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개, 그리고 벚꽃 구경
동학사로 벚꽃 구경을 가자며 급하게 번개를 올렸다. 그런데 친구는 용암리를 간다고 한다. 예정에도 없었고, 나와 상의도 없었다.
다이소에 들러 동네 어르신께 드릴 그림 액자를 산다며 길을 바꾼다. 이 역시 나와의 상의는 없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친구의 일정 속에서 운전기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순간들이 있었다. 친구 사이에도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가 있는데, 이 친구는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나를 도구처럼 대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봄이 온다. 꽃은 순서대로 피어야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인데, 올해의 봄은 어딘가 다르다. 준비되지 않은 시험처럼, 봄꽃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진다.
벚꽃과 수선화가 동시에 존재감을 터뜨리며 계절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용암리로 향하는 길, 친구의 말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자꾸 어긋난다. 처음 가는 길인데도 마치 나와 함께 와본 사람처럼 말하는 친구를 보며, 내가 착각하는 건지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옆에는 아담한 9홀 파크골프장이 있었다. 잘 정리된 잔디를 보자 지난 1년이 떠올랐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몰두했던 시간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채를 내려놓았다. 사람에게 받은 깊은 상처 때문이었다.
어르신 댁으로 향하는 길, 냉이꽃이 밭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며칠 전 대사동에서 냉이를 캐왔는데, 벌써 꽃이 이렇게 피어 있다니. 그 풍경은 마치 메밀밭처럼 눈부셨다. 하얀 냉이꽃이 유난히도 예뻤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친구가 말한다. 동네 어르신들이 이곳에서 냉이를 캤다고. 알고 보니, 나와 함께 왔던 기억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수선화 무리는 마을 어귀에서 조용히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공방에 들르자던 친구는 갑자기 생각을 바꿔 어르신 댁으로 직행한다. 그의 결정은 늘 즉흥적이고, 편의에 따라 바뀐다.
기억이 너무나 띄엄띄엄한 어르신과의 인터뷰는 겨우 무사히 끝났다. 여러 권의 묵직한 앨범 속에서도 친구가 찾던 스토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은 듯했다.
친구가 정성스럽게 그려서 준비한 그림 액자를 전달하고 집을 나섰다.
마을을 내려오다 다시 공방에 들르자고 하며 공방으로 향한다. ‘사개’라는 조그만 간판 문을 들여다보니 안에 사람이 있었다. 잠시 후 젊은 목공 작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나무 향이 은은하게 퍼지며 마음을 풀어준다. 작가는 시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침대를 만들고 있었다. 월넛 목재로 완성된 침대 머리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해 만든다는 사실이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완성된 작품들도 보여주었다. 나무 향은 점점 더 깊어지고, 공간은 또 다른 결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오히려 더 강하게 아날로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는, 우리의 영혼이 돌아가고 싶어 하는 어떤 원형 같은 것이 아닐까.
작품 가격이 오른 이유를 묻자 원자재 상승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쌓인 가치처럼 느껴졌다.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맡겨본다. 마음까지 함께 흔들리는 듯하다.
책장에 꽂힌 책 중 하나를 꺼내 펼쳐보니,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일본 작가의 책이었다. 작가가 특히 좋아하는 책이라고 했다.
‘사개’라는 공방 이름의 뜻을 묻자, 상자의 모서리를 맞물리게 하기 위해 들쑥날쑥하게 깎아낸 구조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렇게 맞물려야 하는 것일까.
더 머물고 싶었지만 이미 나가 있던 친구가 재촉한다. 다음을 기약하고 공방을 나섰다.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이장님이 계셨다. 친구는 이미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친구가 불쑥 말을 던진다.“너 남자 좋아하잖아?”
순간 당황스러웠다. 과거의 일을 끌어와, 내가 남자를 만나러 온 것처럼 말한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혼자 농촌 마을을 방문하는 것이 어렵다던 친구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 말 한마디가, 나의 하루를 한순간에 낯설게 만들었다.
이장님과 함께 온 또 다른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뜻밖의 인연이 이어졌다. 파크골프 이야기가 이어지며 서로 아는 사람으로 연결되었다.
특이한 집도 구경했다. 캠핑카를 지붕 위에 올려 만든 집이었다. 우리는 그 위에 올라가 내부까지 둘러보았다.
이장님의 아내는 봄의 탐스런 쪽파를 다듬고 있었다. 알싸한 향이 공기를 채운다.
봄은 소리로도, 향으로도 다가온다.
농촌은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점점 소멸해가는 현실은 여전히 마음을 무겁게 한다.
벚꽃을 보러 나선 하루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나는 삶의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에 대한 질문이 남았다.
이 친구는 나를 정말 친구로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필요할 때만 쓰는 도구로 여기는 것일까.
마을에서 들었던 ‘사개’라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서로를 단단히 붙잡기 위해, 일부러 깎아내고 맞춰 넣는 구조.
나는 문득 깨닫는다.맞물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서로를 향해 기꺼이 자신을 덜어낼 때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모든 관계가 그렇게까지 애써야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관계는 아무리 맞추려 해도 끝내 맞지 않고,어떤 관계는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나는 더 이상 나를 깎아 맞추는 방식으로관계를 유지하지 않기로 한다.
맞물리지 않는다면,그대로 두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 벚꽃은 여전히 환하게 피어 있었다.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붙잡아야 할 풍경이 아니라,그저 스쳐 지나가도 좋은 계절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나는 이제,는 맞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끼워 넣지 않기로 한다.
2026년 4월 2일 송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