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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사마리아인들의 구세주(요4:39~42)
[요한복음 4:39~42]
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하였더라
오늘은 ‘사마리아인들의 구세주’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한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에게 와보라!” 이 말을 듣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보겠다고 했고 그러고 나서 한 말은 이분은 “참 세상의 구주시다”라고 했다. 아주 간단한 일 같지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 여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에게 와보라!” 그렇다고 그 사람의 역사를 세세하게 조사해서 이 사람은 이렇고 저렇고~, 그런 것을 말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은 말해봤자 오히려 상처만 더 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했다는 것인가? 물론 자기는 그렇게 말했을지 모르지만 듣는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들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간증할 때도 그런 경우가 있는데 세세하게 역사적인 이야기를 다 하는 경우도 있다. 또 그런 것을 해야 다 알아듣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은 세상 어디가도 많이 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것은 전혀 알아듣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무엇을 알아듣느냐가 중요한 문제인데 왜냐하면 무엇을 알아들었느냐에 따라서 무슨 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빵장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고, 떡 장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니까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서는 도로 역사적인 이야기밖에 못한다. 다른 것을 들어야 다른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들었을 때는 이 여자는 남편이 없어서 다섯 번이나 결혼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 동안 복잡한 역사적인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만 다 이야기해도 성경 다 쓸 만큼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는 ‘목이 말랐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예배할 곳이 없어서 여기서 해야 하나, 저기서 해야 하나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이것은 내면적인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든지 간에 요약하면 이 말이다. 나는 남편이 없어서 이렇게 목말랐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배할 곳을 못 찾아서 이렇게 방황했습니다. 이런 말로 들렸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 대한 대답을 한 것이다.
목이 말라서 생수를 달라는 여자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으면 너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나에게도 그러면 그런 물을 좀 주셔서 목마르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했다. 이런 사람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남편을 데려다 주실 수도 없었을 것 아닌가? 예수님이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말이 옳다. 그러고 나니까 이 여자가 하는 말이 예배할 곳이 어디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다.
여자가 왜 목말랐던가?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으로서 예배할 곳을 찾고 있다는 것은 아버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산에서 예배해야 하나 저 산에서 예배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이 된 것이다. 인생은 배필이 없으면 목마르게 되고 쉽게 생각하면 고독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담이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이 말은 속된 표현으로 하면 고독(孤獨)하다는 말이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고 말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은 남자와 여자 즉 배필로써 하나다. 사람은 배필이라는 한 존재라는 말이다. 배필이 있어야 되는 것이니까 혼자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왜 배필이 있어야 되는가? 무슨 일이 있기 때문에 배필이 있다. 일이 없으면 배필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배필이 필요한 것이다.
생리적으로는 사람이 사춘기가 되면 까닭을 모르게 고독하게 되니까 이성이나 친구를 찾게 된다. 이런 생리적인 현상은 창조자가 생물들에게 다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어떤 표시에 불과하고 인생은 배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왜 이렇게 헷갈리고 있는가? 여기서 예배해야 하느냐, 저기서 예배해야 하느냐? 이 말은 이런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 저런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 천주교를 가야 하나, 장로교를 가야 하나? 불교를 가야 하나, 기독교를 가야 하나? 이런 말과 똑같다. 이런 것은 헷갈리는 일이지 않은가? 천주교에 가면 천주교가 정통이라고 하고, 장로교에 가면 장로교가 정통이라고 한다. 정통(正統) 속에 들어가면 또 정통 중의 정정통(正正統)이라는 것이 있다. 거기다가 또 보수(保守)라고 붙여놓는다. 예수교 장로회(보수)라고 해놓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어떤 교회가면 ‘바로 선 장로교회’라고 했다. 그 속에서도 막 갈라져서 제각기 자기가 제일 보수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보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왜 기독교는 자꾸 보수만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보수라는 말이 성경을 그대로 지키겠다는 뜻이다. 성경이 하나의 경전이 되다보니까 이것을 벗어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수! 보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헷갈리게 만드나? 그것은 불교에 가면 불교에서 제일 잘 알 것이고, 기독교 가면 기독교가 제일 잘 알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 어디를 선택해야 될 것인가 하면 헷갈리게 된다. 이런 사람이 묻는 질문이 ‘그리심 산에 가야 합니까? 예루살렘에 가야 합니까?’이다. 왜 그런가?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다. 근원이 없어서 근원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것은 알고 보면 간단하다. 출생해서 성장해가지고 다 크면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 것이다. 인생의 수레바퀴라는 것이 아주 간단하다. 알고 보면 왜 낳나? 잘 하려고 낳는다. 잘하는 것은 왜 잘했냐? 결혼하려고 잘 했다. 결혼은 왜 했냐? 자식을 낳으려고 했다. 이렇게 된다. 아주 간단하다. 배필을 만나서 자식을 열매로 거둔다. 이것이 인생의 한 사이클이다. 씨를 뿌리면 그 씨가 나서 자라서 마지막에 열매를 맺는다. 도로 한 사이클이면 돌아온다. 인생은 똑같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열매 이것은 생물학적인 열매다. 벼를 심어서 벼가 열리는 것은 생물학적인 열매다. 사람이 나서 커서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 것은 생물학적인 열매다. 생물학적으로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고 다른 동물들과 다를 것이 없다.
창세기 5장에서는 이것을 간단하게 표현했다.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고, 그 후 팔백 칠 년을 지내면서, 자식을 낳았으며, 그가 구백 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그러니까 인생의 한 사이클은 이렇게 아주 간단하다. 이것을 열 번 돌려놓았다. 창세기 5장에 가면 열 사람을 가지고 이렇게 돌려놨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열 번이니까 열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다. 모든 사람은 낳아서 커서 자식 낳고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출생과 성장은 잘 했는데 마지막에 자식을 낳아야 할 결혼의 과정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배필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씨는 뿌렸는데 열매가 안 열린 것과 같다. 식물로 한다면 잘 자랐는데 마지막 수정기에 와서 수정이 안 되서 결국 열매가 안 열렸다. 이런 것이 많다. 벼도 펼 때 비가 많이 와버리면 수정이 안 된다. 그러면 벼 이삭이 없어지게 된다. 꼭 이것과 마찬가지가 됐다. 씨는 뿌렸지만 열매를 못 얻게 됐다. 생물학적 인간으로 실패했다. 한 사이클이 끊어진 것이니까 실패한 것이다.
꽃은 피었는데 나비가 없어서 수정이 안 되고 열매를 못 맺었다. 제주도에 가면 매화가 일찍 핀다. 설중매(雪中梅)라고 일찍 핀 다음에 아주 추워 버리는 수가 있다. 그러면 나비고 벌이고 아무도 없다. 그 해에는 꽃만 피고 매실이 하나도 안 열리고 그대로 시들어 버린다. 농장에서는 꽃 필 때 비가 온다던지 서리가 온다던지 하면 농사를 망치는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꽃 필 때 만일에 배필을 못 만나면 망쳐 버린다. 아예 망해 버린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해서 무엇을 얻어야 되나? 그의 나라를 얻어야 된다. 왜 창조했나? 나라를 얻으려고 창조했다. 인생은 결혼해서 뭐하냐? 자식을 낳으려고 한다. 요즘은 자식을 안 낳기도 하고 부수적인 목적이 많기도 하지만 근본 목적은 결혼은 자식을 낳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참 남편이 없었다. 바로 이 중요한 과정에서 결함이 생겼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넌 남편이 없는 것이 맞다고 하니까 그럼 예배할 곳이 어딥니까? 대번에 묻는다. 왜 결혼문제를 얘기하다가 예배할 곳을 찾는가? 남편이 없으니까 예배할 곳을 찾는 것이다. 땅은 남편이 있는 곳이고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그래서 땅에서는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없다. 그래서 소망이 없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땅에서는 소망이 없었다. 그래서 하늘의 것을 찾은 것이다. 우리도 그래서 땅의 소망이 없을 때 하늘의 소망을 쳐다보는 것이다.
다말의 경우는 씨를 얻으려고 결사적으로 행동을 한다. 그때 당신 그러면 바로 죽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죽을 각오를 하고 이스라엘 정탐군을 살려준다. 그것은 자기 운명을 거기에 의탁하려고 당신들이 들어올 때 나를 살려 달라! 대가로 당신을 보내 주겠다! 이것이었다. 이 여자들은 사마리아 여자처럼 땅에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말은 그 때 어찌 할 수 없게 되었다. 남편이 죽었고 두 번째 남편 또 죽었다. 세 번째 남편은 맞을 수 없게 되었다. 시아버지가 주지 않으려고 한다. 셋이나 되는 아들이 다 죽어 버리니까 팔자가 너무 세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안 주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말은 그래도 씨를 얻어야 했다. 이 씨는 기업이다. 이 때 사람들은 만일에 자식을 갖지 못하면 고아와 과부가 된다.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된다. 자기 기업이 없어지니까 그러니까 결사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다.
라합은 기생이었다. 조국이 없는 사람이었다. 기생에게 무슨 조국이 있겠는가! 노예에게 무슨 조국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면 자기 성을 배신하고 자기 나라를 배신하고 외국 군대를 도와준 사람이니까 역적이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이라야 역적이지 기생이란 말은 자기 국적이 없다는 말이다. 땅에서는 자기의 설 자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여자들은 땅의 소망이 없기 때문에 하늘로 향하게 된 것이다. 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자를 남편에게 이끌어 간 것이 아니고,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하는 때가 온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로 인도 했다. 이것은 정말로 지혜로운 일이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물동이를 내려 둔 채 동네로 내려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말하는 이를 와서 보라, 이가 곧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랬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녀가 대답을 얻었다는 뜻이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이란 말은 이 여자가 행한 모든 역사적 사실을 다 말했다는 뜻이 아니고,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대답해 주시는 이를 만났다는 말이다. ‘말한다’는 이 말은 ‘대답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답은 무엇인가? 무슨 답을 얻었는가?’ 우리가 표면적으로 보면 무슨 답을 얻었는지 모르지 않겠는가?
아버지 앞에 오면 여자와 남자,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한 몸이다. 여자와 남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원래는 한 몸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한 몸이 되고 둘이 한 몸이 될지라. 하나님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둘이 아니고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유태인과 이방인, 쉽게 말하자면 아랍인들,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 안에서는 하나다. 아브라함 이후에 둘이 되었지 아브라함 때는 하나였다. 이삭과 이스마엘, 그렇지 않은가?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버지 안에서 하나가 아닌가? 그런데 이삭의 자손이 다르고 이스마엘의 자손이 달라졌다. 지금 유대인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삭의 자손들이고, 아랍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다. 그렇게 둘이 완전히 갈라져서 지금은 원수같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된다. 유태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해결이 안 된다. 완전히 원수처럼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어디서 해결되겠는가? 해결의 자리가 없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아버지께로 가는 수 외에는 방법이 없다.
잘 생각해 보라. 참 간단하다. 유대인과 이방인에 얽힌 문제가 얼마나 많은가? 출애굽할 때도 그렇고 엄청나게 문제가 많다. 아말렉이 나와서 방해하고 여리고성이 방해했다. 가는 길을 안 열어주고 이러니까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유태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을 몰아내고 정복하고 하는 이런 역사가 얽혀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원한이 맺혀 있다. 그런데 풀 방법이 없다. 지금도 못 푼다. 지금도 중동의 문제는 그 문제다. 바로 이삭의 후손들과 이스마엘의 후손들의 싸움이다. 여기에 미국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쉬운 문제가 아니고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을 주도하고 있는 실력자들이 유태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다.
이렇게 복잡한 데 간단한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에게 가면 간단하다. 그래서 아버지 앞으로 가는 방법 외에는 간단한 방법이 없다. 지금 유엔에서 협상을 하라도 별별 소리를 다해도 소용이 없다. 유엔 총회에서 가자지구를 독립시키니 뭐니 해도 하루아침에 끝나버리고 만다. 문제가 하나 생기면 폭탄을 던져 버리고 마니까 도저히 이것은 손을 댈 수가 없는 그런 실정이다. 언젠가 그것은 폭발하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아버지 앞으로 가야 해결된다. 네 아버지와 내 아버지가 하나가 아니냐? 그렇지 않은가? 너희 아버지와 내 아버지가 하나가 아닌가? 이것이다. 너는 유태인이고 나는 모슬렘이고, 이게 아니고 네 아버지와 내 아버지는 하나다. 이것이다. 전에 캠비즈도 물으니까 그랬다. 이삭에 대해서 물으니까 전혀 몰랐다. 이삭이라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아주 꼴도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이삭이라는 사람이 조상 때부터 생각조차도 하기 싫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이삭 때문에 자기들은 핍박받았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물으니까 ‘아브라함은 안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이삭이 참 좋은 사람이지만, 유태인들에게 이삭은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아랍인들에게는 이삭이 원수다 원수. 이삭이 만일 낳지 않았더라면 이스마엘이 장자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이삭이 나오는 바람에 밀려났다. 그러니까 이삭이 철천지 원수가 아닌가? 세상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이삭은 정통 중에 정통이다. 유태인이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삭은 뿌리 중의 뿌리이고, 정통중의 정통이다. 그런데 아랍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원수 중의 원수다. 왜 13년 만에 갑자기 나와서 자기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원수이겠는가? 그러니까 이스마엘은 이삭을 희롱했다고 되어 있다. 그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희롱할 정도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 같았으면 큰 문제라고 죽여 버렸을 것이고 없애 버렸을 것이다. 이런 문제다. 왜냐하면 장자권을 놓고 다투는 그런 셈이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이것은 도저히 해결이 안 된다. 그러니까 정통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어 버린다. 우리는 지금 이삭으로부터 난 자가 네 후사라고 할 것이라고 하게 되어 버렸다.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후사라고 칭하게 될 것이라고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삭으로부터 난 자가 아닌 것은 전부 이단이고 이방인이게 되어 버렸다. 요즘 말 같으면 이것이 이방인이고 이단이다.
저쪽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스마엘로부터 난 자가 아닌 것은 다 이단이요, 역적이다. 이렇게 되지 않겠는가? 이것을 무슨 수로 해결하겠는가? 그러므로 아버지 앞으로 가야 된다. 아버지 앞으로 가야 간단하다. 아버지 앞에만 가면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 가령 어느 형제와 나, 어느 자매와 나 사이의 문제는 여기다 비하면 문제도 아닌 것이다. 문제 자체도 아니고 이것은 문제 자체가 대한민국 교과서에 쓸 일도 못되고 성경에는 아예 쓸 만한 일이 못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 문제는 너무너무 중요한 문제다. 이스마엘이냐 이삭이냐? 이것은 한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다. 이러하니까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것은 기록할 가치마저도 없는 아주 아무 것도 아닌 그런 문제다.
그런데 이렇게 큰 문제도 아버지 앞으로 가면 간단한데 하물며 너와 내가 무슨 문제가 틀어졌느니 어쩌니 하는 이것은 아버지 앞으로 안 가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것도 근원적으로는 아버지 앞으로 가야 된다.
우리는 한 아버지다, 아버지가 하나다. 우리에게는 한 아버지만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에게는 유일한 조상 아브라함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유일한 구속자 예수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교파가 예수 앞으로 가면 모두가 다 하나인데 왜 자기를 갈라놓고 자기가 정통이라는 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예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예수 앞에 가면 다 하난데 자기만 옳고 남은 다 이단이다. 이것은 자기에게 예수가 없다는 말이다. 구속하신 분은 한 분 뿐이다. 교회를 만드신 분은 한 분 뿐이다. 한분뿐이니까 어찌되었든 간에 그분의 것인데, 붉은 색이 되었든지 파란 색이 되었든지 역시 그분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자기 것도 아니면서 쟤 것 내 것 하겠는가? 자기가 구속해서 교회를 만든 게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아버지 앞에 안 가서 그렇다. 이방인과 유태인은 아버지 앞에 안 가서 그렇고, 오늘날 기독교가 분열되어 있는 것은 예수 앞에 안 가서 그렇다.
인류는 한 창조라는 것이다. 어느 인류이고 인류는 한 창조가 아니겠는가? 검든지 희든지 우리가 그것으로 비교하면 정말 곤란할 때가 참 많다. 서양 사람들이 동양 사람을 볼 때도 그렇고 동양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을 볼 때도 그렇다. 흑인이 백인 보면 그렇고 백인이 흑인을 보면 그렇고 이상한 것이 많다. 문화적인 차이만 봐도 엄청나게 차이가 많다. 그런데 창조자 안에서는 다 하나다. 아버지 앞으로 가면 그 안에서 많은 것이 하나이고 우리가 생각할 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그 많은 것이 다 하나이고, 모든 것이 간단하다.
예수는 하나님을 떠나서 복잡했던 우리를 단순화 했다. 예수 앞에 가면 단순화 된다. 예수 앞에 가면 기독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단순화 된다. 그는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것을 처리했다. 십자가 안에서는 기독교나 불교나 무엇이나 다 거기는 죽는 곳이다. 부처님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 놓으면 안 죽겠나, 모슬렘이라고 안 죽겠나. 십자가 안에 가면 다 똑같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 오면 단순하게 처리되어 버린다. 한 칼로 처리되어 버린다.
고물상에 가보면 쇠가 여러 가지 쇠가 있다. 온갖 물건들이 다 나온다. 그런데 용광로에 들어가 버리면 쇳물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가면 모든 것이 단순하게 처리된다. 그리고 새것을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창조 안으로 이끌어서 옛 창조 안에 모아서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다 끝난다. 잘났던지 못났던지 똑똑하든지 못 똑똑하든지 또 잘했든지 못했든지 십자가에서는 다 끝이다. 십자가 안에 가면 검은 것도 흰 것도 다 끝나버리고 모든 것이 다 끝난다. 옛 창조 안으로 이끈 것, 십자가는 옛 창조를 끝내기 위한 것이다.
부활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려냈다는 말인데 이것은 새 창조를 의미한다. 옛 창조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설사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그래도 옛 창조는 옛 창조다. 그러니까 그것이 어디서 끝나나면 십자가에서 다 끝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새 창조는 시작된다. 용광로에서 철물이 다시 만들어진 것과 똑같은 것이다. 들어갈 때는 오만 잡동사니가 다 들어갔다. 나올 때는 한 가지 쇠가 되어가지고 나온다. 그래서 다시 철근이 된다든지 망치가 된다든지 하는 것이다.
남편이 없어서 다섯 번이나 남편을 찾았고, 사마리아인이 되었기 때문에 예배할 곳을 잃었던 사람이다. 유대인 같으면 그렇지 않을 것인데 사마리아인이었기 때문에 성전문제가 복잡했다. 강대국인 바벨론이 와서, 앗수르가 와서 점령을 하면 옛날 사람들은 쓸 만 한 사람들은 포로로 잡아서 다 데려가서 자기들이 사용하고 별 쓸모없고 이런 사람만 남겨놓는 것이다. 그러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잡아갈 사람 다 잡아가고 별 가치 없는 사람을 남겨놓았는데 이 사람들이(정복자들) 자기 백성들을 그 곳에 이주를 시킨다. 공산주의에서도 그렇게 했다. 자기 땅을 만들어야 하니까 자기 백성들을, 앗수르가 오면 거기다 앗수르를 이주를 시키고 바벨론이 오면 바벨론을 거기다 이주를 시킨다. 그러면 자연히 섞어 살게 된다. 그래서 혼혈종이 되게 된 것이다. 혼혈족이 됐다고 해서 유대인들은 이들을 너희는 혼혈족이라고 하고 자기 민족이라고 쳐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다 성전을 세웠냐? 예루살렘 성전에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 받아주지를 않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 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지금도 유대인 회당에 가면 이방인들은 못 들어간다. 우리가 미국에 가서 꼭 가보고 싶어서 세속화된 곳에는 가봤는데 진짜 정통이 모인 데는 가보고 싶었는데 들어가려고 하다가 못 들어갔다. 왜냐하면 자기들끼리만 모이는 데다. 그러니까 오죽 하겠는가! 사마리아 사람들을 받아주겠는가. 그러니까 자연히 그리심 산에다 성전을 세웠다. 그러니까 말썽이 많을 것이 아니겠나. 이것은 긴데 아닌데 이런 소리가 나오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보고 그게 무슨 성전이냐,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는데 너희는 왜? 자기들이 못 오게 해놓고 뭐라고 한다. 그렇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참 예배할 곳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서 예배해야 되느냐? 창조의 태초로 돌아가서, 구속의 은혜로 돌아가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서, 근본으로 돌아가서 새사람이 된, 용광로에 들어가서 다시 나온 쇠처럼, 근본으로 돌아가서 새 인류가 된 한 인생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여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사마리아인이 갑자기 유대인이 되겠는가? 그것도 불가능하고 다섯 남편이나 찾았던 여자가 갑자기 요조숙녀가 되겠는가?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다 불가능하다. 그런데 아버지 앞에 오니까 새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여러분은 속으로 나는 언제 새 사람이 되나? 그전에도 내가 이랬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고 이것은 언제고 고쳐질 것 같지 않은데 내가 새 사람이 되겠나. 하늘에서 불덩어리나 떨어지면 모르지만 이래가지고 내가 새 사람이 되겠나. 이런 생각을 혹시 하지 않는지? 나도 옛날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뭐가 하늘에서 확 떨어져서 모두 녹여버렸으면 좋겠다. 해체시켜 버리고 체질이 녹아버리듯이 확 녹아버리면 뭐가 확 나오지 않을까, 기도를 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는데 아버지께로 가면 사람이 달라진다.
우리가 지금 아버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이 차이이다. 그러니까 새사람 되는 것은 아버지를 만나야 새사람이 되지 내가 지금 무엇을 개선했기 때문에, 조금 개선했으니까 조금 새사람이 됐구나. 아이고! 조금 새 사람이 됐네. 어제보다는 오늘 새 사람이 되었네. 이런 것이 새사람이 아니고 이것은 개선된 사람이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다.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나쁜 버릇은 고쳐야 한다. 남이 싫어하는 버릇은 고쳐야 한다. 그것까지 고치지 않고 나는 새사람 된다고 하면 안 된다.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쳐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는 새 사람은 그것을 고쳐서 사람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보고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 없던 사람이 아버지를 만나면 새사람이다. 아버지 없던 사람이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를 모르던 사람이고 아버지를 부인하던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아버지를 인정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을 보고 새 사람이라고 한다. 새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 새 사람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느냐면 하나님을 인정한 사람을 인정한다. 너희가 나를 인정하면 나도 너희를 인정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겠는가? 내가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 새 사람이다.
예수는 부활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새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죽였지만, 옛사람 안에서는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살렸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새사람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사람은 간단하다. 아버지가 있으면 새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이탈한 인간을 근본이신 아버지께로 이끄셨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가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이탈한 인간을 근본이신 아버지께로 이끄신 분이다.
아버지를 왜 떠났는가? 선악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아버지를 떠났다. 지식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떠난 것이다. 사람을 근본이신 아버지께로 되돌린 사람이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사람을 아버지께로 이끈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하고 불렀는데 ‘하나님’이라는 말은 ‘EL, 엘’이라는 말로 ‘전능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전능자로 불러서는 이상하게도 ‘아버지, 근원’로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라고 부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애굽에서 자기들을 해방시켜주신 분은 여호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처음 창세기1장1절에서는 ‘EL, 엘, 엘로힘’하다가 출애굽기에 오면 당신의 이름이 누구입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나는 여호와다.’라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여호와’다. 이 말은 무엇이 되게 하는 분이라는 뜻이다. 노예를 자유인이 되게 하는 분, 노예를 해방시키신 분, 홍해를 건너게 하신 분,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분 그렇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무엇을 하시게 하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전능자’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분 그분을 믿는 것이다.
희랍사람들처럼 막연하게 추상적인 신(神)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자기 민족을 인도한 그분을 믿는다. 이것을 그들은 ‘여호와’라고 부른다. 10계명의 첫 구절이 “나는 너희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2)이다. 그러니까 이방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희랍인들이 말하는 그 데오스가 아니다. 글자가 그것밖에 없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 GOD하는 데 여호와는 그 GOD이 아니다. 여호와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자기들의 역사 속에 관여했던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그때처럼 자기들을 관여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때처럼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든지 뭔가에 잡혀갈 때마다 애굽에서 자기들을 이끌어냈던 그 여호와를 부르고 있다. 그때처럼 우리도 건져주십시오. 하는 것이다. 그때 일을 당신은 잊었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데도 나온다. 그때는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뭡니까? 이렇게 호소하는 곳도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탈한 사람을 근본으로 돌아오게 하는 분이다. 유태인들은 그리로 돌아가야 항상 하나가 된다. 여호와에게로 돌아가야. 그래서 우상숭배를 못하게 한 것이다. 우상숭배라는 말은 여러 신을 섬긴다는 말이기 때문에 여러 신을 섬기게 되면 다 갈라져 버리게 된다. 그래서 선지서를 읽으면 누가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했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여호와 외에 누가 너희를 인도한 신이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인도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게 유태인들이다. 우리도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근본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불렀다.
구약시대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는 아주 드물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상은 있어도 직접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와서 직접적으로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버지’라고 부른 일이 보통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네가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그 높으신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참람한 짓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심각한 문제다.
근본을 떠난 인간은 아버지를 거부하고 있다. 만약 아버지를 인정하게 되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커지면 굉장히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아버지 앞에 가면 똑같아지게 된다.
만약 자기 아버지가 똥개인 똥개가 어떻게 팔자가 잘 풀려서 아주 개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을 만나서 아주 호화로운 주택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개집 한 채가 아파트 한 채 값이 될 만큼 좋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 겨울이면 외투를 입고 다니는 개가 되었다. 아주 근사한 개가 되었다. 그러면 그 개는 자기가 똥개라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누가 와서 보고 생긴 것을 보고 똥개라고 하면 자기가 그 말을 인정하려고 하겠냐는 것이다. 내가 왜 똥개냐? 내 집을 봐라 내 외투를 봐라 내 주인을 보라고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자기 아버지 똥개를 데려다 앞에 딱 세워두면 자기가 완전히 드러나고 만다. 그래서 싫어한다. 참 이상하다. 아주 신성한 방법으로 근원을 아주 멀리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위대한데 신성하시고 놀라우신 분인데 인간이 어찌 감히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겠냐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아니 미물에 속한 인간이 더군다나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지성소 안에 계시던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삿대질을 한다. 네가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얼핏 들어보면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것 같다.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다. 정말 정통인 것 같다. 정말로 신앙이 좋은 것 같다. 정말로 이 사람들은 알짜배기 같다. 그런데 그 속에는 묘한 것이 들어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수단이 들어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수작이다. 속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그 말에 메여서 인간은 감히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말이 맞다. 이런 것을 아주 근본주의(根本主義)라고 한다.
이것은 사탄의 수작이다. 왜?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면 유태인과 이방인은 갈라져야 한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면 갈라져야 한다. 그러면 유태인의 정통주의자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지금 아랍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자기 조상이라 하면 그것을 용납 하겠는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개 같은 너희가 어떻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너희 조상이라고 하냐고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똑같다.
사람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사탄은 설 자리가 없다. 천사가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사탄은 자기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 결국은 사람으로 하여금 종이 되게 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읽어보면 아주 잘 표현해 놓았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종이 되었다고 한다. 율법이 없을 때는 괜찮았는데 율법이 있다 보니 더욱더 선악을 아는 지식이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더욱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해서 보니 내가 너무너무 불량하다는 것이다. 율법이 없을 때는 내가 그렇게까지 나쁜 줄을 몰랐는데 율법을 통해서 나를 비춰보니까 내가 너무 부정한자라는 것이다. 너무 부정하기에 나는 더욱더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되고 종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바울의 논리다. 왜 우리가 종이 되었냐하면 율법 때문에 더욱 더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 똥개가 똥개냐 진돗개냐에 대한 지식이 없었더라면 막무가내로 할 수 있다. 나는 저 개하고는 종자가 달라. 나는 몰라. 저 개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놈의 똥개가 공부를 했네. 똥개는 어떻게 생겼고 진돗개는 어떻게 생겼다는 공부를 했는데 공부를 하고 보니 자기는 더욱 똥개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똑같은 것이다. 율법이라는 것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더욱 똥개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더욱 못 부르게 된 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했는데 결과는 반대가 된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되어 버린 것이다. 사탄이 수작을 부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가 될 수가 없다. 인류는 하나가 될 수가 없다. 하나 될 방법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 인류는 하나고, 아브라함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고, 예수 안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은 다 하나이다. 예수 안에서는 이 교파나 저 교파나 다 하나이다. 예수는 십자가 안에서 인류를 하나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부활로 새 생명을 분배했다. 옛사람이 갈 곳은 십자가이다. 옛사람은 십자가로 가야 나도 인간이구나! 이렇게 하게 된다. 새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온 사람이다.
크게 말하면 천주교와 개신교는 둘이지만 예수 안에서는 하나다. 저희들이 뭐라고 어떻게 만들어 놓았던 간에 도로 하나다. 하나는 총회장이라고 만들고 하나는 교황이라고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도 예수 안에서는 도로 하나다. 갈 데가 없다.
근원을 베일로 철저하게 가려놓고 분열을 정당화한다. 어떤 이유로 교리적인 이유로 제도적인 이유로 역사적인 이유로 그 분열을 정당화하고 있다. 정당화하는 이것이 바로 사탄의 수작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더 정당화해서 나가고 있는 것이 사탄의 수작에 말려드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인류는 하나다. 누구를 만나든지 이것을 우리가 증거해야 한다. 대구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나는 대구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안 다니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이지만 그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증거해야 하냐면 당신은 대구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이고 나는 대구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면 안 된다. 하나님 안에서 당신과 나는 하나요. 이렇게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넘어서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는 인류가 하나구나! 처음 만나면 그 사람도 생각할 때 나하고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나와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고 나는 나대로 나하고 그 사람하고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 해답이 뭔가? 둘 중에는 그 해답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 인류는 하나다! 이것이 해답이다.
교리나 교파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죄악이다. 이 교리가 정통이니까 이 교리를 믿어야하고 이 교리를 안 믿는 것은 다 이단이다. 교파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정통이라고 하는 것이 다 죄악이다. 하나님 백성을 갈라놓고 원수되게 하고 있다. 종교적인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교리적인 장벽이라는 것이 아주 높다. 보통 일이 아니다. 막걸리 한 잔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너무너무 어려운 것이다. 보통 세상 문제는 대부분 다 이해관계다. 돈 문제, 이해관계, 자존심 문제 다 이런 것이다. 그래서 사실 세상 문제 해결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돈 문제는 돈만 내가 조금만 손해 보면 된다. 내가 돈을 바득바득 손해 안 보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원수가 되는 것이지 내가 조금만 양보하면 금방 풀어지는 것이다.
그 사람이 100원 갖겠다하는데 내가 110원 갖겠다고 하면 싸우는 것이지만 그 사람이 100원 갖겠다고 하면 내가 90원만 갖고 네가 110원 가져라 그러면 그냥 해결돼 버린다.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아둥바둥 잡고 싸우는 것이다. 자존심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세상 사람하고 세상적인 문제로 우리가 만약 다툼이 있다든가 싸움이 있다든가 안 좋다든가 이런 것은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자기들은 그럴 때 우리들은 안 그래야 된다. 우리는 그 10원을 양보하면 되는 것이다. 조금 덜 가지면 되는 것이니까 다 버리라고는 할 수 없고 조금만 덜 가지면 된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 쓰기에 달렸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인류는 하나다. 이것을 우리가 증거해야 된다. 교리나 교파가 달라도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원수 될 자가 아닙니다. 이것을 전해야 된다.
이것은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은 이리가나 저리가나 산에 올라만 가면 된다. 이것이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이다.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가나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똑같은 것이다. 그것이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은 이것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다. 예수 안에서 하나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다. 왜 하나라고 하는가? 십자가 안에 가보니까 하나더라. 그래야 되는 것이다. 나도 둘 인줄 알았는데 십자가 안에 보니까 하나더라. 이렇게 말해야 된다.
예수는 사마리아인들을 아버지 안으로 불렸다. 너희들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틀렸다. 이렇게 하지 않고 너희들이 혼열족이 됐으니까 너희가 부정하다 이러지 않고 이 여자에게는 너 다섯 번이나 결혼하고도 아직도 그러느냐? 그러지 않고 이렇게 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인도 했다. 여기서 하나님 이라는 말을 구지 안 쓰고 아버지라는 말을 쓰고 있다. 아버지다.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라고 쓰면 모해지니까 아버지라고 쓰고 있다.
강대국의 침략 때문에 혼혈족이 됐다. 유대인들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우게 됐고 배도자(背道者)가 됐다. 이 사마리아인들에게 당신들은 그리심 산은 역사적으로 틀렸소! 성경에 맞지 않소! 이렇게 한다고 답이 되겠는가? 그렇다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리겠는가?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받아 주겠는가? 아니다. 사마리아 인들에게는 당당하게 아버지 품으로 갈 길을 열어주어야 된다. 그래서 아버지 품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게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들은 “이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는 세상의 구주시기에 합당하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다. 참 세상의 구주네. 유대인 보고도 뭐라 하지 않고 사마리아 인 보고도 뭐라 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인도해 버리네! 이 사람이 진짜 구세주네! 이렇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세상의 구세주가 되기에 합당한 분이다. 다른 종교 얘기를 해서 그렇지만 어디가도 이런 분은 없다. 이런 분은 없다. 뭐 좋은 일 하라고 가르치는 분도 많고 좋은 생각 하라고 가르치는 분도 많지만은 이렇게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신 분은 없다. 아버지 앞으로 인도해 주신 분은 없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분!(엡2:14) 모든 문제를 소멸하는 분!(히12:29)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다”고 했지 않는가? 모든 문제를 소멸해 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이라 그러는 것이다. 여호와가 소멸하는 불이신데 예수님이 모든 걸 다 소멸시켜 버린다. 그러니까 하나님 이라한다.
새 생명으로 다시 나게 하신 생명의 주(행3:15),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신 새 창조자(계21:5), 유대인과 이방인을 교회가 되게 하는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골1:18) 이래서 예수를 보고 하나님 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하는 것은 신이라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렇게 하시는 분을 보고 ‘하나님’이라 했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난 사람을 자세히 보니까 이 사람이 바로 그 하나님 하신 그 분이네. 이래서 “이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다” 이렇게 나오게 된 것이다. 신을 신이라고 한 말이 아니고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의 영광이다.”(눅2:32) 누가복음에 그렇게 되어 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함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2:32)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온 평화”(창348)
그래서 우리 노래 하나 부르자. (옛날 찬송가 248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1.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2.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같이 누리겟네
3. 보아라 광야에 화초가 피고 말랐던 시냇물 흘러오네
이 산과 저 산이 마주쳐 울려 주 예수 은총을 찬송하네
4. 땅들아 바다야 많은 섬돌아 찬양을 주님께 드리어라
싸움과 죄악의 참혹한 땅에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네 아멘
이게 주님이 만든 나라의 평화다.
아담이 만든 평화라는 것은 언제든지 한쪽이 좋으면 한쪽이 나빠지는 그런 평화다. 이스라엘 나라가 좋다 그러면 아랍사람들이 안 좋다, 아랍사람들이 좋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 좋다. 이런 평화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해봐도 그렇다.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보면 한 사람은 좋다 그러면 한 사람은 나쁘다. 결국은 어느 한편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한 편을 들어버렸단 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좋다고 그러는데 딴사람은 나쁘다고 그런다.
이것은 주님 안에 있는 해답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해답은 그 해답과 다르다. 사마리아인이 잘못하나 유대인이 잘못했나? 이 여자가 잘못했나? 사회가 잘못했나? 이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께로 가니까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선악을 위해서 만들어진 평화보다 얼마나 온전한가! 우리가 전하는 평화는 이런 평화다.
지금 세상은 양쪽이 서로 싸우고 있다. FTA 가지고 지금 싸우고 있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끝이 없다. 다 자기대로 옳다고 그런다. 어느 쪽은 되어도 어느 쪽은 틀렸다고 한다. 이제 강행처리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 명분 놓고 싸우고 있다. 그런데 하고 나면 하고 난대로 또 문제가 생긴다. 안하면 안하는 대로 문제가 생기고 이것이 세상문제이다. 세상문제에 우리가 뛰어들어선 안 된다. 어리석은 싸움에 뛰어 들어가지고 하다보면 나도 이 편이 되든 저 편이 되든가 둘 중에 하나가 된다. 그러면 미친놈 편들면 나도 미친놈 되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어차피 선악을 위해 만들어진 평화니까 우리가 그런 데에 발 딛을 일이 아니다.
우리가 누릴 평화, 우리가 전할 평화, 만민을 하나되게 하는 평화! 이건 주 예수의 평화이다. 그것이 해답이고 이것이 복음이다.
사마리아인들은 “네가 말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에 구주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이제 누가 말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친히 보고 듣고 만지고 우리의 구세주이신 줄 우리가 믿는 것이다.
예수 밖에 누가 이런 인간이 있는가! 또 있으면 나와 보라!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영원한 평화이시고 어둠 가운데 빛이신 주님! 우리 속에서는 영원히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데 주님이 친히 답이 되시고 주님이 친히 답을 우리에게 가져 오셔서 나의 모든 것을 대답해 주신 분이 계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앞으로 우릴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