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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영농·생활수기 당선작 <일반부문> 청년창업농이 이어준 희망의 불씨 최경하 (37ㆍ경북 의성군 단촌면)
밭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니 현수막이 하나 걸려 있다. ‘농촌사랑 하계 봉사활동.’ 7월7일이면 오전 10시부터 숨이 턱 막히게 더운 본격적인 한여름. 17년 전 스무살이었던 나도 여름방학 농촌봉사활동으로 처음 경북 의성군 옥산면에 왔다. 의성읍의 종합운동장에서 비장한 발대식을 마친 뒤 트럭 화물칸에 올라 고개를 넘었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것은 볼에 닿던 바람과, 옆에 앉은 친구 얼굴과, 한참을 가도 비슷해 보이는 풍경들이다. 그 이후로 고맙게도 나는 대학 내내 같은 곳으로 농활을 갈 수 있었다. 그게 인연이 돼 졸업 후 선택한 첫 직업은 옆 마을에 세워진 공부방 교사였다. 아는 것이 없어 오히려 용감하게 아이들과 부대꼈다. 4년 후 부산으로 이직한 남편과 살림을 합칠 요량으로 퇴사해 부산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혼 여성, 스물아홉살, 시골 공부방 교사가 이력서에 쓸 수 있는 전부여서 새로운 취업이 쉽지 않았다. 덕분에 학원 강사, 비정규직 고용센터 상담원을 거쳐 팔자에도 없던 공무원이 됐다. 운 좋게 안정된 직장도 얻었으니 아이만 있으면 완벽한 중산층의 모습을 갖추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이가 허락되지 않았다. 자연유산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 본격적으로 임신을 준비하기 위해 습관성 유산 검사를 했다. 결과는 공무원 임용장 수여와 잔인한 대조를 이뤘다. 의사는 가장 예외적인 경우이니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염색체 이상’이라는 결과를 전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남편과 나는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적당히 여행하고 때때로 사치하며 살기로 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정말로 그러던 어느 날. 임신이 됐다. 또 유산될까 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날들이 지나고 육아휴직계를 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팍팍하고 서글픈 맞벌이 독립육아 말고 알콩달콩 살고 싶어 우리 가족은 3년 전 의성으로 귀농했다. 의성에 비록 친인척 연고는 없어도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줄 선배들이 있었다. 학연으로 맺어진 선배뿐 아니라 공부방 교사를 하며 알게 된 언니·형님들이었다. 작물로 사과를 정한 것은 현지 토양과 기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농사기술이 없던 우리가 기술 교육을 쉽게 접할 수 있어서였다. 지역 대다수 농가가 경작해 재배 가능성을 확인했던 것도 이유다. 주말마다 경남 양산과 경북 의성을 오가며 임차할 밭과 빈집을 보러 다녔다. 이 과정에서 형님 한분은 마지막까지 귀농을 말리셨다. 사과값은 십년째 똑같았고, 밀려오는 수입 농산물에 농촌실정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진심을 아신 후에는 지금까지 진짜배기 농부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셔서 멘토라 감히 부른다. 빌린 밭에서 첫 농사를 조언에 따라 지으며 구입할 밭도 열심히 보러 다녔다.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내릴까? 가진 돈이 적으니 내 입맛에 딱 맞는 밭을 가지기는 어렵다. 아무 데서나 잘 큰다는 호박조차 자라지 않는 밭을 살 뻔한 아찔한 순간을 겪기도 했고, 모든 조건을 갖췄으나 형편에 맞지 않는 밭을 욕심내기도 했다. 이 위험을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멘토 형님이 우리가 밭을 매매하기 전 성심껏 나무와 밭의 상태를 함께 봐주시고, 주변을 수소문해 토박이들만 알 수 있는 밭의 이력에 대해 알아봐주셨기 때문이다. 옥산골짜기, 해발 300m 즈음에 있는 숨은 듯한 밭을 계약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위로는 약 5950㎡(1800평)에 <홍로> 품종이, 아래로는 3966㎡(1200평)에 <후지(부사)> 및 <쓰가루(아오리)> 품종이 심겨 있었다. 나무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밭의 위치 때문에 일조량이 풍부하고 해발고도도 사과농사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계약에 앞서 멘토는 물론 대학 시절 우리 농활대를 이끌어주셨던 옥산마을 형님과도 함께 의논한 후 밭을 구매했다. 꽃눈이 대체로 결실로 이어지는 <홍로> 수확까지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일이 많았으나 멘토가 소개해준 ‘<홍로> 고수’의 조언을 실천하며 부지런히, 그야말로 부지런히 농사지었다. 경북 안동 임하면에서 농번기에 일손을 거들러 오시는 아주머니들과는 첫해부터 인연을 맺었는데, 둘이서 적과해놓은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부지런함만이 농사의 전부는 아니었다. 8월 중순부터 내린 늦장마 때문에 탄저병에 취약한 <홍로>가 급격히 병들었다. 한 나무의 절반 이상을 버려야 하는 참담한 지경이었다. 탄저 피해를 보지 않은 사과는 인근 묵정밭에서 나오는 곤충과 인접 야산에서 온 해충의 공격으로 상품이 될 수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실정과 다른 출하계획이었다. 늦장마와 집중호우로 인한 탄저병 피해는 다른 농가도 마찬가지여서 대체로 조기출하했다. 주변에서는 우리에게 빨리 공판장에 가져가야 버리는 것이 덜하다고 충고했지만, 그때는 제대로 된 사과로 제값을 받고 싶었다. 서두르는 것은 오히려 시류에 휘둘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듣고 싶은 충고만을 들으며 믿으려 했던 어리석음이 있었다. 균은 비를 통해 빠른 속도로 퍼졌고 수세와 나무의 면역력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고집을 부렸다. 드디어 사과를 트럭 가득 실어 공판장으로 보냈다. 두달치 생활비는 나올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실어 보냈다. 그런데 남편이 사과를 실은 채로 돌아왔다. 출하 대기차량이 너무 많아 2~3일은 기다려야 하고, 순번표대로 출하해야 한단다. 둘이서 사과가 익는 대로 한 트럭씩 만들어 출하하려 했으나, 현실은 순번이 왔을 때 가지 않으면 며칠을 대기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존의 고객들에게 직거래로 팔 수도 없었다. 본래 우리는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 ‘우리농 생산규정’에 따라 생태계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판단되는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농 자주인증제’에 따라 방제횟수도 7회로 강제해 농사짓는다. 이렇게 지은 사과는 전량 직거래로 판매했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밭을 새로 구입하며 <홍로>는 관행농으로 공판장에 일괄출하하고, <후지>는 자주인증제를 준수해 농사지은 뒤 직거래로 판매할 계획을 세웠었다. 나름의 위험분산 전략을 세우고 그에 따른 영농과 판매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직거래 고객은 저농약 자주인증제를 신뢰하고 우리 사과를 구입하는데, 이들에게 관행농으로 지은 <홍로>를 판매한다면 당장 공판장 출하 외의 다른 판로는 확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저농약 방제에 대한 신뢰는 잃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 생산자와 농원의 이름을 바꿔 인터넷의 과일 판매 사이트에 올리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상도덕에 맞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기로 했다. 공무원 사표를 낼 때 꽃길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름의 ‘유연한 용기’가 있었다. 넉넉지 않게 살아도 도시에서 나고 자란 우리 부부가 절대 가질 수 없는 야생성을 아이가 무의식에 쌓을 수만 있다면, 농촌 생활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용기만으로 버티기에는 힘든 위기가 너무 일찍 찾아왔다. 출하하려던 사과 한 트럭은 그대로 돌아왔고, 경매는 조기출하하려는 물량들이 많아 낮은 값에 낙찰됐다. 서글픈 날이 이어졌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출하 후 새벽에 들어와 잠든 신랑의 휴대전화에 끼워져 있던 전표를 봤다. 분명 한 차 가득 실어 보냈는데 계산된 금액은 그 절반도 안됐다. 신랑이 느꼈을 허탈한 마음이 전해져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으며 편지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편지 내용은 별것 없었다. ‘고생 많았고 고맙다. 우리 잘 이겨내보자….’ 그리고 밭으로 가서 혼자 사과를 땄다. 사과 한알에 눈물 한숟가락쯤 흘렸던 것 같다. 당장 내년에 써야 하는 영농비와 생활비는 어쩌나. 이 밭은 아무 농사도 안되는 곳인데 억지로 산 것 아닌가 싶어 막막하고 겁이 났던 마음이 결국 무너져 내렸다. 잠에서 깬 신랑이 편지를 보자마자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 그 전표 아닌데” 하며 지난번 것을 봤다고 알려줬다. 이번에 받은 출하대금을 듣고 “아, 고맙습니다”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지난겨울은 혹독한 단련의 시간이었으며 희망을 일구는 준비의 시간이었다. 우선 전지(가지치기)기술을 배울 수 있는 전지팀에 신랑이 합류했다. 멘토 형님이 농촌에 뿌리내리려면 귀농한 사람하고만 교류할 것이 아니라 지역청년들과 사귀어야 한다며 전지팀 합류를 권유하셨다. 더욱이 사과는 전지와 적과 등 농업기술을 많이 필요로 하는 작물이다. 전지팀에 합류한 덕분에 남편은 농사기술과 이론을 익히는 것은 물론 사과에 열정이 있는 사람들과 현장에서 부대끼며 배울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동료가 생겼다. 서로 비슷한 목표를 갖고 때로는 술잔 기울이며 속내를 털어놓을 지근거리의 친구가 생긴 것이다. 폭삭 망한 <홍로> 농사로 앞이 막막해도 서로 내색할 수는 없던 어느 날, 신랑이 호기롭게 말했다. “여보, 걱정 마. ‘청년창업농 영농정착 지원사업’에 합격해서 월급받을 거니까.” 겨우내 낮에는 칼바람 속에서 전지하고, 밤에는 창업농 관련 서류를 준비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지원자격이 되는 전지팀원들도 함께 청년창업농을 준비했다. 준비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게 되면 서로 공유했다. 매월 80만원에서 100만원 정도를 일정기간 동안 지급받고 영농에 필요한 모든 관공서 업무를 ‘프리패스’로 해결해주는 청년창업농은 절박한 동아줄이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류를 접수했다. 의성군에서 11명을 선발하는데 50여명이나 지원했단다. 1차 서류합격 발표가 나기까지 나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는 내가 호기롭게 “걱정 마, 적금 있어. 아르바이트해도 되니까 창업농 안돼도 걱정 마” 하며 큰소리쳤다. 드디어 결과를 알리는 문자가 왔고, 남편은 합격했다. 다른 전지팀원도 모두 합격해 며칠 뒤 면접을 보러 갔다. 남편에게 면접관이 물었단다. “만약에 2년간 농사가 망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남편이 대답했다. “이번에 <홍로> 농사가 망했어요. 그래서 창업농에 지원했습니다. 이 창업농 바우처로 생활비에 보태고 영농비하며 2년간 버텨보려고요.” 남편은 서류전형을 의성군 전체 1등으로 합격했고, 약 4대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합격했다. 전지팀원 모두 합격해 미안한 마음 없이 오롯이 기쁠 수 있었다. 살면서 모두가 계획대로 절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간다. 또 그렇게 어그러진 덕분에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다만 이렇게 새로운 길을 만나기 위해서는 청년창업농처럼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필요하다. 남편은 청년창업농 추가 모집을 준비하는 옆 마을 다른 청년의 서류 준비 멘토를 자처했다. 찾아온 청년의 절박한 마음을 온 마음으로 격려하고 도왔다. 우리가 그렇게 멘토를 만났고 그래서 우리도 기꺼이 누군가의 멘토가 됐다. 그럴 수 있어 고마운 일이다. 스무살 때 농촌활동을 하며 ‘나중에 그 어느 날 농사지어야지’ 했던 꿈을 현실로 선택했다. 그러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동화의 해피엔딩이 아니라, 막막한 늪에 빠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뻔했다. 다행히도 사회는 ‘청년창업농’이라는 동아줄을 건네줬고 그것을 지렛대 삼아 오늘도 풍농을 기대하며 소소하게 알콩달콩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