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일 찬송할 시편 46편을 가정에서 여러 번 찬송합시다. https://youtu.be/iH2TAqVPEyY
시편 43편 찬송: https://youtu.be/XdXEbOsOxqM
고라자손의 시편 (2) 시편 43편
나를 정의롭게 판단해 달라는 탄식에서 찬송으로
찬송 시편 46편
2021-2-16, 화
맥락과 의미
시편 42편부터 49편까지는 매 시편마다 고라 자손의 시편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43편에는 제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42편과 43편은 원래 하나의 시편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여 하는가? 어찌하여 내 안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하나님을 바라라. 나의 얼굴의 구원이신 나의 하나님을 나는 또한 찬송하리라”(42:5, 11, 43:5)가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도를 잊으심으로 인해 자기가 원수의 핍박 속에서 슬프게 걸어 다니고 있음을 고백하는 점에서 비슷합니다(42:9와 43:2).
42-43편 내용: 성전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과 원수에 대한 징벌을 간구
1. 사슴이 메마른 땅에서 물을 찾듯이 하나님 찾으며 성전에서 예배할 날 기다림: 사람들의 조롱(42:1-5).
2. 헤르몬 산의 폭포 앞에서 주님의 징계를 생각함: 원수의 압제와 조롱(42:6-11). 42
3. 성전을 배경으로 주님의 심판을 간구: 원수의 압제와 조롱(43장)
43편
1. 원수의 억압을 심판사시도록 기도(1-2절)
2. 빛과 진리로 인도하여 찬송을 드릴 것을 사모하며 약속(3-4절)
3. 낙심하는 자신을 격려하며 찬송함(5절)
오늘도 하나님을 무시하는 반대자들이 우리를 공격해도 이 시편으로 간구하며 우리의 영혼을 굳게 세웁시다.
1. 신원의 기도
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신실함이 없는 이방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변호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앞서 했던 기도가 이어 지고 있습니다. 거짓되고 불의한 사람에게서 억울한 이 성도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42:3) 하면서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에 여호와의 성전에 나아가던 때를 추억하면서 낙망하고 있습니다(42:4-5). 하나님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며 호소하였습니다. 이제 원수의 억압으로 슬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을 원수 삼는 사람과 맞대응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도 주님은 저의 피난처라고 부르면서 주님께 피하였습니다. 몇 번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다고 하면서 다른 신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주님께 호소한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구하는 것처럼 생명과 사망의 갈림길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2. 빛과 진리로 인도함과 찬송을 드림
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성도는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주님께 피합니다. 자기를 주님의 빛과 진리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거룩한 산에 오를 수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룩하신 임금님께 나아가려면 왕의 시종(侍從)의 안내를 받아야 함을 깨닫고 시종을 보내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 시종은 주님의 빛과 주님의 진리입니다. 참된 빛을 말합니다. 이 어두운 현실 가운데 놓인 자신을 주님께서 참된 빛으로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빛과 진리는 첫째는 출애굽 당시에 보았던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을 생각하게 합니다. 광야 생활에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출 14:24) 하신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참된 빛으로 보호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둘째, 제사장이 성전에서 축복한 것에 주님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드시고 빛을 비추어 주시면 그것을 가장 큰 복으로 여겼습니다(민 6:24-27). 하나님께서 얼굴빛을 비추셔서 그 빛을 보게 되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구원 얻은 사람은 성전에 나아가서 구원의 은혜를 한껏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성전에 이르게 되면 그분의 제단으로 나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전에 성전에서 예배를 인도하던 때를 회상하고 마음이 상한 상태에 있습니다. 주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을 마치 영상으로 보듯이 생생하게 그리면서 결심합니다. 찬송을 결심도 사실은 찬송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시가 여기에서 끝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낙심하는 이 성도의 모습이 나옵니다.
3. 낙심하는 자신을 격려하며 찬송함(5절)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는 낙심하여 있습니다. 우리도 한편으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믿고 나아가겠다고 헌신하면서도,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조롱하는 말이 더 크게 들립니다. 그들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낙담하고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세상과 육신이 내 안에도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송하는 데에서 일관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방향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왜 불안해 하는가? 하나나님을 소망하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는 “그 분의 얼굴의 구원으로”입니다. 나의 얼굴의 구원이신 나의 하나님을 나는 또한 찬송하리라고 새롭게 헌신합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계속 낙심하고 불안해 하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라! 아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찬양하자!”
4.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과 참된 안식
1) 고통의 현실에 대해 질문하는 기도가운데 얻는 안식
42-43편에는 의문문이 많이 나옵니다. 왜 혹은 무엇이 9회, 어디가 2회, 언제가 1회 나오고 합해서 총 12회의 의문문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대한 언급 또한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네 하나님 내 생명의 하나님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나의 기쁨과 희락이신 하나님 나의 얼굴의 구원이신 하나님 등과 같은 다양한 표현이 21회 나옵니다. 하나님을 “그분, 당신”으로 말하는 대명사까지 세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절실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영혼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표시합니다. 42-43편에서 영혼이 모두 일곱 번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당하는 현실에서 성도는 간절히 하나님만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 주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표현하며 간절히 찾습니다.
이러한 간구의 결과로 시인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간절히 부르며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이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가 주님을 계신 그대로 뵙기 전까지는 주님을 뵈옵는 일이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의 말로 주님을 찾는 것 자체가 해답입니다. 고통을 주는 외부환경은 변화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영혼을 신령한 것으로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응답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 자체가 응답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어느 때보다 외부 환경은 안정되고 풍요릅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보다 불안해 하고 우울증 등이 많습니다. 물질을 우상으로 받드는 것이 중요한 원인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불안이 더 커졌습니다. 불안에 대한 해결책은 교회에서부터 이러한 시편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이 만족함을 누리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도록 우리 영혼에게 말합시다. 이것을 통해서만 불안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 마음에 솟구치는 불안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이 경험한 불안과 극복
신앙의 갈증과 요동함을 바르게 풀고 나아가야 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고민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서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요한복음 12:27은 말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괴로우니”는 파도가 치듯이 마음이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말도 하기 어려운 상황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12:28에서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성부로부터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는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그 길을 향하여 가셨지만 그 도중에 마음이 요동하는 상태에 들어가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할 상태에 빠지기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것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아뢰면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도의 고민하는 모습과 예수님의 번민하시는 모습을 성경에 기록하여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번민하는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와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기도를 하며 나아오도록 하려고 시편 42-43편 같은 말씀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도 기록해 주셨습니다.
조금 더 생각하기
믿고 복종할 일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분을 얼굴과 얼굴로 대하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하여 믿음으로 시편 43편을 부르면서 살아갑시다.
우리 시대는 불안감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신자들을 더 조롱합니다. 과학기술로 바벨탑을 쌓는 현대인들은 옛적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신자들을 조롱하던 자들보다 더 심하게 우리를 조롱합니다. 주님께서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이 세상의 비방과 우리의 흔들림에 대한 참다운 대답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러한 시편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할 때 이미 성령님께서 우리의 근원적인 불안함을 사라지게 하십니다.
오늘도 불안한 우리 마음이나 사람들의 비난, 외부환경을 보지 맙시다. 기도하며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얼굴로 향합시다.
<참고> 시편 42-3편과 고대교회
시편 42-43편을 고대교회에서는 세례식에서 불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세례를 받을 때에 이 시편을 불렀다고 합니다.
전통에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시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자리[세례의 자리]에 단지 무슨 말만 하려고 나온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시편을 응답송으로 부를 때에 그 응답이 언약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주님, 사슴이 물의 근원을 찾아 갈망하는 것처럼 저의 영혼이 주님을 열망합니다” 하고 말할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소리로 주님을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한다고 고백함으로써 종이나 잉크도 없이 서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