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지도론 제28권
43. 초품 중 ‘육신통에 머무르고자 하면’[欲住六神通]의 뜻 을 풀이함
【經】 보살마하살이 6신통(神通)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찬보살품(讚菩薩品)1) 중에서 “모든 보살은 모두가 5신통(神通)2)을 얻는다”고 하셨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6신통에 머무르고자 한다면”이라고 말씀하는가?
【답】 5신통은 바로 보살이 얻는 것이요 지금의 “6신통에 머무르고자 하면”은 바로 부처님께서 얻는 것이다. 설령 보살이 6신통을 얻는다 해도 여래와 같다고 동의하기에는 곤란하다.
【문】 왕생품(往生品)3) 중에 “보살이 6신통에 머물러서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이른다”고 하셨는데 어찌하여 “보살은 모두가 5신통을 얻는다”고 하는가?
【답】 제6의 번뇌가 다한 누진신통(漏盡神通)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번뇌[漏]와 습기[習]가 모두 다한 것이다. 둘째는 번뇌는 다했으나 습기는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5신통을 얻는다”고 하고 번뇌가 다했기 때문에 “6신통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 만일 보살이 번뇌가 다했다면 어찌하여 다시 태어나며 어찌하여 생을 받는가[受生]? 온갖 생을 받는 것은 모두가 애욕[愛]이 상속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쌀이 좋은 농토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시기[時]와 윤택함[澤]이 끊어지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성인은 애욕의 껍질[糠]을 이미 벗어버렸기 때문에 비록 유루(有漏)의 업으로 태어날 인연이 있다 하더라도 태어날 수 없어야 한다.
【답】 먼저 이미 “보살이 법위에 들어가면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며 마지막의 육신을 다하고 법성생신(法性生身)4)을 얻는다”고 말했다. 비록 모든 번뇌가 끊어졌다 하더라도 번뇌의 습기인 인연이 있기 때문에 법성생신을 받되 삼계(三界)에서의 생(生)은 아니다.
【문】 아라한은 번뇌는 이미 다했지만 습기는 아직도 다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태어나지 않는가?
【답】 아라한은 큰 자비가 없어서 본래 온갖 중생을 제도하려는 서원이 없었다. 또 실제(實際)를 증득하고 이미 나고 죽음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또 먼저 이미 두 가지의 번뇌가 다함[漏盡]이 있다고 대답했다. 여기서는 보살이 “누진통(漏盡通)을 얻는다”고 말씀하지도 않았으며 스스로 “6신통을 얻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한 것이다. 6신통에 대한 뜻은 후품(後品)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위의 보살품(菩薩品)에서도 찬탄했다. 또한 이미 보살의 5신통에 대한 뜻을 설명했다.
【문】 신통에는 어떠한 차례가 있는가?
【답】 보살은 5욕(欲)을 여의고 모든 선(禪)을 얻었으며 자비가 있기 때문에 중생을 위하여 신통을 취하면서 모든 희유하고 기특한 일을 나타내어 중생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만일 희유한 일들이 없으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이런 생각을 한 뒤에 마음으로 몸을 허공에다 매어 두고 거칠고 무거운 물질 모양을 소멸시키면서 항상 비고 가벼운 모양[空輕相]을 취한다. 크게 정진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지혜로 헤아리면 마음의 힘으로 몸을 들어 올릴 수 있게 되며 아직 헤아리기 전에도 벌써 스스로 마음의 힘이 커지면서 그 몸을 들어 올릴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뜀뛰기를 배울 때 항상 물질의 거칠거나 무거운 모양[麤重相]을 무너뜨리면서 언제나 가볍고 텅 빈 모양[輕空相]을 닦으면 이때 곧 날게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둘째는 역시 모든 물건을 변화시킨다. 땅을 물이 되게 하고 물을 땅이 되게 하며 바람을 불이 되게 하고 불을 바람이 되게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요소[大]를 모두 바꾸어지게 하니, 금을 기와나 조약돌이 되게 하고 기와나 조약돌을 금이 되게 하는 등 모든 물건을 각각 변화하게 한다.
땅이 변하여 물의 모양이 되게 함에는 항상 닦으면서 물을 생각하고 땅의 모양을 기억하지 않으면 이때 땅의 모양은 생각과 같이 곧 물이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든 물건을 모두 변화하게 할 수 있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일체입(一切入)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일체입은 바로 신통의 첫 길이다. 먼저 이미 일체입과 배사(背捨)와 승처(勝處)에 그 마음이 부드럽게 조복되면 그런 뒤에는 신통에 들어가기가 쉽다.
또 일체입 중에서는 하나의 몸만이 스스로 땅이 변하여 물이 되는 것을 보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지만 신통은 곧 그렇지가 않아서 자신이 실제로 물을 봄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역시 실제로 물을 본다.
【문】 일체입도 또한 큰 정(定)인데 무엇 때문에 이것이 실제의 물임을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보게 할 수 없는 것인가?
【답】 일체입은 관하는 처소가 광대하여 다만 온갖 것이 물의 모양이 되게 할 수 있을 뿐 실제로 그것이 물이 되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통은 온갖 것에 두루 하지 못하나 땅이 바뀌어 물이 되게 하면서 실제로 그것이 물이 되게 하나니, 이 때문에 두 정(定)의 힘은 각각 구별된다.
【문】 두 정에 있어서 변화하는 일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만일 진실이라면 어떻게 돌이 금이 되고 땅이 물이 되며, 만일 거짓이라면 어떻게 성인이면서 진실하지 않는 일을 행하는 것인가?
【답】 모두가 진실이요 거짓됨이 없다. 3독(毒)을 이미 뽑아냈기 때문이다. 온갖 법은 각각 일정한 모양[定相]이 없기 때문에 땅이 바뀌어 혹은 물의 모양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소(蘇)와 아교[膠]와 밀[蠟]이 이 땅[地]의 종류이나 불을 만나면 녹아 물이 되면서 축축한 모양으로 되는 것과 같으며, 물이 추위를 만나면 얼어 얼음이 되면서 단단한 모양[堅相]으로 되고, 돌의 즙(汁)이 금이 되며, 금이 부서져서 동(銅)이 되거나 도로 돌로 되는 것과도 같다.
중생도 역시 그와 같아서 악이 선이 될 수도 있고 선이 악이 될 수도 있나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은 일정한 모양이 없다. 그러므로 신통의 힘으로써 변화하는 것이다. 이는 진실이면서 거짓이 아니니, 만일 본래부터 각각 일정한 모양이 되어 있다면 변화할 수가 없다.
셋째는 모든 성현들의 신통은 6진(塵) 가운데서 마음대로 자유로이 좋은 것을 보면 싫은 생각을 낼 수도 있고 추한 것을 보고도 즐겁다는 생각을 낼 수도 있으며 또한 곱거나 추하다는 생각을 여의고 버리는 마음[捨心]을 지을 수도 있다. 이것을 세 가지의 신통이라 하며 이 자재한 신통은 오직 부처님만이 두루 갖출 수 있다.
보살이 이러한 신통을 얻어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돌아다니게 되면 여러 다른 나라에서 언어도 같지 않고, 그리고 멀리 있으면 미세한 중생들의 음성은 듣지 못하기 때문에 천이통(天耳通)을 구하게 되는데 항상 많은 대중들의 소리를 구하여 그 모양을 취하고자 수행하며, 언제나 닦아 익히기 때문에 귀가 색계(色界)의 4대(大)로 만들어진 청정한 물질을 얻게 되는데, 그것을 얻은 뒤에는 곧 거칠고 미세하고 멀고 가까운 하늘과 사람들의 음성을 멀리서도 들을 수 있게 되어 걸리고 막힘이 없어진다.
【문】 마치 『선경(禪經)』의 말씀과 같아서 “먼저 천안(天眼)을 얻어 중생들을 보면서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천이통을 구하게 되고, 이미 천안과 천이를 얻은 뒤에는 중생의 몸의 형상과 음성은 보고 알면서도 갖가지 언어와 근심하고 기뻐하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에 걸림 없는 지혜[辭無礙智]를 구하게 되며, 단지 그 말만 알 뿐 그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지혜[知他心智]를 구하게 된다.
그들의 마음을 안 뒤에는 본래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생 일을 아는 숙명통(宿命通)을 구하게 되고, 이미 그들의 내력을 알게 된 뒤에는 그들의 마음의 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번뇌가 다한 누진통(漏盡通)을 구하게 되며, 이 5신통을 두루 갖춘 뒤에도 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하는 것이 넓지 못하고 삿된 소견을 지닌 이나 큰 복덕이 있는 사람들을 항복 받고 교화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여의신통(如意神通)을 구하게 된다”고 했나니, 이와 같이 차례가 있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먼저 여의신통을 구한다고 하는가?
【답】 중생에게는 거친 이가 많고 미세한 이는 적다. 이 때문에 먼저 여의신통으로써 마음대로 신통을 부리면 거친 이나 미세한 이거나 간에 사람들을 많이 제도할 수 있으므로 먼저 말한 것이다.
또 모든 신통에는 얻는 법이 다르고 세는 법이 다르다. 얻는 법이라 함은 대부분이 먼저 천안을 구하는 것이 얻기 쉽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이는 해와 달과 별과 구슬의 불로써 이러한 등의 광명의 모양을 취하여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잘 닦고 익히기 때문에 낮과 밤이 다름이 없어지고 위와 아래와 앞과 뒤가 꼭 하나같이 밝게 사무치면서 걸림이 없게 된다. 이때에 처음으로 천안의 신통을 얻게 되는데 그 밖의 것도 차례로 먼저의 설명과 같다.
또 부처님은 자신이 얻은 바와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차례로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초저녁 무렵에 하나의 통(通)과 하나의 명(明)을 얻으셨나니, 이른바 여의통(如意通)과 숙명명(宿命明)이다. 한밤중 무렵에 천이통(天耳通)과 천안명(天眼明)을 얻으셨고, 새벽 무렵에 지타심통(知他心通)과 누진명(漏盡明)을 얻으셨다. 명(明)의 작용을 구하는 공(功)이 중하기 때문에 나중에 두고 말한 것이며, 통과 명을 차례로 얻는 것은 마치 네 가지 사문의 과위[四沙門果]와 같아서 큰 것이 나중에 있는 것이다.
【문】 만일 천안을 얻기 쉽기 때문에 앞에 두었다면 보살은 무엇 때문에 천안을 얻지 않으셨는가?
【답】 보살은 모든 법에서 쉽고 어려운 것이 없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근기가 둔하기 때문에 어려움도 있고 쉬움도 있다.
또 초저녁 무렵에 악마의 왕이 와서 부처님과 싸우려고 하므로 보살은 신통의 힘으로써 갖가지로 변화하시면서 악마의 병기를 모두 영락(瓔珞)이 되게 하셨고, 악마를 항복 받은 뒤에도 계속 신통을 염(念)하면서 완전히 갖추어지게 하려고 마음을 내기만 하면 이내 들어가면서 얻었으므로 신통을 두루 갖추게 되셨으며, 악마를 항복 받고 나서는 스스로 한 몸을 염하면서 “어떻게 하면 큰 힘을 얻을까” 하고 곧 숙명명(宿命明)을 구하게 되자 저절로 세상세상마다 모두 아셨나니, 복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한밤중 무렵에는 악마가 곧 돌아갔고 고요해져서 소리가 없었으므로 온갖 것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면서 짐짓 악마들의 소리를 염하자 천이통(天耳通)과 천안명(天眼明)이 생겼으며, 이 천이로써 시방 5도(道)의 중생들의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소리를 들었고 이런 소리를 들은 뒤에 그들의 형상들을 보려고 했으나 가리어져서 보이지 않았으므로 천안을 구하신 것이다.
새벽 무렵에는 중생의 형상을 이미 보았으나 그들의 마음을 알고자 하여 타심지(他心智)를 구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은 모두가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구하고자 함을 아셨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누진신통(漏盡神通)을 구하셨다. 모든 즐거움 가운데서 번뇌가 다함이 가장 수승한 것이므로 중생들로 하여금 그것을 얻게 하신 것이다.
【문】 보살은 이미 무생법인을 얻으셨고 세상마다 언제나 과보와 신통을 얻으셨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스스로 의심하시며, 이미 중생을 보시면서도 그들의 마음을 알지 못하셨는가?
【답】 두 가지의 보살이 있다. 첫째는 법성생신(法性生身)의 보살이고, 둘째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인간의 법을 받아 정반왕(淨飯王)의 가문에 태어나고 네 개의 성문(城門)을 나와서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 일에 대해 물은 보살이니, 이 보살은 보리수[樹王] 아래 앉아서 6신통을 갖추었다.
또 보살에게는 신통이 먼저부터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으므로 이제 밤의 세 때에 얻으신 것이다. 이 부처님의 신통은 인간의 법을 행하셨기 때문에 스스로 의심했다 해도 허물은 없다.
【문】 6신통의 차례는 언제나 처음이 천안통(天眼通)이고 나중이 누진통(漏盡通)인데 그렇지 않은 때도 있는가?
【답】 대부분이 먼저가 천안통이고 나중이 누진의 지혜이기는 하나 때로는 좋아하는 것을 수행하여 혹은 신족통(神足通)을 먼저 얻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초선(初禪)에서는 천이(天耳)를 얻기 쉽나니, 각관(覺觀)의 네 가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2선(禪)에서는 천안을 얻기 쉽나니, 안식(眼識)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어 흩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3선에서는 여의통(如意通 )을 얻기 쉽나니, 몸에 쾌락을 느끼지 때문이다. 4선에서는 모든 신통을 다 얻기 쉽나니, 온갖 것이 조용하고 편안한 곳이기 때문이다”고 한다. 숙명통(宿命通) 등의 세 가지 신통에 대한 뜻은 10력(力)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經】 온갖 중생들의 뜻이 가는 데[意所趣向]5)를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6신통 가운데서 이미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신통[知他心通]을 말씀하셨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거듭 말씀하시는가?
【답】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신통의 경계(境界)는 적으니,6) 다만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에 현존하는 중생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을 알 뿐이며 과거와 미래와 그리고 무색계(無色界)의 중생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알지 못한다.
범부의 신통은 위의 4선(禪)의 자리에서 얻게 된 신통의 것을 따르는 이외에 사천하(四天下)의 중생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두루 알고, 성문의 신통은 위의 4선의 자리에서 얻게 된 신통의 것을 따르는 이외에 천세계(千世界)의 중생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두루 알며, 벽지불의 신통은 위의 4선의 자리에서 얻게 된 신통의 것을 따르는 이외에 백천세계(百千世界)의 중생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두루 안다.
상지(上地)의 근기가 둔한 이는 하지(下地)의 근기가 영리한 이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알지 못하고 범부는 성문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알지 못하며, 성문은 벽지불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알지 못하고 벽지불은 부처님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알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온갖 중생들의 마음이 가는 데를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다.
【문】 어떤 지혜로써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알 수 있는가?
【답】 모든 부처님은 막힘이 없는 해탈[無礙解脫]이 있으므로 이 해탈 가운데로 들어가서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아신다. 모든 큰 보살들은 비슷한 막힘이 없는 해탈을 얻어서 역시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알게 되며, 새로 배운[新學] 보살은 이 큰 보살들의 막힘이 없는 해탈과 부처님의 막힘이 없는 해탈을 얻으려고 하면서 이 막힘이 없는 해탈로써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알게 된다.
큰 보살은 부처님의 막힘이 없는 해탈을 얻고자 하나니, 이 때문에 비록 이미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신통을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다시 “온갖 중생들의 마음이 가는 데를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문】 마음이 가는 데[心所趣向]라 하는데 마음이 가는[去] 것인가, 가지 않는 것인가? 만일 간다면 이것은 곧 마음이 없게 되므로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을 것이요, 만일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게 되는 것인가?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뜻[意]에 의지하여 법을 반연하고 의식(意識)이 뜻을 낸다”고 하셨으니, 만일 가지 않는다면 화합(和合)함도 없을 것이다.
【답】 마음은 가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으면서 알게 된다. 마치 반야바라밀에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온갖 법은 오는 모양도 없고 가는 모양도 없는데 어떻게 마음에 오고 감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또 “모든 법이 생길 때에도 어디서 오는 데가 없고 사라질 때에도 가는 데가 없다”고 한다. 만일 오고 감이 있다 한다면 곧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에 떨어지게 된다.
모든 법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나니, 이 때문에 다만 안의 6정(情)과 바깥의 6진(塵)이 화합함으로써 6식(識)을 내며 그리고 6수(受)와 6상(想)과 6사(思)를 낼 뿐이다. 이 때문에 마음은 마치 허깨비[幻化]와 같다.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안다 해도 아는 이[知者]도 없고 보는 이[見者]도 없다. 마치 탄마하연품(歎摩訶衍品)7) 중에서의 말씀과 같아서, 만일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의 성품이 진실로 있고 거짓이 아니라면 부처님도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알지 못할 것이나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의 성품은 진실로 거짓이어서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아신다.
비유하건대 마치 비구가 탐내어 구하면 공양을 얻지 못하지만 탐내어 구함이 없으면 모자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마음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분별하면서 모양을 취하면 진실한 법을 얻지 못하며 진실한 법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통달하여 알지 못하지만 만일 모양을 취하지 않고 분별하는 것도 없으면 진실한 법을 얻게 되고 진실한 법을 얻기 때문에 잘 통달하여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걸림이 없이 알게 된다.
【문】 온갖 중생들의 모든 마음을 모두 다 알 수 있다는 것인가? 만일 모두 다 안다면 중생은 끝이 있을[有邊] 것이다. 만일 다 알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온갖 중생들의 마음이 가는 데를 알고자 한다면”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어떻게 부처님께는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있는 것인가?
【답】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모두 다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경의 말씀과 같아서 온갖 진실한 말 가운데서 부처님이 맨 첫째이기 때문이다. 만일 온갖 중생들의 마음을 다 알되 그 맨 끝까지 얻을 수 없다면 부처님께서 무엇 때문에 “모두 안다”고 말씀하셨겠는가. 또한 일체지(一切智)를 지닌 사람이라고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가 진실이니 반드시 일체지가 실로 있는 분이라 할 것이다.
또 중생이 비록 끝이 없다[無邊] 하더라도 일체종지도 역시 끝이 없다. 비유하건대 마치 함(函)이 크면 그 뚜껑도 역시 큰 것과 같다. 만일 지혜에 끝이 있고 중생에게는 끝이 없다면 이런 힐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제 지혜와 중생이 다 같이 끝이 없기 때문에 그대의 힐난은 잘못된 것이다.
또 만일 ‘끝이 있다,’ ‘끝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두 가지는 부처님 법 안에서 바로 치답(置答)이다. 이 열 네 가지의 일은 허망하고 진실이 없으며 이익이 없기 때문에 힐난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문】 만일 끝이 있고 끝이 없는 것이 둘 다 진실하지 않다면 부처님은 곳곳에서 “끝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니, 마치 “중생이 어리석음과 애착을 가진 이래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시방도 역시 끝없이 넓다[無邊際]”고 하신 것과 같다.
【답】 중생은 끝이 없고 부처님의 지혜도 끝이 없나니, 이것이 진실이다. 만일 사람이 끝없는 데에 집착하게 되면 모양을 취하면서 쓸모없는 이론을 내세우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이 삿된 소견이라고 하신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세간은 항상하고,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뒤바뀐 생각[顚倒]이어서 14난(難) 가운데에 들어간 것과 같다. 부처님은 대부분 무상하다는 것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시고, 항상하다는 것은 드물게 쓰셨다. 만일 무상한 데에 집착하면 모양과 쓸모없는 이론을 취하므로, 부처님은 “이것이 삿된 소견이요 허망한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무상한 데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苦]이며, 괴로움은 곧 나라고 할 것이 없고[無我],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은 곧 공(空)하다”라는 것을 알게 되나니, 능히 이와 같이 무상함을 관찰함에 의지하여, 모든 법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 들게 되므로 이것이 곧 진실이다. 그러므로 무상함을 알아 진실한 이치[眞諦]의 가운데에 들어간다.
14난(難) 가운데서는 인연(因緣)을 집착하기 때문에 이것이 삿된 소견[邪見]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무상함을 말하여 끝이 없음[無邊]을 밝히며,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은 나고 죽음이 길고 오래임을 싫어하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파리국(波梨國)의 40비구가 다 함께 열두 가지의 청정한 행[十二淨行]을 수행하다가 부처님께로 오자 부처님은 그들을 위하여 싫어하는 행[壓行]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물으시되 “다섯의 강물, 즉 항하[恒伽]8)와 람모나(藍牟那)9)와 살라유(薩羅由)10)와 아지라바제(阿脂羅婆提)11)와 마혜(摩醯)12) 등의 그 근원에서부터 큰 바다에 흘러 들어가기까지의 그 중간에 있는 물은 많다고 하겠느냐?”고 하시자, 비구들은 말하기를 “심히 많나이다”고 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만 한 사람이 1겁 동안에 축생이 되어 있으면서 잡혀 죽고, 가죽이 벗겨지고 칼에 찔렸으며 혹 때로는 죄를 범하여 그 손발이 잘리고 그 몸과 머리를 베이는 등의 이런 일을 당할 때에 흘린 피는 이 강물들보다도 더 많느니라. 이와 같이 하면서 끝이 없는 대겁(大劫) 동안에 몸을 받으면서 흘린 피는 이와 헤아릴 수조차 없으며 울면서 흘린 눈물과 어머니의 젖을 먹은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그리고 1겁 동안에 한 사람이 뼈를 쌓은 것만을 헤아려 보아도 저 비부라산(鞞浮羅山)13)단주(丹注)에서 이르되, 이 산은 천축(天竺)에 있는 산이라 사람들이 항상 보고 믿기 쉽기 때문에 말씀한 것이라고 했다.과 같은 큰 산보다도 더하나니, 이와 같이 한량없는 겁 동안에 나고 죽는 고통을 받았느니라.”
모든 비구들은 이 말씀을 듣고 세간을 싫어하면서 바로 그때에 도를 얻었다.
또 시방의 중생이 끝이 없다 함을 들었기 때문에 마음에 기쁨을 내면서 살생하지 않는 계율[不殺戒]을 받고 그지없는 복덕을 얻게 되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처음에 뜻을 일으키는 보살을 온갖 중생들은 모두 공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끝없는 세계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고 공덕도 또한 끝이 없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등의 이익이 있는 까닭에 “끝이 없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온갖 중생들의 마음이 가는 데를 모두 앎은 마치 해가 천하를 비추면서 한꺼번에 두루 밝게 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經】 보살마하살이 온갖 성문과 벽지불의 지혜보다 뛰어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어떤 것이 성문과 벽지불의 지혜인가?
【답】 전체의 모양[總相]14)과 각각의 모양[別相]15)으로써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관하는 것이 성문의 지혜이다. 마치 경에 말씀하기를 “처음에는 모든 법을 분별하는 지혜를 쓰고 나중에는 열반의 지혜를 쓴다”고 한 것과 같나니, 모든 법을 분별하는 지혜는 바로 개별적인 모양이요 열반의 지혜는 바로 전체의 모양이다.
또한 “이 법으로는 해탈하고 이 법으로는 속박된다. 이것은 유전(流轉)하는 것이고 이것은 돌아오는[來還] 것이다. 이것은 생기는[生] 것이고 이것은 소멸하는[滅] 것이다. 이것은 맛있는[味] 음식이고 이것은 재앙[患]이 온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된 것이고 이것은 차례로 된 것이다. 이것은 이 언덕[比岸]이고 이것은 저 언덕[彼岸]이다. 이것은 세간(世間)이고 이것은 출세간(出世間)이다”고 하는 것을 알고 이러한 두 가지 문의 모든 법을 분별하므로 성문의 지혜라 한다.
또 세 가지의 지혜로 5수(受)를 알면서 “이와 같이 모인다. 이와 같이 흩어진다. 이와 같이 벗어난다”고 하고, “이것이 맛있는 것이다. 이것은 재앙이 있다. 이것은 여의어야 한다”고 하며 3해탈문(解脫門)과 상응하는 지혜 등으로써 세 가지 문의 모든 법을 분별한다.
또 네 가지 지혜로서 4념처(念處)의 지혜와 법지(法智)ㆍ비지(比智)ㆍ타심지(他心智)ㆍ세지(世智)와 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와 부정지(不淨智)ㆍ무상지(無常智)ㆍ고지(苦智)ㆍ무아지(無我智)와 법지(法智)ㆍ비지(比智)ㆍ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 등으로 네 가지의 모든 법을 분별한다.
또 고법지인(苦法智忍)의 지혜로부터 공공삼매(空空三昧)16)와 무상무상삼매(無相無相三昧)17)와 무작무작삼매(無作無作三昧)18)의 지혜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있는 모든 지혜는 다 이것이 성문에 지혜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세간을 싫어하고 열반을 염(念)하며 삼계(三界)를 여의고 모든 번뇌를 끊으면서 맨 위의 법을 얻는 이른바 열반이니, 이것을 성문의 지혜라 한다.
또 반야바라밀의품(般若波羅密議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보살의 지혜의 모양은 성문의 지혜와 동일한 지혜이지만 방편이 없고 큰 서원의 장엄이 없다. 대자대비가 없고 온갖 부처님 법을 구하지 않으며, 일체종지(一切種智)로 온갖 법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늙고 병들고 죽는 것만을 싫어하면서 모든 애욕의 매임을 끓고 곧장 열반으로 나아가니, 이것이 다르다.
【문】 성문이 그와 같다 하면 벽지불의 지혜는 어떠한가?
【답】 성문의 지혜가 곧 벽지불의 지혜이다. 다만 시절(時節)과 영리한 근기(利根)와 복덕(福德)에 차별이 있을 뿐이다.
시절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시지 않고 또한 부처님의 법도 없는데 사소한 인연으로 출가하여 도를 얻게 되기에 벽지불이라 하는 것이다. 영리한 근기라 함은 법의 모양은 동일하나 다만 지혜로 깊이 들어가서 벽지불의 도만을 얻는 것이며, 복덕이라 함은 몸매[相]가 있어서 하나의 몸매나 두 가지의 몸매 내지는 서른한 가지의 몸매[相]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먼저의 부처님 법 안에서 성인의 법을 얻었다가 법이 소멸한 뒤에 아라한이 되면 벽지불이라 이름하게 되나 몸에는 몸매가 없다.
벽지불로서 제일 빠른 이는 4세(世) 동안 행한 이가 있고 오래 걸리는 이는 백 겁까지도 행하며 성문으로서 빠른 이는 3세(世) 동안이요 오래 걸리는 이는 60 겁 동안이니, 이 이치는 앞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문】 마치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사문의 과[沙門果]와 네 가지 성인으로서 수다원(須陀洹) 내지는 아라한이 있고 다섯 가지의 부처님 제자로서 수다원 내지는 벽지불이 있으며 세 가지 보리(菩提)로서 아라한의 보리와 벽지불의 보리와 부처님의 보리가 있다”고 하셨다. 이 과위 중에서나 성인 중에서나 부처님 제자 중에서나 보리 중에서도 모두가 보살은 없는데 어찌하여 “보살은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보다도 수승하다”고 하셨는가?
【답】 부처님의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문과 벽지불의 법이고, 둘째는 마하면(摩訶衍)의 법이다. 성문의 법은 작기 때문에 다만 성문의 일만을 칭찬하고 보살의 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마하연은 넓고 크기 때문에 모든 보살마하살의 일을 칭찬했나니, 발심하고 수행하여 10지(地)의 지위에 들며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부처님의 도를 얻는다.
이 법 가운데서 보살은 부처님의 다음이라 부처님께 공양하듯 해야 한다 함을 설명했으며 이와 같이 모든 법의 모양을 관하면 이것이 복전(福田)이므로 성문과 벽지불보다 수승함도 그와 같다.
마하연경(摩訶衍經) 가운데서는 곳곳에서 보살마하살의 지혜는 성문과 벽지불보다도 수승함을 칭찬했나니, 마치 『보정경(寶頂經)』19)에서의 설명과 같다. 전륜성왕에게 천명의 아들에서 하나가 모자라 아직 다 차지 않으면 비록 큰 세력이 있더라도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은 그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한 전륜성왕의 종자가 태(胎) 안에 있으면서 처음 수태한 지 7일이 되면 모든 하늘들은 귀히 여기고 존중하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999인은 전륜성왕의 뒤를 이어서 세간 사람들로 하여금 두 세대(二世) 동안 쾌락을 얻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비록 태 안에 있더라도 반드시 전륜성왕의 뒤를 이을 것이므로 공경하게 된다.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은 비록 근(根)ㆍ역(力)ㆍ각(覺)ㆍ도(道)ㆍ6신통(神通)과 모든 선(禪) 및 지혜의 힘을 얻고 실제(實際)를 증득하여 중생의 복전(福田)이 되었다 하더라도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보살은 비록 모든 결사(結使)와 번뇌와 욕망에 속박되고 3독(毒) 안에 있으면서 처음 위없는 도의 뜻(道意)을 일으키고 아직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모든 부처님께서 귀하게 여긴다.
그 보살은 점차로 6바라밀을 행하고 방편의 힘을 얻어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감은 물론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고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며 부처님의 종자(佛種)와 승가의 종자(僧種)를 끊어지지 않게 하고 천상과 세간의 청정한 즐거움의 인연을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마치 가라빈가새(迦羅頻伽鳥)20)가 알 속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해도 내는 소리가 미묘하므로 다른 새들보다 수승한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아직 무명(無明)의 알에서 나오지 못했다 하더라도 설법과 의론하는 음성이 성문이나 벽지불이나 모든 의도들보다 수승하다. 마치 『명망경(明網經)』21)에서의 설명과 같다.
혜명(慧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보살들이 하는 말을 만일 이해하게 되면 크게 공덕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보살들의 이름을 얻어 들어도 큰 이익을 얻게 되는데 하물며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나무를 심을 때 땅에 의지하지 않고는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사귀를 얻거나 그 열매가 열기를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듯이, 모든 보살이 행하는 모양도 그와 같아서 온갖 법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 나고 죽는 데에 머물러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있으면서 자유자재하게 지혜의 법을 원하는 대로 말해 주거늘 그 누가 이 큰 지혜로 유회하면서 자유자재하게 원하는 대로 설법하는 것을 듣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일으키지 않는 이가 있겠나이까.”
그때 그 모임 안에 보화(普華)보살22)이 있다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기년장로(耆年長老)23)를 모든 제자들 가운데서 지혜가 제일이라 하셨는데 이제 기년장로는 모든 법의 법성(法性)을 얻지 못했는지요? 무엇 때문에 큰 지혜로써 자유자재하게 원하는 대로 법을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은 그의 경계만큼은 말할 수 있습니다.”
보화보살이 다시 물었다.
“법성에 경계가 있습니까?”
사리불이 대답했다.
“없습니다.”
보화가 말했다.
“만일 법성에 경계가 없다면 어찌하여 기년장로는 그 경계만큼은 말할 수 있다고 하십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얻는 바를 따라서 말합니다.”
보화가 다시 물었다.
“기년장로여, 한량없는 모양이 법성으로써 깨달음(證)을 삼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보화가 말했다.
“이제 어찌하여 얻은 바를 따라서 말씀하신다 하십니까? 마치 얻은 바의 법성이 한량없는 것처럼 설법도 한량이 없어야 합니다. 법성은 한량없으며 한량 있는 모양이 아닙니다.”
사리불이 보화에게 말했다.
“만일 법성이 얻는 모양이 아니라면 당신은 법성을 여의고서 해탈을 얻으셨습니까?”
사리불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법성은 파괴되지 않는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보화가 말했다.
“당신이 얻으신 거룩한 지혜도 역시 법성과 같습니까?”
사리불이 대답했다.
“나는 법을 듣고자 하며 말할 때가 아닙니다.”
보화가 말했다.
“온갖 법은 결정되어서 법성 안에 있으면서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있습니까?”
사리불이 대답했다.
“없습니다.”
보화가 말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는 법을 듣고자 하며 말할 때가 아니라 하십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일심으로 말하는 이나 일심으로 듣는 이의 이 두 사람은 얻는 복이 한량없다고 하셨습니다.”
보화가 말했다.
“당신은 멸진정(滅盡定) 안에 들어 있으면서 법을 들을 수 있습니까?”
사리불이 대답했다.
“선남자여, 멸진정 안에서는 법을 듣는 일이 없습니다.”
보화가 말했다.
“당신은 온갖 법이 항상 소멸된 모양(常滅相)임을 믿고 받아들입니까?
사리불이 대답했다.
“그 일은 믿고 있습니다.”
보화가 말했다.
“법성은 항상 소멸되어 있는지라 법을 듣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항상 소멸된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당신은 정(定)에서 일어나지 않고서도 설법을 하십니까?”
보화가 대답했다.
“어떠한 법도 정의 모양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온갖 범부도 모두가 그것은 선정(禪定)일 것입니다.”
보화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온갖 범부도 모두가 그것은 선정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어떠한 선정이기에 온갖 범부도 모두 선정입니까?”
보화가 대답했다.
“법성삼매(法性三昧)를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온갖 범부도 모두 그것은 선정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범부와 성인에는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보화가 말했다.
“나도 역시 범부와 성인에 차별이 있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인에게는 소멸하는 법(滅法)이 없고 범부의 사람에게도 역시 생기는 법(生法)이 없기 때문이니, 이 두 가지는 모두가 법성품의 평등한 모양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선남자여, 어떤 것이 법성의 평등한 모양입니까?”
보화가 대답했다.
“기년장로께서 도를 얻을 때에 알고 본(知見) 바의 바로 그것입니다.”
사리불이 다시 물었다.
“성인의 법이 생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범부의 법이 멸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인의 법은 얻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범부 사람의 법을 보고 아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년장로께서는 어떠한 지견(知見)으로 성인의 도를 얻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범부도 이와 같고, 비구가 해탈을 얻은 것도 이와 같으며, 비구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드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음은 모두 똑같아서 같음에는 구별이 없습니다.”
보화가 말했다.
“사리불이이여, 그것을 법성의 모양의 같음(如)이요 무너지지 않음의 같음이요 작용 또한 같음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모두가 같은 줄 아셔야 합니다.”
그러자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비유하건대 마치 큰 불 무더기는 물건마다 모두 태우지 않음이 없듯이 이 모든 상인(上人)들의 말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법은 모두가 법성에 드나이다.”
또 마치 『비마라힐경(毘藦羅詰經)』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사리불 등의 모든 성문들은 저마다 모두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 가서 병문안을 할 수 없다”고 했으며, 각자가 말하기를 “옛날 비마라힐에게 책망을 당했다”고도 했다.
이와 같이 곳곳의 경전 가운데서 “보살의 지혜는 성문이나 벽지불보다도 수승하다”고 하셨다.
【문】 무슨 인연 때문에 보살의 지혜는 성문이나 벽지불보다도 수승한가?
【답】 마치 본생경(本生經)에서의 말씀과 같아서, 보살의 지혜는 한량없는 아승기겁으로부터 뭇 지혜를 합하고 쌓아서 한량없는 겁 동안에 괴로운 일마다 행하지 않음이 없고 어려운 일마다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법을 구하기 위하여 불에도 나아가고 바위에도 떨어졌으며, 가죽을 벗기는 고통도 받았었다. 그리고 뼈를 내어서 붓을 삼고 피로써는 먹을 삼고 가죽으로써 종이를 삼아 경법을 베끼고 썼다.
이와 같이 법을 위하여 한량없는 고통을 받았으니, 지혜 때문에 세상마다 그의 스승에게 공양하고 대접하기를 마치 부처님처럼 모셨으며, 온갖 모든 경서(經書)를 모두 다 읽고 외우고 해설했으며,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에 항상 생각하고 헤아리면서 모든 법의 아름답고 추함과 깊고 얕음과 착하고 나쁨과 번뇌 있고[漏] 번뇌 없음과 항상하고 무상함과 있고 없음 등을 찾고 궁구했으며, 생각하고 분별하고 질문을 했다.
그리고 지혜를 위하여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에게 공양하면서 법을 듣고 묻고 믿고 받았으며 바르게 기억하고 법대로 행했나니, 이렇게 지혜의 인연이 완전히 갖추었으니 어떻게 아라한이나 벽지불보다 수승하지 않겠는가?
또 보살의 지혜는 다섯 가지 바라밀로 돕고 장엄하면서 방편이 있고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자비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삿된 소견에 방해 받지 않는다. 10지(地)에 머무르기 때문에 지혜의 세력이 깊고 크며, 깊고 크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수승하고 큰 인연이 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은 저절로 무너지거니와 아라한과 벽지불에는 이러한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보다 수승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經】 모든 다라니문(陀羅尼門)과 모든 삼매문(三昧門)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다라니는 찬보살품(讚菩薩品)에서의 설명과 같다. 문(門)이라 함은 다라니를 얻는 방편이 되는 모든 법이니, 마치 삼삼매(三三昧)를 해탈의 문[解脫門]이라 하는 것과 같다.
무엇이 방편(方便)이냐 하면, 만일 사람이 들었던 것을 모두 지닐 수 있게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일심으로 기억해서 그 기억을 더욱 자라게 하고 먼저 뜻을 짓되 서로 비슷한 일에 대하여 마음을 매어 두면서 보지 않았던 일을 알게 해야 한다. 마치 주리반타가(周利槃陀迦)24)가 마음을 가죽신을 닦는 물건 속에다 매어 두고서 선정을 생각하여 마음의 때(垢)를 제거시킨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것은 처음 배우는 이의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25)라 한다.
세 번 듣고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의 근기면 더욱 영리한 것이고, 두 번 듣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이면 한 번 듣고 기억하도록 꼭 붙잡아서 잊지 않게 하니, 이것이 문지다라니의 첫 번째 방편이다.
혹 때로 보살은 선정에 들어가서 잊지 않는 해탈(不忘解脫)26)을 얻게도 되나니, 잊지 않는 해탈의 힘 때문에 온갖 언어와 설법, 한 글귀와 한 글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잊지 않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의 방편이다.
혹은 때로 신주(神呪)의 힘 때문에 문지다라니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전생에 행한 업의 인연으로 생(生)을 받으면서 들은 것은 모두 지녀서 잊지 않기도 하나니, 이와 같은 것 등을 문지다라니의 문이라 한다.
또 보살이 온갖 음성과 언어를 듣고 그 본말(本末)을 분별하면서 그 실상(實相)을 관하면 음성과 언어가 찰나찰나마다 나고 없어짐을 알게 되며 음성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중생들은 기억하여 모양을 취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미 사라진 언어를 기억하고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나에게 욕설을 했다”고 하면서 성을 내기도 하고 또한 칭찬을 하는 일도 그와 같다. 이 보살은 이와 같이 중생을 관찰하므로 비록 다시 백천 겁 동안 욕설을 듣는다 하더라도 성을 내지 않으며 또는 백천 겁 동안 칭찬을 받는다 하더라도 역시 기뻐하지도 않나니, 음성의 나고 없어짐을 마치 메아리의 모양과 같이 알게 된다.
또 마치 북 소리를 짓는 이가 없는 것과 같다. 만일 짓는 이가 없다면 이것은 머무르는 곳도 없어서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에 다만 어리석은 범부의 귀를 속일 뿐이다. 이것을 입음성(入音聲)다라니27)라 한다.
또 다라니에는 42자(字)로써 온갖 언어와 이름과 글자를 포섭하게 된다. 무엇이 42자인가? 곧 아(阿)ㆍ라(羅)ㆍ파(波)ㆍ차(遮)ㆍ나(那) 등이다. 아제(阿提)는 진(秦)나라 말로 처음(初)이요 아뇩파나(阿耨波奈)는 진나라 말로 나지 않는다[不生]는 뜻이다. 다라니를 수행하여 보살이 이 아(阿)의 글자를 들으면 즉시 온갖 법은 처음부터 나지 않는다[初不生]는 데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와 같이 글자마다 듣는 것에 따라 모두 온갖 법의 실상(實相)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을 자입문(字入門)다라니28)라 한다. 마치 마하연품(摩訶衍品) 중에서 모든 글자의 문[字門]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또 보살은 이 일체삼세무애명(一切三世無礙明)삼매 등과 같은 모든 삼매를 얻으며, 이 낱낱의 삼매 속에서는 한량없는 아승기의 다라니를 얻는다. 이와 같은 등이 섞어 모인 것을 5백의 다라니문이라 한다. 이것이 보살의 착한 법과 공덕의 창고며 이와 같은 것을 다라니의 문이라 한다.
모든 삼매의 문[三昧門]이라 함은 삼매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성문의 법 중의 삼매와 마하연의 법 중의 삼매이다. 성문의 법 중의 삼매는 이른바 삼삼매(三三昧)이다.
삼삼매는 공공삼매(空空三昧)와 무상무상삼매(無相無相三昧)와 무작무작삼매(無作無作三昧)이다. 다시 삼매가 있나니, 유각유관삼매(有覺有觀三昧)과 무각유관(無覺有觀)과 무각무관(無覺無觀)이다. 다시 5지삼매(支三昧)와 5지삼매(智三昧) 등이 있나니, 이것을 모든 삼매라 한다.
또 온갖 선정(禪定)을 정(定)이라 하기도 하고 삼매라 하기도 한다. 4선(禪)을 선(禪)이라 하기도 하고 정이라 하기도 하고 삼매라 하기도 하며, 4선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정을 또한 정이라 하기도 하고 삼매라 하기도 하나 선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10지(地)의 정을 삼매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계 자리[欲界地]에도 역시 삼매가 있다. 왜냐하면 욕계에도 스물두 가지의 도품(道品)이 있기 때문이니, 삼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삼매가 없다면 이 깊고 묘한 공덕을 얻지 못해야 한다”고 한다.
또 천문(千問) 가운데서도 역시 이와 같은 질문이 있다.
“4성종(聖種)에는 몇 가지가 욕계의 매임[欲界繫]이고 몇 가지가 색계의 매임[色界繫]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의 매임[無色界繫]이고 몇 가지가 매이지 않은[不繫] 것인가?”
그러자 대답하기를 “온갖 것은 마땅히 4성종으로 분별해야 하나니, 혹은 욕계의 매임이기도 하고 혹은 색계의 매임이기도 하며 혹은 무색계의 매임이기도 하고 혹은 매이지 않기도 한다”고 했다.
4념처(念處)와 4정근(正懃)과 4여의족(如意足)도 역시 그와 같다.
이런 이치 때문에 욕계에도 삼매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만일 마음이 산란하다면 어떻게 이 으뜸가고 묘한 법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이 삼매는 11지(地) 중에 있나니, 이와 같은 등의 모든 삼매는 아비담(阿毘曇) 중에서 자세히 분별한다.
마하연(摩訶衍)의 삼매라 함은, 수릉엄(首楞嚴)삼매로부터 허공제무소착해탈(虛空際無所著解脫) 삼매에 이르기까지이며, 또 견일체불(見一切佛)삼매 내지는 온갖 여래의 해탈(解脫)ㆍ수관(修觀)ㆍ사자빈신(師子頻伸) 등의 삼매가 있다.
그리고 한량없는 아승기의 보살삼매가 있다. 한량없이 청정하다[無量淨]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온갖 청정한 몸을 나투어 보인다. 위엄 있는 모양[威相]이라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해와 달의 위엄 있는 광명도 다 빼앗는다.
불꽃 산[焰山]이라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모든 제석과 범왕의 위엄 있는 덕도 압도한다. 티끌에서 벗어난다[出塵]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온갖 대중의 3독(毒)을 소멸되게 한다. 막힘 없는 광명(無礙光)이라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온갖 부처님 국토를 비출 수 있다.
온갖 법을 잊지 않는다[不忘一切法]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온갖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모두 다 기억하며 다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강설하게 된다. 음성이 우렛소리와 같다[聲如雷音]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맑은 음성[梵聲]으로 시방의 부처님 국토에 가득 채울 수 있다.
온갖 중생을 즐겁게 한다[能娛樂一切衆生]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온갖 중생들을 마음속 깊이 기쁘게 할 수 있다. 보기를 좋아하면서 만족할 줄 모른다[喜見無厭]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온갖 중생이 보고 듣고 하기를 즐거워하면서 만족해 할 줄을 모른다. 공덕의 과보가 불가사의하여 하나의 인연 안에서 즐긴다[功德報不可思議一綠中樂]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온갖 신통을 성취하게 된다.
온갖 음성과 언어를 안다[知一切音聲語言]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온갖 음성과 언어를 말할 수 있으며 한 글자 가운데서 온갖 글자를 말하고 온갖 글자 가운데서 한 글자를 말하게 된다. 온갖 복과 부와 쾌락의 과보를 쌓는다[集一切福富樂果報]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항상 잠자코 선정에 들어가면서 온갖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법을 듣게 하고 대중들은 성문과 벽지불이 닦는 6바라밀의 소리를 듣게 하면서도 이 보살은 실로 한마디의 말도 하는 일이 없다.
뛰어나고 높은 온갖 다라니의 왕[出高一切陀羅尼王]이라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한량없고 끝이 없는 모든 다라니에 들어가게 된다. 온갖 원하는 대로 말해 준다[一切樂說]는 삼매가 있나니, 보살이 이 삼매를 얻으면 온갖 글자와 온갖 음성과 언어와 비유와 인연 등을 그가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하게 말하여 준다.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세력을 지닌 삼매가 있다.
【문】 이 삼매가 곧 삼매의 문인가?
【답】 삼매 그것이 곡 삼매의 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삼매만을 설명하지 않고 삼매의 문을 말하는가?
【답】 부처님의 모든 삼매는 한량없고 마치 허공이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 보살들이 어떻게 모두 얻겠는가. 보살이 이런 것을 들으면 마음이 곧 물러나고 잠기게 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삼매의 문을 말씀하신다. 하나의 문(門) 안으로 들어가면 한량없는 삼매를 포섭하게 됨은 마치 옷의 한 귀를 끌어당기면 온 옷을 다 얻게 되는 것과 같고 또한 마치 꿀벌의 왕을 잡아 오면 그 밖의 모든 벌들이 모조리 따라오는 것과 같다.
또 차츰차츰 문이 되는 것은 마치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고 일심으로 정진하면서 초저녁과 새벽녁에 부지런히 닦고 생각하며 5욕(欲)의 즐거움을 여의고 마음을 한 군데에 매어 두는 이러한 방편을 행하면 이런 삼매를 얻게 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삼매의 문이라 한다.
또 욕계계(欲界繫)의 삼매는 바로 미도지(未到地)삼매의 문이요 미도지의 삼매는 바로 초선(初禪)의 문이며, 초선과 2선(禪)의 변두리 자리의 삼매는 바로 2선의 삼매의 문이요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의 삼매도 역시 그와 같다.
난법(煖法)의 정(定)은 바로 정법(頂法) 삼매의 문이요 정법은 바로 인법(忍法) 삼매의 문이며, 인법은 바로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 삼매의 문이요 세간제일법은 바로 고법인(苦法忍) 삼매의 문이며, 고법인 내지는 금강삼매(金剛三昧)의 문이다.
요약하여 말하면, 온갖 삼매에는 세 가지 모양이 있나니, 들어가고[入] 머무르고[住] 나오는[出] 모양이 그것이다. 나오는 모양과 들어가는 모양을 문이라 하며, 머무르는 모양은 바로 이 삼매의 본체이다. 이와 같은 법이 바로 성문법 중의 삼매의 문이다.
마하연(摩訶衍)의 법 중의 삼매의 문은 마치 선바라밀의(禪波羅蜜義) 중에서 모든 삼매를 분별하며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시라(尸羅)바라밀도 바로 삼매의 문이다. 왜냐하면 세 갈래[三支]가 바로 부처님의 도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계율 갈래[戒支]와 선정 갈래[定支]와 지혜 갈래[慧支]이다. 청정한 계율의 갈래는 바로 선정 갈래의 문이어서 이 선정이 생기게 하고 선정의 갈래는 지혜의 갈래를 생기게 한다. 세 가지 갈래는 번뇌를 잘 끊고 열반이 있게 하나니, 이 때문에 시라바라밀과 지혜를 삼매의 가까운 문[近門]이라 하고 그 밖의 세 가지 바라밀은 비록 이 문이라는 뜻이 있기는 하나 먼 문[遠門]이라 한다.
마치 보시의 인연으로 복덕을 얻고 이 복덕 때문에 소원을 모두 얻게 되며 소원대로 되기 때문에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이 자비로운 마음 때문에 죄를 두려워할 줄 알면서 중생을 생각하며 세간이 공하고 무상함을 관찰하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고 인욕을 행하는 것이니, 인욕도 역시 삼매의 문이다. 정진도 5욕 가운데서 마음을 제어하고 5개(蓋)를 없애며 마음을 가다듬어 산란하지 않으면서 마음이 떠나가면 다 잡아 내닫거나 흩어지지 않게 하나니, 이것도 역시 삼매의 문이다.
또 초지(初地)는 바로 2지(地)의 삼매의 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차츰차츰 9지에 이르고 이 9지는 바로 10지의 삼매의 문이며 10지는 바로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삼매의 문이니, 이와 같은 등을 모든 삼매의 문이라 한다.
【문】 다라니의 문과 삼매의 문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일 같다면 무엇 때문에 거듭하여 설명하며 만일 다르다면 어떠한 뜻이 있는가?
【답】 앞에서 이미 삼매의 문과 다라니 문의 차이를 설명했으나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삼매는 다만 마음과 상응한 법[心相應法]일 뿐이요 다라니도 역시 마음과 상응하기도 하나 또한 마음과 상응하지 않기도 한다.
【문】 어떻게 다라니가 마음과 상응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가?
【답】 마치 사람이 문지(聞持)다라니를 얻으면 비록 마음에 성을 낸다 하더라도 역시 상실되지 않고 항상 그 사람을 따라 다니는 것이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하는 것처럼, 이 삼매도 수행하여 오래오래 익히면 뒤에는 다라니를 이루게 되나니, 마치 중생이 오래오래 익히게 되면 그의 성품으로 변해지려는 것과 같다.
이 모든 삼매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의 지혜와 같이 하면서 다라니를 생기게 하나니, 마치 굽지 않은 병을 불에다 잘 구워내면 물에 넣어도 부스러지지 않고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강물을 건너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선정에 지혜가 없으면 역시 굽지 않은 병과 같지만 만일 실상의 지혜를 얻으면 마치 굽지 않은 병을 불에 잘 구워낸 것과 같아서 보살이 두 세상 동안 한량없는 공덕을 지닐 수 있다. 보살은 또한 이로 인하여 제도되어서 부처님까지 될 수 있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삼매와 다라니는 갖가지로 구별된다.
【문】 무엇 때문에 성문의 법에는 이 다라니에 대한 이름이 없고 대승(大乘)에서만 있는가?
【답】 작은 법 가운데에 큰 법이 없다는 것을 그대는 물어서는 안 된다. 큰 법 가운데에 작은 것이 없다면 질문할 만하다. 마치 “조그마한 집에 왜 금과 은이 없느냐”고 물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또 성문은 크게 부지런히 모든 공덕을 쌓지도 않고 다만 지혜로써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고통을 벗어나려고 할 뿐이니, 이 때문에 성문의 사람은 다 다라니를 이용하여 모든 공덕을 지니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목이마를 때에는 한 움큼의 물만을 얻어도 족하며 병이나 그릇에 물을 가져올 필요가 없지만, 만일 많은 사람들에게 물을 주려면 병이나 독에다 물을 가져와야 하는 것과 같다. 보살은 온갖 중생들을 위하는 까닭에 다라니로써 모든 공덕을 지녀야 한다.
또 성문의 법 중에서는 대개가 “모든 법은 나고 멸하는 무상(無常)한 모양이다”고 말하기 때문에 모든 논의사(論議師)들은 말하기를 “모든 법은 무상하다. 만일 무상한 모양이라면 다라니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법이 무상한 모양이라면 곧 유지되는 것이 없고 오직 과거에 행한 업의 인연만이 잃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미래 세상의 과보가 비록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생기게 되는 것처럼 과거에 행한 인연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한다.
마하연(摩訶衍)의 법에서는 나고 멸하는 모양은 진실하지 않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모양도 역시 진실하지 않나니, 모든 관(觀)과 모든 모양(相)도 모두 소멸하는 그것이 바로 진실이다. 만일 과거의 법을 지니면 허물이 없나니, 과거의 착한 법과 선근(善根)의 모든 공덕을 지니기 때문에 다라니가 필요하다.
다라니는 세상마다 항상 따라다니지만 보살의 모든 삼매는 그렇지 않아서 간혹 몸을 바꾸면 상실하게도 된다. 이와 같은 갖가지로 다라니와 모든 삼매를 분별하나니, 이 때문에 “모든 다라니와 모든 삼매의 문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1)
범어로는 Bodhisattvastutiparivarta.
2)
누진통(漏盡通)을 제외한 5신통을 말한다. 곧 원하는 곳에 몸을 드러내는 신족통(神足通, ṛddhi-prātihārya)ㆍ미래를 보는 천안통(天眼通, divya-cakṣus )ㆍ범부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천이통(天耳通, divya-śrotra-abhijñā)ㆍ남의 마음을 읽는 타심통(他心通, parijaya-jñāna)ㆍ나와 남의 과거를 읽는 숙명통(宿命通, purvenivāsa-jñāna)이다.
3)
범어로는 Upapadaparivarta.
4)
범어로는 dharmadhātuja kāya. 곧 ‘법의 성품으로 태어난 몸’을 말한다.
5)
범어로는 sarvasattvacittacaritavispandita.
6)
경계란 영역(領域, gocara)을 의미한다. 곧 타심통으로는 무색계 중생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협소하다고 한다.
7)
범어로는 Mahāyānastutiparivarta.
8)
범어로는 Gaṅga. 갠지스강을 말한다.
9)
범어로는 Yamunā.
10)
범어로는 Sarayu.
11)
범어로는 Aciravatī.
12)
범어로는 Mahī.
13)
범어로는 Vaipulya.
14)
범어로는 sarvadharma-lakṣaṇa.
15)
범어로는 svasāmānya-lakṣaṇa. 사물에 존재하는 각각의 모습[相]을 말한다.
16)
범어로는 śūnyatāśūnyatāsamādhi.
17)
범어로는 ānimittānimittāsamādhi.
18)
범어로는 apraṇihitāpraṇihitasamādhi.
19)
범어로는 Ratnakūṭasūtra.
20)
범어 kalaviṅka 의 음사어. 히말라야 산중에 사는 새. 혹은 극락정토에 사는 새라고도 한다. 가릉빈가(迦陵頻迦)라고 음사하기도 한다.
21)
범어로는 Jālinīprabhasūtra.
22)
범어로는 Samantapuṣpa.
23)
범어로는 prajñāvatām agryaḥ. 곧 사리불을 가리킨다.
24)
범어 Cūḍapanthaka의 음역어.
25)
범어로는 Śrutadharadhāraṇī.
26)
범어로는 asaṃpramoṣavimokṣa.
27)
범어로는 Ghoṣapraveśadhāraṇī.
28)
범어로는 Akṣarapraveśadhārāṇ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