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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의 인간학적 원리: 자유와 투쟁
현승효(1950-1977), 도서출판 모임, 2021, P.447.
용출선을 내뿜는 흐름은 지속하고,
전쟁기계는 "같지 않은" 실천을, "같지 않은" 이야기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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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사는 기원전 3000년-1000년대에서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입말로 전승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그리고 계속적인 전승을 위한 글쓰기가 시작됐다고들 한다. 그런데 서양 철학사는 세계의 생성 원인(아르케)을 묻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그 이전의 글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서사와 서술로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사상사에서는 유물과 유적에서 출발하기보다 글로 쓰여진 자료로부터 전개하기에 대부분 기원전 600경으로 잡고 있다.
길고 긴 전승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 표현 방식들과 판본들이 다양하여, 어느 하나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것만큼이나 지식을 사랑하는 현자들은 노마드로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겉보기의 이전(전달)보다 내부적으로 흐르는 소통이 더 멀리 더 넓게 퍼졌으리라. 즉 귀농냥과 눈살미는 전파와 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인데, 요즘 표현으로 청각이미지와 시각이미지의 전승일 것이다. 아마도 이 시대는 청각이미지가 우선했을 것이다.
현자의 전승보다 속도와 넓이에서 확장이 빠른 것은 정복전쟁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이 전쟁이 전제정(군주)을 심었는지, 인민의 투영적 희망으로 종교성(제사장)을 만들었는지는 전쟁 다음이다. 전쟁에서도 무기와 생활에서 도구는 안과 밖처럼 한 사물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무기와 도구의 발달이 생산성을 높이며 전쟁의 시기가 아닌 시절에서는 공동체의 모습을 변환시키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정착의 공동체는 통일적 기호들과 언어체계를 요구했을 것이고, 그 체계에 따른 사회적 위계도 성립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공동체 사회의 시민이라는 개념은 그리스에서 폴리스에서 시민활동에서 비롯되었다. 폴리스의 성내에서 일어나는 사정들이 그 시대의 환경이었으나, 로마의 제국시대는 여러 부속 식민지역에서도 제국의 신민으로 생존 활동을 하는 자들이 로마시민과 같은 처우를 받는다. 제국과 식민의 관계는 로마의 것이 아니라 동방(이집트, 앗시리아, 페르샤, 바빌론)의 것이라고 하는데, 로마식으로 사고의 추론과 법률적 판단이 동방의 전제 군주적 정치에 우월하다는 서구식 발상일 것이며, 서구가 동방과 달리 지혜와 지식을 다루는 사유체계를 개별과학들과 더불어 발전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장점을 말하는 것이다. 즉 로마의 법률적 관례의 실용성과 겉보기 사물에 대한 판단의 유용성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리스 철학의 이데아론과 부동의 원동자를 빌려서 시각적 이미지로 전향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서구가 중세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시각적 이미지의 우월성은 이데아의 실재성을 종교의 환상의 실재성과 맞먹는 위치에 놓았다. 이상하게도 이런 시기에는 인도에서도 보편성의 확보를 위한 유식론이 바수반두에서 디그나가를 거쳐 다르마키르티로 이어지듯이, 서구에서도 포르피리오스 이후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재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자들은 보편자의 우월성에 매료되었다. 시각의 오류는 지구가 평평하게 보이며, 지구는 부동인데 천체는 원운동으로 보인다는데 있다. 그러나 눈의 감관만으로는 평평함의 오류를 바꾸는 것이 어렵듯이, 이데아 또는 보편의 실재성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서양에서 르네상스, 과학의 발달, 특히 물리학의 발달은 인간의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다. 태양이 가만히 있고, 지구가 돈다. 그렇다고 보편성과 저세상을 믿는 종교가 바뀌는 것이 아니고, 그 종교들은 자기존립을 위해 변신을 하는데, 19세기에 변신하고 21세기에도 변신할 것이다. 이런 사고의 변신은 스콜라철학의 변신인데, 네오스콜라주의의 진수처럼 보이는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 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고 말한 괴벨스(Goebbels, 1897-1945)에게서도 볼 수 있다.
서양 철학사는 스콜라주의의 변환점을 거쳐 르네상스 이후에 근대철학이라고 하는 데카르트 이후에 변환을 겪지만, 그 변화의 바탕에서 거의 불변하고 있었던 것은 우주 총량의 불변을 신앙처럼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유는 조금씩 변화를 추구했다. 물론 데카르트의 두 실체론 이후로 인간은 예속이 아니라, 주체로서 등장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여전히 시간이 필요했다. 정치 경제학적으로 변화는 생산력의 발달로 인한 산업혁명이라고들 하는데, 두 가지 구체적 사실에 기인한다. 하나는 증기기관, 다른 하나는 모터이다. 말하자면 1830년이 지나서야, 당대에는 프롤레타리아를 용어로 통용되었던 인민의 자각이 있다. 아마도 인민이 주인으로서 실재로 등장은 두 번의 큰 전쟁을 겪고 나서야 있을 수 있고, 세계사의 변혁에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로서, 일차대전으로 소련과 이차대전으로 새로운 중국이 성립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한 관점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푸꼬는 르네상스 이래로 사물과 언어 사이의 연관이 어떤 방식으로 변화했는지를 역사적으로 또는 고고학적으로 탐구했다. 그는 근대시대에는 과거와 연관하여 여전히 왕정 또는 전제정의 통치시대가 이어져 왔는데, 고대의 동방의 전제정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상부가 통치수단과 제도를 법률로 정하고 실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인민을 지배하는 제도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과 생산력의 발달로 개인의 노동력을 좀 더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을 구성 또는 구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즉 이익을 넘어서 잉여가치를 착취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의 구축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인민들을 국가라는 체제 속에 포획하여 복속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의 생활에 깊숙이 또는 성장과정과 활동과정을 지배해야할 필요성을 알아차렸다. 이에 푸꼬는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구별이 통치체제의 연속으로 지배방식에 연관이 있다고 보았고, 병원, 감옥, 학교, 병영이 이런 지배의 수단으로서 체제를 형성하였다고 보았다. 르네상스에서 계몽시대를 거쳐서 산업 근대화 과정에서 체제의 통제 수단으로, 학교, 병영, 병원, 상벌(감옥) 등은 인민이 체제 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거쳐 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가정에서 떠나 학교로 규율을 배우고, 학교를 떠나 병영에서 체제 내의 복속을 배우고, 그리고 예속인과 저항인의 구별에서 병원과 임상의 역할을 부여하고, 그래도 체제에 저항하고 항거하는 이들을 격리 시키는 상벌의 감옥 제도를 확립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푸꼬는 나중에 통치시대의 마무리 단계가 나폴레옹시대로 보고, 또한 일반적으로는 철도을 만드는 1830년대 이후에, 맑스의 표현대로 토지귀족에서 산업귀족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통치에서 규율과 훈육이 강화되고 또는 체제의 위계를 세우는 방식으로, 훈육시대로 자리 잡는다고 한다. 푸꼬를 좋게 평가하는 들뢰즈는 이런 훈육의 또는 광기의 시대가 두 번의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레닌이 보았듯이 전쟁을 통하여 자본이 국가의 단위를 넘어서 제국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고, 들뢰즈는 다음으로 자본이 탈영토를 걷는다고 한다.
2차 대전은 어느 전쟁보다 세계적으로 피해가 컸다. 그후 미국의 자본이 중동을 장악하면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국에 대비하여 제국의 형성을 구상하였을 수 있다. 체제의 통일성과 지배권의 강화를 위하여 복구 과정에서 소련을 대비하여 서유럽에서는 마샬정책을 써서 독일 등의 부흥에 힘쓰면서, 다른 한편 (공산화된)중국을 대비하여 일본을 부흥시키기 위해 한반도의 전쟁을 3년이나 끌었다고들 한다. 자본의 탐욕과 탐심은 끝이 없어서 개별화된 개인을 파편화하여 자본 제국의 포획과 포로로 만들려는 야욕은 개인의 미세한 부분에까지 즉 개인의 감정까지도 지배하며 통제하려고 한다. 이 통제시대는 기계 산업을 넘어서 소통을 통제하는 디지털 시대이다. 시각이미지, 청각이미지, 언어이미지, 몸의 감화이미지까지도 지배하려는 의도는 인민들에게 숫자를 심어 놓았다. 훈육시대에는 일곱 여덟 살짜리 애들을 탄광으로 보내 육신을 갈아 넣는데 대해 분노하던 맑스와 더불어 사회주의자가 있었다. 통제당하는 현상으로 젊은 청년의 영혼을 갈아 넣고 있는데, 제국에 대한 저항과 항거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새 시대를 창설하려고 또는 현승효가 주장하는 새로운 회향(廻鄕)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거리는 여전히 남아있다. (54T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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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근대철학은 중세의 신에 묶인 예속(sujétion, s'assujettir)의 인간이 데카르트 이래로 스스로 주체(sujet)가 되는 자기의 발견으로 자의식의 발동 시기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발견은 지성인의 경우이지, 인민이 스스로 자각하는 것은 억압과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프랑스 대혁명(1789)이라 한다. 그리고 보편 인권의 성립은 국제연합이 생긴 1948년이라고 하는데, 인류는 조금씩 변화를 만들고 새로운 사회 건설로 나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서구의 도래는 1894년 동학을 무너뜨린 일본군에 의해서 였는데, 일부 지식인이 일본의 힘에 자발적으로 포획된 것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서구화한 일본의 승리였으며, 일차대전의 끝으로 미국의 힘을 보았을 때이다. 그럼에도 반도와 만주에서 1910년에서 1919년까지 독립운동에는 두 계열이, 즉 만주에서 러시아의 변화를 본 계열들과 일본 유학파들과 일본을 통해서라는 부류가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지성인도 있다. 대 기미민족항쟁운동 제1보루(大己未民族抗爭 第1戰壘)로서 2.8 독립선언, 그리고 대기미민족항쟁 제2전루로서 3.1 운동, 대기미민족항쟁 제3전루로서 4.10 민족 대표자회의와 임시정부. 다양체로서 여러 파들 모두가 자주와 독립에는 같은 방향인데, 제1보루의 참여자들은 유럽과 소련을 가까이 참조하고 제2보루 쪽은 일본을 더 많이 참조했다. 이런 운동은 1929년 신간회 운동에까지 여러 분파들은 통합해 보려했다. 그러나 일제의 전쟁개입시기에 반도를 통치를 넘어서 훈육의 장으로 만들었다. 강압적 지배는 독립운동을 말살시켜려 했지만 심층의 흐름과 만주와 해외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여기서부터 사상사에 눈을 돌려보자.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서구 사상의 수용과 연관해서 20세기 후반 군사정권의 지배방식인 훈육시대에도 저항운동이 솟아났다. 1953년 전후 확연하게 남북으로 갈리면서, 사상사의 왜곡과 편파성으로 기울었고, 박정희 군사정권의 몰락으로 숨결이 트인다. 사회주의의 맑스-레닌, 마오(毛, 모)의 사상이 남녘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80년 후반에서 이며, 1948년의 단독정부의 기반으로 부일자와 숭미자들이 미국의 마름 역할로서 주도권을 가지고, 사상과 언론을 지배하면서 왜곡된 세계를 바로 보는 즉 파란 안경을 쓴 관점으로 나갔다. 그럼에도 저항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으로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제 강점기에도 그리고 미군 점령과 군사정부가 강압에도 새로운 사상의 분출과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회향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물론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으로 이어진 동학, 전봉준의 지도로 이끌어진 동학민중항쟁, 천도교의 이돈화도 있었다. .
서양 철학의 도입은 경성제대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이 학풍은 일제의 지류에 속하는 식민지 땅에서 칸트를 중심으로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학계로서는 시대의 저항자로서 신남철(申南徹, 1907-1958?), 박치우(朴致祐 1909-1949) 등이 있다. 신남철은 서구의 과학철학적 입장을 수용하면서도, 사회 해방과 인간 해방을 주장하며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 사회의 주체를 인민으로 보았고, 인민은 자발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인간들 관계에서 전체적 사회관계를 탐구해야 한다고 하고, 맑스의 정치 경제학을 수용하였다. 그의 저서 역사철학에서는 ‘필연성과 개인의 자유의 대립’을 인류 세계사의 보편적 특징으로 보았고, 개인은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무명의 혁명가라는 위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박치우는 사회적 모순의 해결이 학문에 의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의해 해결된다고 보았다. 위기의 현대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실천에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가 이상적 민주주의로 삼는 휴머니즘의 완성은 맑스의 기본정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면서, 철학의 실천성을 강조한다. 그가 해방 후 여운형보다 박헌영의 노선을 택한 것도, 구체적 실천으로 유격투쟁의 파르티잔으로 활동하다가 산화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다른 한편 저항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함석헌(咸錫憲, 1901-1989)과 이종률(李鍾律, 1902-1989), 장일순(張壹淳, 1928-1994) 등이 있다. 함석헌은 일본에서 공부하였고 기독교에 몸담았으나 군사정권의 박해로 퀘이커 교도로 전향하였다. 장준하(張俊河, 1918-1975)와 더불어 민주화 운동 이후로, 사상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며, 민중을 뜻하는 씨알의 개념을 창안하며 새로운 민족사를 모색하였다. 씨알 즉 생명을 그 자체로서 사회 혁명의 기반으로 보았다. 이종률은 인성에 대해 주목하면서, 인종이 아닌 민족, 신민이 아닌 인간에 대해 성찰하면서 정(正)인간론을 제시하였고, 민인(民人)으로서 정인간은 자의식을 체득하고 이해하여 자율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성론에 사적 유물론을 덧붙였으며, 결국에는 실천으로서 민인혁명을 제시하였다. 그의 파장은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의 중요 활동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장일순은 민군정에 의해 강사지위를 박탈당한 후, 원주로 들어가서 토지와 인민의 삶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해월 최시형의 유지를 이어받기로 했다. 그의 학문적 연관은 뒤에서 말하겠지만, 구체적 삶의 터전의 변혁을 이루기 위해 한살림 운동을 실천하였다. 토지의 중요성은 공동체 운동에 영향을 주어 생태운동에까지 연결되고 있다.
여기서 사회변혁에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박홍규(朴洪奎, 1919-1994)는 평생을 대학에서 플라톤 철학을 연구하면서, 앵글로색슨 철학의 기반인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플라톤의 중요성을 전개해 놓았다. 아페이론 대 페라스, 운동 대 정지, 시간 대 공간이라는 사변적 형이상학의 대상들을 기원(아르케)과 이유(raison)에서 탐색해야한다고 했다. 이는 체제의 포섭 이냐, 자발성 지향이냐는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 구체적 실천의 장에서 인물들이 많지만, 여기서 다 열거할 수 없고, 몇 중요인물을 보면, 젊은 청년 시절에 실천 활동으로써 레포 활동 또는 야산대를 했던 안재구(安在求 1933-2020)와 박현채(朴玄埰, 1934-1995)가 있다. 안재구는 세계적인 수학자로서 전문분야에 업적도 있지만, 수학문화사 1 원시에서 고대까지(2000)에서 인류 사유의 기원과 이유(la raison, 근거)에 대한 해명을 서술해 놓았다. 게다가 남민전 사건으로 사형 언도 후 세계 수학자들의 탄원으로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88년에 가석방되기도 했다. 박현채는, 80년대 중반 젊은 변혁가들을 달구었던 국가독점자본주의, 종속자본주의, 후진국 경제론 등의 논의들이 난무할 때, 민족 경제론과 농업경제에서 토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복권이 된 후 정치경제학을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
어느 시대나 저항 운동과 학술 운동은 표면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세계사에서도 관념론의 관점에 대척점에 있었던 자연주의의 시각은 표면 위로 떠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표면 아래에서, 벩송의 자유에 대한 표현처럼, “간헐적으로 불쑥 솟아나”기도 했다. 나로서는 이런 흐름이 소크라테스, 플로티노스, 브루노, 스피노자, 루소, 벩송, 들뢰즈에서 분출할 수 있었다고 본다. 분출, 탈주선 또는 용출선은 시대의 관습과 위계가 두껍게 표면을 층위를 이룰 때 균열을 내고 솟아나곤 하였다. 표면 밑의 흐름을 실재성에서 ‘노마드’라고 한다. (54T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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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겪은 세대에는 허무주의가 깔려 있다. 이는 어느 시대에 어느 환경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행동이 솟아나 준안정상태에 이르면, 제도와 관습은 변혁보다 안주를 택하고, 체제를 구축하여 위계를 만든다. 그럼에도 체계의 부조리와 불평등의 심화일 경우에는 언제나 내부에서 실천적 솟아남은 있어왔다.
일어나지 않았어야할 또한 길게 끌지도 않았어야할 전쟁에서 국토는 피폐하고 사람들 사이에 화해와 동화를 상실했던 시기에, 지식인들이 허무주의에 빠졌다고 한다. 그 시기에 니체는 일제시대를 이어서 다시 사변의 대상이 되었다. 60년대 군사정권에 의해, 유럽마샬정책 다음으로 동북아에 눈 돌린 미국의 영향아래 기안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등을 실행하면서, 미국의 영향아래 일본 자본이 우리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지식의 필요를 일본으로부터 충당할 수밖에 없던 시절에 데칸쇼가 등장한다. 일제가 남긴 산업화의 바탕인 신칸트학파의 과학에다가, 막 들어오기 시작한 미국의 도구주의 다음으로 논리분석학이 도래하게 된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가 서양철학의 전부인 것처럼 여겼던 것은, 조선의 통치시대를 자본주의 시대 통치시대로 바꾸어 놓고, 그리고 산업화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규율과 훈육을 심었던 일제 말기의 상황이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군사정권은 통치시대와 훈육시대를 겸하는 군사 독재를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였다. - 가끔 이야기 하지만 서양의 통치시대, 훈육시대, 통제시대의 변전 270여년을, 우리는 전후 군사독재를 거쳐 촛불저항까지 70여년에 모방하기까지 몸살 중이었다. – 이 저항의 첫 시기가 대학가의 6.3반대운동이었다. 테칸쇼, 인식론을 토대로 주체와 객체, 그리고 주체의 도덕원리의 요청, 본능과 다른 의지의 세계라는 사변적 논의는 일제 강점기 훈육받은 인식의 연장이었다. 푸꼬가 말하는 훈육시대의 학교, 병영, 병원, 감옥 등이 군사정권에서 그대로 시행되어도 인식의 주체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에 포장되어, 파쇼로 흘러가는데 대한 학술적 비판이 미약했고, 운동의 흐름도 정권유지를 위해 무자비하게 체포 구금 당하면서도, 대중이 잘살아보자고 하며 파쇼를 닮은 포퓰리즘에 저항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정보부, 안기부, 사법기관 등의 폭압에서도 저항의 흐름(탈주선)은 솟아났다. 그 탈주선에서 얼마나 많은 열사, 투사, 전사가 감옥에서 또는 의문사로 사라졌던가를 생각하면, 이 산업화를 과학 수입의 승리라기보다 푸꼬가 말한 그대로, 지성(독일철학에서 이성) 광기의 역사였고, 형이상학적으로 속좁은 이성(물자체를 버린 칸트의 오성)의 자기만족에 빠져 삼원성의 논리(네오스콜라주의)로 회귀였다. 이에 새로운 세대는 한편으로 저항적 조직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 학술에서는 산업화와 자본화에 대해 비판하는 사유를 찾아 나선다. 지성(이성)의 인식론이 광기의 극한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치기에는 세계사에서도 1968년이었다. 1968년의 기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군사정권은 3선개헌을 통해서 통치와 훈육, 그리고 통제를 강화하였다.
일본을 통한 지식을 벗어나지 못한 데칸쇼시대, 미국을 통한 도구주의를 넘어서, 독일 나찌즘에 반대하여 파쇼의 공포를 잘 설명한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우선 유입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사회 운동의 전반에서 일본어 번역서적을 통하지 않고, 사회주의 원서를 읽을 수 있을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70학번 세대가 대학원에 진학할 때쯤이었다. 이 저자 현승효도 그 세대인 셈이다. 그는 철학도라기보다 실천가 또는 혁명가였기에 여정남 선배와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70학번 세대가 맑스를 읽기 이전에 60년대 선배들이 사회의 폭압에 대한 저항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로 접근이 먼저 있었다. 그런데 변혁 또는 혁명을 꿈꾸었던 70학번 세대에게 맑스의 역사변증법을 읽어내기 위한 헤겔의 변증법을 읽고 전파한 세대가 있었다.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이 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 미군장교가 들어와 국립대학으로 만드는데 반대하는 운동으로 퇴출당하여 원주에서 실천적으로는 생명운동으로 전환하면서, 60년대 중반에 후배인 김지하(金芝河, 1941-)와 윤노빈(尹老彬, 1941-)을 원주로 불러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었다고 한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80년대 헤겔 읽기는 여러 대학에서 일어났으며, 80년대 중반에는 맑스의 원전에 접근이 가능했다. 현승효는 그의 형이 서울대를 다녔기에 대구의 풍토와 달리 일찍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이었던 에릭 프롬에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구 풍토에서 헤겔을 역사철학과 철학일반에서 벗어나 정신현상학에로 접근도 70년도 후반기였다. 서울에서는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는 프롬을 넘어서, 호르크하이며, 아도르노, 마르쿠제를 학습하고 있었다. 이는 프랑스 68학생운동의 영향도 크다. 당시 소르본 대학 입구에는 3M, 맑스, 마오, 마르쿠제의 플랜카드로 걸려있었다. 다른 한편 정보부에서 발간한 김형욱의 공산주의의 활동과 실제(1972)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 학술인 방식으로 읽기에서, 이영희의 8억 인과의 대화(1977), 김준엽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1976)와 김학준의 러시아 혁명사(1979)등도 있었다. 이제 여기서 이 작품을 넘어서는 몇 가지 이야기를 보태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은 박정희를 이어 안기부의 전두환이 정권을 차지하는 시기에, 곳곳에서 솟아났던 여러 운동들에 이어 민중의 민주화 열기가 광주항쟁을 낳았다. 광주항쟁은 우리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는 움직임과 더불어 실천의 장은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었고, 이에 맞추어 학술운동도 자기 범주를 갖추어 갔다. 헤겔을 읽는 모임들은 당시에는 금서였던 맑스의 원전으로 파고들었다. 민중의 열망은 학술운동과 달리 민주화의 실질적 활동을 전파하며 87년 민주화를 성취하였으나, 정치분야는 이를 수렴하지 못하고 군부의 연장을 허용했다. 학술운동에는 맑스-레닌의 방향과 마오쩌뚱의 방향이 있었는가 하면, 당시의 사상운도의 대중화에서는 주체사상이 표면위로 올라왔다. 이와 더불어 통일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구의 몰락과 소련의 붕괴로 주춤하던 한 때, 프랑스 사회주의 학문에 대해서도 관심이 일어났다. 그러나 들뢰즈의 표현으로 자본제국은 디지털 시대에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로서 통제시대를 가고 있었고, 자본의 또아리는 크고 넓어서 탈주선의 전쟁기계는 파편화되고 침잠하였다, 또아리를 투쟁과 전투로 풀지 못하고 세분화되고 포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미시정치의 통제가 흩어놓았던 다양한 개인을 훈계시대의 기구들(학교 병영, 병원 감옥 등)이 없이도 착취와 명령체계로 만드는 통제시대를 열어갔다. 이는 미세한 흐름조차도 통제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투사와 전사는 토지와 생태에 관심과 더불어, 정보 소통에서도 분출구를 마련하기위해 굴을 파고 있는 셈이다. 흐름은 느리고 여리지만 덩이를 생성하며, 표면의 각질에 균열을 내는 중이다. 통치시대의 연장으로 일제 잔재들이 남긴 대로 군사정권에서 훈육시대를 거치고, 87년 한글 시대와 입말의 성행과 더불어, 물론 경제발전에 힘입어 개인컴 세대가 통제시대에 저항으로 일단 일본을 넘어서자는 운동이 스마트폰과 더불어 합의를 이루었다. 학술 분야에서 사법적 체계가 일본의 아류를 넘어서지 못하는 가운데, 미국식 사법 또는 형법체계의 도입이 조국과 윤석열로 대리 대치되는 과정에서는 일본의 아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수구의 견고한 사고방식은 노론의 사문난적에서부터, 일제의 통치+훈육을 거쳐서, 미국 영향하에 훈육+통제시대에도 이어져 왔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삼원론의 통일성에 대한 신앙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유행처럼 번진 카카오톡과 유투브가 정보소통시대에 제국의 통제시대에 매여있을 것인지, 저항의 흐름들이 탈주선을 마련할 것인지는 비결정적이며 항상 선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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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효의 회향에 관한의 수고본을 예전에 읽었을 때, 나로서는 그의 사유가 단순히 독일철학의 경향이라기보다, 우리가 배운 용어들이 독일철학 경향들이긴 하지만, 독일 철학의 한계에 머물지 않고 폭넓은 사유로서 쓰여진 것으로 느꼈다. 그런 이유는 1970년대까지도 철학이라 하면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로 알려졌기 때문이었고, 실존주의(하이데거, 야스퍼스)가 성행했었던 것도 그리고 동서양을 아우러 보는 막스 베버의 관점과 철학적 인간학의 막스 셸러도 독일 사상의 시각이었다. - 물론 사르트르와 까뮈가 실존주의로서 언급되었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으로는 문학 소양에 더 가까웠다 - 전쟁을 겪었던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가슴에 남은 전쟁의 피해로부터 허무주의에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니체를 읽었던 것도, 또한 역사철학의 시각에서 헤겔을 읽은 것도 독일 철학이 중심역할을 한 것이리라. 세월이 바뀌고, 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철학의 범위에 정치경제학, 사회학, 논리실증주의와 언어분석학, 인류학 등이 알려지고, 그리고 90년대 후반을 지나서 정신분석학, 민족학, 문화과학(예술론)이 논의의 대상으로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학문으로서 철학이 앵글로색슨계를 벗어나 제대로 논의되기 시작하는 것은 1995년 이후 일 것이다. 이 시기에 우선 공론의 장에 프랑스 철학에서 푸꼬가 등장하였다. 게다가 서양 철학에서 중요한 그리스 고전 철학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박홍규 전집” 1권 희랍 철학 논고(1995)과 2권 형이상학 강의(1995)가 나온 이후일 것이다. 철학에서도 다양한 관점이 도래했을지라도, 심정적으로 통일이라는 측면에서 또는 학문의 제일성에서, 철학은 여전히 독일철학을 중심으로 본질로서 관념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여겼다.
회향이라는 개념은 저자의 독특한 용어인데, 저자는 당시까지 지배했던 데칸쇼, 허무주의, 실존주의를 거쳐서, 또는 본질주의와 초월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제시하고 하였다.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하여 아마도 당시까지는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던 초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변혁에 대해 관심이 쏠렸을 것이다. 그에게서 변혁은 자아 또는 인간의 본성을 바로 알고, 정치에서 뿐만이 아니라, 도덕, 종교, 예술에 까지 확장하여, 전통적인 윤리의 장점을 수용하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자고 하였을 것이며, 종교의 이상성과 신화적인 고착성에서도 벗어나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자는 측면에서 예술, 형이상학, 종교에 대해 깊이 사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전에는 읽었을 때는 별 문제거리로 없었던 같은데, 다시 읽으면서 제1장 「회향적 존재」에서부터 숨 막힐 듯한 공포, 그리고 자유를 위한 해방투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제1장의 회양적 원리는 저자의 긴 독서와 사유의 흐름의 시발점인데, 근대철학의 주체 또는 자아로부터 시작함에도, 프롬의 공포로부터 해방에 깊이 몰입되어 있다. 유신정권의 살벌함 때문이었을까.
쪽수를 넘기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때 마다 왜 일까라는 물음을 제기해 보았다. 왜 일까? 생각해보니, 전편에 흐르는 회향은 과거 회귀적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이며, 그 과정에서, 자유의 획득은 불일치를 넘어서려는 투쟁을 통해야 한다는 실천적 입장을 내내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론에 앞서서 혁명을 꿈꾸는 실천가의 공통점일 것이며, 그도 역시 실천과정을 풀어서 정리해 보고자 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엄청난 위협과 위험이라는 공포 속에서 해방되기 위한 급선무로서 스스로 사상의 얼개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글로 쓰지만 실천의 장에서처럼, 불일치를 넘어서 새로운 세계 새로운 범아의 경지를 투쟁의 과정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승리는 자유이며 새로운 세상으로서 회향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완성체로서 회향은 인류사나 철학사에서 과거의 잃어버린 고향이 있었다는 측면을 인정하지만, 이제는 새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다른 고향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썼다는 점이다.
글의 내용들을 보면, 그가 이 글을 쓰기 전에, 얼마나 많은 독서를 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으며,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이미 큰 줄기를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트의 메모의 속에는 1부, 인간 그 자체: 2부 인간의 행위적 산출(종교, 형이상학, 예술): 3부 형성되어야 할 미래로서 회향의 완결(세계국가와 합일적 회향, 기독교와 공산주의 통일)은 현재 출간된 책의 배열과 거의 다르지 않다. 실천을 담보한 체계적이고 방대한 양의 글을 만 1년 1개월 동안에 일반 병들과 같이 생활하는 가운데 썼다는 것은 그의 실천적의지 만큼이나 사상적 정리에 대한 정열과 사명감에 충일해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대하면 깊이 느끼게 된다. 여정남선배의 사형 이후 절박한 심정으로, 새로운 가치의 창안과 실천의 창발로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쓰여진 글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소중한 글이리라. (54PLA)
참, 한 가지 보태야할 것은 저자의 글에서 나오는 몇 가지 용어들을 철학적인 용어로서 한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서 ‘투쟁’은 우리 시대가 말하는 가투와 사투 둘 다를 포함하고, 이런 투쟁에서 해방을 획득하고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의 자유는 권력으로부터 해방(la liberation)과 인성에서 우러나오는 자유(la liberté)를 포괄한다. 실존주의 기투를 자투(自投)라고 쓴 것도 스스로 쟁취하는 의미에서, 숙명(la destinée)이나 운명(le destin)을 극복하여 자발성의 길에서 찾은 피히테의 사명(la destination)에 가깝다. 또한 일치-불일치-일치라는 용어도 헤겔의 변증법의 정반합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변화와 혁명의 과정을 설명하는 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용어의 고유성을 따라가면서, 나치지배보다 심한 공포의 시대에서 해방과 자유를 자발적으로 쟁취하며, 불교와 크리스트교보다 한 단계를 더 나아간 행복한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 열망의 글로 읽어야 할 것이다. (54T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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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회향의 원리에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장 회향의 존재, 제2장 정념과 인식, 제3장 가치와 질서 이다.
회향의 존재인 현존재자는 자아이며, 저자는 자아의 근본적 성격을 탐색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자아는 현 상황에서 특히 당시의 폭압적 군사정권의 상황에서, 프롬이 나치즘 상황에서 분석했듯이, 자아의 해방에 관심이었을 것이다. 자아는 자신의 해방과 스스로 자유를 찾기 위한 힘이 있으며, 그는 이 힘의 발현과 투쟁의 노력으로 존엄한 자기 존재의 회복에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현존재의 상황과 조건은 자아와 비아의 대치에 있으며, 세상의 불일치는 왜 있는가? 원래는 형이상학에서 또는 종교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이 세상의 불일치 속에서 점점 퇴보하고 타락한 것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종교와 형이상학의 문제성을 뒤로 두고, 자아의 능력과 실천에 천착을 다룬다. 현존재의 자아가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범아)를 회복하려는 그 자아는 무엇인가? 자아는 내재적으로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투쟁을 통해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으며 만들 수 있다고 여기며, 따라서 그는 인간이 완전성 또는 통일성을 회복(또는 회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런 자아의 탐구에는 독일 근대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공포로부터 해방에는 초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프롬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당시 그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불일치와 모순의 대치 속에 있으며, 이런 상반된 상황들이 전개되는지를, 저자는 인간의 인식 구조 속에서 파악하려 한다. 철학사적으로 인간의 정념에 속하는 파토스, 현실 사회 속에서 에토스, 순수 지성에 의한 로고스라는 세 측면에서 다루지만, 저자는 자아의 투쟁이 현실 상황과 세계에서 만이 아니라 자아의 형성과 완성에서도, 자아와 비아의 대립과 투쟁을 볼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이런 점에서 대립은 정념과 인식이며, 이의 통일성을 정신으로 보았다. 그는 이 저술 속에서 읽은 문헌을 언급하지 않지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을 읽었다는 편지글을 참조하면, 정념과 인식에 대한 사유는 칸트를 근간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래서 용어상으로 보아, 칸트에서 자아의 오류 추론, 오성의 안티노미, 추론의 극한에서 이상성으로서 신의 성립을 불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게다가 칸트는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을 말했고, 이를 넘어서는 것은, 그리스철학의 에토스론에 닮은, 도덕에서 형이상학을 실현 가능하다고 여기며, 착함이 도덕론에서 필요하다고 여겨 규범적 이상을 요청하게 된다. 이런 입장으로부터, 자아의 정초는 투쟁의 과정에서 찾을 것이고, 그리고 정념과 인식 사이의 대립은 일치-불일치-일치의 길로 가야한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보태면, 저자는 앞의 일치와 뒤의 일치가 다름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면, 뒤의 일치는 일치’일 것이다. 맑스의 가치를 표현하는 방식과 유사성을 볼 수 있다. 그는 여기 인식론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은 - 기계론과 목적론이라 표현하지 않았지만 – 둘 다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고, 통합적 운동을 통해 완전성으로 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런 통합 운동의 실행은 파토스의 정념과 로고스의 인식을 넘어서 자유 실현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가 나중에 피히테를 읽으면서 그의 사유와 유사점을 발견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일치-불일치-일치’로 투쟁을 통한 이행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영향에서 온 것으로 보이지만, 헤겔의 ‘정반합’보다 피히테의 ‘자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인간의 사명’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내가 보기에, 로고스의 과학적 인식의 우선은 진위라는 명제와 판단을 넘어서, 도덕적 가치(선함)와 정치제학의 가치(노동)로 넘어가는 발판이 되고, 나아가 예술적 가치(아름다움)와 종교성의 가치(성스러움) 또한 인식으로 통일성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앵글로색슨의 특성인 것 같다.
자아는 불일치를 해소할 능력이 있고, 게다가 과학적 인식을 통해 완전성과 통일성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이 현존에서 대립과 모순에서 발생한 공포로부터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인식은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삶에서 가치를 세울 수 있으며, 그 가치의 서열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진위를 구별할 수 있는 인간이 주체로서 선악, 미추, 성속을 잘 인식하며, 현실에서 불일치를 넘어서는 창조적 주체로서 세계를 통합할 수 있다(가능성)고 여겼다. - 여기에서 그는 내재적 가능성이 면역성과 유사하다고 하는데, 이런 면역성의 사유는 매우 소중하다. - 그러한 인간의 실천과 투쟁은 자유의지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인간학도 정초할 수 있다고 본다. 실재로 정반합이든 자아와 비아의 투쟁이든, 종래의 스콜라적 인식과 신앙을 넘어서, 인간이 주체로서 새로운 학문을 세울 수 있다는 사상이 퍼져서, 인문학, 심리학, 인류학 등을 포괄하는 인간과학의 태동에서 정립으로 이르는 시기였다. 저자는 베버와 셸러 등의 영향으로 인문학의 갈래로서 사회학과 인간과학에 접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2부에서 나오겠지만 사회학에서 베버(Max Weber, 1864-1920)와인간학에서 셸러(Scheler, 1874-1928)를 읽은 흔적을 볼 수 있다.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실존주의로 이행할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인간이 투쟁을 통한 창조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여기는 점에서 그의 회향은 회고적이거나 회상적인 아닌 미래 지향적이다.
제2부 회양의 경로에서는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4장 종교적 회향, 제5장 예술적 회향, 제6장 인간학적 회향으로 되어 있다.
가치의 위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부분들을 관통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을 행로를 탐구한다. 현상 타파를 위한 자아의 투쟁을 경과하여, 사회와 인류의 가치 실현을 위한 투쟁을 초월적 투쟁으로 간주하였다. 이 책은 이러한 투쟁의 과정을 거쳐 이상향을 찾는 측면을 종교, 예술, 인간학으로 구성하였는데, 저자의 초기 발상은 종교, 형이상학, 예술이었다고 한다. 이런 구상은 콩트(Comte, 1798-1857)가 사회 진보의 단계를,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단계로 보고, 인간의 지식도 진보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유사하며, 프랑스 철학은 실증적 단계가 하나로 수렴되어 통일성과 완전성을 갖기보다 다양성의 발현이란 관점으로 흘러갔다. 그는 우리나라에 수입된 철학의 시각으로 가치의 완성을, 또는 당시 민족통일과제에 염두에 두었을 전반적 저항운동과 마찬가지 통일을 향하듯이 회향의 완성에 초점을 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종교의 발달사를 훑어간다. 원시 종교로부터 자연신앙을 거쳐 다신교에 이르는 길, 그리고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앙의 등장을 서술한다. 구약에서 회귀와 달리 예수에서 혁명적이고 인격적인 측면을 보았다. 그리고 남미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해방신학과 우리나라가 받아들인 민중신학이 도래한 것도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열망이라고 보았다. 그는 맑스의 이상사회 건설과 기독교의 공동체의 건설에서 근접함을 찾고자 하였다. 책 속에는 유일신앙의 신약과 구약뿐만이 아니라 신학자들(독일 신학자)을 견해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그는 불교를 통한 회향도 강조한다. 불교 경전은 기독교 경전보다 훨씬 많이 인용되어, 기독교보다 더 깊이 있게 불교 경전들을 읽은 것 같다. 아마도 여정남 선배의 영향이지 않을까 한다. 일반인이 아함경을 읽어도 그 속에 있는 「념처경」을 주목하지 않고 그냥 아함경의 일부로 지나치는데, 저자는 요즈음 소승불교에 강조하는 ‘념처경’에서 신수심법(身受心法)의 관찰의 중요성도 알았다. 그의 저술 전편에 흐름에서, 독일철학의 경향으로 기독교가 들어와 있는데 비해, 우리 사상에서 유불도의 경향 중에서 불교에 대한 심취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변증법적 논리에 가까운 유식(唯識)의 불이(不二) 치우치기보다, 인민과 더불어 각성하고 범아를 만들어가는 대승적 입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깨달음(각 覺)에서 해탈에 이르는 부처의 길을 니체에서 허무주의의 극복과는 다른 길이라고 여겼으며, 그 각성과 해탈은 인간 본성의 길로 회향이며, 새로운 완성이지 신비가 아니라고 한다. 이런 두 종교의 완성의 길이, 사회에 불평등과 공포를 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맑스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길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당시로서는 포이에르바흐의 인간적 종교로서 크리스트교에 동의하면서, 완수된 회향은 미래적이고 보편적이라 한다. 그리고 능동적 소수의 천재가 앞서서 나아가며, 회향은 항상 미래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연성을 강조한다.
가치 완성 또는 목적론적 의미에서 종교론이 있다면, 가치 실현에서는 예술, 기술, 발명, 이론 생산 등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 그 중에서 각자가 다양한 방면에서 자기실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예술이란 측면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많은 부분을 참조한 하우저(Hauser 1892-1978)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3)를 통하여, 문학과 예술뿐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관념과 학문적 이론 등이 각 시대마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대치하기도 하면서 발전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우저의 책은 구석기에서부터 신석기로, 그리스와 로마 고전시대의 예술을 거쳐서, 중세의 비잔틴예술과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에 들어오기까지 전반적으로 예술사의 이념 대비는 관념 대 자연이었다. 그러나 바로크시대와 신고전주의를 거쳐서 예술의 표현이 사물의 표면에서 심층으로 들어감에 따라, 예술은 인간의 자유의 표현을 드러낸다. 현승효는 심정적으로 종교성을 다루었듯이, 인간적인 것의 표현으로서 예술성을 다룬다, 예술 발달사에서 예술가는 과거에서 현재까지도 자기 이상의 실현으로 창조를 실행했으며, 예술의 창조도 투쟁의 산물이라 한다. 그는 문학과 음악보다 조형예술에 관심을 표하면서 예술가들이 미분화 단계에서 분화를 거치면서 통일을 이루는데, 이런 예술적 이상을 향한 희망과 목적으로 전진의 과정도 회향의 일환이라 본다.
보편적인 가치 실현의 완성의 길로서 종교성을, 그리고 구체적 행위에서 예술작품을 통한 구현의 길을 탐색한 그는 철학과 과학에서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들을 다룬다. 이 부분은 저자 현승효의 중심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철학적 사유의 목적은 행복이며, 일치-불일치-(새)일치로 향하는 회향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고, 공포와 불안을 극복하고 해방과 자유를 실현하여 인간 행복의 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회향의 셋째 장에서 인간학이라고 한 것은 신앙, 예술, 철학 등에서 인간의 일면목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 광경 즉 인간 삶을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데칸쇼 시대가 남긴 자아에 대한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니체식 회의주의 극복을 뢰비트를 불러들이듯이, 방황을 넘어서 인간다운 삶에 대해 셸러와 부버를 읽고, 죽음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실존주의 사상을 섭렵하며, 그래도 종교성과 예술성을 넘어서 인간의 창조성을 강조하였듯이, 여기에 맑스주의를 보태어, 인간학 또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통하여 인간의 일회성을 넘어서려고 무한한 가능성과 내재성을 인정하며 창조성을 강조하려 한다. 저자는 이렇게 자기 사상을 만들어가면서, 또한 상황과 시대의 현존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가능성을, 창조에 힘을 쏟는 영웅적인 인간을 가정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선지자로서 실천가인 그 인간의 투쟁방식은 ‘사랑[아가페] 속에서 투쟁’이어야 한다고 한다. 들뢰즈가 그리스 시대 지혜의 사랑에는 친구, 연인, 주장자, 경쟁자가 있다고 했듯이 ...
제3부는 회향의 완성에서는, 제7장 세계국가와 제8장 범아의 세계로 되어 있다. 이 3부는 앞의 두 부(部)에 비해 훨씬 양이 적은데, 앞의 두 부에서 공포에서 해방, 투쟁에서 자유 쟁취라는 생생한 목소리처럼 써내려온 것에 비해, 회향의 실현을 그려보며 마무리하는 것 같다.
철학자들이면 누구나 플라톤도 벩송도 인간, 공동체, 세계로 향한 사유를 해 왔다. 안중근도 세계평화를 김구도 평화가 세계에 넘치기를 바랐다. 우리의 사상가 현승효도 우리나라만이 해방과 자유를 성취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국가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는 인간 소외를 밝힌 맑스, 제국주의를 알린 레닌, 타자화된 인간을 분석한 정신분석등을 거쳐서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사회민주주의를 거쳐 세계국가가 실현될 것이며, 그 세상에서 범아가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거대한 대립을 통일체로 만드는 것은 범아[대승]의 실현에다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다.
세계는 투쟁을 통해 일치-불일치-(새로운)일치라는 과정을 겪는 회향은 자유의 왕국을 이룰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즉 그 속에서 진아-자아-범아의 길을 가는 개인은 인간 본성을 깨달아 인간다운 삶을 사는 행복에 이른다고 한다. 범아의 세계에서도 자아는 진정한 자유를 구현하며, 실재적 자유의 실행자다.
이제 그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끝내자. <투쟁이 모두 끝나고 회향이 완성된 범아의 세계에는 승리도 패배도 없다. 왜냐하면 자유 그 자체는 누구를 지배하는 것도 복종하는 것도 아니며, 동시에 자유는 전체적인 것이고 완전한 것이고, 또한 단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범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의 통일 속에서 일치가 구현될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제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고, 마침내 완벽한 자유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417, 마지막 문단 전부)> (54T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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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록에 실린 짧은 글도 만만치 않다. 부록은 “일기”에서 발췌된 부분을 몇가지를 실어 놓았는데, 그의 사유의 편력에서 깊이와 넓이를 볼 수 있다. 그가 사유의 틀과 줄거리를 만들면서 지면상(노트)으로 빠져있지만, 연관된 책들과 사유를 끊임없이 펼쳐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카프카의 성과 「율법의 문」에 관한 것이고, 그리고 “생각이 우연히 본 피히테(Fichte)와 너무나 유사해서 지금 쩔쩔 매고 있소.”라는 피히테의 언급은 그가 사유를 더욱 넓게 깊게 하는 과정 중이었을 것이고, 자료들의 총체적 정리의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 애석하고 애석하도다. (54T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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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오기까지 홍승용 교수는 현승효가 틈틈이 써 논 노트들을 일차적 배열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 내용의 일관성을 맞추기 위해 퍼즐을 짜 맞추듯이 배치를 했어야 했을 것이다. 이 두 과정은 현승효 사유 과정을 관통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노력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며 내용에 정통해야 한다. 배치로서 각 장과 소절들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소절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은 더욱 지난한 작업이다. 해보지 않은 이들은 잘 알 수 없는 것이리라. 만일 학위 논문을 써 본 이는, 학위 논문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이 연구 노트들이 이리저리 바뀌고 첨가되고 부분적으로 사라지는지를 알 것이다. 크게 보아 장과 절 그리고 절들의 사이의 연관의 맥락이 잡혔다고 하더라도 문단과 문단 사이, 그리고 어디서 문단을 나눌 것인지는 원작자(현승효)에게 물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작업은 머리를 싸매는 작업이다. 전체의 흐름뿐만이 아니라, 각 용어들이 위치해야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문장이 읽히게 하는 데는 또 다른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독자들이 읽어 나갈 경우에 내용상의 어려움을 감수할 생각을 하였겠지만, 편집자는 저자의 머리 속에 들어가 보거나 또는 저자의 사유에 공감해야만 가능하였을 법한 노력의 결실로서 이 책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비약과 약간의 단절, 그리고 인용 없이 쓰여진 내용의 진위에까지 탐구해 들어가지 않더라도, 죽 읽어나가면 우리의 사상가 현승효가 이런 생각과 저런 연관들을 통과하려고 문제거리로 삼았을 것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독자에게 다가가게 하는 데는 홍승용 선생님의 공이 매우 크다. 아는 사람은 이 기나긴 작업이 얼마나 시간과 노력이 들었으며, 아마도 홍선생님은 현승효의 영혼 속에 들락날락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벩송이 말하듯이 예술가의 진정한 창조물은 창조물의 외부적 형식이나 요소들의 종합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작품 속에서 특히 소설작품 속에서 몰입 또는 동의하면서 그 작중 인물과 더불어 작가와 내적 공감과 일치에 이룰 때 그 작품과 그 작가를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한다. 아마도 창조물에 대한 공감은 작가의 영혼과 일치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저술은 한 사상가의 사유 전체를 드러냈고, 편집자는 또한 저자와 내적 조율과 연대를 통해 일치에 이른 것이 아닐까 한다. 좋은 번역자는 새로운 작품을 창안하는 효과를 갖듯이, 편집에서 배열과 접속의 연결을 잘 이룬 이 책은 시대의 한 장을 마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시대를 알린 생생한 목소리가 들어 있는 글이다. 만난 적이 없는 편집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54TLH)
(13:14, 54TME)(13:14, 54TMF: 빼고 보태도 양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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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의 사상가들
1824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1) 조선 말기 동학의 창시자, 천도교 창시자. 아명은 복술(福述), 호는 수운(水雲)이며, 본관은 경주. 동경대전, 용담유사
1894 이관용(李灌鎔, 1891/4-1933)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의 한국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한국사회당 대표로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도 참여했다. 1921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1901 씨알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동경사범 출신, 박정희 유신에 저항한 재야 학자.
1902 산수 이종률(1902(5?)-1989)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 『민족혁명론』(1989)
1903 신남철(申南徹, 1903/7-?), 경성제대. 역사철학(1948), 김일성 대학 교수,
1909 박치우(朴致祐 1909-1949), 경성제대, 파르티잔 활동. 사상과 현실(1946)
1928 장일순(張壹淳, 1928-1994) 경성공업전문학교 재학시, 미군 대령을 총장으로 하는 후신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운동(국대안 파동)을 하다 제적. 원주에 정착, 대성학원 설립. 중립평화통일안 때문에 1961년 5.16 군사정권에 의해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옥살이를 하다. 1971년 10월 지학순 주교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가두시위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을 하게 된다. 이후 농민 운동을 하였다.
1933 안재구(安在求 1933-2020년 7월 8일) 수학자, 경북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 레포 활동과 남민전 전사. 수학문화사
1934 박현채(朴玄埰, 1934-1995) - 신남철의 과제이자 당시 유물론의 관심사였던 민주 경제의 문제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31) [과제는 박현채(朴玄埰, 1934-1995)로 이어진다고 해야 할까?] 박치우는 부르주아 시민계급의 평등한 일대일의 자유를.
1937 이수병(李銖秉, 1937-1975) 경남 의령, 1953 부산사범학교 입학, 1956 부산대학교 교육학과 입학 민족청년동맹(민민청) 합류, 1971 경락연구회. 2차 인혁당 사건, 사형. 암장
1941 윤노빈(尹老彬, 1941-) 강원도 원주,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 철학박사. 부산대 교수, 김지하와 함께 장일순 아래서 헤겔 현상학을 읽다. 신생철학(1974). 1982년 가족과 함께 월북. 나의 스승 윤노빈에 대한 기억-이병길님 홈피 참조.
1941 신영복(申榮福, 1941-2016) 경제학자, 작가, 성공회 대학교수. 통혁당 사건으로 20년간 복역.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1947 홍세화(洪世和, 1947-)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작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프랑스 망명. 파리의 택시 운전사(1995)
1950 현승효(玄勝孝, 1950-1977), 경북대 의대 재학중 강제징집.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 자유와 투쟁(2021)(1977년 수고본)
1952 이규성(李圭成, 1952-2021), 이화여대 철학과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 2012(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 2016(동녘), 중국현대철학사론 획득과 상실의 역사(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06 30)
[벩송은 역사적으로 자유의 발현이 간헐적으로 그리고 폭발적으로 솟아난다고 하였다. -
자유문제의 진화(L'évolution du problème de la liberté, 1904-1905강의)에서]
(14:16, 54TMB) (14:13, 54T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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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향의 인간학적 원리: 자유와 투쟁 내용 중에서 ㅡ [아래 글에서 꺽쇠[]는 ‘천야’의 글이다.]
책머리에 (7-9)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 내가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된 단서는, 부단히 우리를 투쟁하게 하고 갈등하게 하는 실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서 인간은 영원한 만족 속에 안주할 수 없는가, 또 이 고통과 아픔을 우리가 어떻게 소화해야 하겠는가하는 물음이다. 나는 작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 그 성과를 바탕으로 위대한 사상들, 인류의 찬란한 유산인 자유주의, 이성주의, 변증법, 실존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와 허무주의를 검토하려고 한다.(7)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절대적인 것은 자유의 이념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생명마저 바쳐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지고의 가치인 인간회복의 원동력이 되고 인간의 존엄을 승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낭만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7-8)
니체를 포함한 이 사상가들의 허무주의에서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되고 인간이 절대주권자가 된다. 인간이 절대 주권자가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는 논리에 빠짐으로써, 오히려 인간이 인간을 단되하게 되고 인간타살의 정당성까지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인간 해방이라는 깃발아래 진군의 나팔을 분 군대였으나 결국 인간말살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아서 인간의 가슴에 커다란 회오를 심어줄 뿐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8)
나는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자유의 이념 속에서 인간존엄과 인간해방의 척도를 찾았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인간에겐 투쟁과 창조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8)
의식의 깊고 낮음이나 지식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세계에 대한 모든 사람의 관계와 그들이 서 있는 위치는 동일하다. ... / 동일한 인간이라는 위치에서 위대한 선각자들이 인류에게 제시한 참된 인생의 모습도 궁극적으로는 불일치에서의 해방, 즉 일치로의 진전이라는 면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 이제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심해에 매몰된 아틀란티스처럼 발굴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내부로들어가야 한다. (9)
제1부 회향의 원리/ 11
제1장 회향적 존재/ 13-86
[현존재의 조건 또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고향상실이다. 여기서 공포, 불안 등은 현존재인 자아가 비아와 투쟁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투쟁이 있다. 투쟁의 승리는 고향회복 즉 회향이며, 이는 단순한 도착점이 아니라 완전함의 성취에서 온다. 그런데 현존재의 내면에 그 힘이 있다. 내재적 힘은 인간만이 갖는 실재적 완성에 대한 인식이 있다. 잃어버린 완전성의 회복으로 가는 존재이다.]
현재 상황에서 투쟁적 인간이 지향하는 것은 일치로의 회귀다. 이를 나는 회향이라고 칭한다. (13)
자유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연과 일상의 제약 속에서 자유를 추구해야 하고 심지어 자유의 결핍을 의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자유에 대한 현실적 제약이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제약이 없던 상태를 상정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를 인간의 잃어버린 고향이라고 볼 때, 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운동, 완전한 자유 상태를 구현하는 이 투쟁, 즉 회향의 관점에서, 제반 개념과 위대한 사상들을 재해석하고 오늘날 가능한 회향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을 축소하고 해체하는 속박과 제한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이 제한과 속박은 인간 실재의 근원이며, 해방의 발판이자 자유의 싹이다. 그것이 인간을 전체적인 상태로 이끌어갈 때 그렇다. (17)
논의를 더 진행하기 위해 먼저 자유 개념을 좀 더 살펴보자. 자유에는 다음 요소가 포함된다. ① 무엇으로부터의 해방. ② 일체의 의존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자기존재. ③ 과부족이 없는 자기존재의 충만 등이 그것이다. 인간은 자각을 통해 이 자유가 현존함을 인지한다. [가본 19]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존엄한 자기 존재의 회복이다. (21)
그리고 그 목적이 완성되었을 때 인간은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지적하듯이, 그것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순간에 인간은 다시 자신에 대한 불안감과 갈등을 느낀다. 이와 관련해 프롬은 복종과 연대에 의한 불안의 해소라는 파시즘의 메커니즘을 이야기할 뿐, 순수 자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22]
인간존재는 최고 불일치의 존재다. .. 오직 인간 실존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만이 회향으로 귀결된다. (27)
우리는 인간이 회향적 존재임을 확인하고, 회향의 완전한 실현과 범아의 형성을 위한 좌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32)
예컨대 기독교의 원리를 보면, 에덴동산에서 하나의 일치 속에 있던 인간이 원죄에 의해 추방되는 것은 분리를 의미하며 나아가 기독교의 소망이란 이 분리에서의 구제 즉 다시 신과의 교감 속에 복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불교에서도 동일하다. 수, 화, 지, 풍의 네 가지 요인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번뇌하는 존재다. 그는 자신의 원래 본체가 공이고 무임을 알기에 목적의 왕국인 열반에 이르고자 한다. 또한 맑스주의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나 물신적 지배의 갈등으로 본다. 그 필연적 귀결로서 맑스가 상정하는 것은 일체의 착취나 질곡이 해소된 이상향, 국가도 사멸하는 공산사회다. 이러한 공산사회에 대한 조명을 그는 원시공산사회로부터 얻는다. [32]
이처럼 신의 주권 하에서만 의의를 부여받는다고 믿는 신앙인들은 사실상 영원히 회향을 포기한 우주의 미아이다. ... 그러나 인간을 진아→자아 →회향의 실현자인 범아에 이르는 전체 경로에서 고찰하면, 신[완전상태 엔텔레키]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원리라기보다, 완전성에 이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36)
기독교는 언제나 현존재와 강력히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야말로 현존재의 가장 숭고한 인간상, 회향을 지향하는 존재의 본보기다. 그는 죽음을 대면함으로써 삶과 죽음을 초월한 전형적 인간상이다. 그래서 인간이 회향을 지향하는 한, 그는 추앙받고 존경받을 것이다. 기독교의 강력한 힘은 현존재적이면서 지향성을 지닌다는 데에 있다. 불교는 기독교가 숙제로 남긴 부분, 즉 회향의 모습을 보여준다. 불교에서는 언제나 회향이 문제이지 현존재는 오직 그 출발로서 의의를 가질 뿐이다. (47)
우리는 존재의 인간화에 대해 좀 더 심원한 것을 탐구해야 하지만, 우선 현존재적 세계를 직면할 때의 이질감으로 인한 공포를 거치지 않으면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 (57)
물론 이 타자도 상황 속에서 자기와 같이 한정되고 제약되는 존재지만, 상호관계 속에서는 무한정한 존재, 무제약적인 존재도 경험된다. 우리가 문제로 삼는 인간의 전체성이란 결코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단독자에 의해서도, 하이데거가 말하는 결의한 자아라는 폐쇄적 자아에서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런 점에서 포이어바흐를 지지한다. 즉 개인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인간 본질은 인간과 인간의 통일 속에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이란 개인적 인간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간을 지칭한다. (60)
상황 속에서 인간이 가지는 함수 관계를 고찰할 때, 인간은 그의 본성과 세계의 관계에서 삼중의 함수관계를 이룬다. ① 자아로서의 인간과 비아로서의 우주 사물의 관계, 즉 자아 대 비아의 관계. ② 개인으로서의 자아에 대응하는 타자아로서의 다수 인간을 포함한 인간관계, 즉 자아 대 타자아의 관계. ③ 자아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참 존재와 가지는 관계. 회향과 관련해서는 이 자기존재에 대한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관계는 위의 두 관계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지만, 회향을 자각한 인간에게는 위의 두 관계가 셋째 관계에 의하여 지배된다. (61)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공간, 즉 무제약적 시간⋅공간이라는 것은 적어도 비상황⋅탈상황적 진아에게만 가능한 가상적인 것이다. 인간의 운동인 투쟁이 상황적 제약을 파괴할 때, 운동의 영원한 계속은 없다. 투쟁은 단지 불일치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계속된다. (64)
완전한 정지, 자족의 상태, 다시 말하면 자유의 완전성은 일체의 시공간에서 해방된 상태, 곧 신의 경지를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인 감성계의 일체 존재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기 때문이다. (69)
그러나 올림포스에서는 아직 불일치가 완전히 극복되지 않으며, 그것이 불일치를 잉태하고 있는 한, 그리스 신화는 또 다른 단계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신의 최고봉으로서 유대의 신, 즉 전지전능하며 유일한 신, 여호와의 승리로 나타난다. 그리스인은 유대인에 비해 더 현실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은 현존재적 존재일 뿐 아니라 미래지향적 회향적 존재이기도 하므로 그리스인에 대한 유대인의 종교적 승리는 필연적이다. (71)
§ 자투(自投)와 회향 (72)
현존재적 자아는 생래적 반응체인 감정과 능동적 도전체인 인식및 자유의지라는 두개의 경로로 길고도 험한 회향 길을 헤쳐 간다. 여기서 인식과 자유의지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연쇄를 이룬다. (72)
자투는 그 원래적 속성으로 인해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소극적 자유의 방어능력, 즉 인간 실체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능력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우리는 미생물과 곤충에게서도 더듬이나 촉수 등을 통해 비아에 대응하는 그들 고유의 방법을 본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둘째는 적극적 자유를 지향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자연은 정화되고, 지향⋅통일의 능력에 의해서 정화의 관념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미 인간이 인식이라는 무기를 사용하고 난 후에 우리를 엄습하는 것은 이차적 공포다. 이차적 공포는 어마어마한 우주적 공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주의 이단자인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의식할 때 무언가 이상하고 아직 형용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는 그런 느낌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동굴을 마주하고 섰을 때 우리는 그저 어마어마한 공포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분에 직면한다. (79)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서 우리는 자투와 피투의 모순을 자투 속에서 해소하고 자투를 전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즉 실재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주어져 있는 인간 실체가 자투를 행함으로써 인식이 형성되고, 이는 실재로 전환된다. 가능성이 자투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자투를 통해 비로소 실재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은 통일될 수 있다. 자투는 양면적이다. 그 전면, 즉 비실재적인 것이 실재화되는 경로가 바로 인식이다. 그 이면, 즉 실재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창조다. (83)
{권위 있는 역사철학 속에서 인류가 얻은 세계사의 열쇠는 세계이념의 실현, 계급투쟁, 자유의 확대 등으로 정의되고 있다. 회향의 과정이야말로 자유의 확대, 투쟁의 과정이며 동시에 종교사, 철학사, 그리고 예술사 등 제 영역의 최대공약수를 형성한다. (86-87)}
제2장 정념과 인식 87-140
[완성을 향한 자아와 비아의 투쟁은 자아 내부에 정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정념을 넘어서 인식으로 그리고 정신으로 향한다. 정념은 신체와 정신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정념의 이중성으로 신체에 머물게 되면 비극이 된다. 정신으로 향한 정념은 감응과 감동으로 완전을 향한 힘을 발휘하는 역동성이 된다. 이런 신체와 정신의 통합의 과정은 정념만이 아니라 언어에서 사고에서도 통합을 향한 길이 있다. 이중성은 불안과 공포를 낳는데 비해 통합은 새로운 완전성을 향한다. A → B → A’ 이다. 이런 과정을 보면 원인의 시초는 현존재 안에 내재하며, 그 내재성의 발현과정에서 이중성에 맞주친다. 현존재에서 자아의 이중성, 그리고 세계에 대한 관점에서 유물론과 유심론, 완전성에서 [기계론과 목적론]은 모두 오류를 범하다. 통합적 운동을 통해 완전성으로 나간다. 실천은 정념과 인식을 넘어서 자유 실현의 길을 간다. ]
정념의 첫 단계는 우리의 신체에서 출발한다. 정념의 단초는 감각을 움직이는 대상에 의해 일어나게 되고 이런 감각 대상이 정념을 일으키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은 자아에 대응하는 비아를 감지한다. .../ 불일치 극복에 기여하는 인류 최초의 정념은 불안이었을 것이다. 인식하고 감각하는 인간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을 의식할 때 불일치를 느낀다. ../심적 갈등은 투쟁을 결단하게 만든다. 불일치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투쟁의 목표는 불일치의 해소, 즉 일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다. (87)
정념은 양가적인 것이므로 자연적 요인에서 완전히 탈피할 수 없고, 따라서 불일치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불일치 해소의 최종 결정력은 비육체적인 정신적 능동력에 있으므로, 정념이라는 중개자는 불일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치와 불일치를 비결정적인 상태로 반영하는 데에만 관여한다. 이때 회양과 직결되는 정념의 정신적 측면에는 1) 불일치를 감지하고, 2) 불일치 속에 있음을 알고, 3) 불일치 속에서 해방을 원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93-94)
즉 경이는 단순히 비아가 유발하는 불일치를 거의 즉각적인 반응 수준에서 감지하는 것이다. 인류의 발달사는 이 경이에서 시작된다.태초에 인간에게는 전 우주가 오직 경이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94)
최대의 공포는 주로 최대의 불일치로 인한 파괴와 관련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는 아직 인식으로서의 무(無) 개념이 확립되기 이전 단계이다. 상반신은 사람이고 다리와 꼬리는 염소이며 이마에 뿔이 있는 그리스 신화의 목신(Pan)의 모습은 공포의 상징이며, 공황 즉 패닉(panic)의 어원이기도 하다. 인간 인식이 양적 수용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인간 각자에 따라 주관적으로 차이를 가진다. 따라서 각자에 따라 공포의 내용도 상이하며 고대인에게 현대인보다 더욱 공포의 정념이 강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공포는 신비주의의 모태이기도 하다. (96)
고매한 인간은 오직 자신의 내적 법칙만을 가지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서는 비-의존적이며 타인의 정념을 자신 속에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는 하이데거가말하는 세인(das Man)의 비난이나 기쁨으로 인해 동요되지 않는 의연함을 지닌다. 동시에 고매한 인간은 타인을 경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타인에 비-의존적인 자기의지에 의한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타인도 자기와 동일한 자기 책임적 존재로 보며, 그런 인식과 감정을 가진다고 확신한다. (101)
이처럼 인식의 최고봉인 무 개념이 대두될 때, 인간존재는 불일치에 대한 투쟁을 결단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즉 인식에 이어지는 의지에 의해서 인간은 무에 도전하며 또한 근원적 불일치에 도전한다. 인간은 행위에 의해 부단히 창조적 유를 지향함으로써 무를 거부하며, 따라서 존재와 무의 상충관계의 불일치를 해소하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정신의학에서 무에 직면한 자가 발작적으로 행위를 벌인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인간은 죽음을 직면할 때 가장 정열적으로 투쟁하며 종말을 예감할 때 자신의 최선을 다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회향은 바로 창조 속에 실재하는 최선의 것,즉 완전성을 위한 것이다. (113)
언어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실향민임을 보여준다.우리의 지식은 우리 자신과의 관계 하에서만 생산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인간 언어의 구조에서 충분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언제나 정신의 발달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일차로 드러나는 것이 외계이므로 가려져 있는 우리의 정신을 서술할 때에도 물질적 외계와의 유추를 통해 정신을 표현한다. 그것은 언제나 메타포다. 명쾌한(luminous, clear)이라고 정신영역에 사용되는 언어는 자연적 빛과 물질적 대상의 메타포다. 우리는 자연의 소재를 통해 정신을 표현한다. ‘정신의 배후에’라는 말도 공간의 메타포다.이러한 것은 유물론이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13-114)
야스퍼스, 사르트르, 하이데거 .. (116-117)
확실히 통정적 원리는 요청적 사실에 대한 필요의 누적에 의해 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 무제약성에 도달했을 때, 가능성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이제는 실재성을 얻었다고 믿기 시작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제 이렇게 얻은 실재성에 근거해 모든 것을 역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일한 길을 다시 내려오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현존재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는 데에 감탄하며, 그것을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느낀다. (118-119)
그러나 변증법은 결코 절대화와 양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만이 활용할 수 있는 논리다. 반면에 상부구조로서의 인간 정신성이 하부구조의 반영으로 결정된다고 보아 하부구조를 절대화할 경우 사유의 자유는 질식될 것이다.완전성은 일체의 운동이 정지하는 곳이다. 현존재는 일체의 운동이 진행되는 곳이다. 따라서 현존재에는 운동 전개의 논리인 변증법적 논리를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 (127)
§. 유물론과 관념론의 통일. 128-132
이러한 전체적, 일회적 회귀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 근원은 결국 실향에 있다. 인간적 사실에서 근원적인 문제는 유물론이나 관념론이 아니라 실향이라는 상황에 있다. (132)
이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인식과 마찬가지로 정념도 소멸할 것이다. .../... 그러므로 현존재의 회향은 오직 관계의 파괴라는 행위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이 행위가 아닌 안주는 영원한 실향을 뜻한다. 이때 관계란 불일치로서의 관계다. 만일 그 관계가 질곡이 아닌 관계일 경우 인간은 자신에 침잠함으로써 공(空)에 도달할 수 있고, 이때 회향은 완결된다. 회향은 외적인 것에서 시작되더라도 내면에서 완결되는 것이다. (140)
제3장 가치와 창조 141-181
[현존에서 공포의 벗어남과 인식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형성 또는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가치론은 사회와 경제의 것이 아니라 인성의 실현으로서 가치로서 도덕과 윤리 나아가 종교의 것이다. 가치에서 진리는 삶과 행위에서 진리이며 인식의 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현실에서 불일치를 삶의 최고, 통합을 이끄는 것은 주체이다. 이 주체는 종교에서 신에 매인 것이라기보다 스스로 완성으로 나가는 주체이며 불일치의 해소에서, - 1장의 공포로부터 해방으로서 자유와 더불어 - 삶에서 반복과 자기 발견으로 이루는 창조이다. 이 창조는 무에 유의 창조라기보다 통일장[공동체 완성, 큰수레를 타고감]을 이루는 것으로 환희이다. 이는 자유 실현의 향유보다 넓고 깊은 차원, 화학적 일치와 같다. 내재적 힘은 어쩌면 면역성과 같은 것일 것이다. (54PKI).]
§ 가치서열과 가치척도145-152
인간은 자연의 영역으로부터 가치의 영역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이것이 거부될 경우 반-자연적 반항을 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통일을 향한 진전이다.... 모든 인간은 가치의 주체라는 동일한 책임의 주체 위치에서 행위의 좌표를 설정한다. 따라서 그의 도덕적 갈등의 배후에 있는 것은 가치와 반가치의 대립이 아니라 가치서열상의 대립이다. (148)
갈증으로 물을 마시려고 하는 짐승이 물을 찾는 것이 자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치서열인 선과 악의 투쟁은 인간이 인간인 한 언제나 선의 승리로 귀결된다. (152)
의학의 기초 면역학을 공부한 자는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체의 면역세포는 어떤 물질에 대해 길항적 가능성으로 미리 주어져 있고, 어떤 세균이나 물질의 침입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날 때에만 이 가능성이 미리 우리의 세포 속에잠재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성으로 주어져 있는 가능성 자체는 불변적인 것이고, 이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표출이 될 때 그것은 가변적인 것이다. (157)
회향을 철학적으로 모색하는 우리는 숙명적 기계론의 어떠한 논리도 단호히 배격한다. 자유란 오직 다양하게 주어지는 가능성의 실현에 있으므로 우리의 철학은 행동의 철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의 이론은 행동의 안내서다. (158)
그러나 창조의 최고 형태인 자존자의 합일도 인식의 대상이 될 때에는 숙명적 비극이 불사신처럼 다시 살아나서 우리를 괴롭힌다. 이 합일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인간 집단으로서 대상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거대한 소외로 나타난다.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가 낳은 소외로부터 도피하는 가운데 파쇼 독재가 태어난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정당하다. (160)
국가는 세계국가와, 개별 자아는 범아와, 자연은 물아일체(物我一体)와 구별된다. 이 모든 구별로부터, 자유의 실체인 자기존재 자체로의 복귀라는 관점에서,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는 내적 필연성이 도출된다. 우리가 존재 자체에서 만나는 실재는 진리 창조의 토대가 된다. (163) [실재성은 마치 면역성처럼 다양체이다.]
§ 자유의지와 신앙 170-174
자유의지를 고취하고 발휘하기 위해 인간은 모든 노력을 다할 필요가 있다. 회향을 위해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뜻한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의 뒤를 잇는 세대들에게 주입시키고 끊임없이 교육할 때, 다음 세대는 타인을 위한 의무의 완수를 배우기보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인간됨의 실현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170)
모든 비아와의 단절로 얻는 것이 피안이자 열반이라면, 여기에는 어떤 정념적 신앙도 인식적 지성도 없다. 불교는 그 자체로 무종교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따라서 석가는 결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또 그 자신 예배의 대상이 아님을 설파하고 있다. (173)
포이어바흐가 자기 철학의 최고의 대상으로 본 인간은 결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 너와 나의 결합된 인간이다. 그는 강령적 저서인 미래철학의 근본원리에서 “고독한 개인은 도덕적 존재로서도 사색적인 존재로서도 인간 본질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인간의 본질은 공동체 속에만, 인간과 인간의 통합 속에만, 그러나 오로지 나와 너라고 하는 차이성 위에서 성립되는 통합 속에만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177)
불일치를 전제하고 이를 철저화함으로써만 일치가 가능하다고 할 때 일치는 불일치의 산물에 불과하다. 일치가 반자연적 산물이라면 일치는 무에서 창조된 유가 아니라, 발견과 반복을 통해 창조된 것이며, 순수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인식 수단으로는 불가해한 존재인 창조는 공포가 아니라 희열의 존재로서 대두된다. 이로써 창조적 주체와 창조의 관계가 충분히 설명된다. 이 양자의 관계는 불일치의 해소, 즉 하나의 합일이 완결된 상태로서, 통일장의 영역과 거의 유사한 것이다. 이 합일 상태에서야말로 저 창조의 희열, 창조가 주는 환희를 우리는 모순 없이 경험할 수 있다. 창조 과정에서 나오는 희열은 통일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181)
제2부 회향의 경로/ 183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는 사회 진보의 단계를,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단계로 보고, 인간의 지식도 진보한다고 주장했다. 실증적 인류학으로 1859년 파리에서 인류학자 폴 브로카(Paul Broca, 1824-1880)등에 의해 설립되었다. - 이 해에는 특이성이 여럿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되었고, 리만에 의해 그 유명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였으며, 흥미롭게도 파리 언어학회가 루소 이래로 전개된 언어의 기원론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제4장 종교적 회향 185-246
[초월적 투쟁이란 이 단계를 넘어서가는 지속하는 운동과 같다. 종교의 발생과 발전과정에서 이런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원시 종교에서 물신에서 다신교가 있었고 기독교에서 유일신앙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구약은 향수의 회귀임에도 예수에 이르러 새로운 세상의 합일로서 회향을 향한다. 그럼에도 예수를 혁명적 인간적인 측면보다 절대자로 만듦으로서 한계를 보일 때, 우리시대의 민중신앙(해방신학)으로서 기독교가 도래하였다. 인간적 투쟁과정에 대한 고찰은 불교에서 분명하다. 중아함경에 나오는 「념처경」에서 사념처법으로 신수심법(身受心法)의 관찰과 그 다음 높은 경지의 정진을 요구한다. 그 정진의 과정은 허무주의를 넘어서는 반야바라밀로 이르는 노력이다.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으로서 상품을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때, 그것이 자본주의 소멸로 귀결되는 것과 같이, 원죄에서 출발하는 기독교는 그것의 소멸로 진행된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삶을 고뇌로 보고 출발한 불교에서 그 귀결은 필연적으로 고뇌의 소멸인 열반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225) 그는 유일신앙이 대중과 더불어 활동하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불교에 관심처럼 포이에르바하에 관심을 표한다. 그러고 나서 완결된 회향은 미래적이고 보편적이며, 능동적 소수의 천재가 선봉이 되어 합일 과정을 미래에 이루어갈 것이다. 회향과 합일은 항상 미래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252) 한다. (54PLA)]
인류애와 인격창조를 추구하는 한 회향은 인간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회향의 경로를 밝히려면 다양한 종교들의 본질적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6) [인간학적 관점을 종교 -> 예술 -> 인간학으로 설정하였다.]
불일치에 대한 불일치인 투쟁을 전개하는 회향적 인간은 이미 그의 삶의 성격을 생성하고 소멸하고 그리고 다시 생성하는 순환적 자연의 운동 속에 머문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투쟁에서 극단적 사태인 죽음을 직면해도 그 투쟁을 끝까지 수행함으로써 죽음을 초월하는영원한 삶으로도약할 수 있다. 그는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190)
[자연종교에서 종교의 발달과정을 일반적인 순서로 일별하고 난 뒤에, 기독교와 불교를 통해서도, 완전한 저세상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새로운 세상, 즉 회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설파한다.]
남아메리카에서는 19세기 제국주의적 선진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해방투쟁을 신학화함으로써,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는 흑인들의 인종문제에 따른 인류의 구원문제와 씨름함으로써, 포스트 기독교적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 기독교 조류는, 구원 즉 회향은 개인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 정신으로 사는 새 공동체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새 공동체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투여하는 것이다. / ...기독교의 운명은 기독교인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회향의 진로는 우리를 인류해방 전선으로 안내한다. (220)
인식의 한계 형태인 허무주의를 철저히 고양함으로써 회향을 추구한 인류의 위대한 업적은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 (221)
탐구의 출발점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으로서 상품을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때, 그것이 자본주의의 소멸로 귀결된 것과 같이, 원죄에서 출발하는 기독교는 그것의 소멸로 진행된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삶을 고뇌로 보고 출발한 불교에서 그 귀결은 필연적으로 고뇌의 소멸인 열반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225)
불교와 예술적 창조가 인간학적 자유의지를 고수한 채 이룩한 회향은 창조적 소수에게만 가능하다. ... 창조만이 인류를 능동적으로 회향에도달시킬 수 있다. 예술적 창조가 개인적일 뿐이라면, 창조와 인격해방의 합일은 인간학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창조적 소수 천재들 자신이 선봉에 선 합일 과정에서 회향은 영원한 미래에 실현될 것이다. 창조적 소수는 자신의 생산성을 통해 전 인류를 창조의 대열에 능동적으로 참여케 하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 회향과 합일은 항상 미래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245-246)
제5장 예술적 회향/ 247-281
[심정적으로 종교성을 다루었고, 인간적인 것의 표현으로서 예술을 다룬다. 인류가 예술작품을 점점 더 자신의 창조력을 발현하는 쪽으로 나간 것도, 미분화와 분화 사이에 불일치를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구석기에서 신석기 그리스와 고전시대의 예술을 거쳐서 현대예술까지,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3)를통하여, 예술에서 인간의 진심, 즉 범아의 실현 노력도 자유의 투쟁과 마찬가지의 전진과 진화의 길이라고 한다. 예술은 창조적이라고, 문학과 음악보다 조형 예술사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그는 예술 자체가 투쟁이며 창조로 보고서, 예술가들이 미분화 단계에서 분화로 그리고 통일을 이루면서, 내적 통일을 이루는 과정을 보아야 한다고 한다.]
인류가 경제적⋅정치적으로나 문화 전반에서 자유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향적 모색에서 인류가 루소나 몽테스키외를 탄생시키고 맑스를 불러낸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255) - [인류사에서 인민에게 자의식의 발동이 일어나는 것은 손이 자유로워야 한다. 정치경제학적으로 두 가지, 하나는 증기기관(루소의 자연권) 다른 하나는 모터이다(맑스 공산당 선언). 이제 인민이 정치에 관여하게 된다. 혁명이 있을 수 있다.]
예술은 그 자체가 투쟁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창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투쟁이 구체적 목적을 발견하느냐 못하느냐이다. 투쟁과 목적이 미분화된 상태에서는 목적이 조망되면서 희망 속에서 상징을 통해 목적을 향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적이다. 자기존재의 분화가 이루어질 경우의 투쟁은 오직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가교로서, 회의와 갈등이 있더라도 목적을 성실히 추구하면 된다. 그것은 미래적이다. (279)
제6장 인간학적 회향/ 282-378
[저자의 중심 사상은 여기에 있다. 철학과 과학 그리고 삶에서 목적은 행복인데, 행복을 위한 노력으로 선한 행위가 있고 또한 그 행동을 통해 자아의 완성의 길로 간다. 도덕과 종교는 자아가 자연의 변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모습을 인간이 만들 수 있다는 인식에서 나올 것이다. 어떤 종과도 다른 사회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과거의 회귀라기보다 새로운 세상 건설하는 끊임없는 노력과 실행의 힘을 또다시 새로이 길어 올리는 회향일 것이다.(54PLB)]
[철학사 개관으로는, 일제 강점기에 남겨진 철학사를 그대로 따라간다. 소크라테스로부터 근세철학은 베이컨과 데카르트, 칸트로 이어지는 계몽의 철학은 맑스에 와서야 심리학과 더불어 철학이 실증 과학들과 함께 발전하면서 인간학으로 전개된다. 인간학이 자연을 토대로 삼는 한계에서 벗어나 무제약적 무한정의 실천으로서 형이상학을 요청하는데, 그 근거를 앞에서 종교와 예술에서 빌어 왔으며, 공동체를 창조하는 실천 투쟁(혁명)이 있어야 한다. 투쟁하는 자가 특이자(소수자)로서 고독이 있다. 전쟁을 겪은 데칸쇼 시대의 난점은 회의주의 극복이었듯이, 뢰비트의 허무주의 니체를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 죽음의 극복으로 종교를 설명하고 창조적 노력으로 예술을 설명했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새로운 분수령이며, 불가역성의 역사 속에서 실현에는 인간 현존의 일회성과 더불어 가능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 사상은 확장되고 개방되어 있으며,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다. 즉 허무, 고난, 질병, 죽음을 극복하고 범아의 경지로 가는 것은 회향을 향한 열망일 진대, 이 회향적 존재의 투쟁 방식은 ‘사랑[아카페?] 속에서 투쟁’(374)이라 한다. 삶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 불일치를 일치로 실천하는 것, 톨스토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54PLC)]
종교⋅예술⋅ 철학을 비롯한 인간의 위대한 건축 일체는 회향을 위한 모색이다. 그것은 회향을 위해 쌓아가는 탑, 높아지는 탑을 형성하고 있다. 철학의 주 테마는 이제 구원이 되어야 한다. (282. 시작 문장) .../ 이러한 회향의 길을 찾아가는 바탕은 오직 인간학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학은 역사와 세계와 인간을 신앙⋅예술⋅철학 등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전 광경을 비상하면서 그 조감도를 그리기 때문이다. .. / 미분화된 복수→단독자→범아라는 경로는 인식이 추구하는 무제약성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다. 이것은 또한 한 개아(個我)의 인식 발달사와 동시에 전 인류의 세계사적 경과이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세계사를 완전히 우리 자신의 발전과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얻는다. 역사는 외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을 반영하고 그 전체 과정은 바로 개아적 인간의 거대한 확산과 투영의 공간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282-283)
신학과 종교도 인간적 사실이라면, 확대된 인간학은 이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종교와 예술적 창조를 포함한 제 인간적 사실을 회향을 성취하려는 인간적 투쟁으로 간주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학을 회향적 인간학이라 칭한다. (291)
인간사로서의 세계사는 사상사, 사회사, 예술사의 삼위일체로나타나게 된다. 이 전체가 곧 문화사이기도 하다. (296)
역사는 물질⟶예술→초월적 대상으로 진전해 간다. 인간의 발육은 육체→정념 →정신으로 진행된다. (299) [크리스트교 3위1체의 도식의 적용.]
§ 심리학과 자연과학의 일치 316-322.
정신분석이 추구한 것은 결국 인간존재의 해명이 아니라 무의식에 조종되는 인간의 유형화에 대한 규명이었다. (316) [프로이트라는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미국으로 가서 변질된 행태주의와 연결을 그려볼 수 있다.]
§ 자연과 인간의 만남 316-322.
자연은 운동의 연속이자 무한한 지속인 한 그것은 물의 존재 자체인 물자체와 영원히 불일치할 뿐이다. 물자체와 영원히 불일치하는 자연은 현존재로서는 영원한 비-자유다. (322-323) [칸트 이래 독일철학의 맹점이다. 물자체를 비하시킴은 인민을 무시하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회양의 길에 들어선 철학자에게 모든 것은 영겁의 투쟁과 고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336)
§ 고독과 천재의 역할 336-341
우리가 앞에서 인식을 가지는 것은 회향의 첫째 관문이라고 했듯이, 여기서 둘째 관문이 시작된다. 둘째 관문은 자유의지와 관련된다. (337)
이제 고독에서 탈피하기 위해 돌파구를 모색하는데, 이 돌파구의 모색이 인류의 정신사를 형성한다.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와 헤겔, 포이어바흐와 맑스, 니체와 하이데거, 오늘날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1928]와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를 읽는 가운데, 이들이 여러 부류의 환상적 회향을 실현하며, 찰나적 안도감으로 그 속에 몰입하거나 혹은 당황하고 외로운 순례자로서 끝없이 황야를 헤매기도 했다는 점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이 ‘회향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밝혔을 뿐, 회향은 끝없는 광야에 신기루처럼 멀리 있을 뿐이다. (338) [저자가 철학사에서 독일철학에 대한 독서 경향, 여기에 피히테와 베버를 첨가해야 할 것이다. - 인간학적 회향도 막스 셸러의 인간학에 가까울 것이다. ]
여기서 자유의지에 의한 자유의지와 인식의 포기냐, 아니면 인식의 포기와 자유의지의 고양이냐, 또 아니면 인식의 인정과 함께 자유의지의 고양이냐에 따라 경로가 나뉜다. 첫째 경로는 맹목적 종교로, 둘째 경로는 창작으로 진행된다. 이 두 경로는 회향을 완수할 수 없지만, 양자는 자유의지의 투여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물론 인간학적 회향의 경로는 셋째 경로다. 불교는 종교임과 동시에 철학적 인간학이다. 왜냐하면 인식과 자유의지의 최대 고양에 의해 불교는 바로 인식과 자유의지의 소멸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345-346) [종교, 예술, 철학]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최대 실패는 반가치의 정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향 자체의 파괴에 있다. 즉 기독교가 비현실적 몽상 속에서나마 간직하고 있었던 소망을 파괴해 버렸다는 점에서 그는 실패했다. (350) [카프카의 소송에 대한 오해도 마찬가지인데, 니체는 성안에 대한 관심이 없고, 문지기에 매번 만날 필요도 없고, 문지기에게 가끔 물으러 갈 필요도 없이 다른 세상에서 “디오니소스 삶”을 살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보는 것이 1967년 이래로 푸꼬와 들뢰즈의 관점이다. - 아제 인간과 주사위 놀이 - (54TMA) - 니체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니체를 허무주의로 읽기 때문일 것이고, 니체는 허무를 풍자했으며, 실질적으로 생성과 그 권능을 이야기했다. ]
현존재를 긍정하면서도 그 가변적 가능성을 유지하면서 창조하고 개선해가는 자야말로 최대한 영웅적으로 행동하는 자다. (360)
한마디로 회향적 존재의 투쟁방식은 ‘사랑 속에서의 투쟁’인 것이다. (374) [예수는 이웃의 사랑이라 했는데, 그 사랑이 아가페가 아닌가? ]
제3부 회향의 완성/ 379
[인간에 대한 봉사와 사랑을 통한 범아(큰수레)의 실현은 사회(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배제(소외)되지 않고 함께 가는 길의 실현. 생명체로서 인간이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제7장 세계국가/ 381-395
[서양사는 계몽기에서 자연으로 회귀를 언급했으나, 칸트, 니체, 실존주의, 기독교는 부분적으로 문제를 인식했으나 해결의 방식과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역사의 과정은 무수한 실패와 순간적 성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은 만인에 대한 개인의 봉사와 사랑으로 범아를 이루고자 노력해야 한다. 근대 사회에서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 인간의 소외를 분석해낸 맑스, 국가의 성립과 발달에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등장을 알린 레닌, 정신분석의 도래로 인간의 타자화 등에서 인간이 스스로 새로운 인간형을 창안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사는 대립과 투쟁을 통해 타인과 공존하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변증법적으로 통일하는 데는 인민의 유일한 계급으로 이루어야 할 것이며, 이런 세계는 범아를 실현하는 형태로서 사회민주주의를 거쳐서 세계국가가 될 것이다. 저자는 현재 양대진영의 거대한 대립을 통일체로 만드는 것은 범아[대승]의 실현에다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다.]
고독이라는 관문을 통하여 인간은 진아를 보며, 진아에 도달하기 전까지 결코 이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이제 고독에서 탈피하기 위해 돌파구를 모색하는데, 이 돌파구의 모색이 인류의 정신사를 형성한다.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헤겔, 포이어바흐와 맑스, 니체와 하이데거, 오늘날 막스 셸러와 마틴 부버를 읽는 가운데, 이들이 여러 부류의 환상적 회향을 실현하며, ... (338)
따라서 현대는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대결 장소이고 이 과도기를 거친 후에는 사회민주주의의 승리로 종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그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한 전인민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이다. (393)
국가가 최대의 일치를 이루어 회향을 완결할 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국가는 소멸할 것이다. 이때야말로 전 인류는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정신 속에서 안분할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관계, 오직 일자로서만 주어진 관계는 이제 비약을 통하여 무관계, 관계의 완전한 해소로 향한다. 이때 구분과 제약인 일체의 이데올로기나 일체의 인위적 건축물은 소멸할 것이다. (395)
제8장 범아의 세계/ 396-417
[저자는 서구 삼신신앙을 철학적 사유체계에다 옮기고 싶었을 것같다. 세계의 대립의 통일이든, 종교, 예술, 철학의 목표이든 범아의 회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헤겔의 절대지로 지향보다 범아의 실현으로 회향은 중아함경에 영향[여선배의 영향?]이 아닐까 한다. (54PLC)]
[투쟁의 과정을 거쳐 쟁취한 회향의 세상은 자유의 쟁취로서 자유의 왕국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인간 개인의 자아는 내재적 힘으로서 진아를 지니고 있다는 확신 같은 것이 저자에게는 있다. 진아를 되찾는 것이라기보다 진아를 현재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실현하는 것이 그에게는 범아이다. 진아→자아→범아의 관계는 개인의 자아가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으로서 진아를 인식하고, 그 진아가 개별자로서 자아 여기 현존하며 무수히 많은 관계들을 크게 보아 양자 대립이란 여러 가지 체계를 극복하여, 인간다운 삶으로서 긍정과 행복을 이루는 삶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 범아이다. 범아의 세계에서 자아는 진정한 자유이며, 투쟁의 과정을 거친 현존의 실재적 자유의 구현자이다.]
[헤겔. 부르크하르트, 키에르케골의 관점으로 단독자에 자기 완성과 범아의 실현을 합일 시키려 한다.]
이때 각자는 회향적 투쟁을 통해 범아를 형성해 가고 범아를 초대함으로써 세력을 확장해가며, 궁극적으로는 범아일여(凡我一如)의 사상 속에서 우주(브라만凡)는 나(아트만我)를 품고 나는 우주를 아우른다. (412)
회향적 개인에서 일차적 통일을 거친 물과 신은 범아 속에서 더욱 완결되고 완벽한 일치의 모습으로 전개되며, 이는 물과 인과 신 삼자의 합일로, 회향의 완성으로 귀결된다. (413)
투쟁이 모두 끝나고 회향이 완성된 범아의 세계에는 승리도 패배도 없다. 왜냐하면 자유 그 자체는 누구를 지배하는 것도 복종하는 것도 아니며, 동시에 자유는 전체적인 것이고 완전한 것이고, 또한 단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범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의 통일 속에서 일치가 구현될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제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고, 마침내 완벽한 자유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417, 마지막 문단 전부) [벩송은 “우주가 신들을 만드는 기계”라고 한다. 벩송도 누구나 보살이 되는 세상을 이상으로 삼았다. 현승효도 보살들이 사는 세상을 바랐다. (54TMC)]
♤ 현승효의 삶과 사상 419-447
§1. 철학인의 삶은 죽을 수 있음을 배우는 것: 현승효 421-425
인생이란 깊고도 험하다. 애닯고 뜨겁도다. 가슴을 쳐도 두드려도 풀리지 않는 이 답답함. 한 권의 양서도 읽을 때 뿐. 이 가슴의 비밀 음울한 갈등은 해소가 되지 않음이 어인 일인가. 아! 그리워라 그 빛. 우주의 제1의 빛, 카프카가 도달하려다가 결국은 좌절하고 마는 그 성과 「율법의 문」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련가. (423)
나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있다. 이것은 많은 독서와 인생의 경험을 토대로 내나이 30이 되기 전에 하나의 이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책으로 묶고 싶다는 것. 나는 수많은 독서로 영원성 속에서 사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노야와 나는 영원히 살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 정신[영혼]의 재발견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 일만은 꼭 성취시키고 싶다. 그것도 20대에 소박하나 꺼지지 않는 정신의 불멸을 남기고 싶다. (423)
끊임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하늘의 소리에 아무와도 나눌 수 없는 유열에 싸여 있소. 그러나 이 생각은 책이 되는 날 모든 사람들과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내가 하고 있는 생각 회향(回鄕)이란 것은 바로 인간의 구원에 관한 문제이오. (425)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나에게서 나의 사상에서 내려진 생활 자세를 흔들리게 할 수 없을 만치 당신의 나는 성장했소. 정말 눈물과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거요. 이제 노야에게도 주위 사람에게도 나눌 날이 멀지 않았소. 내 생각이 우연히 본 피히테(Fichte)와 너무나 유사해서 지금 쩔쩔 매고 있소. 그래서 요즘은 며칠 조용히 쉬고 있소. (425)
(1975년 5월부터 1977년 5월까지 현승효의 일기에서)(54TLG)
(15:15, 54TMC)
* 참조1: 청심학술토론회
회향에의 인간학적 모색 – 현승효(1950-1977)의 사유 체계
1부 인간 그 자체
2부 인간의 행위적 산출(종교, 형이상학, 예술)
3부 형성되어야 할 미래로서 회향의 완결(세계국가와 합일적 회향,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통일)
그것은 아래와 같이 대응 된다
1부 자유로의 실체로서의 인간, 회향에의 존재
2부 회향에의 방법론과 모색
3부 회향의 종결
*** 책에 등장하는 인명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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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김소월(金素月, 1902-1934) 일제 강점기의 시인. 본명 김정식(金廷湜).
1921 문동환(文東煥, 1921-2019)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겸 대학 교수, 미국 피츠버그 신학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출신. 「해방신학과 한국의 기독교」
1922 안병무(安炳茂, 1922-1996) 대한민국의 신학자, 한신대 교수. 민중신학의 창시자.
1922 김춘수(金春洙, 1922-2004) 대한민국 시인. 사물(事物)의 사물성(事物性)을 집요하게 탐구하였다.
1931 구혜영(具暳瑛, 1931-2006) 강원도 춘천 약사동 출생, 1955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단편 <안개는 걷히고>가 당선되면서 데뷔. <안개의 초상(肖像)>(삼성출판사.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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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아브라함(이브라힘, 전2166-전1991)(한.위키)[이 연도는 가상일 수 있다, 모세에 견주어보면, 인물들을 백년씩 잡아도 기원전1530이다, 실증사와 기록은 서로 맞지 않는다. 그래서 탐구자들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본다.]
- 유대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은 모두 그를 선조로 주장한다. 바빌론에서 가나안으로 온 한 부족... / 아브라함(Abraham) 구약 「창세기」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이스마엘[Ismaël 아랍의 조상]과 이삭[Isaac 이스라엘의 조상]의 아버지 .. 노아의 10대 손으로 / 들뢰즈가 도래족인 아브라함 부족을 국가라는 장치의 의미로 보았다. 타(가나안)지역에 도래한 종족이다. / 이슬람에서는 다섯 대예언자들(Noé, Abraham, Moïse, Jésus et Mahomet)이 있다.
12?? 짜라투스트라(Zoroastre, Zarathushtra ou Zarathoustra (en persan : زرتشت ; en avestique : Zaraϑuštra ; en grec : Ζωροάστρης, en kurde Zerdest) 조로아스트교 예언자, 활동기는 15세기에서 11세기.
1230년경 모세(Moïse, 1230?) 야곱의 후손들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떠남 - 모세 이집트 지방행정장관[프로이트의 견해] 그와 언약의 궤를 보호하는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민족이 아니라 이집트 근위대일 것이다. [람세스 2세(Ramses II, ?-?)(재위: 전1279-전1213년)는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
746 이사야(Isaïe, 746-701 env.) 앗시리아 침공과 여호와의 권능 / 이사야(Ἠσαΐας, Isaiah) 기원전 8세기 유다 왕국에 살았던 예언자이다.
586 싯달다/석가모니(釋迦牟尼, 563년-483년). 반야심경, 중아함경, 화엄경 사키야무니는 불교의 교조이며 힌두교에서는 유지신 비슈누의 9번째 다샤바타라이라 한다.
570? 유마힐, 싯달다의 내밀한 친구. 제가 불자.
550? 가섭(카샤파) 마하카샤파 또는 마하가섭, 석가의 제자. 두타제일. 석가 사후에 경전 제1결집을 실행했다.
551? 노자(老子)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이다.
551 공자(孔子, lat. Confucius, 기원전 551-기원전 479) 춘추시대 노나라 도덕가, 정치가.
480 에우리피데스(Ευριπίδης, Euripides, 전480경-전406) 고대 아테네 활동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더불어 3대 비극 시인. 오늘날 18편의 비극이 남아 있다.
480-??? 제논(Zénon Ζήνων, 기원전 480[490]-420경) 변증법(상대부정을 통한 자기긍정)의 발명자 [소크라테스보다 10살[20살]많다. 소씨가 한 수 배웠을 확률이 있다]
469(470)-399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469-399; 70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에 아티카(Attique) 지방의 알로페케(Alopèce, Ἀλωπεκή, Alōpekē) 데모스에서 태어나서, 399년에 아테네에서 죽었다. -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que Σωφρονίσκος)는 조각가, 어머니 파이나레테(Phénarète, Φαιναρέτη)는 조산원이다. 부인 크산티페(Xanthippe, Ξανθίππη)와 세 자식이 있다.
[399(70세) 비극 시인 멜레토스(Μέλητος / Mélétos), 연설가인 뤼콘(Lycon, Λύκον), 무두(가죽)장이였지만 정치가가 된 아뉘토스(Ἄνυτος/Ánytos)와 함께 소크라테스를 399년 4월에 고발했다.]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이데아의 철학자. (출생시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그가 18년 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Aristotélēs, 384-322: 62살) 스타지르(Stagire)에서 탄생. (플라톤 나이 43세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367년(17살)에 플라톤의 나이 예순 살에 아카데미아 입학했다고 한다.
365 퓌론(Pyrrhon, Πύρρων 기원전365-275) (90살) 고대 그리스의 회의학파의철학자. 아브데라 출신, 회의 주의 창시자인 아낙사르코스(Anaxarque d'Abdère, s.d.)에게 배웠다. 30세 때 아낙사르코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정(東征)에 참가하여 인도에 갔다. 거기서 고대 인도의 고행 수도자를 알았다.
341 에피쿠로스(Epicure, Ἐπίκουρος, Epicuros. 전341-270; 71살) 탄생 플라톤이 죽은 후 6년이 지나 태어났다. 알렉산더가 죽을 때 18살이었다.
335 제논(Zenon, Ζήνων, 전335-264) 사이프러스 키티움 출신의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 (아리스토텔레스 사망시 제논은 13살, 디오게네스(87살에 사망)사망시 제논 8살이었다.)
306 에피큐로스(35살) 아테네에서 학교(Jardin, école à ciel ouvert)을 열다.
301 스토아학파 제논(34살), 회랑(Portique) 학교 세웠다.
12 빌라도(Pontius Pilatus, 전12, 재임: 기원후26년~36년) 고대 로마 유대인(Juda) 지방의 총독. 에케 호모(Ecce homo)요한 복음서 19장 5장에 나오는 라틴어 어구
04 [예수] (Jesus de Nazareth, 전4- 후29) 팔레스타인 지역의 나자렛에서 태어난 유태교 종교개혁가이며, 로마제국에 저항한 노마드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기적을 행하여 유태교를 개혁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바울에 의하여 새로운 종교, 크리스트교의 몸주가 된다. 그 자신이 남긴 글도 없고, 또한 복음서로 남은 글은 그리스 방언으로 되어있어서 문헌적으로 문제가 많다. 예수의 방식은 인민의 안녕인가 구원인가.(Salut) [종교로서, 그리스트(Christos), 부활, 최후심판]
O
5 바울로/바울, Παυλος, lat. Paulus, 5-67) 초기 기독교의 사도로, 신약성경의 주요 부분인 바울로 서신을 저술한 인물이다. 예수를 크리스토스로 신격화함으로서 몸주로 만들다.
354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 보편교회 시기의 신학자이자 성직자, 주교로, 개신교,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569 솔거(率居, 569년경)는 신라 때의 화가로, 삼국사기에 열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솔거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그 조상에 대한 기록이 없다. 선천적으로 그림에 뛰어났으며 황룡사[(553년(진흥왕 14)-569완공)년 벽에 그린 노송(老松)이 실물과 같아 새들이 날아들었다 부딪혀 죽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일화에 의하면 훗날 황룡사의 벽에 그려져 있던 노송도의 색이 바래지자 한 승려가 노송도를 색을 다시 칠했고 새들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1342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Juliana of Norwich, 1343–1416?) 중세 영국의 여성 은자. 그녀가 쓴 <신성한 사랑의 계시(Revelations of Divine Love)는 잉글랜드 언어로 여성에 의해 쓰여진 저서들 중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져 있다.
1343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 잉글랜드 작가, 시인, 관료, 법관, 외교관. 영어로 쓴 첫 작가. 설화집 《캔터베리 이야기(1400)》
1483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의 종교개혁가.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1517년 95개 논제를 제시하면서 종교개혁을 주창하였다.
1509 장 칼뱅(Jehan Cauvin, Jean Calvin, 1509-1564)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의 개혁교회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이다.
1533 바이겔(Valentin Weigel, 1533-1588) 독일 신비가 목사. / 프랑스 계시주의들(이들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에 반대자들인데)은 독일의 신비가들, 즉 목사인 바이겔(Valentin Weigel, 1533-1588)과 구두장이 뵈메(Jakob Böhme 1575-1624)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1596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
1619 르 브룅(Charles Le Brun, 1619-1690) 프랑스 예술가. 화가, 장식가. Méthode pour apprendre à dessiner les passions (1698)
1623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프랑스의 심리학자, 수학자, 과학자(물리학자), 발명가, 작가, 철학자다.
1689 몽테스키외 (Charles Louis de Secondat, Baron de Brède et de Montesquieu, 1689-1755) 보르도 지방 브레드에서 태어난 그는 그 지역 의회의 의장을 맡기도 한다. 그는 정치적 관심뿐만 아니라 문학적 관심의 작품도 있다.
1694 볼테르(François-Marie Arouet, 필명:Voltaire, 1694-1778) 프랑스 사상가.
1712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프랑스 18세기 절대왕정 시대에, 사회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니고, 인민의 자아의식의 성장을 직감했던 계몽의 철학자.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 철학자.
1762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독일 철학자. 헤겔, 셸링과 더불어 독일 관념론을 대표 (425)
1770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 관념철학자.
1770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독일 작곡가. 독일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1788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
1790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Byron, 1790-1824)[서른넷] 영국의 시인
1804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 1804-1872) 독일 철학자이자 인류학자, 미래철학의 근본원리(Grundsätze der Philosophie des Zukunft, 1843 [« Principes de la Philosophie de l’avenir »],
1811 벨린스키(Vissarion Grigoryevich Belinsky, 1811-1848)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자. 처음에는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농노제와 차리즘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1840년대 초기에 유물론자가 되었고 잡지『조국의 기록』,『동시대인』등의 편집자로서 활동하면서 특히 미학과 문예비평의 영역에서 유물론적인 원리 및 리얼리즘 이론을 수립하였다. 그의 작업은 체르니세프스키, 도브로류보프들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며 동시에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역사적 전제가 되었다. 《페테르스부르크 문집》, 《러시아 문학관》, 《푸시킨론》 등이 있다.
1812 게르첸(Aleksandr Ivanovich Gertsen, 1812-1870) 맑스가 "딜레탕트의 사회주의자"[「스테파노니와 인터내셔널 재론」, 18:80]라고 그 성격을 규정한 러시아의 급진적 사상가, 망명활동가. 1829년에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하자 오가료프 등과 급진적인 그룹을 결성하여 생시몽파를 연구하기 시작. 그는 유형지인 우라지밀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 헤겔 철학을 연구하여 그 반동성을 깨달으며, 이후 헤겔 좌파인 체시코프스키의 역사철학에 주목하고, 나아가서는 동시에 유물론에 친밀감을 자각해간다.
1813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마흔둘] 19세기 덴마크 철학자이자, 신학자, 시인, 그리고 사회비평가이다.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1818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Christoph Burckhardt, 1818-1897) 스위스의 미술사와 문화사를 연구한 역사가. 니체보다 먼저 바젤대학 교수였다. 《이탈리아 예술사에 대하여 Beiträge zur Kunstgeschichte von Italien》(1898)가 그의 사후 친구들에 의해 편집·출판되었다.
1822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 독일 개신교 신학자. 1852 년부터 리츨은 " 조직신학 "에 관해 강의했다. 그에 따르면 신앙은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서 다른 경험과 바꿀 수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1828 톨스토이(Lev Nikolaevic Tolstoy, 1828-1910 ) 러시아의 소설가, 사상가.
1833 카를 힐티(Carl Hilty, 1833-1909) 스위스의 철학자, 법률가이다.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의 문헌학자, 철학자, 시인, 음악가.
1856 플레하노프(Georgit Valentinovich Plekfanov, 1856-1918).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처음에는 나로드니키에 속하였으나 국외로 망명하여 동지들과 함께 제네바에 ‘노동 해방단’을 만들고(1883)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였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된 후에는 후자의 입장에 서서 제1차 혁명당시에 무장봉기에 반대하고 게다가 10월 혁명에도 반대하였다.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프롬의 “공포와 해방”이 프로이트의 영향인데도, 이 책에서 프로이트의 언급이 전혀 없다.]
1864 베버(Max Weber, Maximilian Carl Emil Weber, 1864-1920) 독일의 법률가, 정치가, 정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로, 사회학 성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 그의 논문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를 연결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유명하다.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In: 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20 1904, S. 1–54 und 21, 1905, S. 1–110
1866 나탄 쇠더블롬/셰데르블롬(Nathan Soderblom, 1866-1931) 스웨덴의 기독교 성직자, 웁살라 대주교, 193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구자.
1866 칸딘스키(Vassily Kandinsky, 1866-1944) 러시아 화가. 독일국적 다음 프랑스 국적. 1909년 칸딘스키 주변의 화가들, 신미술가 협회(Neuen Künstlervereinigung München, N.K.V.M.: l’association des Nouveaux Artistes de Munich)(1911해체).
1868 새퍼(Heinrich Schäfer, 1868-1957) 독일 이집트 연구가. 베를린 이집트 박물관장. Von ägyptischer Kunst, 1923.
1870 레닌(Lenin, Vladimir Ilitch Oulianov, 1870-1924) 러시아 혁명가,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로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특별히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
1874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1928) 독일 현상학자. 뮌헨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 예나대학교에서 의학, 천문학, 사회학을 공부. 루돌프 오이켄의 지도 아래 연구하다가 1902년에 예나대학교 강사 시절에 에드문트 후설을 만나 현상학적 방법론에 관해 연구했다.
1877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 독일계 스위스인, 시인, 소설가, 화가, 년 데미안(Demian: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 1919, 싯다르타 (Siddhartha, 1922),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트문트 1930).
1878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종교철학자. 1938년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에서 사회철학 교수가 되었다
1881 윌리엄 템플(Wiliam Temple, 1881-1944) 영국 성공회 주교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로 사목하였다.
1883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와 함께 독일 실존철학을 창시했다.
1883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이다.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에서 활동하였다.
1884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 프랑스의 철학자. 촛불의 미학(La flamme d'une chandelle 1961)
1886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했다. 나치에 의해 비유대인으로 교수직 박탈. 1932년 미국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The Courage to Be, 1952),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의 영향을 받았다.
1886 피셔(Eduard Jakob Otto Fischer, 1886-1948) 독일 예술사가, 미술관장. 중국예술 전문가. 신미술가 협회(Neuen Künstlervereinigung München, N.K.V.M.) 회원이다. 칸딘스키가 떠난 후 피셔가 이끌었다고 한다.
1897 뢰비트(Karl Lowith, 1897-1973) 독일의 철학자. 니체전문가, 철학사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의 압박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동북제국대학 강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갔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다. 스트라우스(Leo Strauss, 1899-1973)와 친구.
1889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메스키르히에서 출생한 독일의 철학자.
1889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 영국의 역사가. ‘도전과 응전’의 논리가 집약된 저술 역사의 연구(12권). 한국의 효(孝)사상과 경로사상, 가족 제도 등의 설명을 듣고 당시 86세였던 토인비는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의 효 사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니 효 사상은 인류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사상”이라며 “한국뿐만 아니라 서양에도 ‘효’ 문화를 전파해 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1892 라인홀드 니부어/니버 (Reinhold Niebuhr, 1892-1971) 개신교 신학자, 기독교 윤리학자이다. 기독교 신앙을 현실적인 현대 정치와 외교에 접목시킨 기독교 현실주의로 유명하다.
1892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 헝가리 역사학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3) 영역본 The Social History of Art, Knof; Routledge & Kegan Paul, 1951. / 독일원본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 C.H Beck, 1953.
1892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유대계 독일인으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문학평론가이며 철학자.
1900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 유태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으로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인문주의 철학자이다. 비판이론 영역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활동하였다. 자유로부터의 도피(The Fear of Freedom (UK) (1941), fr. La Peur de la liberté, Escape from Freedom (U.S.), 1941)
1918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법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기 만에 1919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으로 옮겨 사회학을 배웠다. 당시 교수는 알프레드 베버(유명한 정치경제학자인 막스 베버의 동생), 카를 야스퍼스, 하인리히 리케르트 등 이었다. 192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졸업 후 하이델베르크에 있던 프리다 라이히만(Frieda Fromm-Reichmann)의 정신분석 치료소에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하여 1927년 자신의 진료실을 열게 되었다. 1930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본산인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들어가 자신의 정신분석학 이론의 정립을 마쳤다. 나치 등장으로 제네바를 거쳐서 1934년에 뉴욕으로 옮겼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1941)는 에리히 프롬이 1941년 출판한 책이다. 첫째는 나치즘의 이상심리(異常心理)에 대한 분석, 또는 나치즘 성립과정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이라는 점에서, 둘째는 사회적 성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특색을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경제적 분석은 마르크스에 의거하고 사회구조적 분석은 막스 베버에 의거하며, 다시 여기에 프로이트의 방법을 가해서 분석을 한다.
프롬에 의하면 나치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중산계급이며, 중산계급이 사회경제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화의 길을 걸으면서 정치적으로는 나치즘에 흡수되어 나치즘을 지탱하게 된 과정에 주목하고, 이러한 사태를 발생시킨 요인인 중산계급의 사회적 성격이 사회구조상으로 보아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아마도 이 개념은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1904-1905연재, 1920출간)에서 배운 것으로 생각되며,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와 의식, 또는 하부구조의 상부구조에 대한 규정성(規定性)에 관한 견해에 대해 제3의 요인으로서 생각해 낸 것이다. 그는 나치즘의 분석에 주안을 두면서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자유’ 문제를 다루며, 자본주의의 현대에 있어서의 기구와 이를 초래하는 노동·집단·조직의 기계화에 의한 자기소외(自己疏外)의 요인을 중요시하고, 사회경제적 요인과 이데올로기적 요소와의 관계, 상호규정성(相互規定性) 등을 밝히려고 한다
1904 스키너(Burrhus Frederic Skinner, 1904-1990) 미국의 영문학자, 심리학자. 행동주의 심리학자.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Beyond Freedom and Dignity, 1971)(정명진 역), 행동주의(About Behaviorism, 1974)(김영채 역),
1905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실존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1906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 루터교회 목사, 신학자, 반 나치운동가.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외국 첩보국(Abwehr)의 구성원에 의해 진행된 계획에 가담하였다. 그는 1943년 3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결국 독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1945년 4월 교수형.
1913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알제리 태생, 프랑스 작가, 저널리스트이자 철학자이다
1928 체 게바라(Ernesto Guevara, « Che Guevara » 1928-1967) 아르헨티니 출신 볼리비아에서 혁명 수행중 사살당함. 쿠바 혁명가.
?-? 프란체스코파(le père franciscain)의 마이야르 신부(s.d.)는 체 게바라를 순교자로 평가. / [fr.Wiki: Pierre Kalfon, Che, Points, Seuil, 1998, page288에서 체게바라와 동료들의 총살에 참여했던 신부가 프란체스코파 신부(le père franciscain)라고만 되어 있다.]
- [동명이인? 마이야르(Alain Maillard de La Morandais, 1935-) 카톨릭 신부, 고등학교시절 멕시코 만에서 지냈다. 그리고 낭트로 파리에서 지내며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3년 서품을 받았다(프란체스코파란 이야기는 없다). 그리고는 라디오 방송을 주제.], [체의 단원들: Israel Reyes Zayas (Alias "Braulio")(s.d.), Harry Villegas Tamayo ("Pombo")(1940-2019), Eliseo Reyes Rodriguez ("Rolando")(1940-1967) and Dariel Alarcón Ramírez ("Benigno")(1939-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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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 루치페르(Lucifer) 기독교에서 사탄에게 자주 부여하는 이름으로,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특별히 해석한 것에서 유래한다. 좀 더 명확하게는 하늘나라에서 추방당하기 이전에 사탄이 지녔던 이름이라고 한다. 루시퍼는 루치페르의 영어식 음역에 해당한다. 그러나 루치페르 혹은 루시퍼가 사탄의 이름이라는 것이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사도신경(使徒信經, Symbolum Apostolicum) 또는 사도신조는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신앙고백의 하나로 주로 서방교회에서 기도문으로 활용한다. ‘로마신조’서 유래한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문으로 주기도문(마태복음 6: 9-13)과 달리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다.
예수회(Jésuites 1534, lat. Societas Iesu) 가톨릭교회의 남자 수도단체. 1534년 성 이냐시오(St. Ignatius de Loyola)가 파리에서 창설, 1540년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았다. / 로욜라(San Ignacio de Loyola 1491-1556, (영)Saint Ignatius of Loyola. 세례명은 Inigo. fr. Ignace de Loyola) 스페인의 신학자. 1622년 3월 12일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축일은 7월 31일. 16세기 가톨릭 종교개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534년 파리에 예수회(제수이트 교단)를 세웠다.
얀센파 / 코르넬리스 얀세니우스Cornelius Jansenius 1585-1638) 네덜란드의 신학자. 얀센주의(le jansénisme)는 1653년에 로만카톨릭에 의해 단죄되었다.
향수(鄕愁)와 천수(天愁) 이중주. 고향 에덴, 가나안 이스라엘 ...
불교경전: 중아함경에 나오는 「념처경」(비구에서 아라한으로), 금강경(반야 바라밀). 열반경, 십지경, 법구경(중생이 보살, 심정), 보적경의 ‘가섭품’, 화엄경(보살 여래), 유마경
신미술가협회(Neue Künstler-vereiningung München) : 뮌헨을 지배하고 있던 유겐트슈틸에 반대하고 후기 인상주의와 야수주의적인 경험에 의거하여 1909년 1월 설립된 표현주의 작가들의 협회, 칸딘스키, 카놀트, 에르프슬뢰가 주도하여 성립되었다. .. 1910년에는 프랑스 작가인 지리외(pierre Girieud)와 르 포코니에(Le Fauconier 1881-1946)가, 1911년에는 제2회 전시회를 보고 감명받은 마르크(Franz Marc, 1880-1916)와 오토 피셔(Otto Fischer, 1870-1947)가 가입했다. 피셔는 이후 칸딘스키가 떠난 후 이 협회 대변인이 되었다.
우파니샤드(Upanishads)는 힌두교의 이론적 · 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철학적 문헌들의 집성체이다. 우파니샤드는 또한 베다의 끝 또는 베다의 결론이라는 뜻에서 베단타(Vedanta)라고도 불린다. 힌두교 경전은 크게 신으로부터 계시된 지식을 뜻하는 슈루티와 스승에서 제자로 전승된 지식을 뜻하는 스므리티로 나뉘는데, 전통적으로 우파니샤드는 슈루티에 속한다. 하지만,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정수(精髓)를 해설하는 주해서이기 때문에 슈루티의 엄밀한 정의에 따를 경우 슈루티에 속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대다수의 우파니샤드는 《브라마나(Brahmanas)》와 《아란야캬(Aranyakas)》의 결론부에서 발견되었으며, 모든 우파니샤드는 구전으로 전수되어 내려왔다.
까뮈의 정의의 사람들(Les justes, 1949)(5막 연극)에 등장하는 아나키스트 테러단원 칼리아예프(Kaliayev)의 말, “우리는 누구도 살인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살인을 하는 거요. 우리는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들만 살게 하려고 범죄자가 되는 거요.”라고 주장한다. 이방인(1942),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
포괄자(包括者, das Umgreifende) 야스퍼스의 용어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은 항상 한정된 시계(視界) 내에서이며 이 때문에 진리 자체는 우리에게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계를 무한히 넓혀 가면 그 극한에서 모든 시계를 자신 속에 포괄하는 것이 정립된다. 이것이 포괄자이다. 객관적으로는 세계 내의 모든 존재자를 포괄하는 '세계', '초월자', 그리로 주관적으로는 모든 의식 내용을 포괄하는 '의식 일반'이 고찰되며 그 위에 이 양자를 포괄하는 궁극적인 포괄자를 생각할 수 있다. / 야스퍼스가 말하는 인간의 진정한 실존은 현존재(Dasein)의 인간이 참다운 자아로 돌아가 일체一切의 존재 양식을 초월超越하여 “포괄자(Das Umgreifende)”에 다가감을 말한다.
페이비안 사회주의 (Fabian Socialism)19세기 80년대에 영국의 《페이비안협회》(《Fabian Society》) 회원들이 제출한, 폭력혁명을 반대하고 점진적인 조치를 취하려는 개량주의적 사상체계로서 전형적인 자산계급적 사회주의였다. / 1884년에 영국의 일부 자산계급 지식인들은 《페이비안협회》라고 하는 단체를 세웠다. 《페이비안》이란 말은 고대 로마의 통수 페이비안 막씨므스(Fabian Maximus, 약 기원전 280-203)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페이비안은 카르타고의 통수 한니발(Hannibal) 과의 전쟁에서 결전을 회피하고 기회를 엿보는 전술을 취하였기 때문에 《쿵크타토르》(Cunctator, 즉 우물쭈물하는 사람)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페이비안이란 이름으로 협회를 명명한 것은 그들도 페이비안처럼 완만하고 점진적인 전술을 취함으로써 사회개혁을 달성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페이비안협회의 주요한 대표 인물로는 시드니 웹(Sidney James Webb, 1859-1947), 비어트리스 웹(Beatrice Potter Webb, 1858-1943), 죠지 버너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등이 있었다. 1889년에 그들은 처음으로 ≪페이비안 사회주의 총서》(Fabian Essays in Socialism)를 출판하여 자기들의 관점을 체계적으로 론술하였다..
(54PLC) (13:16, 54SMA) (16:11, 54SMC) (23:22, 54T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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