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10월 11일.
옆지기와 딸래미를 대동하고 가을 비속에 정선 여행을 떠난다.
김삿갓묘로 들어가는 입구.
정선(旌善)여행을 가던 중 영월의 김삿갓 묘를 둘러보기 위해 일부러 영월길로 돌아서 간다.
3~40년전에 김삿갓 묘가 있는 곳을 알았을 때는 이곳은 비포장 도로에 엄청난 산골이였다.
가 보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이곳을 방문하기에는 여러 조건이 무척 어려운 때였다.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병연(炳淵)이고, 호는 난고(蘭皐)이다.
1807년(순조7년)3월 13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회동면(檜東面)에서 출생했다.
6세 때 조부 김익순(金益淳, 1764년 - 1812년)이 함경도(咸鏡道)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다가
홍경래 난(洪景來-亂)을 진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투항한 것과 관련하여 집안이 멸족(滅族)을 당하였다.
조모(祖母)는 관비((官婢)가 됐고, 아버지는 남해(南海)로 귀향(歸鄕)을 가서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된다.
어린 병연은 형 병하와 함께 집안 노복(奴僕)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야반도주(夜半逃走)했고,
어머니는 망내동생 병호를 데리고 여주 이천으로 피신을 했다.
그후 죄는 당사자 김익순에게만 묻고 멸족(滅族)에서 폐족(廢族)으로 한 등급 감하게 된다.
아들 손자들은 종이 되는 신세를 면하게 되어 가족이 모두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아버지 김안근(金安根)은 홧병으로 죽고만다.
김삿갓 가족은 황해도 곡산에서 경기도 여주, 가평, 광주, 강원도 평창등을 전전(轉轉)하다가
영월 삼옥리(三玉里)에 산골 깊은 곳에 정착하여 화전을 일구며 속세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이곳은 소백산 북쪽으로 경북 영주, 충북 단양, 강원도 영월의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역인 험한 산골이다.
지금의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하동면(下東面) 와석리(臥石里) 노루목"이라고 하는 곳이다.
하동면(下東面)은 2009년 10월 20일 지명(地名)이 "김삿갓면"으로 변경되었다.
조부(祖父)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김삿갓"은 20세 때 영월 동헌에서 열리는 백일장에서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홍경래난 때, 순절한 가산 군수 정공의 충절을 찬양하고, 항복한 김익순을 규탄하라.)
는
시험 제목의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한다.
이 기쁨을 어머니께 전하다가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욕했던 김익순(金益淳)이 자신의 조부(祖父)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왜 이 험한 산골까지 와서 숨어 살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 김삿갓. 그는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아무도 몰래 정처없는 길을 떠나고 만다.
위로는 금강산 · 영월 . 강계까지, 아래로는 여산 · 지리산 · 화순 동복까지 끝없는 방랑의 길을 떠돌았다.
그중에 兄 병하가 죽었을 때 잠깐 들렀다가 다시 길을 떠나고 만다.
이것이 어머니와 아내와의 마지막이 되고 만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홍성(洪城)에서 친정살이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으나,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외가에 들르지도 않고 발길을 돌렸다.
그후 김삿갓은 57세로 객사할 때까지 전국 각지를 떠돌아 다니면서 방랑 걸식하였다.
지친 몸으로 말년에 들른 곳이 "전라남도(全羅南道) 화순군(和順郡) 동복면(同福面) 구암리".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그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뒤 김병연은 지리산을 두루 살펴보고 그 선비 집에 돌아와 잠시 살았다.
김삿갓이 즐겨 찾았던 물염적벽(勿染赤壁)의 물염정(勿染亭).
물염정(勿染亭)옆에 있는 김삿갓 시비(詩碑)
이곳 "물염적벽"(勿染赤壁)에 반하여 많이 찾았다고 한다.
1863년(철종 14) 57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인터넷에서 발췌.
그의 두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헤메다 3년만에 이 소식을 듣는다.
시신을 거두어 그의 연고지인 영월 땅 살던 집 근처의 기슭에 안치하였다.
그후 모든 사람들의 생각에서 멀어졌을 때 이를 찾아 다니는 분이 있었다.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靜岩 朴泳國)선생의 노력으로 전설만 같았던
김삿갓의 묘소가 처음으로 발견되어 지금처럼 정돈이 되었다.
큰길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는 "김삿갓 유적지" 입구.
이곳에는 마땅한 주차장이 없다.
다행히도 아침 일찍이고 비가 와서인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초입에 있는 정암 박영국(靜岩 朴泳國)선생의 공적비.
我向靑山去 (나는 청산으로 가는데)
綠水爾何來 (녹수야 너는 어찌 내려 오느냐)
젊어서 내가 읽은 책에는 이 詩가 제일 먼저 나온다.
김삿갓이 집을 떠나 금강산에 들어서며 지은 詩라고 한다.
金笠先生三甲追慕詩
天生金笠大先生 (천생김립대선생 : 하늘이 김삿갓같이 큰 선생을 내셨으니)
忠節之鄕一巨星 (충절지향일거성 : 충절의 고장에 큰 별이구나.)
千里江湖皆浪跡 (천리강호개낭적 : 천리강호에 떠돌은 자취가 남았으니)
萬山花月總詩情 (만산화월총시정 : 만산의 꽃과 달빛은 모두 시의 정취에 젖었네)
길 양쪽으로 여럿의 시비(詩碑)가 있지만 우선 묘소로 향한다.
묘소는 다리를 건너 우측에 있고 살던곳은 여기서 좌측길로 1.8k를 올라가야 한단다.
주거지로 가는 초입에는 "성황당"같은 집이 있는데 설명은 없다.
저 위에도 시비(詩碑)가 줄 지어 있는데 오늘은 묘소만 돌아 볼 참이다.
다리를 건너 돌아 본 모습.
다리를 건너면 바로 우측으로 묘소가 보인다.
난고정(蘭皐亭)
해설사가 있는 집인듯 한데 문이 잠겨있다.
처음부터 이러했는지 아니면 나중에 꾸며 놨는지는 모르지만 망주석(望柱石)과 혼유석(魂遊石)모두 자연 그대로다.
똑바로 서 있지 않고 슬쩍 누워있는 망주석(望柱石)은 고인(故人)의 마음을 읽은 상당히 의도적일듯 하다.
앞으로 내가 흘러 주변이 상당히 습할듯하다.
잔디도 잘 자라지 못하는듯 새로 깔은 흔적이 보였다.
이제 내려가면서 돌에 새겨진 몇 개의 詩를 보고 떠나야 한다.
이 시(詩)는 吉州明川(길주명천)이란 시(詩)의 뒷부분이다.
吉州吉州不吉州 許可許可不許可 (길주길주불길주 허가허가불허가)
明川明川人不明 漁佃漁佃食無漁 (명천명천인불명 어전어전식무어)
"어전"은 "함경도 명천군 기남면 어전리"라고 하는데 현재는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길한 곳, 길한 곳하지만 길하지 않고, 허가 허가 하지만 재워주는 곳 없고
명천 명천하지만 사람은 밝지못하고, 어전 어전하지만 밥상에 고기는 없네."
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천대받고 지명(地名)을 비유해 쓴 詩다.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차죽피죽화거죽 풍타지죽랑타죽)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竹 (반반죽죽생차죽 시시비비부피죽)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빈객접대가세죽 시정매매세월죽)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만사불여오심죽 연연연세과연죽)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대로 살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대로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장에서 사고 팔기는 세월대로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못하니, 그렇고 그런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
이 詩는 끝의 竹자 여덟개를 빗대어 "八竹詩"라고도 불리운다.
白髮汝非金進士(백발여비김진사)
我亦靑春如玉人(아역청춘여옥인)
酒量漸大黃金盡(주량점대황금진)
世事纔知白髮新(세사재지백발신)
허연 머리 너 김진사 아니더냐
나도 청춘에는 옥인과 같았는데
주량은 점점 늘어 가고 돈은 떨어지니
세상 일 겨우 알만하니 어느새 백발이 되었네
김삿갓이 샘물을 떠 마시다 문득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며 읊은 詩라고 한다.
鄕愁(향수)
對酒慾歌無故人(대주욕가무고인) 一聲黃鳥獨傷神(일성황조독상신)
過江柳絮晴獨電(과강류서청독전) 入峽梅花香如春(입협매화향여춘)
地接關河來往路(지접관하래왕로) 日添車馬迎送塵(일첨차마영송진)
臨津關外妻妻草(임진관외처처초) 管得羈愁百種新(관득기수백종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싶어도 옛사람은 가고 없고, 꾀꼬리 울음소리만이 울적한 마음을 괴롭히는구나.
강 건너 버들가지는 마냥 싱그럽기만 한데, 산골짜기 돌아가니 梅花香氣가 봄 같구나.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목이라, 날마다 牛馬車 수레에 티끌이 날리는구나.
臨津나루 강북에는 잡초만이 무성한데, 나그네의 시름은 數많은 생각으로 새롭구나.
이 詩가 여기에는 향수(鄕愁)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過長端"(장단읍을 지나며) 라고도 되어 있다.
여기의 세번째 줄에는 "過江柳絮"의 "柳絮"(유서)는 버들의 꽃을 말함이다.
邑號開城何閉門(읍호개성하폐문) 山名松嶽豈無薪(산명송악개무신)
黃昏逐客非人事(황혼축객비인사) 禮義東方子獨秦(예의동방자독진)
고을 이름이 開城인데 어찌 문을 닫으며, 山 이름이 松嶽(송악)인데 어찌 땔나무가 없으랴.
황혼에 나그네 쫓는 일이 사람 도리 아니니, 東方禮儀之國에서 자네 혼자 오랑캐일세.
개성에서 땔 나무가 없다고 재워주지를 않아 밖에서 떨며 이 시를 썼다고 한다.
二十樹下三十客(이십수하삼십객)
四十家中五十食(사십가중오십식)
人間豈有七十事(인간기유칠십사)
不如歸家三十食(불여귀가삼십식)
스무나무 아래 설흔(서러운) 나그네,
마흔(망할) 놈의 집에서 쉰 밥을 먹네.
인간 세상에 어찌 일흔(이런) 일이 있단말인가
집에 돌아가 설흔(선) 밥 먹는 것만 못하리.
"스무나무"는 느릅나무과의 큰키나무이다.
이詩는 숫자로 모든 것을 표현한 김삿갓만의 특유한 재치라고 해야 할것이다.
寒松孤店裡(한송고점리) 高臥別區人(고와별구인)
近峽雲同樂(근협운동락) 臨溪鳥與隣(임계조여린)
稚銖寧荒志(치수영황지) 詩酒自娛身(시주자오신)
得月卽帶憶(득월즉대억) 悠悠甘夢頻(유유감몽빈)
겨울 소나무 외로운 주막에, 베게 높이베고 누우니 딴 세상 사람이네.
산골짝 가까이 구름과 노닐고, 개울가에서는 산새와 이웃하네.
하찮은 세상 일로 내 뜻을 거칠게 하리, 시와 술로써 내 몸을 즐겁게 하리라.
달 뜨면 옛 생각도 하면서 유유히 단꿈 꾸리라.
김삿갓이 개성 송도松都 근처 진봉산을 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뻔 했다고 한다.
마침 그를 발견하고 치료해준 천석사(泉石寺)의 범어스님의 도움을 받아 회복이 되었다고 한다.
그 때 몸을 회복하면서 쓴 시라고 한다.
김삿갓 샘터.
彼坐老人不似人 (피좌노인불사인)
疑是天上降眞仙 (의시천상강진선)
其中七子皆爲盜 (기중칠자개위도)
偸得碧桃獻壽筵 (투득벽도헌수연)
김삿갓이 떠돌다 보니 마침 환갑잔치하는 곳에 있다.
술과 음식이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치겠는가.
슬쩍 들어가 앉으니 행색을 보고 자식들이 와서 조용히 말한다.
'여기는 축하시(祝賀詩)를 지을 줄 알아야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행색을 보고 정중하게 나가라는 이야기이다.
그러자 김삿갓이 당당하게 지필묵(紙筆墨)을 청한다.
좌중(座衆)을 둘러보고는 한 줄을 써 내려간다.
"彼坐老人不似人" (피좌노인불사인) 저기 앉은 노인은 사람같지 않구나,,,,,,,
"뭐? 뭐야?" 구경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한다.
축하연에서 환갑노인을 사람같지 않다니,,,,,
김삿갓은 못들은 척 다음을 써 내려간다.
"疑是天上降眞仙" (의시천상강진선) 하늘에서 내려 온 신선인듯하네.
화를 내던 사람들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돈다.
"하,,,, 이런 이런,,,,,,"
모르는 척 김삿갓은 다음 글을 써내려간다.
"其中七子皆爲盜" (기중칠자개위도) 저기 있는 일곱 자식들은 모두 도독놈들이구나.
또 한번 주위사람들과 자식들이 노하여 한마다씩 한다.
하지만 김삿갓은 모르는 척 마지막 글을 써 내려간다.
"偸得碧桃獻壽筵" (투득벽도헌수연) 하늘의 천도복숭아를 훔쳐 환갑잔치에 올렸네.
자식들이 감탄하여 술상을 새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왔다고 한다.
김삿갓만의 특유한 재치로 사람들의 감정을 순간 순간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글이다.
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않구나.
아마도 하늘 위에서 내려온 신선일듯하네.
여기 있는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들이로다.
천도 복숭아를 훔쳐다 환갑 잔치에 바쳤네.
주변에 "김삿갓 문학관"이 있다.
이곳에 가면 더 많은 그의 詩를 볼 수 있겠지만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인 정선((旌善)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