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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사파 대부들(4)-신영복
“제가 사상적으로 존경하는 신영복 선생은. . . .”
많은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선서한 대통령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8년2월9일 북한의 김영남이 참석했던 '올림픽 개회식 사전 리셉션 환영사'에서 자신은 신영복 교수를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라 언급하며 신영복의 글을 인용해 연설했다.
또한 문 전 대통령은 다음날 북한의 김영남과 김여정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고(故) 신영복의 서화 '통(通)'자와 이철수 화가의 판화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문 전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선거 슬로건으로 사용한 '사람이 먼저다'의 서화는 신영복의 작품이다.
더불어민주당의 당명이 신영복의 글 '더불어 숲'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간첩 잡는 국정원의 원훈(院訓)에 간첩 혐의로 복역한 신영복체를 쓰기도 했다.
이렇듯 문 전 대통령이 존경을 표하며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것으로 보이는 신영복은 어떤 인물인가?
신영복(1941~2016)은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1968년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통혁당은 북한 노동당의 지령과 자금을 받아 움직였던 반체제 지하조직이다. 그런 신영복을 한국의 현직 대통령이 사상적으로 가장 존경한다면 그런 문 전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불러도 마땅치 않을까?
신영복은 1941년 경남 의령에서 출생하여 1959년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상고 출신(1966년)이다.
1959년에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학사와 석사를 하고 졸업한 후, 육사 교관 시절인 1968년(당시 27세) 북한 노동당 앞잡이인 통일혁명단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주모자인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신영복이 대학에 들어간 지 1년 만인 1960년에 4·19가 일어났다. 그것은 엄청난 감동이자 충격이었다.
4·19에서 5·16까지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푸른 하늘을 직접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은 지금까지 신영복을 지탱시켜준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4·19는 그야말로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이었다. 이후 비록 독일어 원어를 교재로 썼지만 『자본론』 강독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했고, 학생들은 『공산당 선언』 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지식 사회에 공산주의 새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대학 3학년 때에 5·16혁명이 일어났다. 신영복에게, 5·16이 무너뜨린 것은 무능한 장면 정권만이 아니었다.
5·16이 진정 짓밟은 것은 4·19 이후 돋아나기 시작한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의 새싹이었다.
해방정국에서 변혁적 운동의 복원이라는 의미의 4·19가 군부세력에 의해 짓밟힌 것이 5·16이었던 것이다.
그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서울상대에 본격적인 독서 동아리를 만든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같은 논문도 번역해서 대학노트에 베껴 적어 (복사기와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 돌려 읽고,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도 영문판을 구해 대학노트 4권에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 읽곤 했는데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모두 중앙정보부에 압수됐다.
신영복은 3학년 이후, 거의 매일같이 세미나의 연속이었다.
서울 상대 학생들로 조직된 경우회, CCC(대학생선교회)란 종교단체 산하의 경제복지회, 정읍 출신들이 모인 동학연구회 등 나중에 통혁당 사건 때 연루된 동아리들 외에도, 고려대·연세대의 학생 동아리 세미나에도 자주 가서 지도했는데, 이런 모임이 6~7개가 되다 보니, 각각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있어도 매일 불려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동아리 지도에 주력했다.
경제학과 대학원의 한 해 위에는 안병직과 사회학과를 졸업한 신용하가 있어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 뉴라이트의 깃발을 내세운 안병직은 그때는 아주 좌파적인 입장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숙명여대에 강사로 나가던 시절, 아마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에『청맥』이라는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들을 따라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김질락은 신영복의 선배였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인데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당시 신영복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강사였다. 새문화연구회에서는 막내인지라 적극적인 역할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김질락과 그의 후배 이진영 등은 신영복이 학생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접근했고, 어느 날 김질락이 정색하고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물어왔고, 신영복이 '그렇다'고 하자 그날부터 김질락, 이진영과는 따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이 사형됐으니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살아있는 사건 관련자 중에서 가장 핵심 인물이 된다.
통일혁명당은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노동계급의 전위당임을 자처했다.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최고의 목적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 두고 있다.
당강령은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로 규정하였다.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는 김종태가 전후 4차례에 걸쳐 북한의 김일성과 면담하고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여 혁신정당으로 위장한 뒤 합법화하여 반정부 및 반미데모를 전개하는 등 대정부공격과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고 발표했다.
통혁당 사건으로 북한에 가서 로동당에 입당한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을 당했다.
신영복, 이재학, 오병철, 신광현, 정종소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박성준(전 한명숙 총리 남편)은 15년형, 김종태의 아내 임영숙은 1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기타 인물들은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신영복은 20년을 복역한 후 가짜 전향서를 제출하여 1988년 8∙15 특사로 출옥, 1998년 사면 복권을 받았다.
이후 성공회 대학교 등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2010년 사망했다.
신영복은 감옥에서 고전과 서예를 배웠고, 수감 중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이 「평화신문」에 연재되었고, 출소 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출간했다.
한학자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선생과 같은 방에서 지내며 동양고전을 익혔고, 서예가를 통해 민중의 정서를 담은 글씨체를 모색하던 중 어머님의 모필에서 영향을 받아 연대체, 민체, 어깨동무체라고 불리는 신영복체가 탄생했다. 이 글씨체는 소주인 ‘처음처럼’에 사용되기도 했다.
신영복은 오랜 수감 생활 동안 주고받은 편지와 글 등 230여편을 담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1998년 출간했다.
그 밖에도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1·2』, 『강의-나의 동양 고전 독법』, 『처음처럼』, 『변방을 찾아서』 등 6권의 책을 남겼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정치경제학, 사회과학입문, 중국고전강독 등의 강의를 해 온 신영복은 2006년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석좌교수로 강의를 계속해 왔으나 암 진단을 받은 뒤 그해 겨울 학기를 끝으로 강단에서 내려왔다.
신영복의 독자들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한 좌파 노회찬 전 국회의원은 ‘신영복 선생과 함께 걷는다는 것,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 같은 곳을 디디고 서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축복이고 기쁨이다’고 말했다.
신영복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시 꿈을 꾼다. 대학서열과 학력차별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나라. . . .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나라. . . . 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
토마스 모어는 고작 하루 노동시간을 여섯 시간으로 줄여놓고 그 섬을 존재하지 않는 섬, 유토피아라 불렀지만 나는 그보다 더 거창한 꿈을 꾸지만 단지 꿈이라 여기지 않고 있다. . . .
신영복이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니다.
‘그 꿈 이외에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신영복은 진보진영의 지식인으로 오래 활동하여 정치인들과도 꽤 인연이 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전 대통령, 안희정을 비롯해 정청래, 심상정, 노회찬이나 기타 진보진영 인사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다.
취임 초기와 말년 두 번 청와대를 찾아 각각 '춘풍추상(남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라), '우공이산'(오랜 시간이 걸려도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면 결국에 뜻을 이룰 수 있다) 등의 글씨를 선물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공이산’이라는 글씨를 좋아해 퇴임 후 자신의 웹사이트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자신의 아이디를 여기서 따온 '노공이산'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묘역에 새겨져있는 어록도 신영복이 직접 썼으며 서거 2년 후인 2011년 12월 봉하마을을 찾아 문재인 당시 이사장을 만나고 권양숙 여사도 만났다. 생전 마지막 방문이었다.
진보진영 정치인들은 신영복을 존경하는 지식인으로 뽑고 있어, 생전 진보진영 정치인들이 선거에 나갈 때 신영복에게 조언을 구하러 자주 방문하였다.
반면 보수 쪽에서는 과거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간첩이나 빨갱이, 종북주의자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당시 자유한국당 김문수 서울시장 후보가 2018년 5월3일 ‘문재인 대통령은 김일성 사상을 굉장히 존경하는 분’, 출마선언에서도 ‘신영복의 사상은 간첩 사상이고 김일성주의’라고 주장한 바 있다.
2006년 8월, 신영복의 정년 퇴임식에는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이학수 삼성전략실 부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이현재 호암재단 이사장, 소설가 조정래, 유홍준 문화재청장, 이소선 전태일 어머니 등 정재계 사회각계 인사가 참석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통혁당 사형수 김질락이 본 신영복 신영복이 죽자 그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언론보도들은 그에 대한 칭찬 일색이다.
그가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고, 죽을 때까지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았던 막시스트(Marxist)라는 사실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고 있다.
『어느 지식인의 죽음』(원제; 주암산)이라는 책이 있다. 통혁당 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김질락이 처형되기 전에 남긴 옥중수기다.
여기에는 신영복을 어떻게 포섭했고, 신영복이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가 잘 나와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김 : 미스터 신은 머리 좋을 뿐만 아니라 글도 잘 쓰신다던데….
신 : 뭐 잘 쓰는 것도 없습니다. 그저 4∙19때 상과대학에서 선언문을 쓴 일이 있고, 대학신문에 익명으로 수필 같은 것 쓴 일이 좀 있지요. 글을 함부로 쓸 수야 없지 않습니까?
김 : 아니 선언문 같은 것 쓰고도 아무 일 없었소?
신 : 그래서 무척 조심했습니다. 다 걸리지 않게 쓰는 방법이 있지요.
외견상으로 볼 때 누가 봐도 저는 순수한 자유주의자죠.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쉽고 재미나는 말로 계급의식을 주입시키지요.
예컨대 원시사회에는 인간이 뛰어다니며 자연을 착취하며 살았고, 좀 더 편하게 살자니 농사를 지었다.
농사 짓는 것보다는 남이 지어 놓은 농사나 재물을 빼앗는 게 훨씬 수월했기 때문에 부족 간에 싸움이 생기고, 이긴 자는 지배자가 되고 진 자는 노예가 되었다.
그리스 문화만 하더라도 노예의 희생 위에 성립된 것이었다. 그러니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는 데서 인간을 착취하는 방향으로 지능이 발달했다.
이런 식으로 인류역사가 계급투쟁사임을 인식시키는 거죠.
이런 방법이 훨씬 안전하고 사회주의를 모르는 친구들에게는 잘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김 : 미스터 신은 경제학을 전공하니까 저보다는 더 잘 아실 거라고 믿는데, 우리나라의 경제전망은 어떻습니까?
신 : 한국경제는 한 마디로 엉망입니다. 지난 번 로스토 교수가 왔을 때 제가 사회를 맡아보았습니다만, 한국경제는 로스토 교수의 말과는 달리 외국자본에 이중적으로 예속되어 있습니다. 외국자본과 국내 매판자본의 시장독점현상이 날로 노골화해 가고 있습니다.
김 : 미스터 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의 한국경제는 미국의 신식민주의 정책에 의해 완전히 미국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레닌의 말과 같이 금융적으로 완전히 예속된 나라는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독립성을 상실한 식민지나 다름없습니다. . . .
신영복은 김질락을 만나기 전부터 기독교 학생단체인 CCC내에 경제복지회와 서울상대 내의 경우회에 관련하고 있었고, 구성원의 대개가 이화여대 학생으로 이루어진 여학생 서클을 하나 지도하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기존 서클에 당원을 침투시킨다는 지하당 조직방법은 신영복에게 있어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거나 다름없었다.
사회 종교단체로는 CCC(기독교대학생선교회), 불교청년회, 경우회, 동학연구회, 새문화연구회, 60년대 학사회, 청맥회 등에 조직구성원들이 투하되고 있었다.
-신영복에 대한 평가
『우익은 죽었는가』, 『대한민국 건국 전후사 바로알기』의 저자인 양동안은 신영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론매체들은 신영복의 가르침을 그가 자주 말한 ‘인간이 희망이다’라는 애매모호한 캐치프레이즈와 그의 부드러운 미소와 감성적인 글 등을 위주로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름다운 포장에 불과하다. 그러한 포장지로 감싸진 신 교수의 가르침은 포장지와는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신영복이 전향서를 썼지만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통혁당’에 가담한 것은 양심의 명령 때문이었고 향후로도 양심에 따라 ‘통혁당’ 가담 때와 비슷한 생각으로 활동하겠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은 대담하게도 신영복의 본질을 ‘붉은 경제학자’라고 규정했다.
주역의 山地剝(산지박) 괘에 대한 신영복의 설명은 바로 그가 왜 감옥에서 전향서를 쓰고서도 전향하지 않았는지, 혁명을 같이 시도하다가 여러 동지들이 사형을 당했으나 자신에게 맡겨진 혁명과업의 완수를 위해 자신이 취해온 행동들, 즉 전향서를 쓰고서 감형받고 살아남은 이유와 경위, 그 정당성을 변명하는 것이다.
-신영복의 북한 옹호와 대한민국 비난
신영복은 이렇게 말했다.
한민족의 세계와의 관계방식에 있어서의 2개의 축이 있다. 그 하나는 주체이다.
민족의 내부결속과 단결을 통하여 주체성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고 보여진다.
북한의 경우에는 주체성을 강화했다. 다른 또 하나의 축은 개방성이다. 남한의 경우는 개방을 통해서 문화적, 물질적으로 성장한 반면에 민족의 주체성을 잃고 종속화 되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황해문화』 2003년 가을호 인터뷰).
북한 체제에 대해 살펴보면 자본주의 제국의 적대와 봉쇄, 그리고 중국·소련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민족자주, 자력갱생의 기초 위에서 사회정치적인 안정과 전후의 경제적 회생을 이룩한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통일, 그 바램에서 현실로’, 1995년 경실련 총서 5)에 게재된 신영복의 글).
신영복은 ‘인간이 희망’이라면서도 단 한줄기 희망도 없는 북한 주민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서는 ‘처음처럼’ 내내 단 한마디 하지 않고 죽었다.
‘인간이 희망’과 ‘사람이 먼저’에서 북한주민은 ‘인간과 사람’이 아니었다. 「한겨레」가 규정한대로 그는 ‘본디 붉은 경제학자’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 자본주의 비판, 사회주의 옹호
자본주의가 인간의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극단적인 주장이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빈곤, 질병, 무지, 환경오염, 나태 등 이른바 빅5로 불리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제기다’(「월간 말」, 1996년 8월호 인터뷰).
자본주의 체제, 종속적 자본주의, 천민적 자본주의가 우리나라에 언제까지 갈 것인가?
비인간적인 근본적 모순구조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억압적 구조에서 취약 역량을 가지고 희망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힘들어도 샛길은 없다. 사회를 바꾸어 내자(2002년 1월 연세대에서 민노당 당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하다 특별 가석방된 뒤 신영복은 성공회대에 둥지를 틀었다.
성공회대는 막시즘으로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을 집대성 포장한 것으로 유명한 조희연(현 서울시교육감)을 비롯해 김일성을 ‘민족불세출의 혁명가’로 찬양하는 한홍구 등이 포진해있는 ‘좌파∙전체주의 추종 변혁이론의 총본산’ 같은 곳이다.
DJ정권에서 통일부장관을 지내기도 한 이재정(전 경기도교육감)이 총장 시절 신영복을 영입했다.
신영복은 이곳에서 이들의 좌장노릇을 하면서 김제동 같은 연예인도 제자로 끌어들였다.
성공회대학은 대한민국 최대의 ‘반자본주의 아지트’가 되었다. 성공회대학에는 통혁당의 일원으로 신영복이 지도했던 박성준(한명숙 전 국무총리 남편)도 교수로 재직했다.
뇌물수수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 만장일치로 유죄 선고받고 복역한 한명숙 전 총리를 문재인 전 대통령이 끝까지 보호하는 배경에는 이런 그들만의 끈끈한 네트웍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