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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10권
18.1.5. 양시연(量施緣)
[自述] 소위 보시하는 사람의 행위에는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 있다.
만약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보시를 행할 적에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을 관찰하나니, 이익이 있으면 곧 보시하고 이익이 없으면 보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가난하고 궁색한 사람을 보면 우선 말을 한다.
‘당신은 삼보에 귀의하고 재계(齋戒)를 받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물어보아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면 먼저 삼보에 귀의하는 일과 재계를 주고, 그런 다음에는 곧 재물을 보시할 것이며,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하면 다시 말한다.
‘나의 말을 따라서 온갖 법은 덧없는 것이고 나라고 주장할 것도 없으며 적멸한 경지인 열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보아 만약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그렇게 가르치고 나서 보시한다.
그리고 마치 재물이 없는 이를 교화하듯이 나머지 재물이 있는 이에게도 이렇게 보시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또 그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재물이나 탐하고 집착하면서 덧없다[無常]는 것과 사람이나 물건이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지라 그리워하고 집착하며 아까워한다.
보살은 이런 이익이 없는 물건을 보면 곧 그로 하여금 속히 보시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일들을 폐지하고 도업(道業)을 수행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장엄론(大莊嚴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재물이 고뇌를 일으키게 한다면 마땅히 쌓아두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값진 물건이나 보배라 해도 반드시 여의어야 하나니,
마치 벌이 꿀을 반들면 남이 먹어버려 스스로는 먹지 못한 것처럼
재물과 보배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또 보시하는 재물에는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다.
법답지 못한 재물이면 아무리 가져다가 보시한다 해도 얻는 복이 적을 것이요,
법에 합당한 재물이라면 얻는 복이 많을 것이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땅히 보시해서는 안 되는 것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치에 맞지 않게 구한 재물은 남에게 보시해서는 안 되나니, 그 재물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술과 독약은 다른 사람에게 보시해서는 안 되나니 중생을 어지럽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짐승을 잡는 그물은 남에게 보시해서는 안 되나니 중생들을 괴롭히기 때문이요,
넷째는 칼ㆍ몽둥이ㆍ활ㆍ화살은 남에게 보시해서는 안 되나니 중생을 해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음악과 여색은 남에게 보시해서는 안 되나니 깨끗한 마음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또 『지지론(地持論)』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또한 법답지 않은 음식을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이른바 출가한 사람에게 먹다 남은 음식이나똥ㆍ오줌ㆍ눈물ㆍ침ㆍ고름ㆍ피 따위가 섞인 더러운 음식이나 말을 하지 않아 그게 밥인지 보리밥인지를 모르게 하여 보시하는 것이다.
법답지 않은 것이 섞였으면 마땅히 버려야 한다.
이른바 피가 섞인 음식과 잡되고 더러운 음식이 아니어야 하고
고기가 섞인 음식이 아니어야 하며,
술이 섞인 잡되고 더러운 음식이 아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섞였으면 법답지 못한 것이므로 다른 사람이나 부처님께 보시하지 말아야 한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채찍으로 때리고 고문하고 빼앗고 가두고 묶어서 위협을 가하여 얻은 재물을 가지고 보시를 행하면
코끼리나 말이나 소 가운데에 태어나게 된다. 비록 축생의 몸을 받아 무거운 짐을 지고 채찍을 맞아가며 굴레가 씌워진 채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일을 당하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좋은 집과 좋은 음식을 얻고,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겨서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것이다.
또 마치 악한 사람이 성을 많이 내고 마음이 비뚤어져 단정하지 못한데도 보시를 실행하면
장차 용의 세계에 떨어져서 일곱 가지 보배로 만든 궁전과 맛있는 음식, 좋은 빛깔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교만한 사람이 교만과 성내는 마음이 많은데도 보시를 실행하면
금시조(金翅鳥)의 세계에 떨어져서 항상 자재(自在)가 있어서 그것으로 영락(瓔珞)을 삼고 갖가지 필요한 것들을 다 제 마음대로 얻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며, 만단(萬端)으로 변화하여 일마다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재상이나 벼슬아치가 인민들을 억울하게 하고 함부로 다루며 법에 의하여 순리대로 다스리지 않고서 취한 재물이라 해도 보시를 행하면
귀신의 세계에 떨어져 구반다(鳩槃茶)귀신이 되어 갖가지 변화로 다섯 티끌 속에서 스스로 즐거워하는 것과 같다.
또 성내고 사나움이 많고 술과 고기를 즐겨 먹고 마시는 사람이라도 보시를 실행하면
지야차(地夜叉)귀신 세계에 떨어지지만 그러나 항상 갖가지 환락과 음악과 음식을 얻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괴팍하고 힘도 세어 수레와 말을 보시하고 대신 걸으면
허공야차(虛空夜叉)의 무리에 떨어지지만 그러나 큰 힘이 있고 질풍처럼 목적지에 이르는것과 같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질투하는 마음이 있어 다투기를 좋아하면서도 좋은 방과 집과 침구ㆍ의복ㆍ음식 따위를 보시하면
그 때문에 궁관(宮觀)의 비행야차(飛行夜叉)의 무리 중에 태어나지만 그러나 온갖 즐거움과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이 있는 것과 같다.”
만일 앞 사람을 괴롭혀서 억지로 사람이나 재물을 구하여 복을 경영하면 도리어 그 죄를 부르나니,
마음을 고요히 하여 속 마음을 닦아 다스려서 얻는 이익이 훨씬 뛰어난 것만 못하다.
또 『지지론(地持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보살이 하는 보시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받게 하거나 혹 그로 하여금 핍박을 당하게 하거나 또는 그로 하여금 침탈당하고 속임을 당하게 하거나 또는 법답지 못한 요구를 당하게 하는 것이면
자신의 힘이든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든 바라는 바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에 차라리 자신의 몸과 목숨을 버릴지언정 그의 욕망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핍박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보시해서는 안 되나니, 이것은 보살이 깨끗한 보시를 실행할 적절한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 밖에 보시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는
만약 어떤 중생이 여자ㆍ불ㆍ칼ㆍ술 따위를 구하거나 중매 따위의 행위로 희롱을 하려는 것 등 온갖 법에 어긋난 것을 와서 구걸하면 보살은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베풀어주게 되면 대부분 악을 일으키고 악한 세계에 떨어져서 저 언덕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사람이 와서 나의 몸 어느 부분을 요구하면 곧 반드시 베풀어주어야 하며,
다른 사람을 헤아리거나 앞의 사람에 대해 퇴굴(退屈)하는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
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권속들을 괴롭혀서 얻은 물건을 보시하면 이 사람은 미래 세계에 비록 큰 과보를 얻기는 해도 몸이 병고(病苦)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만일 먼저 부모를 공양하지 않고 처자와 노비(奴婢)를 괴롭혀서 고달프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로 인해 얻은 재물을 보시하면 이 사람을 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거짓된 보시라 하며 의로운 보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보시한 이를 가련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고 말하며,
은혜에 보답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미래 세계에 비록 재물을 얻는다 해도 항상 구하되 쌓이지는 않고 꺼내 쓰지도 못하며 몸에 병만 많아 고통스러울 뿐이다“
이런 글로써 증험하건대 억지로 남을 부려서 얻은 물건으로 복을 경영하여 닦은 사람은 도리어 괴로운과보를 초래하거늘 어찌 이익을 낸다고 하겠는가?
지금은 말법 세상이라서 도인이나 속인이 잘못 뒤바뀌어서 앞다투어 재(齋)나 강(講)을 일으키고 억지로 재물을 구해 탑을 세우고 절을 짓는데, 떳떳한 법에 의한 합당한 것도 아니니, 도리어 앞의 죄만 초래할 뿐이다.
고요히 앉아서 안으로 닦고 실천하느니만 못하나니,세간을 벗어난 가운데 이보다 더 뛰어난 것은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깨끗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법을 설하면 그 앞에서 법을 들은 사람은 공경하고 정성을 다해 법을 구하며 보시하게 될 것이니,
곧 그들을 위해 설법해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복과 지혜를 성취하게 해야 할 것이요,
앞의 판단이 있음을 보고 덩달아 모두 물리치며 망령되게 헐뜯고 비방하면서 앞의 복을 억지로 막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또 『무성섭론석(無性攝論釋)』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저 유정(有情)들이 그 재물 때문에 중한 업장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일부러 베풀어 주지 않아서 그로 하여금 아무리 보시해도
그 보시는 공(空)하여 과보가 없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
설령 다시 그에게 보시한다 해도 또한 받을 수 없거늘 무엇으로 늘 보시를 하겠는가?”
마치 어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되
한결같아서 달이 지나도 지겨워하지 않건만
젖먹이의 목구멍이 행여 닫혀버리기라도 하면
젖을 먹이고 싶어한들 어찌하겠는가?
차라리 가난하고 궁핍한 이로 하여금 재물이 다하여
악한 세계의 모든 악행 여의게 할지언정
그가 부귀로 모든 감관 어지럽혀
미래 세상에 온갖 고통 받게 하지 말라.
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때를 맞추어 보시하면 다섯 가지 일의 이익이 있다.
무엇이 그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먼 데서 온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요,
둘째는 멀리 가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셋째는 병든 사람에게 보시한 것이요,
넷째는 넉넉하지 못할 때에 보시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만약 첫 수확한 과일이나 곡식 또는 음식을 얻으면 먼저 계율을 지키고 정진하는 사람에게 드리고 그런 뒤에 자신이 먹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 보시를 행하려고 하면 마땅히 때를 따라 보시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만일 때를 맞추어 청정한 보시를 하면 다시 때를 맞추어 과보를 받게 된다.
시기의 적절함을 따라 청정한 마음으로 보시한다는 것은
만약 추울 때에는 따뜻한 방과 털이불과 땔감과 불, 그리고 따뜻한 음식 등을 보시하고
만약 더울 때에는 서늘한 방과 가벼운 의복과 물과 부채, 그리고 시원한 물건 등을 보시하는 것이며,
목이 마를 때에는 마실 것을 주고 배고플 때에는 음식을 주며,
바람 불고 비가 올 때에는 공양을 보내드리고 날씨가 맑고 화장하면 스님을 초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때에 따르고 마음에 맞추어 그들을 기쁘게 하면 미래 세상에는 복을 얻되 다시금 순한 과보[順報]를 받느니라.’”
18.1.6. 복전연(福田緣)
『우바새계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축생(畜生)에게 보시하면 백 배의 과보를 얻고,
계율을 깨뜨린 이에게 보시하면 천 배의 과보를 얻으며,
계율을 지키는 이에게 보시하면 십만 배의 과보를 얻고
외도(外道)로서 욕심을 여읜 사람에게 보시하면 백만 배의 과보를 얻으며,
도(道)를 향하여 수행딴 이에게 보시하면 천억 배의 과보를 얻는다.
수다원(須陀洹)에게 보시하면 한량없는 과보를 얻고
사다함(斯陀含)을 향하여 보시하면 또한 한량없는 과보를 얻으며,
나아가 부처님에게 보시해도 한량없는 과보를 얻느니라.
나는 지금 너희들을 위하여 모든 복전을 분별하게 하려고 일부러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만일 지극한 마음으로 매우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내어 축생에게 보시하면 전심(專心)으로 공경하면서 모든 부처님께 보시하여 얻는 복과 동등하여 조금도 차별이 없느니라.
백 배라고 말한 것은 마치 수명과 물질과 힘과 안락, 그리고 말재주를 그에게 보시하면 시주(施主)는 뒤에 수명과 물질과 힘과 안락, 그리고 말재주를 각각 백 배, 나아가 한량없이 많이 얻게 되는 것까지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계경(契經)에서 말하였다.
‘내가 사리불(舍利弗)에게 보시하고 사리불도 또한 나에게 보시하였다.
그러나 나는 얻는 것이 많지만 사리불이 얻는 복은 많지 않다.’
혹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받는 사람이 악을 지으면 그 죄가 시주에게 미친다’고 하는데,
그 이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시주가 보시할 때에는 그의 고통을 깨뜨려주기 위해서이지 죄를 짓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시주는 꼭 좋은 과보를 얻을 것이다.
받는 이가 악한 일을 지었으면 그 죄는 제 몸에게로 모이며 시주에게는 미치지 않는다.”
[문] 만약 성인에게 베풀어 주어서 복을 얻는 것이 많다면 어찌하여 경전에서는
‘지혜 있는 사람은 보시를 행함에 있어서 복전(福田)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는가?
[답] 지금 이 뜻을 풀이하자면 여러 갈래가 있다.
보시하는 사람에게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구별이 있고
보시할 대상에는 자비와 공경의 다름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자비는 곧 가난하여 고통받는 이를 말하고 공경은 곧 삼보를 말한 것이다.
자비는 복전[田]은 하열하지만 마음은 뛰어나고,
공경은 복전은 뛰어나지만 마음은 하열하다.
만일 마음의 우세함만을 취하여 부처님께 보시한다면 가난한 이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못하다.”
그러므로 『상법결의경(像法決疑經)』에서 말하였다.
“모든 중생들 중에는 남이 모으고 쌓아서 모든 복업을 짓는 것을 목격하고서 단지 명예와 이름만을 추구하기 위해 온 집안의 재물을 다 기울여 보시하는데 사용하면서도 가난하고 고독한 사람이 보이면 꾸짖고 쫓아내면서 한 털끝만큼도 구제하지 않는 이가 있으니,
이와 같은 중생을 전도된 선행을 짓는다고 하며,
어리석고 미쳐서 복업을 닦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복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매우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니, 재물은 아주 많이 쓰면서도 얻는 복은 너무도 적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나는 한 때 여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승기(阿僧祇) 겁 동안 몸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 그리고 성문(聲聞)대중들에게 공양한다 해도
어떤 사람이 축생에게 한 입의 음식을 보시하는 것만은 못하다.
그 복은 저것보다 백천만 배나 더 뛰어나며 한량없고 그지없다.
나아가 굶주린 개나 개미에게 보시하는 자비의 밭이 가장 뛰어난 것이다.’
또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사리불이 한 발우의 밥을 부처님께 올리자 부처님께서는 곧 개에게 베풀어 주시면서 사리불에게 물으셨다.
‘누가 얻는 복이 더 많겠느냐?’
사리불이 말하였다.
‘제가 부처님 법의 이치를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개에게 베푸시어 얻는 복이 더 많을 것입니다.’
만약 법을 공경하고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며 직위(職位)를 가지고 도를 닦는 일에 의지하면 공경의 밭이 더 뛰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바새계경』에서 말하였다.
“만약 축생에게 보시하면 백 배의 과보를 얻고
나아가 수다원에게 보시하면 한량없는 과보를 얻는다.
아라한과 벽지불조차도 오히려 부처님만 못한 이들이거늘 하물며 그 밖의 무리들이겠는가?
만일 평등에 의거하여 보시를 실행하는 사람이면 자비와 공경을 따질 필요가 없다.
평등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얻는 복이 크고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서 말하였다.
“나누어 두 몫을 만들어 가지고 한 몫은 난승(難勝)여래께 보시하고 다른 한 몫을 성 안에서 가장 천한 걸인에게 준다면 그 복전은 둘이 아닌 것이다.”
또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의 이모(姨母) 마하파사바제(摩訶波闍波提)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시자 손수 베를 짜서 미리 일단(一端)의 금빛 모직물로 방석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언제나 마음에 쌓아두고 잊지 않은 채 부처님만을 기다리다가 이윽고 부처님을 뵙게 되자 기쁨이 마음과 골수에 사무쳐 이내 그 방석을 가져다 여래께 받들어 올렸다.
부처님께서 교담미(憍曇彌)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이 방석을 가지고 가서 많은 대중들에게 바치도록 하시오.’
파제는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뒤부터 마음으로 늘 생각했기 때문에 손수 베를 짰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기다렸습니다. 부디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저를 위해 받아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님께서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저에게 주시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사랑의 마음으로 한 보시는 그 복이 크고 넓지 못합니다.
만일 스님께 보시하면 그로 인해 얻는 복은 더욱 많을 것입나다.
저는 이런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 권하는 것입니다.’
또 『거사청승복전경(居士請僧福田經)』에서 말하였다.
“오백 나한을 따로 청하는 것은 스님의 차례에 따라 일반 스님 한 분을 청하는 것만 못하다.
나의 법 중에는 따로 초청을 받는 법이 없나니,
만약 어떤 사람이 스님을 따로 초청한다면 그는 내 제자가 아니다.
이는 육사(六師:外道)의 법이며 일곱 부처님께서도 인정하시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로 간추려서 대강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8.1.7. 상대연(相對緣)
[自述] 여기에는 따로 다섯 종류의 상대(相對)가 있다.
첫 번째는 복전과 재물이 상대가 되나니 여기에 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복전은 뛰어나지만 재물은 하열한 것이니, 마치 어린아이가 흙을 가져다가 부처님께 보시한 것과 같다.
둘째는 재물은 뛰어나지만 복전이 하열한 것이니, 마치 보물을 가져다가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따위와 같다.
셋째는 복전과 재물이 모두 뛰어난 것이니, 마치 보배를 가져다가 부처님들께 보시하든 것과 같고,
넷째는 복전과 재물이 다 하열한 것이니, 마치 풀을 가져다가 축생들에게 보시하는 따위와 같다.
두 번째는 가볍고 무거운 상대이니 여기에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마음은 중하나 재물은 가벼운 것이니 마치 가난한 여인이 대중에게 돈 한 푼을 보시하고서도 얻은 복이 크고 많은 것과 같은 따위요,
둘째는 재물은 중하나 마음이 가벼운 것이니, 마치 왕의 부인이 교만한 마음으로 많은 보물을 가져다가 대중들에게 보시했더라도 얻은 복은 적은 것과 같다.
[이하 두 가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공(空)과 유(有)의 상대이니,
첫째는 마음을 비웠으나 그 대상 경계를 비우지 못한 것이니, 마치 비록 공관(空觀)을 배우기는 했어도 재물이 아까워 보시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가난한 과보를 얻는 것과 같고,
둘째는 대상 경계는 비웠으나 마음을 비우지 못한 것이니, 마치 재물을 보시하면 부유함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항상 많은 재물을 즐겁게 보시하여 얻는 복이 매우 많은 것과 같다.
[이하 두 가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는 많고 적음의 상대이니 『법구비유경(警喩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시에는 네 가지 일이 있다. 어떤 것들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 보시는 많으나 얻는 복은 적은 것이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제사를 지낼 적에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돈과 보물을 허비하여 복과 지혜가 없는 것과 같나니,
이것이 보시는 많으나 얻는 복운 적은 것이 된다.
둘째는 보시는 적으나 얻는 복은 많은 것이다.
마치 인자한 마음으로 도덕이 있는 사람에게 바쳐서 여러 스님들이 그것을 먹고 난 뒤에 정진하면서 배우기도 하고 외우기도 하면
비록 보시는 적으나 그 복은 더욱 큰 것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보시는 적으나 얻는 복이 많은 것이라고 한다.
셋째, 보시도 적고 얻는 복도 적은 것이다.
마치 간탐(慳貪)과 악한 마음으로 삿된 견해를 지닌 이나 외도(外道)에게 보시하면 둘 다 어리석은 것과 같으니,
이런 까닭에 보시도 적고 얻는 복 또한 적은 것이 된다.
넷째, 보시도 많고 얻는 복도 많은 것이다.
만약 어진 이가 세상은 덧없음을 깨닫고서 좋은 마음으로 재물을 내어서 탑과 절을 세우고 정사를 만들고 과수원을 만들며 삼존(三尊)께 의복ㆍ이불ㆍ신ㆍ평상ㆍ책상ㆍ살림도구ㆍ음식 따위를 공양하면
이 복이야말로 다섯 개의 큰 강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듯 복의 흐름도 이와 같아서 세상마다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보시도 많고 그 과보도 많은 것이 된다.”
다섯 번째는 더럽고 깨끗한 상대이니, 『지도론』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의 법에는 네 가지 보시가 있다.
첫째는 보시한 사람은 청정하나 보시를 받은 이가 청정하지 못한 것이요,
둘째는 보시한 사람은 깨끗하지 못하나 보시들 받은 사람은 청정한 것이며,
셋째는 보시한 사람이나 보시 받은 사람이 모두 다 청정한 것이요,
넷째는 보시한 사람이나 보시를 받은 사람이 다 청정하지 못한 것이다.”
또 한 구(句)만 잘 이해한다면 나머지는 유추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들이 둘 다 청정한 것인가?
부처님께서 스스로 부처님을 공양하기 때문에 이것을 다 같이 청정하다고 한 것이니,
마치 동방의 보적불(寶積佛)께서 공덕의 힘으로 만들어 내신 꽃을 십주(十住) 법신(法身)의 보명(普明)보살에게 맡겨 이 꽃을 보내 석가모니부처님의 위에 뿌리게 하여 시방의 부처님께 이것이 제일가는 복전임을 아시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바로 두 가지가 모두 청정하다고 한다.
[나머지 구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재물을 지니고 있으면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고도 없다고 말하거나 거절하는 말을 하면
이 사람은 이미 말했듯이 미래 세상엔 가난하여 궁핍하고 덕(德)도 또한 희박하리라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을 방일(放逸)한 이라 한다.
스스로 재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의리상 옳지 못하다. 왜냐 하면 온갖 물풀[水草]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없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나라의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보시하리라고는 할 수 없으며,
아무리 가난하고 궁핍하다 할지라도 능히 보시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 또한 먹고 살 몫이 있을 것이고 먹고 난 뒤에 그릇을 씻고 버리는 찌꺼기일지라도 마땅히 음식을 보시하면 역시 복덕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티끌만큼의 밀가루를 개미에게 보시하더라도 그 또한 한량없는 복덕의 과보를 얻을 것이다.
천하에 지극히 가난한 자라 해도 어느 누가 마땅히 이 티끌만큼의 밀가루조차 없겠느냐?
그러나 그 누가 하루 동안에 세 뭉치의 밀가루도 먹지 못해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먹을 것의 절반이라도 걸인에게 보시해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아무리 지극히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느 누가 옷조차 없어 벌거벗고 살겠느냐?
만약 의복(衣服)이 있다면야 어찌 한 오라기의 실이라도 남에게 보시하여 상처를 동여매게 하거나 한 손가락만한 재물로 등 심지를 만들게 하지 못하겠는가?
천하의 사람으로서 어느 누가 가난하다고 해서 마땅히 몸조차 없는 이가 있겠느냐?
만일 그에게 몸이 있다면 남이 복을 짓는 것을 보고 몸소 꼭 가서 돕고 기뻐하면서 싫어함이 없어야 시주(施主)라고 말할 수 았고 또한 복덕도 얻을 것이다.
혹 때로는 나누어짐이 있기도 하고 혹 때로는 평등하기도 하며 혹은 보다 우세하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써 나는 바사닉왕(波斯匿王)의 식사를 받을 때에도 축원하기를
〈왕과 가난한 사람이 여는 공덕은 똑같아서 차별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니라.
마치 어떤 사람이 향을 사되 바르는 향ㆍ가루향ㆍ뿌리는 향ㆍ피우는 향 등, 이와 같은 네 가지 향은 사람들이 만지든 사든 향을 헤아리든 간에 그 향기를 맡는데 있어서는 동등하여 다름이 없다.
그런데도 그 모든 향은 털끔만큼도 잃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시를 닦는 법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많거나 적거나, 거칠거나 보드랍거나,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으로 몸소 가서 돕거나 또는 멀리서 보고 듣고 하여 마음으로 기쁨을 내거나 간에 그 마음은 똑같기 때문에 얻게 되는 과보도 아무 차벌이 없느니라.
만약 재물이 없으면서 남이 보시하는 것을 보고 나서 마음에 기쁨과 믿음을 내지 않고 복밭[福田]을 의심한다면
이것을 가난하고 궁색한 이라고 말한다.
또 재물과 보배가 많아서 자재(自在)롭고 걸림이 없는 이가 좋은 복밭이 있는데도 마음에 믿음이 없어서 받들어 보시하지 않으면
그 또한 가난하고 궁색한 이라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지혜로운 이는 스스로 관찰하되, 남은 한 뭉치의 밥을 제가 먹으면 살고 남에게 주면 죽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꼭 베풀어 주어야 하겠거늘 하물며 많이 남아도는 것이겠느냐?
지혜로운 이는 다시 세간에서 만약 계율을 지니고 들은 것이 많은 이이거나 나아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획득한 이까지도 오히려 배고프거나 목마른 것 등을 차단하지 못하고 방사(房舍)와 의복ㆍ음식ㆍ침구와 병 들었을 때에 약이 없어 괴로워하는 것을 관찰하게 되는데, 이는 모두가 과거 세상에서 보시하지 않은 인연 때문이다.
계율을 깨뜨린 사람조차도 만일 보시하기를 즐거워하면,
이 사람은 비록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항상 배가 부르게 될 것이요, 모자람이 없게 될 것이니라.
비록 부자로서 천지(天地)간에 한량없는 쾌락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마땅히 위없는 즐거움을 위하여 보시를 실천하는 것이지 인간 세계나 천상(天上)에 태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무상(無常)하기 때문이요, 끝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시주가 기뻐하며 후회하지 않고 착한 사람을 친근히 하면
재물이 풍부하고 자재하며 최상의 족성 집안에 태어날 것이요,
인간 세계와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고 무상과(無常果)에 이르게 되며,
능히 일체의 번뇌와 결박(結縛)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만약 시주가 손수 보시하고 나면
최상의 족성 집안에 태어나고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것이며,
재물과 보배가 풍족하고 권속들도 성취하며 재물을 마음대로 쓸 수도 있고 보시할 수도 있으며,
온갖 중생들이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보려고 하고 보고 난 뒤엔 공경하고 존중하며 찬탄할 것이니라.’”
또 『대장부론(大丈夫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간탐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은 비록 또한 진흙이라 할지라도 금과 옥(玉)보다 귀중하게 여길 것이나,
만일 자비로운 마음이 많은 사람이면 비록 금이나 옥을 보시할지라도 풀이나 나무보다 더 가벼이 여길 것이다.
만약 간탐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은 재산과 보물을 상실(喪失)하면 마음으로 크게 근심하고 괴로워할 것이나,
만일 보시를 실천하는 사람이면 받는 이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고 스스로도 기뻐할 것이다.
설사 맛좋은 음식이 있다고 해도 만일 베풀어 주지 않고 먹어 치우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없으나,
설사 나쁜 음식이긴 하지만 그것을 보시한 연후에 먹는 사람은 마음 속에 기쁨이 넘치고 아름답게도 여길 것이다.
만약 보시를 실천하고 나서 남은 것이 있을 때 자신이 먹은 그 훌륭한 장부는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 마치 열반(涅槃)을 얻은 것과 같을 것이다.
믿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이런 말을 믿겠는가?
설령 거친 음식이 있고 그의 앞에 굶주린 이가 있다고 해도 오히려 베풀어주지 않겠거늘 하물며 그 밖에 다른 좋은 물건들이야 남에게 줄 수 있겠느냐?
또 어떤 사람은 큰 물가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조금의 물조차도 중생들에게 보시하지 않거늘 다른 좋은 재물이겠느냐?
이런 사람은 세간의 쓰레기와 흙이 물보다 얻기 쉬운 것인데도 간탐하는 사람이기에 쓰레기와 흙조차 달라는 말만 들어도 오히려 인색한 마음을 품거늘 하물며 재물이겠느냐?
비유하면 마치 어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큰 부자이고 한 사람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이라고 할 때 어떤 걸인(乞人)이라도 오게 되면 이와 같은 두 사람은 다 같이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재물이 있는 이는 그가 달라고 할까 두려워하고 재물이 없는 이는 내가 마땅히 어떻게 해서라도 조금의 재물이나마 얻어다가 그에게 주어야 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이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비록 같지만 그 과보(果報)는 각기 다른 것이다.
가난하면서 자비로운 생각을 하는 이는 천상이나 인간 세계에 태어나서 한량없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요,
부자로서 간탐하는 사람은 아귀의 세계에 태어나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만약 보살이라면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을 터인데, 하물며 조금의 물건을 주는 것이겠는가?
보살은 자비한 마음으로 보시를 생각하면셔도 재물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와서 구걸할 때에는 차마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며 눈물 흘린다.
설사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하는 말만 들어도 오히려 참고 견딜 수 없겠거늘, 더구나 직접 다른 이가 괴로워하고 고통받는 것을 보고서 구제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런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불짱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가난으로 고통받는 중생을 보고서도 줄 재물이 없어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탄식하는 것은 비유할 수조차 없다.
중생을 구제하는 사람이라면 중생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슬프게 울면서 눈물을 흘릴 것이니,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그 마유의 느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보살의 눈물에는 세 가지 때가 있다.
첫째는 공덕을 닦는 사란을 보면 사랑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요,
둘째는 고뇌(苦惱)하는 중생으로서 공덕이 없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가엾게 여기기 때문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며,
셋째는 큰 보시를 닦을 때에는 한편은 슬퍼하고 한편은 기뻐서 뛰기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보살이 지금까지 눈물 흘린 것을 계산해 보면 네 개의 큰 바닷물보다 더 많을 것이다.
세간의 중생들은 친족을 잃었을 때에 슬프게 울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보살이 가난하여 고통받는 중생을 보고도 보시할 재물이 없을 때에 슬피 울면서 흘리는 눈물에는 미치지 못한다.
보살이 구걸하는 소리를 듣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 구걸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비록 서로 말은 주고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얻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은 구걸하는 사람이 오는 것을 볼 때 지극히 슬퍼하면서 괴로워하나, 걸인은 재물을 얻었을 때에 마음에 기쁨이 생기면서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보살은 구걸하는 말을 들을 때에 슬프게 울면서 흐르는 눈물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다가 구걸하는 이가 만족하다는 말을 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그친다.
보살은 보시를 수행한 뒤에 중생들이 만족해 하면 곧 산림(山林)으로 들어가서 선정을 수행하여 세 가지 독을 멸하여 없앤다.
재물이 갑절이나 많아져서 구걸하지 않는 이에게도 보시할 수 있게 되고 나는 이제 출가하여 모든 번뇌[結使]를 끊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