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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시골 촌놈이, 미국에서 가수가 되고 코미디언이 되고, 마침내 자기 이름을 내걸고 NBC 쇼 MC가 되기까지의 대인생역정!
* 선인장은 사막에서 사는 식물이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사막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식물이다. 사막에서 사는 것이 당연한 선인장이 꽃 한 송이 피워냈다고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아니, 적어도 덜 겪은 사람들이다. 밑바닥에서 하늘 높은 곳으로 비상(飛上)하길 원하는 사람들,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는 사람들이 지고 가야 하는 삶의 무게를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다. 그 인내와 고통의 시간들을 말이다. -자니 윤(한국계 미국 할리우드 연예인)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이다.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인간에게 불가능은 뛰어넘어야 할 하나의 장애물일 뿐이다. 수십 번 발을 굴리다가 장대 높이 뛰기를 하듯 훌쩍 장애물을 뛰어넘고 나면 거기에는 분명 또 다른 환희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장대에 몸을 의지해 공중을 비상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싶은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는 나의 꿈. 나는 한도 내 꿈을 남들에게 말해 본 적이 없다. 내겐 너무 소중한 꿈이 그들에겐 한 동양 남자의 허황된 욕망으로 비춰질까봐 그게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니 윤
* 어쩌면 늘 외롭고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나를 소외시킨 게 아니라, 내가 세상 전체를 소외시키고 살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를 주지도 않았는데 상처받을 것을 먼저 염려하고, 그래서 벽을 쌓고, 그 안에 갇혀 외롭다는 호소조차 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억누르며 지냈던 시간들…. 단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먼저 벽을 쌓고,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뉴욕에서의 4개월은 그렇게 자기 방어에 충실했던 시간들이었다.
* 세상일이라는 게 참 묘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을 때는 돈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돈이 생겨도 시간이 없으니까 소용이 없었다. 필요할 때, 그리고 간절히 원할 때 돈과 시간이 한꺼번에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럴 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몸을 강제로 적응시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돈과 시간을 동시에 버는 일이 아닐까.
* “아버지, 어머니. 기다리지도 말고, 걱정하지도 마세요. 제 꿈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세요.” 고향을 떠날 때 나는 그렇게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나왔다.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니, 부모님 가슴에 그렇게 못을 박으면서까지 미국으로 와야만 했던 그 꿈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무슨 꿈이 그리 대단하고 거창해서 꼭 미국이 아니면 안 되는가. 비정한 나를 누군가 이렇게 힐난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겐 이 길이라고 생각되는 자신만의 길이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가지 않을 수 없는 길,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시작은 내 의지였지만, 결국은 운명의 힘이 나를 미국으로 불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미국 땅에 내가 발을 붙이고 살게 된 과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하지만 돈과 시간은 그렇게 어긋나면서도 결국은 맞물려간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돈과 시간의 어긋남과 맞물림 속에서 자신의 몫을 챙기려는 싸움 같은 것은 아닐까?
* 돈도 벌어야 하고, 배우학교도 다녀야 하며, 성악 공부도 해야 하고, 재즈도 배워야 하고…. 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없다. 이 모든 일들을 내가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니, 발버둥친다고 해서 내 꿈을 이룰 기회가 정말로 찾아와줄지도 의문이다. 내가 혹 가망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스물아홉, 보통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자기 삶의 둥지를 준비하는 나이다.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신혼의 단꿈을 꾸고, 아이를 낳고…. 그런 삶의 방식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은 상식적인 삶의 궤도를 일탈한 내 삶의 두려워지기도 한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그 길 끝에서 낙오자가 되어 있거나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 도중에 주저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봐 겁이 나는 것이다.
*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결심을 상기해본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텅 빈 아파트에 혼자 남아 나는 다시 한번 그 결심을 마음에 새긴다. 여기서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어느 곳에 가서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절대로 비껴가지 않겠다고. -자니 윤
* 술집 안의 모든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듯 몸을 좌우로 흔들며 웅장하게 볼레로를 열창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전율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살아온 배경, 생긴 모습, 살아가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지만, 이렇게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모두 하나가 되는 것. 이 일체감이야말로 노래가 지닌 가장 큰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기회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곳에서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술집에서 그냥 따라 불렀던 볼레로 한 곡 때문에 졸지에 한국에서 온 가수가 되었고, 아리랑을 부르고 앵콜곡으로 이탈리아의 정서가 흠씬 배어 있는 마티나타를 부른 덕분에 가수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무명가수로의 첫 출발. 비록 시작은 초라했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불가능하지 않구나! 노력하면 해낼 수 있겠구나! 나는 그렇게 내 꿈을 향한 한발을 성큼 내딛고 있었다.
* 서울대 음대 진학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끝내 좌초되고 말았다. 꿈이 좌절당한 내게 남은 희망은 한 가지뿐이었다. 오페라 가수가 되지 못한다면 영화감독이 되겠다! 지금이나 그때나 영화감독 데뷔가 얼마나 어려운데, 열아홉 까까머리가 참 야무지고 옹골찬 꿈을 품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허풍이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비록 소도구를 나르는 심부름꾼에 불과하긴 했지만, 잠깐이나마 영화사 물을 먹어본 경험이 있는, 완전 문외한은 아니었던 것이다.
* 해군에 지원하면 외국으로 나갈 기회가 생긴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주워듣고 두 번 고민할 겨를도 없이 덜컥 군 입대를 결정해 버렸다. 거기는 자유 시간이 많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언젠가 미국에 가게 될지 모르니 미리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들 그런 나를 이상한 놈으로 여기며 흘끗흘끗 쳐다봤지만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미국에 갈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운 좋게도 주한 미군에게 무료로 영어 회화 레슨을 받았다.
* 아리랑말고 아는 노래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외국인이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면 어김없이 아리랑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한과 슬픔의 미학,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주는 존재의 뿌리…. 아리랑에는 그런 민족적인 정서가 깃들여 있었고, 나는 그날도 앤더슨 부인 앞에서 구성지게 아리랑 고개를 넘었다.
* 그때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튼튼한 몸과 프리다 여사가 보내준 왕복항공권, 미화 백 달러가 전부였다.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므로 내게는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떠남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에 도전하는 것만큼 인생에서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내 나름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신앙과도 같은 자신감이었다. 그토록 겁 없이 당당하게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에 인생의 도전장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자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 내게는 10년의 세월이 가르쳐준 값진 교훈이 있다. 다름 아닌, ‘기회는 노력하고 준비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인생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최대의 무기는 성실함이다. 성실함으로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도약의 발판으로 이용할 수 없다. 그 교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래서 오늘도 뉴욕 거리를 힘차게 뛰어다닌다.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더 멋진 기회가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와줄 거라는 믿음과 준비하면 언젠가는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안고 말이다.
* 나와 결혼한 다이앤은 성대가 막혀 오페라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한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착한 줄리어드 음대를 나온 나무랄 데 없는 미국 여자였다. 그러한 다이앤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고, 한 남자의 아내로 살겠다는 나에게 고백을 했다. 또한 나도 불법체류자가 될 위기에 처해 있어 미국 시민권을 가진 여자와 가능한 빨리 결혼하는 게 필요했다.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시민권을 받아야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좀더 근본적인 이유에서 우리의 결합에는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인종과 다른 뿌리,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되는 이질감과 거리감. 그것은 굳이 유대인인 상대방의 부모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당사자들조차 쉽게 극복하기 힘든 두렵고 불안한 출발이었다.
* 우리가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식당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손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봤다. 피부색 때문이었다. 선택을 해도 다이앤은 피부가 하얀데, 유독 까만 나를 다들 동양계 흑인쯤으로 본 것이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고함을 버럭 지르고 말았다. “누가 보는 거야! 화이트는 색깔이 아냐?”
* 여전히 든든한 친구인 제임스는 어느날 뜻밖의 의견을 내놓았다. “종승은 앞으로 연예계로 나갈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사람들이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좋겠지. 그래! 자니가 어때? 종승과 발음도 비슷하잖아?” “자니요? 자니라…. 자니 윤! 괜찮은데요.” “오케이? 좋아! 그럼 지금부터 종승은 자니야. 자니 윤의 성공을 위해 건배!” 자니 윤으로서의 새 출발. 짧지만 행복했던 다이앤과의 결혼 생활이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비로소 미국 시민으로서 당당히 권리와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것이었다. 뉴욕에 온 지 정확히 2년 만이었다.
* 진짜 가수가 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은행과 엑소더스 술집 일만으로는 돈이 부족하여 보석 센터의 파트타임 세일즈맨으로도 일을 해야 했다. 나는 짬만 나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그날도 보석 가게에서 노래 연습에 몰두해 있었다. 그런데 노래 한 곡을 마치자, 난데없이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점잖게 생긴 노신사 한 분이 진열대 앞에 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가수에 대한 나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듣은 그는 그 자리에서 4천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 내게 주었고 11캐럿짜리 노란 케네리 다이아몬드까지도 사주었다. 유대인인 그는 에미얼 카프만으로 어린 시절 폴란드에 살다가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는데, 어린 나이에 시카고 도살장에서 고기 운반하는 일을 시작으로 해서 뉴욕 뉴저지에 소시지 공장을 세우고 지금은 백만장자가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돈을 많이 벌고 나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의 아내가 암으로 죽어간다는 데 있었다. 지금 사가는 다이아몬드 역시 아내에게 줄 선물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는 물론 내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나는 카프만의 그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꼭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잊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 나는 그를 하나님이 내게 보낸 ‘천사’라고 믿기로 했다. 간절히 구하는 순간, 기적처럼 나타나 도움을 주는 인간의 모습을 한 천사. 비단 카프만뿐만이 아니다. 프리다 여사와 비글로 할아버지, 제임스 라텔라와 프랭크 우드까지도 다 내게는 ‘천사’들이 아니었을까? 가진 것 없는 내게 그런 천사들을 보내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나는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렸다.
* 장거리 공연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출 무렵 나는 16개 국어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 노래는 물론이고,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유대어, 중국어, 일본어 노래까지 레퍼토리가 다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대단한 오기와 집념으로 일군 성과였다. 따로 연습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일하는 틈틈이 밤늦도록 이어폰을 꽂고 잠들거나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연습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알고, 즐겨 부르는 노래는 유대어로 된 노래였다. 유대어 노래에는 우리가 한(恨)이라고 부르는 애끓는 듯한 슬픔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아마 압박과 천대를 받았던 유대 민족의 역사가 외세로 인한 수난의 역사로 점철된 우리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웃음을 참아내시느라 참 고생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동양 사람이어서 Love의 l과 r을 정확히 구분해서 발음하기가 아직도 몹시 힘이 듭니다. 하지만 프로페셔널 가수로 나와서 이런 실수를 하게 된 것에 대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 ‘This is my song’이 끝난 후, 나는 객석의 손님들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나로서는 그 말을 하지 않고서는 공연을 계속 이끌어갈 수가 없었다. l과 r 발음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가수의 노래를 누가 성심성의껏 귀기울여주겠는가? 차라리 내 입으로 먼저 실수를 시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솔직함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내가 말을 하는 동안 좌중이 조용해지더니,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우레와 같은 기립 박수를 보내주는 것이 아닌가.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 하나를 깨우치는 순간이었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꾸미지 않는 것, 그 진실한 모습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힘있고 아름다운 재산이라는 것을 말이다.
* 브릭만 호텔의 주인인 머뤼 포즈너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궈온 호텔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에게 주겠다고 했다. 그건 자신의 전부를 내게 주겠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게 상처를 주고 떠날 수밖에 없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할 운명. 끊임없이 더 넓고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 호텔이 아니라, 세상 전부를 준다고 해도 그런 내 욕망을 붙잡아 둘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히 바치지 못하는 삶,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내달려야 하는 삶.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을 포기하기에는 나는 자기애가 너무 강한 사람이다. 그것이 또 한편으론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런 자기애로 인해 어쩌면 평생을 외롭게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아들을 미국에 데려가서 공부시킨 사람이 예수교도라고 들었다. 내게도 성경책 한 권 다오.” 이것이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렇게 내 걱정을 하시며 성경책을 붙잡고 눈을 감으신 것이다. 그 길로 나는 교회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프리다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천국에서 꼭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너무 훌륭한 프리다 어머니, 너무 착한 우리 어머니. 그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함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 그렇게 마음이 든든하고 편안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어째서 이렇게 좋은 일하고, 착하신 분들을 일찍 데려가셔야만 할까? 참 무심하기도 하시다…. 한편으론 그런 원망의 마음이 일기도 했다. 착한 사람들을 먼저 데려가는 하나님. 하지만 그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아는 순간,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일찍 하나님 곁으로 간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죄를 다 지고 가는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잘살 수 있도록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바로 그 사랑과 순교의 정신처럼 말이다. 나의 두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것은 바로 그런 사랑이었다.
* 왜 떠나려고 하느냐고 하도 물어봐서 ‘영화도 찍어야 하고, 자니 카슨 쇼에도 나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다들 웃었다. 꿈도 야무지다는 뜻을 담고 있는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웃음 따위에 내 결심이 좌우될 리 없었다. 그들 말대로 나는 뉴욕에서 성공했다. 그러니 뉴욕은 더 이상 나의 꿈의 도시가 아니었다. 내게는 새로운 꿈의 도시가 필요했다. 할리우드! 그곳이야말로 영화 감독으로서의 내 꿈을 실현시켜줄, 또 다른 희망과 도전의 대지인 것이다.
* 미지의 세상을 향해 떠나는 일. 그것은 언제나 기대와 두려움을 동반하는 여정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인생에는 발전도 성공도 없다. 뭔가 특별한 인생을 원한다면, 정말로 성공하고 싶다면 이렇게 떠나는 일에 먼저 익숙해지고 이를 즐거워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겁 없이 할리우드로 쳐들어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준 뉴욕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할리우드가 어떤 얼굴로 나를 맞을지 자못 기대가 되면서 이렇게 아무 준비도 대안도 없이 떠날 수 있다는 게 마냥 즐겁기만 했다.
* 어쩌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순간이 꿈 같은 것은 아닐까?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은 좋은 꿈을 꾸다 가는 것이고,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은 악몽을 꾸다 가는… 죽음이란 것은 바로 그 꿈에서 깨어나는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이고.
* 미국에서 십여 년 살아왔다고 하지만, USA 태생이 아닌 내겐 아직도 그들만의 독특한 유머 표현법이 단숨에 입력되지 않을 때가 있다. 여전히 말 때문에 실수를 하고, 문화의 차이 때문에 좌충우돌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코미디언으로 진출해서 성공해 보겠다니? 어쩌면 그것이 더 웃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삶을 변화, 발전시키는 중요한 변수는 언제나 한번쯤 뒤집어서 생각해보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그것이야말로 내가 남들과 차별되는 거의 유일한 무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 세상 읽기. 변시능ㄹ 시도할 용기를 얻은 것 또한 그 대목이다. 이방인이라는 것이 코미디언으로 데뷔하는 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남을 웃겨본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뉴욕에 있었을 때 나는 ‘엑소더스’에서 노래한 경험을 살려 유대 노래 12곡을 앨범으로 취입한 일이 있었다. 홍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판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채 레코드 가게 한 구석에서 먼지와 함께 묻혀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브로두웨이에서 쇼 평론을 하는 슈트 클라인이라는 유대인이 내 앨범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내 앨범을 대중적으로 평가해 보고자 채널 5 뉴스에 나를 초청해 했다. “궁금한 것이 있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한국에서 왔는데, 어째서 맨처음 내 앨범이 히브리(Hibri)어와 주이시(jewish) 말로 된 앨범이냐?”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내 입에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제어할 사이도 없이 튀어나갔다. “그게 히브리어였나요? 나는 영어인 줄 알고 불렀는데….” 나는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단순한 농담이지만, 내가 동양 사람이기 때문에 웃기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찌되었건, 나는 그 농담 한마디 덕분에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내 앨범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판매 수입까지 짭짤하게 챙길 수 있었다.
* 앨범의 주가가 오르면서 텔레비전 쇼에 초청이 되었다. 10개국의 노래를 메들리로 선보였는데, 노래가 끝나자 금발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질문을 했다. “자니, 왜 대니시 노래는 안하는 거죠?” 아마도 아가씨는 덴마크 출신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대니시(Danish)가 덴마크를 가리키는 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의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나는 대니시는 먹어도 노래는 안합니다.” 그러자 좌중이 난리가 났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휘파람을 부는 사람, 넘어갈 듯이 웃어대는 사람들. 그 뜻밖의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서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은 나와 금발의 아가씨뿐이었다. 당연하다. 대니시는 먹기만 한다니!잘못하다간 따귀를 맞을 뻔한 대답이었다. 미국에서 대니시는 빵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한 것인데, 오해를 하자면 대니시 여자와는 즐겨도 노래는 안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내가 정말로 몰라서 실수를 한 것으로 다들 알아주었고, 그래서 무사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 같은 말도 두세 번 꼬아서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기지와 독설이 번뜩이고, 어떤 급박한 상황에서도 기상천외한 유머를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들. 미국인들은 생활 자체가 곧 유머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웃기기가 쉬울 것 같은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웃기기가 힘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에 종종 웃음을 터뜨려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아마도 내가 자신들과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생김새부터 사고방식까지, 말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자신들과 다른 데다가 또 종잡을 수 없이 아슬아슬하고 엉뚱하기 때문에, 그 신선함이 그들로 하여금 쉽게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 것은 아닐까? 스스로 웃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별로 안하고 살아온 나에게는 그런 이유가 아니고는 내가 웃기는 사람이란 특별한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 내게는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내 스타일대로 밀고 나가는 줏대와 솔직함이 있었다. 그것은 장점이자, 최대의 단점이기도 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연기자가 되기에는 성격적으로 어렵다는 뜻이다. 평범하고 밋밋한 이미지이지만 개성이 강한 연기로 승부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맞는 연기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부딪쳐보면 또 잘 안 되는 것이 연기이기도 하다. 연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새삼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 에나멜 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빨간 스포츠카의 유혹에 팔려 몇 년째 분신처럼 끌고 다니던 캐딜락을 중고시장에 덜컥 팔아버렸다. 나의 새 애인은 공연 리허설을 향해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어둠이 내리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고, 어떤 위험의 신호가 느껴진 것도 아닌데, 한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고 말았다는 아득한 느낌과 함께 필름이 툭 끊기고 말았다. 아니, 사실을 그것조차도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있었다. 눈을 떠보니 병실이었다. 내가 왜 누워 있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자못 흥분한 어조로 상황을 정리해준 사람은 담당 경찰관이었다. “과속으로 달리던 차가 뒤에서 들이받았습니다. 당신 차는 언덕 아래로 굴러서 완전히 박살이 났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최악의 상황에서 머리에 혹만 하나 생겼을 뿐 찰과상 하나 입지 않은 채로 살아났어요. 자니, 당신은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오. 죽다 살아난 거란 말이오.”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니? 기억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텔레비전 드라마 공개 오디션 전날 이런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 문득 기념품 가게를 지나가다 문득 가슴을 찌르는 몇 줄의 글이 새겨져 있는 널빤지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알코올 중독자를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아량을 주셨고, 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셨으며, 그 일이 바뀔 수 있는 일인지 없는 일인지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나는 지난 밤 목숨을 잃을 뻔했다. 적어도 불구가 되어 다시는 무대 위에 서지 못하는 불운한 처지에 놓이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난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기는커녕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어 불평 불만만 늘어놓은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오디션을 보지 못하는 것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던 일인 것이다. 나는 10달러를 주고 그 그림을 샀다. 알코올 중독자는 아니지만, 삶에 깨달음을 안겨준 글을 늘 곁에 두고 순간 순간마다 나를 일깨우는 금언으로 삼고 싶었다.
* 잘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능력이 출중해서인 것으로 알고, 안 되는 일에 대해서는 세상 탓으로 여겨 불만을 늘어놓고, 최선을 다한 결과가 실패로 나타나는 것이 두려워 때로는 비겁하게 포기해버리고, 그러고도 늘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착각 속에 빠져 사는 삶. 혹시 지금까지 나도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 짧은 경구로 인해 나는 내 힘으로 가능치 않은 일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었다. 다만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작은 일들에 최선으로 매달리기로 했다.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늘 감하며 살아갈 일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외버스 정류장을 찾아 꽤 먼길을 걸어가야 했지만 시간이 아깝다거나 몸이 힘들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나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새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철학 하나를 얻었다. 세상을 좀더 여유를 갖고 바라볼 수 있는 눈, 겸허하고 성실하게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무욕(無慾), 바로 그것이었다.
*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는 ABC의 간판 프로그램, ‘자니 카슨 쇼’. 자니 카슨 쇼는 연예인이라면 누구든 한번쯤은 초청받고 싶은 프로그램이다. 자니 카슨 쇼에는 매주 짤막한 코너로 연예계의 새 얼굴을 소개하는 데뷔 무대가 있다. 무명의 신인들에게는 그 무대에 한번 출연해보는 것이 일생의 소원인 일이다. 자니 카슨의 한마디가 시청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혹독하긴 하지만 그의 평가 한마디를 얻어내는 것이 수백 번 밤무대를 전전하는 것보다 유명해지는 데는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나 역시 그런 무명 중의 한 사람으로 자니 카슨 쇼를 동경해왔다. 드디어 자니 카슨 쇼에 첫 출연하던 날, 내가 얼마나 긴장했고, 또 얼마나 감격했고, 기뻐했는지…. 그런데 오기로 했던 찰턴 헤스턴이 도착하지 않은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찰턴 헤스턴은 너무도 유명한 영화, ‘벤허’의 주인공이었던 배우다. 성동고등학교 시절, 영화 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내게 심어주었던 바로 그 영화의 주인공 말이다. 수십 년 전 영화 속에서 보았던 사람을 대신하여 쇼에 나가게 된 것이 내겐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급히 출연할 시간을 앞당겨 나가 5분 만담을 끝내고 노래까지 부르는 기회를 가졌다. 카슨은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르고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는 그런 나의 솔직한 토크가 맘에 들었는지 칭찬에 인색한 그였지만 그날만큼은 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관례를 깨고 나를 데려가기 위해 무대 중앙까지 걸어 나왔으며,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초청하라고 제작팀에게 특별히 당부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자니 카슨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날은 내가 세계의 중심에 서 있던 날이었다. 자니 카슨, 찰턴 헤스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던 순간, 나는 또 한번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과연 나는 세계적인 사람이 될 자격을 갖추었는가?
* 사랑은 사람은 의존적으로 만드는 나쁜 습성을 갖고 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어떤 일이건 혼자서 씩씩하게 잘 해냈는데, 그녀에게 길들여지면서 나는 혼자 있다는 것이 몹시 불안하고 우울해졌다. 급기야 필요할 때마다 내 곁에 있어주지 않는 그녀에게 화가 나 극단으로 치닫고 말았다. 끝이 난 것이다. 너무 아름답고, 너무 착하고, 너무 여려서 안아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여자. 내 차지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자격지심에 욕심조차 내지 못했던 여자, 그토록 어렵게 내 피앙세가 된 여자를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날려보내고 혼자 남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사랑이란 것이 너무 허무하고 순간적이다. 이렇게 쉽게 끝나버릴 것을, 모든 것을 바칠 것처럼 맹세하고 헌신했던 것이 우습고 씁쓸했다. 라스베이거스로 향할 때는 분명 둘이었는데, 왜 돌아갈 때는 혼자여야만 하는가?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고, 복받치는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다시는 그녀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슬픈 예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 메이저 영화사들을 상대로 한 소수민족 연예인들의 처우 개선 시위가 벌어진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당시만 해도 흑인들조차 영화에서 주연급으로 캐스팅되는 경우가 거의 없던 때였다. 백인 중심의 문화에서 하물며 아시안을 주연급으로 해서 영화를 만들 제작자나 감독이 있을 리 있겠는가? 설사 만들었다 해도 그 영화를 몇 명이나 보겠는가? 나 역시 이런 현실이 불만스럽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나 같은 소수민족 연예인은 조연이나 단역 이상은 절대 캐스팅되지 않는데, 왜 속이 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데모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한마디 충고를 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왜 저 사람들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라고만 있어야 하는가 라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될 것 아니냐? 아시안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모범과 선례를 남기는 것, 그것만이 터부를 깰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자니 윤
* 어느 날 뜻하지 않게 NBC 사장 프레드 실버만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자니 카슨 투나잇 쇼와 같은 소수 민족이 메인 스타로 진행하는 자니 윤 스페셜 쇼를 해 보자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다행히도 스페셜 쇼의 시청률이 높아지면서 나는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나는 NBC와 전속 계약까지 맺으며 돈과 명성,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한꺼번에 찾아오는 속성이 있는 모양이다. 소수민족의 연예인으로서는 거의 유일무이하게 스타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는 평을 받게 되었고, 어디를 가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슈퍼스타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이런 영예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드라마 ‘사위’의 장인 역할 연기자의 미숙한 연기에 화가 치밀어 그만 폭발하고 만 것이다. 나는 NBC 예능국 부사장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짐을 싸들고 방송국을 나와버렸다. 덕분에 드라마는 조기 종영되었고, 나는 NBC의 미움을 톡톡히 받으면서 다른 프로그램까지도 고스란히 반납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를 키워준 NBC에 큰 손해를 입히면서 관계가 아주 끊겨버린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나는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왜 그렇게도 경솔했을까? 잘 나갈 때일수록 겸손한 마음으로 좀더 인내했어야 했는데…. 순간의 실수로 NBC에서 누렸던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런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감정을 앞세운 경솔함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 이소룡 영화가 미국에서 한창 히트를 하고 있을 때였다. 길을 걷다 보면 내가 이소룡과 비슷하게 생겼는지 사람들이 자꾸만 나에게 ‘브루스 리’가 아니냐고 물어왔다. 아니라고 하는데도 자꾸 물어보는 것이 처음에는 성가셨는데, 나중에는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아, 이 사람들 눈에는 동양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이것을 영화에 한번 써먹어보자. 이렇게 해서 나는 영화 ‘데이 콜 미 브루스(THEY CALL ME BRUCE, 내 이름은 브루스)’의 자니를 탄생시켰다.
* 누구와 함께 일을 하든 영리를 바로보고 일을 할 때는 분배가 공평해야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법이다
* 영화 ‘데이 콜 미 브루스’는 처음에는 쇼핑 거리의 한 작은 소극장에서 그것도 ‘한 주먹의 젓가락’이라는 제목으로 초라하게 개봉해야만 했다. 처음으로 영화가 시작된 지 몇 분쯤 흘렀을까? ‘영화가 될지 안 될지는 지금쯤 결판이 날 것이다’라고 생각한 순간,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두 주먹에 힘이 불끈 쥐어졌다. 아, 됐다! 그때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중에는 큰 웃음소리가 극장 안을 가득 메웠고, 박수도 터져나왔다.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웃음. 나는 그 웃음으로 모든 것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그 청량한 웃음소리야말로 지난 2년간 흘린 내 땀과 눈물, 극도의 절망과 수치심으로 괴로웠던 날들에 대한 보상에 다름 아니었으므로. 영화가 좀 될 것 같은 기미를 보이자 배급 회사들이 하나둘씩 계약을 해 왔다. ‘한 주먹의 젓가락’이란 페러디 제목을 떼고, ‘데이 콜 미 브루스’로 원제를 찾아 드디어 극장 개봉을 하게 되었다. ‘한 주먹의 젓가락’이 ‘ET’라는 대작과 나란히 붙어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누구도 간판만으로 영화의 흥행을 보장할 수는 없다. 길고 짧은 것, 영화가 될지 안 될지는 극장에 붙여봐야 안다. 나는 ‘데이 콜 미 브루스’로 극장주들이 주는 공로상 격인 극장협회의 ‘올해의 연예인상’을 받았다. 또한 더 고무적이었던 일은 연예정론지인 <할리우드 리포터>에서 내 연기를 전설적인 코미디 배우 찰리 채플린과 ‘핑크 팬더’에서 개성적인 코미디 연기로 주목을 받았던 피터 셀러스의 캐릭터에 버금갈 만한 연기력을 내가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배급회사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때를 생각하면 몇 달 사이에 엄청난 반전이 일어난 셈이다. 흥행, 돈, 배우로서의 평가…. ‘데이 콜 미 브루스’는 그 모든 것을 내게 안겨주었다.
* 3월이 오고 ‘데이 콜 미 브루스’는 15주 상영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마침내 팍스 극장에서 내 영화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내 영화로 돈을 번 제작자 에드 먼토로가 그만 모든 수입금을 몽땅 챙겨서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단지 돈만 가지고 달아났을 뿐인데, 내가 찍은 작품까지도 고스란히 도둑맞은 것 같은 상실감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돈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처음 얼마 동안은 미친 사람처럼 배급회사와 은행, 변호사 사무실과 에드 먼토로의 집까지 쫓아다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짓도 접어버렸다. 회사와 집은 은행에 담보가 잡혀 있는 상태였고 빚쟁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마누라와 자식들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난 파렴치한이었다.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알코올 중독자를 위해 쓴 글’을 보며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은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아량을 주셨고, 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셨으며, 그 일이 바뀔 수 있는 일인지 없는 일인지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는 그 글귀.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에 더 이상 연연해봤자 마음의 병만 깊어질 뿐이었다. 어찌되었건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것이 나의 현실이고, 에드 먼토로처럼 세상 끝으로 사라질 수 없는 바에야 죽도록 일을 해서 이 불명예를 벗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 빚을 내서 영화를 찍는데, 부도 맞은 수표가 돌아왔다. 결국 촬영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스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서 중단하면 돈을 구해서 다시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몇 달이 걸릴지 모른다. 나는 고심 끝에 염치는 없지만 꽤 오랜 친분이 있는 스티브 샤퍼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어 임시로 10만 달러를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말이 10만 달러지, 한국 돈으로 1억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그런 큰돈을 담보나 계약도 없이 선뜻 꿔달라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날 저녁, 호텔로 돌아온 나는 서른여덟 살 이후로 한번도 입에 대본 적이 없는 담배를 두 갑이나 연달아 피워댔다. 어느 날 문득 목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하루 만에 가차없이 끊어버렸던 담배였는데, 그 날은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정말이지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처음으로 자살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지난 2년간 재기한다는 각오 하나로 절치부심하며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버텼는데, 이렇게 무너지고 나면 이것으로 내 인생도 끝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 죽어서 그 험한 꼴들을 보지 않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이튿날,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은행으로 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확하게 10만 달러가 내 구좌에 입금되어 있는 게 아닌가! 아, 이게 친구구나…! 와락 눈물이 솟구쳤다. 같은 피를 나눈 민족도 아니고, 재산이 많아서 언제든지 갚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닌데, 언제까지 갚아야 한다는 각서 한 장도 요구하지 않은 채 돈을 보내준 그 우정에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볼 수 있다라는 오래된 격언이 떠올랐다. 하루 사이에 구하기도 벅찼을 10만 달러를 보내주면서 전화 한 통도 걸지 않고 무심한 척 내버려두는 그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우정이자, 인간에 대한 진한 신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난 2년여 동안 나를 괴롭혔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그 순간, 말끔하게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래도 믿을 것은 사람뿐이다. 스티브는 바로 그런 희망을 내게 보여준 것이었다. 배신의 쓴맛으로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어내기도 했지만, 결국 스티브를 비롯한 친구들의 대가 없는 우정은 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그래도 희망은 사람이다’라는 소중한 교훈을 그들은 몸소 가르쳐준 것이다.
* 기금 마련을 위해 열리는 밥 호프 토너먼트는 미국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골프 대회이다. 난생처음 밥 호프 토너먼트에 참석한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역대 대통령에서부터 전용 제트기를 타고서 날라온 기업의 총수들, 영화 배우, 가수, 스포츠 스타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대도 다 알 만한 유명인사들이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엄청난 참가비를 내고 밥 호프 토너먼트에 참가한 것이다. 밥 호프는 일개 연예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통령이라도 영접하듯 대규모 리무진 행렬이 이어졌으며 경찰관들은 교통정리뿐만 아니라, 주차까지 솔선수범해서 도와주고, 근교 시민들로 구성된 자원봉사단은 얼굴빛 찡그리지 않고 청소와 뒷정리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나는 연예인의 힘이 이렇게까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문화와 풍토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해도 연예인을 광대나 딴따라 정도로밖에 대접할 줄 모르는 우리 나라와 비교한다면 엄청난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 수천 명의 유명인사들이 도원되고, 크라이슬러사를 통해 수백 대의 차가 무상으로 제공되고, 경찰관과 시민들까지 환호하고 봉사하는 대규모 페스티벌, 그것을 만들어내는 밥 호프는 일개 연예인이 아니라, 계층 인종간의 위화감을 뛰어넘어 모두를 하나 되게 만드는 미국의 힘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밥 호프의 힘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힘이자, 승리이기도 했다. 밥 호프가 비단 연예인이라서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든 연예인이든 장사치든 막일꾼이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라면 직업의 귀천 없이 존경하고 인정하는 문화와 풍토. 개척정신 하나로 아메리카 드림의 신화를 창조한 미국인들이 그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정신유산은 바로 이것이었다. 직업이나 빈부에 구애됨 없이 타인을 인정하고 존경함으로써 스스로도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문화를 정착시킨 것.
* 아직은 정치적으로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 한국. 어느 시인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했다지만, 그래서 젊은이들은 적대적 투쟁만을 부르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민주주의는 희생뿐만 아니라, 인간의 온갖 미덕을 먹고 자라나는 제도다. 예를 들면 인간에 대한 믿음, 존경, 예의, 배려, 중용, 그리고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웃음까지도 말이다. ‘민주주의와 웃음’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의식의 발로이겠지만, 그것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숙되었나를 엿보게 하는 내 나름의 바로미터이다. 웃음이라는 것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이 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기아선상을 헤매는 나라, 권력이 국민을 억압하는 사회에서는 웃음이 생겨날 수가 없다.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안정이 되었다고 하지만, 얼마나 웃음이 있는 사회인지는 각자 자문해볼 일이다. 대통령이 정치 조크의 주인공이 되든, 국무총리가 코미디언의 안주거리가 되든 웃으면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의 여유. 권력이 투명해지고, 세대간의 벽이 헐리고, 누구든 정치적 입장을 표현할 자유가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양념으로 웃음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다면 말이다.
* 88 서울 올림픽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4월, 나는 올림픽 추진위원회로부터 올림픽 선수촌에서 공연되는 축하 쇼의 사회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잠실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은 밥 호프, 브룩 실즈, 훌리오 이글레이시어스, 마이애미 사운드, 등 세계적인 슈퍼스타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십 만의 관객들로 꽉 찼다. 올림픽 전야제, 프레(PRE) 올림픽의 막이 오른 것이다. 로레타 스위트와 공동 MC를 맡은 나는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쇼를 진행했다. 한국에서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국제적인 쇼에 관중들은 환호와 열광을 아끼지 않았고, 놀라울 정도로 질서를 잘 지켰다. 슈퍼스타들이 한 명 한 명 소개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메인 스타디움을 가득 채웠는데, 그때의 내 심정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 그 자체였다. 충청도 촌놈이 미국으로 건너가 쇼 비즈니스맨이 됐고, 아직 한국에서는 내 존재를 아는 사람조차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큰 무대에 MC로 서서 다시 동포들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좌충우돌 말이 많았던 슈퍼스타들도 무대에 오르자 최선을 다해 공연에 임했고, 서울 올림픽을 준비해낸 한국 국민들의 노고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모두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들이었다.
* 11일 동안의 올림픽 축하 쇼 일정을 끝내고 출국을 이틀 앞둔 날, 안면이 있는 KBS의 진필홍 PD와 이남기 PD와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우리도 이제 웃을 여유가 있을 만큼 잘 살게 되었으니 토크 쇼를 한번 해봅시다.” “에이, 토크 쇼요? 아직은 안 됩니다.” 두 PD는 어림도 없다는 식으로 못을 박았다. “파이어니어 정신을 가지고 한번 도전해야지요. 남들이 다할 때 하는 건 능력이 없는 거죠. 남들이 생각도 안할 때, 시대에 앞선다고 포기할 때, 그때 시작해야 성공도 하고 보람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토크 쇼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웃음이 풍부한 사회, 민주사회로 가는 데 분명히 일조할 수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자니 윤
* 한국말도 잘 못하는 미국 시민. 그것은 분명 내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한국에서 멀쩡하게 26년을 살다 갔는데도 남의 땅에서 또 그만큼의 세월을 살다 보니 내 한국말 실력은 형편없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정말로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우물쭈물하게 되고, 발음이 새서 더듬거리게 되는 것이다. 영어를 우리말처럼 술술 튀어나오게 하려면 문장구조는 둘째치고 발음할 때의 구강구조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20여 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발음 교정을 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되바꾸려니 나도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루이틀에 고칠 수 없는 노릇이다.
* 사람들은 내가 미국 시민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쇼를 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나는 오랫동안 이중 국적자였다. 다소간의 불이익이 있기는 했지만 한국 국적을 포기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그러던 중 불과 몇 해 전, 영사관으로부터 이중 국적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으니까 하나를 포기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 당시 영화 배우로서 내 주가가 한창 올라갈 무렵이었고, 앞으로도 내 활동무대는 미국일 텐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런 내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인데, 전후 사정도 모르면서 단지 미국 시민이라는 이유로 차별한다는 것이 내게는 몹시도 부당하게 느껴졌다. ‘미국인들에게는 꼼짝 못하면서 왜 같은 민족에게는 더 냉정하고 잔인한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자니 윤 쇼를 기필코 성공시켜야겠다는 오기가 더 강하게 꿈틀댔다.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웃기는 일’이라는 것은 이미 무수히 경험해서 알고 있었지만, 자니 윤 쇼를 진행하면서 나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한계상황을 맛보고 있었다. 도무지 미국식 조크가 먹히질 않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내 쇼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웃기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던 말에서, 그러니까 아주 엉뚱한 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온 것이다. 패널로 앙드레 김 씨를 초정했을 때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훼숀 디자이너의 한 사람인….”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웃는 거예요?” “훼숀이 뭐예요? 패션이지.” 아하! 그때서야 나는 사람들이 왜 웃었는지 이해가 갔다. 방청객들은 내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패션이라고 해도 다 알아들을 것을 굳이 훼숀이라고 발음한 것이 낯설고 웃겼던 모양이다. 그래도 나는 웃어준 것이 고마워서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아, 죄송합니다. 내가 패션을 훼숀이라고 해서 부인을 웃겼군요. 하지만 부인, passion은 정열이고 의상은 fashion입니다.” 그렇게 생명을 했는데도 아주머니는 패션이 맞는데, 라며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나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예는 무수히 많았다. 정확하게 발음나는 대로만 표기해도 이런 오류가 생기지는 않을 텐데 일상적으로 쓰이는 많은 영어 단어들이 오기(誤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잘못된 표기는 잘못된 발음으로 굳어지고, 결국 훼숀이 맞는 것인데도 패션이 훼숀이 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 늘 한쪽 귀퉁이가 찌그러져 있는 듯한 삶.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끌어왔고, 그 과정에서 많이 사랑하고 사랑받았다고 생각하는데도 도무지 불완전하기만 했던 그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오랫동안 그런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야 해답을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사랑에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같은 피, 같은 뿌리, 같은 정서를 가진 사람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원초적 사랑. 어딘가에 완전하게 소속되어 있다는 편안함이 주는 사랑.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갈채를 받았지만, 그 어느 곳도 서울만큼 편안하고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곳 서울에 와서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스타는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사람이다.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빛을 발하며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사람이다. 하지만 대주의 사랑도 모두 똑같은 빛깔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자니 윤 쇼를 진행하면서 처음 알았다.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완전한 동그라미를 이룬 느낌, 같은 민족에게서 받는 사랑은 그런 충족감으로 채워지는 완전한 사랑이었다.
* 2년여 동안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 나의 일과는 반복되는 일상과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아직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재기하지 못하고 이대로 주저앉는 것은 아닌가. 그런 힘없는 불안함이 시시때때로 엄습해 왔다. 그 무렵 올해 아흔을 맞은 밥 호프로부터 토너먼트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토너먼트가 열리기 전 목요일, 나는 밥 호프의 집을 방문했는데 정원에서 바비큐를 굽고 있던 밥 호프의 아내 돌로레스가 가장 먼저 나를 알아보고 환영했다. 올해 여든을 맞은 밥 호프의 아내, 돌로레스는 여전히 건강했다. 지금은 무대에 설 수 없지만 돌로레스도 한때 잘 나가는 가수였다. 그날 저녁, 정원에 꾸며진 간이무대에서 나는 오랜만에 돌로레스와 공연을 가졌다. 손님들을 접대할 때는 가장 편안한 안주인이었던 돌로레스는 무대에 오르자 프로페셔널 가수로 돌변해 오케스트라의 선율에 맞춰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청아한 음색으로 박자 하나 틀리지 않고 너무도 훌륭하게 끝까지 불러냈다. 그 순간,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와 부끄러움을 느꼈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얼마만큼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돌로레스가 노래로 보여준 것이다. 고작 오십대에 재기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나의 나약함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돌로레스는 통렬하게 일깨워 주었다. 여든이라는 나이에도 철저히 자신을 관리하고 프로페셔널로서의 정신을 잊지 않는 돌로레스만큼만 노력한다면 세상에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겠다는 각오로 일한다면 내게 남겨진 시간과 기회는 무한할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은퇴’라는 단어를 내 사전에서 지워버렸다. 그러고 나니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당장 일거리가 없는 것에 안달이 나지도 않았고, 또 다시 반복될 일상이 지겹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늘, 아무 할 일이 없다는 것. 그것은 내일을 위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 더 늘어난다는 것 외에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다.
* 돌이켜보면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구나…! 어느 순간 나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에 평생을 매달리며 살아왔는데,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니! 그것은 내 삶에 대한 최악의 결론이기도 했다. 그것은 내 평생 소원이던 아카데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도 유명한 감독이 되지 못해서도 아니다. 몇 달 전, 나는 예수님의 흔적이 깃들여져 있는 예루살렘에 열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내가 필요할 때마다 홀연히 나타나 나를 도와준 나의 에인절(angel)들에게 맹세를 한 일이 있었다. 나도 누군가의 에인절이 되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새 그 맹세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해버린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인생은 아름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나 결과에 있지 않다.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빛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들이 많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내게 도움을 주어 오늘의 내가 있게 했듯이, 나도 누군가의 가슴에 진정한 에인절이 되어 그가 세상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갖게 해주는 것. 그리고 내 도움을 받은 누군가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에인절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 나를 미국으로 이끌어 준 나의 국제적 어머니 프리다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가수가 될 수 있게 도와준 백만장자 에미얼 카프만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습을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파시키는 것. 그래서 이제 감히 나는 말하는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에인절로 살겠다고. 내가 가진 얼마되지 않는 재산과 경험과 삶의 지혜들을 가난하고 진취적인 청년들을 위해 바치겠다고. 이것이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인생이야기를 털어놓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이자, 이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힘이다.
*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불우한 처지라고 생각될 때, 좌절하지 마십시오. 어디선가 에인절(angel)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이 나누어줄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될 때도 당신은 지금과는 180도 다르게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당신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는 누군가를 위하여 에인절이 되십시오. 삶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속에 당신이 속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