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하회관/안하경로당/수담(壽潭)노인정
1시간 정도 걸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 안하회관에 도착했다.
잠깐의 준비운동을 마치고 원통산의 들머리인 조항마을로 달려간다.
4.5km 떨어진 거리의 지방 차도는 차량 통행이 뜸해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조항마을
조항(鳥項)마을은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의 운둔지이면서 동학 교리를 설법한 곳으로 알려졌다.
비석의 글월을 그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해월신사 동학교리 설법장소 / 임실군에 동학이 처음 포교 된 것은 1878년 3월이다. 동학의 2세 교주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이 장수교인 김신종을 데리고 주치리 새목터 허선의 집에서 35일간의 설법을 시작하신 것이 처음이며 강진면에서 15일간 설법을 하였다.
해월신사 은둔지 / 동학2대교주 최시형이 1894년 9월 동학 농민혁명 재봉기 이후 우금치 전투 등 격전이 벌어지는 시기의 대부분을 여기서 머물며 상황을 주시하였던 곳이다. 11월25일 김제 원평에서 전봉준과 함께 손병희 동학군이 후퇴하여 갈담을 거쳐 찾아온 손병희(3세 교주)를 만나 12월 초 충청지역으로 도피하였다."
날씨는 화창했지만 마을회관의 태극기가 나부끼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바람은 초속2미터로 불어댔다.
원통산 초입 임도
조항마을에서 새목재까지 오르는 임도는 3km 정도이다.
마을을 벗어나서 임도로 접어들면 잡초가 무성하여 굴러가는 바퀴를 붙잡는 것 같다.
지도에는 포장도로가 새목재까지 이어져 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다.
조금 더 올라가서 포장도로에 진입했다.
새목재
개인적으로 새목재의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장대 같은 나무들이 펼쳐져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린 설경이었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새목재라는 지명은 임실 출생의 조선 최고 풍수가인 홍성문대사가 비조탁목이라고 한데서 지어졌다고 한다.
비조탁목(飛鳥啄木)의 형세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형상이라고 한다.
541고지
이번 라이딩도 멜바 구간이 많겠다고 살짝 걱정했었다.
새목재를 지나서 잠깐 서너 군데 오르막에서만 끌바로 이동하였고 대부분 원통산 정상으로 가는 능선은 안장에 올라 패달 질을 이어갈 수 있었다. 541고지에서 조망이 제일 좋았다.
원통산 정상
"원통산은 임실군의 덕치면 사곡리, 가곡리, 삼계면 학정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남쪽으로 시루봉 북쪽으로 지초봉과 연결되어 산줄기를 이룬다. 서쪽 사면에서 평지천이 발원하여 섬진강에 동쪽 사면에서 후곡천이 발원해 오수천에 합류한다. 「여지도서」(임실)에 "원통산(元通山)은 두만산에서 뻗어 나와 관아의 서쪽 35리에 있다"고 하였고, 이후 「여지고」에는 "원통산(元通山) 혹은 원통산(圓通山)이라 하였다. 6.25전쟁 전후 원통산은 빨치산 활동의 중심부이기도 하였다. 공산군 점령 기간 중 전북의 공산 통치를 맡았던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방준표가 협력자들과 함께 국군 및 UN군의 수복에 앞서 전주를 탈출 회문산에 입산하여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를 설치하여 회문산 일대를 중심으로 순창쌍치, 임실덕치·삼계에 위치한 원통산에 활동하였으며, 원통산 정상은 국군과 빨치산의 치열했던 전투 격전지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원통산 정산에는 전투의 상흔이 남아있으며, 1950년 9·28 이후 이듬해 1951년 1월까지 회문산 주변 일대 마을주민들 가운데 공산유격대에 의해 살해된 주민 수는 모두 1백72명에 이른다."
원통산의 지명 유래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김해 양씨가 멀리서 산세가 좋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와서 조상들을 모실 명당자리를 찾았으나 헛수고를 하고, 순창에 명당자리를 잡았다. 그 뒤부터 먼 곳에서 찾아왔다가 헛걸음하고 마을을 아파하며 돌아갔다고 해서 멀 원(遠), 아파할 통(痛)을 써서 원통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원통산 정상 2
원통산 정상에 올랐을때 이정표와 지도, 안내판 그리고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조성되어서 당연히 이곳이 정상이라고 여겼다.
의례적인 기념촬영을 마치고 하산하려고 몇 미터나 지났을까 또 다른 정상 이정표를 발견하였다.
어느 누가 603.5m인 원통산 정상에 다녀왔어라고 시비를 걸어 오면 다녀오고도 증거가 없으면 할 말이 없어 원통 할 뻔 했지 않은가?
정상 아래 헬기장에서 기가 막히게 맛있고 푸짐한 점심을 먹었다.
상상만 하시라고 사진은 올리지 않은 점 이해해 주세요.
443고지
정상에서 약 1.8km를 끌바·멜바 없이 타고서 내려 올 수 있어서 너무너무 즐거웠다.
443고지를 내려가는 길은 위험한 급경사도 있고 계단도 놓여 있다.
등산객이 없어서 인지 낙엽은 고스란히 쌓여 있어 지면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으니 낙차에 조심해야 했다.
학정마을
학정마을의 흙돌담은 옛 도요지에서 가져와 쌓은 것이라고 한다.
성문안/성문사/학정리 석불상
성문사는 조계종이 아닌 한국일심유도회 소속의 절이다. 2003년경 성문사 앞에 있었던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7호
<학정리석불>을 법당내로 옮겨 봉안해 오다가 2018년 학정리석불의 대좌가 있었던 학정리 55번지로 다시 옮겼다. 대웅전과 산신각을 갖추고 있다. [출처 임실군지]
세련미 보다 둔중한 느낌을 주는 고려시대의 학정리 석불은 마을 밭 가운데에 하반신이 땅에 묻혀있는 상태였으며, 대좌와 광배가 따로따로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가곡-원치 임도
라이딩은 항시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원통산 정상에서 내려 올 때 몸이 앞으로 쏠린 상태에서 크게 경사각이 변하면서 순간 몸의 균형을 잃게 되며 낙차 할 뻔했었다.
또한 학정마을 지나 지방 차도인 세학로를 바람을 가르며 내려오는데 앞바퀴의 바람이 순식간에 빠지면서 조향은 어렵고 브레이크를 급히 잡을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다. 무사해서 다행스럽긴 했지만, 당사자는 아찔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곡-원치 임도의 2km정도는 오르막인데 여름이었다면 이 길은 배가 힘들었을 것 같다.
가곡마을 / 돌탑
가곡(佳谷)마을은 조선 초기 밀양박씨에 의해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가곡은 마을공간이 골짜기가 깊고 아름답다하여 ‘가실’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강점기이후로 가곡(佳谷)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
가곡마을 돌탑은 마을들어오는 길이 3곳인데 그 길목에 3기의 돌탑이 있었다. 현재는 2기가 남아 있다. 하나는 현재 마을 입구 모정과 느티나무 숲 건너편에 돌탑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나머지는 독배기로 넘어가는 산중턱에 허물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마을입구 돌탑은 허물어진 상태에서 2010년경에 조성되었다가 길을(2016년) 내면서 다시 새롭게 조성하였다. 이 돌탑은 전형적인 수구막이 돌탑으로 마을 우백호 맥 끝자락에 위치한다. 돌탑 형태는 콘크리트 기단 위에 원통형으로 조성하였다. 크기는 높이 200cm, 너비 280cm, 탑 윗돌은 2기가 있는데 각각 80cm, 50cm 크기의 자연석이 올려져 있다. 독배기라 불리는 곳에 있는 돌탑은 허물어진 상태라 크기를 알 수 없으나 탑 윗돌로 세워진 돌은 확인할 수 있다. 과거 정월대보름날에 제를 모시기도 했으나 현재 특별한 제의는 없다.
보통 우리가 연상하기에는 고개에 돌무더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을 서낭당이라고 하는데 마을입구에 형성된 돌탑은 마을사람들의 공동체적인 의식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을 말한다. 조산, 조탑, 돌산, 탑거리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데, 이러한 탑들은 보통 마을 입구가 허(虛)한 경우에 세워진다.[출처 임실군지]
총거리가 22.6km 정도지만 모처럼 끌바 멜바를 짧게하고 대부분의 경로를 안장 위에서 라이딩했다는데 만족합니다.
충분한 휴식과 멋진 풍경의 볼거리 그리고 맛있는 식사를 겸해서 즐거웠습니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다행히 안전하게 여행을 마치게 되어 감사하고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100명산 라이딩 중 수월한 코스이여서 나름 편안히 다녀왔습니다
백호님 삼겹살 준비해줘서 맛있게
먹었어요^^
수고들 하셨습니다~~
설경이 그리워지는데 더 이상 눈을 기대하기 어렵겠죠.
즐거운 라이딩였습니다.
낙엽이 말목까지 들어갈정도로 푹신한 라이딩! 재미 있었습니다.경치도 너무좋았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아찔한 순간을 무사히 넘겨서 다행입니다.
삼겹살비빔라면 찰떡궁합이었습니다.
사진은 쫄보라서 못 올렸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명절 잘 보내셨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