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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까지 4차례에 걸쳐서 풍수지리와 함께 이 땅 이곳저곳의 명당터를 찾아보았다.
큰 명제는 조선의 8대 명당터였지만, 어디 보는 시각에 따라, 나름대로 갖추어진 풍수에 대한 지식과 입장에 따라 딱히 결정하기가 어려운지라 말도 되지않는 VIC 5 外 Bic 10을 가려내어 15곳과 추가 2개소, 처음 풍수지리를 얘기하면서 명당의 형태론에서 다루어진 양택 11곳과 음택 12곳을 모두하면 중복되는 3곳을 제외해도 양택 11곳과 음택 26곳의 나름 명당이라 불리는 곳 37개소를 소개해 보았다.
그래도 이 글을 읽는 울 카페의 회원들의 입장에서라면 나의 성(姓)씨가, 우리 마을이나 내 고향은 우째 없냐고요?? 헹여 서운하면 우짤꼬? 하여 명당이라 불리우는 몇 곳을 더 소개하면서 조선의 명당에 대한 에피소드의 글을 맺을까 합니다.
◈서울지역(강북/ 강남 順)
1)벽진이씨 충숙공 이상길묘: 서울 노원구 중계로 57, 충숙공원 내
- (주차: 노원구 하계동 251-9, 하계동 공영주차장-> 도보 500m.)
: 이상길(1556~ 1637, 82)공은 선조18년(1585) 문과 급제해 벼슬길에 나온 후, 광해군 때 은둔하였다가 인조반정 후 다시 출사해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영위사가 되어 81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이듬해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로 몰려오자 아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생을 마쳤다. 이러한 충절로 ‘충숙공(忠肅公)’이란 시호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하계동 충숙공원은 벽진이씨의 세장지로 구릉에 따라 가문의 분묘가 줄지어 있는데…
이유번(증조부), 석명(조부/守한성부참군), 희선(부친/선조 때 진사,동몽교관), 이경(坰/차남/인조 때 정언, 강진현감)이 모두 이 곳 묘역에 있다.
공은 궁중화가 김명국이 그린 두 벌의 초상화를 남겼는데, 한 벌은 원작의 모본(模本)으로 보물 792호, 전남 남원 덕과면 사곡리 벽진이씨 충숙공 영당에 있고, 다른 한 벌은 이모본(二模本)으로 유형문화재 69호로 현재 하계동 선영 東川齋 뒤 忠影閣에 보관되어 있다.
♠Tips: 한글 옛날비석, 영비(靈碑)를 아시나요? (한글비석로 202, 공원입구->도보 500m)
: 성주이씨 이문건(1494~ 1567)이 가문을 찬양하며 부모의 유덕을 추모하여 1536(중종31년) 세운 최초의 한글로 세운 묘비로 부친 이윤탁(1462~ 1501)의 묘에 설치하였다.
이윤탁은 연산조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權知: 과거에 합격 후 보직발령 전)에 있으면서 그 해 12월 질병 으로 사망하였다. 현 무덤은 고령 신씨부인과의 합장묘이다.
이문건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1513년 사마시 합격, 1528년 별시문과 병과 급제하였다.
승정원 주서로 보직되고, 장령, 판교 등을 거쳐 승지에 이르렀으나, 1545년 명종 때 소윤 윤원형이 일으킨 을사 사화 때 대윤일파로 지목되어 성주로 23년 간 유배된 후 죽었다.
고비의 내용은 "신령(神靈)스러운 비이니 거스르는 사람은 재화(災禍)를 입을 것이라. 이는 글 모르는 사람 에게도 알리노라"라는 뜻으로 묘비 및 묘역의 훼손을 경계하였다.
본래 태릉址에 있었으나 능 조성 때 이전한 것으로 현재 보물 1524호 지정되어 있다.
♠Tips: 한글을 비석 등에 금석문형태로 남긴 유물은 많지 않다. 비슷한 형태의 석비로…
포천 인흥군묘 및 신도비(향토유적 28호, 포천 영중면 양문리 산18- 6) 입구에 있는 비석으로 아들 낭선군이 부친의 묘를 해(害)할까 두려워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문구는 “이비가 극히 녕검하니 성심도 사람이거 오디말라” 즉 “이 비석이 극히 영검하니 당신도 사람이거든 해 하지마라”란 의미이다.
2)함양여씨 여계(稽)묘: 구로구 고척동 산6- 3, 덕의공원 내 (유형문화재 80호).
- (주차: 구로구 고척로 212, 공영주차장 -> 도보 약 300m)
: 함양여씨 10세조, 조선개국공신 정평공 여칭(稱)의 장남 여계(稽)와 부인 청송심씨묘.
여계(稽) 이후로 자손이 번창하였는데, 공은 5남을 두어서 오늘날 함양여씨의 대부분으로, 공의 손자 여자신과 증손자 여윤철은 조선 최초의 부자 청백리로 가문을 빛냈다.
묘역에는 숭의랑공의 묘가 위쪽, 아래에 부인 청송심씨의 묘가 있다.
숭의랑공은 조선 전기의 인물로 태종 때에 호조좌랑,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1421(세종 3년)에 세상을 떠나서, 세종 10년(1428) 이곳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묘역의 총 면적은 1025㎡이며, 조선 전기 묘제를 알 수 있는 분묘 양식이다.
3)궁동 안동권씨, 정선옹주묘: 구로구 궁동 54- 2, (정선옹주묘 外)
- (주차: 묘역입구 적당한 장소 또는 구로구 오리로22가길 22 건너 주차장 -> 200m)
: 정선옹주(1594~ 1614, 21세/ 선조 7녀)는 권대임(1595~ 1645)과 혼인하여 현 궁동 67번지 일대에 큰 집을 짓고 살아 마을이름이 궁동이 되었다. 부마 권대임의 조부는 예조판서 권협(1542~ 1617)이고 부친 권신중(1575~ 1633/군수, 贈영의정)이다.
이곳은 ‘금계포란형’의 명당터로 주산 와룡산에서 좌우로 갈린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며, 가운데 남쪽으로 내려온 짧은 줄기가 정혈이다. 그 줄기에 8기의 문중묘가 집중되어 있다.
제일 상단에 권협과 최씨부인, 다음이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합장묘, 밑으로 부친 길흥군(吉興君) 권신중과 전주이씨 부인의 무덤이 있다. 더 밑으로는 외아들 권진(1613~ 1659, 돈녕부봉사:왕족관리부서, 종8품))과 부인 남양홍씨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권대임과 부친 권신중의 순서가 바뀌었는데, 권대임이 부마라 바뀌었다는 것보다는 이 묘역에 제일먼저 들어온 주인공이 바로 인근 땅 전부를 사패지로 받아 안동권씨 문중에 주고 정작 본인은 21세에 외아들만 남기고 요절한 정선옹주란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묘역 아래로는 저수지까지 자리한 완벽한 명당터로 자리매김하였다.
♠Tips: 정선옹주와 포천 한글경고비의 주인공 인흥군은 친남매로 10살 많은 누이다.
4)순흥안씨 묘역: 금천구 독산로 36나길 63, (묘역입구 주차장)
: 묘역에는 려말선초 문신인 양도공(良度公) 안경공(安景恭: 1347~1421)을 비롯하여 그 후손들의 묘 다수가 크게 세 곳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분포되어 있다.
양도공파는 안경공이 파시조이며 안경공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 한성부판윤(서울시장), 대제학(장관급 국립대총장) 등 높은 벼슬을 지내며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다. 아들 안순(純/ 세종조 호조, 공조판서, 찬성)과 손자 안숭선(崇善/ 세종조 예문관대제학), 안숭효(崇孝/ 세조조 대사헌) 등이 모두 벼슬길에 오른 중요 인물들이다.
안순은 안숭직, 안숭선, 안숭신, 안숭효의 네 아들을 두었는데, 현재 이 묘역에 주로 안장되어 있는 인물들은 안숭효의 후손들이다. 안숭효의 세 아들은 안겸, 안눌, 안해이며 다시 안해의 후손으로 안존도, 안존의, 손자 안혼, 증손자 안극인 등이 안장되어 있다.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역은 크게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①신흥초등학교와 접하는 구릉에 안순과 안숭효의 묘가 있는 구역,
②추모재의 남쪽 구릉에 안경공과 안숭선의 묘가 있는 구역,
③가장 남단 구릉부에 안존도(돈녕부참봉)와 안해(회양도호부사), 안존의(용안현감), 안혼(이조참판), 안규(충좌위부사직), 안후천(홍문관 부정자), 안눌(통정대부), 안극인(곡성현감)의 묘가 있다. 현재 묘역 내 석물로는 조선시대 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인물에게만 세울 수 있었던 3기의 신도비(양도공 안경공, 안순, 안숭선 신도비)가 있으며, 문무인석 8기 및 장명등 3기가 있다.
5)덕수이씨 묘역: 관악구 낙성대로 42. (묘역입구 주차장, 덕수공원 내)
: 이변(李邊, 1391~ 1473(성종 4), 본관 덕수(旧개풍), 충무공 이순신의 5대조 이다.
시호 정정(貞靖), 공은 늦게 글을 읽어 30세가 넘어 1419년(세종 1) 문과 급제하였으나, 성품이 강직하고 한학에 정통해 대명외교일을 40여 년 동안 관장한 중국통이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공조판서, 판중추원사를 역임하였으며,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됨.
1457년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뒤, 공조판서, 지중추원사, 판중추원사를 지냈고,
1467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며, 1472년(성종 3)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473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작고하니, 향년 83세였다.
두 아들을 두었고 장남 봉례공 효조(孝祖), 차남 판관공파 파조 효종(孝宗)으로 충무공은 장남 봉례공 효조의 직계 고손(高孫)이 되신다. 묘역 내에 차남 효종의 단(壇)이 있다.
♠Tips: 길 건너편에 고려 강감찬장군 탄생지인 낙성대공원이 있다.
6)동래정씨 임당공파 묘역: 동작구 사당동 산32-83, (9대정승 배출터)
-(주차: 사당솔밭도서관에 주차 가능하면 그곳! 안되면 사당5동 성당 부근 적당히!!)
: 묘역 내에 임당 정유길의 임당시조비를 비롯해 아들 좌의정 정창연(신도비, 묘), 손자인 병조판서 정광성 (신도비, 묘)가 유형문화재 61, 62, 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곡 정광성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정태화(영의정), 3남 정만화(예조판서)가 묘역 내 함께 있으며, 정태화의 아들 5형제 중 장남 정재대(공조참의), 3남 정재항(양주목사)이 있다.
이 외에도 한계공 정재한(정만화의 차남), 정창연의 차남으로 정광성의 아우 정광경(이조참판), 그의 장남 정지화(至和/ 찰방), 손자 정재후(능주목사) 등의 묘가 선영 내에 재실(상덕재)와 사당(회현사) 뒤쪽 좌우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Tips: 건너편에 유형문화재 94호로 전주이씨 함풍군파 묘역(효간공 이정영, 1616~ 1686/ 인조 한성판윤 7회, 이조판서, 기로소에 들다.)이 있다.
7)목천상씨 상진(尙震) 묘, 신도비: 서초구 방배동 1002, (상문고 내, 유형문화재 60호)
-(주차: 서초구 명달로 45, 02-3472-6411 남도주차장 -> 신도비와 곧바로 이어짐)
: 松峴 상진(1493~ 1564, 72세), 본관 목천,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 급제하면서 출사.
1533년 대사간, 부제학을 역임하고, 그 뒤 형조참판, 경기관찰사가 되어 잘 다스렸다.
1539년 특진으로 형조판서가 되어 탄핵을 받기도 하였지만, 대사헌, 한성부판윤, 공조판서가 된다.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조판서, 우찬성에 이어 형조판서에 임명 되었으나 윤원로와 결탁한 혐의로 인종이 즉위하자 좌천되었지만, 곧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병조판서로 중용되고, 1549년 우의정에 올라 15 51년 좌의정에, 1558년 영의정에 오르면서 1563년까지 3정승을 두루 역임하며 15년간 국정을 총괄하였다.
재임 중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고, 좌의정 이준경과 사림 등용에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 기로소에 들어갔고, 궤장이 하사되었다.
청렴, 인자한 명상으로 신망이 두터웠으나, 만년에는 이기, 윤원형 등 소윤파와 어울리며 사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5년간 재상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의 3대 재상의 한 분으로 불려지며 황희, 허조정승 다음가는 정승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묘역 내에 공의 내외분 묘소(쌍분)와 신도비 및 후손들의 묘가 있다.
8)창녕성씨 상곡(桑谷) 성석인(1357~1414)묘: 서초구 우면동 산63. 형촌(荊村)마을.
-(주차: 서초구 성촌7길 16, (신도비와 공덕비 앞) -> 묘소진입 철책우회? )
묘역은 신도비 뒤편으로 보이지 않는다. 2011년 7월, 이곳 형촌마을에서 일어난 우면산 산사태로 16명이 희생된 후 이곳 묘역도 철책으로 보강되어 진입이 더 어렵게 되었다.
: 려말선초 문신, 초명은 석연(石연)이었으나 국왕과 휘(諱)가 같아 석인(石因)으로 개명.
창녕(昌寧)부원군 성여완(汝完)의 3남 중 막내로 석린(石璘), 석용(石瑢)의 아우이다.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 고려 때 지평, 경연강독관을 역임하다가 조선왕조에 이르러 강원관찰사, 충청관찰사를 거쳐 경연관, 사헌부대사헌, 예문관대제학과 형조, 호조, 예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예조판서로서 조정의 일을 의논 중에 졸도하여 순직하였다.
묘역 내에는 부인 서산유씨, 아래로 후손으로 추정되는 성급지(중추부사)와 청주 한씨부인이 있으며, 묘역 입구에 신도비와 함께 서있는 비석은 후손(?) 학정 성창호의 공덕비이다.
♠성여완(1309~ 1397): 고려충신, 정몽주 살해되자 포천 왕방산에 은거한 왕방거사.
♠독곡 성석린(1338~ 1423): 개국공신, 하넝부판사, 평양부윤, 우정승, 좌정승 역임.
♠회곡 성석용(1352~ 1403): 개국 원종공신, 개성유수, 대사헌, 대제학 역임.
※왕방거사 3아들의 호(號)가 독곡, 회곡, 상곡으로 함께 불러 삼곡(三谷)이라 한다.
상곡의 두 아들 성엄과 성억의 자손들 중에서 성현, 성수침, 성혼 등이 나왔는데…
▶長男성엄(세종, 동지중추원사)=> 長子성염조(세종 한성판윤->子성현), 次子성봉조(세조 우의정): 문산 내포리 선영.
▶次男성억(태종 좌찬성)=> 딸 성녕대군부인, 성득식(한성부윤)=> 성충달(현령)=> 성세순(중종 이조참판) => 청송 성수침(조광조 제자로 기묘사화에 낙향)-> 우계 성혼(성리학大家, 동국18현): 파주 향양리 산8- 1. 상곡공파 종조 이외는 거의가 문산에 자리하고 있다.
성여완의 아들들 삼곡 중에서 장남 독곡보다 회곡과 상곡의 후손 중에서 더 많은 충신과 문신들이 배출되었는데, 불사이군 만고의 충신 성삼문은 차남 회곡의 증손자였다.
9)광평대군파 묘역: 강남구 수서동 산10-1 (전주이씨 왕족 묘역).
-(주차: 수서공영주차장(5분: @100원) -> 도보 묘역 정문 1Km)
: 묘역에는 세종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과 부인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신씨(申氏)의 묘를 비롯하여 태조의 아들인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광평대군의 아들인 영순군(永順君, 영의정)을 비롯한 종문 700여기의 묘소가 같이 있다.
무안대군 방번은 후손이 없는 관계로 부왕 세종의 명에 의해 봉사손이 되어 오늘날까지 문중에서 같이 모시고 있다. 이곳은 종가 재실(齋室)의 오랜 가옥이 있는 공동 묘역으로서 이곳 마을이름을 궁말[宮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묘는 처음에 경기도 광주 서촌 학당리(현 강남구 삼성동 선릉 부근)에 있었는데 연산 원년(1495) 3월, 성종의 왕릉 선릉(宣陵)터로 정해지면서 광수산(光秀山) 현 위치로 이장했다.
이곳의 차례를 살펴보면…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세일제(歲一祭)로 향사를 지낸다.
매월 묘하(墓下)의 자손들은 삭망제(朔望祭)를 윤번으로 거행한다.
춘추제향, 즉 시향(時享)은 음력 2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 지내던 것을 정성왕후(貞聖王后: 성종계비, 선릉) 승하일과 겹쳐 1757년 이후 춘향을 음3월 15일로 조정하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데, 묘역 안에 지은 도청(都廳)에서는 정초, 한식, 단오, 추석에 사절일(四節日) 차례를 지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Tips: 입구 우측 수서성당 옆에 광평대군 종손이 운영하는 한정식 ‘필경재(必敬齋)’에서궁중요리를 맛볼 수 있다. 후원에 녹천 이유 선생의 신도비가 있는 등 전통건조물 1호로 지정된 한옥으로 후원을 통해서
12만 5천평의 광활한 광평대군 묘역으로 나갈 수 있다.
여기까지가 서울지역에서 명당터로 불리는 곳들 이었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모두가 서울이 아니었지만)
조선팔도의 버금 명당터가 서울, 경기에만 있을리 없지만 일단은 방문을 한다해도 가까운 곳을 먼저 찾을 수 있기에 여기부터 정리해 들어가기로 했다.
다음 야그 소재는 경기도 동북지역, 서남지역 순으로 더 찾아보고 나머지 지방에 있는 명당터에 대해서는
몇몇 반드시 소개가 필요한 터 이외에는 묘소명과 위치만을 갈음하면서 정리를 끝내고자 한다.
그래서, 이번 야그는 서울의 명당터로 여기까지임돠. - 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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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식집 필경재가 어디 있나 궁금했는데..
알토란같은 강남 지역 12만여평 대지에..헉~
음식보다도
그 분위기에 더욱 매료됐단 말이 맞군요.
조오 방배동 궁금했던 곳들이 바로 명당터로군하~^^;;
아무나 들어가 볼 수 있나요?
아무렴요~ 효령대군의 청권사는 오후 5시까지, 물론 요즘 시대에 발맞추어 토, 일, 공휴일 휴관.
입장료 꽁짜!! 묘소, 사당(청권사), 기념관이 있고요, 정원이 딥따 좋아요....
목천상씨도 다 있군요. 성이 "상" 씨 이신분 한번도 만나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언냐!!! 그래도 이 분은 성씨는 '상(尙): 오히려 상' 이지만, 같은 발음의 '상'씨로는 象(코끼리 상), 桑(뽕나무 상), 相(서로 상)씨도 있다네요.... 기래도 喪(죽을 상)이 아니니 그거이면 되았지 싶습니다...
일설로는 고려 왕건이 통일 후 尙씨들이 말을 안들어서 "앞으로는 '象'으로 부르라!!" 했는데, 다시 찾은 성씨랍니다. 그래도 85년 인구조사 때 1700여 가구로 목천에 집성촌도 있으며 성씨순위 142위
즐거움으로 잘 읽습니다
고맙습니다~~
흠~~~사당동은 꼭한번 가봐야하는디~~~~ㅎ
언냐는 갈 곳이 넘 많으시겠어요.... 사당동, 군포, 경북 영천, 부산 화지동.... 일단은 시내에 한 번 나가실 때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입구에 있는 '회동대감址' 거기 서있는 노거수는 알랑가 몰라~~~
좋은자료에 감사감사...
읽기도 쉽잖은데 이 방대한 자료를 언제 다 조사하시는지, 또 글로 쓰시느라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을지 짐작하고도 남는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고 또 거맙습니다.
쇳대는 푸시고..ㅎㅎ
내꺼까정 걸리네.ㅜㅜ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7.20 11:46
남편이 효령대군파라 늘 양반 쌍놈 저희는 말로써 싸웁니다
효령대군능을 한번 가 봐야겠습니다 시간이되면요
쌍놈이 더 인간답게 살았다고 씌우는 저와 왕족 양반을 늘자랑질 해대는 남편과요 ㅎㅎ
오늘도 이 많은 자료를 준비하시고 정리하셔서 바쁘신데 올려주셔서많은 모르던 것도 알게되어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언니와 알콩 달콩 행복하시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