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달마발지론 제20권
8.6. 가타(伽他)납식
본 자[見]와 범지[梵]와 아비[父]와 이긴 자[勝]와 그물[網]과
수레[車]와 근본[本]과 믿지 ≺않는≻ 자[信]와 흐름[流轉]과
어미[大母]와 왕(王)과 각혜[慧]와 해탈[脫]과 뿌리[根]≺를 표제어로 하는 가타(伽他)≻에 대해
원한다면 이 장에서 모두 설명하겠다.
이미 본 자[已見者]는
이미 본 것과 보지 않은 것을 보며,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은 것과 이미 본 것을 보지 못한다.
‘이미 본 자’라고 하는 것은, 이미 고ㆍ집ㆍ멸ㆍ도를 본 모든 이를 말하며,
‘이미 본 것과 보지 않은 것을 본다.’고 하는 것은, 그들은 이미 보았거나, 또한 아직 보지 않은 그 밖의 다른 여러 고ㆍ집ㆍ멸ㆍ도를 보는 것을 말한다.
‘보지 않은 자’란 고ㆍ집ㆍ멸ㆍ도를 보지 않은 모든 이를 말하며,
‘보지 않은 것과 이미 본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은 보지 않았거나, 또한 이미 본 그 밖의 다른 여러 고ㆍ집ㆍ멸ㆍ도를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범지(梵志)를 해쳐서도 안 되며,
또한 버려두어서도 안 된다.
만약 그를 해치거나, 혹은 버려둘 것 같으면,
다 같이 세간과 지혜 있는 자로부터 나무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범지를 해쳐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범지란 바로 아라한이기 때문에 손이나 흙덩이ㆍ칼ㆍ몽둥이로써 아라한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버려두어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아라한에게 의복ㆍ음식ㆍ잠자리ㆍ의약품이나 그 밖의 생활에 필요한 여러 용구로써 공경하고 공양해야 하지, 그냥 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그를 해치거나, 혹은 버려둘 것 같으면, 다 같이 세간과 지혜 있는 자로부터 나무람을 당하게 될 것이다.’고 하는 것은, 아라한을 손이나 흙덩이 등으로 해치거나, 혹은 또한 그냥 내버려 둔 채 공경하고 공양하지 않으면 다 같이 세간과 지혜를 가진 모든 이로부터 나무람과 헐뜯음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아비[父]와 어미[母]와 왕,
그리고 두 가지 다문(多聞)을 거역하고 해치며,
나라와 그것에 따르는 것[隨行]을 쳐부수고,
어떠한 장애도 없이 지나치면, 그가 곧 범지이다.
‘아비와 어미와 왕, 그리고 두 가지 다문을 거역하고 해친다.’고 하는 것에서 어미란 아이를 낳는 자이기 때문에 바로 애(愛)를 비유한 것이다.
이는 세존께서 설명하신 것과 같다.
사람[士夫]은 애로부터 생겨난 것이며,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사로 내닫게 된다.
즉 유정은 생사에 처하여,
괴로움으로 크게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비란 인기(引起)하는 자이기 때문에 바로 유루업을 비유한 것으로, 이는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유정은 선한 유루를 닦아 이루어진 업을 지었으므로 그것에서 생겨난 결과의 이숙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는 업에 따라 행하는 자이다.’고 설명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왕은 유취식(有取識:취란 번뇌, 곧 번뇌를 갖는 의식인 유루식의 뜻)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세존께서 설명하신 것과 같다.
여섯 번째는 증상왕(增上王)이니,
더러워질 때에는 스스로 더러움을 취하며,
더러워지지 않을 때에도 더러워져 있으니,
여기서 더러워진다고 함은 어리석은 범부를 말한다.
또한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알아라. 나는 성주(城主)를 바로 유취식이라고 한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두 가지 다문이란 바로 견취와 계금취를 비유한 것이다.
제사를 지내거나 침묵하는 두 다문은 더러운 진흙창[塵穢] 중에 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듯이,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취는 유루법을 가장 뛰어난 것이라 집착하며, 혹은 또한 정탈(淨脫)과 출리(出離)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와 같은 유루애의 업(業)과 식(識)과 취(取)를 버리고 영원히 끊었기 때문에 ‘거역하고 해쳤다.’고 일컬은 것이다.
또한 나라는 번뇌를 비유한 것이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란 그와 같은 번뇌와 상응하는 심(尋)과 사(伺)를 비유한 것이다.
‘쳐부수었다.’고 하는 것은 쳐부수고 도륙하는 것을 말하는데, 번뇌와 심ㆍ사를 버리고 영원히 끊었기 때문에 쳐부수었다고 일컬은 것이다.
‘어떠한 장애도 없다.’고 하는 것에서, 장애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탐ㆍ진ㆍ치이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세 가지를 이미 끊고 변지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장애도 없다고 일컬은 것이다. ‘지나친다.’고 하는 것은 나왔다는 말이다.
즉 그에게는 장애가 없기 때문에 삼계로부터 벗어났으며, 악법을 영원히 제거하였다. 그래서 범지라고 일컬은 것이니, 세존께서 설명하신 것과 같다.
부처는 항상 정념(正念)에 머물며,
세간을 두루 교화하며,
악법을 제거하고, 번뇌[結]를 다하였으니,
그래서 범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아비와 어미와 왕,
그리고 두 가지의 다문을 거역하고 해치며,
호랑이와 다섯 번째의 원수를 제거한 이,
이러한 이를 청정한 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앞의 반 구(句)의 뜻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다.
호랑이는 진에의 번뇌[纏]를 비유한 것이다.
즉 호랑이가 품성이 포악하고 흉험하여 피와 살을 먹듯이, 진에도 역시 포악ㆍ흉험하여 모든 선근을 소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원수란 오개(五蓋) 중의 다섯 번째 개를 비유한 것이다.
혹은 오순하분결 중의 다섯 번째 결을 비유한 것으로, 이를 버리고 영원히 끊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는 탐ㆍ진ㆍ치를 영원히 끊었기 때문에 청정한 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미 이긴[勝] 자는 다시는 이기지 않으며,
이미 이긴 자에게는 따르는 바가 없다.
부처의 소행은 무변(無邊)으로서,
어떠한 자취[迹]도 없으니, 무엇에 의해 나아갈 것인가?
‘이미 이긴 자’라고 함은 여러 번뇌를 이미 끊고 변지[斷遍知]한 자를 말하는데, 그는 다시 이기는 경우가 있으며, 다시는 이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떤 이가 다시 이기는 자인가?
이미 번뇌를 끊었더라도 다시 뒤로 돌아서 물러나는 자이다.
어떤 이가 다시 이기지 않는 자인가?
이미 번뇌를 끊고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자이다.
즉 다시는 이기지 않는 자는 다시 이기는 자와 다른 것이다.
‘이미 이긴 자에게는 따르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만약 번뇌를 끊고 변지하지 않았으면 삼계를 따라 순환하고 유전하지만,
이미 이긴 자는 여러 번뇌를 이미 끊고 변지하였기 때문에 따르는 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부처의 소행은 무변이다.’고 하는 것에서,
불세존이란 무학의 지견(知見)과 명각(明覺)의 보리와 혜조(慧照)의 현관을 일으키고 성취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부처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또한 네 가지의 염주(念住)를 부처의 소행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념주의 행상과 소연은 모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끝이 없기 때문에 무변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어떠한 자취도 없으니, 무엇에 의해 갈 것인가’에서, 자취란 발자취를 말하는 것으로, 바로 번뇌를 비유한 것이다.
즉 만약 모든 번뇌를 아직 끊고 변지하지 않았다면, 그것에 의해 삼계의 악취로 나아갈 것이지만,
이미 모든 번뇌를 끊고 변지하였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악취로 나아가는 일이 없는 것이다.
여러 그물을 펼칠 수가 없다면,
애(愛)는 어디에도 나아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부처의 소행은 무변으로서,
어떠한 자취도 없으니, 무엇에 의해 나아갈 것인가?
‘여러 그물을 펼칠 수가 없다.’는 것에서,
그물이란 바로 애를 비유한 것이니,
이는 세존께서 “나는 애의 그물을 넓게 덮힌 숲의 연못과 같다고 설명하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애가 만약 아직 끊고 변지되지 않았다면, 널리 펼쳐져 삼계를 망라할 수 있겠지만,
이미 끊고 변지되었기 때문에 ‘펼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애는 어디에도 나아가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애가 만약 아직 끊고 변지되지 않았다면 삼계로 나아갈 수 있겠지만,
이미 끊고 변지되었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게송 중 뒤의 반구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미 수레를 허물고,
밧줄과 유주(流注)와 그것에 따르는 것[隨行]을 끊고,
구덩이를 건넜으므로, 세간에서는
오로지 부처만을 범지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미 수레를 허물고, 밧줄과 유주와 그것에 따르는 것을 끊었다.’고 하는 것에서, 수레란 아만을 비유한 것이고, 밧줄은 바로 애를 비유한 것이다.
즉 수레에 실린 물건은 수레로 인해 고귀해지고, 밧줄에 묶여져 먼 곳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유정도 역시 그러하여 만으로 인해 고귀하며, 애에 속박되어 생사를 유전하는 것이다.
또한 유주란 모든 번뇌를 비유한 것이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란 그것과 상응하는 심(尋)과 사(伺)를 비유한 것이며,
만과 애와 번뇌와 그것과 상응하는 심과 사를 이미 끊고 변지한 것을 ‘이미 끊고 허물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구덩이를 건넜다.’고 하는 것에서,
구덩이란 무명을 비유한 것으로, 무명을 이미 끊고 변지하였기 때문에 건넜다고 일컬은 것이니,
이는 세존께서 “무엇을 두루 갖추어야 구덩이를 이미 건너간 자라고 할 수 있는가?
말하자면 무명을 이미 끊고 변지한 자이다.”고 설명하신 것과 같다.
‘세간에서는 오로지 부처만을 범지라고 일컫는다.’고 하는 것에서, 부처와 범지의 뜻은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수많은 세간에서 오로지 부처만이 진실된 범지, 무상(無上)의 각자(覺者)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으니, 그는 모든 악법을 영원히 소멸하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의 근본과 두 가지의 소용돌이[洄洑]와
세 가지의 더러움[垢]과 다섯 가지의 유전(流轉)과
큰 바다와 열두 가지의 험준한 곳
모니(牟尼)는 이미 모두를 건너갔도다.
한 가지의 근본이란 무명을 비유한 것이니, 이것은 바로 생사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 설명하신 것과 같다.
존재하는 모든 악취와
이 세상과 후생은
모두 무명을 근본으로 하고,
욕탐 등을 보조적인 도움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다.
두 가지의 소용돌이란 바로 명(名)과 색(色)을 비유한 것으로, 유정은 여기서 빠져 나오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세 가지의 더러움이란 탐ㆍ진ㆍ치의 더러움을 비유한 것이고,
다섯 가지의 유전은 바로 오취(五趣)를 비유한 것이니, 유정은 여기서 항상 유전하기 때문이다.
큰 바다는 육내처(六內處)를 비유한 것이고,
열두 가지는 바로 십이상(十二相)으로, 이는 육내처와 육외처를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험준한 곳이란 험한 구덩이로, 여러 번뇌를 비유한 것이다.
‘모니는 이미 모두를 건너갔다.’고 하는 것에서,
모니(牟尼)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가 학이며, 둘째가 무학이다.
즉 학은 그러한 것을 지금 건너가는 자이며, 무학은 그러한 것을 이미 건너간 자이다.
더 이상 믿지 않고, 은혜를 알지 못하며,
은밀함도 끊고, 태어남이 허용되는 곳[容處]도 없으며,
항상 희망을 변토(變吐)한 자이면,
이러한 이가 최상의 장부이다.
‘믿지 않는 자’란 아라한을 말한다.
즉 그는 삼보와 사제에 대해 모든 것을 스스로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혜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에서, 은혜란 유위를 말하니, 작용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반을 은혜로운 것이 아닌 것이라고 한다.
곧 모든 아라한에게는 뛰어난 지견이 있으며, 은혜롭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은혜를 알지 못한다고 일컬은 것이다.
‘은밀함을 끊었다.’고 하는 것에서, 은밀함이란 상속을 말한다.
이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가 욕계로의 상속이며, 둘째가 색ㆍ무색계로의 상속이다.
곧 그와 같은 아라한은 이러한 상속을 떠났기 때문에 은밀함을 끊었다고 일컬은 것이다.
‘허용되는 곳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라한은 상속을 떠났기 때문에 삼계 중의 태어날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항상 희망을 변토하였다.’고 하는 것에서,
희망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가 재산이나 지위를 희망하는 것이고, 둘째가 수명을 희망하는 것이다.
곧 그와 같은 아라한은 이러한 두 가지를 이미 끊고 변지하였기 때문에 변토하였다고 일컬은 것이다. 즉 이것은 항상 희망을 포기하고 버린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가 최상의 장부이다.’고 하는 것은, 아라한은 앞에서 설명한 최상ㆍ최승ㆍ제일의 공덕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장부 중의 제일이고, 최승ㆍ최상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서른여섯 가지의 빠른 흐름[駛流]은
의식에 의해 인기(引起)되고 증성하는 것,
이는 악견자가 타는 것으로
분별하고 집착하는 것의 근거[所依]이다.
‘서른여섯 가지의 빠른 흐름’이란 삼십육애행(三十六愛行)을 비유한 것이며, 의식에 의해 인기된 것이란 의식이 원인[集]이 되어, 의식에서 생기하였다는 것으로, 이것을 의식에 의해 인기된 종류라고 하는 것이다.
증성하는 것이란 상품(上品)의 그것으로 맹렬하고 날카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악견자란 여러 외도를 말하는데, 이러한 삼십육애행을 타고 나락가(捺洛迦)ㆍ방생ㆍ아귀계로 가기 때문에 ‘탄다.’고 일컬은 것이다.
분별하는 것에는 세 가지의 분별이 있으니,
말하자면 욕(欲)분별과 에(恚)분별과 해(害)분별이다.
집착의 근거라고 하는 것에서, 집착은 탐욕과 진에와 우치를 말하는데, 이것은 그러한 삼십육애행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근거’라고 일컬은 것이다.
신(身)악행과
어(語)악행을 버리고,
의(意)악행과
그밖의 과실을 버려야 한다.)
신악행을 버린다고 함은 신체적인 세 가지의 악행을 끊는 것을 말하고, 어악행을 버린다고 함은 언어적인 네 가지의 악행을 끊는 것을 말하며,
의악행을 버린다고 함은 의식적인 세 가지의 악행을 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밖의 과실을 버려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앞의 열 가지의 악행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과실을 끊는 것을 말한다.
그대가 보여지고 들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보여지고 들려지는 것만을 가지며,
또한 느껴지고 알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느껴지고 알려지는 것만을 가진다면,
그대에게는 오로지 보여지고 들려지고 느껴지고 알려진 것만이 있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 가깝고 먼 것이 없으며,
또한 두 가지의 중간도 없으니,
바로 괴로움의 종극[邊際]에 이르게 되리라.
이 두 가지 게송은 『중현경(重顯經)』 중에 있는 것이다.
즉 “부처님께서 어머니[大母]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보여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보여지는 것만을 가지며,
들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들려지는 것만을 가지며,
느껴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느껴지는 것만을 가지며,
알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알려지는 것만을 가진다면,
그대는 오로지 보여지고 들려진 것 등만을 갖기 때문에 그대에게는 이것이 없다.’
그대에게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그대에게는 저것도 없다.
또한 그대에게는 저것이 없기 때문에 가까운 것도 없고 먼 것도 없으며, 두 가지의 중간도 없다.
이러한 인연에 따라 마침내 괴로움의 종극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안식에 의해 감수[受]되고 요별(了別)되는 것을 ‘보여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보여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보여진 것만을 갖는 자가 있으며,
보여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보여진 것만을 갖지 않는 자가 있다.
어떠한 이가 보여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보여진 것만을 갖는 자인가?
안식에 의해 감수되고 요별된 것에 대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자이다.
어떠한 이가 보여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보여진 것만을 갖지 않는 자인가?
안식에 의해 감수되고 요별된 것에 대해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자이다.
이식(耳識)에 의해 감수되고 요별되는 것을 ‘들려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들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들려진 것만을 갖는 자가 있으며,
들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들려진 것만을 갖지 않는 자가 있다.
어떠한 이가 들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들려진 것만을 갖는 자인가?
이식에 의해 감수되고 요별된 것에 대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자이다.
어떠한 이가 들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들려진 것만을 갖지 않은 자인가?
이식에 의해 감수되고 요별된 것에 대해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자이다.
비ㆍ설ㆍ신의 세 가지 식에 의해 감수되고 요별되는 것을 ‘느껴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느껴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느껴진 것만을 갖는 자가 있으며,
느껴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느껴진 것만을 갖지 않는 자가 있다.
어떠한 이가 느껴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느껴진 것만을 갖는 자인가?
세 가지 식에 의해 감수되고 요별된 것에 대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자이다.
어떠한 이가 느껴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느껴진 것만을 갖지 않는 자인가?
세 가지 식에 의해 감수되고 요별된 것에 대해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자이다.
의식에 의해 감수되고 요별되는 것을 ‘알려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알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알려진 것만을 갖는 자가 있으며,
알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알려진 것만을 갖지 않는 자도 있다.
어떠한 이가 알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알려진 것만을 갖는 자인가?
의식에 의해 감수되고 요별된 것에 대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자이다.
어떠한 이가 알려지는 것에 대해 오로지 알려진 것만을 갖지 않는 자인가?
의식에 의해 감수되고 요별된 것에 대해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자이다.
‘그대는 보여지고 들려지고 느껴지고 알려진 것에 대해 오로지 보여지고 들려지고 느껴지고 알려진 것만을 가지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즉 만(慢)과 오만한 마음[憍傲心]과 건방진 마음[高擧心]과 만용[快勇]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에게 이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도 없다.’고 하는 것은, 즉 탐ㆍ진ㆍ치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에게 그것이 없기 때문에 가까운 것도 없고, 먼 것도 없으며, 두 가지의 중간도 없다.’고 하는 것은, 즉 욕계나 색ㆍ무색계 어디든 태어나는 곳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마침내 괴로움의 종극에 이르게 될 것이다.’에서, 괴로움이란 오취온을 말하며,
이러한 괴로움의 종극이란 바로 이러한 괴로움의 모든 근거를 버리는 것이니,
애가 다하고[愛盡] 염오함을 떠난 영원한 소멸의 열반을 말한다.
의니(醫泥)와 미니(謎泥)와
답포(鋪)와 달섭포(達鞢鋪)를 듣고,
희구하지 말 것이며, 기뻐하고 고요히 하며,
두루 떠나면, 마침내 괴로움의 종극에 이르게 되리라.
이와 같은 게송은 『중현경』 중에서 “부처님께서는 호세(護世)의 두 왕을 위해 멸루차(蔑淚車)의 말을 지어서 사성제 등을 설명하셨더니, 그들은 바로 깨닫게 되었다.”라고 설명되었다.
여기서 의니란 고성제를 나타내며, 미니는 집성제를 나타내며, 답포는 멸성제를 나타내며, 달섭포는 도성제를 나타낸 말이다.
‘희구하지 말라’고 함은 그들에게 욕계나 색ㆍ무색계를 희구하지 말 것을 권유한 것이며, ‘기뻐하라’고 함은,
만약 부처가 증득한 보리의 법과 묘행을 닦은 스님들이 ‘색은 무상이며, 수ㆍ상ㆍ행ㆍ식도 무상이다.’라고 고제를 잘 시설하고, 집ㆍ멸ㆍ도제를 잘 시설한 것을 들으면 환희심을 낼 것을 그들에게 권유한 것이며,
‘고요히 하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만약 탐ㆍ진ㆍ치가 일어날 때에는 고요히 하고, 두루 원만하게 고요히 하고, 가장 지극하게 고요히 해야 함을 권유한 것이다.
‘두루 떠나야 한다.’고 한 것은, 그들 마음으로 하여금 욕계와 색ㆍ무색계를 떠나기를 권유하고 장려한 것이다.
그리고 ‘괴로움의 종극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바로 괴로움의 종극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괴로움의 종극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몸은 물거품이 모인 것과 같은 것으로 알고,
또한 아지랑이[陽焰]와 같다고 느끼며,
마구니의 꽃[魔花]과 보다 적은 꽃[小花]을 꺾어버리면,
죽음 왕[死王]의 사자를 만나지 않으리.
‘몸은 물거품이 모인 것과 같은 것으로 안다.’는 것은, 몸은 물거품이 모인 것과 같아 힘도 없고, 허약하여 잡아 당기거나 연마할 수 없다고 참답게 아는 것을 말한다.
‘또한 아지랑이와 같다고 느낀다.’고 하는 것은, 몸은 아지랑이와 마찬가지로 무루익은 번뇌[熟惱]에 의해 생겨나며,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머물지 않는다고 참답게 아는 것을 말한다.
‘마구니의 꽃과 보다 적은 꽃을 꺾어버린다.’고 하는 것에서, 마구니에는 네 가지가 있다.
즉 번뇌마(煩惱魔)와 온마(蘊魔)와 사마(死魔)와 자재천마(自在天魔)가 그것인데,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번뇌마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견소단의 번뇌를 마구니의 꽃이라고 하였으며, 수소단의 번뇌를 보다 적은 꽃이라고 하였다. 또한 번뇌를 버리고 영원히 끊는 것을 ‘꺾는다.’고 일컬은 것이다.
‘죽음 왕의 사자를 만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무상이 멸하는 것을 일컬어 죽음의 왕이라 하였으며, 늙음과 병이 핍박하며 뒤쫓는 것을 죽음 왕의 사자로 지칭한 것이다.
머무는 것[住]을 관찰하고, 각(覺)은 가깝고 멀리하며,
기뻐하고, 더 이상 모든 업이 존재하지 않으며,
세간에 흥함과 쇠퇴함이 있는 것을 안다면,
선한 마음은 널리 해탈하리라.
‘머무는 것을 관찰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세 가지에 머무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니, 첫째가 공이며, 둘째가 무원이며, 셋째가 무상이다.
‘각은 가깝고 멀리한다.’고 하는 것에서, 각이란 각혜(覺慧)로서 총명함을 두루 갖추어 내외의 대상에 대해 올바로 생기하는 것을 말한다.
‘기뻐한다.’고 함은,
만약 부처가 증득한 보리의 법과 묘행을 닦은 스님들이 ‘색은 무상이며, 수ㆍ상ㆍ행ㆍ식도 무상이다.’고 잘 설명하는 것과 고제를 잘 시설하고, 집ㆍ멸ㆍ도제를 잘 시설한 것을 들으면, 환희심을 낳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모든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후생을 초래할 만한 신ㆍ어ㆍ의업을 성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간에 흥함과 쇠퇴함이 있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에서, 안다고 함은 이해하고 판단[了達]하는 것을 말하고, 세간이란 오취온을 말하며,
흥함과 쇠퇴함은 생멸을 말한다.
즉 이것은 유루의 오온에는 생기하고 멸진함이 있다는 사실을 그것에 따라 관찰[隨觀]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한 마음이란 결정하고 간택하는 마음[決擇心]ㆍ숙련된 마음[善巧心]ㆍ부드러운 마음[調柔心]을 말하며,
‘널리 해탈한다.’고 함은, 모든 취, 모든 존재, 모든 생에서 이미 해탈하고, 두루 해탈하며, 완전히 해탈한 것을 말한다.
비록 해탈하였더라도 떨어지며,
탐하여 먹음으로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안은(安隱)을 획득하면, 바로 즐거움을 즐기며,
즐거움을 타고 즐거운 곳에 이르게 된다.
‘비록 해탈하였더라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외도가 비록 욕계에서 해탈을 하였지라도’의 뜻이며,
‘그렇더라도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모든 외도는 그렇더라도 색ㆍ무색계의 생으로 떨어지고, 나아가 그곳에서 받았거나 낳아진 애탐에 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탐하여 먹음으로써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모든 외도는 순오하분결을 비록 조금은 끊었다고 하나, 그 밖에 끊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그 후 반드시 탐을 일으켜 욕계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안은을 획득하였다.’고 하는 것에서, 안은이란 유여의열반의 세계를 말하는데, 모든 아라한은 이미 그것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획득하였다.’고 일컬은 것이다.
‘바로 즐거움을 즐긴다.’고 하는 것에서, 즐거움이란 무여의열반의 세계를 말하는데, 그는 항상 그것을 흠모하기 때문에 ‘즐긴다.’고 한 것이다.
‘즐거움을 타고 즐거운 곳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것은, 도의 즐거움에 편승하여 열반의 즐거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뿌리가 땅[地界]에 내리는 일이 없고,
잎도 없으며, 가지도 역시 없으면,
그러한 이는 용맹하게 속박에서 벗어났으니,
누가 다시 나무라고 헐뜯겠는가?
뿌리란 유취식(有取識)을 비유한 것이고, 땅은 사식주를 비유한 것이니,
이는 세존께서 “다섯 가지의 종자는 유취식을 나타내고, 땅[地界]은 사식주를 나타낸다.”고 설명하신 것과 같다.
잎은 아만을 비유한 것으로,
이는 세존께서 “무엇을 잎을 태운다고 하는가?
아만이 이미 끊어지고 이미 변지된 것을 말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가지는 애를 비유한 것이니, 이 또한 세존께서 설명하신 것과 같다.
다섯 가지 묘색의 궁전 안에서,
만약 애의 가지가 생겨나는 일이 있으면,
모니는 그와 같은 생을 보고,
지혜로써 신속히 제거하고 끊어버린다.
모든 아라한은 사식주 중에 후유(後有)를 이끌어 낼 만한 유취(有取)의 식이 없으며, 만도 없고, 애도 없기 때문에 ‘뿌리가 땅에 내리는 일이 없고, 잎도 없으며, 가지도 역시 없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한 이는 용맹하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아라한을 성취한 자를 말하는 것으로, 용맹법을 성취하였으므로 또한 용맹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에서,
속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탐ㆍ진ㆍ치이다.
즉 그는 이러한 속박에서 이미 해탈하였고, 두루 해탈하였으며, 완전히 해탈한 것이다.
‘누가 다시 나무라고 헐뜯겠는가?’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유형의 보특가라를 오로지 칭탄하고 예찬해야 마땅하지, 응당 나무라거나 헐뜯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나무라고 헐뜯게 되면 한없는 죄를 짓는 것이고, 세간의 참된 복전(福田)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이는 세존께서 설명하신 것과 같다.
만약 비방해야 함에도 예찬하거나,
혹은 예찬해야 함에도 비방하게 되면,
그의 입에는 재앙이 쌓이며,
필시 안락을 얻지 못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