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뼈도 패총에서 발견되지만 전체 뼈의 23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폴리네시아의 다른 곳에서는 물고기가 주식었던 까닭에
물고기 뼈가 패총에서 90펴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이스트 섬의 해안지대는 대부분이 낭떠러지이기 때문에
섬사람들이 얕은 바다에서 그물이나 낚싯줄로 물고기를 잡을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식생활에서 물고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이유로, 연체동물과 성게의 섭취량도 적었다.
이런 부족함은 바닷새와 육지새의 고기로 채워졌다.
새고기 스투에 쥐고기를 더해 맛을 냇을 것이다.
쥐들도 정착자들의 카누에 무임승차해 이스터 섬에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실제로 이스터 섬은 폴리네시아의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쥐뼈가 물고기 뼈보다 많이 발견되는 유일한 섬이다.
어떻게 쥐고기를 먹을 수 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내가 1950년대 말 영국에서 지낼 때
영국인 동료 생물학자들이 식량 배급을 받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쥐를 실험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영양 공급원으로 삼았다며
내게 가르쳐준 쥐요리법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스터 섬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이 돌고래, 물고기, 갑각류, 새, 쥐에서만 살코기를 얻었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ㅇ 바다표범이 있었고, 때로는 바다거북과 큰 도마뱀까지 잡아먹엇다.
이런 진미들은 장작불로 조리되었고,
이런 조리법은 훗날 이스터 섬에서 숲을 사라지게 하는데 작은 역할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선사 시대 초기의 음식물 쓰레기 퇴적물과 후기의 퇴적물, 혹은 요즘의 음식물 쓰레기를 비교해보면,
커다란 차이가 발견된다.
돌고래, 참치와 같은 난바다 물고기의 흔적이 거의 사러져서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초기 이후에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물고기는 주로 연근해에서 잡히는 물고기였다.
육지 생물들은 식단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남획과 삼림 파괴, 쥐의 공격 들이 겹치면서 모든 육지새가 멸종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양의 육지새에게 닥친 최악의 재앙이었다.
모아(moa, 타조와 비슷한 뉴질랜드의 거대한 새), 날지 못하는거위 등 몇몇 종은 멸종되었지만
많은 종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뉴질랜드와 하와이의 기록을 압도하는 재앙이었다.
태평양의 다른 섬들과 달리, 이스터 섬에서는 토종 육지새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25종이 넘게 번식하던 바닷새들도 남획과 쥐의 공격에 24종이 이스터 섬을 떠났다.
그나마 9종은 이스터 섬 연안의 작은 바위섬들에서 둥지를 틀고 있지만
나머지 15종은 그런 바위섬에서도 종적을 감추었다.
갑각류들도 지나치게 남획되어, 커다란 별보배고등은 식탁에서 거의 사라지고,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작은 검은 달팽이가 주인공이 되었다.
패총에서 발굴된 별보배고등과 달팽이의 크기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역시 인구가 늘면서 남획되었기 때문이다.
카 트린 오를리아크 , 존 플렌리, 사라 킹이 확인한 거대한 야자나무를 비롯해
모든 나무가 대여섯 가지 이유로 사라지고 멸종되었다.
그 이유를 추론해보자, 오를리아크가 아궁이에서 채취한 숯을 볼 때
나무가 땔감을 사용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나무는 시신을 화장하는 데도 쓰였다.
실제로 이스ㅌ터 섬의 화장터에서는 수천 구의시신과 산더미 같은 골뢰(骨灰)가 발견되었다.
화장을 하는 데 엄청난 나무가 쓰였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가장 높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땅이 농지로 개간된 것으로 판단하건대 숲을 개간해서 밭을 만들었다.
초기패총에서 먼 바다의 돌고래와 참치 뼈가 대량으로 발굴된 것에서는
알피토니아와 엘라에오카르푸스와 같은 큰 나무를 배어 커다란 카누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로헤벤이 보았던 작고 약한 배는 먼 바다까지 나가 작살로 돌고래나 참치를 잡기에는 젓합하지 않았다.
또한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는 데 필요한 목재와 밧줄을 만들기 위해서도 많은 나무가 베어졌을 것이다.
그밖에도 많은 이유로 나무가 하염없이 베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밀항자인 쥐들도 나름의 이유로 야자나무와 다른 나무들을 '이용'햇다.
발굴된 야자나무 열매들에서 예외 없이 쥐가 갉은 듯한 잇자국이 남아 있다.
그래서 땅에서 떨어져서도 발아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도래한 직후, 즉 900년경부터 삼림이 파괴되기 시작해서,
로헤벤이 상륙한 1722년에는 완전히 끝난 것으로 판단된다.
로헤벤이 3미터가 넘는 나무를 볼 수 없었다니 말이다.
그런데 900년과 1722년 사이에 언제 삼림이 파괴되었는지 더 정확히 밝힐 수는 없을까?
적어도 다섯 가지 증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방사성 탄소법으로 측정한 야자나무 열매들 대부분은 1,500년 이전의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 이후에는 야자나무가 크게줄었들었거나 멸종했다는 뜻이다.
이스터 섬에서 가장 척박한 땅이므로 십중 팔구 가장 먼저 삼림 파괴가 시작되었을 포이케 반도에서는
야자나무가 1400년경에 자취를 감추었다.
개간에 따른 숯은 1440년경에 사라졌지만 그후에도 사람이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흔적은 남아 있다.
오를리아크가 아궁이와 쓰레기 구덩이에서 채취한 숯을 방사성 탄소법으로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1640년 이후로는 연료로 나무 대신에 풀이 사용된 듯하다.
이런 현상은 최후까지 나무를 연료로 사용했을 지배계급의 집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플렌리는 화분 분석을 통해서 900년부터 1300년 사이에
야자나무, 데이지, 토로미로, 관목 등의 화분이 사라지면서 풀의 화분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퇴적물에 방사성 탄소측정법을 적용한 결과에 따르면
야자나무와 그 열매를 직접 측정한 결과보다 삼림 파괴가 더 나중이다.
끝으로 크리스 트티븐슨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고지대의 풀랜테이션은 1400년대 초부터 1600년대에 가장 팔발하게 개발되엇고,
이 시기는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기 위해 나무와 밧줄이 가장 많이 필요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듯하다.
이런 모든 증거로 판단하건대,
인간이 이스터 섬에 정착하고 곧바로 삼림 벌채가 시작되었고,
1400년경에 최고조에 아르렀으며,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지만 1400년대 초부터 1600년대 사이에 거의 끝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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