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관대에는 공민왕릉의 시신이 남아 있었다고 하며.
놀랍게도 머리카락이 썩지 않은 채 발견이 되었고
그 머리카락에 머리 장식품인 동곳도 달린 채 였다고 한다
고려사에 기록된 원나라 공주 출신 왕비는 모두 여섯명, 노국공주 이전의 원나라 공주들은
친정 원나라를 등에 업고 권력을 남용했다.
충렬왕과 결혼한 제국대장공주는 사찰의 탑을 털어 사치를 부렸지만 왕은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어찌하지 못했고
충혜왕비인 덕녕공주는 충혜왕이 사망하고 충정왕이 즉위한 후에도 정사에 관여했지만 왕이 이를 막지 못했다고 한다.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명교체라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는 많은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1365년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정사를 소홀히 했다.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며,
글씨에도 능했는데 특히 큰 글자에 뛰어났다.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명덕태후이다.
12세가 되던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1351년 충정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즉위 후 몽고식의 변발과
호복을 폐지하여 고려의 자주적 전통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정치의 방향을 암시했다.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 의도는 권문세족의 반발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처음 이름은 기(祺)이고, 뒤에 전(顓)으로 고쳤다.
몽고명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이고, 아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이다.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왕비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12세가 되던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1351년 충정왕(忠定王)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