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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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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정려 유(維) 백천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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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시원 증사복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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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徵) 병조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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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 증참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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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揆) 수 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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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섬 이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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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시형 원주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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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徽) 청산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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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행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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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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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 (履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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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덕 (五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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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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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 이길 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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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敏) 죽산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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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 (五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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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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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 (履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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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득 (五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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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擠) 담(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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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敷) 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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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진초보 오규 수 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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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捄) 유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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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 (履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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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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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 (履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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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운 (五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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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抃) 무후無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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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시무 수 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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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章夂) 증좌승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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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위 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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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擇) 돈녕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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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국 종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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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과武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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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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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④ 시경 금천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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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敞)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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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훈 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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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典欠)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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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악 (五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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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擴) 유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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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 (履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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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⑤ 시일 종묘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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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儼)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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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성 (五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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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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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관 (履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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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18세 이하 인물 |
① 시원(時元) 家 | - 18세 정은(鄭垠) 유학자, - 20세 정제원(鄭濟遠) 수통정대부 |
② 시형(時亨) 家 | - 19세 정구석(鄭龜錫) 황해도사, 유학자, 숭보지전(崇報之典) - 22세 정상배(鄭尙培) 중학교 교감 - 23세 정현중(鄭賢重) 지방부이사관, 정연중(鄭然重) 인천남구 부구청장 정한중(鄭漢重) 대우건설 상무 - 24세 정감현(鄭鑑賢) 상성전기 전무, 정보인(鄭普仁, 女) 연세대교수 정윤길(鄭胤吉) 공주시청 지방기술서기관, 정윤칠(鄭胤七, 호 思江) 시인 정윤관(鄭胤官) 한의학박사 한의원원장, 정 현(鄭鉉) 충남농협도지부장 - 25세 정익우(鄭益雨) 부장검사 변호사 |
③ 시무(時武) 家 | - 25세 정찬우(鄭讚雨) 조종사 |
④ 시경(時卿) 家 | - 20세 정제인(鄭濟寅) 유림 봉선(奉先) - 21세 정홍림(鄭弘林) 대한제국 재무서주사 유림 |
⑤ 시일(時一)家 | - 19세 정현석(鄭賢錫) 수통정대부 |
세 | 부 | 성 명 | 주요 직책 ‧ 행장 |
9 | 熊 | 정응규(鄭應奎) (1508 ~ 1565) 忠 賜禮葬
配 固城李氏 (1513 ~ 1575) 賢婦 | 중종28년(1533년) 癸巳 무과 1549년 장흥부사, 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 양산군수, 부산진첨사, 1556년 가덕진첨사(加德鎭僉使), 1560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1563년 경기수사(왕조실록), 1564년 경원부사 불부(慶源府使 不赴)
* 명종 11년(1556년) 상이 가덕 첨사(加德僉使) 정응규(鄭應奎)에게 "근래에 첨사와 만호들이 침탈만을 일삼고 방비하는 일에는 유의하지 않아서 지난해에는 참혹한 변고를 당하였다. 지금부터는 법을 벗어난 일은 일체 하지 말고 군졸들을 어루만지고 살피며 군기를 잘 단련시켜 날로 새롭게 변란에 대비하여야 한다." 고 분부하였다.
- 전공 사예장(戰功賜禮葬) 및 사패 10여 년간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의 군직 및 수령으로 재직하며 왜구방어에 진력하였다. 그 공로로 장례에 예장을 하고 살던 곳을 사패지로 내렸다
배 고성이씨(配 固城李氏)
13세에 시집와서 현명하고 언행에 예도가 있었다 十三歸公賢而有禮 |
10 | 응규 (應奎) | 정연(鄭演) (永思堂) (1541~1621) 老典 |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 동지중추부사(陞同知中樞府事)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노년 성서에 은거하여 덕망 있는 선비와 “팔선계”와 “구로회”를 조직하여 활동함(晩隱城西與耆英諸公修八仙契九老會)
* 팔선계 계원 ① 신 벌(申 橃:1523~1616, 94세 졸) 號 友松 官同知 ② 이의건(李義健:1533~1621, 89세 졸) 號 峒隱 官直長 ③ 신 암(申 黯:1537~1616, 80세 졸) 號 不如堂 官經歷 자 直孺 ④ 김극효(金克孝:1542~1618, 77세 졸) 號 四味堂 官同知 ⑤ 정 연(鄭 演:1541~1621, 81세 졸) 號 永思堂 官同知 ⑥ 심 암(沈 嵒) 官正 ⑦ 권성이(權成已) 官僉正 ⑧ 유 탁(兪濯 : 1544~1618) 官正 |
11 | 연(演) | 정보문(鄭保門) (1572 ~ 1652) | 숙종3년(1676년) 병진 (丙辰) 무과 1608년 선전관(宣傳官) 1623년 웅천현감(熊川縣監), 1648년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1651년 수승 첨지중추부사(壽陞 僉知中樞府事) |
12 | 보문 (保門) | 정유(鄭維) 持世 (1593 ~ 1654) 忠孝義 旌閭 | 광해군 무오년(1618년) 생원
사마시험 치룰 때 적신 이이첨이 사마 급제자를 부추겨 장차 폐모의 소를 올리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그러한 불의한 자와 영화를 누리느니 바름을 지키고 죽는 것이 낫다. 또 아비가 없고 군주가 없는 사람과 사대부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며 대과를 보지 않고 나주의 고향으로 내려왔다. 인조반정으로 상산 신흠이 재상이 되어 최우선으로 공을 천거하였다.
1634년 전의현감 1636년 병자란을 당하여 안무사 박횡의 종사관으로 근왕병을 통솔하였다. 1641년 구례현감 1648년 백천군수
光海 戊午 司馬時 賊臣李爾瞻 嗾新榜 將上廢母疏 公曰 與其不義而榮寧守正而死 且無父無君之人 士大夫不可同席而立遂不應榜遯歸羅州故庄 仁廟改玉申象村欽以冢宰首薦公 甲戌(1634년)全義縣監 當丙子亂 爲按撫使朴橫從事 領兵勤王 辛巳(1641년) 求禮縣監 戊子(1648년) 白川郡守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나이 들어 기력이 쇠약한데도 죽을 먹으며 항시 소리 내어 우는 것이 돌아가신 날(1652년)과 같았다. 3년 탈상을 5개월 앞두고 돌아가셨다. 순조 임오년에 대신 김재찬과 한용구가 임금의 면전에서 충효를 아뢰니 정려를 내렸다. 8대손 제인이 묘 앞에 정려각을 짓고 기문을 세웠다
天性篤孝及丁外艱年己衰而啜粥呼泣常如袒括之日隔終祥五月而孝宗甲午(1654년)卒 純祖 壬午(1822년) 大臣 金載瓚 韓用龜 以忠孝筵奏命旌閭 八代孫濟寅建閣于墓前而延旌 |
12 | 보문 (保門) | 정긍(鄭緪) (1640 ~ 1718) 老典 | 수승 통정대부(壽陞 通政大夫) |
13 | 유(維) | 정시원(鄭時元) 伯春 (1613 ~ 1666) 孝 | 백주 이명한* 문하에서 배웠으며 문장이 뛰어나 칭송이 자자하였고, 향리에서 효와 우애를 칭송했다.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受業于李白洲明漢*門 文詞擅譽 場屋孝友著稱鄕里 贈司僕寺正
* 백주 이명한(1595∼1645)
좌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홍문관, 이조판서, 예조판서. 1643년 이경여(李敬輿)·신익성(申翊聖) 등과 함께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이듬 해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심양에 가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왔다.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아버지 정구, 아들 일상(一相)과 더불어 3대가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13 | 유(維) | 정시형(鄭時亨) (盤洲) (1619 ~ 1699) 孝 | 효종 정유(1657) 진사
1658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959년 도원찰방(桃源察訪) 1662년 제용직장(濟用直長) 1664년 사헌감찰(사헌監察), 형조좌랑(刑曹佐郞) 1667년 공조정랑(工曹正郞), 호조정랑(戶曹正郞) 1668년 12월 면천군수(沔川郡守) : 부임치 못함 호조에서 아뢰기를 “본조에서 사무가 복잡 긴급하고 낭관는 각자 소관하는 업무가 있어 오래 근무치 않으면 가히 그 책무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금번 인사에서 정낭(正郎) 정시형이 외직으로 발령받았는데 본조의 업무를 감안하여 통촉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상께서 “수령의 선임이 비록 중하나 어찌 호조의 사정을 모른 척 할 수 있는가? 인임(그대로 근무)토록 하라” 하였다. 戶曹啓曰, 本曹事務之繁, 有非他司之比, 郞官各有所掌, 若不久任, 難可責效, 而今番都目政, 正郞李慣正郞李慣·鄭時亨, 俱授外任, 本曹之事, 誠爲可念。守令之選, 雖重, 豈如地部專摠之地? 此兩人, 竝仍任, 何如? 傳曰 1669년 1월 鄭時亨 戶曹正郞 仍任(호조정랑 유임) 1669년 4월 공산현감(公山縣監), 6월 25일 公山縣監 鄭時亨, 竝以判官, 改二批之意, 敢啓。傳曰, 知道. 공산판관(公山判官)으로 직책 이름을 바꿈 1672년 부평부사(富平府使) 1675년 해주목사(海州牧使) 1680년 原州牧使(원주목사), 1683년 태인현감(泰仁縣監) 1687년 한성서윤(漢城庶尹)
* 공산현(公山縣) 1646년(인조 24) 산적 류탁(柳濯) 등이 난을 일으켜 공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현종·영조·정조 때도 공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으로 회복된 바 있다.
* 공산판관(公山判官) 공주 감영의 충청감사가 공주목사를 겸임하였다. 판관은 공주목사를 보좌하여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인데, 공주가 목에서 현으로 강등되어 사실상 공주목사직이 공산현감이 된 것이다.
* 정시형(鄭時亨) : 1619년(광해군 11) ~ 1699년(숙종 25)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숙하(叔夏), 호는 반주(盤州). 아버지는 군수 유(維)이다.
1657년(효종 8) 진사가 되고, 이듬해 의금부도사를 비롯하여 연원찰방(連源察訪)·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감찰·형조좌랑을 역임한 뒤 파직되었다가, 1667년(현종 8) 공조정랑·호조정랑·공산현감·형조정랑·부평부사를 역임한 뒤 해주목사·한성판관·원주목사·이조정랑·태인현감·한성부서윤·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는 남인·서인간의 당쟁이 극심하여 서인인 그는 여러 차례 파직된 바 있고,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남인에 의하여 서인이 축출 당하매 고향 임천(林川)에 돌아갔다가 1698년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이듬해 죽었다.
대과급제는 하지 않았으나 관료생활 40여년에 여러 차례 외직으로 수령과 내직을 역임하면서 보통 이상의 재주와 세월을 기다리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효력(孝歷) : 남구만(南九萬) 撰 묘갈명 중(붙임)
공은 어려서는 영리하고 빼어났으며 자라서는 단정하고 씩씩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필법이 신묘의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선배들이 그 학업을 감상하고 속성(速成)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거듭 상(喪)을 당하여 6년간 시묘(侍墓) 살이를 하면서 예에 지나칠 정도로 거상(居喪)하여 병이 들어 위태로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도암 이재가 묘표를 짓고 퇴어 김진상이 글씨를 썼다. 6대손 구석이 묘지를 지었다 |
13 | 유(維) | 정시무(鄭時武) (1622 ~ 1710) 老典 | 향년 89세, 수 동지중추부사(壽 同知中樞府事)
셋째 사위 반남 박세당(朴世堂), 호 서계(西溪) 증판서, 시호 문절(文節), 자 박태한(朴泰翰) 현감 : 전부인 소생, 친소생은 딸 2명(붙임 참조) |
13 | 유(維) | 정시경(鄭時卿) (1627 ~ 1697) | 현종3년(1662)임인(壬寅) 증광시(增廣試) 생원 1665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1669년 현릉참봉(顯陵參奉) 1674년 전설별검(典設別檢) 1675년 군자시주부(軍資시主簿) 1676년 강서현령(江西縣令) 1678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679년 장예원사의(掌隸院司議), 金川郡守(금천군수) |
13 | 유(維) | 정시일(鄭時一) (1632 ~ 1671) | 현종(1660) 경자(更子) 증광(增廣) 진사 1667년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1670년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
14 | 시원 (時元) | 정징(鄭徵) (1641 ~ 1677) | 현종7년(1666) 병오(丙午) 문과 식년시(式年試) 1669년 가주서(假注書), 1670년 제원찰방(濟原察訪) 1672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 1674년 예조좌랑(禮曹佐郞) 1675년 함경도사(咸鏡都事) 불부(母病), 안주판관(安州判官) 1676년 병조좌랑(兵曹正郞), 1677년 성균관 직강(鄭徵爲直講) 1689년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품성이 곧고 강직하여 무리들과 맞지 않아 병조정랑에 그쳤다 以直切忤時輩 止兵曹正郞 |
14 | 시형 (時亨) | 정휘(鄭徽) (1639 ~ 1704) | 숙종8년(1682) 임술(壬戌)증광시(增廣試) 진사 1684년 정릉참봉(貞陵參奉), 1686년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1688년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 1689년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1692년 적성현감(積城縣監), 1694년 청산현감(靑山縣監)
성담 송환기가 묘갈명을 지었다 性潭 宋煥箕撰 碣銘 |
14 | 시형 (時亨) | 정민(鄭敏) (1644 ~ 1699) | 현종10년(1669) 기유 (己酉)식년시(式年試) 무과 비변사 낭관 및 3조 낭관과 부사를 거쳐 종2품 가선대부에 승자하였다 歷備郞 三曹郎官 府使 陞嘉善大夫
1669년 선전관(宣傳官) 1672년 삼화현령(三和縣令), 1675년 증산현령(甑山縣令) 1675년 철산부사(鐵山府使), 1679년 봉산군수(鳳山郡守) 1688년 호군(護軍), 1692년 죽산부사(竹山府使) |
14 | 시형 (時亨) | 정부(鄭敷) (종애, 鐘崖) (1659 ~ 1712) 孝, 유학자 | 고요히 도와 덕을 닦고 학문에 힘쓰므로 선비와 벗들이 존경하였다. 귀영당 이만성공이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다. 수암 권상하 선생이 그 묘에 “종애처사“라 제를 썼다. 저서로 「사준십책」이 있고 이밖에 유고가 남아있다. 도암 이재가 묘표를 짓고, 판서 권적이 행장을 썼다
淸修力學爲士友推重 歸榮堂李公晩成薦于朝未及筮仕 遂菴權先生題其墓曰 鐘崖處士 嘗著「士儁十冊」又有遺稿 陶菴李縡撰墓表 判書權樀撰行狀
* 이재(李縡) : 1680년 ~ 1746년(붙임)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대제학, 공조판서를 지냄
* 권상하(權尙夏) : 1641년∼1721년, 호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붙임)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다. 좌찬성·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이단하(李端夏), 박세채(朴世采), 김창협 등과 교유했다.
* 효력(孝歷) : 권상하(權尙夏) 撰 묘갈명(墓碣銘) 중(붙임)
대재는 효성과 우애가 남보다 뛰어나서 형과 누나를 항상 화기애애하게 모셨으며 분가(分家)할 때에도 형제들에게 많이 양보하고 자신은 조금만 가져갔다. 두분 형이 먼저 죽었으므로 구수(丘嫂, 큰 형수(兄嫂)를 말함)를 받들고서 조상의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아버지를 여읜 여러 조카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무양(撫養)하니, 이웃 사람들이 모두 감화되어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묻곤 하였다.
대체로 대재는 성품이 너그럽고 솔직하였으며 말수가 적어서 평소에 과격한 행동이나 남을 시기하여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믿고 사랑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읜 이후로 강산(江山)을 유유자적하며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서 경적(經籍)을 폭넓게 보았다. 또 손수 여러 사책(史冊)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베껴내어 10책으로 엮은 뒤에 이를 ≪사준(史雋)≫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 가운데 정신을 몰두하고 이것을 낙으로 삼아 그 곤궁함을 잊고 지냈다. |
14 | 시무 (時武) | 정장(鄭章夂) (淸纓齋) (1650 ~ 1677) 義 급제 | 숙종 병진(1676년) 무과(武科)
나이 12세에 한양에 구경 왔는데, 때마침 청나라 사신이 왔다기에 일행과 같이 이를 보러갔다. 공이 말하기를 “저들은 나라의 원수인데 보기 싫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매우 기특하다”하였다. 스스로 호를 “청영재”라 불렀다. 1676년에 무과 급제하였으나 다음 해에 졸하였다. 손자 택이 동지로 귀하게 되어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年十二歲 遊京 値胡使來 同隊往見 公曰 “彼乃國讐吾不欲觀” 金淸城錫冑* 聞而奇之 嘗自號淸纓齋 ~~ 以孫擇貴贈左承旨
* 김석주(金錫冑) : 숙종조 우의정(붙임), 1662년 문과 장원급제 |
14 | 시무 (時武) | 정필(鄭弓弓夂) (1657 ~ 1746) 老典 | 수승 동지중추부사(壽陞 同知中樞府事) |
15 | 징(徵) | 정오상(鄭五常) (1663 ~ 1698) 孝 | 일찍 효행이 현저하여 여러 번 대제학을 지낸 오도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자식 규가 귀(수동추, 壽同樞)하게 되어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孝行夙著 累被西波吳道一獎詡 以子揆貴贈戶曹參判
* 오도일(吳道一) : 1645∼1703. 대제학, 병조판서(붙임) |
15 | 휘(徽) | 정오행(鄭五行) (1672 ~ 1731) 孝 | 통덕랑(通德郞)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孝友而聞 |
15 | 부(敷) | 정오규(鄭五奎) (三悔齋) (老學齋) (1678 ~ 1744)유학자 奉先 | 일찍 수암 권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길이 바른 것이면 이를 실천하고 이행했는데 이에 더해 경사와 백가의 서적에 더욱 정진하니 하늘과 사람의 성명근본에 대하여 궤 뚫지 못함이 없었다. 저서로는 「독서질의」와 「의례영언」이 있으며 유고가 남아있다. 소위 「병진초보」를 편찬하였는데 실로 우리 광주정씨의 최초 족보인데 발문을 썼다.
早師遂菴權先生門 路旣正踐履 益篤於經史 百家之書 天人性命之源 無不該貫 而究極著「讀書質疑」「疑禮零言」 又有遺稿 編纂所謂「丙辰初普」 實是我宗初普也書拔
현손 구석이 묘지를 짓고 도암 이재가 묘표를 지었으며 퇴어 김진상이 글씨를 썼다
玄孫龜錫述墓誌 陶菴李縡撰墓表 退漁金鎭商書 |
15 | 부(敷) | 정오운(鄭五雲) (1689 ~ ?) 효우 | 문행과 재물로서 형제지간의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니, 사람들이 “노학선생(老學齋) 오규(五奎)의 현명한 아우”라 했다
以文行資 益於塤箎之間 人稱 老學先生賢弟 |
15 | 장(章夂) | 정오위(鄭五緯) (1684 ~ 1723) 유학자 | 생부 부(敷) 성품이 관후(너그럽고)하고, 문장과 글귀에 치우치지 않고 춘추공부에 전력으로 힘썼다. 독서하면서 그때 그때 적어놓은 차기가 있다. 조부이신 목사공(鄭時亨) 께서 말년에 출계하도록 유명을 내렸다. 후일 자식 택(擇)이 수동지로 귀하게 되어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性寬厚 不事章句 專用力於春秋 有箚記 以祖考牧使遺命 晩暮出系 以子擇貴工曹參判 |
16 | 오상 (五常) | 정규(鄭揆) (1692 ~ 1775) 老典 | 문행이 있었고 고령으로 동지중추부사의 노전을 입었다
有文行 壽 同知中樞府事 |
16 | 오규 (五奎) | 정구(鄭捄) (천은, 川隱) (1697 ~ 1772) 유림 | 덕이 두텁고 행실이 바르며, 집에 거할 때는 독서와 서예로 정진하고, 천리를 실천하며 세간의 풍속이 아닌 경서의 가르침에 따랐다, 시고가 있다
有純德篤行端 居讀書循蹈規 距不以俗事經心 有遺詩稿 |
16 | 오위 (五緯) | 정택(鄭擇) (소와, 素窩) (1701 ~ 1782) 老典 | 영조37년(1761)신사(辛巳) 정시(庭試) 문과
1961년 9월 20일 박사눌, 예조에서 아뢰기를 “~~ 지방에 거주하는 진사 정택 등에 금번 정시문과전시에 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고자 합니다” 하니, 상께서 이를 윤허하였다
朴師訥, 以禮曹言啓曰 ~~~ 鄕居首進士鄭擇 ~~一倂許赴於今番庭試文科殿試, 何如? 傳曰, 允。
1961년 10월 가주서(假注書), 기사관(記事官) 1762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보령현감(保寧縣監), 1764년 황해도사(黃海都事) 1765년 해남현령(海南縣監) 1769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773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1781년(정조 5년) 2월 12일, 전 도정 정택의 나이가 80이므로 가선대부에 가자함을 아룀 ~~前都正鄭擇年八十~~以上今加嘉善, 12월 9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782년 부사직(副司直)
* 나이 61세에 진사로서 대과 전시에 직부를 허락하여 직접 응시할 자격을 주어 급제하자, 1년간 가주서 및 기사관 등 기본 문과 관직을 거쳐 경험을 쌓게 한 뒤, 사헌부 및 지방 수령으로 발탁하여 관직을 이어갔으며, 나이가 80에 이르므로 노전으로 종2품의 가선대부로 승자하니, 이미 60세 이전에 학식 및 덕행이 높아 사림의 천거와 조정이 발탁한 것으로 판단된다. |
16 | 오악 (五岳) | 정확(鄭擴) (1702 ~ 1772) 유림 | 문장과 행의로 촉망받았다. 만년에 사미당 김극효의 후손들과 함께 “구로회”를 조직해 강학하였고 글 짓고 심신수양하기를 좋아했다. 계첩이 있다.
有文行雅望 晩年與金四味堂克孝 后昆講九老會 先好修述 有禊帖 * 10세 판서공(정연) 공의 팔선계에 김극효 공이 포함되었으므로 선대의 아름다운 행적을 계승(克趾先美한 일)
ㅇ 13세 시경 - 14세 전 - 15세 오악 |
18 | 이화 (履華) | 정은(鄭垠) (죽서, 竹棲) (1759 ~ 1830) 유학자 | 태어나서부터 영특하여 7세에 문장을 잘 지었다. 햇볕 좋은 경치를 읊기를 “풀이 돋아나고 봄기운 따뜻하니 꽃이 만발하였네! 빗소리 그쳤으니 3년은 넉넉하겠다.” 하고 이어서 한 구절의 경을 붙여 완성하였다. 3세에 어른이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을 지었다. 스승이 칭찬하고 자랑하니 세상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장성하여 경서와 사기에 두루 박식하게 되고 문장은 뛰어남이 넘쳐 흘렀다. 특히 지모에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여러 번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니 논자들이 매우 애석해 하였다. 유고 1권이 남아있다.
生而穎悟七歲能屬文 吟卽景曰 “草生春氣暖花發 雨聲疎後三年足” 成下聯曰一句經 三歲文章覺不於長 師稱詡藉甚 及長 博涉經史 文章浩汗 尤長於策 屢度發解而畸名未第 論者惜之 有遺稿一卷
ㅇ 13세 시경 - 14세 전 - 15세 오악 - 16세 확 - 17세 이화 |
19 | 방(坊) | 정구석(鄭龜錫) (石塘) (1790 ~ 1865)유학자 崇報之典 | 일찍이 가훈을 받들어 경서 학문을 닦고 도와 덕을 숭상하여 유학의 태두가 되었다
早襲庭訓經術道德爲世儒宗
영의정 조두순이 75세 나시던 기년에 임금님 면전에서 학문이 두터운 노학자로서 공을 천거하니 효문전 참봉을 제수하셨다. 다시 통례원 인의로 승진하고, 외직으로 전라도사를 제수했다. 그 후 조정에서 경연참찬관으로 의망(추천)받았으나 바로 세상을 별세하시므로 조야에서 이를 애석해 하였다. 문집이 남아있다
領相趙斗淳筵奏其年老篤學卽 除孝文展叅奉 旋陞通禮院引儀 以外臺拜 全羅都事 朝廷擬望於經筵參贊 而遽爾棄世 朝野惜之 有文集
제자 이명운이 행장을 짓고, 승지 김복한이 묘갈명을 지었다. 오대손 윤상이 비를 세우고 글씨를 썼다
門人 李雲明撰 行狀, 承旨金福漢撰墓碣銘 五代孫 胤庠書立碑
< 승정원일기>
1685년 孝文殿參奉
1865년 3월 16일, 영상 조두순 아뢰기를, “전 참봉 정구석은 독서하며 행의가 독실한데, 듣기에 기년으로 장차 머지않아 팔순입니다. 하나의 목숨으로 그 기록을 받는 것은 불가하니 이를 그만두고 특별히 6품직으로 제수하시고 차차 등용하시면 어떠하실지, 감히 앙달하옵니다.” 하니 대왕대비께서 웃으시며 “그리하라” 하였다. 斗淳曰, ~~~ 前參奉鄭龜錫, 讀書篤行人也。聞其年, 將近八耋, 不可但以一命, 收錄而止, 特授六品職, 以爲次次奬用之地, 恐好故, 仰達矣。大王大妃殿答曰, 依爲之
1865년 3월 17일, 인의(引儀)
1865년 4월 22일 이조에서 아뢰길 “통례원 인의 정구석이 제배과한이 되도록 숙배하지 않으니 개차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吏曹啓曰, 通禮院引儀鄭龜錫, 除拜過限未肅拜, 改差, 何如? 傳曰, 允
1865년 6월 14일 전라도사(全羅都事)
1865년 8월 14일 또 아뢰길, “전라도사 정구석이 기간이 다되도록 숙배하지 않으니 개차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又啓曰, 全羅道都事鄭龜錫, 黃海道都事尹墩, 俱爲除拜後, 過限未肅拜, 竝改差, 何如? 傳曰, 允
1868년 4월 9일 고 도사 정구석이 조용히 별세하니 이에 “숭보지전”을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爲故都事鄭龜錫請隱卒崇報之典事 ~~~ 傳曰, 允
* 숭보지전 : “은덕을 갚는 포상”이니 요즘 훈장으로 생각됨 * 실제로 관직에는 노령과 건강사정으로 부임치 않은 듯하다
ㅇ 13세 시형 - 14세 부 - 15세 오규 - 16세 구 - 17세 이도 - 18세 방- 19세 구석 |
19 | 연(埏) | 정현석(鄭賢錫) (1822 ~ 1902) 老典 | 수 통정대부(壽 通政大夫)
ㅇ 13세 시일 - 14세 엄 - 15세 오성 - 16세 황 - 17세 이관 - 18세 연 |
20 | 우석 (禹錫) | 정제원(鄭濟遠) (1842 ~ 1910) 老典 | 수 통정대부(壽 通政大夫)
ㅇ 13세 시원 - 14세 싱 - 15세 오상 - 16세 규 - 17세 이섬 - 18세 원 - 19세 우석 |
20 | 태진 (泰鎭) | 정제인(鄭濟寅) (愚齋) (1813 ~ 1874) 유림 봉선(奉先) | 풍모가 바르고 성품과 도량이 대쪽같이 엄정하였다. 문장과 학문이 깊어 사우들이 우러러 존경하였다 儀容端粹 性度簡嚴 文學行誼 士友推望
* 12세 유(維)공 : 8대손 제인이 정려각을 짓고 기문을 세웠다. 八代孫濟寅建閣于墓前而延旌
ㅇ 13세 시경 - 14세 전 - 15세 오악 - 16세 확 - 17세 이화 - 18세 돈 - 19세 태진 |
21 | 제인 (濟寅) | 정홍림(鄭弘林) (靑居) (1867 ~ 1932) 관직, 유림 | 문장과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文學德行 著名于世
1903년 경남지계위원(慶南地契委員), 궁내부기사원(宮內府記事員) 1906년 태의원주사(太醫院主事), 돈녕사주사(敦寧司主事), 탁지부세무주사(度支部稅務主事) 1907년 재무서주사(財務署主事), 임시재원조사국주사(臨時財源調査局主事) * 승정원일기 확인
ㅇ 13세 시경 - 14세 전 - 15세 오악 - 16세 확 - 17세 이화 - 18세 돈 - 19세 태진 - 20세 제인 |
* 정시형(鄭時亨) : 묘갈명(墓碣銘), 撰 남구만(南九萬) -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65 갑인 이후 이화 입절인(甲寅以後罹禍立節人)
공의 휘(諱)는 시형(時亨)이고 자(字)는 숙하(叔夏)이며, 성은 정씨(鄭氏)이고 관향은 광산(光山)이다. 시조(始祖)는 고려조 삼중 대광(三重大匡)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정신호(鄭臣扈)이고, 5대조는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정웅(鄭熊)이고, 고조(高祖) 정응규(鄭應奎)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이고, 증조(曾祖) 정연(鄭演)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할아버지 정보문(鄭保門)은 현감(縣監)이고, 아버지 정유(鄭維)는 군수(郡守)이다. 군수가 광해조(光海朝) 때 일방(一榜)의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폐모(廢母)에 대한 상소를 올려 그 의논을 배척하려다가 향리에 여러 해 동안 숨어살았고,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반정되자 곧바로 관직에 임명되었다. 어머니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집의(執義) 박명손(朴命孫)의 손녀이자 봉사(奉事) 박한(朴澣)의 딸인데, 만력(萬曆) 기미년(己未年, 1619년 광해군 11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는 영리하고 빼어났으며 자라서는 단정하고 씩씩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필법이 신묘의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선배들이 그 학업을 감상하고 속성(速成)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거듭 상(喪)을 당하여 6년간 시묘(侍墓) 살이를 하면서 예에 지나칠 정도로 거상(居喪)하여 병이 들어 위태로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정유년(丁酉年, 1657년 효종 8년)에 비로소 태학(太學)에 들어갔고, 무술년(戊戌年, 1658년 효종 9년)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는데 파직되었다가 서용(敍用)되었다. 기해년(己亥年, 1659년 효종 10년)에 연원 찰방(連源察訪)에 임명되었고, 임인년(壬寅年, 1662년 현종 3년)에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으로 전직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664년 현종 5년)에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로 승진하였다가 감찰(監察)ㆍ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전직되었으나 파직되었다. 의정부(議政府)의 별도 추천으로 서용되어 위솔(衛率)이 되었다가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년)에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전직되었다. 그때 현고(顯考, 현종(顯宗)을 가리킴)가 동조(東朝, 대비(大妃))를 위하여 집상전(集祥殿)을 건립하였는데, 공이 그 역사를 감독하였다. 한겨울인데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낙성을 하니, 특별히 모엄(帽掩)과 표리(表裡)를 하사하였다. 호조로 전직되었다.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 연달아 금천(金川)ㆍ면천(沔川) 두 고을의 수령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공이 부처의 업무에 능숙하다는 이유로 청원하여 유임시켰다. 주목(州牧)의 추천에 선발되어 기유년(己酉年, 1669년 현종 10년)에 공산 현감(公山縣監)에 임명되었는데, 그 고을은 주목(州牧)이 강등된 것이었다.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에 파직되어 임천(林川)으로 돌아가서 그곳의 강산(江山)을 사랑하여 지명(地名)을 따서 반주(盤洲)로 호(號)를 삼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는데, 선혜청 낭관(宣惠廳郞官)으로 차출하여 진휼(賑恤)의 일을 관장하도록 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672년 현종 13년)에 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임명되었다가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승진하였고,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에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승진되었다. 그런데 형조에서 송사에 진 사람의 거짓말을 듣고 아뢰어 파직시켰다가 조정에서 그 송사의 문건을 열람하고 무고임을 알아 유임할 것을 청하였다. 오래 있다가 어떤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되고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사면되었다.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에 임명되었다가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나가 진휼을 잘했다고 하여 말을 하사받았고, 계해년(癸亥年, 1683년 숙종 9년)에 또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스스로 연로하다고 여기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이조에서 공이 치사(致仕)할 나이가 곧 닥친 것을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치사 이전에 다시 목민관(牧民官)을 시키려고 연달아 세 고을의 수령 후보의 대상으로 첫째에다 넣어 태인 현감(泰仁縣監)에 임명되었다. 어떤 사람이 인사 행정이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말하자, 공론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지만 공은 굳이 사양하여 체차되었다.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년)에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으로 임명되었다가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으로 옮겼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였고 나이도 치사할 때가 이르렀으므로 결단을 내려 반주(盤洲)로 돌아가 다시금 벼슬하지 않았다. 무인년(戊寅年, 1698년 숙종 24년)에 장수로 품계가 승진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기묘년(己卯年, 1699년 숙종 25년)에 졸(卒)하여 공주(公州) 반탄(半灘) 오좌(午坐)의 묏자리에 묻혔다.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현감(縣監) 유동발(柳東發)의 딸인데, 그의 선대가 혁혁하고 현달하여 으뜸의 씨족으로 일컬어졌다. 공보다 2년 전에 태어났다. 성품이 곧으면서도 순하고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등 부도(婦道)가 매우 잘 닦아졌으므로 종족들이 귀의하였다. 공보다 11년 전에 세상을 떠나 공의 곁에 묻혔다.
공은 4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정휘(鄭徽)는 진사(進士) 현감(縣監)이고, 둘째 정징(鄭徵)은 백부(伯父)의 후사로 나갔는데 문과 출신 병조 정랑이고, 셋째 정민(鄭敏)은 무과 출신 가선 대부(嘉善大夫) 부사(府使)이고, 넷째는 정부(鄭敷)이다. 딸은 김규(金湀)에게 시집갔다. 정휘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정오상(鄭五常)ㆍ정오행(鄭五行)ㆍ정오서(鄭五敍)ㆍ정오교(鄭五敎)ㆍ정오준(鄭五俊)ㆍ정오채(鄭五采)이고, 딸은 이천석(李天錫)ㆍ이광조(李匡祚), 생원(生員) 윤동태(尹東泰)에게 각각 시집갔다. 정징은 정오상을 후사로 삼았다. 정민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오봉(鄭五鳳)이고, 딸은 권집(權)ㆍ송내상(宋來祥)에게 시집갔다. 정부는 3남을 두었는데, 정오규(鄭五奎)ㆍ정오위(鄭五緯)ㆍ정오운(鄭五雲)이다. 김규는 4남을 두었는데, 김상화(金相華)ㆍ김상렬(金相烈)ㆍ김상현(金相顯)ㆍ김상철(金相哲)이다. 측실에서 3녀를 낳았는데, 김응명(金應明)ㆍ이신저(李信著)ㆍ심상충(沈尙忠)에게 각각 시집갔다. 증손 몇 명은 모두 어리다.
공이 일찍부터 무리에서 뛰어난 재주와 세상에 수응하려는 뜻이 있어 더불어 교유하는 사람이 모두 다 일시의 유명한 부류였으니, 공경(公卿)을 하더라도 그 누구에게 뒤지겠는가? 그런데 정시(庭試)의 대책문(對策文)이 누차 합격권에 들어갔으나 눈이 오색(五色)에 어두워 급제(及第) 한 번을 못함으로써 만물을 재성(裁成)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도 널리 시행할 수 있는 지위가 없었으니,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가문의 음덕으로 평탄하게 진출하고 또 스스로 분발하여 낭관(郎官)에서 명예가 드높았고 고을에 혜택이 흠뻑 졌음으로써 말과 옷감을 하사받는 등 특별한 은총이 자주 내렸으니, 벼슬살이가 여기에 이르면 또한 영광스럽다고 이를 만하다.
그리고 관리들 속에 뒤섞여 있으면서도 마음에 고의(古誼)가 독실하여 출처(出處)의 즈음에는 반드시 마음에 만족해야 하였다. 만년에 일을 사절하고 초연(超然)히 벼슬길에서 떠나 한 번 도성의 문을 나가자 곧바로 세상의 분란을 단절하고 북해(北海)처럼 벗을 불러 술잔을 나누고, 서호(西湖)처럼 학ㆍ매화와 어울려 노닐며 즐기면서 세상 밖의 맑은 운치를 십수 년간 누렸으니, 자고이래로 순리전(循吏傳) 가운데 또 이처럼 고상한 기풍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아! 숭상할 만하도다.
나는 응교부군(應敎府君)의 외손자이므로 나와 공은 실로 중표(中表)의 정의가 있다. 그런데 중간에 떨어져 살다가 갑자기 천고(千古)로 떨어져 버렸으므로 옛날을 회상할 때마다 매우 슬펐다. 공의 아들들도 많이 세상을 떠나고 막내아들만 남아있는데, 그가 묘소에 기록할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이 일에 대해 어찌 차마 늙어서 정신이 혼미하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가림(嘉林)의 동쪽에 반주(盤洲)가 있도다. 호수와 산들이 맑고 화려하여 수목이 깨끗하고 그윽한데, 이곳이 바로 공이 사는 집이니 노년에 벼슬을 사직하고 여기에서 휴식했도다. 공산(公山) 서쪽 모퉁이에 반탄(半灘)이 있도다. 산봉우리가 휘감아 안아서 풍기(風氣)가 왕성하게 서렸는데, 이곳이 바로 공의 무덤이니 혼백이 안식(安息)한 곳이도다. 유풍(遺風)을 상상하니 어언간 좌우에 맴돌도다. 백세는 앞에 있고 천세는 뒤에 있도다. 좋은 말을 새기니 영원히 불후(不朽)할 것이도다.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정부(鄭敷) : 권상하(權尙夏)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속고6
가림(嘉林)은 바다와 인접한 곳으로서 강가의 뛰어난 경치가 호우(湖右) 지역에서 으뜸으로 꼽히는데, 나의 우인(友人) 정 대재(鄭大哉)가 그곳에 살았다. 그는 청백하게 몸을 수양하고 학문에 힘써 높은 관원들과 선비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는데, 지금 이조 판서로 있는 이만성(李晩成)공이 왕명을 받들어 본도를 순무(巡撫)할 때에 공의 재주와 학식을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서 그 포부를 펴보지 못하였으므로, 공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애석하게 여기었다.
대재(大哉)는 휘(諱)가 부(敷)이고, 고(故) 해주 목사(海州牧使) 정시형(鄭時亨)의 막내 아들이다. 숭정(崇禎) 기해년(己亥年, 1659년 효종 10년) 윤3월 7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침중 단결(端潔)하였고, 자라서는 행의(行誼)가 순수하게 갖추어지고 문사(文辭)에 능하였으며,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모두 잘 썼으므로 선배들은 그가 원대하게 성취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윽고 반시(泮試)에서 명성을 울렸을 때에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공이 그의 걸출한 글귀를 외우면서 자주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장옥(場屋)에서 명예를 독차지하면서 누차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명운(命運)이 기구하여 끝내 대과(大科)에는 급제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게 여기었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보다 지나치도록 슬퍼한 나머지 몸이 몹시 야위었고, 기묘년(己卯年, 1699년 숙종 25년)에 목사공(牧使公)이 서너 달 동안 병들어 누워지내자, 곁에서 부축해 모시며 병구완을 하는 데 지극 정성으로 효도를 다하다가 상을 당하기에 미쳐 예전처럼 상례대로 거상(居喪)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712년 숙종 38년)에 서울에 들어갔다가 병이 들어 5월 14일에 죽으니 향년은 54세였다. 임천(林川)의 집 뒤에 있는 술좌(戌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대재는 효성과 우애가 남보다 뛰어나서 형과 누나를 항상 화기애애하게 모셨으며 분가(分家)할 때에도 형제들에게 많이 양보하고 자신은 조금만 가져갔다. 두분 형이 먼저 죽었으므로 구수(丘嫂, 큰 형수(兄嫂)를 말함)를 받들고서 조상의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아버지를 여읜 여러 조카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무양(撫養)하니, 이웃 사람들이 모두 감화되어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묻곤 하였다.
대체로 대재는 성품이 너그럽고 솔직하였으며 말수가 적어서 평소에 과격한 행동이나 남을 시기하여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믿고 사랑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읜 이후로 강산(江山)을 유유자적하며 문 밖을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서 경적(經籍)을 폭넓게 보았다. 또 손수 여러 사책(史冊)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베껴내어 10책으로 엮은 뒤에 이를 ≪사준(史雋)≫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 가운데 정신을 몰두하고 이것을 낙으로 삼아 그 곤궁함을 잊고 지냈다. 그중에서도 주자(朱子)의 글을 가장 좋아하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마음을 두었는데, 항상 늦게서야 깨달아 성취하기가 어렵다고 탄식하곤 하였다. 그리고 젊었을 때 함께 지내던 동무들이 모두 현달한 관직에 있었으나 일찍이 그들에게 문안하는 편지조차 한 통 보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무나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고려 때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정신호(鄭臣扈)를 상조(上祖)로 삼는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현달한 관원을 계속 배출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응교(應敎) 정웅(鄭熊)은 중종조(中宗朝) 때에 검열(檢閱)로 재임하면서 소장(疏章)을 올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호)이 원통하게 죽은 일을 신원(伸寃)하도록 청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옳게 여기었다. 증조(曾祖)는 정보문(鄭保門)인데 현감(縣監)이었고, 조(祖)는 정유(鄭維)인데 광해군(光海君)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자는 논의에 반대 의견을 제기하고 곧장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인조 반정(仁祖反正) 후에 맨 먼저 수록(收錄)되어 벼슬이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이르렀다. 부친인 목사공은 젊었을 때에 높은 인망(人望)이 있어서 한 시대의 승류(勝類)들에게 추중을 받았고 만년에는 순리(循吏)로 이름이 났는데,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25년)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선비(先妣)는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좌의정(左議政) 유양(柳亮)의 후손이며 감찰(監察) 유동발(柳東發)의 딸이다.
정 대재는 감사(監司) 홍위(洪葳)공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두었는데, 정오규(鄭五奎)ㆍ정오위(鄭五緯)ㆍ정오운(鄭五雲)이다. 장방(長房, 맏아들을 말함)은 2남 2녀를 낳았고, 중방(仲房, 둘째 아들을 말함)은 2남을 낳았으며, 계방(季房, 막내 아들을 말함)은 2녀를 낳았다.
아! 대재는 재주와 행실로써 일찍부터 뛰어난 칭찬을 짊어졌으니 마땅히 명성을 세상에 크게 떨칠 듯 하였는데,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으니, 천도(天道)를 알 수가 없다. 선(善)을 하는 자를 어떻게 권면하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일찍이 관찰하건대, 인(仁)을 쌓고 행실을 깨끗이 하고서도 그 보답을 누리지 못할 경우 반드시 그 후손을 크게 창성하게 하였으니, 근원이 깊으면 멀리까지 흘러가는 것이 이치의 떳떳함이다. 지금 정오규가 그 전해오는 가업을 이어서 사우(士友)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졌으니, 하늘이 그 후손에게 넉넉하게 해준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가보다.
나는 정대재와 서로 인척 관계의 정의(情誼)가 있어서 그의 평소 언행(言行)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묘문(墓文)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마침내 그 가장(家狀)을 간추리어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내가 가진 꽃다운 재주와 덕망은 남들이 몰라준들 무엇이 손상되랴. 분수를 지키고 천명에 순응하면서 애오라지 그렇게 유유자적하였네. 봉곳한 이 언덕에 착한 선비가 묻혀 있으니, 효자가 옥돌에 글을 새기어 천추(千秋)토록 빛나게 하였네.
[네이버 지식백과] 정부 [鄭敷]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김석주(金錫冑) : 1634년(인조 12년) ~ 1684년(숙종 10년)
조선의 정치가.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청풍. 병조 판서 좌명(佐明)의 아들. 효종 때 진사에 장원하고 1662년(현종 3) 문과에 또 장원 급제, 전적(典籍)이 되고, 옥당(玉堂)에 들어가 오래 있었으며, 우승지ㆍ이조 좌랑을 거쳐 숙종이 즉위 하자, 도승지ㆍ이조 참판(參判)ㆍ부제학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특진하여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 때 흉당이 일을 꾸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은 이미 처형 되고 국구(國舅) 김만기(金萬基)를 몰아내려 하자, 왕에게 상소하여 그들에게 따르지 않게 하였으며, 어영 대장을 겸하게 되자, 이를 시기하는 남인(南人)과 영의정 허적(許積)의 아들 견(堅)의 역모를 사전에 알아 채고 상소하여 그 일당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보사(保社) 공신의 호를 받고 청성(清城) 부원군에 피봉되었다. 뒤에 병조 판서를 거쳐 1658년 우의정에 이르렀고, 사망한 후 4년 만에 남인이 또 권세를 잡게 되어 작위가 박탈되었으나 또다시 복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석주 [金錫冑]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 박세당(朴世堂) : 1629 ~ 1703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등 이다. 이조 참판 박정(朴炡)과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후기의 학자로 남원에서 태어났다. 현종 1년(1660)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관·북평사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을 때는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려 신분제도의 모순에 따른 사대부들의 무위도식을 비판하고,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실리주의 정책을 펼 것과 백성을 위한 법률의 혁신, 정치·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1668년에는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있다가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관료생활을 그만두고 양주(楊州) 석천동(石泉洞 : 지금의 도봉산 아래 다락원)으로 물러났다. 그뒤 숙종 23년(1697) 4월에 한성부판윤을 비롯하여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 수차례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주력하였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송시열(宋時烈)을 축으로 한 노론계(老論系)가 정국을 주도하였고 있었기 때문에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 입장에 섰던 그로서는 정치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병자호란 당시 송시열이 청태종공덕비문을 지은 이경석(李景奭)을 비판한 것에 대해 1702년 이경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찬술하면서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판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여 노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조선의 성리학이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를 보이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1703년에는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밝혀 노론에게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박세당은 관작을 삭탈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유배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으면서 아들에게 “장례를 지낸 후에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상식(上食)을 설치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이 말은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행동양식 표준으로 인식되어 오던 예론(禮論)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서 당시 정치세력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그는 당대 조선조 유학을 지배하던 주자설(朱子說)의 절대화된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각적인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주학적(程朱學的) 학풍과 사상이 강요되던 테두리에서 벗어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태도로 고전의 본뜻을 찾아보고자 하였기 때문에 관념화된 성리학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이후 진보적인 학문을 촉진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치적으로 소론계(少論系)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소론의 거두인 윤증(尹拯)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 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그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원(伸老)되었으나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水落山) 중턱 석림사(石林寺) 옆에 그의 묘소가 있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 《사변록(思辨錄)》,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1책 및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6책과 농서인 《색경(穡經)》이 전한다.
(두산백과)
* 이재(李縡) : 1680년 ~ 1746년, 조선후기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유겸(有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䎘)이고, 아버지는 진사 만창(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 ≪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4년 설서, 이듬해 사서가 되어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했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부교리·응교·필선·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
1712년 장악원정·수원도호부사, 1713년 형조참의·대사성, 1715년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1719년 형조참판·승문원제조·부교리 등을 거쳐 경상도에 균전사(均田使)로 파견된 뒤 당면한 토지 정책을 논하다가 파직되었으며 이듬 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721년(경종 1) 대사헌·동지춘추관사를 겸하다가 실록청당상에 임명되었고, 이조참판에 제수되면서 실록청도청당상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1722년 임인옥사 때 중부 만성(晩成)이 옥사하자 은퇴하고, 인제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 서울 성문 밖으로 쫓겨남)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송명흠(宋命欽)·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예학(禮學)에도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 陶菴集≫·≪도암과시 陶菴科詩≫·≪사례편람 四禮便覽≫·≪어류초절 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권상하(權尙夏) : 1641년∼1721년, 조선 후기의 학자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아버지는 집의격(格)이며, 동생은 우참찬상유(尙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660년(현종 1)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668년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留任)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1659년(효종 10) 효종의 승하시에 있었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가 다시 발생하여, 송시열은 관작을 박탈당하고 덕원(德源)에 유배되는 불운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남인의 정권에서는 관계에 진출하는 것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하며 학문과 교육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거나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 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하였다.
1703년 찬선, 이듬해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그 밖에도 1705년이조참판과 찬선, 1712년판윤과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인성·물성 상이론의 발상은 후천적인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본성을 동물성으로부터 분별하고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
이처럼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준다. 또한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禮學)에 의해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써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이 중 『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으로 영인되어 간행되었으며, 가전되던 영정을 수록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오도일(吳道一) : 1645∼170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 선공감역(繕工監役) 오희문(吳希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이고, 아버지는 오달천(吳達天)이다.
1673년(현종 14)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80년(숙종 6) 지평·부수찬, 1683년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687년 승지가 되어 자파(自派)를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1694년 개성부유수를 거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간·부제학·강원도관찰사에 이어 다시 부제학을 거쳐, 1696년 도승지·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다음해 예문관제학·사직·이조참판, 1698년 이조참판·공조참판을 지내고 양양부사로 좌천, 삭출(削黜)되었다가 1700년 대제학·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성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세칭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라 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숙종으로부터 과음의 경계를 받았다. 죽은 뒤 복관되고 울산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파집』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극효(金克孝) : 1542 ~ 1618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62년(명종17)에 세자익위사의 세마(洗馬)를 지냈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동지동녕부사에 이르렀다. 신(新)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중시조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희민(希閔)이며, 호는 사미당(四味堂)이다. 아버지는 신천군수(信川郡守)을 지낸 김생해(金生海)이다.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중시조로서, 나란히 정승에 오른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의 아버지이다.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1562년(명종17)에 동궁의 시위를 담당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를 지냈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德沼里)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두산백과) |
< 정시형 묘갈명 : 남구만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 정부 묘갈문 : 권상하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첫댓글 13세 정시무공의 사위 박세당공의 배 광주정씨는 삼남 박태한공을 낳았는데 친생자입니다. 설명에 전부인 소생이라고 잘못 기재되었는데, 이 글은 스크랩형식으로 재게재되어 수정이 안됩니다. 의정부 석천동 서계(박세당) 가문의 길가 소개 안내판에도 친생자로 써있습니다. 반남박씨 족보에 의하면 박태한은 통훈대부(종3품) 한성부 판관이며, 4남 5녀를 두었고, 3남 박필규는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