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코라디 항구의 불빛
콩고나 수단 같은 이웃 아프리카 나라에서 온 사람은 가나처럼 도로와 인터넷이 잘된 나라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쿠마시와 타말리 위쪽의 훨씬 북부 산간벽지에서 온 사람은 타코라디 같은 도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또 어떤 이는 가나가 캄보디아 보다 훨씬 열악한 나라였는지 몰랐다고 말한다. 여기가 한국의 60년대 말이라고, 또는 70년대 초의 풍경이라고도 말한다. 보는 이에 따라 이 도시는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코코넛 글로브 리조트(coconut grove resort)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21세기의 하와이에 있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90년 초의 베트남보다 사정은 더 나아 보이지 않는다.
타코라디에서 저녁 8시가 되면 잠드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할 일이 없다고 어떤 미국인이 말한다. 아프리카 비치 호텔에서 몰타 한 병을 마시고 하버 뷰(harbour view) 전망대에서 작은 항만을 바라보고 마킷 써클(market circle)의 재래시장을 한 바퀴 돌고나면 서너 시간 쯤 되는데 이 도시의 속살을 전부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새벽 6시면 먼동이 트고 저녁 6시면 어김없이 붉은 해가 내려앉고 나면 도시는 칠흑처럼 어둠에 싸인다. 해가 차츰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본능적 슬픔은 적도에서 없다. 외국인들은 할 만한 일이 따로 없기에 담배와 술을 더하게 되고 차츰 말수가 줄어들고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 표정의 변화가 사라진다. 스텔라 로지(Stella Rodge) 바에서 조용히 음식을 먹고 텔레비전 화면의 축구 중계를 멍하게 쳐다본다. 일행과 함께 온 사람들조차도 서로 말이 없다. 웃고 떠드는 활기찬 분위기 보다 자신에게 할당된 고독을 야금야금 씹어 음미한다. 타코라디는 이방인에게 자신이 알던 세상과는 완전히 절연된 도시이기도 하다.
슬레트나 함석 지붕 위로 세워둔 생선 가시 모양의 텔레비전 안테나가 빼곡이 들어찬 동네를 들여다본다면 타임머쉰을 타고 한국의 60년대, 루핑 천이 휘날리는 산복도로 마을이나 뒷골목을 실사로 촬영하는 무대 세트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디를 가도 떠도는 붉은 흙먼지와 소독차처럼 뿜어내는 매캐한 가솔린, 하수구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는 냄새, 검정 플라스틱 쓰레기 봉지 태우는 자욱한 연기들이 바로 실상인 것이다. 바퀴 빠진 녹슨 차량의 잔해가 먼지를 뒤덮어 쓰고 여기저기 나뒹글어진 틈사이로 염소가 지나가고 암탉이 병아리를 몰고 가면 장작이나 플랜틴(plantain) 바나나를 머리에 인 흑인여자가 지나간다. 당신이 이 가운데 서 있다면 쓰레기 매립장 같은 도시라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 우후죽순처럼 돋아난 교회와 갤러시 S3 스마트폰과 랩탑 컴퓨터와 도요타 신형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시간의 지층에서 백악기와 쥐라기의 화석이 함께 출몰하는 듯한 묘한 사물의 공존을 보게 된다.
대낮에는 주홍, 초록, 황갈색 무늬로 목과 어깨에 완장을 두른 듯한 이구아나의 축소판 같은, 어른 손바닥과 팔목을 합친 것 보다 큰 도마뱀이 뒷목을 바짝 치켜 세워 올리며 풀밭 사이를 뛰어다니며 서로 싸우는 모습은 해가지면 사라지고 화장실 모서리 천장 벽에 새끼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작은 도마뱀이 달라붙어있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한참 물끄러미 바라본다. 정지된 시공 속에서 나와 도마뱀뿐이다. 서울 명동 악세사리 가게에서 본 수정 브로치를 연상시킨다. 가방을 열자 더 작은 도마뱀이 놀란 듯 황급히 달아난다. 시간이 다시 째각거리며 살아 움직인다.
까치, 맥파이(magpie)를 모르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새도 있느냐고 되묻는다. 저기 저 새가 바로 맥파이라고 말했더니 저 새는 까마귀(crow)라고 말한다. 사물과 이름 사이의 인식 상 오차가 끼어든다. 여기의 까치도 목과 가슴이 분명한 흰색이지만 부리와 덩치가 크기에 한결 불량스러워 보인다. 앙증맞고 귀여운 까치보다는, 우는 소리와 행동이 까마귀에 더 가깝다. 이걸 까치라고 불러야 하나 까마귀라고 불러야 하나 잠시 논란 속에서 누가 그러면 ‘까마치’라고 부르자고 했다. 까마치 떼가 항상 타코라디 하늘을 높이 선회한다. 간혹 콘도르(vulture) 떼를 지상에서 만나기도 한다. “동물의 왕국”에서 사체를 뜯어먹고 사는 새의 흉한 모습이다. 보기 싫어 쫓아내었더니 껑충껑충 뛰면서 피한다. 그 모습은 텔레비전에서 본 그대로였다. 여기가 아프리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오늘 또 타코라디에서 길을 묻는다. 왜 오브로니(흰둥이)가 택시를 타지 않고 걸으려 하느냐는 반문에 질려 버린다. 인도도 없거니와 오브로니가 걸어가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택시와 트롸트롸(tro tro: 봉고)차가 오브로니가 홀로 길을 걷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경적을 빵빵거리며 정신 나간 사람 아니냐고 따라붙는다.
“칭.챙.총(Ching Chang Chong) 차이나만(China man)”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동네 어린아이들도 따라붙는다. 눈이 가늘게 찢어진 오브로니를 놀려댄다. 구걸하는 사람도 길을 걷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도보여행(walking tour)을 찬미한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도 가나에서 만큼은 걸어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시궁창에 빠지지 않으려면 땅을 보고 걸어야만 할 것이다. 잠수함처럼 간혹 고개를 들어 올리고 긴 숨을 내쉬어야 한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토마토와 고등어 썩는 냄새가 대기에 분자식을 각인시켜 놓은 듯 굴러다닌다.
가나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것이 여전히 두렵다. 붉은 핏빛이나 노란 눈빛으로 염색된 듯 보이거나, 동공이 움직이지 않거나, 좌우 안구의 형태가 다르거나, 뿌연 백태가 끼인 것처럼 보이거나 그들의 상한 눈빛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안질환을 제대로 치료받지 않아 세상이 희미하고 어둑하게 보이더라도 그냥 살아 내거나 체념해야 하는 인생들. 오늘 한량없이 부끄러워하고 고마워하면서도 묵묵히 코코넛을 쪼개어 파는 행상의 선한 눈빛을 만났다. 그런 눈빛을 만나면 곁에서 말없이 좀 더 오래 서 있고 싶었다.
드디어 시장에서 크로와상 빵집을 찾아내었다. 하나에 2 씨디를 주고 2개를 사서 부드러운 속살의 빵을 허겁지겁 먹었다. 지난 주 피자를 구워 파는 곳을 우연히 발견해 낸 것도 수확이다. 어제는 햄버거를 파는 레스토랑을 알아내어 다음 주에 한 번 가 볼 생각이다. 책방이래야 채 100권도 안되는 챌린지 북스토어(말 그대로 ‘도전’한 셈이지만)에서 Phrasal verb 옥스퍼드 사전을 한 권 사고 혹시나 하여 ‘풀:glue’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하여 이게 왠 횡재냐 하고 여섯 개를 샀다. 조그만 나무 책상을 수소문 끝에 보름만에 하나 사들였다. 책상에 놓는 스탠드 램프도 찾는데 십일이 걸렸다. 그나마 불량이라 불이 켜졌다, 꺼졌다 깜빡 걸린다. 사소한 것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흔한 것을 흔하게 얻지 못하는 나라에서 그 흔한 것을 진귀한 보물 얻듯 찾아내어 감격하고 고마워 할 줄 알게 되었다.
타임 지나 텔레비전에서 보던 아프리카의 사진이나 영상에는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이 빠져 있다. 붉은 홍토와 잿빛 하늘, 세찬 바람의 촉감, 훈제 생선 비린내, 옥수수 잎의 서걱거림, 알라 신을 찬미하는 이슬람 사원의 새벽 기도 소리, 마르지 않는 빨래의 흥건함, 어둑한 방안과 새벽의 한기, 밤사이 꿈결에서 듣는 빗줄기.....그런 모습들은 영상으로 잡히지 않는다.
땅거미가 내리고 나면 타코라디는 큰 짐승처럼 웅크리며 어둠 속에 잠긴다. 호박색의 희미한 가로등이 항만 아래에서 아련하게 피어오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과 별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대로이다. 감천 고개를 내려오며 보이는 송도의 밤바다, 건너편 영도의 불빛처럼 밝고 투명한 느낌은 없다. 뭔가 불투명하고 묵직한, 혼(混)과 돈(沌)이 흑암 속에 뒤엉켜 검은빛으로 웅웅거리는 듯 야경이 펼쳐진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항구를 내려다본다.
허공을 찢는 듯한 바람과 밤이면 늑대처럼 울부짖는 개들의 소리만 들려온다. 난생 처음 듣는 하울링(howling) 소리에 뒤척인다. 도마뱀 한 마리가 흰 벽에 삿갓따개비처럼 달라붙어 있다. 세상은 고요하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 것일까?”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이 깨어나는 시각에 눕는다. “여기는 아프리카이다”하고 중얼거리지만 현실도 꿈과 같이, 밤이면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어쩌면 모든 게 지나고 나면 꿈일지도.
*“오브로니 : White man”
가나의 토착 언어에서 오브로니는 자신들의 피부 색깔을 기준 삼아 검은색을 제외한 인간의 다른 피부는 '흰둥이'로 백인, 황인, 홍인 종에 상관없이 모두 통칭하여 그렇게 부른다. 반대로 자신들은 오비비니(검둥이)이다. 색상 개념이 다소 이분법적이지만 재미있는 발상처럼 보인다. 황색인종인 우리에게 흰둥이와 검둥이란 말은 있어도, 정작 우리를 지칭하는 낱말은 없는 것 같다. 산간벽촌에서 보기 힘든 오브로니가 나타나면 “Father(신부님)”이라고 대단히 높은 존재로 인식한다. 노예와 압제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상은
원자력 연구소에서 연구원 으로 있던 중 같은과선배님이자 통역협회 선배님께서 어느날 문득 모든것을 놓으시고
Africa 로 훌쩍 떠난 후 몇개월이 지나 협회 회원들에세 보내주신 매일 원문입니다
적도 한자락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헤매이는 한 사람과
동유럽 의 순례길에서 피땀 흘리는 원정대를 향해 숙연.....
나도 덩달아 MTB 타고 땀 좀 흘리고 ....
철인 삼종 가족들에게 어울리지 않은 글일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