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 / 홍해리
단단한 어둠이 밤을 내리 찍고 있다 허공에 걸려있는 칠흑의 도끼 밤은 비명을 치며 깨어지고 빛나는 적막이 눈을 말똥처럼 뜨고 있다
동백꽃 속에는 적막이 산다 / 홍해리
뚝!
비 그친 오후 / 홍해리
- 선연가嬋娟歌
조용하던 매화나무
눈물 젖은 손수건을 말리며
세상 모르고
어디선가
둥근잎나팔꽃 / 홍해리
아침에 피는 꽃은 누가 보고 싶어 피는가 홍자색 꽃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고 가는 허리에 매달려 한나절을 기어오르다 어슴새벽부터 푸른 심장 뛰는 소리---, 헐떡이며 몇 백리를 가면 너의 첫 입술에 온몸이 녹을 듯, 허나, 하릴없다 하릴없다 유성으로 지는 꽃잎들 그림자만 밟아도 슬픔으로 무너질까 다가가기도 마음 겨워 눈물이 나서 너에게 가는 영혼마저 지워 버리노라면 억장 무너지는 일 어디 하나 둘이랴만 꽃 속 천리 해는 지고 타는 들길을 홀로 가는 사내 천년의 고독을 안고, 어둠 속으로 뒷모습이 언뜻 하얗게 지워지고 있다
난타 / 홍해리
물방울 악단을 데리고 오셨다 난타 공연이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빗방울은 온몸으로 두드리는 하늘의 악기 관람하는 나무들의 박수소리가 파랗다 새들은 시끄럽다고 슬그머니 사라지고 물방울만 신이 나서 온몸으로 울었다 천둥과 번개의 추임새가 부서진 물방울로 귀명창 되라 귀와 눈을 씻어주자 소리의 절벽들이 귀가 틔여서 잠은 물 건너가고 밤은 호수처럼 깊다 날이 새면 저놈들은 산허리를 감고 세상은 속절없는 꿈에서 깨어나리라 깨어지면서 소리를 이룬 물방울들이 다시 모여 물의 집에 고기를 기르려니,
방송에선 어디엔가 물난리가 났다고 긴급 속보를 전하고 있다 약수若水가 수마水鹿가 되기도 하는 생의 변두리 나는 지금 비를 맞고 있는 양철북이다.
소금쟁이 / 홍해리
처서 지나면 / 홍해리
매화나무 책 베고 눕다 / 홍해리
겨우내 성찰한 걸 수화로 던지던 성자 매화나무 초록의 새장이 되어 온몸을 내어 주었다 새벽 참새 떼가 재재거리며 수다를 떨다 가고 아침 까치 몇 마리 방문해 구화가 요란하더니 나무속에 몸을 감춘 새 한 마리 끼역끼역, 찌익찌익, 찌릭찌릭! 신호를 보낸다 ‘다 소용없다, 하릴없다!’ 는 뜻인가 내 귀는 오독으로 멀리 트여 황홀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데 고요의 바다를 항해하는 한 잎의 배 죄 되지 않을까 문득 하늘을 본다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입술들, 혓바닥들 천의 방언으로 천지가 팽팽하다, 푸르다 나무의 심장은 은백색 영혼의 날개를 달아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언어의 자궁인 푸른 잎들 땡볕이 좋다고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파다하니 뱉는 언어가 금방 고갈되었는지 적막이 낭자하게 나무를 감싸안는다 아직까지 매달려 있는 탱탱한 열매 몇 알 적멸로 씻은 말 몇 마디 풀어내려는지 푸른 혓바닥을 열심히 날름대고 있다 바람의 말, 비의 말, 빛의 말들 호리고 감치는 품이 말끔하다 했는데 눈물에 젖었다 말랐는지 제법 가락이 붙었다 그때, 바로 뒷산에서 휘파람새가 화려하게 울고 우체부 아저씨가 다녀가셨다 전신마취를 한 듯한, 적요로운, 오후 3시.
죽죽竹竹 / 홍해리
이쁜 눈썹 푸르게 반짝이거라 눈짓으로나 또는 몸짓으로나 여긴 달 뜬 세상 꿈속이어서 귀에 가득 반짝이는 저 이쁜 것들이 한도 끝도 없이 일으키는 파돗소리 길 다 지우고 산도 모두 허물어 버려 허허벌판 만리 허공 비우고 있구나 네 몸의 그늘과 살의 그림자까지도 대명천지 아니라도 일색이어서 푸른 그리움은 해마다 되살아오고 진달래 붉은 산천 꽃이 피어나 갈 곳 없는 풍찬노숙 나의 가슴을 봄바람소리 흔들어 잠 깨우는구나.
무화과無花果 / 홍해리
그녀는 왜 꼭꼭 숨기고 있는지 대체 누가 그녀를 범했을까 애비도 모르는 저 이쁜 것들, 주렁주렁 스스로 익어 벙글어지다니 은밀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오늘밤 슬그머니 문지방 넘어가 보면 어둠이 어둡지 않고 빛나고 있을까 벙어리처녀 애 뱄다고 애 먹이지 말고 울지 않는 새 울리려고 안달 마라 숨어서 하는 짓거리 더욱 달콤하다고 열매 속에선 꽃들이 난리가 아니다 질펀한 소리 고래고래 질러대며 무진무진 애쓰는 혼 뜬 사내 하나 있다.
황홀한 봄날 / 홍해리
조팝나무꽃 / 홍해리
숱한 자식들 다 큰 자식들 산비둘기 먼 산에서 운다
산벚나무 꽃잎 다 날리고 / 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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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방석 앞
그녀가 보고 싶다 / 홍해리
크고 동그란 쌍거풀의 눈 살짝 가선이 지는 눈가 초롱초롱 빛나는 까만 눈빛 반듯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 도톰하니 붉은 입술과 잘 익은 볼 단단하고 새하얀 치아 칠흑의 긴 머릿결과 두 귀 작은 턱과 가는 허리 탄력 있는 원추형 유방 연한 적색의 유두 긴 목선과 날씬한 다리 언뜻 드러나는 이쁜 배꼽 밝은 빛 감도는 튼실한 엉덩이 주렁주렁 보석 장신구 없으면 어때, 홍분 백분 바르지 않은 민낯으로 나풀나풀 가벼운 걸음거리 깊은 속내 보이지 않는 또깡또깡 단단한 뼈대 건강한 오장육부와 맑은 피부 한번 보면 또 한 번 보고 싶은 하박하박하든 차란차란하든 포옥 안기는 한 편의 시 詩.
창밖, 소리 없이 눈 쌓일 때
풍란 風蘭 / 홍해리
처녀치마 / 홍해리
좌로부터 홍해리, 임 보, 채희문, 박흥순, 이인평 시인
인연 / 홍해리
해질 녘 속리산으로 가는
사치시(奢侈詩) / 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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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洪海里) 시인 1942년 충북 청원 출생 현재 <우이시> 주간 사단법인 우리시진흥회 이사장 블로그/ http://blog.daum.net/hong1852 카페 / http:// cafe.daum.net/urisi
시집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홍해리 시선』 『대추꽃 초록빛』『청별』『은자의 북』『난초밭 일궈 놓고』 『투명한 슬픔』『애란』『봄, 벼락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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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헌 詩壽軒 / 임보
시수헌은 서울 북한산 골짝 우이동(牛耳洞)에 자리한 한 건물의 다락방 이름이다. 5층 옥탑에 버려둔 두어 평 남짓한 공간을 '우이동시인들'이 얻어 사랑방으로 쓰고 있다. 우이동 시인들이란 고불(古佛) 이생진 (李生珍), 포우(抱牛) 채희문,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이다. 우리들은 20여 년이 넘게들 우이동 골짝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온 숙맥 들로서 이심전심 서로 마음들이 통했던지 87년부터 年 2회씩 <우이동 시인들>이란 사화집을 묶어내고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일러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틀이 멀다하고 서로를 불러 시주(詩酒)를 즐기다 보니 사랑방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던 차에 이 건물 의 주인 沈여사가 우리의 뜻을 알아 선뜻 내어준 방이다. 여럿이 지내기는 좀 협소하고 천장이 낮아 군색하기는 하지만 창을 열면 백운(白雲), 인수(仁壽), 만경(萬景)의 삼각산(三角山)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니 가히 명당이라 이를 만하다. 애초의 생각으로는 전화기 하나만 놓고 차나 마시며 단조롭게 지내려 했던 것인데 사랑방 소문이 밖으로 새나가 뜻대로 되질 않았다. 구경삼아 찾아온 이웃들이 우리들의 꼴을 보고 민망했든지 살림살이 들을 한두 가지씩 갖다 놓았다. 어떤 분은 그의 고운 손때가 뭍은 정겨운 책상을, 어떤 분은 자신의 집에서 아껴 쓰던 냉장고를, 또 어떤 분은 아름다운 칠기상을, 혹은 차와 다기(茶器)를, 혹은 주과 (酒果)를 이고 지고들 와서 부려놓고 가는 바람에 좁은 방이 더 비좁아졌다. 벽에는 박흥순(朴興淳) 화백이 우리들 네 사람을 기리며 그린 「우이문우도(牛耳文友圖)」와 이무원(李茂原) 사백이 우리를 노래한 족자가 결려 있다. 게다가 북이며 징 꽹과리 등 사물(四物) 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분에 넘치는 복된 방인가. 차를 마시며 산을 보다가 무료하면 술을 한 잔 하고, 술을 하다 흥이 오르면 북을 잡는다.
詩茶酒鼓 *佛牛蘭華 不聽騷音 不問世情 牛耳好日 勝於仙境
(시에, 차에, 술에, 북에/ 시수헌의 네 사람/ 세상 소리에 귀 담고/ 세상 물정에 입 다문/ 소귀골의 좋은 하루/ 신선 세상 뺨칠레라!)
부지런히 살아가는 세상 분네들이 우리 사는 꼴을 보면 필시 빈정 댈 것이 뻔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 뛰고 뛰어도 부족하거늘 이 무슨 세상 물정 모르는 한량패 놀음이냐고 말이다. 하기는 그렇다.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은 세상에 이름을 얻어 응분의 대접을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남의 눈에 띄게 사는 것을 오히려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축들도 있다. 그들은 느긋한 게으름을 피우며 남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바보스럽게 조용히 살아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긴다. 이 양자의 생활 태도를 놓고 어느 쪽이 더 복된 삶의 방식 인가를 객관적으로 판가름하기란 쉽지 않다. 허기사 우리도 술만 마시고 빈둥대며 허송세월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인지에 실을 연 40여 편씩의 작품들을 열심히 만들어 내고 있고, 매월 마지막 토요일엔 도봉도서관 강당에서 국악과 더불어 시낭송을 벌인 것이 우금 84회에 이르렀다. 또한 봄에는 시화제(詩花祭)를 가을에는 단풍시제(丹楓詩祭)를 북한산록에서 펼치면서 시와 자연 사랑의 마음을 일깨우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들 하는 일도 제법 없는 바는 아닌 셈이다. 언젠가는 시수헌의 방을 좀 늘리고도 싶다. 그래서 세상의 외로운 시인들이 자주 들러 쉬어 갈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내어 놓았으면 한다. 시수헌의 다락에서 건너다 본 북한산의 신록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뻐꾹새 소리도 은은히 골짝을 울리며 들려온다. 이 삭막한 서울에서 그래도 이러한 자연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용의 머리처럼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구쳐 오른 거대한 바위덩이 인수봉(仁壽峯)을 바라다보면서 그처럼 웅장하고 오래 남을 시들의 산실(産室)을 꿈꾸어 본다. 그래서 이 방의 이름을 감히 시수헌(詩壽軒)이라 명명한 것이다.
* 佛牛蘭華 : 古佛, 泡牛, 蘭丁 그리고 필자의 아호인 華山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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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의 향기 / 무명시인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
첫댓글 주옥같은 ... 잘 읽고 갑니다~ 천천히 조금씩 두고두고 음미하겠습니다. 감사요 ^^
반갑습니다, 김은주 님! 서두르지 마십시오. 시란 평생을 해야 할 일이니까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직은 보고 읽고 조금씩 쓰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답니다 *^^*
시를 껴안고 살면서 가끔씩 느끼는 감정이, 저뿐이 아니고 회장님도 그러셨네요...영혼의 허기만 더해가고 돈이 생기나, 배가 부르나 뭐 할라꼬 고뇌의 짐보따리 싸들고 절절매는지 모르겠어요. 그림으로 나마 회장님을 뵈오니 너무 반갑고 감사함이 솟구치네요. 한 편의 詩가 이렇게 정갈하고 맛갈스러운 고품격을 지니다니, 정말 감동이예요. 건안하시어요 회장님,
긴 내용을 다 보시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요? '사치시'는 아주 오래 전의 글입니다. '인연'은 1969년에 낸 시집에 실린 것인데 용케 여기까지 등장을 했군요.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한 편이라도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 살다 가야지요. 감사합니다, 꿈초롱 님!
많은 주옥같은 시가 빛을 발하는데 그 중 '연가'와 '그녀가 보고싶다'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내뿜고 의미가 깊습니다.시수헌은 한가로움이 보이고요.회장님 감사합니다.그리고 잘 계시지요?
잘 놀고 있습니다. 시수헌은 한가해야 시수헌답습니다. 고맙습니다, 죽림 님!
시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 오늘은 물러갑니다. 더 와서 음미하면서 찬찬히 즐기고 배우겠습니다. 저의 부족했던 견문이 번쩍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백꽃을 보고는 처음에 '뭐지? 더 없나?'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공감요~~ ?? 뒤엔 !!
놀라셨다니, 미안합니다. 시 공부야 평생하는 것이니 서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시 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