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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명소 스크랩 남한산성(11.9)
설악산 추천 0 조회 20 07.11.16 20: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한산성(11.9)


오늘은 그동안 바쁜 일이 대충 마무리된 후 처음 맞는 금요일이다.

그동안 미루어 왔던 현장방문을 가기로 한 날이다.

현장방문 후 시간이 나면 어디로 잠시 갈까 의논했는데 그 중 남한산성이 제일 적격지 인 것같아 남한산성을 가기로 했다.

아침 9시에 과천에서 출발을 해서 음성까지 승용차 2대로 나누어 타고 가기로 했다.

미리 약도를 나누어 주고 갔음에도 우리가 탄 차량은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가다 성남 지나 43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갔는데 다른 차량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야 하는데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바람에 우리보다 시간이 조금 지체 되었다.

그동안 날씨가 꽤 괜찮았는데 오늘은 날씨가 안개가 많이 끼었다.

그래도 모처럼 가는 시골풍경은 모두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 것같다.

현장방문은 1시간 반에 걸쳐 이루어 지고 그곳에서 점심을 먹자는 제의를 물리치고 승용차를 나누어 타고 이번에는 같이 다니기로 했다.

음성에 직원분의 집이 있다고 해서 잠시 들렸는데 어머님이 출타중이라고 하셨다.

그곳에서 남한산성까지 오는 길은 이번에는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왔다.

남한산성은 알맞게 단풍이 잘 들어 있었다.

그런데로 야외에 나온 기분이 들었다.

산성로타리에 차를 주차시키고 주차관리하는 사람에게 백숙 잘 하는 집 소개하라고 했더니 다 잘한다고 소개를 안하신다.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옆에 장안식당이 잘 한다는 것이다.

닭 백숙이 나오기 전에 도토리묵과 파전을 먼저 먹으면서 백숙을 기다려 먹었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산성로타리 밑에는 남한산성 역사관도 있고 그 옆에 개원사도 있는데 시간이 없어서 구경을 못하고 바로 북문으로 먼저 갔다.

시야가 흐려서 경관은 별로 좋지 못했고 성곽 밖으로 본 단풍도 많이 시들거나 떨어져서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금요일이라서 사람들이 많지 않았서 한적하고 좋은 날씨였는데 가끔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졌다.

평소에는 사람이 많아서 구경다니기가 걸구적거릴 지경이었는데 평일에 오는 것도 괜찮은 것같았다.

서문 가기전에 암문으로 나가 옹성인가 거기로 올라가 보았는데도 날씨가 흐려서 경관이 좋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남한산성에서 서울 야경을 찍어서 사이트에 올릴 만큼 좋은 경관인데 아쉬웠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다시 올 수 밖에 없다.

서문을 지나 수어장대 구경을 했는데 지난 번에는 수어장대 뒤에 공사를 한 것같았는데 이제 수리가 다 끝난 것같았다.

남문을 거쳐 비석거리를 지나 산성로타리로 돌아왔다.

어찌 되었든 가을에 남한산성을 다시 오게 된 것도 행운인 것같다.

여기는 야생화 사진 찍는 사람도 많이 와서 계곡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는 곳이다.

남한산성은 광주시의 자랑거리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언제 기회되면 여러번 와 봐야 할 곳이다.


아래 내용은 남한산성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은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점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높고 낮은 산이 많으며 좁고 긴 하천이 한강을 향하여 북 또는 북동쪽으로 흐른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성벽의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광주시의 지질은 회색화강암과 편마암지대 이며, 지형은 광주산맥의 영향권 안에 있다. 토양은 편마암계나 화강암을 모암(母巖)으로 하는 사질양토(砂質壤土)나 양토(壤土)이다.

남한산성은 청량산(497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내부는 약 350m의 구릉성 분지이다. 또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지방도에 걸친 연변은 약 8km에 이르는 긴 협곡을 이루고 있다.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한편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은 문형산497m, 매지봉(400m), 검단산(542m) 등과 남북으로 주부(主部)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산릉들은 북동 방향으로 연결되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 모양이 대략 남북으로 발달된 것은 부분적으로 좌수향(左手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평균 기온은 인접 도시와 약4。C 정도 낮은 기온차가 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1,400mm이며 맑은 날의 평균 일수는 약 204일로 봄과 늦가을에 많이 분포하며여 탐방객의 산성이용에 촉매제 역활을 하고 있다. 산간지역의 계절 변화는 평지보다 1∼2주 늦게 봄이 오고 일찍 겨울이 온다.

 

남문 근처에는 1986년 말에 복원된 개원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옛날부터 불경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한번에 아주 많은 양의 밥을 지을 수 있는 무게가 200근이 넘는 큰 놋동 4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서는 귀중한 불경 궤짝을보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매우 신기하다.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한 척의 배가 서울 삼개 나루에 닿았다. 그런데 그 배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다만 불경을 담는 궤짝만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궤짝 위에는 '중원개원사간'이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이를 발견한 삼개 사람들은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고, 그 궤짝을 관가로 보냈다. 그리고 관가에서는 이를 다시 왕에게 올렸다.삼개에서 보내온 궤짝과 그 사연을 들은 인조는 "사람도 하나 없는 배가 삼개에 이른 것만 해도 정말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불경 궤짝이 중원의 개원사에서 판각하고 찍은 것이라니, 이는 반드시 인연이 있어 우리 나라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시 우리 나라에 개원사라 불리는 절이 있는 지를 알아보도록 하라. 내가 보기에는 불경 궤짝 위에 쓰여진 글로 보아, 그 불경 궤짝을 우리 나라의 개원사에 보내 길이 보관하라는 뜻인 것 같다. 서둘러 개원사라는 절을 찾아보시오."라고 분부하였다.이에 개원사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절을 찾아보니, 광주 남한산성 안에 있었다. 그래서 인조는 그 불경 궤짝을 귀중하게 잘 싸서 남한산성의 개원사로 보냈다. 불경 궤짝은 한동안 별 탈없이 잘 보관되었다. 그런데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던 개원사에 불이 나게 되었다. 절의 화약고에서 불이 일어나 절 전체가 타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불길의 반대편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일순간에 불이 꺼져버렸다고 한다.

후에 다시 한 번 큰불이 나서 불길이 그 궤짝을 보관하고 있던 누각에까지 번진 적도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더니 무섭게 타오르던 불길을 덮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불경 궤짝을 보관하던 누각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두 차례나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은 불경 궤짝을 보관하고 있는 개원사를 부처님의 덕을 보고 있는 절이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수어장대 앞 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매바위' 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매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데에는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회 장군에게 그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서장대 앞뜰에서 이회 장군은 참수를 당하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이회 장군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장군의 말대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회 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그리고 실제로 이회 장군이 책임을 맡았던 지역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견고하게 쌓아져서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곽 공사를 함에 있어서 부정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심혈을 다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남한산성 서쪽 등성이에는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다. 이 무덤에는 병자호란 때의 명장 임경업 장군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임경업 장군은 충주 달촌에서 태어나고 그곳에 묻혔다. 그런데 이 무덤이 주목받는 것은 임경업 장군을 태어나게 한 임씨 가문의 선조의 무덤인데다 다음과 같이 임경업 장군의 출생을 예견한 이야기까지 함께 전해지기 때문이다. 먼 옛날 한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가난한 총각이 광주 친척집에 식량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날이 저물어 산 속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날씨는 비바람까지 몰아쳐 그 총각은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산길은 한참 동안이나 헤매던 총각의 눈에 불빛이 들어왔다. 멀리서 보이는 불빛을 발견한 총각은 그 불빛을 따라갔다. 그랬더니 웬 집이 하나 나타났다. 그 집의 문을 두드리니 놀랍게도 어여쁜 처녀가 나왔다. 깊은 산 속 외딴 집에 처녀 혼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총각은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무엇에 홀린 듯 처녀가 이끄는 대로 방에 들어갔고 차려주는 밥도 먹었다. 그리고 총각은 그 처녀와 꿈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한양에서 굶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한 총각은 서둘러 광주 친척집으로 떠났다. 그러나 길을 걷는 총각의 뇌리엔 어젯밤 그 처녀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총각은 마침내 그 처녀와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다시 어제 묵었던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바로 그때 온 산이 쩡쩡 울리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듣거라! 나는 이산의 산신령이다. 너는 지금 마음을 돌이키고 어서 네 갈 길이나 가거라. 어제 밤을 함께 보낸 그 처녀는 오백년 묵은 암구렁이다." 총각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총각은 잘못들은 것이라 생각하고, 어제 묵었던 집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처녀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집의 자취는 온데 간데 없고, 다만 한 그루의 고목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총각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산발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산발한 여인은 바로 어젯밤의 그 처녀였다.

처녀는 숨가쁘게 뛰어온 총각을 보며 자초지정을 이야기했다. "저는 산신령의 말대로 오백년 묵은 암구렁입니다. 세상 남자 중의 남자인 당신을 만나게 되어 이제 승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당신의 덕입니다. 아무쪼록 편안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 제가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이 자리에 비늘 세 개가 떨어질 것입니다. 그 비늘이 떨어진 자리를 이후에 당신의 묘 자리로 쓰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자손 중에 나라를 구할 유명한 장수가 꼭 나오게 될 것입니다." 처녀는 말을 마치자 곧바로 모습을 감췄다. 하늘로 올라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하늘로 올라가자 하늘에서 비늘 세 개가 떨어졌고, 그 비늘은 매화 나무 세 그루로 변했다. 그 후 임총각은 죽을 때, 처녀의 말대로 무덤을 매화 나무가 있는 자리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처녀가 승천하면서 남긴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는데, 총각의 자손 중에서 유명한 장수가 태어난 것이다. 그 장수가 바로 병자호란을 전후해서 큰 공을 세운 임경업 장군이다.


남한산성 관리사무소 앞쪽 화단에는 묘비가 서 있다. 묘비의 위쪽은 깨어져 없어졌고, 남은 묘비마저도 마모되어서 확실한 형체를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묘비명에는 서흔남(徐欣男)이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이 묘비는 동문 밖 검복리 병풍산 묘소에 있었는데, 그 후손이 화장을 하면서 묘역이 없어짐에 따라,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서흔남의 묘비를 이쪽으로 옮긴 까닭은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을 구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 임금의 곤룡포를 하사 받기까지 한 그를 지속적으로 가리고자 함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난을 왔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인조를 모시던 신하들은 하나 둘 흩어져,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강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다. 인조는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 앉기를 거듭했다. 더구나 남한산성으로 가는 산길은 험했고, 때마침 눈이 깊이 쌓여 걸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인조는 그 총각에게 "나를 좀 업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에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어서 성까지 한숨에 모시고 갔다.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산성으로 들어올 때,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은 것이 못내 궁금했다. 그래서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총각은 "당신은 피난민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말했다.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서,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였다. 이에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袞龍袍)가 너무 좋아 보여서, "당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달라."고 하였다. 인조는 흔쾌히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그 총각에게 벗어주었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활약을 펼쳤다. 청나라의 군사가 철통같이 포위하여 산성 안과 밖외 교통이 끊어지자, 그는 거지 행세를 하거나 적군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면서 적진을 통과하여 삼남지방과 강원도 등지로 가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서흔남은 전국 각지의 근왕병 진영에 뜻을 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삼 차 왕래하여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청과의 전투에도 참여하여 청군 3∼4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고도 한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걸쳐 활약을 펼친 서흔남은, 죽을 때까지 왕에게서 하사 받은 곤룡포를 지극 정성으로 보존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을 때, 자신이 평생동안 분신처럼 아껴왔던 곤룡포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서흔남의 가족들은 그와 함께 곤룡포를 중부면 검복리 서남쪽 병풍산에 묻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서흔남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하찮은 천민임에도 불구하고 정3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라는 파격적인 품계를 내렸다고 한다. 후세에 말을 탄 벼슬아치들이 서흔남의 무덤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는데, 이는 서흔남고 더불어 왕의 곤룡포가 함께 묻혀있기 때문이라 한다.

한편, 인조를 업어 모신 사람은 서흔남이 아니라 서기남(徐紀男)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서기남은 천하영웅이라 그 후 원두표(元斗杓)의 비장(裨將)이 되어 산성 북문 밖 싸움에서 큰공을 세우고 청나라의 장수 양고리(楊古利)를 붙잡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한미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인조를 업어 모시 사람이 최모(崔某)라고도 한다. 최모는 그 공으로 인하여 늘문이에 임금이 직접 하사한 땅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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