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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서 시를 읽다(25)
-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김철교(시인, 배재대 명예 교수)
2015년 7월 3일 (금) 에르미타주 미술관
모스크바 국립대학과 한국문예창작학회가 공동 주관하는 학회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열렸다. 6월 29일 하루 종일 진지한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발표하는 러시아 박사들의 한국어 실력과 한국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미나가 끝나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야간열차를 타고 오가며 톨스토이와 푸시킨의 삶의 궤적들을 더듬어 보았다. 또한 7월3일에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7월 5일에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을 관람하였다. 특히,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을 안내하는 모스크바 대학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과 활달함을 보고, 내가 봉직하던 배재대학교 경영학과 대학원에 10여년전 러시아 학생들이 유학을 와서 함께 지낸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때 학생들은 활달하게 춤도 잘 추었고 공부도 제법 열심히 했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이주헌이 쓴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을 탐독한 것이 러시아 미술에 대해 넓은 시야를 갖게 해 주었다.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곳이 트레티야코프 미술관(모스크바), 유럽을 중심으로 한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곳은 에르미타주 미술관(상트페테르부르크)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1852년 제국박물관으로 문을 열었고, 1917년 국립박물관으로 바뀌어 국유화된 전국의 개인 컬렉션이 에르미타주로 집중될 수 있어서 오늘날 거대한 소장품을 갖게 되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전시된 이탈리아 회화 중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리타 마돈나>와 <꽃을 든 마돈나>; 조르조네 <유디트>; 카라바조 <류트 연주자>;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명화로는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아브라함의 희생>,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다나에>, <플로라>; 루벤스 <시몬과 페로>가 우리에게 익숙하다. 프랑스 회화 컬렉션에는 푸생 <비너스와 판, 푸티>; 제롬 <노예 매매>; 르페브르 <동굴의 막달라 마리아>; 드가 <머리 빗는 여인>; 마티스 <춤>과 <음악>; 르누아르 <여배우 잔 사마리>; 반 고흐 <아를의 여인들>; 고갱의 <타이티의 전원시>; 다비드 <사포와 파온> 등이 유명하다.
1.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1669, 캔버스에 유채, 262 × 205cm, 에르미타주 미술관>
네덜란드의 17세기는 황금시대(The Golden Age)로,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해 절정기에 있었다. 또한 ‘렘브란트의 세기(Le Siecle de Rembrandt)’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렘브란트는 널리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의 렘브란트는 창작의 재능 외에 모든 현세의 영화를 상실한 고독한 상태에 있었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온 탕자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미타주에는 20여점의 렘브란트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데, 초기에서 말기에 이르는 그림들을 통해 렘브란트의 예술가로서의 일생을 가늠할 수 있다. <플로라, 1634>는 렘브란트의 아내인 사스키아를 모델로 그린 것으로, 젊은 아내에게 화려한 의상과 화환을 얹어 행복했던 시절을 담고 있다. 그러나 사스키아는 곧 죽고 그의 부와 명성도 사라져 갔다. 아내 사후 완성된 <다나에, 1636>와 말년에 그린 <돌아온 탕자>를 통해 당시의 렘브란트의 심적 상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보기 위해 찾아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 우리가 방문한 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이 그림 앞에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아버님의 사랑 앞에서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는가.
<돌아온 탕자>는 신약성서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렘브란트가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이 있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요구했고, 유산을 챙긴 작은 아들은 고향을 떠났다. 객지에서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여 먹을 것조차 궁했기 때문에 남의 돼지를 치게 되었다. 돼지들이 먹는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 멀리서 아들을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더 이상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환영 잔치를 벌였다. 들에 나가있던 큰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한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 군요” 라며 화를 낸다.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적지 않은 화가들이 이 내용을 그림으로 그렸다. 렘브란트는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그를 맞아주는 아버지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생의 마지막 해에 이 그림을 그렸다. 강력한 명암대비보다는 부드러운 빛을 사용하였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헤진 신발은 한 쪽은 벗겨 진채이며, 머리는 마치 죄수처럼 밀어버린 거칠고 비루한 모습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무릎을 꿇은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을 눈이 빠지게 기다려, 혹은 노안으로 시력을 잃은 것처럼 표현되었다. 아들의 어깨에 놓인 아버지의 커다란 손은 왼손과 오른손에 차이가 있다. “부드럽게 묘사된 아버지의 오른손은 모성을, 그리고 굵고 투박하게 묘사된 왼손은 부성을 상징한다.” 하느님을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을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오른 쪽에 빛을 받고 서 있는 큰 아들은, 방탕한 아들에게 이런 환대를 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멀리 떨어져 있다. 포옹하는 두 부자와의 거리를 통해, 큰 아들의 심리적 거리를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아들의 모든 허물을
토닥토닥 다독이며 덮고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은
환한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있다
죄를 죄로 단죄했더라면
이 세상에 인간은 씨도 말라 버렸으리
어둠을
빛으로 그려 내는 붓질이 있어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
사랑의 빛이 검은색으로 칠해지는
그날이 오면
이 세상은 문을 닫고
새로운 캔버스에
하나님은 에덴을 다시 그리시겠지만
패악의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여의도 서쪽 거대한 무덤 속을 들여다보면
또다시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야 하지만
끝까지 참으실 것이다
이 세상에 무지개를 주신 것을
기억하시는 한
- 졸시, (신의 인내 –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2. 렘브란트 <다나에>
<렘브란트, 다나에, 1636, 캔버스에 유채, 203 x 185 cm, 에르미타주 미술관>
렘브란트 <다나에>는 1985년 6월 15일 에르미타주에서 한 미치광이가 그림에 황산 농축액을 뿌리고 칼로 두 번이나 긁어서 크게 훼손당했는데, 12년간의 신중한 복원작업을 통해 1997년에 다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 그림은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들인 다나에는 신비의 체현인 듯 황금빛으로 빛난다. 주위의 가구와 장식품들 또한 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황금빛으로 그려진 큐피드는 사슬에 묶이고 울부짖는 모습으로 다나에의 어쩔 수 없는 처지에 탄식하는 모습이다. 다른 화가들이 그린 다나에는 에로티시즘에 초점이 맞추어져 그려졌지만, 렘브란트의 다나에는 운명(신탁)에 순종하는 부인 혹은 어머니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신화에서 제우스를 받아들이는 내용을 표현한 도상적 관례대로 다리를 벌리고 있지도 않다. 다나에의 몸을 에워싼 금빛은 주위의 비치는 금빛과는 다른, 어쩌면 다나에의 내부에서 배어나오는 그런 종류의 금빛이다. 그러나 두려움을 조금은 머금고 있는......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다나에는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우스와 에우리디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페르세우스의 어머니가 된다. 공주는 있으나 왕자가 없어 걱정을 하던 아크리시우스는 예언자를 찾아 신탁을 구했다. 자신의 외손자에게 살해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겁이 난 아크리시우스는 아직 처녀인 딸이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청동 탑에 가두었다. 그러나 제우스는 금빛 비로 모습을 바꾸어 방으로 스며든 뒤 다나에를 임신시켰다. 다나에가 페르세우스를 낳자, 제우스의 분노를 두려워한 아크리시우스는 딸 다나에와 외손자 페르세우스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상자에 넣어 바다로 던져 버린다. 제우스의 부탁을 받은 포세이돈은 상자가 바다에 가라앉거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했다. 상자는 세리포스의 바닷가에 닿았고, 어부가 상자를 발견했다. 어부 딕티스는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를 극진히 대접했고, 페르세우스를 자기 아들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딕티스의 형인 폴리덱터스 왕은 아름다운 다나에와 결혼하기 위해 페르세우스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는 위험한 임무를 주어 떠나보낸 뒤 죽이려했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헤르메스신과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아 메두사를 죽인다. 신탁을 들은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로 가는 대신 라리사로 향했다. 그 곳에서 열리는 창던지기 대회에 참가한 페르세우스가 던진 창은 우연히 그 자리에 와 있던 외할아버지 아크리시우스를 향했다. 이렇게 하여 예언자의 신탁은 실현되었다. 세리포스로 돌아온 페르세우스는 억지로 다나에와 결혼하려는 폴리덱터스를 죽이고 인정 많은 양부 딕티스를 왕위에 올렸다.
<티치아노,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 1553-54, 캔버스에 유채, 128 X 178cm, 프라도 미술관>
렘브란트보다 80여년전에 티치아노가 그린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이보다 먼저 코레지오(Le Corrège, 1489-1534)가 그린 <다나에, 1531, 캔버스에 유채, 193 x 161 cm>는 로마에 있는 보르게세 미술관(Galleria Borghese)에 걸려 있다.
다나에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에로틱한 주제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운명의 힘 혹은 황금의 힘으로 굳게 닫혀있는 여인의 마음을 여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마다 그 해석을 달리하며 그리고 있다. 똑같은 신화를 화가의 독특한 정서로 가공되어 관람객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림마저도 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시각과 정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예술의 묘미라 할 것이다.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는 유럽 궁정에서 유행한 귀족적이고 선정적인 작품을 그렸다. 당시 '다나에'라는 신화의 주제는 많은 의뢰자들에게 아름답고 감성적인 이미지로 인기가 있었다. 특히 르네상스 때 다나에라는 주제는 고전적 도상의 틀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창의적인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주제였다.
티치아노가 그린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에서 늙은 유모는 황금비에 놀라서 앞치마로 이를 모으고 있지만 다나에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다. 황금비는 늙은 여인에게는 탐욕을 불러일으키지만 다나에의 경우, 신탁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여인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황금에 시선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니다. 왼쪽 아래에 포근히 자리하고 있는 개는 바로 다나에의 마음속에 자리한 이러한 분위기를 확증시켜 주고 있다. 다나에는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행복한 모습이다.
<클림트, 다나에, 1907-08, 캔버스에 유채, 77 x 83cm, 개인소장>
한편,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다나에의 신화를 관능적인 시각, 나르시즘적 시각에서 해석했다. 제우스와 다나에의 쾌락적 합일과 열락을 관능적으로 포착했다. 지금 다나에는 제우스와의 관계를 가지는 순간일 것이다. 터질 듯 풍만한 허벅지와 쾌락으로 지그시 감은 눈과 무엇인가를 감아 쥔 오른 손이 환상적 색채와 함께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클림트는 제우스가 황금비가 되어 다나에가 있는 탑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금화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그 금화를 마치 원했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다나에의 몸짓과 표정으로, 몸을 파는 창녀로 해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성적인 이미지와 황금에 대한 열망은 인간 탐욕을 나타내기에는 적합한 소재였던 것이 아닐까.
2015년 7월 5일 (일)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트레티야코프 형제가 소장하던 러시아 회화 1,287점과 드로잉 518점, 유럽회화 75점과 드로잉 8점 등을 모스크바 시 당국에 기증함으로써 1892년에 공식 개관했다. 트레티야코프는 모스크바의 상인으로 러시야 미술품 애호가였으며, 사망하던 해까지 종신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시의회에서 할당받은 예산은 물론 사재를 지속적으로 투입하여 수집품을 늘려갔다. 러시아 혁명 후 1918년 국립미술관으로 승격되어, 국유화된 개인 수집품들을 흡수하여 규모가 방대해지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러시아 미술품은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 러시아 미술관’에 집대성되어 있다. 소비에트 시절 강력한 국가주도의 재편 작업으로 이 두 미술관만 방문해도 러시아 미술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는 비잔틴 미술에 뿌리를 둔 이콘(종교 도상을 담은 그림)은 물론, 인자(人子)로서의 예수를 그린 그림들이 관심을 끌고 있다. 러시아 혁명 전후로 민중들의 아픔과 염원을 담아낸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 니콜라이 게의 <무엇이 진리인가?> 등이 그것이다.
또한 러시아 역사를 다룬 레핀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과 <쿠르스크 지방의 종교 행렬>도 유명하다. 우리 풍속화와 유사한 서양미술의 장르화로는 바실리 후키레프 <어울리지 않는 혼인>, 바실리 페로프 <트로이카> 등이 있으며, 브루벨 <앉아 있는 악마>와 <백조 공주>도 러시아 미술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1. 이바노프 (Aleksandr Andreevich Ivanov, 1806-58):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알렉산드르 이바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아카데미 화가이며 교수인 아버지 안드레이 이바노프(Andrey A. Ivanov)에게 그림을 배웠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1830년 정부의 후원으로 이탈리아 유학하여, 정치적인 문제로 생애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이바노프는 이탈리아에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형 그림 작업에 20년간이나 몰두했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 무참하게 진압되는 것을 목도한 이바노프는 지식인과 민중을 억압하는 현실과 이를 구원할 구세주의 출현에 대한 희망을 이 작품 속에 담았다. 당시 이 그림에 대한 기초구상이 알려지자 러시아 정부는 구세주의 출현을 새로운 정권의 등장으로 해석하여 미술아카데미 교수였던 이바노프의 아버지를 교수직에서 해임시키고, 이바노프의 정부 장학금마저 끊어버렸다.
데카브리스트는 나폴레옹 전쟁 때 서유럽에 원정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접한 일부 청년장교들이 모체가 되었는데, 1825년 11월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죽은 뒤 계승문제로 정계가 혼란해진 틈을 타 12월 14일에 무장봉기를 꾀하였으나 실패하여 시베리아의 이르크츠크로 유배당한 바 있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기 위한 습작만도 300여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화면에 배치된 인물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고 인물들의 특성을 정확하게 포착하기 위해 수많은 스케치와 드로잉 작업을 수행하였으며 인물의 자세와 표정을 꼼꼼하게 연구했다고 한다.
이바노프는 불순한 반정부 세력으로 알려져 귀국을 못하고 있다가 고국을 떠난 30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 1858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지 못한 채, 5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트레티야코프가 이바노프의 이 대작을 구입하여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안착하게 된 것이다.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1837-57, 540×750 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그림의 주제는 성경 요한복음 1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장소는 요르단 강변이다. 죄를 회개하라고 설파하며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유대민족이 오랜 동안 기다리던 구세주가 드디어 오고 있음을 군중들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우선 등장인물들을 보자. 그림 앞부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먼 곳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홀로 걸어 오고 있다. 앞쪽 무리들 중 십자가 지팡이를 든 사람이 세례요한이다. 군중들 속에는 세례 받는 사람(요한 주위에 옷을 벗고 웃고 있는 사람들), 바리새인(오른쪽 로마 병정 앞에 있는 터번을 쓴 화난 노인들), 노예(푸른 옷을 입고 웃고 있는 사람들), 로마 병정(말탄 사람) 등이 보인다. 사람들은 요한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있다. 이바노프는 이 그림에서, 학대받는 민중의 꿈을 그리려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미래의 자유와 구원을 믿지만 현재의 고난과, 악의 세계를 타도하지 못하고 전설의 구세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민중의 비극을 그린 것이다.
2. 게(Nikolai Ge, 1831-94): <무엇이 진리인가?>
니콜라이 게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서 배우고 후에 교수가 된다. 1871년 결성된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들의 모임인 이동파에 참가했다. 이동파 화가들은 엄격한 사실주의 입장에 서서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는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니콜라이 게는 인간 존재가 지닌 태생적 모순에 괴로워하고, 예술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화가다. 말로만 이야기되는 도덕과 정의, 현실의 모슨 사이에서 갈등한 끝에, 예술은 인생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붓을 꺾었다. 이곳저곳 떠돌다가 대문호 톨스토이를 만나 톨스토이의 사상에 감화를 받았다. 톨스토이는 진리의 계시자로서 종교는 존중하되 교회의 권위는 배척하였다. 예수를 존경하고 사랑하되 신앙의 대상으로 믿기를 거부하였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출교당한 뒤 톨스토이는 ‘나는 신의 의지가 인간 예수의 가르침 속에 알기 쉽게 명백히 표현되어 있다고 믿는 것일 뿐,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기도드리는 것을 가장 큰 모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종교관에서 톨스토이는 불화와 위선, 폭력을 버리고 사랑과 자기부정, 형제애에 입각한 무저항주의를 주창하게 되었다. 게가 이러한 톨스토이의 사상에서 받은 감화를, 그만의 개성적인 시각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진리는 무엇인가?, 1890>와 <갈보리, 1893>다.” (이주헌,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 학고재, 39-40쪽)
<니콜라이 게, 무엇이 진리인가?, 1890, 캔버스에 유채, 233 X 171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무엇이 진리인가?>에서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는 등을 보이고 있고, 예수님은 앞을 바로보고 있다. 빌라도는 빛을 받고, 예수님은 그림자에 싸여 있다. 빌라도는 자유로운 권력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반면, 예수님은 손이 뒤로 결박된 상태다. 두 사람의 이런 대비를 통해 관객이 예수가 처한 상황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그림 속 빌라도는 어둠 속의 예수를 바라보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왕이냐?"고 묻자 예수는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왕이다."라고 답한 뒤, 자신이 진리를 증언하러 세상에 왔으며,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말을 듣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빌라도가 ‘무엇이 진리인가? 하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부도덕하고 정의롭지 못한 자는 저 따뜻하고 화사한 빛에 싸여 있고, 진리와 양심을 외친 자는 이렇듯 더럽고 차가운 어둠 속에 팽개쳐져 있는 것, 그것이 인생의 엄연한 현실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극단적인 모순으로 충만한 제정 러시아에서 그런 사실을 피부로 절감한 게는 그 모든 인간적인 좌절과 고독, 슬픔의 원형으로 예수를 그렸다. 그러나 게의 예수는 결코 패자가 아니다. 저 높고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를 비롯하여 세상의 영광과 권위로 충만한 모든 제도와 기득권자들이 승리자가 아닌 것처럼 가난하고 누추하다고, 세상에서 멸시를 받고 있다고 예수가 패자는 아니다. 오히려 지독한 고통을 진리와 양심을 위해 스스로 감내했기에 게의 예수는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다.”(이주헌, 위의 책, 43쪽)
3.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1930):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雷帝)와 그의 아들 이반>
<레핀, 1581년 11월16일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1885, 캔바스에 유채 200x250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레핀은 186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러시아의 미술학파인 이동파를 이끈 스승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로부터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배웠다.
레핀은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야이로의 딸의 부활>로 아카데미 졸업 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아 공식화가 자격을 취득했고, 우수 연수생으로 6년간 해외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레핀은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유학을 미룬 채 이 장면을 그리는 데 3년간이나 매달린 결과가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1870-73>이다. “각각의 인물 속에 개성 넘치는 성격과 다양한 삶의 흔적, 강인함과 절망, 비극적인 러시아의 상황을 담아낸 수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레핀은 1873년부터 1876년까지 유럽을 여행하며 유럽의 인상주의 등을 접했으며, 1877년 추구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와서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아브람체보를 자주 방문했다. 이곳에서 톨스토이(Leo Tolstoy), 무소륵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 트레티야코프(Pavel Tretyakov) 등 예술가 및 재력 있는 사람들과의 모임에 적극 참여했다.
1882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옮긴 레핀은 이동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하였으며, 혁명을 주제로 한 역동적인 삶을 주로 그렸다. 1894년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01년에는 러시아 국가 의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형 프로젝트를 의뢰받아 <1901년 5월 7일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회의>를 완성하고 오른손 관절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레핀은 말년을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보냈고 1930년 9월 29일 그곳에서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레핀이 그린 <1581년 11월16일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에는 제목에 날자와 등장인물을 알려주고 있다. 두인물중에 늙은 사람이 16세기 러시아의 절대군주, 일명 '차르' 였던 이반대제로, 역사적으로 '공포의 이반'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독재적 군주였다.
임신 중인 황태자비가 건강이 좋지 않아 예복을 갖춰 입지 않고 행사장에 등장하자, 격분한 뇌제는 그녀에게 지팡이를 휘둘러 유산시키고 말았다. 황태자인 아들이 자신을 나무라자, 격분한 뇌제는 그만 지팡이를 휘둘러 이반의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아들을 품에 안고 머리를 감싸 안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아보려 하지만 이미 죽음을 맞는 아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면서 한손은 힘없이 카펫위에 떨구고 나머지 한손으로 아버지를 잡은 채 죽어간다. 이 상황을 뇌제가 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가 광기어린 성격으로 유명하다지만 자기자식을 죽이려는 생각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눈에서 두려움이 보인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기엔 이미 늦었다. 한 순간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결과가 너무 혹독한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도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남의 생명을 빼앗은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특히, 21세기는 분노와 광기의 세기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4. 부르벨(Mikhail Aleksandrovich Vrubel, 1856-1910): <백조 공주>
브루벨은 젊어서부터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아카데미 교수들의 만장일치로 1884년부터 1889년까지 키예프의 키릴로프스키 성당의 프레스코화 벽화를 복원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이 작업을 통해 그동안 배워 온 서유럽 전통의 사실적이고 합리적인 표현을 넘어 비잔틴 미술 특유의 아름다운 선과 장식적인 평면효과를 체득하게 되었다.
한동안 그가 머물렀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문학작품 및 오페라 등에서도 적지 않은 영감을 얻은 작품을 다수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앉아있는 악마>(1890), <라일락>(1900), <백조공주, 1900> 등이 있다.
<앉아있는 악마>는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인 레르몬토프의 서사시 <악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푸슈킨의 후계자로 지목될 정도로 탁월한 시인 및 극작가인 레르몬토프(Mikhail Lermontov, 1814-1841)는 겨우 27세의 나이로 요절했으며,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극적인 구성은 연극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사시 <악마>에서 악마는 아름다운 타마라 공주를 사랑했다. 영원한 추방자로서 죽을 수도 없는 그가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공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주 또한 악마를 두려워하면서도 마침내 악마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의 밤이 지나자 그녀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하고 말았다. 악마는 그녀의 영혼이라도 취하고 싶었지만 그 마저 천사가 데리고 가 버렸다. 불행하게 살도록 숙명 지워진 악마는 자신의 창조주는 물론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동정받지 못한 존재다. 오늘날 우리 인간 세계에도 이러한 숙명의 굴레에 묶여 한 평생을 보내다가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브루벨이 그린 <백조 공주>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오페라 <황제 술탄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옛날 술탄이란 황제가 살았는데, 이 나라의 부자 상인 세 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막내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두 언니들은 동생이 왕비가 된 것을 몹시 질투하여 술탄 황제가 전쟁 때문에 궁궐을 비우게 되었을 때, 왕비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트렸다. 전쟁에서 돌아온 황제는 소문만 믿고 화가 나서 왕비와 어린 왕자를 나무통 속에 넣어 바다에 던져버렸다. 왕비와 왕자가 들어있던 나무통은 마법에 쌓인 섬에 닿아 살아났다. 한참 세월이 흘러 왕비와 왕자는 해변을 거닐다가 땅벌 떼들에게 마구 쏘여 다 죽어가고 있는 백조를 구해 주었다. 백조는 아름다운 공주로 변해서 왕자의 신부가 되었다. 브루벨은 소외와 고난의 운명을 타고 났으나 마침내 본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공주의 이미지를 그렸다. 백조 공주가 미쳐 다 펴지 못하고 굽혀져 있는 날개와 뒤를 돌아보고 있는 공주의 표정에서 모든 운명을 능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 순수한 표정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브루벨, 백조 공주, 1900, 캔버스에 유채, 142.5 x 93.5 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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