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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팔건도론 제30권
8.6. 게(偈)발거
[본 발거에서 설명하는 게송의 표제어는] 견(見)ㆍ바라문ㆍ이모(二母)ㆍ진(盡)ㆍ쇄(灑)ㆍ약부(若負)ㆍ일(一)ㆍ불신(不信)ㆍ삼십육(三十六)ㆍ악(惡)ㆍ견(見)ㆍ무망(無望)ㆍ말(沫)ㆍ강당(講堂)ㆍ타(墮)ㆍ피(皮)이다.
[4제를] 본 자는 볼 때에도 보며,
보지 않을 때에도 역시 본다.
보지 않은 자도 역시 보았다고 하며,
보지 않은 것을 보고도 역시 보았다고 한다.31)
[제1]
‘본 자는 볼 때에도 본다’고 함에서 본 자라고 하는 것은 이미 고ㆍ습ㆍ진ㆍ도를 본 이들을 말하며, 볼 때에도 본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이가 고ㆍ습ㆍ진ㆍ도를 볼 때, 그들도 역시 이러한 고ㆍ습ㆍ진ㆍ도를 보는 자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본 자는 볼 때에도 본다’고 일컬은 것이다.
‘보지 않을 때에도 역시 본다’고 하는 것은, 고ㆍ습ㆍ진ㆍ도를 보지 않은 그 밖의 모든 이에 대해 그들은 이러한 고ㆍ습ㆍ진 도를 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보지 않을 때에도 역시 본다’고 일컬은 것이다.
‘보지 않은 자도 역시 보았다고 한다’고 함에서 보지 않은 자라고 하는 것은 고ㆍ습ㆍ진ㆍ도를 보지 않은 이를 말하며, 보았다고 하는 것은 고ㆍ습 진ㆍ도를 본 모든 이를 말한다. 그래서 ‘보지 않은 자도 역시 보았다고 한다’라고 일컬은 것이다.
‘보지 않은 것을 보고도 역시 보았다고 한다’는 것은, 그는 고ㆍ습ㆍ진ㆍ도를 보았다 하더라도 이는 고ㆍ습 진ㆍ도를 보지 않고서 보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지 않은 것을 보고서도 역시 보았다고 한다’라고 일컬은 것이다.
[제l견을 마친다]
[제2]
바라문을 때려서는 안 되며,
또한 마찬가지로 바라문을 내쫓아서도 안 된다.
올바르지 못한 일은 바라문을 때리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올바르지 못한 것은 바라문을 내쫒는 일이다.32)
‘바라문을 때려서는 안 된다’고 함에서 바라문이란 바로 아라한을 말하므로 그를 주먹이나 혹은 돌, 혹은 칼, 혹은 몽둥이로 때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라문을 때려서는 안 된다’고 일컬은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바라문을 내쫓아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아라한을 내쳐 공경하지 않거나, 옷과 먹을 것, 잠자리, 병들고 쇠약해졌을 때 사용할 의약품 따위를 시여하시 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또한 바라문을 내쫓아서도 안 된다’고 일컬은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것은 바라문을 때리는 일이다’고 함에서 올바르지 못하고 폐악한 일이란 여러 아라한을 주먹이나 혹은 돌, 칼, 몽둥이로 때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올바르지 못한 것은 바라문을 때리는 일이다’고 일컬은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올바르지 못한 것은 바라문을 내치는 일이다’고 함에서 올바르지 못하고 폐악한 일이란, 아라한을 내쳐 공경하지 않거나, 옷과 먹을 것, 잠자리, 병들고 늙었을 때 사용할 의약품 따위를 시여하지 않는 것 등을 말한다. 그래서 ‘또한 마찬가지로 올바르지 못한 일은 바라문을 내치는 것이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2를 마친다]
[제3]
아비와 어미, 혹은 왕과
또한 두 가지의 학(學)을 내버리고
나라(那羅)와 그것에 부수하여 따르는 것[翼從]도 역시 버리며,
걸림[碍]없이 넘는 이가 범지이다.33)
‘아비와 어미를 버린다’고 함에서 어미는 애(愛)를 말한다. 즉 낳는 것이기 때문이니, 세존께서 “애(愛)는 사람을 낳으며, 그의 마음을 질주하게 한다. 곧 인간은 생사를 따르는 자로서, 그 같은 괴로움을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아비는, 놓아버리고 끊어져야 할 유루행의 존재를 말한다. ‘그래서 아비와 어미를 버린다’고 일컬은 것이다.
‘혹은 왕 및 또한 두 가지의 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왕이란 유루의 심의식(心意識)을 말하는 것으로, 세존께서 “여섯 번째의 증상왕(增上王:제6의식)은 물들지 않은 여러 진(塵)34)을 염착하니, 여기에서 염착이란 어리석음을 말한다”라고 설명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두 가지의 학이란 계도와 견도를 말한다. 그래서 ‘또한 왕과 두 가지의 학을 버린다’고 말한 것이다.
‘나라와 그것에 붙따르는 것을 버린다’고 함에서 나라란 번뇌를 말하며, 그것에 붙따르는 것이란 이것과 상응하는 유각유관을 말한다. 곧 그것들은 버리어 여의고 끊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라와 그것에 붙따르는 것을 버린다’고 일컬은 것이다.
‘걸림없이 넘는 이가 범지이다’고 했는데, 세 가지 걸림[礙]이 있으니, 탐욕과 진애와 우치이다. 이것을 다하게 되면 욕계를 넘어 출요(出要)하며, 색ㆍ무색계를 넘어 출요한다. 곧 범지란 바로 이것에 대해 장애가 다한 출요를 본 자인 것이다. 그래서 ‘걸림없이 넘는 이가 범지이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3을 마친다]
[제4]
아비와 어미, 혹은 왕 및
또한 두 가지의 학을 내버리고,
이미 다섯 호랑이를 해쳤으면,
그를 곧 청정한 이라고 한다.
‘아비와 어미를 내버린다’고 함에서 어미는 애를 말한다. 즉 낳는 것이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애(愛)는 사람을 낳으며,
그의 마음을 질주하게 한다.
곧 인간은 생사로 말미암아
그 같은 괴로움을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비란, 놓아버리고 끊어져야 할 유루행을 말한다. ‘그래서 아비와 어미를 내버린다’고 일컬은 것이다. ‘혹은 왕 및 또한 두 가지의 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왕이란 유루의 심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여섯 번째의 증상왕은 물들지 않은 여러 진(塵)을 염착하니, 여기에서 염착함이란 어리석음을 말한다”고 [세존께서] 설명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두 가지의 학이란 계도와 견도를 말한다. 그래서 ‘또한 왕과 두 가지의 학’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이미 다섯 호랑이를 해쳤다’고 함은, 세존께서는 진에가 마치 저 흉악하고 무자비한 호랑이와 같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곧 이와 같은 진에의 번뇌는 중생에게 있어 흉악무자비한 것이므로 세존께서는 그것들을 멸진해야만 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섯인가? 다섯이란 숫자로서, 5개(蓋)의 다섯이며, 5하분결의 다섯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버리고 여의어 끊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미 다섯 호랑이를 해쳤다’고 일컬은 것이다.
‘그를 곧 청정한 이라고 한다’고 함에서 탐욕을 다한 이를 바로 정정한 이라고 하며, 진에와 우치를 다한 이를 청정한 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곧 청정한 자이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4를 마친다]
[제5]
만약 이미 다하여서 다시 생겨나지 않으며,
이미 다하여 장차 수증하지[隨] 않는 것이면,
그것은 부처의 무량행으로, 아무런 자취도 없으니,
어떠한 자취가 이어질 것인가?35)
‘만약 이미 다하여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고 함은 결(結)을 멸진하고 남음이 없는 그것을 다한 것을 말한다. 어떤 이에게는 결이 다시 생겨나고 혹은 어떤 이에게는 생겨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게 다시 생겨나는 것인가?
[답] 혹은 그러한 결의 다함에서 물러나는 자이면 다시 생겨난다.
어떠한 이에게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답] 혹은 그러한 결의 다함에서 물러나지 않는 자이면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만약 이미 다하여서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미 다하여 장차 수증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러한 결을 다하지 못하고 남음이 있으면 두 가지 일[二事]36)에 의해 장차 수증하여 현법 중에 있어서 색ㆍ성ㆍ향ㆍ미ㆍ세활을 즐기게 되며, 나아가 몸이 무너지면 괴로움이 있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같은 결을 다하여 남음이 없으면 앞으로 수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다하여 장차 수증하지 않는 것’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것은 부처의 무량행이다’고 했는데, 어떠한 이를 부처라고 하는가?
[답] 그것은 여래로서 남음이 없는[無餘:신역 無學] 지(智)ㆍ견(見)ㆍ명(明)ㆍ각(覺)ㆍ사유를 이미 득도하고 성취하는 이와 같은 자이니, 그러한 이를 부처라고 한다. 즉 두 가지 극단인 상(常)과 단(斷)에 집착함이 있으면, 이것은 불세존의 행이 아니며, 4의지(意止; 念住)가 무량ㆍ무변ㆍ무한한 것, 이것이 불세존의 행이다. 그래서 ‘그것은 불세존의 무량행이다’고 일컬은 것이다.
‘아무런 자취도 없으니, 장차 어떠한 자취가 이어질 것인가’고 함에서 자취란 번뇌를 말한다. 즉 그에게는 더럽거나 혹은 어리석음의 번뇌로서 이어질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아무런 자취도 없으니, 어떠한 자취가 이어질 것인가’라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5를 마친다]
[제6]
만약 우거진[叢] 염오의 줄기[染枝]가 뿌려지더라도,
그것에 장차 수증할 만한 어떠한 애도 없으면,
그것은 부처의 무량행으로, 아무런 자취도 없으니,
장차 어떠한 자취가 이어질 것인가?37)
‘만약 우거진 염오의 줄기가 뿌려지더라도’에서, 우거진 것이란 애를 말한다.
즉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이여, 애라고 할 만한 다발의 물줄기[叢水枝]가 뿌려질 경우, 만약 그것에 여러 중생이 덮히게 되면 은몰하여 음개(蔭蓋)에 얽히게 된다고 나는 지금 설명할 것이다”고 하신 것과 같다.
그렇다면 무엇을 뿌려진다고 함인가?
[답] 이러한 애가 다하지 않고 남음이 있어 뿌려지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5취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다하여 남음이 없으면 뿌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만약 우거진 물듦의 줄기가 뿌려지더라도’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것에 따라 수증할 만한 어떠한 애도 없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애가 다하지 않고 남음이 있으면 두 가지 일에 따라 수증하여 현법 중에 있어서 색ㆍ성ㆍ향ㆍ미ㆍ세활법을 즐기게 되며, 나아가 몸이 무너지면 괴로움이 있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다하여 남음이 없으면 앞으로도 수증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차 수증할 만한 어떠한 애도 없다’고 일컬은 것이다.
‘그것은 부처의 무량행이다’에서, 어떠한 이를 부처라고 하는가?
[답] 그것은 여래로서 남음이 없는 지ㆍ견ㆍ명ㆍ각ㆍ사유를 이미 득도하여 성취하는 이와 같은 자이니, 그러한 이를 부처라고 한다. 즉 두 가지 극단인 단멸과 유상에 집착함이 있으면 그것은 불세존의 행이 아니며, 사의지가 무량ㆍ무한ㆍ무변한 것, 이것이 불세존의 행이다. 그래서 ‘그것은 불세존의 무량행이다’고 일컬은 것이다.
‘아무런 자취도 없으니, 어떠한 자취가 이어질 것인가’에서, 자취란 번뇌를 말한다. 즉 그에게는 더럽거나 혹은 어리석음의 번뇌로서 이어질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아무런 자취도 없으니, 어떠한 자취가 이어질 것인가’라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6을 마친다]
[제7]
이미 밧줄과 그것에 묶여 고귀하게 된 것과
또한 의식 및 그것들과 서로 의존하는 것을 끊고,
깨달아 이미 구덩이를 건너갔으면,
그러한 이를 바로 세간의 범지라고 한다.38)
‘이미 밧줄과 그것에 묶여 고귀하게 된 것을 끊었다’고 함에서 세존께서는 중생들의 고만함을 밧줄의 애[繩愛]라고 표현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수레에 실린 것을 표현하여 고귀한 밧줄에 묶인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중생은 고만함을 일으켜 애에 얽매이게 되었으나, 그것의 소멸을 세존께서는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이미 밧줄과 그것에 묶여 고귀하게 된 것을 끊었다’고 일컬은 것이다.
‘또한 의식 및 그것들과 서로 의존하는 것’이란, 탐욕ㆍ진에ㆍ우치의 세 가지 의식 및 그 같은 의식과 상응하는 각(覺)과 관(觀)을 말한다.
그래서 ‘또한 의식 및 그것과 서로 의존하는 것도 끊었다’고 일컬은 것이다.
‘깨달아 이미 구덩이를 건너갔다’고 하는 것은, 불세존께서는 당연히 무명을 끊었음을 표현한 것이니, 이는 “비구들이여, 어떠한 이를 이미 피안에 이른 자라고 하는가?
답하여 말하기를, 무명의 구덩이를 다하여 남음이 없는 자이다”고 설명하신 것과 같다.
그래서 ‘깨달아 이미 구덩이를 건너갔다’고 일컬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를 바로 세간의 범지라고 한다’는 것은, 범지는 이미 악법을 멸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이를 바로 세간의 범지라고 한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7을 마친다]
[제8]
하나의 근본에 의한 두 가지의 전전(展轉) 및
세 가지 번뇌에 의한 다섯 미광(彌廣)과
여러 바다와 열두 가지 전전이 있으나,
문니(文尼:muni)는 옥초(沃焦)를 건너간다.39)
‘하나의 근본에 의해 두 가지의 전전이 있다’고 함에서 세존께서는 무명을 바로 근본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니, 다음의 게송과 같다.
그밖에 모든 악취와
금세와 후세,
그것들은 무명을 근본으로 하여,
간탐(慳貪) 등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두 가지 전전이란 명(名)과 색(色)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의 근본에 의해 두 가지의 전전이 있다’고 일컬은 것이다.
‘세 가지 번뇌에 의해 다섯 미광이 있다’고 함에서 세 가지 번뇌란 탐음과 진에와 우치이며, 다섯 미광이란 5취로서, 지옥ㆍ축생ㆍ아귀ㆍ천ㆍ인간을 말한다.
그래서 ‘세 가지 번뇌에 의해 다섯 미광이 있다’고 일컬은 것이다.
‘여러 바다와 열두 가지의 전개가 있다’고 함에서 세존께서는 6입(入)을 바다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곧 “해(海)비구여, 바다란 어리석은 범부인의 언설이니, 성전의 바다가 아닌 대수처(大水處), 대수취수(大水聚數)를 말한다”라고 바다에 대해 설명하긴 것과 같다. 즉 안입을 바다라고 하는 것이니, 거기에 색의 회오리 바람[廻使:廻風]이 일 경우, 만약 그가 색의 바람[色使]을 참아내지 못하면 눈의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회오리바람과 함께 하고, 신(神:악귀)과 함께 하며, 나찰과 함께 하게 된다.
이ㆍ비ㆍ설ㆍ신ㆍ의입은 바다이니, 거기에 법의 회오리바람이 일 경우, 만약 그가 법의 바람을 참아내지 못하면 그는 의식의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회오리바람과 함께 하고, 신과 함께 하며, 나찰과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열두 가지의 전전이란 12입을 말하는 것으로, 눈은 색 중에서 전전 상속[廻]하고, 색은 눈 중에서 전전 상속하며, 나아가 의식은 법 중에서 전전 상속하고, 법은 의식 중에서 전전 상속하기 때문에 ‘여러 바다와 열두 가지의 전전이 있다’고 일컬은 것이다.
‘문니는 옥초를 건너간다’고 함에서 옥초란 무한한 생사를 말한다. 즉 그 같은 무학의 문니는 이미 건넜고, 학의 문니는 바야흐로 건너기 때문에 ‘문니는 옥초를 건너간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8을 마친다]
[제9]
믿지 않고, 상주하지 않는 것을 알며,
혹은 나라(那羅)로서 종극[邊際]을 끊고,
음욕을 막고 음욕을 버린 자이면,
그러한 이가 바로 무상사(無上士)이다.40)
‘믿지 않고, 머물지 않는 것을 안다’고 함에서 세존의 제자는 이미 4제를 참답게 관찰하였으므로 나머지 다른 주장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답] 그는 나머지 다른 것은 믿지 않으며, 다만 혹은 부처, 법, 승, 혹은 고ㆍ습ㆍ진ㆍ도만을 믿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주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란 니원(泥洹:nirvāṇa)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곧 “비구들이여, 생겨나지 않고[不生], 상주하지 않고[不住], 현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不有]이 있으니, 무위는 이러한 것에서 장구하고 영원하여 나머지 다른 도에 의해서나 도적(道迹)에 의해 지금 획득하는 일을 얻을 수 없다”고 설명하신 것과 같다. 그래서 ‘믿지 않고 상주하지 않는 것을 안다’고 일컬은 것이다.
‘혹은 나라(nara)로서 종극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그가 온갖 3계의 종극을 끊은 자임을 말한다. 그리고 나라란 명칭이니, 이는 즉 “중생을 나라, 마누사(磨㝹舍, manusa), 셋째 마납바(磨納婆:manava), 넷째 부루사(富樓沙:purusa), 다섯째 복가라(福伽羅:pudgala), 여섯째 기바(祁披:jiva), 일곱째 선두(禪豆:jāntu)라고 한다”고 설명하신 것과 같다. 그래서 ‘나라가 종극을 끊으면’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음욕을 막고, 음욕을 버린다’고 함에서 음욕을 막는다고 함은 형상에 대한 음욕을 멸진하는 것을 나타내며, 음욕을 버린다고 함은 목숨에 대한 음욕을 멸진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음욕을 해지고, 음욕을 막는다’고 일컬은 것이다.
‘그러한 이가 바로 무상사이다’고 함에서 그러한 이는 제일사(第一士)이며, 대사(大士)ㆍ묘사(妙士)ㆍ고사(高士)ㆍ무상사이다. 그래서 ‘그러한 이는 바로 무상사이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9를 마친다]
[제10]
36수(水)가 있으니,
의식[意]에서 흘러나와 배로 된 것이며,
그러한 흐름에 따르게 하는 것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으니,
각을 희구함[望覺]으로써 나오게 된 것이다.41)
36수에서 수(水)란 서른여섯 가지의 애종(愛種)을 말한다.42) 그래서 36수라고 일컬은 것이다. ‘의식에서 흘러나와 배로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의식에서 생겨나 의식을 위주[首]로 하고 의 식에 속박된 것을 말하며, 배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증가하며 넘쳐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의식에서 흘러나와 배로 되었다’고 일컬은 것이다.
‘그러한 흐름에 따르게 하는 것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고 함에서 두 가지 견해란 단멸견과 유상견을 말한다.
즉 이것들은 그러한 흐름으로 하여금 지옥ㆍ축생ㆍ아귀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그러한 흐름에 따르게 하는 것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고 일컬은 것이다.
‘각을 희구함으로써 나오게 된 것이다’에서, 각에는 욕각ㆍ진에각ㆍ해각(害覺)의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모두 욕망에서 생겨나 욕망을 위주로 하고, 욕망에 속박된 것이기 때문에 ‘각을 희구함으로써 나오게 된 것이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10을 마친다]
[제11]
신(身)악행을 버리고
구(口)악행을 버리고,
의(意)악행도 버리며,
더럽고 잡다한 상(想)을 버려야 한다.43)
‘신악행을 버린다’고 함은 신체적인 세 가지 악행의 소멸을 나타낸다. 그래서 ‘신악행을 버린다’고 일컬은 것이다. 아울러 ‘구악행을 버린다’고 함은 언어적인 네 가지 악행의 소멸을 나타낸다. 그래서 ‘구악행을 버린다’고 일컬은 것이다.
‘의악행을 버린다’고 함은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악행의 소멸을 나타낸다. 그래서 ‘의악행을 버린다’고 일컬은 것이다.
‘여러 더러운 잡다한 상을 버려야 한다’고 함은, 만약 그 밖의 다른 여러 잡다한 상을 알았으면, 멸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여러 더러운 잡다한 상을 버려야 한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11을 마친다]
[제12]
만약 만동자여, 보이는 것[見]은 보는 것만으로 족함이 있으며, 들려지는 것[聞]은 듣는 것만으로 족하며, 알려지는 것[知]은 아는 것만으로 족하며, 인식되는 것[識]은 인식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만약 이것이 아니고, 만약 이러한 것이 아니면, 만약 그것이 아니고, 만약 그러한 것이 아니라면, 만약 하에 태어나지 않고, 만약 상에 태어나지 않고, 만약 두 가지의 중간에 태어나지 않게 되면,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종극이다.44)
‘만동자여, 혹은 보이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 족함이 있다거나 혹은 없다’고 함에서 어떠한 이에게 족함이 있는 것인가?
[답] 만약 눈이 색을 보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면, 이러한 이를 족함이 있는 자라고 한다.
어떠한 이에게 족함이 없는 것인가?
[답] 만약 눈이 색을 보고 번뇌를 일으키면, 이러한 이를 족함이 없는 자라고 한다.
‘들려지는 것은 듣는 것만으로 족하며, 알려지는 것은 아는 것만으로 족하며, 인식되는 것은 인식하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또한 이와 같다.
그와 같이 만동자여, 보여지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 족함이 있으며, 들려지는 것은 듣는 것만으로 족하고, 알려지는 것은 아는 것만으로 족하고, 인식되는 것은 인식하는 것만으로 족하며, 이것은 번뇌에 물든 것도, 혹은 더러운 것도, 혹은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만약 이것이 번뇌에 물든 것도, 혹은 더러운 것도, 혹은 어리석은 것도 아니라면, 그는 속박되지도 않는다. 만약 그가 속박되지 않으면, 그는 하의 욕계에도 태어나지 않으며, 상의 무색계에도 태어나지 않으며, 두 가지의 중간인 색계에도 태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종극[苦邊]인 것이다.
여기에서 괴로움이란 5성음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종극이며, 더욱 나아간 종극[後邊]이며, 최후의 종극[最後邊]이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괴로움의 종극이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12를 마친다]
[제13]
마사(磨舍)ㆍ두사(兜舍)ㆍ승세마(僧貰磨)ㆍ살피다라비비율다(薩披多羅毘比栗多),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종극이다.45)
마사란 탐욕도. 혹은 진에도, 혹은 우치도 희망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마사라고 말한 것이다.
두사란, 불도를 기뻐하고, 좋은 설법을 기뻐하고, 성스러운 승을 따르고, 고ㆍ습ㆍ진ㆍ도를 분별하고, 색은 무상하며, 통ㆍ상ㆍ행ㆍ식도 무상하다고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사라고 말한 것이다.
승세마란,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을 제압하여 종식시키고, 진에나 우치가 생겨나도 그것을 제압하여 종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승세마라고 말한 것이다.
살피다라비비율다.[曇蜜羅國의 말이다l란, 모든 욕계심에서 벗어나고, 모든 색ㆍ무색계심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살피다라비비율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종극이다’고 함에서 괴로움이란 5성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종극이며, 더욱 나아간 종극이며, 최후의 종극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종극이다’라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13을 마친다]
[제14]
몸은 물거품이 모인 것과 같은 것으로 알고,
법은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라고 느끼며,
마구니의 꽃과 작은 꽃화을 꺾어버리면,
가서 죽음의 왕을 만나지 않으리.46)
‘몸은 물거품이 모인 것과 같은 것으로 안다’고 하는 것은, 그 같은 물거품은 힘도 없고, 약하고, 허망하고 공한 것으로서, 견고하지 않듯이, 5성음도 역시 그러하여 힘도 없고, 약하고, 허망하고 공한 것으로서, 견고하지 않다. 그래서 ‘몸은 물거품이 모인 것과 같은 것으로 안다’고 일컬은 것이다. ‘법은 아지랭이와 같은 것으로 느낀다’고 함에서 아지랭이와 같다고 함은 아지랭이가 햇빛에서 나와 오래 있지 않으며, 지극히 짧은 시간도 머물지 않으며,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홀연히 존재하며, 설사 존재하더라도 바로 멸진해 버리는 것처럼, 5성음도 역시 그러하다.
즉 이것은 지극히 짧은 시간도 머물지 않으며,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흘연히 존재하며, 설사 존재하더라도 바로 멸진하고 만다. 그래서 ‘법은 아지랑이와 같은 것으로 느낀다’고 일컬은 것이다.
‘마구니의 꽃과 작은 꽃을 꺾어버린다’고 함에서 마구니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음마(陰魔)와 구마(垢魔)와 사마(死魔)와 자재천자마(自在天子魔)가 바로 그것이다. 곧 세존께서는 그것을 끊기 위해 견제단을 설하여 꽃의 번뇌를 멸진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작은 꽃이란 사유단의 번뇌를 말한다. 그래서 ‘마구니의 꽃과 작은 꽃을 꺾어버린다’고 일컬은 것이다.
‘가서 죽음의 왕을 만나지 않는다’고 함은, 이와 같이 견제단과 사유단의 결을 이미 멸진하여 남음이 없으면 자재천자는 자신의 뜻에 따라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가서 죽음의 왕을 만나지 않는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14를 마친다]
[제15]
강당에서 만약 이러저러한 것을 지키면,
여러 각(覺)으로써 스스로를 기쁘게 만족시키고,
세간의 흥망과 성쇠를 알아
선한 마음은 모두 해탈하리라.47)
‘강당에서 만약 이러 저러한 것48)을 지킨다’고 함에서 강당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공(空)과 무원(無願)과 무상(無相)이다. 즉 이것은 내적인 여러 가지를 소연으로 하여 외적인 소연을 낳는 것이기 때문에, ‘강당에서 이러 저러한 것을 지킨다’고 일컬은 것이다.
‘여러 각(覺)으로써 스스로를 기쁘게 만족시킨다’고 함에서 각이란 지(智)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즉 총명한 지혜가 이루어지면, 불도와 착한 설법을 좋아하며 성승(聖僧)을 따른다. 또한 고ㆍ습ㆍ진ㆍ도를 간별하여, 색은 무상이고, 통ㆍ상ㆍ행ㆍ식도 무상이다고 묘하게 생각하며, 스스로가 신ㆍ구ㆍ의행을 갖추고 성취하게 된다. 그래서 ‘여러 각으로써 스스로를 기쁘게 만족시킨다’고 일컬은 것이다.
‘세간의 흥망과 성쇄를 안다’고 함에서 세간이란 5성음을 말한다. 즉 여러 비구들은 흥망과 성쇄를 두루 관찰하여, 이 같은 것은 색이며 이 같은 것은 색의 습(習)이며, 이 같은 것은 색의 진(盡)이며, 이 같은 것은 통ㆍ상ㆍ행ㆍ식이며 이 같은 것은 식의 습이며, 이 같은 것은 식의 진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세간의 흥망과 성쇠를 안다’고 일컬은 것이다.
‘선한 마음은 모두 해탈한다’고 하는 그것은 뜻[義]을 사유하고 법을 사유하고, 선을 사유하고, 묘(妙)를 사유하여 모든 존재의 길[有道]을 몰함으로써 지금 해탈하고 장차 해탈할 것이며 이미 해탈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마음은 모두 해탈한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15를 마친다]
[제16]
해탈하여 혹은 이미 떨어졌더라도,
탐욕하면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미 안은처(安隱處)를 획득한 자이면,
즐거움에 의해 즐거운 곳으로 가 이르게 되는 것이다.49)
‘해탈하여 혹은 이미 떨어졌더라도 떨어진다’고 함에서 해탈이란 욕계로부터의 해탈을 말하며 이미 떨어졌다고 함은 색계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색계 중의 5음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해탈하여 혹은 이미 떨어졌더라도 떨어진다’고 일컬은 것이다.
‘탐욕하면 다시 되돌아온다’고 하는 것은 세간도를 가졌더라도 번뇌를 다하는 성지(聖智)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그는 자신을 즐기고 자신만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다시 지옥ㆍ축생ㆍ아귀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탐욕하면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미 안은처를 획득한 자’라고 함에서 ‘획득한 자’란 부처의 제자를 말하며, 안은이란 니원으로서, 그들은 곧 그것을 즐기는 자임을 말한다. 그래서 ‘이미 안은처를 획득한 자’라고 일컬은 것이다. ‘즐거움에 의해 즐거운 곳으로 가 이르게 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은 도의 즐거움[道樂:신역 無餘依涅槃]에 의해 니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즐거움에 의해 즐거운 곳에 가 이르게 된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제16을 마친다]
[제17]
만약 뿌리가 없다면 껍질도 없고,
잎도 없거늘, 하물며 가지가 있겠는가?
그는 용맹하게 속박으로부터 해탈하였으니,
누가 감히 비방할 수 있겠는가?50)
‘만약 뿌리가 없다면 껍질도 없다’고 함에서 세존께서는 무명을 뿌리로 표현하신 것으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러한 여러 악취로서
금세와 후세에 있어
그들은 무명을 근본으로 하여
간탐(慳貪) 등을 낳게 된다.
껍질이란 4식주(識住)로서, [만약 뿌리가 없다면] 그것이 다하지 않고 남음이 있는 것을 바랄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만약 뿌리가 없으면 껍질도 없다’고 일컬은 것이다. ‘잎도 없거늘 하물며 가지가 있겠는가’에서 세존께서는 아만을 잎으로 표현한 것이니
“비구들이여, 무엇을 잎을 태운다고 함인가? 답하여 말하면 아만을 다하여 남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고 설명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가지란 애(愛)를 말하는 것이니,
“비구들이여 나는 지금 애라고 할 만한 물의 줄기가 뿌려질 경우, 여기에 중생이 덮이게 되면 은몰하여 음개(蔭蓋)에 얽히게 된다고 설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래서 ‘잎도 없거늘 하물며 가지가 있겠는가’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는 용맹하게 속박으로부터 해탈하였다’고 함에서 용맹이란 부처의 제자가 용맹한 것을 말한다. 즉 그들은 지혜를 성취함으로써 악법인 탐욕ㆍ진에ㆍ우치의 세 가지 속박을 제거하여, 지금 해탈하고 이미 해탈하였고 앞으로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용맹하게 속박으로부터 해탈한다’고 일컬은 것이다.
‘누가 감히 비방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이는 칭탄하고 예찬해야 하지 헐뜯거나 비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헐뜯거나 비방하면 많은 죄를 받을 것이니,
이는 세존께서,
“만약 헐뜯어야 할 이를 바로 예찬하고 혹은 예찬해야 할 이를 바로 헐뜯게 되면, 입에는 재앙이 초래되고,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고 설명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약 뿌리가 없다면 껍질도 없고 잎도 없거늘 하물며 가지가 있겠는가. 그는 용맹하게 속박으로부터 해탈하였으니, 누가 감히 비방할 수 있겠는가”고 일컬은 것이다.
[이상 게품(偈品) 제44를 마친다.]
[범본 210수로, 진어 3,957언]
견(見)건도를 마친다.
[이상 팔건도론은 모두 44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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