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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벩송(Henri Bergson, 1959)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PUF, 증보판 1959(초 1931), P. 300.
[차례] 300
서문 Avant-Propre 1
제1장 유기적 총체성 Totalités organiques 5
제2장 자유 Liberté 28
제3장 영혼과 신체 L'âme et le corps 80
제4장 생명 La vie 132
제5장 영웅주의와 성성(聖性) L'héroïsme et la sainteté 182
제6장 개념들의 무와 정신의 충만 Le néant des concepts et le plein de l'esprit 200
제7장 단순성: 환희에 대하여 La simplicité. Et de la joie 229
* 부록: 벩송과 유대주의 Appenice: Bergson et le judaïsme 255
# 영혼 전체와 더불어 Avec l'âme tout entière 286
참고문헌 Bibliographie 297
차례 Table des matières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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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 전체와 더불어 Avec l'âme tout entière 286
Ⅰ. 유기체주의들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자: 총체성들만이 있다. [현재로] 있는 모든 것은 꽉 차있으며, 완전하게 생명적이고 전체적(global)이며, 자기에게 자족한다. 그럼에도 그 충만은 항상 동등하게 꽉 차있는 것 같지도 않고, 경박하고 나쁜 또 보잘 것 없는 피상적인 인간은 항구적으로 총체화되는 것 같지도 않다. 영혼 전체가 각 동기에서 모여질 때, 우리가 반투명이 다시 되는 것은 자유로운 작동에서(l'acte libre)이다. 따라서 그 자유는 지엽적 작동이 아니고 생명의 소명에 응답하는 자유이며, 재생성을 허락하는 자유이다. 벩송은 신중함, 성실성, 심층을 요구하는 자유에 대해 말하는데, 그는 플라톤의 폴리테이아의 제7권의 유명한 정식을 인용하였다. [누구나] 영혼 전체의 선(le Bien)으로 전향해야 한다(ξύν ὅλη τή ψυχή). 동굴 깊숙이에 갇힌 포로들은 빛을 향하여 머리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돌려야만 한다. 그리고 약간 어느 정도의 예각으로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회전하듯이 반회전(백팔십도)으로 돌아서 완전히 뒤로 향해야 한다. 결국에는 단순히 뒤로 돌려서 움직이지 않은 채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실재적으로 동굴 밖으로 나가야하며, 정말로 태양의 빛으로 향해 올라가야 한다.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의미에서 진실한 전향(ἐπιστροφή 전향, 또는 περιστροφή 전회)에 의해 진리로 스스로 전향한다는 것은 자기 영혼의 조그만 양으로 전향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전체와 더불어 전향하는 것이다. 펼쳐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전환에 의해서 직경으로 반대 방향을 취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즉 불멸의 진리들에게 경의의 표시를 한 후에 브라보를 외치는 것은 말뚝처럼 쿡 박혀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걸으라는 것이다. 바리세인들에게 대답하는 예수 자신은 「신명기」에서 매우 자주 선언된 말투를 확정한다. 그리고 그 말투를 그는 모든 율법의 첫째 계명으로 고려한다: 너는 너의 신 영원한 자(l'Eternel)를 너의 전 심장(심정)으로 그리고 너의 전 영혼으로 사랑할 것이다. 신은 사람들이 일방적이고 부분적인 연관을 가질 수 있는 한 존재도 아니고, 사람들이 자기 정신의 조그만 부분에, 예를 들어 인식에 의해 닿을 수 있는 한 대상도 아니며, 하물며 추론처럼 이 조그만 부분의 더 작은 부분에 의해 닿을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그 신은, 우리가 그에게 우리의 전 생애를, 우리 감성의 전 섬유들을, 우리 능력의 모든 힘들을, 우리가 원하는 모든 긴장을, 우리 지식의 모든 확대를 봉헌할 것을 요구한다. 신은, 예를 들어 이데올로기의 이유들 때문에 정신의 피상적 부분과 더불어 영혼의 끄트머리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신은 무한히 요구하는 자로써, 그 신은 우리가 그를 우리의 모든 존재로서 살게 하기를, 우리가 그를 우리의 전 심장으로 사랑하기를 바라지, 심장의 1/4로, 즉 일심방 또는 일심실로 사랑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신은 자신이 유일자(l'Unique)이기에 나누지 않고 사랑받기를 원하며, 가장 강도 있게 또 가장 지속 가능하게 그리고 문자 그대로 극단적인 사랑으로 사랑받기를 원한다. 착하게 생각하는 위선자와 예식적인 고집불통이 행하는 것처럼 일주일에 한 번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우리들의 생애의 매순간들마다 사랑받기를 원한다. 게다가 유보[예약]조건들을 붙여서가 아니라 밑바닥까지 재지[계산]하지 않고서 사랑 받기를 원한다. 신은 사람들이 자기를 열정적으로(passionnément) 사랑하기를 원한다. 게다가 우리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우리 피의 마지막 방울까지, 이 마지막 방울의 작은 방울까지 그에게 봉사하기를 바란다. 따라서 [사람들은] 순수 심정[심장]에서 말하는, 다시 말하면 나누어가지지 않고 절대적으로 무관심한 심정에서 말하는 순수 사랑의 이론가가 「이사야」와 「신명기」의 언어를 재발견하는 가에 놀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 심지어는 키케로의 언어였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따르면, 자기의 전 영혼으로(κατά πάσαν τήν ψυχήν) 욕망하는 자는 신중한 자(le sérieux, σπουδαιος 신실한)가 아닌가? 왜냐하면 페늘롱도 나눔 없는 전 영혼의 단순성을 표상하는 것은 이와 같기 때문이다. 단순한 영혼, 다시 말하면 신중하고 성실한 영혼은 투명한 수정 결정체 덩어리에 닮았는데, 거기에서 빛은 유보[조건]없이 또 제한 없이 퍼진다[넘쳐난다]. 전체에서 전체로 전환, 그리고 전체를 위해 전체에 참여하고 우리들의 숙명에 대해 모 아니면 도(전체 아니면 무)의 역할을 하는 결단, 이것들이 절대적이고 범주적인 정언명법에 응답하지 않을 것인가? 중간 정도들, 타협들, 또는 미세한 차이 변별들은 더 이상 없다. 정열적 참여는 단지 하나의 등급, 즉 최상급 말 만을; 하나의 크기 즉 최대 만을; 하나의 철학, 즉 극단주의 또는 최대주의 만을 인식한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하시디의 성스러움을 특징지우는 존재 전체의 모든 권능들의 회복을 매우 강조하였다. 정념으로 되어있고 깊이 있는, 또 마치 “자기 자신을 향한 원함(의지)의 뒤틀림[꼬임]”처럼 가끔 체험된 전환은 사실상, 벩송의 지혜안에서 내적 개혁 전체의 전주곡이다. 벩송은 철학적 작동(l’acte)이 이미 알려진 개념들의 재배치도 아니고 새로운 질서 속에 옛 요소들을 배열하는 “조합의 기술”(ars combinatoria)도 아니다. 마치 시간은 전체적 존재가 다른 존재가 될 정도로 급진적인 다시 새롭게 함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철학적 진행은 신중한 작동이며, 인격전체의 완전한 전환이며, 우리들의 모든 습관들, 모든 관념연합들, 모든 반성들의 전복을 함축하는 전환이다. 밑바탕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있는 자는 나쁜 이가 될 수 없다는 이론을 낙관주의라고 부르자. 그런데 인격적 이상의 내재성 자체 안에는 고독한 어떤 위험은 없는가? 결론으로써 무매개자의 실재론은 타동사적[타인에 영향을 주는] 의도를 내재적 총체화로 향하게 한다.(49TMB)
Ⅱ. 총체화는 신중(sérieuse)할뿐만 아니라, 또한 순진(죄 없는, innocent)도하다. 벩송은 자기 생애에 가장 많은 부분을 무매개적 자료와 직접 접촉을 탐구하는데, 우리가 실재적인 것과 연관을 한 등급 낮추게 하는 예의 바른[의전적인] 중간 항들을 몰아내는데, 이미지들을 도치하거나 간섭하게 하는 것을 고발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의 철학은 문자 그대로 사물들 그 자체에로 회귀이다. 순수지각은 그 자체의 자료(datum ipsum), 즉 인격적으로 주어진 것의 그 자체성이 아닌가? 관념연합들과 추억들 저쪽에서 예술가들은 웃음과 물질과 기억에 따르면 마치 순수형식의 기원적 솔직함과 같은 어떤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벩송은 앙글로 색슨의 신실재론에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에서는 독자적 철학이며 새로운 순진함인 러시아의 실재론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벩송은 로스(N. Losski, 1870-1965)의 실재론에서, 프랑크(S. Frank, 1877-1950)의 무매개자 안에서,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객관성 안에서 인정받았을 것이다. 무소르그스키(Moussorgski, 1839-1881)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Vladimir Stassov 1824-1906)에게 글 쓴 “직접 마주대한(à bout portant)” 실재성, 바로 그것이 나의 겨냥(ma visée, 표적)이다. 음악가는 시장의 소란한 소리와 유모의 부드러운 노래와 ‘같은 것’들을 받아들인다. 즉 이 그러함과 ‘같은 것’이란 다시 말하면 이상주의자의 거리(cette distance)가 없는 것이다. 이 거리란 문체화의 원리, 그리고 거짓말의 원리이며, 사물들의 거친 맛(la saveur)을 완화하는 것이다. 즉시 물질 속으로 들어가는 적, 즉 크리스트교에 심판받은 적은 무매개적인 접근성(가까움)을 원한다. 단순성의 찬미, 심지어는 채식주의자의 자연주의 찬미는 혹시(par hasard) 매개자들의 공포를 기원으로 삼지 않았을까? 인식형이상학도 서문도 없는 이 철학은 직접적으로 살았던(체험했던) 사건들에 결부되어 있다.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 속에 감동(l’émotion), 그리고 특히 직관은 인격에서 직접(à mêm la personne) 일어난 것이다. 직관은 인식이기도 하고 또한 결실 있는 통합이며 체험된 공감이다. 직관은 진리에 대해 일별해 보기이며, 또한 향유이자 환희이다. 직관은 신지(gnose)일 뿐만 아니라, 생명적 식이요법이자 존재의 양태이다. 철학자의 진실한 즐거움들에 대해 말하는 플라톤은 즐기다(jouir, καρποῦσθαι)란 단어를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편」 제34장은 “영원한 자가 선하다는 것을 느끼고 보세요”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절대자는 인식을 위한 대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정신이 동화되는, 또는 정신이 내밀한 변질과 신체화[신의 체화]에 의해 개입된 매개자 없이 그 자신이 되는, 양식이며 신적인 “자양분[고기]”이기 때문이다. 신지적 통찰에서 존재적인 나누어 가짐에까지가 먼 것처럼 순수하게 인식적 직관에서 유사국면에까지도 또한 멀다. 이것은 크리스트교가 예수-크리스트의 “모방”(l’imitation)이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이 모방은 몸짓 모방이나 흉내 내기가 아니라 황홀하게 되어 자기 자신이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만일 벩송이 기계적인 반복이 모방이나 창의력에 반대되는 모방을 단죄하였다면, 그는 반대로 본질적으로 [정체화]동일화를 설교하였다. 독단적인 교의의 표본을 따르는 방식처럼, 그런 모방주의는 더 이상 없으며, 사랑받는 자와 더불어 총체적 일치가 있다.
거기에는 더 많은 것이 있다. 벩송은 유사-철학으로부터 나온 해결할 수 없는 유사-문제들, 미치게 하는 환상들, 현기증 나는 궤변론들이 이중화 속에 그 근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구경꾼의 회고적 시각은 행위자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재와 이중화된다. 이차 자승[권능]에 속하는 긍정 명제가 되는 부정, 이것들은 동일한 지수[자승]과 동일한 이차성에 전적으로 타격을 입는다. 주체가 [단지] 보는 대신에 관점을 본다고 주장하며, 보면서 자기를 주시하며, 짧은[갑작스런] 관점 대신에 관점의 관점을 대체하며, 1인칭이라 하는 아주 단순하고도 기적적인 조작의 내부에 있기를 그만두고, ‘나’처럼 또 ‘그’처럼 동시에 생각하게 되는, 이 주체는 제논의 취향에서는 많은 부조리한 난문제들을 만든다. 자기 자신의 자유에 관해 구경꾼의 외적이며 원근법적인 관점을 채택하는 자유로운 인간은 자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필연성과 무차별[무차이]의 딜레마는 사변적 관점에 속하며, 그리고 어느 정도로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관한 관조주의자의 관점에 속한다. 사실상 그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며, 마치 그는 인칭시제와 같다(tempus ipsum libertas ipsa). 톨스토이에게서 순진무구한 자는 진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진리 그 자체이며, 전적으로 순진무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에게서 지혜란 보편극장의 요약적인 “투시법”(la scopie)이었는데, 벩송에게서 그것은 오히려 살아왔던 참여부분이 될 것이다. 즉 모든 방법론의 부재와 모든 예비교육의 부재는 벩송에게서 이미 무매개적 참여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생성은 [강연의] 회기가 계속되는 중에, 서곡도 서설도 없이 시작한다. 따라서 벩송은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그만큼 늦어졌다. 만일 자유가 우선 이상과 관계하는 인간의 타동사적 연관보다 오히려 내적 심층의 깊이로 탐구해들어 갔더라면, 자유는 적어도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그 자체로 증명되었을 것이다. 이때에 환희가 추상적 이중화 작업의 침울함을 계승한다. 환희 속에 행위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역설적으로 서로서로 정비례한다. 이 역설은 모든 지혜를 정의한다. 벩송은 이 지혜에 대해 어느 날 말했다: 지혜는 사유하는 인간에서는 행동하는 것이고 행동하는 인간에서는 사유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지혜는 신지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배설적이기도 한데, 마치 시처럼 그 지혜 자체 속에 지식과 행위가 통일되어 있다. 따라서 그 철학자는 구경거리의 구경꾼이 아니라 드라마의 배우이며, 더 좋게 말하자면 행하고 있는 중인 행동의 행위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벩송주의는 그 전체적인 면에서 행위자의 다시 말하면 창조의 관점이며, 그리고 벩송주의는 자기 자체와 함께 시(詩)의 퍼져(넓혀)가는 운동을 완수하는데 우리를 초대한다. 내포(이해) 그 자체는 창조, 즉 포이에시스(ποίησις 제작, 생산), 그리고 종에서 재창조가 아닌가? 이해하다는 다시 만들다가 아닌가? 내포는 자기 발걸음을 걸으면서 창조와 반대 방향이 아니라 동일한 방향에 있다. 따라서 기호화작용(la signification)은 그것의 종착점이 아니라 그것의 출발점이다. “창조적 해석”은 없는가? 이걸 다시 말하자: 원심(운동)력과 구심(운동)력의 대칭은 헛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것과 시작하는 것은 동일한 방향이기 때문에, 철학 전체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작동(un acte)이 될 것이다. 각자는 이 작동을 자기에 관하여 그리고 자기 소유로, 각각 자기 자신을 고려하여, 마치 그가 첫째였던 것처럼 더 좋게 말하면 마치 그가 혼자였던 것처럼, 다시 행해야만 한다. 데카르트가 우리에게 주었던 예이다. 이리하여 벩송주의자가 되는 것은 벩송이 말했던 것을 다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벩송이 행했던 대로 아주 고독하게 아주 순진무구하게 행하는 것이다. 위대한 진리들을 다시 생각하는 자는 [그것들을] 사랑하는 자와 같다. 그는 마치, 처음으로 한 인간이 사랑하는 것처럼, 즉 마치 이 봄날이 세상의 첫 봄날인 것처럼, 사랑한다. 그는 더 이상 시각(une optique)을 갖는 것이 아니라 숙명(une destinée)을 갖는다.
마치 체내(in vivo)에서 일어나는 직관과 감동[정서]이 표면으로 양식화하는 거리를 무화시키듯이, 이처럼 행위는 분리된 두 시각을 재통합한다. 거리두기와 이중화는 추방의 두 형식이며, 이것들은 무매개의 우아함[그대로 됨, la grâce]에 굴복한다. 우리가 말했듯이 플라톤의 전환은 전 영혼의 전환이며, 완전히 반회전(180˚)하여 실질적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행하는 책무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실질성이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동굴을 떠나도록 허용하는 것도 아니고, 동굴을 떠나는 자들을 박수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동굴 그 자체를 당장에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 말투(la parole)는 단지 조롱 섞인 참여나 불쌍하게도 인격의 부분적 참여, 말씀(la langue)의 조그만 끝의 참여일 뿐만 아니라, 게다가 그 말투는 행위의 잡다하고 퇴행적인 형식일 뿐만 아니라, 생략법적이고 상징적이며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다. 언어는 무엇보다도 행위를 향한 행위이며, 제시하는 (능력)을 지닌 행위, 부차적이고 따라서 비실질적이고 개념적인 행위, 벩송이 언어인(Homo loguax) - 언어적이고 장황하고 나약한 인간 - 이라 불렀던 인간의 용도에 맞는 행위이다. 참여한다는 것은, 마치 참여에 관해 강연을 행하며 유행에 맞게 떠드는 허풍쟁이처럼, 동사 ‘참여하다’를 동사 활용하는 것이 아니며, 유명작가들처럼 참여하다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진심으로 참여하는 것, 무매개적이고 우선적 작동에 의해 우리가 결심의 무엇인 것(la quoddité, quiddité)이라고 불렀던 실질적이고 쏟아내는 작동에 의해 참여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지 말라, 그들이 행하는 것을 쳐다보라고 벩송은 자주 말했다. 말하는 대로 행하라, 훨씬 더 좋게 말하면 말없이 행하라. 그러한 것이 톨스토이의 항구적 근심이었다. 사도와 성도전 필자인 이아스나이아 폴리아나(Iasnaia Poliana)의 현자는 그가 공언했던 총체적 복음주의를 살아가는데 애착을 갖지 않았던가? 따라서 제논이 말한 것을 듣지 말라. 그는 별로 신중하지 못하다. 오히려 아킬레스가 행하는 것을 보라! 왜냐하면 작용들에 의한 증거 이외에 의도에 관한 오로지 성실하고 총체적인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작동(l’acte, 현실태)은 동사보다 더 유창하고 더 설득력 있다. 예를 들어 에우독소스(Eudoxe de Cnide, 전408–전355)는 이론적으로 쾌락주의자였으나, 생활습관[품행]에서는 절도 있었다. 그래서 엄격한 방랑자라기보다 준엄한 쾌락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더 낫다. 아니다와 끊임없이 아니다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다(être)와 더 이상 이다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도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물들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사물들이 있다. 이 사물들 주변에 말투, 생겨나지 못하고 위축된 표현, 웃기 위한 표현 등은 불쌍하게도[비참하게도] 허구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사물들은 생명에서 가장 값비싸고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 사물들의 이름은 사랑, 시, 음악, 자유 등이기 때문이다. 꾀꼬리[로시뇰]는 [음악의] 알페지오 기법을 강연하지 않으나, 그 노래를 실행하면서(en le faisant) 알페지오 기법을 가능하게 한다. 로시뇰과 강연자 사이에 거리는 시와 시론[시작법]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크다. 전자[시]는 전시하지 않고서(sans exposant) 직접적으로 “행하는”(만드는) 행위이고, 후자[시작법]은 행하는 것에 관해 행하는 것, 즉 2차적 또는 2등급에서 행하는 것이다.
게다가 영웅은 영웅주의에 관한 강연을 행하지 않는다. 성자와 영웅은 자신들의 이웃을 향해 행위(agir)하는데, 문학자들처럼 자신들이 쓴 글에 의해서도 아니고 연설가들처럼 그를 말한 것에 의해서도 아니라, 그 자신들이 행한 것에 의해서, 또한 그 자신들이 있다는 것보다 훨씬 더 그 이상의 것에 의해서이다. 마치 “행위자”(제작자)가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포착하기(captiver) 위하여 단어를 사용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와 매력에 의해 자신들의 이웃에게 작용한다(agir). 자신들의 삶의 표본에 의해도 자신들의 참석[출석]의 시적인 광휘(빛남)에 의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발작(Balzac, 1799-1850)의 말에 따르면, 유창한 설교자들은 우리에게 견해를 바꾸게 하지만, 품행을 바꾸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설득 없이 정복한다. 행하는[실천하는] 인간, 영웅, 성자 또는 시인은 단지 닮고자 하는 선망(l’envie)만을 부여한다. 사람들이 관대함을 얻고자하는 것은 관대함을 설교하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설교하면서 사람들은 단지 정중한 동의만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전이란 거의 조금도 설복시키지 못한다. 순교자의 희생은 선전이 아니다. 왜냐하면 순교자는 죽음까지도 열정적이기 때문이고, 자신의 표본에 대한 열광하는 덕목들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운동을 권장하는 벩송의 성인은 또 엘레아학파의 괴물 고르곤(Gorgone)을 몰아내는 그 성자는 러시아의 정교수도원장(Staretz)을 닮았다. 정교수도원장과 프라보슬라브 수도원 서열의 고위자들 사이 만큼이나, 하시디즘의 정신적 지도자(Zaddik)의 빛나는 인격성과 율법의 박사 사이만큼 많은 차이가 있다. 러시아정교의 스타레쯔, 하시디즘의 자디크, 벩송의 성자는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을 자신들의 글로 써서도, 말을 해서도, 지식에 의해서도,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도, 존재에 의해서도 변형하지 못한다. 메시지와 호소는 인격이며, 관대한 분출과 축복들의 마르지 않는 풍부함은 영웅주의의 교훈이다. 여기서부터 지혜는 영웅주의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 왜냐하면 지혜는 영웅적으로 사는 현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무매개의 철학은 문자 그대로 의미로는 “긍정”(positive, 실증)철학이며, 다시 말하면 ‘그래요’라고 말하는, 즉 생명에게, 존재에게, 신에게 ‘네(그래요)’라고 말하는 철학이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나가는(시작하는) ‘네!’(le Oui)이다. 또한 ‘네’ 만이 무한한 부정적 경험들보다 우세하다. 창조적 진화는 우리에게 부정 속에서, 말하자면 판단에 관한 판단인 둘째 운동을 폭로했다.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은 여기에 이런 것을 덧붙였다: 갑자기 잊었던 것을 생각하고서, 헌신에게 ‘아뇨’를 말하고, 그리고 단체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지성이다. 만일 완전히 퍼져나가는 환희가 ‘더 많음(un Plus)’의 징후[증상]이라면, 그리고 만일 그 환희가 창조적 도약의 순수 실증성의 표현이라면, 철학이 환희의 근원들에로 회귀(un retour)라는 것은 당연하다. 동일한 이유에서 물질과 기억에 따르면 고통은 감각의 형식으로 역류하는 일종의 운동이기 때문에, 벩송의 활동가적인 지혜는 고통을 넘어선, 양심가책을 넘어선, 모든 다양한 낭패를 넘어선 승리일 것이다. 따라서 긍정적인 철학은 이편(l'‘endroit, 겉면)에서 철학이다. 그 철학이 우리에게 제안한 명증함들의 개입들과 역설적 전복들은 이 모든 것을 마치 저편(l'envers, 안면)에 있었던 것을 이편[겉면]으로 다시 놓는 것처럼 고려되어야만 한다. 특히 우리에게 좋은 방향을 지적하는 것은 시간의 불가역성이다. 사실상 모든 것은 이편에 있으며, 거꾸로 진행한다고 믿는 회고적 운동을 포함하고, 또 거꾸로[반대]-생성으로 가는 듯한 추억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 모든 것은 생성의 방향으로, 창조의 방향으로, 시작(詩作)의 방향으로(volen nolens) 가고 있다. 뒤로 돌아보는 자(βλέπων είς τά ὸπίσω, 그는 성자 루가의 복음에 의해 단죄 받지 않았던가? 자기 소명의 진실한 의미를 인정하는 인간, 이편에서 인간, 자기 발걸음들을 다시 놓는 그 인간은 마치 부정[작용]이 자기에게 그렇게 하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뒤로 곁눈질 하는 대신에, 마치 자기 눈이 자기를 거기에 초대하는 것처럼, 자기 앞을 새로이 쳐다본다. 그 자리에 머무는 대신에 자신의 두 발로 자신을 지탱하는 거기에서 자유롭게 앞으로 간다. 메가라학파의 필연주의는, 마치 엘레아학파의 부동성이 운동을 끝까지 도달하는 것을 막는 것처럼, 미래가 우발적으로 생겨나는 것을 막는다. 이편의 철학은 미래작용과 운동작동을 동시에 고장 난 것을 수리한다. 일단 부동성의 저주를 몰아내고, 또한 일단 회고성과 퇴행성의 주술들을 쫓아내고서, 아킬레스는 방향을 앞으로 향하여 새로이 잡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향하여 방향을 잡는다. 아킬레스는 회상의 탕약을 거부하고 죽음의 부정주의를 극복한다.
이처럼 ‘그래요(Oui)’의 철학은 바른 길(la vore droite, via recta)을, 즉 일체 똑바르고 직접적인 철학을 재발견한다. 왜냐하면 그 철학은 한 편으로 미래를 향하여 데려가고, 다른 한 편으로 그 철학은 매개 없이 ‘나’와 ‘너’를 제1인칭과 제2인칭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부재를 현재로 정당화하기를, 또 먼 추상작용들을 구체화하기를 열망하는 자에 있어서, 제2인칭은 무매개적이고 특히 가까운 인칭이 아닌가? 만일 오르페우스가 회고적인 신기루에 양보하지 않았다면, 그가 자기 가까이에서 사랑했던 부인을 지켰을 것이다. 테세우스에게 바른 길에는 미로로 가득 차 있다고 폭로한 것은 반대로 무매개적 연관의 상관항인 사랑했던 여인이다. 사랑 속에서 다시 말하면 나와 타자의 타동사적[타율적]이고 직접적인 연관 속에서 직관과 행동은 결국에는 이둘의 종합을 발견한다. 끝맺기 위하여, 타자의 근심은 정열적인 모든 의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직관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공감과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효과성(l’efficacité)은 사실성(l’effectivité)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것을 제시해보자. 창조적 진화에 따르면, 의식은 전적으로 자유이기 때문에,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의 저술이 그렇게 서술했던 대로 영웅적이고 천재적인 현전[출석]의 자비로운 소명을 인정해야 했던 것은 이 자유의 발산(le rayonnement)에서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하나의 소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이 소명이 농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 옆에 사는 자는 자유롭기를 갈망하며, 마치 관대한 인간의 빛의 방출 속에 사는 자가 그 다음 차례로 관대하게 되는 것과 같다. 관대의 전염성처럼 자유의 전염성도 있다. 도화선의 화약같은 자유는 자유의 핵심들 중의 핵심 주위에 불을 붙인다. 이것은 진실한 반작용의 연쇄이며, 마치 플라톤의 이온편에서 우리에게 설명해 준 자석의 끈(ὁρμαθός, 연결고리)과 같다. 자유는 이것 또는 저것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이것 또 저것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자유는 자유롭게 되고 싶어 한다. 관대한 자유, 영웅적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각성시킨다.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 자유, 다시 말하면 자유 그 자체를 선물하고, 외적인 증여에 의해서도 아니고 어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래 아니지: 창조적 자발성은 재창조의 자발성들을 서로서로 무매개적으로, 마술적으로, 텔레파시적으로 유도한다. 왜냐하면 이자발성[선도력]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는 자유의 소명이 물질 속에 비결정성을 도입하는 것이라 말했다.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은 이것을 표현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자유는 또한 영혼들 속에 비결정성을 삽입한다고 덧붙인다. 자유로운 인간은 그가 돌들을 해방시키려는 자체만큼이나 자유롭다! 그 인간이 모든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자유를 갖지 않는가? 자유는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구속으로부터] 해방자이다. 자유는 [고통으로부터] 해방(la délivrance)이다. 푸른 수염(Barbe-Bleue)의 여인들은 아리아드네의 말을 듣지 않고, 대낮의 햇빛을 향하는 자유로운 아리아드네를 따르지 않고, 이 자유에 의해 설득되지 않았으며, 슬픔 성(城)의 지하실들을 더 좋아했는데, 이 여인들은 아리아드네가 그들에게 가져다 준 새로운 삶의 메시지 덕분에 아마도 비밀스럽게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부차적이라 할지라도 봄이 온다는 전조의 향내를 맡았던 자는 좁은(협소한) 계절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유는 조용하게 자유 그 자체로 남아있기 때문에, 또 자유의 공포를 부르주아 삶으로 실행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자유가 전체작업(tout opération)이며, 그것은 마치 운동이 운동화(mobilisation)하는 것과 또한 생명이 활성화(animation)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신 그 자신은 자기 신성의 불가사의한 수혈[전수]에 의해서 “창조자들을 창조한다”. 누가 아는가? 신[나로서는 자연]은 아마도 우리를 위해서 [자기 창조에 의해서] 연속적인 신격화 작업일 것이다. 이것은 써도써도 다 쓸 수 없이 풍부한 뿔(une corne)이다. 자유는 끊임없이 주는 것이고 낭비하는 것이며, 시체[죄수]들을 부활시키면서[플라톤], 졸고 있는 인간들에게 전기 자극을 하면서[소크라테스], 억압받는 자들의 봉기를 부추기면서[해월, 통혁, 인혁], 예언자들의 관대한 분노를 일으키면서[이사야] 말이다. “미래의 문은 크게 열려있다. 무한함 들판이 자유에게 제공되어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i Korsakov, 1844-1908)에 의해 음악이 된, 러시아 전설에서 [불멸의 주인공인] 카흐체이(Kachtchéi)처럼, “폭풍-기사(Palandin-Tempête)”는 이반 코로레비치(Ivan Korolévitch, s.d.)에게 봄의 문, 빛의 문, 자유의 문을 열어준다. 여기에서 타성적 우주에 대해 움직이게 하는 원리가 시간이다. 자유는 기막힌[기발한] 순간에 압축된 지속이 아닌가? 자유로운 인간은 부동성을 생성이 되게 하는 구현된[구체화 된] 생성이 아닌가? 예를 들어 설교하면, 아킬레스는 돌진하여 거북이를 사로잡고, 엘레아학파의 난문제들을 우습게 여긴다. 말로서(언어)나 개념적으로 참여하는 기사단들은 혼동될 것이다. 이것이 최면술사들의 실패(la déroute)이다. 주술로부터 해방된 전 세계는 노래하며 우리에게 미소 지을 것이다. 마비된 자는 걷기 시작하고 춤추기 시작한다. 미칠 듯한 기쁨과 희열이 사슬들에서 해방된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이사야는 플라톤의 폴리테이아에 앞서서 인간성의 재탄생에 인사하였다. 포로는 두더지와 땅굴쥐의 삶을 부정하고, 영원히 예속적인 동굴을 떠난다. 인간은 행진과 진보의 정상적 의미인 미래화 적업의 의미[방향]에서 이편에서 시간을 풍부하게 하고, 그리고 “미래의 즐거운 노래”를 지각한다. 왜냐하면, 환희(Joie)라는 단어는 선지자들에게서 만큼이나 벩송에게서도 또한 중요하다. 인간들을 춤추게 하는 환희, 즉 빛나는 내일들의 환희는 무엇보다 해방(la délivrance)에, 다시 말하면 자유의 작업(l’opération)에 유래하지 않는가?
이 해방은 무한하며, 마치 우리를 정복하는데 또 항상 위협받는 자유를 끊임없이 재정복하는데 쓰이는 해방전쟁이 연속적이듯이 말이다. 따라서 경험적인간의 해방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완성태[현실태]로서 자유의 간격에서 즐길 수 없는 인간은 시간들의 마지막까지 투쟁 속에 있을 것이고, 그 해방노력(la liberation)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빛의 예루살렘에, 러시아 전설들의 볼 수 없는 도시에, 우리 희망의 천상에 있는 키티에쥬(Kitiège)에, 바로 거기에서는 죽음이 불가역적으로 우리를 분리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알 수 없는 거대한 불가사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볼 수 없는 이 도시가 우리의 가슴[심장] 속에 꽃피고 또 피어야 하는 것은 이 아래에서부터이다. 이 도시에서 인간들은 배고픔도 갈증도 없으며, 빈곤과 추위도 더 이상 떨지 않으며, 서로 서로 때문에 고통을 겪지도 않는다. 그때에 우리는 아마도 침묵 속에서 밤의 천사들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 천사들은 우리에게 먼 키티에쥬에 대해 말할 것이고,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사물들이 우리 귀에 속삭일 것이다.(49TMF) (수정 보완, 49U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