이른 아침 부산 공원에서 문호와 헤어진 형규는 곧바로 자갈치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장 입구에는 '해안 정비 지도소'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작은 초소가 있었다.
그 안에서 특별히 업무를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초소 안에는 50쯤 되어 보이는 작업복을 입은 중년 남자 하나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 말씀 좀 묻겠는데요."
"누굴 찾으시죠?"
"아니 그런게 아니구요. 뭣 좀 알아볼게 있어서요.
저 시간 있으시면 제가 커피나 한 잔 살까요?"
형규는 해안 경비 지도소에 있는 다방으로 사람을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다방 안은 스피커를 통해 '돌아와요 부산항에...'하는 유행가가 낮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방이 깨끗하진 않았어도 퍽 관록이 있어 보였다.
"여기가 송원 다방이라고 꽤 역사가 깊은 다방이죠. 아, 나 김창호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거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서울에 있는 Q신문사에서 왔습니다. 뭣 좀 취재할 게 있어서요."
"아 그러셨군요. 첫눈에 깔끔하더라니... 그런데 뭘 알아보시게."
"여기 자갈치 시장에서 아주 오래 일한 사람을 소개받고 싶습니다.
혹 그런 분 아시면... 아주 여기서 잔뼈가 굵은 그런 사람으로 말입니다."
"오래 일한 사람이요? 아 여기야 태반이 오래된 사람이죠. 대대로 해먹는 집안도 있는데요.
허기야 나도 여기서 잔뼈가 굵었으니까요."
나이는 들었어도 뼈마디나 얼굴 근육이 매우 강인해 보였다.
바닷가 사람다운 용모가 역력하게 보였다.
"젊어서는 배도 많이 탔는데 손을 한쪽 다쳐서... 이렇게 의수를 했죠.
그러고는 더 할 일이 없어서 여기에 잡일을 보고 있습니다.
이 동네야 제 손바닥이나 다름없으니까. 뭐 물어보실 게 있으면 물어 보십시오."
형규는 그에게 커피와 담배를 시켜 주고 부드럽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박진식이라면 잘 모르실테죠...
왜 영화 배우도 하고 요샌 가끔 텔레비젼에도 나오는 진남포라고..."
"아, 진남포. 알죠 알다마답니까. 어렸을 때부터 이 골목에서 자란 사람인데요."
"저 혹시 진남포 학교 시절 친구나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해 잘 알만 한 사람 없을까요?"
"에, 또 보자... 그러니까 덕쇠라고 있죠. 네 덕쇠요.
지금 이 자갈치 시장 이층에서 횟집을 경영하고 있는데...
그 참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세월도 많이 흘렀군요. 그게 벌써 20년이 넘었으니."
"그분 만날 수 있을까요?"
둘은 커피를 마시고 다시 자갈치 시장으로 들어섰다. 생선 비린내가 코를 확 찔렀다.
그러나 그 냄새는 역겹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바다내음의 특유한 싱싱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자갈치 시장의 아래층은 각종 어패물이 판매되고 있었다.
어패물 판매소에 있는 층계를 타고 2층으로 오르자 이번에는 찌개, 김치 같은 냄새가
번져나오고 있었다. 큰고 작은 횟집, 식당이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형규가 안내된 곳은 '송도 횟집'이라고 붉은 천에 횐 글씨를 써서 매달아 놓은 식당이었다.
"아줌마, 아저씨 어디 가셨어요?"
"요 아래 물건하러 갔는데 금세 올 거예요. 그런데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허허허, 뭐, 그럴 때도 있죠."
김창호라는 사람은 이곳 주인 여자와 잘 알고 있는 듯 인사를 나누었다.
"저 여기 말이죠. 회 2인분하고 매운탕 백반, 그리고 소주 한 병만 주세요."
형규는 아침 식사를 주문하고 담배를 꺼내 막 불을 붙이려는데 건장한 남자 하나가
양손에 무엇인가를 잔뜩 들고 올라왔다, 김씨가 말하던 진남포의 친구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이구, 김씨 웬일이십니까? 아침부터 해장하십니까?"
"응. 장사 잘 돼?"
"뭐 매일 그렇죠."
"이봐 덕쇠 자네 찾아오신 분이야."
덕쇠라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찾아왔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형규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저 서울 Q신문사 기잡니다."
"아 그러세요. 저 덕쇠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그저 덕쇠라고 통하죠.
이거 장사를 하다 보니 꼴이 말이 아닙니다."
"지금 잠시 시간이 좀 있으신지."
"시간이야 뭐 만들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형규는 식사를 마치고 소줏잔을 권하며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다.
"저 제가 부산에 내려온 것은 다름아니라... 에, 있죠. 진식이라고. 박진식."
"진식이요? 진식이..."
"거 왜 영화 배우하던 진남포말입니다."
"아, 예 진식이 알죠. 국민 학교를 같이 다녔구 중학교 중퇴할 때까지 한집에서 살았죠.
학교 그만두고도 쭉 생활을 같이 했었습니다.
아참 엊그제 신문 보니까 다쳤다고 하는 것 같은데..."
"진식이요? 참 고생 많이 했죠.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를 겁니다."
홀짝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마시고는 부두의 뱃머리 위로 날으는 갈매기를 바라보던 그는
시선을 고정시킨 채 진남포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들려 주었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진식이가 이곳 부산으로 전학 온 것은
국민 학교 3학년 때였다. 6.25직후였으니까 부산도 한참 어수선할 무렵이었다.
피난민들은 서서히 고향을 찾아 흩어지고 일부는 그대로 남아 정착을 모색하고 있을 무렵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장님 여동생과 함께 부산에 내려온 진식이는 부산 영도 국민
학교에 전입하여 덕쇠와 한반에 배치되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덕쇠도 학교에서 힘께나 쓰는 골목대장인 편에 속하게 되었는데 진식이의 출현으로
세력 판도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진식이가 전학 온지 삼일만에 도전장을 보낸 덕쇠가 싸움한번 변변히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3학년짜리 진식이는 4학년 5학년짜리까지 건듯하면 두들겨 팼다.
또한 이런 진식이는 가정 환경은 엉망이었다.
조금은 기형으로 생긴데다 장님이기까지 한 여동생은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나 아버지는 특별한 벌이가 없어 이곳저곳 떠돌며 푼돈을 벌어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얼굴이 좀 기형으로 생긴 것은 진식이도 마찬가지였으나 싸움 잘하고 성격 좋은 진식이는
그래도 주변 꼬마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진식이는 비교적 착한 편이었지만한번 격해지면 또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런 성격이었다.
끼니를 굶어도 티를 안 내고 가까운 친구가 어디서 얻어맞고 오면 끝까지 따라다니며
복수를 해주는 그런 의리파 사내였다.
그러한 진식이에게 결정적 불행이 닥쳐온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기저기 피부병이 돋고 머리털이 빠지며 시름시름 앓던 그의 아버지가
죽어 버린 후였다. 장례고 뭐고 할 것 없이 바닷가에 아버지를 내버리고 돌아온 진식이는
학교를 때려치고 돈벌이에 나섰다.
돈벌이래야 목판에 미제 껌이나 드롭프스, 아까다마, 카멜 같은 양담배를 담아 거리를
돌아다니며 파는 것이었다. 악발이로 통하는 진식이는 그렇게 점점 자랐다.
자라면서 유달리 크고 굳은 뼈대가 익어가기 시작했다.
뼈대가 영글어가면서 그는 남포동과 자갈치 시장에서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어깨들의 졸개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부산역을 중심으로 서면, 해운대 일대를 주름잡는 깡패 클럽 '파도'파와 남포동,
자갈치 시장 그리고 영도 다리 부근을 장악하고 있는 '자갈치'파가 있었는데 두 깡패
클럽은 부산역의 장악을 위해 적지 않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부산역을 장악 한 '자갈치'파는 부산역의 지휘권을 일부를 진남포에게 맡겼다.
진남포는 단신으로 '파도'파의 적진으로
뛰어들어가 우두머리 '쌍칼'을 해치웠던 것이다.
당시 이들은 시장 확보를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대결을 벌여 왔는데
그중 가장 큰 노른자위가 '부산역'이었다. 이 부산역의 탈환을 위해 '자갈치'파에서는
'파도' 파의 본거지인 해운대로 진식이를 밀파했다. 정탐의 임무를 맡고 뛰어든 진식이는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파도'의 두목 쌍칼을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인근에 있는 트럭을 훔쳐 쌍칼을 싣고 개선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진식이는 경찰에 체포돼 6개월을 살고 나왔다.
그러나 남포동과 충무동 자갈치 시장, 부산역 일대에서의 그의 입김은 거의 절대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를 우상처럼 떠받들었다.
6개월을 감방에서 보낸 대가였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해운대 일대에까지 미쳐갔다.
경제적인 여유도 생겼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늘 쫓기듯 했고 불안은 옆에서 떠나 본 일이 없었다.
치안이 회복되고 사회 질서가 잡혀가면서 깡패 조직도 서서히 붕괴되어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런 거친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어머니마저 죽고 부산에서는 장님 동생과 단
둘이만 남게 되었다.
별다른 피붙이가 없는 진식이는 동생 하나만은 목숨처럼 끔찍이도 사랑했다.
얼굴이 기형인데다가 눈까지 멀어 버린 동생을 데리고 시간만 나면 동백섬으로 데리고
나갔다. 바닷바람도 쏘여 주고 예쁜 옷들도 사주었다,
어려서부터 그가 싸움을 잘하는 데는 선천적으로 힘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장님
동생을 놀려 주는 아이들에게 참지 못하고 덤벼들었던 이유도 있었다.
진식이는 노래도 잘했다.
따뜻한 날이면 동생을 데리고 바닷가로 나가 당시 유행했던 '잘있거라 부산항'
'대전발 0시 50분' '목포의 눈물' 등을 불러 주었고 동생은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진식이는 오로지 동생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동생이 왜 장님이 되었는지
왜 얼굴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타고 날 때부터 불행하게 태어난 동생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주먹 세계와 동생만을 위해 살아온 그에게 또
한 번의 커다란 변화가 닥쳐왔다.
변화의 시초는 그에게 커다란 좌절을 주었지만 결과는 인생을 변하게 할 만큼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소위 '부산 남포 시장 대화재' 사건의 주범으로 몰리게 된 것이었다.
남포동 시장의 소위세금 '권리금'이 잘 걷히질 않아 시장 번영회 사람들과 커다란
싸움이 벌어졌는데 하필 그 날 밤 시장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시장 번영회 사람들은 방화 주범이 진식이라고 진정서를 올렸다.
시장 사람들과 싸우고 돌아온 진식이는 마음이 울적해 동생을 데리고 해운대 동백섬에
데려가서 술을 마시고 돌아와 보니 시장에 큰 불이 나 있었고 다음날 새벽 시장
방화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연행된지 사흘 만에 혐의에서 풀려났다. 화재는 어느 가게에서 실화하여 발생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진식이는 자기를 고발한 시장 번영회
사람들과 다시 싸움이 붙었고 이때 액션 배우 물색차 부산에 내려왔던 영화사 사장이며
감독인 최두관 씨에게 발탁되었던 것이다. 부산 건달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던
진식이는 이름의 첫자인 '진'자와 남포동의 두 이름을 따서 '진남포'라는 예명을
만들고 영화계에 투신하였던 것이다.
"영화계에 데뷔해서도 한동안은 날렸죠. 여기도 가끔은 내려왔구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안 보이기 시작하더니 전혀 소식이 없었어요.
그러더니 요즈음 얼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글쎄 다쳤다는 기사가...
참 재미있는 친구였는데... 한때는 나도 같이 어울려 지내기도 했죠. 진식이가 서울로
올라가고 나도 그 동네에서 아주 발 씻고 새생활을 시작했습죠. 장가두 들고... 허허허
이렇게 돈벌이가 되고 생활이 안정되니까 사는 재미가 납니다."
"참 잘하셨어요. 그래 진남포는 요즈음 전혀 부산에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고 또 전에도 부산에 오면 들렀기 때문에 만일 부산에
드나들었다면 한 번도 안 찾아올 리가 없죠. 본 지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무슨 별다른 성격 같은 건 없었습니까?"
"지금 말씀 드린 그대롭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동생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대들고요. 또 한번 흥분하면 이성을 잃는 포악함이 있죠. 그러나 본디 심성은 참 착해요.
또 보기보담 머리가 아주 좋아요. 언제 알았느냐 하면요... 에, 해운대 '파도'파 하고
싸울 때 알았어요. 귀신같이 작전을 짜는데 개들 진식이 작전 때문에 꼼짝 못했어요.
공부는 못해도 머리 하나는 참 비상해요."
소줏잔을 치우고 일어나며 형규는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그들은 진남포가 회복되면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두 사람과 헤어진 형규는 풋풋한 비린내가 나는 자갈치 시장을 뒤로 하고 남포동으로
들어섰다.
옛날에 몇 번인가 와 본 기억은 있지만 그동안 이곳도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옛날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남포동에는 영화관 여섯 개가 집결해 있었고 크고 작은 수퍼마켓과 식당들이 거리를
흥청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형규는 기분이 미묘해졌다.
서울 명동이 감상적인 낭만을 주는 거리라면 부산은 바로 이 남포동이 그런 거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이곳 부산을 추억의 거리라고 생각하고
또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이 거리를 주름잡던 진남포, 그리고 천형의 불구인 여동생 박영숙,
두 남매의 불행한 과거가 깔려 있는 남포동 거리, 그러나 거대한 빌딩과 환락의 거리,
즐겁게 거닐고 있는 사람들은 두 남매가 걸어온 불행한 발자국을 기억도 하지 못하는
듯 행복하게만 보였다.
이리저리 거닐며 생각에 잠겨 있던 형규는 문득 박영숙이 떠오르자그가 시체로 발견되었던
동백섬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자살의 상황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 곳을 취재하자면 먼저 남부 경찰서를 방문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판단이
서자 지체하지 않고 빈 영업용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 아저씨. 남부 경찰서로 갑시다'하고 방향을 정해 주자 택시는 남포동을 빠져
대한 통운 건물과 부산역을 지나 송정동을 향해 달렸다.
군데군데 파헤쳐진 지하철 공사장으로 막히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더니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추어섰다. 새로 지은 듯 깨끗하고 큰 건물이었다. 남부 경찰서의 현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형사과로 찾아갔다.
형사과 사무실에는 네 명의 형사가 앉아 있었고 이들 중 두 명은 젊은 여인과 남자를
취조하고 있었다. 책상 맨 끝에 앉아 있는 사복을 입은 형사에게 다가갔다.
"말씀 좀 여쭤 보려는데요?"
"어디서 오셨죠?"
형규는 아무 말 없이 수첩을 꺼내 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자기의 신분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신분증을 보여 주고 받아 보는데 익숙한 형사과 사람들이
한눈에 척 알아보고 일어났다.
"아, Q신문에서 오셨군요. 요샌 지방 주재 기자들이 없어서.
기자 분들 본 지도 꽤 오래 됐는데요. 자, 앉으시죠. 그런데 무슨 일로..."
형규의 신분을 확인한 형사가 의자를 당겨 주며 앉으라고 권하고 형규는 의자에 앉으며
담배를 꺼내 권했다.
"취재 좀 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혹 기억이 나실는지? 왜 요전 해운대 동백섬에서
발견된 여자 장님 시체 건 말인데요?"
"아, 그건 제가 알고 있습..."
말을 하려다 갑자기 멈춘 형사가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가 약 5, 6분 후에 들어왔다.
"저, 저의 계장님께서 좀 뵙자는데요."
담당 형사는 상대가 기자인 만큼 윗사람에게 보고를 하고 오는 것 같았다.
조금 후 키가 작고 단단하게 보이는 40대 초의 남자가 들어왔다.
"아, 말씀들었습니다. 앉으시죠."
일어서려는 형규에게 의자를 권하고 따라 앉으며 사환 아이에게 커피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Q신문에 계시다고요. 좋은 신문사에서 근무하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런 지방에까지..."
"감사합니다. 사건 취재 좀 할 게 있어서요.
왜 엊그제 탤런트 고강진이 경부선 열차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 사건을 따라다니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에, 다름아니라 어저께 밤에 동백섬에서 발견된 여자 장님 시체 말입니다,
좀 자세히 알아 보려구요."
"아, 그 장님 시체 말이군요. 그 시체는 인근 주민이 발견했습니다.
어제 아침 운동삼아 동백섬에 올라갔던 주민이 시체를 발견하고 해운대 바다 파출소에
신고했죠. 파출소에서는 관할 경찰서인 저희들에게 보고했구요.
보고에 의하면 사망 추정 시간은 새벽 두 시경 같다 하구요. 위액에서 다량의 수면제
성분이 검출됐다고 합니다. 약병이 있으니 자살은 틀림없답니다. 담배 성냥갑,
약간의 돈과 지갑 하나가 소지품의 전부였습니다. 서울 무슨 안마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게 밝혀졌는데 거 누구더라... 무슨 배우 동생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아 시체를 시립 병원에 보관시켜 놓았습니다."
"그 외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뭐,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이 밝혀진 건 없구요... 처음엔 저희들도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 장소가 좀 험했습니다. 바위가 가파르고 거칠어서요.
그래서 타살체가 아닌가 하고 긴장하고 있는데 밤중에 그곳으로 가는 장님 여자를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비치 호텔을 찾아가는 안마사로 알았답니다."
형규도 그의 자살설에는 이의가 없었다. 문제는 그가 타살이냐 자살이냐가 아니고
무슨 이유로 이 험한 바위까지 와서 죽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가 죽은 이유를 알면 진남포가 왜 피습당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고강진과도 무슨 연결이 있을 것만 같았다.
진남포를 독자적으로 취재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진남포에 대한 호기심뿐이었다.
어쨌든 진남포의 여동생 즉 여자 장님 안마사 박영숙의 죽음은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얻을 게 없었다.
핸드백에서 나온 소지품 이외에는 이렇다 한 것이 없으니 경찰측에서도 그저 염세자살
정도로만 처리해 버렸고 그 이상 무엇을 밝혀낼 수도 없었다,
형규는 형사 계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남부 경찰서를 나왔다.
경찰서 앞에는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는 301번 버스가 서있었다.
해운대 해수욕장행 버스였다.
뛰어가서 차를 타자 이내 부르릉하며 떠났다. 차에는 안내양이 없었다.
운전 기사 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데 운전 기사가 자꾸만 돌아보았다.
'왜 이러지'하고 앉아 있는데 드디어 기사가 한마디 던져 왔다.
"손님, 왜 차비 안 내세요?"
"네?"
기사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하며 다시 차를 몰았다.
"차비, 왜 안 내느냐구요?"
"아, 네. 얼마죠?"
"350원입니다."
얼굴이 빨개진 형규가 주머니를 뒤져 지불했다.
'제길 촌놈 만드네' 주위 사람 시선이 뜨겁게 느껴지자 창 밖만 내다보고 앉아 있었다.
눈에 익은 비치 호텔이 보이고 호텔을 지나 두 정거장을 더 달린 후 차는 멈추어섰다.
거리를 빠져나와 해운대 바닷가로 나왔다.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바닷바람이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군데군데 서있는 조망대와 MBC 공개홀 건물들이 쓸쓸하게 서 있었다.
그래도 바닷가에는 신혼인 듯한 젊은 커플들이 겨울 바다를 거닐며 즐기기도 했다.
웬일인지 마음이 아주 평화로웠다. 철썩이는 바닷소리와 끼웃거리는 바다물결
소리까지 마음 가득 채워 주고 있었다.
살고 죽는 문제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순간이나마 겨울
바다와 마주서서 밀려왔다 가는 파도를 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게 했다.
형규는 자기가 좋아하는 J 시인의 '바다'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나의 바다에는
지난 겨울 죽은 갈매기
살아 끼웃거리고
가슴 차 오르는
파도에 어깨 떨며 익사하는
섬 하나 묻혀갑니다.
타오르는 노을 보며
천천히 죽음을 연습하는
나의 바다에는
파도처럼 살고 죽는
의미들로 가슴 충만합니다.
진남포 여동생이 죽은 곳은 비치 호텔과 인접한 동백섬 바위 덩어리가 뒤엉켜 있는
곳이었다. 파도가 간헐적으로 바위를 할퀴고는 물러갔다, 제일 크고 둥글며 사람
두엇이 놀기에 적합한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이 곳이 장님 여인 박영숙이 자살한 곳이었다. 그의 불행한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뒷덜미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얼마나 많은
신혼 부부들이 이 바위에 와서 젊음과 환희를 만끽했을까. 그러나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겨울밤 더듬거리며 이곳까지 찾아와 애절한 생애를 매듭지은 장님 여인,
스스로 불행한 생애와 싸우며 살아오다가 마침내 이 곳에 와서 바위와 함께 마지막
숨을 거두어들인 여인, 누구라도 죽는 것은 슬프다.
나이 서른이 가까워지도록 남자와 몸 한번 섞어 보지도 못하고 거울을 보며 화장
한번 못해 본 이 불행한 여인의 운명에는 형규도 가슴 뭉클한 아픔이 솟아올랐다.
이 여인을 찾게 한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아 이 곳까지 와서 숨을 거두게 했는가...
경찰관과는 별도로 이 사건에 매달린 형규는 어떻든 이번 사건을 심층으로 취재해서
밝혀보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바위숲을 나온 형규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시간은 아직 14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걸렀는데도 시장기는 돌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나와 비치 호텔 커피숍으로 되돌아왔다.
쓸쓸하기는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커피숍 흘에는 외국인 팀 두엇과 그리고
한복으로 정장한 여인과 말쑥한 차림의 젊은이, 한눈에 보아도 신혼 부부인 듯한
커플 몇몇만이 있을 뿐이다.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유리에는 푸른 남해 바다의 절경이 그대로 투사되어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커피가 도착되는 동안 서울 본사로 전화를 걸었다.
"나 민형규요. 사회부 좀 대 주세요."
DDD전화는 막바로 교환을 불러냈고 교환의 목소리는 언제나 다름없이 카랑카랑 울려 왔다.
"예, 사회부입니다."
"아, 나 민 차장이야. 별일 없는가?"
"네, 민 선배님. 고생 많죠... 그런데...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한동안 잠잠하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민 선배님. 아침에 누가 찾아왔었어요. 일찍 왔다갔어요. 열 시쯤..."
"열 시쯤? 누군데."
"신부님이었어요."
"신부님? 아니 문화부로 가실 분이 잘못 찾아온 거 아니야?"
"아닙니다. 민형규 씨 누구냐고 묻던데요. 이번 고강진 사건 때문에 왔다는 거예요."
"고강진? 신부가?... 아, 한 분께서 범인을 목격했다던 그 사람. 그런데 그분이 왜 날 찾지?"
"그래서 제가 여쭤 봤어요. 지금 민형규 씨는 부산 출장이라고요.
하실 말씀 있으면 제게 하라고요. 그랬더니 신문 기사를 읽고 찾아왔다는 거예요.
신문 기사와는 맞지 않는 게 있다구요."
"뭔데? 뭐가 안 맞는다는 거지?"
"내용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겠는데 왜 거 화장실 사건 있죠."
"응, 화장실에 범인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던 거."
"예, 바로 그 문제랍니다. 마침 사건 현장에 자기가 있었고 또 목격자로 진술까지 했다던데요."
"맞아, 그 사람 그런데 뭐라고 하던가? 아, 잠깐 메모 좀 하고."
형규는 어깨를 움츠려 턱과 어깨 사이에 수화기를 꽂고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그래서, 말해."
"서울 오시면 자세히 말씀 드리겠지만 수사하느라고 법석을 떨때 이 신부님이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전 도착하기 직전에는 화장실에 아무도 없었다는 거죠.
신부님이 연락처까지 적어놓고 가셨어요."
"뭐야, 어쨌다고?..."
"..."
통화는 간단히 끝났다.
그러나 사정은 통화처럼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연 사흘 동안 마지막 기대를 걸고 뛰어온 목표물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신부가 자기발로 말하고 갈 때는 그 나름대로 생각도 많이 했을 것이다.
경찰이나 신문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고강진 피살체가 열차에서 발견된 후 오늘이 삼 일째, 모든 희망은 성기준이
공범이며 그가 진범을 화장실에 은닉시켜 준 것으로 사건을 좁혀왔고 또 성기준은
김만호와 밀착되어 그의 사주를 받고 저지른 사건으로 보고 이곳 부산까지 내려오지
않았는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올 때 일부러 침대차를 이용하여 조사해 보았지만 범죄
수사의 일인자인 문호나 형규 자신도 화장실 도피 방법 외에는 범인이 증발할 가능성을
전혀 발견해 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정말 마술사란 말인가.
연기와 함께 사라진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테이블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커피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커피를 마실 생각도, 일어나서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도 무엇하나
머리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혼돈이 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어디까지 어떻게 무엇을...
어지럽게 머리 속을 헤매이는 의문들이 머리를 확확 조이며 올 뿐이었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던 형규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써늘한 초겨울 바람이 여전히 맵게 불어 대고 있었다.
해운대 해수욕장 망루가 있는 활 모양의 긴 방파제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약 10분을 걷자 마음이 약간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계를 들어다 보았다. 세 시 삼십 분이었다.
-- 자, 형규 힘내라고 힘을 좀더 침착하게 여유를 가지고 말야.
지금 넌 무엇인가에 속고 있어. 차분히 그리고 신중하게 대처해 알았지 --
독백처럼 자신을 타이르며 발길을 해운대 시가지로 옮겼다. 비로소 시장기가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운대 갈비집,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신발을 벗던 형규가 깜짝 놀랐다.
낯익은 구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이 구두 주인 어느 방에 있지?"
"네, 별실에 계시는데요."
"나, 그리로 좀 안내해."
종업원의 뒤를 따르며 이 시간에 문호가 왜 여기에 와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형규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힘없이 앉아 있던 문호가 벌떡 일어나 반겨 주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부산 바닥에 점심 식사할 데라곤 여기밖에 없는 모양이지...
자, 잘 왔어. 앉아!"
"이봐, 자넨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그리고 이분은?"
"아, 인사하시죠. 좀전에 말씀드렸던 Q신문 민형규 씨입니다.
이쪽은 부산 시경 곽영근 형사 과장님이시고..."
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합석했다. 식탁이 치워지고 새로 상을 보았다.
형규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사건의 새로운 전개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둘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서로 자기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식사가 끝난 뒤에 서서히 마음을 정리하며 꺼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형규가 식사를 하는 동안 문호는 소파에 앉아 서울과의 전화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형규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일어섰다.
"자, 어디가서 커피나 한 잔 할까?" 형규가 구두끈을 조이며 말했다.
"그래? 난 지금 바로 서울에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나도 서울가는 게 급해질 일이 생겼어, 그렇지만 꼭 생각해야 할 일이 있어."
"좋아, 그럼 나가자구."
곽 과장이 세 명의 식대를 지불하고 두 사람을 극동 호텔 커피숍으로 안내했다.
극동 호텔 커피숍은 호텔의 좌측 끝 해변과 마주한 위치에 있어 시원한 바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었다.
홀 중앙에 자리잡은 세 사람은 웨이터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형규가 담배를 꺼내며
천천히 말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문호, 아주 중요한 소식이 들어왔는데 절대 놀라지마. 아직 완벽한 정보라고 장담은
못하니까 말야."
"정보? 새로운? 부산에서 취재한 거야?"
"아냐, 부산엔 아무것도 없었어. 우리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성기준 공범 혐의가 깨질 것 같아."
형규가 말의 서두를 꺼내며 문호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나 전혀 동요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형규측에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오늘 김만호 씨 집에 간다고 했었지. 그래 성기준 씨도 만났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던 문호가 형규를 바라본다.
"성긴준 씨는 김만호 씨 댁에 없었어. 나도 성기준 씨에게는 끝까지 희망을 걸었었지.
그런데 자네가 한 말은 뭐야. 성기준 씨한테 공범 혐의가 없다는데..."
"사건 현장에 있던 신부가 신문사에 왔다갔다는 거야. 내 기사를읽고..."
"야, 알겠어, 그 신부님은 내 사무실에도 왔다갔어...
그럼 뭐 다 알고 있는 얘기구만.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문호가 수첩을 꺼내 여기저기 훑어보고 있었다.
"성기준 수배는 계속하라고 지시했어. 아직 포기할 수는 없어.
신부라고 해서 수사권 밖으로 세워놓을 수는 없단 말야.
내가 왜 그 말을 하느냐 하면 말야... 에...
아까 문득 생각이 났는데 그 신부말야 내가 처음 목격자 진술을 받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범인이 짐을 끌고 열차에 올라온 후 짐을 침대에 밀어 넣고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애꾸는 아닌 것 같았다'는 거야.
그러더니 나중에는 '글쎄 자기가 잘못 보았는지도 모르죠' 하고 얼버무려 버렸다구.
분명한 태도가 아니었어. 올라가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이 신부도 그냥 넘어갈 순 없어."
"그럴까?"
형규는 이 사실을 처음 알았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은 없었다.
"이걸 한 번 생각해 봐."
문호는 조금 전 형규가 식사하는 동안 곰곰이 생각했던 가정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문호는 일단 신부도 공범의 일원이라는 가정 상황을 설정했다.
그의 논리는 아주 적절해서 곽 과장이나 형규도 그저 고개나 끄덕이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최초, 범인은 성냥이나 라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 작은 단서라도 남기는 게 불리하고 주머니에 무엇을 넣는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기준과 무엇을 의논하기 위해서는 구실을 만들어 그의 침대로
들어가야 했다. 그 구실을 담뱃불 빌리는 것으로 만들었다.
둘은 담뱃불을 나누며 무엇인가 정보를 교환했을 것이다,
여기서 제 2의 공범자 신부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는 열차가 천안을 출발하기 전에 범인에게 불붙은 담배를 넘겨주었다.
목사나 승려와는 달리 신부는 술, 담배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설혹 누군가의
눈에 뜨이더라도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범인은 천안에서 한 대의 담배를
더 피울 기회가 생겼다.
술은 마실 수 없으니 담배라도 피워서 마음이 진정하길 바랬을 것이다.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시체를 끌고 가는데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열차는 순조롭게 대전에 도착했다.
범인이 제일 먼저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 다음 성기준이 화장실로 들어가 시간을 지체하다가 승무원이 표를 나눠주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시간을 맞추어 복도로 나왔다.
시체가 발견되고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서 이번엔 신부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만일 누군가 화장실을 조사하려고 하면 자기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어 일을 간단히
끝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범인을 숨기기 위해 이중 트릭을 쓴 셈이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경찰에서 범인이 숨어 화장실에 있을 가능성을 추리해서 성기준이
궁지에 몰리게 되면 제 3자인 자기가 나타나서 '내가 그 후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진술을
하면 성기준은 궁지에서 빠져나오고 사건은 영원히 미궁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범인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완전 범죄'를 가능케 했다,
범인이 탈출한 시기와 방법은 이렇게 추리된다. 즉 대전에 도착하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시체는 발견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시체에 정신이 없을 동안 신부의 엄호를 받으며 살그머니
화장실을 빠져나와 출입 승강구로 갔다.
열차 내에서는 소동이 일어나고열차는 역에 도착하기 위해 서행을 했다.
이때 문을 열고 뛰어내리면 모든 일은 순조롭게 끝난 셈이 된다. 대전에 열차가 정차했을 때는
이미 범인은 대전역에서 멀리 사라진 후가 될것이다.
"애꾸를 애꾸가 아니라고 증언한 사람은 성기준과 신부였거든.
그리고 신부는 담배를 피워도 어색하지 않고..., 결국 범인을 은닉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벽을 쌓아놓는 거야. 공범을 한 열차에 두 사람이나 태웠다면 이건 틀림없이 배후가 있어
큰 배후가... 무엇보다 빨리 신부를 알아봐야 돼. 형규, 어떻게 생각해?"
"글쎄, 자네의 논리에 빈틈은 없어 신부의 신원이 애매하거나 공범 가능성의 소지가 있다면
그 논리는 틀림없겠지."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날, 그러니까 11윌 30일 신부는 대구에 간다고 했거든.
그의 주민등록증상 본적은 대구직할시였어.
주소도 대구로 되어 있고 그런 사람이 다시 서울에 올라와 신문사로, 경찰서로 쫓아다니며
범인 은닉의 가능성을 깨뜨리는 논리를 알려 주며 다니는 게 어색하지 않아?
나도 경찰 밥을 먹고 있지만 경찰서나 신문사에 찾아다닌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더구나 이런 살인 사건으로 말야."
"..."
"..."
형규와 곽 과장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신부와 성기준이 공범이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완강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그의 조직적이고
빈틈 없는 논리에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또 범인이 사라진 미스터리를 성립시키자면 이 두 겹의 트릭과 배후 인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호가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전화 두어 군데 걸고 오겠습니다."
하고는 뚜벅뚜벅 걸어 전화기 앞으로 갔다.
"아, 나 박문호야. 최찬일 좀 바꿔."
"네, 접니다. 부산 사정은 좀 어떻습니까? 잘 되어 가는지요."
"음, 여긴 잘 풀려가고 있어. 그것보다 우선 급한 지시할 테니까 차질 없도록 하라구.
첫째 성기준을 어떤 방법으로든 연행해 오고, 또 신부 말야 낮에 왔다갔다고 하던...
응, 그 신부 신원 파악 빨리 하고 소재를 알아 놔. 확실하게 알았지.
그리고 나 오늘밤이라도 올라갈 거야. 사정이 달라졌어, 그럼 내일 만나자고."
문호는 수화기를 놓고 또 어딘가 전화를 걸어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번째 전화가 끝나자 형규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내고
또 전화를 걸고는 돌아왔다.
"일단 성기준을 연행하라고 했어. 그리고 신부 신원 확인을 하라고 했고,
그 다음 김 회장 집에 전화 걸었지. 김 회장은 종교가 없는데 부인이 천주교 신자야.
또 애들은 절에 다니고... 여하튼 종교 하나는 엉망이더군...
마지막으로 대전 경찰서에도 걸었어. 만일 범인이 대전에 도착하기 전에 뛰어내렸다면
반드시 어깨나 팔 한 쪽쯤은 부러졌을 거야. 인근 병원이나 접골원을 샅샅이 뒤지라고 했어.
꼭 나타날 거야."
문호의 말을 듣고 있던 형규는 수첩을 꺼내 지금까지 취한 그의 조치를 일일이 노트에
기록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 때문에 적어놓은 분량은 다른 어느 사건보다도 많았다.
그러나 노트 어디를 뒤져 봐도 범인의 근거나 사건 해결 방법은 눈에 띄질 않았다.
“곽 과장님, 서울행 열차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서울 가는 거야 십 분마다 한 대씩 있죠. 지금이 네 시 사십 분."
"자, 그럼 일어납시다. 서울 올라가면서 좀더 생각이나 해보게."
문호가 일어서며 곽 과장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원 별말씀을 제 차로 부산역까지 모셔다 드리죠. 큰 힘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
하여 일행을 차에 태웠다.
세 명은 극동 호텔을 나와 다시 부산역으로 돌아왔다. 열차는 10분마다 연이어 있었으나
특급 열차는 20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곽 과장은 돌아가고 두 사람은 2층 그릴로 올라갔다.
"도대체 어떻게 돼 돌아가는 거야?"
형규가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어떤 놈이든 잡혀만 봐라. 이번엔 곱게 안 보낼 테니.
에이, 이거야 원 이렇게 일이 꼬여서야... 그래, 오늘 뭐 좋은 거 취재 좀 했어?"
"응, 진남포 어릴 때 생활을 알아봤지. 그 친구도 참 어지간히 불행한 친구더군."
"불행? 어떻게?"
"부모가 다 이상한 병으로 죽었어. 어려서 말야. 동생 하나 있는 건 그나마 장님에다
기형아이고. 왜 진남포도 약간 기형아잖아. 그런데 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니 거지처럼
살아온 거지, 다행히 진남포가 주먹이 세고 담력이 강해서 뒷골목 생활을 시작했고
그래서 생활에는 좀 여유가 생겼지, 영화계에 데뷔해서도 젊은 시절은 좀 괜찮았나 봐,
액션 배우로. 그런데 지금은 단역이나 맡아하고 동생은 안마사로 생계를 꾸려가는데
이번 사고가 터진 거야. 겨우 자리 잡으려는 판국에 말야... 불행이 꽁무니에서 안 떨어지나 봐."
"형규 어떻게 생각해?"
"뭘?"
"고강진 사건과 진남포 사건, 아무래도 별개 사건이 아닐까?"
"..."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건은 우연의 일치 같애. 고강진 사건에는 김만호, 성기준 그리고
가짜인지도 모를 신부 이렇게 셋이 얽혀 있는 게 분명해. 그런데 이 틈에 진남포가 끼어들
자리가 없단 말야. 내가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긴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진남포
고향과 김만호가 한 고향이라는 것, 그리고 성기준이 부산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
진남포 동생이 부산에까지 내려와서 자살한 점... 이게 묘하단 말야."
"아, 문호 내가 말해 준다는 게 그만 깜박했는페 진남포 동생 말야. 불행했던 어린 시절
오빠인 진남포가 늘 동백섬에 데리고 와서 놀았나봐, 오빠 생각을 하며 자살한 게 틀림없어.
문제는 왜 죽었느냐 하는 거지. 이번 진남포 사건은 본인들만 알고 있는 거 같애.
피습 당한 이유나 상황도 진남포는 전혀 입을 열지 않고 있잖아.
거기다가 또 얼마나 동생 걱정을 하고 있어?
이건 말할 수 없는 깊은 사연이 숨어 있다는 뜻이야."
갑자기 그럴 안이 썰렁해지는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열차 시간이 다 되었는지 여기저기서
일어서며 그릴을 빠져나갔다.
둘도 일어나서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청년 하나가 다가와 그들의 길을 막고 있었다.
문호와 형규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청년을바라보았다.
한편 문호와 곽 과장이 한바탕 설치고 돌아간 김 회장 집은 갑자기 미묘한 분위기에
횝싸이게 되었다. 세 사람이 응접실에서 이야기하는 동안 가족들은 다른 방으로 쫓겨가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지만 탤런트 고강진이 김만호의 아들이니 그가 피살당한 것이
성기준과 김만호의 조종이라느니 하는 말들을 얼핏얼핏 들었고,
참다 못한 큰아들이 방문을 박차고 나가 항의까지 했지만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의 제지로 이나마 항의도 좌절됐고 가족들의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측이 밝힌 아버지의 추문에 대한 분노와 고강진이 과연 자기들의 동생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잠시 집안이 시끄러워진 것이다. 김 회장은 아예 소파에 몸을 파묻고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어머니는 안방에 누워 버렸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항의를 하고 덤벼든 것이 막내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재산에만 욕심을 내는 형들과는 달리 사교 모임이나 취미 생활을 더 존중히 해서
귀공자로 널리 알려진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 어떻게 된 건지 분명히 말씀해 주셔야죠.
저희들 보고 그저 앉아서 구경만 하라시는 겁니까?"
"뭘, 자꾸 말하라는 거야. 뭘..."
짜증 섞인 목소리로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아버지 뒤에서 그는 집요하게 대들었다.
"이건 우리 가문에 대한 문젭니다. 전 잘 모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처신해 오셨는지
또 어떤 사고 방식으로 살아오셨는지.
그러나 지금까지 저는 아버지를 존경해 왔고 우리 집안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전 지금 다녀간 사람들과 아버지의 말씀을 다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도 이젠 모든 것을 충분히 알아들을 나이는 되었습니다. 이번 일은 절대 그냥
묵과하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저도 가족의 일원입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고강진이 아버지의 아들이 맞습니까? 또 그가 죽은 게 아버지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까?"
"..."
김 회장은 무어라 할말이 없었다. 한 생애를 통해서 커다란 실수는 누구에게나 한두번쯤
있게 마련이다. 그 실수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갈라지기도 한다.
김만호 자신은 지금까지의 사회생활에서 비교적 실수 없이 잘 처리해 왔으며 작은
실수라도 두 번 다시 거듭되는 일이 없었다.
사업도 교묘한 수단을 부리거나 타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착취해서 성장시키는 비굴한
방법은 쓰지 않았다.
성실하고 끈질기게 버티어 몇 번인가의 위기에서 빠져나와 오늘의 대기업을 성장시켜
놓은 것이다, 굳이 실수가 있었다면 뒤늦게 한 여인을 사랑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은 또 그만큼 가치가 있었다.
그는 김 회장에게서 아무런 요구도 없었다.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떠나간 그런 사람이었다.
가족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생활 기반이 잡히고 수입은 많고 어쩐지 인생이 자꾸만
초조해지는 그런 40대 후반, 지금 시대 같으면 한참 정력적으로 일할 그런 나이라고도
생각되어지겠지만 그 시절은 그렇지가 못했다.
여인이 말없이 떠나가고 난 후 한동안은 찾아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럭저럭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불쑥 사진 한 장 들고 찾아온게 바로
고강진이었다.
처음 그가 찾아왔을 때는 '신인 영화 배우가 왜 날 찾지' 하는 의아심으로 맞아 들였는데
그가 꺼내놓은 사진을 보고 그만 심장이 멎는 충격을 받은것이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그가 바로 말없이 떠난 옛날의 그 여인이었던 것이다. 여인의 팔에 안겨 고추를 드러내놓고
방긋이 웃는 아이가 장본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건달의 그렇고 그런 소행으로 오해도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며 차차 의심을
풀었던 것이다. 그 후로 두어 번 더 찾아왔고 편지도 보내왔다. 어머니의 소재를 물어도
말도 없었다. 무조건 호적에 입적시켜 달라는 고집뿐이었다.
김 회장은 때아닌 사태에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이번엔 그 아들이라는 고강진이 피살당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 일이 없었는데 급기야 경찰이 개입되고 그의 피살 혐의가 본인에게로
접근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에게는 이렇다저렇다 할 말이 없어진 그는 속으로만 고민하고
있었다.
"얘 진구야, 죽은 고강진 사건은 나와는 아무 관계 없어. 그러니 애비를 믿고 물러가 있어.
내가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래."
"아버지, 확실하죠. 확실하다고 말씀해 주시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공연히 오해받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뭐라구? 네가 뭘 어쩌겠다는 거야.
오해는 그 사람들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풀어지게 마련이야. 그러면 다 끝나는 거지.
지금 네가 나서서 뭘 어쩔 거야."
"아버지, 이건 집안과 회사의 명예에 관한 문젭니다."
김 회장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후다닥 뛰어나갔다.
마당에 서있는 승용차의 시동 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고 잠시 후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는지 이내 잠잠해졌다.
집을 뛰쳐나온 진구는 시경 곽영근 과장 사무실로 찾아갔으나 좀체로 돌아오질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그가 시경을 나와 부산 중심가의 코스모스 호텔 바아를 찾아갔다.
바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진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모두 벌떡 일어났다.
김진구, 그가 부산의 대재벌 김만호의 아들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구가 구석에 앉아 술을 주문했고 엉거주춤 서있던 몇 사람이 그 주변으로 몰려 왔다.
"아이구, 공자님께서 무슨 일로 대낮에 여기까지... 무슨 일이 있으세요? 안색이..."
"아, 괜찮아, 자 다들 앉지. 오늘은 내가 한 잔 살게."
"아이구, 그럼... 이게..."
그들은 진구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어이, 여기 위스키 로얄 두 병 하고 안주 좀 가져오라구...
어때 요즈음 나이트 클럽 신장 준비는?"
그중 가장 뚱뚱해 보이는 사람이 이 곳 나이트 클럽 지배인이었다.
이 나이트 클럽은 금년 크리스마스 때 신장 개업을 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라운지를
재보수하고 대대적인 선전을 하며 개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말도 맙쇼, 일자는 얼마 안 남았는데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엉망진창? 왜..."
"아 ! 이 부산 바닥에 우리만큼 시선을 해놓은 데가 또 있나요. 일본 관광객 유치하려구.
국제 규모의 시설을 설치해 놓고 적어도 개업식만은 멋지게 한 판 벌일 계획이었는데..."
이때 웨이터가 양주와 안주를 들고 왔다.
진구는 서슴없이 따라마시고는 일일이 한 잔씩 권했다, 모두들 황송한 듯 두 손으로 받아 마셨다.
"그런데?"
"아, 그런데 쇼 스케줄이 펑크가 났지 뭡니까?"
"스케줄에 펑크가 나?"
"네, 뭐냐 하면요. 이번 개업 기념 공연을 하기 위해 두 사람의 스타를 교섭했거든요.
서울에서 뛰면 더 많은 개런티를 받을수 있을텐데 왜 부산에까지 내려가느냐고 완강히
거절하는 걸 서울보다 더 좋은 조건이다.
지방 예술도 도와 달라 하는 고집으로 겨우겨우 교섭을 끝냈죠.
아 그런데 이게 그만 뒈져 버렸잖아요."
"뒈져? 누군데... 혹시?"
"아, 거 왜 있잖아요. 고강진이라는 탤런트 말입니다,
요즈음 한창 인기 끌고 있는... 계약금을 4백만 원이나 주고 예약을 해왔는데 글쎄. 이거 참..."
"고강진? 그 사람을 불렀다고?"
"네, 하필이면 그 자식을 불러가지고...
아 거기다가 이번 개업쇼에 고강진을 무대에 올린다는 소문이 나니까 왜 태종대 입구에
새로 지은 호텔 있잖아요. 스타(Star)호텔이라구요, 이번엔 거기서 또 손을 댄 거예요.
우리가 주기로 한 개런티의 곱을 주겠다고요.
그 호텔은 이번 크리스마스 때 개관식을 겸해서 나이트 클럽도 개업하겠다는 거였죠.
그 나이트 클럽은 호텔에서 직영하기 때문에 거액을 투자한 거예요.
'부르버드' 나이트 클럽. 뭐 시설은 우리보다 나을게 없지만 워낙 물량 지원이 대단해서
경쟁이 붙은 거예요. 우리두 외형이야 호텔 직영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거든요.
우리 사장님이 뒤로 권리금을 내고 따로 경영하고 있거든요.
교통부에선 호텔 부대 시설 중 특히 나이트 클럽은 호텔에서 직영해야 된다는 걸 법적으로
명시해 놓았지만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됩니까?
그러니 재정적 뒷받침이 스타 호텔을 못 따라 가는 거죠.
사장님이 서울에 열 번도 더 올라갔습니다, 다른데서 아무리 뭐라고 해도 우리하고 계약한
거니까 다른 데는 출연하지 말라고요.
스타에서는 또 거기대로 '모든 책임을 자기들이 다 질테니 걱정말고 계약하자,
계약금 위자료를 다 물어 주겠다. 그러니 부르버드 무대에만 서 달라'고 했죠. 조건도
크리스마스와 송년 이틀만 서 주면 우리의 세 곱을 주겠다고... 어휴 말도 마세요.
사장님 입이 다 부르트고 우리도 서울에서 아주 진을 치고 며칠씩 보냈죠.
개똥 참외도 먼저 맡은 게 임자라고 겨우 겨우 결정해서 포스터까지 붙여놓고 서울
일간지에다 광고를 때렸는데 이번엔 스타에서 아우성이었죠.
'어디 이번 개업쇼 곱게 치루나 보자' 하고 벼르더라구요. 그러면 뭐 합니까?
부르버드나 우리나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으니 말입니다...
개새끼들 스타 호텔 놈들 지랄을 해댔으니 재수 옴붙었지 뭡니까...
그 새끼들 심지어는 협박까지 해왔어요. '어디 무대 곱게 올리나 보자' 하구요."
이 말을 듣던 진구가 말도 끝나기 전에 벌떡 일어났다.
"뭐? 부르버드에서?"
"네, 아이 그런데 왜?"
"여기 술값 내 앞으로 올려 놔."
어리둥절하는 주위 사람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갔다.
코스모스 호텔을 뛰쳐나간 진구는 스타 호텔에 들러 총지배인을 만나보고 다시 경찰서에 들렀다.
비로소 돌아온 곽 과장을 만났다.
그러나 고강진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서 내려온 형사는 서울로올라가기 위해
부산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그릴까지 찾아 온 것이었다.
"저, 박 형사님 얘기 좀 합시다."
"자, 우선 앉으시죠... 무슨 일로."
"무슨 일이건 뭐건 당신들 그럴 수 있소? 해도 너무하지 않소."
"무슨...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자 흥분하지 마시고 차근차근."
"흥분? 내가 흥분하지 않게 됐습니까? 나 원 세상에 아니 천하에 김만호를 뭘로 보고 이러십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굽니까?"
진구는 문호와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비로소 형규가 있음을 의식했는지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분요? 괜찮습니다. 서울 Q신문에서 오신 기자입니다."
"기자? 나 박 형사님과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 좀 피해 주시겠습니까?"
형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차 출발 시간은 이제 불과 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형규가 시계를 보며 문호에게 눈짓을 하자 그는 귓속말로 형규에게 무엇인가 말해 주었다.
열차표는 얼마든지 환불 받을 수 있고 또 고속버스 편도 시간은 충분하니 서두르지
말자는 의견이었다. 문호는 진구의 말이 무엇인가 궁금하여 형규를 기다리게 하고 다시
진구와 마주 앉았다.
"박 형사님, 당신이 돌아간 뒤에 제가 아버님께 정식으로 여쭤 보았습니다.
과연 고강진이 아버지의 사생아냐, 또 고강진 피살 사건에 아버지가 관여되어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물론 아버지도 고강진과의 혈연 관계는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적어도 피살 사건과는 절대 관계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짜 혐의 받을
놈들은 빠지고 말입니다."
"진짜 혐의?"
"네, 진짜 말입니다."
"진짜 혐의가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까? 누굴 모함하거나 쓸데없이 곤경에
빠지게 만들면 곤란합니다."
"좋소, 그 보담도 아버지 건에 관해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네들이 왜 아버지를 뒤쫓고 있는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말씀 드리죠. 첫째 이유는 고강진의 진짜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 즉 김만호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점이구요. 둘째, 고강진이 자기의 아버지 즉
김만호 씨에게 자기 호적을 입적시켜 달라는 편지를 여러번 보냈고 또 협박까지
한 사실이 밝혀졌구요. 다음 가장 강력한 공범자로 몰리고 있는 성기준 씨가 김만호
씨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맺어져 있다는 사실, 이 때문에 저희들이 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고강진과 아버지는 진짜..."
"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선 고강진이 보낸 각종 편지를 소각하려다 실패한
사실이 있구요. 또 고강진, 그의 어머니, 김만호 씨의 혈액형을 조사한 결과 틀림없는
아버지로 판명되었구요. 마지막으로 더 큰 이유는 김만호 씨가 이 사실들을 인정하고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
"자, 그럼 말씀하시죠.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뭡니까?"
"아무튼 너무 흥분해서 미안합니다."
진구는 담배를 한 대 피워물며 코스모스 호텔과 스타 호텔의 부르버드 나이트 클럽
관계와 그 알력을 말하며 고강진 피살 사건은 스타 호텔측의 장난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비약해서 생각할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소홀히
넘기지는 않겠습니다. 이번 두 호텔 사건은 곽영근 과장에게 의뢰하겠습니다."
김만호의 인격이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서 쫓아온 김진구의 당연한 정보 제공이었다,
또 그것은 그럴 듯한 발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타 호텔이 아무리 개관 기념식이 중하고 또 배우 하나를 놓쳤다고 해서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만일 피해를 입히겠다면 고강진측보다는 코스모스 호텔에 상처를 입히는 게 상식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정말 소홀히 넘어 갈 문제도 아니었다.
김진구, 김만호의 가장 똑똑한 막내아들 그를 설득시켜 마음을 진정시킨 문호는 진구의
권유대로 그의 차를 이용해서 고속 터미널로 방향을 돌렸다.
옛날에는 시민 회관 근처에 있던 것이 서면 끝으로 장소를 옮겨 무척 오랜 시간을 달린
후에야 도착되었다.
"박 형사님, 아버님에게 잘못이 있다면 당연히 조사를 받아야죠.
그러나 좀더 신중히 다뤄 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문호와 형규는 진구의 말에 적극 호응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헤어졌다.
어린 나이에 무척 당돌하고 또 생각이 깊은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문호는 곽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두 호텔 간의 알력을 자세히 파악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훈훈한 스팀이 차내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차가 터미널을 출발하면서 둘은 깊은 잠에 빠졌다.
이때가 18시 정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