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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니엘 영재교육원 원문보기 글쓴이: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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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장 결혼에 소명 있습니까? : 소명, 결혼, 그리고 독신
2장 신들의 음모 : 연애와 사랑
3장 가엾은 새 한 마리 : 섬김과 목회적 위치
4장 양수리에서 생긴 일 : 인격, 고난, 그리고 성품
5장 웃기는 내핍 생활 : 물질, 동료애, 그리고 노후
6장 자식 사랑에 영력이 마른다 : 자녀 사랑과 신앙
7장 입술은 거룩과 작별하는가 : 말과 경건
8장 깊은 산, 맑은 개울은 : 기도 생활, 영성, 그리고 직업
9장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 : 결단과 용기
10장 그가 홀로 우는 밤에 : 부부애와 고독, 인격적 결합
11장 가혹하리만치 아픈 날들 : 성적 타락화 회복
12장 꿈이 있습니다 : 충성, 부활과 소망
저자 소개 김남준 목사
총신 대(M. Div. Th. M. D. cand)공부하였으며 대신대학교 신학부에서 전임강사와 조교수를 지냈다. 서울 방배동에 있는 열린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는 저자는 특별히 조국 교회의 참된 부흥과 그리스도인의 영적 각성에 관심을 가지고 설교와 집필 및 강연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십자가를 경험하라(생명의 말씀사),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꽃처럼 살아야 한다. 영적 회복은 불꽃처럼 번져야 한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이상 두란노 출판),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규장)등 다수가 있다.
1장 결혼에 소명 있습니까?
소명. 결혼. 그리고 독신
고통하는 목회자들
한 목회자가 뜻박에도 제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속해 있는 시찰회에 속한 교회들 중 1/3정도가 목회자의 아내 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며, 남편들이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때문일까요? 목회자나 그의 아내 모두 특별히 남다른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목회의 길을 들어선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이 34,000여 가지나 된다는데, 그 모든 것을 마다하고 목양의 길로 들어선 것은 두 사람 모두 세상의 영광이나 부유한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놀라워” 어찌하든지 주님께 순종하고 영광 돌리려고 고난이 기다리는 이 길을 들어선 것이 아닙니까? 영혼을 사랑하고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데 이바지하는 일을 보람으로 알겠다는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그 고달프고 가난한 신학공부 시절을 함께 지나고, 사람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전도사 생활을 뒷바라지하며, 목회의 길까지 들어선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물론 그들의 섬김을 받고 있는 교회도 그 섬김 때문에 도무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사명감만으로는…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 사역에 있어서 소명이나 동기는 말할 수 없이 귀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승리하는 목회를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역자로서의 생애는 위대한 일을 꿈꾸었다고 해서 그렇게 마감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많은 배웠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롭게 섬기는 것도 아니고, 많은 준비를 갖췄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소명을 주신 이도 주님이시고, 목회 사역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지만, 그런 준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 죽은 사람들!
저는 때때로 심령이 완전히 죽어 있는 목회자와 그의 아내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영력이나 영성은 커녕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한없이 힘겹게 느껴질 정도로 “거의 죽게 된” 목회자 부부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은 우리를 매우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들 부부는 그들이 목양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만큼이나 회복될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체험하고 어린아이처럼 감격하고 즐거워하는 영혼의 회복과 함께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찌는 회개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더욱이 조국 교회에서 목회자와 그의 아내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교만한 부류의 사람들로 통합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쉽게 가르침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를 돌아보는 성찰이 너무나 결핍되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심지어 누군가의 지적대로 성경에 의해서도 교정받기를 거절할 정도로 자기의 주관이나 목회를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자기 주장이 뚜렷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회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학적인 견해가 정립되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하는 방법을 따라서 이리저리 교회를 몰고 가는 모습을 보면 이 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착각은 자유
너무나 많은 목회자와 그의 아내들이 자신들의 목회 사역의 동기가 정화되지 못하거나 신학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사고 속에서 섬기거나 인격적으로 다듬어지지 못한 데서 오는 고통을 모두 주님을 위해서 받는 영광스러운 고난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 착각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고난을 받는 인생을 사느냐가 아니라, 그 고난이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고난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정작 상 받을 고난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 중에 정말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 주님 때문에 받는 순수한 고난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주님을 위해 가치 있는 고난, 아픔을 겪을수록 하나님께로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복된 시련을 당함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자업 자득의 고통으로 소중한 인생을 낭비합니까?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모든 아픔이 상 받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난을 자랑으로 알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고난 그 자체를 가치 있게 생각하려고 이 길로 들어선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섬기는 밀알이 되려고 이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하나님을 기뻐하고 좋으신 주님을 찬송하며 교회와 성도들을 섬길 시간밖에는 남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삶의 구석구석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데 드려지고, 우리의 인생 중 보다 많은 시간이 하나님 아버지께만 바쳐지는 삶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 무지의 어두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와 그 아내들이 현장에서 당하고 있는 고통의 대부분은 무지와 죄로 말미암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미친 놈의 덩크슛
우리의 목회 사역을 생각해 보십시오. 열정만 있으면 저절로 목회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역에는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규칙도 함께 부여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여기에 농구 선수가 있습니다. 키가 얼마나 큰지 점프할 필여도 없이 서서 덩크슛이 가능합니다. 또 발이 얼마나 빠른지 공을 몰고 달려가면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스피가 있는 선수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슛은 얼마나 길고 정확하지 자기 골대에서 상대방 골대를 향하여 공을 던져도 백발백중입니다. 좋은 유니폼과 운동화도 신었고 볼도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농구 규칙을 전혀 모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목회자 아내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이 중요합니다만 신앙의 정절이나 결단도 중요하고 인격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시급한 것은 성경이 목회자의 아내의 삶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는가입니다. 그의 사역의 원리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규정하느냐 입니다.
그는 육상 선수와도 같습니다. 자기의 트랙에 들어서야 합니다. 목회자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트랙에 넘나들면서 달리면 실격입니다. 그가 그런 식으로 더 빨리 잘 달릴수록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교회의 영적인 상황도 나빠집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목회 사역에 몸바치면 몸바칠수록 하나님과 교회와 남편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이 모든 염려에 대한 대안의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목회자의 아내를 향한 풍부한 하나님의 교훈과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과 소명은 거기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결혼이 중요하다 - 이중적인 태도를 버리고
목회의 길을 들어선 선배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기 부인을 신학 공부를 한 동료들 중에서 고르기를 꺼려합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보기에는 대개 두 가지 이유인 것 같습니다. 첫째는 너무 은혜로운 자매는 재미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학의 내막을 아는 자매를 만나서 참견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아내 될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지 사모 될 사람하고 결혼합니까?”
이런 식의 이중적인 태도는 인생에 있어서 결혼이라는 사건 자체를 얼마나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소명을 받고 목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뜻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사람의 남녀가 거룩한 목회 사역에로 소명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은 주님만을 사랑하는 인격입니다. 우리는 우리 좋자고 결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 부부의 결혼 생활이 우울하거나 남다르게 번뇌에 싸일 필요는 없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우울한 결혼 생활이 그들의 경건을 입증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결혼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결혼까지도 주님의 것이고 주님과 교회와 영혼들을 섬기는 데 있어서 유용한 도구로 바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결혼의 행복과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난체하지 말고
목회의 길을 가는 사람, 그는 자기와 사랑에 빠진 한 여자와 결혼하는 거싱 아니라 함께 주님을 섬길 동역자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일찍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잘난체하려는 위험한 기질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들에 대한 일종의 우월감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신학을 공부한 자매들을 피함으로써 그러한 우월감과 목회의 영역에서 전문가적인 위치를 가정에서도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고 방식이 얼마나 가련한 것입니까?
목회의 길을 걷는 사람의 권위는 학문이나 전공의 유무가 아니라 거룩입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하고 하나님께 특별히 붙들려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을 인정해주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냐, 사랑이냐
저는 주위에서 젊은 시절 목회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주님의 인도를 받는 대신 제 소견에 옳은 대로 결혼했다가 낭패를 만나고 지리멸렬한 목회로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목회자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회심의 여부조차 불분명한 사람을 목회의 파트너로 생각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랑을 믿은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목회자의 아내, 이 길은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특별하게 부르심을 받고 준비된 사람들만이 가는 길입니다. 요즘 목회자 후보생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결혼에 대한 안일한 태도는 미래의 교회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 관한 규칙과 기준을 성경에서 구하기를 게을리하는 사람들의 희생은 말할 수 없이 크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영력으로도 안되는 것
18세기 영국의 영적 대각성과 부흥에 귀하게 쓰임받았던 존 웨슬리는 이 점에 있어서 좋은 표본이 됩니다. 그렇게 영력있는 설교로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고 탁월한 지도력으로 감리교를 창설한 그 주인공이 아내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일생을 살았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의 아내인 바제일은 남편의 영적인 충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남편을 내조하지 않았고, 그것이 웨슬리에게 두고두고 가시가 되었습니다. 남편에게 존경과 사랑은 커녕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어떤 때는 그 부인이 거룩한 주의종을 구타하였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합니다. 가족 관계, 특히 부부 관계는 목회자 개인의 위대한 영력으로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맺는 말
주님이 친히 세우진 제도가 두 가지 있습니다. 즉 가정과 교회입니다. 그리고 두 제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두 기관은 모두 거룩한 신적인 기관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라는 제도자 거룩하다고 해서 교회 내부가 저절로 거룩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눈물이 있는 기도의 헌신과 불 같은 성령의 역사가 그 안의 사람들을 늘 새롭게 해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리 거룩한 제도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라 할지라도 저절로 거룩해질 수는 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가정이든 평신도의 가정이든, 하나님께서 은혜의 수단들을 통하여 부부를 거룩하고 신령하게 만들어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만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기여하는 가정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목회자 부부가 사역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며 살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장 신들의 음모
연애와 사랑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살아도 영원을 향하여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인생에 대하여 범람하는 경박한 견해들에 놀아나서는 안됩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자와 함께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가 살아가는 모든 삶과 행하는 일은 자신을 목회자의 아내로 부르신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도 아내에 대한 사랑에 바쳐진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누구입니까? 목회자의 아내는 하나님께 바쳐진 한 남자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소명을 따라 ‘돕는 베필’로서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목회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의 혼인 결합이 주님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결혼은 단지 시집가고 장가간 것일 뿐입니다. 결혼은 그들에게 있어서 결코 목적 자체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부부인 동시에 동역자로 만났습니다.
그들에는 함께 사랑하고 즐기며 사랑가는 것 이상의 공통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다가 불꽃처럼 산화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두 사람의 섬김을 통하여 밤하늘에 섬광같은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거룩한 증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혼은 그러한 일을 위한 중간 성취일 뿐입니다.
목회는 밥벌이?
저는 목회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부수어 버리기까지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에 열심을 내기보다도 부부가 아기자기하게 사랑을 나누는 일에 마음을 빼앗긴 젊은 목회자 부부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그러한 삶을 성경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믿는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한 가지 계명에 충성하는 중이라는 희극적인 사고 방식 때문입니다. 무지의 어두움 위에 교만한 고집까지 덮쳐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목회자 부부의 원만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교회의 질서가 무너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 떼들의 마음이 나뉘고 상처를 받아도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의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그의 필요한 고통과 인내의 비용을 교회와 교인들이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회심치 아니한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이 하는 목회의 독입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그러나 목회자 아내의 삶은 그러한 뚜렷한 회심이나 불붙는 열정을 가진 것으로 모두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의 아내에 대한 정확한 자리 매김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는 목회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고, 목회자의 아내는 그렇게 바쳐진 사람을 매우 고유한 자리에서 홀로 돕도록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충성된 삶을 살았는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살아간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하였는지에 의하여 평가받습니다.
그들은 함께 한 목회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름받고 서야 할 자리는 같은 자리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소명에 알맞는 고유한 자리가 있습니다.
열심 있는 목회자의 아내들은 종종 발견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서서 섬기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목표는 성공이 아니다
헌신된 결심으로 목회의 길에 들어선 부부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그들의 결합과 삶의 목표가 목회의 성공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일에는 성공하고 자신에게는 실패하는 목회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목표가 목회의 성공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미친 듯이 부부가 목회에 열중하다가 중형 교회가 된 다음에 남편은 타락하고 아내는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교회에 거치는 돌이 된 목회자 부부들을 몇몇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심을 자신들도 자랑했고 다른 사람들도 부러워했습니다. 미친 듯이 열심히 일했고 교인들도 많이 모였습니다. 몸부림치며 매달려서 교회를 건축했고 교인 수는 늘어서 중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은 자신들을 휘몰아 갈 다급한 목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탈진했습니다. 그 후에 영적인 공황이 찾아왔습니다. 넉넉해진 물질 생활은 타락을 위한 뒷돈이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목회자 부부의 삶의 목표가 잘못 놓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의 목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회의 길로 부름을 받는 것은 먼저 일 앞에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목회보다 더 큰 소명
여러분은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서 실패한 시몬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목회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을 목양으로 부르시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목회자 부부의 목표는 교회 성장도 아니고, 큰 교회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우선적인 부르심은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최우선적인 소명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목회를 하면서 더욱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져 가는 거룩한 기쁨이 있습니까? 여전히 주님을 닮아 가는 거룩한 기쁨이 있습니까? 넘치도록 일하나 일에 치이는 대신 은혜에 잠기는 영광스러운 기쁨이 있습니까? 시련으로 가득 찬 목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 갑니까? 십자가 사랑의 감격이 늘 새로움으로써그 사랑이 여러분을 살게 합니까? 성공에 미치는 것과 주님께 미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다
두 번째로 전제되어야 할 것은 목회를 하려는 목회자 부부 자신들입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체험하고 삶의 동기가 정화되고 목표가 거룩해질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사역에 적합하도록 자신을 부수는 열심과 자기 부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불붙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순종하지 말라
그에게는 목회자인 남편을 돕는 것이 소명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을 돕도록 부름받았으나 그 직무는 남편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목회자 아내에게 있어서 남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이 미덕은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목회자와 교회의 부당한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을 목회자의 아내로 부르신 분은 당신의 남편이 아닙니다. 생활비를 주는 교회도 아닙니다.
만약 목회자인 당신의 남편이 그리스도 밖에서 분량을 넘어서는 처사와 요구를 함으로써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하도록 한다면, 목회 사역을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단호하게 대처하고 가정을 지킬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목회보다 중요한 것
얼마 전 목회 전문 잡지에 목회자 가정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것은 아내를 때리는 남편을 직업별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에서 목회자가 상위권에 올라 있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가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보다 아내를 더 잘 때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이러한 처지에 있다면 단호하게 밝힙니다. 거기서 그렇게 매맞고 사는 것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상 받을 일도 아닙니다. 당신이 거기서 인내하는 것은 남편의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회하는 교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가정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일을 위하여 부름받았습니다. 목회를 그만두더라도 그런 일은 종식되어야 합니다.
혼자 목회자일 수 없다
목회자가 일단 결혼을 한 이상, 목회자의 아내의 도움 없이는 결코 혼자가 목회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목회자의 아내는 확실히 ‘에제르’의 응원군(이 말은 전쟁에서 볼 수 있는 응원군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서 패배의 위기에 있을 때 결정적으로 찾아와서 승리를 이끌어 내는 군대를 가리키는 말이다)입니다. 목회자는 가정을 가졌으나 목회사역을 위하여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녀는 먼저 남편의 사랑에 사로잡히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에 강력하게 사로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가 거듭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특별한 사람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일에 요긴하지만, 목회자의 아내가 목회자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매우 특별히 준비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모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영광을 받는 일에 있어서는 목회자인 남편에게 가리워지고, 남모르게 고난을 받는 일에 있어서는 남편 앞에 서야 하는 때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더욱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요구되고, 주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며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맺는 말
당신이 목회자의 아내입니까? 정말 어두운 시대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도 선지자처럼 살고 싶으십니까? 이 땅이 우리의 목회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까?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마음이 뜨겁습니까? 영혼들이 우리의 섬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생각할 때 여러분의 가슴이 기쁨으로 뜁니까?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는 세상을 향한 아픔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그렇지 않다면, 이 책을 덮으십시오. 더 이상 읽지 마십시오. 이 책은 당신이 읽을 책이 아닙니다.
3장 가엾은 새 한 마리
섬김과 목회적 위치
새 한 마리가
어느 날 제 방으로 연결된 환기통을 타고 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습니다. 나갈 곳을 찾지 못한 어린 새는 결국 좁은 방을 이리저리 날아 다니다가 벽에 부딪혀 책꽂이 뒤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새를 밖에다 도로 놓아 주기 위해서 전도사님 한 분과 여러 개의 책꽂이 들을 드러내고, 책을 온 방에 하나 가득 쏟아뜨리고 법석을 떨었습니다. 온 방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다음에 새를 창문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어린 새는 팔딱거리는 가슴을 안고 뜻밖에 찾은 자유를 타고 훨훨 날아갔습니다.
그때 저는 이상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날아 들어와 책꽂이 뒤에 할딱거리며 숨어 있는 녀석은 참 귀엽게 생긴 어린 새엿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닐 때는 그렇게 예쁘고 아름다워 보이던 새가 방안으로 날아 드니 그렇게 징그럽고 불쾌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쥐가 방안에 들어와서 어딘가 숨었을 때의 그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그 새를 책꽂이 뒤에서 찾아내서 밖으로 내어보낸 것은 그 새를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하늘을 날아야 할 새와 방에 있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징그럽고 불쾌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예쁘고 가엾은 새가 더렵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의 역사는 질서와 무질서의 싸움입니다. 인간이 타락하면서 제일 먼저 잃어버린 것은 질서와 조화에 대한 감각이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그는 즉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여야 할 질서에 대한 감각을 잃었습니다. 겸손하게 한없는 경외심으로 경배하여야 할 하나님께 말대꾸하고 대들기를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행했습니다.
그 후로 성경의 역사는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질서를 자비와 능력으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열심과 거기에 반항하는 인간들과의 갈 등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다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러한 질서가 회복된 곳입니다.
두 가지 실수
목회자 아내들의 삶을 보면서 새삼 이런 진리들을 느끼게 됩니다. 열심도 있고 능력도 있고, 또 순수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목회 현장에서는 목회자 아내의 그러한 장점이 역사하고 있는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결국 타당한 원리를 따라 정확한 자리를 지키며 사는 삶이 불붙는 열심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목회자의 아내들 중에 의외로 무기력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보고 놀랍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적도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겠다는 거룩한 갈망도, 영혼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나 사역의 목표도 분명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아내로 데리고 살면서 목양의 길로 들어선 사역자들에게 저는 한없는 연민을 느낍니다. 그런 목회자들은 타고 달려야 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대신, 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목회자에게 있어서 최대의 실수는 목회의 길에 들어선 것이고, 두 번째 실수는 소명이 없는 아내와 만난 것입니다
정직한 욕망
개인적으로는 별로 문제가 없어 보이는 헌신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인데, 목회자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 열심과 헌신이 교회에 고통이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보면서 새삼 놀라게 됩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교회 일에 대한 열정과 아내의 일에 전념하는 것 사이에서 조화를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께서 남편의 목회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섬김을 통하여 남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에 가장 큰 만족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남편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란?
한 목회자의 아내가 되는 순간, 그는 남편의 목회를 자기 일처럼 여기며 그를 전심으로 도우며 합력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을 기뻐하여야 합니다.
자신은 드러나지 아니하여도 그녀의 즐거움은 자기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라고 믿으며 궁극적인 상급과 위로가 하나님께만 있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쁘게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원의 원천은 풍부한 영적 생활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영적 삶의 자유함 없이 개인의 자질이나 의무만으로써 목회 사역을 감당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로서의 삶의 자원은 단지 남편의 사랑이나 교인들의 인정이나 성취욕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도움이 되는 요소일지는 모르나 궁극적인 자원일 수는 없습니다.
잃어버린 중심축
사모는 모든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섬김이 중심축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봉사의 최종적인 관심은 하나님께서 남편을 통해서 충분히 일하실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힘들여 섬기면 섬길수록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봉사하면 봉사할수록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은혜에 넘치기보다는 일에 치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사역의 중심축을 남편이 아니라 일 자체에 두었던 사람은 일에 대한 집착이 크니까 그 일로부터 격리되었을 때 자신을 지탱할 존재의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것 같은 영적인 위기를 맞게 됩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교회와 남편의 필요에 따라 열심히 목회를 도와 봉사하면서도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섬기면 섬길수록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남편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무슨 일을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어떻게 열심히 섬기든지 이러한 중심축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더디 가는 목회 같지만, 그것이 교회도 살고 목회자 부부도 사는 길입니다.
일에 대한 집착과 리더십
목회자에게도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만, 목회자의 아내가 과도하게 교회 일에 매달리는 것은 섬김 자체 안애서 내재하는 성취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일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업적 지향적인 목회자의 아내는 게으른 무지에 빠진 사람에 버금가게 나쁘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이러한 위험에 빠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리더십에 대한 오해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자와 함께 목회를 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함께 한 교회의 지도자가 되도록 부름받은 것은 아닙니다. 목회에 있어서 자신의 위치 설정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낳습니다. 그릇된 자기 설정은 그의 순수한 마음과 섬김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고통 속에 몰아넣기 쉽습니다. 잊지마십시오.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부르심을 입었으나 함께 교회의 지도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필요로 해도 지도자로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 손으로 교회를 붙드시기 전에 먼저 당신에게 사로잡힌 한 목회자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돕게 하십니다. 목회자의 아내도 그렇게 부름받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관계의 결핍이
목회자의 아내들이 과도히 일에 집착하는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관계에서 오는 결핍 때문입니다. 때로는 무능한 남편 대신 자신이 더 잘 섬김으로써 교회에 대하여 보상하고자 하는 심리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또 가정을 돌보는 일에 취미를 잃어버린 데서 기인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의 아내를 가정에서 몰아낸 것이 하나님을 위한 뛰어난 열심 때문일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추론은 착각입니다. 가정 일보다 교회 일이 더 재미있고 성취감도 있고 사회적인 만족도 높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때로는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지도자인체하는 태도가 그로 하여금 더욱 자기를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도록 부추기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에 있어서 얼마나 유능하고 성취적이냐 하는 문제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유능함과 성취의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마음을 다하여 목회자의 아내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바는 이것입니다. 남편에게 인정받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남편이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힌 목회자일수록 그가 원하는 섬김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섬김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목회자의 아내인 당신의 인생의 성패에 있어서 최대의 질문입니다.
“당신의 남편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결단을 하고 남편을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남편이 만족하는가?
남편이 하나님께 바르게 목회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라면, 아내인 당신을 만족스러워하지 않고 있다면 당신의 삶 역시 성공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들은 목회자와 함께 목회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때로는 일로써 남편을 감동시키려는 충동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태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일을 통해서 남편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는 아내는 언젠가 자기 곁에 있던 남편은 사라지고 일에 치인 목회자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늘 교인들을 가르치고 싶어하고, 뭔가를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여 싶어하는 목회자의 아내는 겸손한 섬김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남이 할 수 있는 일에 열심을 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세워 줌으로써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에 자기를 매몰시키는 데서 성취감을 느끼는 대부분의 목회자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만 주신 고유한 자리를 떠난 사람들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맺는 말
목회자의 아내, 그는 단지 한 남자의 아내일 수만도 없고 교회의 지도자는 더욱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평범해서는 안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다른 지도자들보다도 더욱 뛰어난 소명으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이 세상에 그 사람들처럼 독특한 자리에서 세움을 받은 특별한 일꾼들이 없습니다. 그는 일생을 단지 한 사람의 아내가 아니라, 선지자처럼 핏빛 인생을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기의 고유한 자리가 있습니다. 자기 자리에 서 있는 목회자의 아내가 가장 아름답슴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서 섬기도록 부르셨기 때문에….
4장 양수리에서 생긴 일
인격, 고난, 그리고 성품
질병적 결함과 소명
우리의 목회 사역은 사람들을 돌보는 섬김입니다. 그러므로 불타는 소명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평균적인 사람들 속에서 용납될 수 있는 성품입니다.
뛰어나게 거룩하고 순결로 다져진 성스러운 인격은 오랜 경건과 연단의 결과입니다. 그런 인격과 품성을 가진 목회자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소명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진실은 아닙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부름받았을 때 모두 고매한 인격을 가지신 예수님을 이미 닮은 일군들이 아니었습니다. 불 같은 성격에 좀 모자란 듯 단순한 베드로가 그러했고, 과격했던 우뢰의 아들 요한 야고보가 그랬습니다. 약삭 바르고 계산하기 좋아했던 빌립도 그러하였고, 참을성이 부족했던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룩한 복음 사역을 위하여 소명되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인격의 뛰어남이나 성품의 고결함 때문이 아니라 목양하도록 소명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 때문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완전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인격적인 평범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불완전함과 질병적인 결함은 전혀 다른 것이고, 그런 사람이 목회의 길에 들어서면 안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길로 부르신 것이 분명하더라도 그들은 아직 목회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들은 먼저 치료되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격을 알고 복음의 능력으로 영혼의 치유와 성품의 변화를 먼저 경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병적인 결함이 고쳐지지 않은 채 목회의 길에 들어서는 것은 마치 병균에 감염된 더러운 손으로 환자를 수술하겠다고 하는 의사의 무모함과 같은 것입니다.
자질과 소명
자신을 추스리지 못하는 분노와 폭언, 폭행, 몸에 배인 방탕한 성적 타락, 돈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힌 인격,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불붙는 마음이 없는 고질적인 냉담함, 이런 것들은 단순히 성품상의 결점이나 부족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질병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품의 질병적인 결함은 한두 번의 회개나 신앙 체험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마땅히 그렇게 자기를 고치는 하나님을 만나고 새롭게 되기 전까지는 목회의 길을 걷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검증 없이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모든 것이 자로딜 것이라는 마음으로 목양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의 믿음은 언제나 예외 없는 실패를 가져옵니다.
조국 교회의 목회 현장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도 없는 일을 가지고 말도 안되는 고통을 겪는 것이 바로 이런 ‘인성적 결함’을 가진, 패역이 고쳐지지 않은 사람들이 치유되지 못한 채 목회 현장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아내에게 있어서 이런 인격과 성품의 준비는 어떤 면에서 목회자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것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리가 매우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아내에게 있어서 사역의 현장은 모난 인격과 부족한 성품이 다듬어지는 훈련의 장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아내는 교회 안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인간 관계를 통하여 자기를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빨리 인식하고 순응하여야 합니다.
그런 목회자의 아내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주님을 닮아가는 인격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닮아 가는 인격적인 변화의 과정 가운데서 자신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양수리에서 생긴 일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에 함께 어울려 지내던 친구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 친구는 집안의 2대 독자였는데 경기도 양수리로 중고등부 학생 수양회에 갔다가 물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던 친구들이 모아 준 돈을 가지고 저와 또 한 친구가 양수리까지 가서 묘비를 맞추고 우리들은 연마용 숯돌로 투박하고 커다란 돌판을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산마루에 걸린 해가 떨어져 드넓은 강물을 붉게 물들일 때쯤 우리둘은 우리 앞에 놓인 돌을 보고 놀랐습니다. 물로 닦아 내고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거두고 나니 정말 우리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짝거리는 비석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양수리를 지날 때면 그 일이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을 다음으시는 데는,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이나 고통스러운 시련, 내 맘대로 쉽게 되지 않는 인간 관계 같은 것들은 정말 좋은 연마제입니다. 채석장에서 막 떠 온 돌멩이 같은 목회자 아내의 인격과 성품을 거룩한 사역에 합당하도록 갈고 닦으시는 데는 사람들과의 부딪힘이 연마제로 잘 사용됩니다.
경건한 반응 없이는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성품과 인격을 깍고 다듬어서 온전하고 거룩한 사람을 만드는 것은 고통이나 고난, 피곤한 인간 관계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 고난에 대한 경건한 반응입니다. 고통과 연단만 있고 이에 대한 경건하고 거룩한 반응이 없다면, 목회자의 아내는 그 고통 속에서 오히려 더 이상하게 굽고 한 맺힌 성격을 가진 패역한 사람으로 변해가기 쉽습니다. 그리하여 이윽고 목회자의 아내로서 섬길 수 없게 하는 ‘질병적인 인성 결함’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목회자의 아내들이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에 자신을 담가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목회자 아내의 영광은 고난 자체가 아닙니다. 그녀의 영광은 고난을 통하여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아내인 그녀에게 믿음으로 경건하게 반응하는 말씀과 기도의 생활이 없다면 그녀의 고생은 고통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그렇게 고통으로 끝나는 고생에는 상이 없습니다.
남편 길들이기
남편이 목회자의 아내인 당신에게 고분고분할지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남편 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남편의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과 하나님이 당신을 인정해 주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고분고분 하는 남편을 길들인 채로 데리고 사는 것을 가지고 마치 자신은 남편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부끄러움을 면류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을 지배하는 데서 어떤 희열을 느끼고 고생스러운 목회자의 아내의 길을 가는 데서 어떤 희열을 느끼고 고생스러운 목회자의 아내의 길을 가는 데 보상감을 느낀다면, 목회자의 아내로서의 그녀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무너진 작은 교회
이렇게 일그러진 목회자 부부의 관계는 모두 가정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한 목회자의 무능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목회자의 아내가 가정에 있어서의 남편의 지도력에 암초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바로 서지 못한 가장은 온 교회의 고통이며 목회의 수치입니다. 그렇게 일그러진 부부 관계는 아내를 가르치지 못하는 힘없는 가장과 가르침받기를 거부하는 교만한 아내가 합작으로 만들어낸 ‘자기 가정 먹칠하기’라는 작품입니다.
아내를 가르치지 못하는 남편이 어떻게 교인들을 가르칠 수 있겠으며,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목회자가 어떻게 교회를 다스리겠습니까?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아내는 가장 뛰어난 교인입니다. 그 뛰어난 교인이 가정 목회자의 가르침을 마다하는데, 더 큰 교회에서야 누가 그 권위를 인정하고 머리를 숙이겠습니까?
목회자 되게 하는 것
목회자르 만드는 것은 단지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치며 살아온 역경이 아닙니다. 열심 있는 교회의 중직들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당신 혼자서 목회자를 만드시지 않습니다. 목회사역에 합당하도록 그를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거기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자신을 빻는 열심히 기도 속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말씀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목회자 자신의 극기 어린 노력을 사용하셔서 목회자다운 목회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그러하다면 그의 아내는 더욱 그렇게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영광스러운 목회의 길을 걸어갔던 스펄젼의 기도를 당신도 따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내 몸의 살 중 단 한 점이라도 주를 위하여 찢어지기를 싫어하는 살이 있다면, 그것을 도려내어 주소서. 내 혈관으로 흐르는 피 중 단 한 방울이라도 주를 위하여 흘려지기를 거절하는 피가 있다면, 그것을 쏟아 버려 주소서. 나는 주의 것입니다.”
실상은 죽은 자들
목회 사역은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즉 하나님만을 위한 영광스러운 목회 사역과 밥 벌어 먹기 위한 목회입니다. 당신의 남편과 교회가 당신의 존재를 힘겨워한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이땅에 살아 있는 것을 힘겨워하실지도 모릅니다. 거룩한 집념을 가지고 목회자의 아내로 다시 태어나게 되기를 다짐하십시오.
목회자의 아내는 사람들 앞에서는 부드럽게, 하나님 앞에서는 절박하리만치 연약하게, 그리고 위기 상황 앞에서는 사자처럼 담대하게 살아야 할 영적인 어머니입니다.
상처받을 때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목회 현장에서 자신들에게 상처를 주는 수많은 교인들을 만납니다. 교회에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사회적으로 기도 못 펴는 별볼 일 없는 인생들이 목회자의 아내를 밥처럼 생각하고 괴롭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억울하기도 하고, 사랑을 괴롭힘으로 갚는 못된 교인들 때문에 남모르게 눈물을 흘려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목회지의 교인들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떠드는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것입니다. 교인들을 사람으로 보지 말고 어린 양으로 보십시오. 고난받을 때는 그 고난 때문에 사명이 있는 것을 알고 감사하십시오.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고통을 줄 때 그들을 하나님이 여러분을 목회자의 아내다운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보낸 사자들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교인들이 목회자의 아내인 당신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판단할 때 놀아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비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무시당하십니까?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때때로 무서울 정도로 냉혹한 자기 보호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목회자의 아내가 그런 근거 없는 비난을 받을 때 남편이 나서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목회자가 비난을 받을 때 그의 아내가 나서는 것보다 더 악한 상황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에 목회자의 아내들이 교회 안에서 사역에 필요한 격려와 위로를 얻는 대신 이토록 고통을 받는 것일까요?
침실의 물고기
첫재는 목회자의 아내 자신의 인격적인 미성숙입니다. 아무리 이리 같은 교인들이 모인 교회라고 할지라도 아무 빌미 없이 목회자의 아내를 물어뜯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둘째로, 교인들을 향한 마음도 있고, 순수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있는데 교회 안에서의 인간 관계로 고통을 당하는 목회자의 아내들을 봅니다.
연못 속에서 커다란 고기가 헤엄칠 때에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가 우리의 침실에 누워 있다면 우리는 징그럽다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물고기가 혐오스러워지는 것은 그 물고기의 본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있어서는 안될 적합하지 않은 곳으로 위치를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들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유능한 목회자의 아내가 될 수 있을까? 어찌해야 교인들이 나를 좋아하게 될까? 이런 질문만큼이나 더 자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선 자리는 내가 서야 할 자리인가?”
미완숙의 아픔
목회자의 아내가 성공적인 섬김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의 선 자리가 정확해야 합니다. 교회가 목회적으로 소망있는 목양지가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아내가 목회자인 남편보다 존경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에 있어서 범사에 자기를 버리는 연습을 거듭하십시오. 그것이 거룩한 목회자의 아내로서 상처받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입니다.
셋째로, 미숙한 판단이 인간 관계에서 고통받는 원인이 됩니다. 의외로 많은 목 회자의 아내들이 인정 많은 성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의 인간 관계로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동의와 반대의 표시가 너무 분명하고 정에 이끌리는 것이어서 필요없이 적을 만드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적인 결정 사항이나 교인들끼리 다투는 관계에는 쉽게 나서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이불당회 합니까?
넷째로, 교회의 중요한 결정에 잘못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분별없는 행동이 인간 관계의 고통을 낳습니다.
제가 아는 한 교회에서는 당회원들이 모여서 교회의 중대사를 결정한 뒤에 장로들이 돌아서면서 늘 자조적으로 내뱉는 말이 있습니다. “이불 당회의 재가가 날 것인가?” 당회에서 결정된 중요한 사안이 그날 밤, 잠자리에서 목회자 부인에 의하여 농단되는 교회 정치의 상황을 비꼰 농담입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그것은 목회자의 아내인 자신을 부끄럽게 할 뿐만 아니라 남편의 목회에까치 수치를 더하는 것입니다. 목회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은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고독하게 서는 가운데 신앙적인 결단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남편이 조금 무능해 보여도 목회자의 아내는 그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목회자 자신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목회하는 일에 익숙하게 됩니다. 목회자가 교회의 중대사를 자신의 아내와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교인들은 목회자의 영적인 지도력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됩니다. 교인들은 아내에 의하여 움직이는 목회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움직이는 목회자를 원합니다.
함께 목회에 부름받은 목회자의 아내로서 교회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에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과 결정에 나서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목회자 아내의 자리이지만, 교회나 성도들과 관련된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목회자 아내의 일이 아닙니다.
다섯째로, 상처받을 수 있는 관계에 쉽게 나서는 경솔함이 인간관계에 고통을 불러옵니다.
맺는 말
상처받을 관계에 경솔히 나서지 마십시오. 남편의 상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렇게 오해와 거짓이 꼬리를 무는 상황에서 목회자의 아내가 나서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빼앗기는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하고 당신과 남편의 마음의 평강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고통 속에 휘말린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남편이 홀로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홀로 지게 하십시오. 그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것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비둘기 같이 순결할 뿐 아니라 뱀같이 지혜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5장 웃기는 내핍생활
더러운 흥정
순결한 목회자는 혼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홀로 살았더라면 성자처럼 거룩한 생애를 마쳤을 텐데 탐욕스러운 아내 때문에 마지막 목회의 길을 낙서하듯이 마치는 선배 목회자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모두 물질에 대한 집착이 빚어 낸 결과입니다.
젊어서는 성적인 타락이 덫이 되고 나이가 들어서는 분에 넘치는 명예에 대한 욕심이 올무가 됩니다. 그리고 노년에는 물질에 대한 탐욕에 발목잡히기 십상입니다. 목회자 부부가 노년에 들수록 더욱 탁월한 경건 속에서 살아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목회자 부부가 일생 동안 섬긴 교회가 그들의 외로운 노후를 보장하고 평안한 가운데 남은 여생 동안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성심껏 노 목회자 부부를 섬기는 교회를 보기 쉽지 않습니다.
성직에서 물러난 이후 돌보는 사람 없이 비참한 노후를 지내는 외로운 노 교역자들을 보면서, 교인들이 한창 젊고 유능한 교역자들에게 마음 쓰는 것의 단 십분의 일만이라도 그분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목회자들의 은퇴 행각은 거룩한 성직의 위엄을 추락시키고 교회와 그리스도의 이름을 심히 더럽히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수년 간 목회하던 교회에서 목회자 자신의 도덕적인 문제나 무능, 혹은 교회 정치적인 문제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퇴직금 문제로 교회와 흥정하는 모습들은 더욱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퇴직금을 흥정하느라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양떼들의 형편이나 사명 때문이 아니라, 오직 돈이 빌미가 되어서 강단을 지키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동안만큼은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단지 돈의 노예일 뿐입니다. 중형 교회 이상 되는 교회에서 은퇴하는 목회자들이 챙기는 퇴직금의 액수를 보면 경건한 심령을 가진 성도들은 마음이 상합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은퇴시에 드러나는 목회자의 내면의 탐욕과 그런 사람들 밑에서 자신이 목양을 받아 왔다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얼굴을 들 수 없어요
목회 사역을 직업으로 감당하는 일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신령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유의 불결로부터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목회자 부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기며 살게 하신 것으로 만족하여야 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으로 만족을 느낀 생애엔 거룩한 감화력이 있습니다. 저의 이러한 생각에 항의하는 목회자들은 거의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아무리 그러해도 목회자의 아내가 그와 같은 마음과 보람을 가지지 아니하면 목회자 부부는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목회자의 아내들이 물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가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 심리적인 측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물욕과 결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위탁과 부족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영적인 관계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앗아갔고, 하나님께 돌봄을 입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하나님 다음으로 우리를 지켜 줄 수 있는 수단이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자보다도 더욱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도 일종의 질병입니다. 그것은 목회의 길에 들어서는 데 중요한 결격 사유가 됩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은 모두 미래의 가난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그러한 두려움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가지고 있는 한, 그러한 내면 세계는 언젠가 반드시 목회 사역에 치명상을 입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실패는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의 실패만큼이나 치명적인 어려움을 목회자와 교회에 안겨 줍니다.
거룩한 자존심
목회자의 물질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가난한 목회자들의 비굴한 태도입니다. 교회나 가정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목회자 부부로 하여금 당연히 교회에 출석하는 돈 많은 교인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것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그 마음을 언젠가는 의식적으로든, 혹은 무의식적으로든 행동으로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목회자인 남편이 교인들이나 동료들에게 너무 많이 얻어먹거나 대접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언제나 적당한 액수의 용돈을 지니게하여 목회자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게 하십시오. 남편으로 하여금 선물을 받거나 바라는 마음을 갖기 않도록 수시로 점검하십시오. 대접받는 것이 몸에 배는 것처럼 추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신학을 공부하거나 개척 교회를 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도움받는 것을 자신의 당연한 권리에 속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해 감사하거나 도움에 감격하는 마음도 사라져 가고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게 가슴 가득한 감사를 느낄 리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것은 마음이 부패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맑은 영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 목회자의 아내의 삶에는 이러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거만한 사모는 동료들에게 남편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차가운 인품을 가진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법입니다. 잠시는 모일지 모르지만 곧 떠나갑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되, 특별히 남편을 존경하고 따르는 신앙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아낌없이 주는 형제애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규모있는 가정 생활을 해 나가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힘닿는대로 넉넉히 나누어 줌으로써 남편의 목회에 덕을 더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영원을 향하여 사는 목회자의 아내가 취할 물질에 대한 태도입니다.
웃기는 내핍 생활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을 위하여 과도히 재물을 모으는 데 뒤따르는 위험입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낭비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내핍 생활 자체가 덕목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음은 버려야 합니다. 문제는 내핍과 허비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한 내핍이고, 무엇을 위한 허비인가가 문제입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은퇴하는 말면에 돈 문제로 일평생 섬겨 온 교회와 자기의 양 떼들과 얼굴을 붉히며 추하게 싸우는 목회자와 그의 아내들 가운데 훌륭할 정도로 몸에 배인 내핍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물질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근검 절약 생활이 몸에 배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돈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몸에 배인 것입니다. 그것을 아낄 때는 그 동기가 하나님의 교회를 아끼는 마음인 줄 알았겠지만, 그가 교회를 떠나는 마지막은 그 같은 내핍 생활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교인 사랑이 아니라 그저 경제 생활의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탐욕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저는 재물에 대한 이러한 인간 마음의 미묘한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의에 빠지거나 남을 정죄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무지는 거의 악임에 틀림없습니다.
누구를 의지하나
목회자의 아내가 자신을 위하여 모든 재물은 그가 일평생 누구를 의지하며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입을 것 안 입고, 먹을 것 안 먹으면서 알뜰살뜰 모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재물을 움켜쥐는 것은 목회자의 아내로서 복음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생활의 여유, 다급한 일을 만났을 때 궁핍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만 남겨 두고 열심히 흩으십시오. 나누어 주십시오.
물질의 결핍으로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마치 보화를 만난 것처럼 기뻐하며 나누어 주고 섬기는 일에 흩으십시오.
목회자의 아내들이 빠지는 실패는 내핍과 절제로 스스로 아낀 재물을 움겨쥐고 흩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자신을 위하여는 엄격하리만치 가난하고, 남을 위하여 재물을 흩는 일에는 탁월하게 너그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은 섬길수록 더욱 귀하신 분으로 느껴지고, 물질은 모을수록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앞 뒤 생각 없는 즉흥적인 경제생활은 목회자 가정과 교회로 하여금 규모를 잃어버리게 하고, 결국은 삶도 덕스럽지 못하게 합니다. 이 모두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2:15-16).
소유욕과 결별하라
문제는 목회자의 아내인 당신이 알뜰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당신의 물질을 누구를 위하여 무엇에 사용하며 사느냐입니다.
무소유의 목회는 목회자와 그의 아내의 여혼이 하늘의 거룩한 은혜로 가득 차고 십자가 사랑의 감격으로 넘치는 영혼의 부요함 때문에 땅에 것에 연연해하지 아니하고 누리는 일에 집착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며, 누구에게 배우고 전수받을 성질의 목회 요령이 아닙니다. 따라서 목회자 아내에게 있어 가장 좋은 물질 생활은 최소한의 필요를 초과하는수입이 생기면 즉시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또 만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행복한 노후
목회자의 아내로서 영생보다 노후를 더 염려하고 있습니까? 목회자의 아내의 노후에 대한 과도한 염려가 목회자의 말로를 추하게 합니다. 목회자의 노후의 위로는 물질도 아니며 높은 지위에 오른 자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일평생 사랑해 온 주님께서 그들의 노년에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소명을 받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던 사랑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불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였을 그때, 단지 젊고 건강한 날만 드리기로 하였습니까? 정년 퇴직하기 전까지의 시한부 인생만 주님께 바친 것입니까? 힘이 있고 목회할 수 있을 때에만 고난을 받겠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때 우리의 인생 전체를 다 드린 것입니다. 우리 뿐 아니라 태어날 우리의 가족도 다 드렸습니다. 일평생 하나님만을 섬겼다는 이유 때문에 쓸쓸하고 고생스러운 노후룰 보내야 한다면 그것도 우리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맺는 말
사랑하는 목회자 아내들이여, 가능하면 노후를 자녀들에게 의탁하도록 하십시오. 교회로 하여금 과도한 짐을 지게 하지 말고, 또 교회에서 돈 받아서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려는 탐욕을 버리십시오. 성경에 이 모두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오히려 당신의 자녀들이 목회의 길을 걸었던 부모의 거룩한 신앙을 본받고, 자신들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하며 목회에 자신을 드리며 헌신의 삶을 살아온 부모에 대한 영광스러운 긍지를 갖게 하십시오. 신앙의 사람들로 자라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불굴의 사랑을 유산으로 물려 주십시오.
무엇보다 노년이 될 수록 가까이 다가오는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두 눈이 빛나게 하십시오. 부유해지는 즐거움보다 거룩해지는 기쁨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욕망으로 마음을 불붙게 하십시오.
이것이 물질 문제에 있어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6장 자식 사랑에 영력이 마른다
자녀 사랑과 신앙
자식 사랑에 마르는 영력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엘리 제사장의 가정의 몰락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 제사장은 한때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을 정도로 신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어 늙으면서 영적인 순결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요 원인은 빗나간 자식 사랑이었습니다. 그 자식들은 아버지가 제사장인 것을 타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물질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제사와 제단을 멸시하였고, 그것도 부족하여서 거룩한 회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간음함으로써 거룩한 성소를 더렵혔습니다.
그러나 자식 사랑에 눈먼 엘리는 그런 상황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저런 추문이 들려도 목회자들이 흔히 겪는 구설수 정도로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모두 빗나간 자식 사랑이 그의 영안을 멀게 한 것입니다. 자식을 올바르게 징벌하고 신앙의 도리를 이스라엘 가운데 세우는 일에 실패한 엘리는 패역한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사랑으로 응답한 소명의 자리가 저주받는 자리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느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버리는 것보다 자식을 버리는 것이 낫고, 자식에게 버림받는 것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사명을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모에게 몹쓸 자식이 되는 것이 낫습니다.
누구나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께 모두 효도하며 살고 싶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목회자의 아내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사랑스럽고 충성스러운 딸로 인정받고, 육신의 부모님께는 효성스러운 딸과 며느리로 남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그렇게 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님을 포기하여야 할 때는 당연히 육신의 부모를 버려야 합니다. 하물며 자식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목회자 부부가 마음껏 목회 사역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자녀들의 신앙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바로 이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자녀들의 영혼의 상태를 주시하고 믿음으로 자라는지 눈여겨보며, 남편이 온 교인들을 목회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남편과 함게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돌보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족 공동체
지금 이 책을 읽으시는 여러분이 목회자의 아내라면 정직하게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은 구원받았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회심하였습니까? 십자가의 도리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까? 자녀들의 영적인 변화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까?
목회자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모 때문에 목회사역의 짐을 함께 진 사람들입니다. 목회자의 아내와 목회자 모두 애는 써야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목회자인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경우와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일평생 연애 감정에 빠져 아내를 기쁘게 하는 재미로 일생을 사는 영화 속의 주인공과 같이 아내에게 만족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목회자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목회자 가정의 가족적인 결속력이 약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족 관계만 잘하느라고 다른 섬김에 자신을 드릴 시간이 없다면, 그는 가족의 종이지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목회자 가정의 자녀들은 이런 저런 결핍 속에서 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교인들과 나누어 가져야 하고, 때로는 조국 교회와도 공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잠시 헤어져 하나님을 섬기는 아버지와 남편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해야 하는 때도 있고, 교인들과 슬픔을 함께 하기 위하여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희생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어차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변화와 위험 가운데 목회자의 가족들이 단단한 결속을 유지하는 것은 남편과 아내, 자녀 그리고 부모님들 모두 신앙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7장 입술은 거룩과 작별하는가?
말과 경건
물에 빠진 친구
어린 시절에 시골집에서 멱을 감다가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하던 친구들을 여럿 보았고, 저도 한두 번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서 익사할 때 가장 마지막으로 물에 잠기는 부분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당연히 머리 부분입니다. 숨쉬는 코와 입이 머리 부분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온몸이 거룩하게 하는 은혜의 물에 잠긴다고 할 때, 온몸의 지체 중 끝까지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않으려고 하는 부분은 어디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입입니다.
몸의 모든 지체 중 끝까지 거룩한 은혜의 통제로 붙들어 놓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입이고, 곧 그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교인들 백 명의 말보다 목회자의 부주의한 한마디가 영향력이 더 큽니다. 이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목회자 아내의 말의 영향력은 목회자의 말의 영향력보다 더 클 때도 있습니다.
묻히지 않는 실수
목회자의 아내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목회자의 말의 실수는 묻히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말의 실수나 허물은 교인들의 가슴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목회자와 직접적인 인간 관계를 원합니다. 그들은 목회자와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할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는 당연히 목회자와의 관계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배타적이기를 원합니다. 특히 그들은 의도적으로 목회자와의 아내를 그런 관계에서 배척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여성도들 경우는 더욱 그렇고,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아내나 여성으로 소속감이 없는 사람은 더욱 그런 경향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교인들의 그러한 마음은 목회자 아내의 말의 실수를 더욱 놓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는 가볍게 대하지 않아도 목회자의 아내를 가볍게 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목회자와 막힌 관계 속에서는 교회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목회자 아내와의 문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목회자의 아내인 당신의 말의 실수와 허물을 놓치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자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인들에게나 미워하는 교인들에게 모두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교인들과 하나 될 수 없다
교인들을 사랑한다는 것과 목회 관계의 질서를 허문다는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곧 무차별하게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는 교인들과 같은 한 형제 중에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도 목자이기 이전에는 교인들과 같은 한 마리의 연약하고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형제였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언하도록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목회자 역시 사랑하는 교인들을 형제와 자매처럼 여기며 죄와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는 제사장처럼 사랑하는 지체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경건한 슬픔으로 탄원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거스르는 자들을 향하여, 혹은 긍휼로, 혹은 진노로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선지자처럼 나아와야 하는 사람입니다. 마주하여서는 다급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하여야 하고, 돌아서서는 하나님 앞에 서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지체들을 인하여 흐느껴야 하는 사람입니다.
터놓고 지내는 사이?
목회자의 아내가 말에 있어서 경건과 절제가 몸에 배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 중 하나는 목회자의 지도력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이지만 그들과 유별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존재의 신비감을 잃으면 감화력도 잃기 쉽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신비감 그 자체가 위대한 것은 아니지만, 거리낌없이 터놓고 지내는 사이에서는 경건한 감화력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목회자와 교인이 그렇게 지낸다는 것은 이미 목회자로부터 거룩하고 경건한 영향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늘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감화를 경험하는 사람이 목회자와 친구처럼 지낼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볼 것 다 보고
교인과 함께 목욕을 즐기는 목회자를 두고 어느 선배 목사님은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볼 것 다 보고 무슨 목회를 하려고 그러는지….”
목회자에 대한 신비감 자체가 감화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이 솔직한 인간 관계 형성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거룩한 목양의 관계를 이루어 가는 데는 해로운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태도가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 이외의 것에 대하여 더 많이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저의 판단은 이렇습니다. “목회자는 감출 것이 없는 투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감출 가치가 없는 그것을 쉽게 다 보여주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은 좋은 목양의 관계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목회자 아내의 말의 절제와 경건한 대화 습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많은 목회자의 아내들을 만났습니다만, 그 영혼이 살아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은 거의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거의 죽은 자와 같은 핍절한 영적 삶을 가정과 교회를 치다꺼리하는데 매몰시키고 있거나, 그나마 열심히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분별 없이 영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신앙적으로 잘못 살아 있는’ 아집덩어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일에 열중한 사모는 있어도 거룩한 삶을 사는 기쁨에 젖어 있는 목회자의 아내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에 열심히 있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경건의 향기가 나는 깊은 영성을 가진 목회자의 아내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죽은 자처럼 사는 이유
저는 목회자의 아내들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남편의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방탕한 언어 생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의 아내들은 함께 털어 놓고 대화를 나누어 줄 사람이 흔치 않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고 동정하는 사람을 만나면 서서히 마음이 열리고 쉽게 자기 속에 있는 말을 쏟아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간들은 목회자의 아내로 하여금 방탕한 언어 생활을 통하여 자기의 쌓인 감정을 배설하는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많은 말은 반드시 허물을 낳고 책임지기 어려운 상처를 목회자나 교인들에게 입히게 됩니다.
더욱이 성령에 의하여 인도받지 않는 많은 말은 영적인 힘을 소진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모아졌던 마음을 쉽게 흩어지게 합니다. 때로는 잘못 토해 놓은 말이 가져온 잘못된 결과들을 수습하기 위하여 마음을 빼앗김으로 영적인 손해를 더하기도 합니다.
잊지마십시오. 목회자의 아내인 당신이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은 많은 말을 통하여 당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을 늘이기보다는 당신의 인격과 성품에 대하여 반감을 갖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것은 목회자의 아내의 몫이 아니라 목회자의 몫입니다.
지혜롭게 하라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목회자의 아내들은 교인들의 작은 말 한마디에 놀아나는 사람만큼이나 목회에 적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도록 자신을 바꿈에 있어서 완고한 것은 교인들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만큼 천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불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교회에서 큰 소리로 말하며 나서지 마십시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를 배우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보다 마음을 끄는 말을 하는데 익숙해지십시오. 품위도 잃지 않고 사람들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미소에 능하라
나는 목회자의 아내인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말보다 미소에 능한 자가 되십시오. 어쩌다 한 번 보여 주는 파안대소보다는 늘 미소를 띤 얼굴이 주는 영향력이 더 크고 긍정적이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말 없이 우울한 목회자의 아내는 말 많고 경박한 사람만큼이나 주위에 있는 교인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많은 말은 허물을 드러내게 하여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는 자신과 목회자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 주면서도 신비감을 거두어 가질 않습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늘 웃을 수 있는 이유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8장 깊은 산, 맑은 개울은
기도생활, 영성, 그리고 직업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자와 함께 맑은 물을 기다리는 교회라는 들판과 이어지는 산이요, 계곡입니다. 그들의 여성이 골처럼 깊고 인격이 산처럼 높으면, 아무리 메마른 목양지라 할지라도 풍부하고 맑은 물을 흐르게 하여 푸른 초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녀의 영적인 삶은 산처럼 높고 계곡처럼 깊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벌판처럼 너른 목양지의 양 떼들이 그들을 통하여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에 이르는 감화
목회자의 아내가 거룩해지는 것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먼저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거기에 영적인 삶의 뿌리를 박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환경에 의하여 쉽게 흔들리지 아니하고 고난에 의하여 쉽게 꺼지지 않는 열심의 불을 깨닫는 말씀에 의하여 연료가 모아지고 기도에 의하여 불붙여집니다. 예배를 통하여 깊은 은혜를 받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훈련이 든든하게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감화를 받는 삶 없이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기도한다 해도 깊은 기도 생활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열렬히 기도하는 데도 남편의 목회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하는 목회자의 아내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
목회자의 아내가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대화하는 즐거움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보다 하나님께 사람들을 사랑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일에 더욱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목회자의 아내들이 이 일에 약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많은 시간을 애쓰고 수고하지만 적은 열매밖에 거두지 못합니다.
목회자 아내의 재능은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축복받을 때에는 목회를 위한 귀한 밑천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오히려 목회에 욕이 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항상 경계하는 약점을 인하여 넘어지기 보다는 스스로 자신 있어 하는 부분 때문에 훨씬 더 잘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표를 목회의 성공에 두는 목회자의 아내는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기도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즐거움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 생활은 깊이를 더할수록 목회자 아내의 삶과 생각을 거룩하게 합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을 움직이며 목회하는 사람이라면, 목회자의 아내는 하나님을 움직여 목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아내는 매우 특별한 기도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가사를 돌보고 목회자의 가정을 지키는 사람이지만, 결코 한 남자의 아내일 수많은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또 다른 목회자입니다. 남편이 일에 치어 허덕일 때에도 목회자의 아내의 깊은 기도는 그에게 찬사를 파송할 수 있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그를 위한 기도에 자신을 바치지 않는 것은 그가 남편을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는 것인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로 부은바된 진정한 사랑은 목회자인 남편을 위한 기도에 자신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사랑은 염려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염려는 하나님 앞에서 염려해 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이 아니라면
진실로 깊이 기도하는 목회자의 아내가 얼마나 소수인지 모릅니다. 목회자의 아내로서 목회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 신학을 전공하는 것은 필수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기도의 학교에서 깊이 기도에 자신을 바치는 비결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누구도 그러한 기도의 삶을 살지 아니하고는 신령한 목회자의 아내가 될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신령하지 못하고 세속적이고 경박하다면,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의 결함이 목회에 덜 영향 미치게 하기 위해서라도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남편인 목회자가 신령한 사람이라면, 목회자의 아내는 그러한 사역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래 기도합니까?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것은 진실한 기도 생활의 태도이지만, 장시간 매달려 기도하는 영적인 끈질김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긴 시간의 기도가 반드시 깊은 기도는 아니지만, 깊은 기도는 반드시 장시간의 기도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목회자의 아내의 기도 생활은 남편의 목회 사역에 깊은 뿌리가 됩니다. 아무리 크고 훌륭한 나무라도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나기만 하면, 무성한 결실을 계속 맺을 수 없습니다.대부분의 목회자의 아내들은 평범한 가정의 아낙네들이 텔레비젼을 보는 시간만큼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잡지를 읽거나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 떠는 시간만큼도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역은 늘 건조하고, 신앙 생활은 마치 뜨거운 태양볕 아래 먼지 나는 신작로 길을 맨발로 타박타박 걷는 것과 같이 힘겹습니다.
신령한 기쁨으로 충만한 목회자의 아내들을 자주 만나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반드시 견고한 기도의 골방을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섬김
존 웨슬리의 생애에 있어서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지도력과 영감의 원천이 육십 년 동안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기도하던 초인적인 기도 생활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비극적인 가정 생활과 늘 따라다녔던 악의찬 비난 속에서도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고 믿었던 불굴의 신앙의 원천은 강대상 아래 마루판이 뚫어지도록 무릎을 꿇었던 기도 생활이 젖줄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설교 사역에 영감이 마르기 시작할 때 목회자의 아내인 당신이 도울 일은 없습니다. 교인들의 사악한 모독과 근거 없는 비난으로 교회를 떠나고 싶어할 때 당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교회가 냉랭하여지고 쓴 뿌리같은 패역한 교인들이 일어나서 목회 상황을 고통으로 몰고 갈 때, 주위의 핍박이 남편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게 할 때도, 당신이 도움이 될 영역은 거의 없습니다. 오직 하나, 기도를 빼놓고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아내인 당신이 기도의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은 목회 사역에 있어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에 태만한 목회자의 아내들이 치러야 할 쓰디쓴 대가는 기도하기를 쉬면서 맛본 안일함을 능가합니다.
상처보다 깊은 기도를
목회자의 아내가 교인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아서 심하면 성품까지 변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만족스러운 기도 생활이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기도가 가져온 신령한 은혜의 물에 잠기는 것은 교인들의 독한 말이나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상처를 더 이상 덧나지 못하도록 해독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안일한 삶으로 기도의 영이 약해지는 사람에게는 형통한 생활이 재앙입니다. 젊은 시절 가난을 벗삼아 개척교회를 하던 시절에는 열렬히 기도하다가 교세가 커지고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는 목회자의 아내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압니다. 모두 기도의 목표 자체가 성공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해지는 기쁨
목회자의 아내가 기도 속에서 성공에 대한 응답보다 더 많이 체험하여야 할 것은 거룩해지는 기쁨입니다. 기도 속에서 날마다 정결해지고 거룩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만큼 그리스도를 더 잘 본받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없습니다. 많이 일하고 그리스도로부터 더 멀어지는 사람이 되는 것은 목회자와 그의 아내들입니다. 일은 성취하고 자신은 무너지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얼마나 모욕을 받는지 모릅니다.
목회자의 아내와 직업
목회자의 아내에게는 매우 특별한 소명감이 필요합니다. 목회자의 아내의 길은 그 사역을 자기 인생 가운데 행하는 이 일 저 일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아무추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는 목회자와 동일한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목회자 중 어떤 사람은 이전에 야구 선수였던 사람도 있고, 과학자 였던 사람도 있습니다. 또 교수였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그 방면에 달란트가 없이는 성취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회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여전히 그 직업을 가지고 목회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목회가 무엇인지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신령한 영적 생활의 기초 위에 부어져야 할 자신을 이기는 진지한 열심과 변하지 않는 영혼들을 부여안고 몸부림쳐야 하는 해산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목회 사역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기 위한 헌신적인 탐구가 요구하는 시간과 인내, 장시간을 드려야 하는 기도의 섬김이 목회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안다면 목양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회는 아무리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라도, 그가 아무리 말씀에 능하고 목양에 유능하다고 해도 아르바이트처럼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아직도 세속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목사들을 봅니다. 그분들은 두 번 실수를 한 것입니다. 자신이 신학을 공부하였어도 그런 일에서 손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목회에 손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면 다른 직업을 버려야 했습니다. 목회자의 아내도 그러합니다.
목회자 부부는 그렇게 특별한 목양의 섬김으로써 세상을 위하여 봉사할 사람들을 세우는 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가장 보람있고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목회자의 아내입니다.
맺는 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가치 있고 좋은 것들을 위하여 살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가치들, 학문이나 예술, 문화나 이웃을 위한 봉사, 인정으로 넘치는 사회 봉사 등 이 모든 것들도 역시 세상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도 모두 세상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영원한 것들이 아닙니다.
물론 거기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고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영혼을 구원하고 섬기는 목회를 통해서 그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이 길로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목회자인 자기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받아서 동행하게 된 아내와 함께 말입니다.
9장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
결단과 용기
위기를 위하여
위대한 목회자의 아내는 평범한 때가 아니라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목회자인 남편도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열심 있고 반듯한 신앙 생활을 넘어서서 무시할 수 없는 영적인 권위를 가진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녀가 오랜 기간 동안 이어 온 진리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깊은 기도 생활에서 비롯됩니다.
가정 생활에서뿐 아니라 목회에 있어서도 모든 판단은 남편이 알아서 하겠지라고 미루면서 도무지 아무런 영적인 분별력도 없이 응석받이(?)로 살아가는 가련한 목회자의 아내들을 볼 때마다 포탄이 비 오듯 퍼붓는 전쟁터에 철모르는 어린아이가 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은 저만의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남편의 목회적인 결정에 자주 나설 필요는 없지만 판단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에 어긋나는 길을 가고자 할 때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권위를 가지고 막아야 합니다. 부부 관계에 금이 가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라
목회자의 아내가 잔소리꾼이라면 결정적인 때에 결코 남편을 경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아내가 결정적인 때에, 잘못나가는 목회자에게 브레이크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평소에 아내가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믿게 하여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목회자의 아내가 깨어 있는 영으로 사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 몇 번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사소한 일로 남편과 부딪히거나 옹졸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남편으로 하여금 당신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너그러운 사람임을 믿게 하십시오.
남편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정직하기만 하면 아내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하십시오. 잔소리를 당신과 목회자의 영력을 모두 말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신처럼 죽을 각오가 된 아내는 결정적인 때에 남편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아내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맺는 말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살게 하려고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녀의 영광은 남편이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사는 것이고 주님처럼 양 떼들을 돌보다 진리를 따라 죽은 것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홀로 그렇게 살기 어려운 목회자를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려고 부름받는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아내, 그도 남편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0장 그가 홀로 우는 밤에
부부애와 고독, 인격적 결합
외로운 지도자
때때로 우리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아내보다는 훨씬 못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미모에 있어서나 학식에 있어서나 심지어는 나이에 있어서조차 비교도 안되는 열등한 처지에 있는 여성과 연애 감정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남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인격적인 결합입니다. 성적으로 실패하거나, 가정이 파괴된 목회자 부부의 경우는 대부분 그러한 눈에 띄는 실패 이전에 먼저 둘 사이에 인격적인 결합이 깨어지는 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 아내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인 남편과의 인격적인 결합을 굳게 하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에 성공한다면 그는 목회자의 아내로서 성공한 것입니다.
목회자의 신앙을 이해하라
이 일을 위하여 목회자의 아내가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은 목회자인 남편의 신앙의 세계와 영적인 관심사를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 결합이 주는 교제의 즐거움은 같은 관심사에서 비롯됩니다.
제가 이 책에서 시종일관 목회자의 아내가 복음의 감격에 불붙는 마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싶어하는 거듭난 삶의 가치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목회자 부부가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냈다고 하는 것이 기껏홰야 취미 생활이거나 먹고 마시고 돌아 다니는 여행 정도였다면 그 결합의 초점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사랑입니다. 목회의 길로 들어선 그들은 먼저 잃어버린 영혼들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싶어하는 소원에 있어서 일치하여야 합니다.
사랑만으로는
미갈은 스스로 다윗을 택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미갈은 가장 어려운 때에 사랑하던 다윗을 버렸습니다.(삼상25:44).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남편의 영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전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다 바침으로써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순결한 삶을 향한 모든 그리움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어도 그의 신앙의 세계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도 이같은 인격적인 결합의 실패에 기인하는 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자 부부의 결혼이 사랑 하나만 가지고 안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 할지라도 서로의 신앙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온전히 하나 될 수 없습니다.
못생긴 아내는 용서해도…
목회자 부부가 인격적인 결합을 견고해 해야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목회자의 아내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영악한 목회자의 아내는 많은데 지혜로운 사람은 너무 소수이고, 또한 세속적인 사모는 많은데 정말 타락한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 목회자의 아내는 너무나 드물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즘 세간에는 “못생긴 목회자의 아내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미련한 아내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 아니라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의 아내가 적어도 세 가지의 책만큼은 잘 읽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책, 자연의 책, 인간 마음의 책입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자신을 매몰시키고 허덕이는 대신에 이러한 책들을 더 잘 읽고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힘쓴다면 목회 사역의 열매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목회자인 남편과 인격적인 결합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비결 중 하나는 함께 신앙적이고 영적인 필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도를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남편이 읽는 책을 함깨 읽으며 목회적이고 영적인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영적 생활로부터 목회자의 아내가 배울 것이 있다면, 신앙에 있어서 남편의 제자가 되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알게 하십시오.
스펄젼의 아내 수잔나
찰스 스펄젼 목사는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아내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내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기보다는 그런식으로 인격적인 결합을 굳게 하고 영적인 유대를 유지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오후, 설교할 본문이 결정되면 부인 수잔나가 주석들 중에서 본문에 관한 부분들을 읽어 줍니다. 평생 12,000권이나 되는 장서를 소장하였던 스펄젼이 그 많은 책들을 설교에 인용하고 응용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의 공로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께 수시로 서재에 머물며 인격적이고 영적인 결합을 굳게 하였던 것입니다. 스펄젼은 토요일 저녁 깊은 기도 속에서 설교할 내용을 마음에 불붙이는 일을 끝내고 마음속에서 설교가 형성되면 서재로 아내를 불러서 이튿날 전할 설교의 요약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시간이 수잔나에게 있어서 더없이 행복했던 시간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타락을 이해하라
목회가 몇 해 동안의 단거리 사역으로 끝난다면 목회자의 아내의 순진한 것이 자랑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남편인 목회자는 거룩한 사람들이 아니라 죄와 결별할 수 없는 타락한 인간들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목회자의 아내는 누구보다도 타락한 남성들의 세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부부의 인격적인 결합이 풀어지는 곳에는 항상 타락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결속이 느슨해지면 신앙이 무너지는 것이 시간 문제이듯이, 부부의 인격적 결합의 줄이 끊어지기 시작하고 영적 생활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목회 현장은 목회자의 타락을 위한 훌륭한 무대가 됩니다. 거기에는 한 남자의 타락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돈도 있고, 여자들도 있고, 시간도 있습니다.
목회자를 노린다
한 사람의 목회자를 쓰러뜨리려는 마귀의 시도는 항상 불꽃 튀는 격렬한 도전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일 먼저 봄바람 같은 따스함이나, 가을 바람 같은 서정적인 분위기로 다가옵니다. 목회자가 아내와의 인격적인 결합을 굳게 하고 있는 한, 최소한 그의 타락은 목회자로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락은 동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타락은 허물과 실수로 말미암는 사소한 것일 수 있고, 보다 심각한 경우에라도 치명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무슨 이유로든지 아내와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결속을 풀어 버리고 나면, 그것은 십중팔구 목회자의 성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마귀는 목회자 부부의 가정을 쓰러뜨리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쉽게 가정을 파탄내고 이혼하여 갈라서지 않을 것입니다. 실상은 이혼 상태이면서도 교회라고 하는 공동의 활동 무대를 보존하기 위하여 이혼하지 않고 있는 목회자 부부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사탄은 목회자의 가정을 껍데기만 남겨두고 모두 와해시켜 버림으로써 두사람의 영력을 말려 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고 합니다.
교회보다 중요한 것
목회자의 아내는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일과 부부간에 이러한 영적인 결합을 유지하는 일, 두 가지를 위하여 부름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습니다. 교회 봉사보다도 중요하고, 다른 가족들을 돌아보는 일보다도 중요하고, 자식들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 고유한 직무에 유능하지 않으면 그 목회자의 아내는 살았으나 산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그는 자기만 살아있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목회자를 죽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스도깨서 피로 값 주고 사신 목양지에서 말입니다. 목회자 부부에게 있어서 인격적인 결합은 바로 그런 치명적인 부위입니다. 교회 성장과도 바꿀 수 없고, 가족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 부부가 인격적인 결합을 잃어버리고 타락에 길을 열어 두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임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목에도 꽃은 피는가?
지난 해 봄에 남쪽 해변에 있는 어느 도시에 설교로 섬기기 위하여 간 적이 있습니다.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는지 고목이 되어 있었습니다. 커다란 나무 둥치는 다 썩고 벌레가 먹었습니다. 제가 그 나무를 보다가 깜짝 놀란 것은 그렇게 다 썩은 고목 나무에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 탐스럽게 피다니….
인간의 연애 감정도 그런 것입니다. 겉사람은 후패해 가지만 마음속에 내재하는 연애 감정은 마르지 않습니다. 더욱이 목회자는 많은 사람들의 지도자입니다. 목회자의 아내에게는 아무 매력도 없는 남편을 아름답게 보는 팬(?)들은 언제든지 그의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인간적으로 늘 외롭습니다.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이 그의 인격을 지배하지하지 않는 한, 아름답게 보는 타인의 시선과 목회자 자신의 외로운 내면이 손잡을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무능하면 그녀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자기의 존재로 목회자의 마음을 가득히 채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내와 마음을 함께 하는 인격적인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 다른 여인과의 인격적 결합을 위한 길은 열립니다.
목회자의 두 가지 눈물
자신의 발등에 떨어지는 목회자의 외로운 눈물은 후일 하늘의 빛나는 면류관의 보석이 되든지, 자신과 아내와 교회의 심장을 찌르는 칼이 되든지 오직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남편의 눈물을 모른 채 단지 열심히 목회만 한다면 그 목회자의 아내는 교회와 결혼한 사람이지 목회자와 결혼한 사람은 아닙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으로 말미암는 자신의 만족을 보이며 하나님 앞에 서게 해주어야 합니다. 불만과 충고는 한 번에 모아서 그것도 매우 중요한 것만 이야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의 아내의 보석과 같은 충고가 쓰레기 같은 잔소리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 앞에서 예절을 갖추도록 노력하십시오. 긴장이 남아 있는 아내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목회자의 아내가 남편을 존경한다는 표시입니다. 여기서 목회자의 이중적인 심리가 나타납니다.
목회자는 일평생 사람들 앞에서 예절을 갖추고 대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정장을 벗을 기회가 없는 삶을 강요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자신에게는 예절을 지켜 주기를 바라면서도 자기는 아내 앞에서만이라도 그러한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맺는 말
목회자인 남편에게 휴식을 줄 여유가 없을 정도로 피곤하게 살지 않도록 지혜롭게 일과를 관리하십시오. 목회자의 아내의 고유한 사역은 대체로 목회자의 사역이 끝나는 시간부터 시작된다고 말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저녁을 맞는 목회자의 아내가 승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실천은 곧 하나님을 향하여 불붙는 충성심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11장 가혹하리만치 아픈 날들
성적 타락과 회복
그 죄의 6가지 특징
저는 성적인 타락으로 힘없이 무너지는 목회자들의 모습 속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실패한 그 사람들의 평소 신앙이나 도덕적인 삶이나 헌신에 있어서 결코 우리만 못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범죄에 빠져서 이십여 년 가까이 목회해 오던 교회를 떠난 중견 목회자 한 분은 사십일 금식 기도를 네 차례나 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그들이 범죄에 빠진 것은 정말 한 순간의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간음죄를 저질렀다”기보다는 “간음죄에 기습을 당했다”라고 말해야 어울릴 정도로 순간적인 범죄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목회자가 그러한 간음죄에 빠지기 전에 먼저 내적인 생명이 고갈되는 탈진 상태가 있었다는 것이고, 넷째는 부부의 인격적 결합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는 기간들이 타락의 앞길을 예비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범죄에 빠지고 난 목회자들의 삶과 사역 영혼 속에 깃든 한없는 무력감입니다. 마지막 여섯째는, 그들 모두가 회복되기를 원하지만 실패한 사람의 수에 비하여 정말 온전히 회복된 사람은 소수였다는 것입니다.
영적 재충전?
목회자가 영적 생활의 기반 없이 과다한 사역에 노출되는 것은 이러한 성적인 타락에 빠지는 지름길입니다. 문제는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목회자가 영적으로 탈진하게 되면 휴식을 찾게 되는데 성적인 타락도 이런 과정에서 비롯되기 쉽습니다. 사탄은 목회자에게 범죄할 수 있으며 그것이 그리 크게 문제되지 않을뿐더러 신앙적인 손해에 비하여 범죄를 통해 얻게 되는 즐거움이 훨씬 더 크다고 지적으로 설득합니다. 혹은 범죄를 실행에 옮기면서도 죄의 위험과 파괴적인 성격에 주목하는 대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거나, 매우 심한 자기 연민에 빠지게 만들어서 자신의 불쌍한 처지가 워낙 딱하기 때문에 한 번의 범죄 정도는 하나님도 용납하실지 모른다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강한 소망을 불어넣어 주고 타락이 주는 즐거움에 목마르게 하는 정서를 갖게 합니다.
이러한 갈등의 과정을 통하여 죄를 거슬러 싸우게 하는 거룩한 정서는 고갈되기 시작합니다. 경건한 정서까지 고갈되고 나면 성적인 타락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탈진과 성적 타락
목회자가 성적으로 타락하게 되는 것도 목회자의 이러한 탈진 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목회자나 그의 아내가 이처럼 회복되기 어려운 범죄에 빠지기 전에 먼저 죄에 대한 저항력을 잃어버리는 영적인 탈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타락은 충동적인 성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만, 대부분 다른 여인과의 인격적인 유대가 타락의 실마리가 됩니다. 목회자가 성적으로 타락하게 된 상대가 대분분 교회 안의 지체들이거나 복음 사역과 관계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사진을 끌어안고 다른 여인과 침상에 오르는 목회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성적인 타락의 절반은 목회자의 아내의 책임입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직무인 남편과의 인격적인 결합과 영적인 연합을 유지하는 일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성적 타락의 안전 지대가 아닙니다. 교회에는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여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들을 감싸안고 돌보아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음란성 패역
우리 주위에는 이처럼 성적 탐닉이 하나의 인격적인 경향을 형성해서 타락한 기질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지배받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실수나 연약함이 아니라, 품성적인 결함입니다. 거듭되는 범죄가 인격 속에 고착되고 웬만한 은혜생활에 의하여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질병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좋은 말로 표현하면 ‘인성적인 결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경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면 그것은 곧 ‘패역’입니다.
만약 독자의 남편이 이런 목회자라면, 남편의 영적 변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소명 받은 사람임을 입증할 수 있는 마지막 고백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주저앉아 버린다면, 하나님 앞에서 남편의 타락과 교회의 파멸에 대한 공동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이 일에 실패했다면, 목회자의 아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은 각자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지 아니하였고 함께 섬기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남편의 타락이 아무리 상상을 초월하는 악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내의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한 사람을 잘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성공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봉사의 원리
또 하나 지적되어야 할 것은 목회자 부부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은 성 생활의 원리에 관한 오해입니다. 성 생활의 성경적인 원리는 ‘봉사’입니다. 부부 중 어느 한 편이 성생활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사도의 권면을 눈여겨보십시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전7:1-3).
사도는 자기 기분이 내킬 때에만 성 관계를 가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몸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상대방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성 생활의 의무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남편에게 있어서나 아내에게 있어서나 성 생활의 봉사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 봉사는 의무입니다. 그것은 목회자 아내로서의 가장 중요한 섬김 중 하나이며, 독신으로 살지 아니하고 한 남자와 결혼해서 목회하기로 결심했을 때에는 그런 짐도 기꺼이 지겠다는 부르심에 서원한 것입니다.
실패하지 말기를
부부에게는 한 사람의 범죄가 당사자 한 사람의 것으로만 끝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영적인 연합체일 뿐만 아니라, 한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성적인 타락은 목회자 자신 뿐 아니라, 목회자의 아내에게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히게 하고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범죄와 수많은 허물을 낳게 합니다.
교회가 부패하고 더러운 상황으로 타락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촛대를 옮기시지 않는 한 그 곳은 여전히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를 향한 우리 주님의 사랑은 정말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애정 어린 마음을 다 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이처럼 크시기 때문에 때로는 이런 일에 있어서 실패한 목회자 부부들을 향한 심판을 늦추시며 돌이킬 기회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아내는 이 일에 있어서 실패하는 부부가 되지 않도록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 실패했다면, 그 목회자의 실패가 그런 것처럼 회복의 절반도 목회자의 아내의 몫입니다. 목회자의 아내의 도움 없이 목회자가 홀로 회복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시 타락한 어거스틴
여러분은 어거스틴이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 어린 기도로 회심하고 이교적인 신앙과 성적인 타락으로부터 돌이켰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지만, 그가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온 후에 다시 타락한 이야기는 모르실 것입니다. 귀족의 딸과 약혼하고 법정 결혼 연령이 되기가지 차마 기다리지를 못해 다시 성적인 타락의 길로 걸어 들어간 사실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성적인 타락을 마음 아파하는 한 번의 회개는 쉽습니다. 순간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부채 의식 속에서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든지 성적인 타락이 가져다 준 부패한 경향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거룩의 회복 없이는 죽기까지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적인 타락으로부터의 진정한 승리는 정죄 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 승리를 선언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경박한 것은 모두 추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견고하고 거룩한 삶은 없습니다.
맺는 말
그러므로 저는 조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피 어린 경고를 보냅니다. 순결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무너지는 교회 아래에 우리를 먼저 묻으실지도 모릅니다.
목회자인 우리가 순결한 사람이 아니면 우리가 자랑하는 목회 경력, 유창한 설교, 그렇듯한 비전, 교인들을 굴복시키는 카리스마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두 거짓이고 매일 입고 설교단에 오르는 검은 가운은 속이는 망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범죄는 양 떼들의 범죄와 같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그렇게 타락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이 방탕하고 더러운 땅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기를 구하며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신령한 은혜는 오직 순결한 마음에 깃드는 것입니다.
목회자 부부에게는 성공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결입니다.
12장 꿈이 있습니다
충성, 부활과 소망
신음하고 탄식하며
목회자의 아내가 세속에 흐르지 아니하고 거룩하게 사는 비결 가운데 하나는 세상을 적당히 경멸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세속적인 욕망을 누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습니다. “눈멀고 미련한 육신의 소욕이 저항한다 할지라도 보다 확고한 견해를 붙듭시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림에 있어서 지체함이 없도록 합시다. 그 일을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으로 여기며 사모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신음하고 탄식함으로 기다립시다. ”
세상을 적절하게 멸시하는 신앙의 태도가 경건에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현세에 대한 경멸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미워하거나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데로 나아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비와 은혜를 맛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영원한 세상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짝사랑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 줄 압니다. 목회자의 아내의 사고 체계가 신령해지기 위해서는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이 속히 오기를
광야를 지나는 것 같은 슬픔 많은 세상을 잠시 지나고 나면 주님은 우리를 예비하신 천국으로 옮기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토록 사랑했지만 헤어져야 했던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이들과 함께 손잡고 구원의 주님을 노래할 것입니다. 저도 그 곳에서 꿈에도 그리던 성도들과 만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찬란한 보좌 앞에서 어린 양을 찬송하는 수많은 천사와 성도들을 볼 것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이 하늘 나라 한구석에서라도 그 아름다운 찬송에 우리의 노래를 보태게 하신 것을 인하여 감격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를 기억합니다. 이 강도는 분명히 땅에 남아 있는 우리를 부러워하였을 것입니다. 죄악된 삶에 어울리지 않는 말할 수 없이 큰 구원의 은총을 입었지만 그에게는 이처럼 자기를 구원해 주신 좋으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 드릴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단 한 시간이라도 살아 드릴 기회가 없었던 강도는 주님의 손에 이끌려 낙원에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이 땅을 내려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이 세상에 남겨진 우리를 부러워하였을 것입니다.
맺는 말
언젠가 우리는 죽음의 휘장을 걷고 우리를 목회의 길로 부르신 주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남편도 죽고, 자식들도 남겨 두고, 사랑하는 교인들과도 헤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섬김의 동기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다면, 그 날은 얼마나 아름다운 날일까요?
이제 여러분은 천사가 흠모하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가고 싶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고, 가기 싫다고 마다할 수 없는 특별한 소수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 남은 인생을 어찌 사시렵니까?
목회꾼의 아내가 되시렵니까?
거룩한 주의 종의 아내로 사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