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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장애화가(8)_앙리 마티스(Henri Matisse)_글 이명환
앙리 마티스(Henri Émile Benoît Matisse :1869-1954)는 1900년경 야수파 운동의 선구자이자 생애 전반에 걸쳐 색채의 표현성을 추구한 프랑스 화가이다. Matisse는 The Red Studio와 같은 그림뿐만 아니라 판화와 드로잉의 유연한 윤곽과 선형 경계성을 보여주는 테크닉의 작품들을 생성했다.
불운하게 앙리 마티스는 1941년 장암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결장조루술 대수술을 받으면서 급격하게 신체적 변화를 가져왔다. 암 수술 결과 장은 괴사 되었고 복근의 회복에 치명적인 부작용이 생겨 자유롭게 서거나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급격하게 허약해진 몸의 상태로 이전 방식처럼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작업을 할 수 있는 체력이 더 이상없었다. 하지만 앙리 마티스는 포기보다는 불굴의 의지를 던져 새로운 창조적 에너지를 발견했고 그의 전 모델 중 한 명인 러시아 태생의 아름다운 조수인 리디아 델렉터스카야(Lydia Delectorskaya)와 친구가 되었다.
예술가가 점점 더 많은 영감을 받아 종이 자르기를 주요 매체로 삼게 된 것은 1940년대 후반이었다. 앙리 마티스 조수 리디아 델렉터스카야(Lydia Delectorskaya)는 이 기간을 제2의 삶이 부여된 기간이라고 언급했다. 그녀는 “병 후에 내가 창조한 것만이 나의 진정한 자아를 구성한다. 자유롭고 해방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는 데는 그 모든 시간이 필요했다”고 회상했다.
Matisse는 재단 가위를 사용하여 손으로 그린 종이를 나뭇잎, 조류, 해초, 산호와 유사한 추상적이거나 유기적인 형태인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자르는 방법을 선택하여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한다. Lydia Delectorskaya의 도움으로 Matisse는 원하는 형태와 색상의 균형에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색상 컷아웃을 배열과 재 배열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감각적 위치와 일치하는 순간 종이, 캔버스, 판자와 같은 받침대에 붙였다.
이렇듯 장암 수술 후 기립이 활동이 불구한 변곡점을 맞이한 화가의 남은 13년간의 삶을 힐 체어 생활로 이어져 색종이 컷아웃 기법의 예술적인 콜라주 시리즈 연작으로 예술적 삶을 1954년도 84세 나이로 마감한 화가로 유명하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글로벌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1바이바이 키플링>이란 초대형 글로벌 위성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행했던 비디오 창시자 백남준 뉴미디어 아티스트(1997년 프랑스 퐁피드센터의 대대적인 20세기 새로운 장르의 시각예술을 정의하는 용어를 사용한 20세기의 뉴미디어 아트 전시 타이틀)의 힐체어에 앉아 공항을 통해 입국했던 타계 몇 년 전의 뉴스를 통해 전해졌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앙리마티스의 힐체어 모습을 보다 쉽게 상상으로 소환해 본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이동 능력의 상실로 인해 자신의 기분이 꺾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대신 이동의 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힐체어를 다리로 삼아 활력을 되찾았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 13년을 "Une seconde vie", 즉 제2의 인생이라고 불렀다. Matisse는 휠체어 사용자로서 이 기간을 통해 자신의 우선 순위를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불운한 신체적 환경에 적응하며 가장 훌륭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앙리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적 방법을 휠체어 생활에 맞게 시스템화했는데 바로 색종이 모양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Matisse는 모양을 잘라낸 색종이 조각을 벽에 걸린 큰 종이에 붙일 위치를 조수에게 알려줘 다리를 대신하며 예술표현의 기질을 활화산처럼 녹여냈다.
앙리 마티스가 임종을 앞둔 몇 년간의 시점에서 긴 막대에 끝에 연필이나 목탄을 끼워 머리 속에 가득 담긴 염감 중 일부를 벽에 걸린 대형사이즈 종이 위에 실현시키는 모습은 운명적으로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마저 사력을 다해 예술가라는 명함을 남기리라는 정열적인 행위를 실행하면서 드라마 같은 생의 마감을 준비하는 과정을 거쳐 결국 1954년 하늘의 별이 됐다.
우리 예술가들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심장을 고조시킨 구절로 받아 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시각예술가들의 DNA은 창작과 실행이라는 문제와 직결되는 정신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저하고 처절하리만큼 죽음과 맞닥뜨려지는 상황에서마저 예술가의 정신을 놓지 않았던 모습은 그 자체가 감동이자 인류의 위대한 생명력과 정신력을 대변하는 것 같아 코끝이 찡하며 전율이 흐른다.
예술가 경력에서 고난을 겪지 않는 예술은 나태해지는 정신으로 생활하는 환경을 만들겠지만 다방향의 창의적 시각을 여는 예술가는 단일직업이 아님을 다시금 깊게 사고해보는 기회를 가져 보면서 존엄하고 숭고한 임종의 순간을 예술적 마감으로 마법적인 종착지를 남겼던 앙리 마티스의 고귀한 예술영혼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1>
1984년 백남준 ( July 20, 1932 – January 29, 2006) 은 동시대적 글로벌이라는 광활한 시야의 비디오 아트 창시자로서 소수에서 다중으로, 파괴에서 질서로 들어섬을 담아낸 < 굿모닝 미스터 오웰>작품이 전파를 탄 지구촌 최대 위성 축제 프로젝트실행을 감행하였다.
1986년에 백남준은 <바이 바이 키플링 Bye Bye Kipling>이라는 명제의 비디오 아트를작품을 제작하여 위성을 통한 전 세계 도처로 중계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는 동양과 서양은 태초부터 융합할 수 없다는 20세기 초 인도의 시인 키플링에 반발하는 프로젝트로 우리나라 ,일본 ,미을 동시에 위성을 매개로하여 전개하였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병력: 다양한 건강 문제와 창의성에 미치는 영향
마티스(1869-1954)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책, 전기, 삽화에는 작가가 휠체어나 침대에 앉아 가위로 종이를 자르거나 특별히 길게 확장된 브러시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복부의 암 수술로 인해 Matisse는 힐체어에 앉아있거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보고되어있다. Matisse의 삶은 의학 저널에서 한 번도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은 다양한 건강 문제로 특징 지어졌다.
더욱이 그의 전기에는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 활동이 그의 건강과 정신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따라 건강과 예술의 역상호작용에 대한 사례가 가득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마티스의 삶과 예술에서 건강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종합적인 견해를 시도하고 있다.
마티스의 병력은 평생 동안의 다양한 신체 및 정신 신체 건강 문제에 대한 유익한 예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가 활력과 창조력을 통해 자신의 예술 작품과 삶의 문제를 어떻게 인상적으로 포착했는지 보여줌으로써 인본주의적인 의학관에 기여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이한 관계: 피카소와 마티스의 마지막 만남
피카소(1881.10.25~1973.4.8)와 마티스(1869.12.31~1954.11.3)는 1946년 마티스가 죽을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계기로 두 화가는 교류를 재개했다. 평소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그들의 필요에 무관심했던 피카소는 그가 존경하고 애정과 찬사를 구했던 마티스에 대해 현저히 다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변화된 태도의 뿌리는 앙리 마티스의 신체 악화에 대한 병적인 관심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 되었으며 다가오는 죽음에 맞서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티스는 피카소에게 있어서 희망적인 불안 치료제이자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자신감 넘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징하는 인물로 받아들였다.
Henning Zeidler 1 논문 "무상에 대하여"에서 시적으로 표현된 프로이트의 죽음에 대한 견해는 피카소의 "애도에 대한 반란"과 마티스의 상징적 불멸성 감각을 대조하는 모델이다.
마티스의 "급진적 발상": 치료 변화에 대한 시각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최근 전시회 "마티스: 급진적 발명 1913-1917"은 큐레이터들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에 기인한 마티스 예술의 돌파구에 초점을 맞췄다.
전쟁은 예술 자체, 전기 자료, 예술가 자신의 통찰력 있는 논평을 연구하여 탐구된다. 유럽의 재앙이 마티스의 신경증적 갈등을 가중 시켰으며, 그의 예술은 이러한 갈등을 새로운 타협의 형성, 더 중요하게는 승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그의 노력을 반영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승화는 마티스 전시 예술의 "급진적 창의력"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의 동시적 변화와 관련되어 논의된다. 마티스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치료적 변화에 대한 현대적 관점에서 승화의 역할을 고려하여 임상적 삽화에 적용하고 있다.
공공미술관의 앙리 마티스에 대한 폭넓은 연구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Art Museum)은 다른 기관 및 학계와 협력하여 전시회와 함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경력과 개인 생활 상태를 탐구하는 잘 정리된 작품과 에세이 개요를 정리했다.
1930년대 이전 몇 년 동안 독자는 위기에 처한 마티스를 만난다. 예술적 침체, 관련성 유지, 유산 확립에 대한 우려가 그의 예술적 과정을 짓누르고 있었고, 그의 작품에 대한 회고전 상영은 예술가가 그의 경력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대중의 인식을 신호해준 역할을 했다.
필라델피아 메리온에 있는 반스 재단( Barnes Foundation in Merion, Philadelphia)에 의뢰해 완성한 작품 'The Dance'는 종종 앙리 마티스 작업 과정과 구성에 있어서 역동적인 변화의 분수령이라 일컬어지는 주요한 작품이다.
사진을 사용하여 자신의 변화된 사항을 기록하고 잘라낸 종이조각을 사용하여 넓은 색상 영역을 수정하는 것은 그가 야수파와 오달리스크에서 벗어나 더 넓은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앙리 마티스를 한 화가로 분리된 이름으로 생각하지만, 특히 이 문헌에 반영된 것은 The Dance에서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고요(Goyo)라는 하우스 페인터와 마티스의 모델인 리디아 델렉터스카야(Lydia Delectorskaya)의 도움이 없었다면 둘 다 직접 작품을 작업했기 때문에 The Dance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표현재료 생산에서 앙리 마티스를 정바위로 후원하는 사람들의 실제 작업 외에도 다른 사람들도 그의 작업을 활성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Cahiers d'art의 편집장인 Christian Zervos는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예술가들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전파함으로써 그들의 옹호자 역할을 하는데 한몫했다. Zervos, Picasso 및 Delectorskaya와 같은 이름은 Matisse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지속적으로 독자들에게 상기시켜주는데 충실했다.
앙리 마티스의 발전된 회화 스타일을 복사하는 익숙하고 반복적인 상황의 가장 친숙한 원하는 효과의 결과를 얻기 위해 테레빈유로 영역을 지우고 그 위에 칠하는 방법을 구사했던 결과 생동감 넘치는 페인팅 캔버스, 신중하게 계획된 라인워크 등의 마티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남겨졌다.
앙리 마티스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예술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앙리마티스의 프로필 사진을 통하여 카메라 렌즈를 엄격하게 응시하는 예술가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전반적으로 인간화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편집이 동양주의적 시선에 의해 뒷받침되는 성공을 탐구하기보다는 예술가의 활력을 축하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앙리 마티스 작품의 문제화는 때론 소수의 에세이로 격하되기도 한다.
앙리 마티스의 타히티와 미국 여행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여성을 묘사하는 전환점으로 극찬 받았지만, 당시 그의 작업은 이젤 그림에서 건축의 기념비적 벽화 그림의 증가로 옮겨가는 전환점이 맞이했다.
이들 신작들은 “가까운 면밀함과 집중된 집중”을 요구하는 작품보다는 “이미지와 배경의 완전한 통합”을 추구하는 의도가 스며들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작품들이 여성을 사물로 묘사하던 것에서 사물과 하나가 되는 방식으로 변모한다는 점이며 정보의 풍부함과 넓은 폭으로 인해 이 모든 컬렉션은 Matisse에 대한 중요한 리소스가 돼주고 있다.
앙리 마티의 삶
앙리 마티스(Henri-Émile-Benoît Matisse)(1869년 12월 31일 프랑스 피카르디 르 카토 출생~1954년 11월 3일 니스 사망). 종종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주목되는 예술가. 그는 1900년경 야수파 운동의 창시자이자 지도자였으며,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색채의 표현력을 추구했다. 그의 주제는 주로 가정적이거나 비유적인 것이었고 독특한 지중해의 열정이 담긴 힐링의 영향을 주재한다.
성장기
1868년 마티스는 12월 말 프랑스 북부 르 카토-캉브레지(Le Cateau-Cambrésis)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Emile-Hippolyte-Henri Matisse는 곡물 및 철물 상업에 종사하여 부유한 가정 속에 마티스는 프랑스 피카르디의 보앵앙베르망두아(Bohain-en-Vermandois)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티스는 20세가 될 때까지 예술과는 거리가 먼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1882년부터 1887년까지 그는 Saint-Quentin의 중등학교에 다녔으며, 1888 년에는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서 1년간 법학을 공부하여 법률행정자격증을 취득한 뒤 1889년에 Saint-Quentin으로 돌아와서 법률 사무소 서기원으로 근무했다.이무렵 맹장염에 걸려 몇 달 동안 집에서 쉬어야 했기 때문에 그 일은 오래 하지못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미술용품을 사주면서 그림에 대한 사랑을과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지역 École Quentin-Latour에서 이른 아침 드로잉 수업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1890년에 심각한 맹장염 발병에서 회복되는 동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어머니가 준 오일 상자에 채색된 복제품을 모사하는 것부터 입문하였다. 곧 그는 Le Cateau에 있는 조부모님의 집을 장식하는 재능의 잠재력을 발휘한다.
1891년에 앙리 마티스는 법조계 일을 버리고 전문 예술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아마 우리시각예술가들 대부분이 어떠한 계기의 전환점으로 인해 창의력을 발휘하는 전업화가가 되겠다는 과정이 유사한 상황이라서 피부까지 와닿을 정도로 이해가 된다.
비록 이 시기 그는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압살롬과 같은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지만 전형적인 좌안 보헤미안 미술 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나중에 “나는 일에 뛰어 들었다”고 말했다. “내 어린 시절 내내 들어왔던 원칙에 따라 '서둘러라!'라는 말을 표현했다.
앙리 마티스 왈 ‘나도 부모님처럼 서두르고, 강요받지 않고 일을 서둘렀습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나는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내 삶에 이질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힘에 의해.' , 또한 "일종의 천국"을 발견하고 예술가가되기로 결정했다는 먼 훗 날 그가 남겼던 말이다.
북부 프랑스의 중산층에서 자란 앙리 마티스의 19세기 노동 복음은 그의 경력 전체를 대표하게 되었고 곧 철저한 부르주아적 외모, 즉 금테 안경을 끼게 되었다. 짧고 섬세하게 손질한 수염, 통통하고 고양이 같은 몸, 보수적 분위기로 입은 옷, 이는 파리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에게는 이상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앙리 마티스는 곧바로 아방가르드의 일원이 된 것은 아니였으며 1891년 공식 École des Beaux-Arts 입학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사립 아카데미 Julian에 등록하게 된다.
그곳의 원장은 엄격하고 학구적인 William-Adolphe Bouguereau였다. 마티스가 이렇게 보수적인 사설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놀랍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는 한때 암탉과 가금류 사육장을 그린 생캉탱 화가의 추천에 따라 입학했다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 생칸탱화가는 당시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의 후기 인상주의에 이미 익숙한 파리의 구식 취향을 가진 지방 사람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그의 초기 그림은 1850년대 프랑스 현실주의자들이 선호했던 17세기 네덜란드 방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빠리 보자르에서의 모로 아틀리에 입학
1892년 마티스는 입학 시험을 치르지 않고 École des Arts Décoratifs의 저녁 수업과 École des Beaux-Arts의 상징주의 화가 Gustave Moreau의 아틀리에를 위해 Académie Julian을 자퇴했다.
관용적인 교사였던 모로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개성을 발전시키고 루브르 박물관의 보물로부터 배우도록 격려하는 모로교수를 무척 존경했다.
처음에 그는 전통적인 스타일로 정물화와 풍경화를 그렸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어느 정도 능숙해졌습니다. 마티스는 Jean-Baptiste-Siméon Chardin, Nicolas Poussin, Antoine Watteau와 같은 초기 거장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Édouard Manet과 같은 현대 예술가 및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샤르댕은 마티스의 가장 존경받는 화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미술 학생으로서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네 장의 샤르댕 그림을 복사했습니다.
마티스는 1899년 모로가 죽은 후 교수가 된 편협한 화가 페르난드 코르몽(Fernand Cormon)에 의해 강제로 떠나게 될 때까지 오랜 중단을 겪으면서 아틀리에에서 계속 공부했다. 그 후 그는 30세가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초상화가 외젠 카리에르(Eugène Carrière)에게 간헐적으로 교육을 받는 사립 아카데미에 한동안 자주 다녔다.
1896년 마티스는 살롱 드 라 소시에테 내셔널 데 보자르(Salon de la Société Nationale des Beaux-Arts)에 5 점의 그림을 전시하여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는 살롱 협회의 준회원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Woman Reading』(1894)등 2점을 프랑스 중앙정부에서 매입했다. 이 시점부터 그는 예술가로서나 인간으로서 점점 자신감과 모험심이 커졌다.
그 후 1896년과 1897년 동안 그는 브르타뉴(우리나라 지형과 비교하면 인천지역 위치)로 탐험을 떠나 베테랑 인상파 화가인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를 만났고, 보수주의자들의 항의 속에서 막 프랑스에 기증된 구스타브 카유보트 컬렉션(Gustave Caillebotte Collection)에서 인상파 걸작 시리즈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브르타뉴 해안의 벨일 섬에 있는 호주 화가 존 피터 러셀을 방문했으며 , 그에게 인상주의와 러셀의 친구였지만 당시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반 고흐의 작품을 접한다. Matisse의 스타일은 완전히 바뀌었고 나중에 그는 "Russell은 나의 선생님이었고 Russell은 나에게 색 이론을 설명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앙리 마티스의 색상은 한동안 더 가벼워지고 동시에 더 강렬해졌다. 1897년에 그는 문체적 해방을 향한 첫 번째 큰 발걸음을 내디뎠고 The Salon with The Dinner Table에서 사소한 스캔들을 일으켰다. 여기서 그는 Pierre-Auguste Renoir 유형의 광채와 진한 빨간색과 녹색의 확고한 고전적 구성을 결합했다.
1898년에 그는 툴루즈 출신의 젊은 여성인 Amélie Parayre와 결혼하고 1년 동안 파리를 떠나 런던을 방문하여 J.M.W. Turner의 작품을 접하며 관심을 가졌으며, 이 후 프랑스 령의 지중해 섬 코르시카 (Corsica)에서 일하면서 지중해의 햇빛과 색상에 대한 지속적인 인상을 받았다.
앙리 마티스_ 야스파 (Fauvism ) 탄생의 중심에 서다 : 창시자적 행보
1898년에 신인상파 또는 점묘파의 이론가이자 적극적으로 이즘 활동을 펼쳤던(조르주 쇠라 사후) 폴 시냐크(Paul Signac)는 문학 평론지 La Revue Blanche에 그의 주요 선언문 " 외젠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 (D'Eugène Delacroix au Néo-Impressionnisme.")를 출판했다.
1899년 파리로 돌아온 Matisse는 기사를 읽고 즉시 새혁신적인 장르에 동조하고 합류하지는 않았지만 캔버스에 병치된 점(프랑스어로 점)을 사용하여 망막에 추가 색상 혼합물을 얻는 점묘법 아이디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앙리 마티스는 유명한 모더니스트 딜러인 Ambroise Vollard로부터 Cézanne의 그림인 The Three Bathers를 구입하여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연구를 더욱 발전시켰다. 소년의 머리 고갱의 작품; 그리고 반 고흐의 그림. 종종 순수한 색상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절친한 친구인 Albert Marquet와 함께 그는 파리의 뤽상부르 정원, Arcueil 교외, 그리고 센 강이 내려다보이는 그의 아파트의 열린 창문에서 야외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티스는 또한 볼라르(Vollard)로부터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앙리 로슈포르 (Henri Rochefort)흉상 석고 모형을 구입했으며, 1899년에는 저녁 조각 수업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생애 동안 제작한 약 60점의 작품 중 첫 번째인 그의 초기 3차원 작품은 로댕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동물 조각가로 여겨지는 앙투안 루이 바리(Antoine-Louis Barye )의 영향도 드러낸다.
1899년 이후 앙리 마티스는 살롱 전시를 중단하고 점차 현대미술의 최전선이자 활발한 창작이 이뤄지며 발표되고 열렬히 논의되는 파리계에서 친숙한 인물으로 부각 되었다. 1901년 그는 공식 전시회 심사위원단이 받아들일 수 없는 화가들을 위한 어떠한 규제가 없고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된 1884년 설립된 심사위원이 없는 절충주의 살롱 데 앵데팡당(Salon des Indépendants)에 처음으로 출품했다.
1902년에 앙리 마티스는 Berthe Weill의 작은 갤러리에서 열린 그룹 전시회에 참가했고, 이듬해 그와 모로의 아틀리에와 Académie Carrière의 옛 동급생들은 새로 창설된 자유주의 단체인 Salon d'Automne의 진보적 파견단 소속일원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종 재정적 파탄의 위기에 처했으며, 1900년에 그는 샹젤리제 지구에 새로운 만국박람회의 일부를 수용하기 위해 건립되고 있던 그랑 팔레(Grand Palais) 장식 작업 일을 해야만 했다.
앙리 마티스 와이프는 생계유지를 위해 옷가게를 열었으나 1901년 기관지염으로 인해 오랫동안 안정적인 휴식을 취해야 했다. 1902년에 그는 세 자녀인 마거리트(Marguerite), 장(Jean), 피에르(Pierre)와 마티스 부인(Amélie Matisse)과 함께 보앵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결정을 내렸다.
1904년 6월 앙리 마티스 34세가 넘을 즈음, 볼라드 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한 쓰라진 경험을 했으나 새로운 도전에는 희망을 걸고 1905년 여름을 스페인 국경 근처 지중해의 작은 프랑스 어항인 콜리우르에서 앙드레 드랭과 함께 보냈다.
지중해의 이글거리는 눈부신 햇살 속에서 앙리 마티스는 자신이 '점묘법'이라고 불렀던 것으로부터 빠르게 탈피하여 완전한 해방의 길을 선택했다. 첨가물 혼합 접근 방식에서 요구되는 세심하게 배치된 작은 두드리기는 자연스러운 붓놀림의 소용돌이와 판으로 바뀌었고, 이론적으로 사실적인 색상은 빨간색과 녹색, 주황색과 파란색, 노란색과 보라색 등 보색의 감성적인 표현으로 폭발했다.
이 새로운 자유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콜리우르(Collioure)에서 완성된 <열린 창>과 9월 파리에서 그린 아내의 초상화 <모자를 쓴 여인(Woman with Hat)>이 있다. 그 해 가을, 두 그림은 폭력적인 색채를 실험했던 여러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Salon d'Automne에 전시되어 새로운 혁신의 산물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파리 평론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이 그룹을 야수(Les Fauves)라고 불렀고, 이로써 20세기 회화의 첫 번째 중요한 '이즘'인 야수파(Fauvism)의 탄생을 알리는 즉시 Matisse는 모두가 인정하는 리더로 추앙받게 된다.
앙리 마티스와 아멜리에 마티스 Amélie Matisse의 부부의 연을 맺다
Amélie Parayre에서 태어난 Amélie Matisse는 Armand와 Catherine Parayre의 딸인 Beauzelle과 Paris에서 자랐다. 아멜리는 1897년 파리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우연히 나란히 앉았던 앙리 마티스와 인연이 되어 교제하다 이듬해인 1898년에 결혼을 했다.
앙리 마티스의 부인이 된 Amélie Matisse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그녀의 부모가 정치적이며 자유롭고 미래 지향적인 사고 집단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으나 분명한 건 1898년에 고군분투하는 파리 예술가 앙리 마티스와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Amélie Matisse의 아버지 Armand는 학교 교사였으며 Avenir de Seine et Marne 신문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그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프랑스의 모범적인 집안이었다.
앙리 마티스와 결혼한 Amélie는 1899년 Rue de Chateaudun에 모자 가게를 열었고, 이 부부는 이전 관계에서 온 Matisse의 딸 Marguerite와 함께 길 바로 아래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사랑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관계는 실질적인 공생관계이기도 했다. Amélie는 남편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동시에 남편의 그림 다음으로 자신이 두 번째가 될 것 임을 화가의 부인으로 존재를 후한 이해심을 발휘하여 가족은 늘 화목을 유지했음이 짐작된다.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고 성공했으며 Matisse가 성공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갖출 수 있도록 열심히 헌신적인 노력을 이어왔다. 앙리 마티스 부부는 결혼 초기에 매우 가난했고 마티스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술가였다.
그들의 두 아들 Jean과 Pierre는 각각 1899년과 1900년에 태어났다. 1902년에 아멜리의 부모는 고용주의 사기로 인한 금융 스캔들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Amélie는 세상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그녀의 남은 생애 동안 그녀를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Amélie는 Matisse의 경력에 깊이 관여하여 예술가의 아내이자 개인 관리자, 모델의 역할을 했습다. Matisse가 Sergei Shchukin이라는 자신의 미술상을 찾는 것을 포함하여 더 많은 독립을 추구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Issy-les-Moulineaux의 더 큰 집으로 이사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그곳에서 Matisse는 이전에 공유했던 스튜디오 집보다 더 부재하고 혼자 있을 수 있었다. Amélie에 대한 의존성이 부족한 것은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1939년 Amélie가 Matisse의 조수로 고용되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Matisse의 모델이자 지적이고 창의적인 파트너에 더 가까운 Lydia Delectorskaya에 의해 창작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추월당했다고 느꼈을 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Matisse의 삶에서 자신의 역할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 Amélie는 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청했다. 그는 아내를 선택했지만 연말까지 헤어졌다.
아멜리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2차 세계대전 나치독일 치하의 프랑스 레지당스 저항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Amélie는 1958년에 사망했으며 Matisse와 같은 묘지에 묻혔다.
앙리 마티스의 리비에라(Riviera) 시절
큐레이터와 과학자들이 1913년에 촬영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강변 목욕하는 사람들"의 흑백 사진을 채색하기 위해 어떻게 협업했는지 궁긍하지 안흐세요?.
1912년 마티스의 조각품은 뉴욕 시에서 전시되었고 그의 그림은 쾰른과 런던에서 전시되었다. 1913년에 그는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New York Armoury Show에서 13장의 사진을 선보였으며, 전시회 작품이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의 Blue 누드 작품 시리즈 중 한 점을 태워서 유익한 홍보효과를 거뒀다.
그러나 중년, 증가하는 풍요, 확립된 국제적 명성, 제1차 세계 대전의 혼란, 대중 소동에 대한 혐오감 등이 점차 결합되어 그를 아방가르드의 중심에서 고립시켰다. 그는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겨울을 보내기 시작했고, 1920년대 초에는 대부분 니스나 그 주변 지역에 거주했다.
앙리 마티스의 심리적 위압감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하여 작품의 구상이 덜 대담해졌고 수단도 덜 경제적이 되었다. 이 시기의 많은 화가 및 작곡가(특히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처럼 마티스도 현대화된 고전주의에 편승했다. 그러나 〈목련이 있는 오달리스크〉(1923~24), 장식적 배경에 장식된 인물(1925~26) 등 전형적인 니스 시대 작품은 충분히 인기를 끌 만한 걸작이다.
진화는 마티스를 덜 근면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1920년에 그는 Serge Diaghilev의 발레 Le Chant du Rossignol 제작을 위한 세트와 의상을 맡았다. 그는 몇 년 동안 방관했던 조각으로 돌아왔고, 1930년에는 기념비적인 여성 누드 부조인 The Back의 네 번째이자 가장 추상적에 가까운 버전을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1909년부터 간헐적으로 작업해 왔다.
그는 항상 그랬듯이 영감을 받을 생경함을 눈에 넣을 이국으로의 여행을 터났다. 1921년 노르망디 해안의 에트르타 (<*2. Étretat> : Claude Monet_양산을 쓴 여인(1886)작품의 배경의 석회암 절벽으로 유명한 소도시),1925년에 이탈리아, 1930년에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타히티로 갔다. 1933년에는 베니스와 파도바를 방문했고, 펜실베이니아주 메리온에서는 대형 벽화 '춤 II'의 최종 버전을 완성하고 설치했다. (반스 재단의 Albert C. Barnes)
<*2>
Étretat 소도시해안의 그림같은 석회암 절벽 위의 모네의 양산을 쓴여인 서 있는 작품이 탄생했다.
왼쪽으로 향하는 양산을 쓴 여인(1886)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
양산 쓴 포즈를 취한 사람은 모네의 며느리인 수잔 오슈데(Suzanne Hoschedé)이다. . 이 작품은 현재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여자가 오른쪽을 바라보는 시리즈도 있다.
에트르타 소도시 석회암 설벽
https://www.worldatlas.com/geography/sea-cliffs-of-etretat-france.html
Claude Monet_양산을 쓴 여인(1886)작품
http://www.lankaart.org/article-monet-la-femme-a-l-ombrelle-45124830.html
마티스는 파리에 온 첫해부터 에칭, 드라이포인트, 석판화 및 관련 판화 제작 기법에 관심이 있었고 가끔 여러 장의 판화를 제작했다. 1932년에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의 〈시 Poésies〉 판에 삽화로 29점의 동판화를 출판했는데, 이 판화에서는 유연한 윤곽과 선형 경제에 대한 그의 재능이 시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수단의 순수성'과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그는 특히 Henry de Montherlant의 Pasiphaé(1944년 출판), Pierre Reverdy의 Visages(1946), Lettres portugaises(1946), Charles Baudelaire의 Fleurs du에 삽화를 그리는 등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점점 더 활발해졌다. 말(1947), 피에르 드 롱사르(Pierre de Ronsard)의 Florilège des Amours(1948), 샤를 도를레앙(Charles d'Orléans)의 시(1950). 주로 흑백 기법으로 된 이 책들과 함께 그는 예술과 삶에 대한 자신의 성찰로 구성된 책인 Jazz(1947)를 출판했으며, 그가 "가위로 그리기"라고 명명한 기법으로 만든 화려한 색상의 삽화를 남겼다. 색종이를 잘라낸 후 함께 묶었다.(원하는 색상을 얻기 위해 직접 구아슈를 칠함).
생애 말년에 그는 아내와 헤어지고 다 자란 자녀들과도 뿔뿔이 흩어져 다소 고독한 화가생활을 했다. 1941년 장암 수술을 받았을 때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지내는 것이 일상이 되어 지금 껏 창작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발목을 잡힝것도 부족해 1950년 이후 그는 천식과 심장병을 앓았으나 삶의 목적의 전부인 화가로서의 정신력은 더욱 강해졌다.
1930년대 초 그의 모델 중 한 명이었던 충실한 러시아 여성의 보살핌을 받은 그는 니스가 내려다보이는 Cimiez의 Old Hôtel Regina에 있는 큰 스튜디오에서 살았다. 종종 그는 긴 막대에 부착된 크레용의 도움을 받아 스튜디오 침대에서 벽화 크기의 프로젝트를 작업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최종 성취에는 창조적 에너지가 쇠퇴하거나 슬픔을 느끼는 조짐이 없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그의 전체 경력 중 가장 대담하고, 가장 성취되었으며, 가장 차분하고 낙관적인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남은 생애를 화가가 세상에 던지는 초인적인 에너지를 다 부어 제작하는 명작을 남기리라는 정신의 흔적임에 세상은 읽으며 감동을 전해 받는다.
앙리 마티스의 성공과 명성
독보적인 자신만의 기법을 찾은 후 마티스는 더 큰 성공을 거두기까지 지칠 줄 모르는 작품제작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때론 영감을 얻기 위해 장기간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여행을
떠났다.
그는 파리 교외에 대규모 스튜디오를 구입하고 파리의 유수 갤러리 베른하임 준(Galerie Bernheim-Jeune)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파리의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과 마티스의 중요한 그림인 댄스 I(Dance I)과 음악(Music)을 의뢰한 러시아 사업가 세르게이 슈킨(Sergei I. Shchukin)과 같은 저명한 수집가들에 의해 구입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작품에서 마티스는 채도가 높은 색상, 평면화된 그림 공간, 제한된 디테일, 강렬한 윤곽 등 그의 시그니처 요소로 관객을 계속해서 즐겁게 하고 놀라게 했다.
Piano Lesson(1916)과 같은 일부 작품은 마티스의 평생 라이벌인 파블로 피카소가 개척한 운동인 입체파의 구조와 기하학을 탐구했다. 그러나 색상과 형태에 대한 그의 급진적인 접근에도 불구하고 마티스의 주제는 종종 전통성에서 벋나지 못했다.
자신의 스튜디오(1911년 레드 스튜디오 포함)의 장면, 친구와 가족의 초상화, 방이나 풍경 속의 인물 배치 등의 작품을 통하여 정통성의 흔적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917년 마티스는 지중해에서 겨울을 보내기 시작했고, 1921년에는 프랑스 리비에라에 있는 니스로 이주했다. 1918년부터 1930년까지 그는 작업실 내 신중하게 준비된 환경에서 따뜻한 조명과 패턴이 있는 배경을 활용하여 여성 누드를 가장 자주 그렸다. 그는 또한 이 기간 동안 판화 제작 분야에서 표현범위의 폭넓을 넓혔다.
앙리 마티스에 관한 최초의 학술서는 1920년에 출판되었으며, 이는 여전히 진행 중인 현대 미술사에서 마티스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앙리 마티스의 화가인생 종착지
Matisse는 1931-33년에 Pennsylvania의 수집가 Dr. Albert Barnes의 미술관을 위한 Dance II라는 제목의 벽화와 같은 몇 가지 주요 의뢰를 받았다. 그는 또한 일련의 한정판 시집에 책 삽화를 그렸다.
말년의 앙리 마티스의 작품은 그의 초기 예술적 혁신만큼이나 실험적이고 활기가 넘쳤으며 삶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색종이 컷아웃의 생생한 이미지와 나란히 배치한 1947년 저서 Jazz가 포함되어 있다.
마티스가 1943년부터 1948년까지 별장을 갖고 있던 리비에라(Riviera) 언덕 마을 방스(Vence)에서 그는 3년간의 계획과 실행 끝에 1951년에 현지 도미니카 수녀들을 위한 로자르 성당을 완성했다.
그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몇 개를 디자인하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시작으로 벽화를 그렸고, 의복과 예배용 도구를 포함하여 내부와 외부의 거의 모든 것을 디자인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카톨릭 예배당이 완성되기 전에 그는 여러 면에서 그를 1950년대 초반의 "가장 젊고" 가장 혁명적인 예술가로 만든 거대한 색종이 컷아웃 작업(재즈의 일러스트레이션에서 했던 작업을 확대한 작업)을 하고 있다.
앙리 마티스는 장 암수술 후 다리가 되어준 휠체어에 앉거나 침대에 누워 숭고한 예술적 감흥을 시각화하는 카톨릭 성당 프로젝트 완성을 끝냈다.
말년의 앙리 마티스의 작품은 그의 초기 예술적 혁신만큼이나 실험적이고 활기가 넘쳤으며 삶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색종이 컷아웃의 생생한 이미지와 나란히 배치한 1947년 저서 Jazz가 포함되어 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그 자체로 컷아웃된 작품을 고안하게 되었는데, 특히 밝은 파란색 종이에서 잘라내어 벽 크기의 배경 시트에 붙인 표현력이 풍부한 여러 인간 형상 시리즈(예: Swimming Pool, 1952)가 있다.
마티스는 1954년 11월 3일 84세의 나이로 니스에서 사망했으며 인근 Cimiez에 묻혔다영면에 들었다. . 그는 여전히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다.
블루시대
동시대적으로 마티스, 피카소, 이브 클라인의 작품과 파란색에 대한 매력이 공통점이다,
앙리 마티스의 컷 아웃 포트폴리오 < 재즈> 출판
종이 컷아웃을 사용한 마티스의 첫 번째 창의적인 여행은 전쟁 중인 1943년에 그가 제작하기 시작한 활기 넘치는 책이 있었다. 포트폴리오에는 화려한 색상, 시적 텍스트, 즐거운 서커스 및 연극 테마가 특징인 100권 한정판으로 1947년에 출판되었다. 마티스는 이 음악 스타일을 "반음계적이고 리드미컬한 즉흥 연주"로 연관시켰기 때문에 책 제목을 재즈로 지정했다.
단순함과 놀라운 창의적 정교함이 결합 되어 충분히 강력하고 혁신적이라면 어떤 매체로 제작되든 상관없다는 깨달음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https://luxebeatmag.com/henri-matisse-cut-outs-tate-modern/?format=pdf
https://www.ordovasart.com/exhibition/the-artists-room/#Artists
https://www.moma.org/calendar/galleries/5137
https://www.pinterest.co.kr/manubet/la-chapelle-du-rosaire-de-vence-matisse/
앙리 마티스의 대표작들
마티스의 걸작: 방스의 묵주 예배당(Matisse’s Masterpiece: Vence’s Chapelle Du Rosaire)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