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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Conscience) 정신분석학에서
P.-L. Assoun, Les Notions philosophique, Dictionnaire, PUF, 1992, p.429-430.(P.3299)
- 아순(Paul-Laurent Assoun, 1948-), 프랑스 철학자, 정신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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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순(Assoun, 1948-)이 쓴 항목 “의식”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넘어서, 의식 일반을 다루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 같다. 의식 일반을 세분화 또는 미분화하여 설명하는 방식이 어떻게 전개될까? 아마도 아순의 설명방식일 것이다.
프로이트가 벩송을 또는 프랑스 심리학을 읽었을 것이다. ‘의식’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주체와 대상으로 다루는 방식은 부분에서 종합 또는 전체를 다루는 방식인데, 이는 지식의 종합과 확장의 방식일 뿐이다. 문제는 필자 아순이 여기서 말하지 않았지만, 의식은 생성하고 변화하며 어느 경향성을 실현하려고 노력 중에 있는 ‘뭣’이다. 이 “뭣”꼬는 소크라테스의 과제 였다. 아마도 싯달다의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아순이 쓴 이 짧은 글은, 내가 읽은 프로이트에 관한 한, “의식”에 대해 가장 잘 요약된 글이다. 프로이트 관심자는 원문과 대조하여 용어 하나하나에 주의하면서 읽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 글은 정신분석학의 해석이나 치유에 관한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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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다루는 방식이 여럿이라 한다.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의식하는’ 것으로 보아 철학은 “철학하다”이래로 의식을 다루었다. 의식은 우주를 관통하는 어떤 힘(에너지)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온의식이 있고, 그리고 생명체 속에 나누어가지는 부분이 있다고 하면 각 생명체의 작은 의식들이 있다. 이 작은 의식들에서 불가분의 개별적 의식이 자아의식이 될 것이다. 이 자아의식들이 자아(moi, 인격성)를 훌륭하게 발현하기 위해 모여서 활동하는 자기의식(사회의식, conscience de soi)들도 있다. 이런 자기의식들 중에서 자기들이 만든 체계와 제도가 최고 또는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의식들이 있었는데 이를 절대의식(conscience de Soi 온자기의식)라고 한다. 그런데, 루소 이래로 최고의 힘 있는 자 또는 최상위의 하나는 없으며, 20세기 들뢰즈 이래로 최상위 또는 최고위의 절대자라는 것을 상정하는 이들이 이미 광기(소외된 자) 또는 신앙(파라노이아)에 빠진 자라는 것이며, 상정된 세계는 없으며, 천국도 부활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에게서는 먼저 주장하고 죽을 때까지 굽히지 않는 것을 순교처럼 생각하게 하는 망상에 빠진다.
철학은 어쩌면 소외되지 않고 또한 신앙과 망상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자발성과 자유를 발현할 수 있고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했고, 이런 노력을 하는 힘 또는 능력을 프쉬케(영혼)에 있다고 보았다. 그 영혼은 경험적 과거를 전부 지니지는 못할지라도 필요한 과거들(추억들)을 간직하는 능력이 있어서, 이런 필요에 따른 인식을 지성이라 한다. 다른 한편 선험적으로 교감과 공감을 하는 어떤 능력이 있어서 타인에게 배우지 않아도 태어나면서 종의 유전에 의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 있는데, 이를 본능(직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개인 스스로도 일상에서는 이런 능력(직관)을 갖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산다. 언제 절실하면 나올 것이지만 평생에 깨닫게 할 절실함이 없이도 살 수도 있다.
미국 심리학은 어제와 연관, 기억과 연관 등에서 현재에 등장하지 않은 의식활동은 알 수 없다고 하며, 행동으로 등장한 것만을 다룬다고 하며 행동심리학[행동주의]이 있다. 다른 한편 의식하고 행동했는지를 아는 것을 다루지, 무의식적으로 행동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고 다룰 수 없다고 하여 인지심리학만을 심리학으로 다룬다. 이 둘은 의식의 영역에서 무의식, 잠재의식, 기억 등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행동과 인지만을 다룬다는 것이다. 이는 공시태 속에서 재현하는 것으로, 사회성 또는 자기의식(절대의식)에 속하는 것만을 다룬다는 것인데, 그 재현이 제국에 맞는지 안 맞는 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삼원성(가족관계)를 다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이 식민지를 다루는 학문만이 학문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즉 식민지의 자발적 예속을 의미한다[일제의 부역자의 후신들은 일제와 미제에 자발적 예속을 한다].
제국의 심리학은 영혼의 외화 된 겉보기만을 다루고자 하는데, 이는 제국의 자기의식에 속하는 개인들이 웃을 수 있을 때, 식민지 인민들은 그들처럼 웃지 못하는 것과 같고, 공시태로서 재현은 사회성을 기준으로 하기에, 제국에 속하지 않은 인민들은 웃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과 같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통시칸에서 웃고 있을 때, 이태원 참사의 가족 친지들은 울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심리학에서는 이항이 방향이 달라서 상호 소통이 없다. 즉 한쪽은 다른 쪽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도 또는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메타심리학적 난제(la crux metapsychologica)의 난제가 생긴다. 이항 대립에서 절대주의 신봉자와 천국신앙자들이 상대를 허무주의, 악의축으로 만들어 놓고서, 이런 난제를 해소하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치(癡)졸함 인지를 철학사가 근대화의 맹점을 드러내면서 보여 준 것이다.
이 난제가 마누라 죽고 통시칸에서 웃는 자의 모습처럼 보이면서, 정신분석학이 성립한다면 정신분석학이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망자에 대해 목 놓아 우는 이는 그래도 망자와 같이 살았던 과정이 있는 것이고, 웃는 자는 이미 다른 삶을 예약할 과정이 있는 자이다. 외화 심리학을 넘어서, 제국의 정신분석학은 살았던 과정을 다루고자 하면서도 예약할 과정에 있는 자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이다. 미국 심리학이 외화된 모습을 다루듯이, 정신분석학도 초자아를 끌여들여 전자기의식(conscience de Soi) 속에서 자아를 찾고자 한다. 이 영혼을 다루는 이 두 가지 방식이 제국주의에 속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벩송이 답한다면 한마디로 아제의 비결정성을, 하나는 결정성으로부터 다른 하나는 어째거나 결정된 것의 재현으로부터 라고 다룬다는 것이다.
미국 심리학과 비엔나 정신분석학은 결정론을 바탕으로 둔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라고 말한다면, 기껏해야 원자론적 유물론과 관념연합론을 바탕으로 할 것이다. 조립과 조작, 실험과 재현을 감당할 수 있는 “자아들”의 예를, 즉 광신자집단의 예를 제시하면서, 즉 그 미친 사례들을 제시하면 치유와 환대를 이야기할 것이다. 이는 탐만치(貪慢癡)에서 오는 것이다. 근대사회의 광기의 시작은 탐욕이며, 그리고 자아의 오만이 제도와 체제의 획일화를 가져와서 전쟁을 치닫게 했고, 치졸함이 덧붙여서, 즉 사이비 집단의 종교처럼 이기심에서 자기조직만이 착하고 정의롭고, 성스럽다고 하는 치사함에 빠져서도 자랑으로 여기는 풍토를 만들었다. 이기심의 조장으로 근대화의 극한을 가는 탐만치의 현실판이 윤정부의 모습이 아닌가.
저항의 저항이, 오랜 문화적 전통에서 금수강산의 유상수의 저항이 거세다는 것을 기존의 제도와 체제 종사자들이 알고 있기에, 저항에 대한 저항이 광기의 모습으로 거세다. 저항의 저항은 제국의 성은을 입어야 하는데, 제국은 별로 신경쓰지 않으니, 제국의 마름인 일본에게 부역하고 상태인데, 초자아의 성은이 없으면, 거울에 비친 자아의 모습이라도 빌려와야 하는 데, 상상의 자아가 거울에 비친 자아의 모습을 초자아로 치장하는 것이 법률의 해석과 언론의 미사여구가 하는 일이다. 인민의 저항에 대해 제도의 저항이, 심층의 분출에 대해 표면의 저항이, 자기의 길을 잃어버렸다. 대중의 길을, 백성의 길을, 민중의 길을, 인민의 길을 버리고 법과 정의의 길을 간다고 하는데, 그 법과 정의는 저항의 거울이었지 제국의 모습도 아니었는데 제국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통시칸에서 웃는 일도 없을 것이다. 통시칸처럼 혼자서 웃을 공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 인민 주권의 권력은 문이 열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도리가 빠져 문짝이 뜯겨져 나가 없어졌다. 5년이 지나지 않아도 누구나가 다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심리학이 미국 심리학과 비엔나 정신분석학과 다른 점은, 철학사의 통시적으로 영혼이 ‘뭣’이며 어떻게 다루었느냐를 묻고, 그 문제를 제기한 철학자들은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를 되묻는다. 프랑스 심리학에는 현상의 제시와 재현이 문제거리가 아니라, 생성의 인식과 재인식을 문제 삼는다.
따라서 18세기의 알리에네(aliéné 소외)가 자연으로부터 소외인지 인간으로부터 소외인지를 한참 따져보았고, 그러고 나서 19세기에 소외가 정신병리학의 대상인지 아닌지, 즉 인간이 사회제도를 만들어서 소외가 발생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제도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무너뜨려야 하는지를 문제 삼는다.
20세기에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망상을 심는 자본제국과 같은 이런 제도를 만들어야 하느냐, 또는 이런 제국이라는 제도가 인간에게 정신병들(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네니)을 만드는 것이 아니냐를 문제 삼는다. 제도가 인간에게 맞다는, 또는 인간을 이롭게 평등하게 한다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학문에서는 정신병들이 생성하는 이유를 밝힐 수 없기에, 왜냐하면 제도가 광기의 질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제도는 자기 제도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을 단죄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제도가 내부적으로 이질성들의 발현으로 인해 무너질 판이다.
제국은 작은 전쟁들을 만들면서 인민자주 자발성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제도, 이 체제와 다른 공동체를 만들 수 없을까? 어떻게 만들까?라는 생각이 정상이지, 이 제도에 저항하는 자들을 미친자, 빨갱이, 악의축으로 만드는 자들이 정신이상자(정신병자)가 아닌지를 탐구하는 것이 정신병리학의 후신들이다. 따라서 21세기는 망상의 파라노이아가 아니라, 새로운 생성과 새로운 공동체의 교감과 공명을 찾는 스키조프레니가 주제가 될 것이다. .
요즘 망상자들이 여전히 매체에서 발언권이 있다고 여긴다. 이차 가해자라는 말을 쓰는 이들이 이기심의 파라노이아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차 가해자라 말의 두 방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광기의 집단이 하느님을 집단의 졸개로 만들면서 공개 광장에서 또는 제복을 입혀 천국이라고 여기고 심판할 집회를 스타디움에서 나찌처럼 공개 행사하는 것이 파라노이아이라는 논리를 전개한 것이 프랑스 정신병리학의 과제였다. 이 편집증이 부의 획득에는 침묵하면서 상호침투하는 공감에는 절단을 하는 것이 이차 가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푸꼬가 근대화과정이 얼마나 광기에 사로잡혔던 가를 고고학적으로 분석하였다. 가정, 학교, 병영, 공장, 사물실, 병원, 감옥 등이 광기를 은폐하며, 자연과 더불어 자발성을 발현하는 인민의 길을 막고서(1차가해) 인민을 제도 속에 감금하려고 하였던 것이 2차가해이다.
푸꼬가 탐만치의 용어를 알았더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탐만치를 벗어난 그것은 무상보시(아카페, 자비, 자애, 사랑)가 답이다고 했을 것이다. 정신분석하는 곳에는 탐만치가 넘쳐나기 때문에, 정신분석은 광기를 소외를 분석을 하는 것이다. (55WMBD)
[프로이트의 첫째 구도는 의식의 원인에 대한 탐구하는 의식에 대한 과정에 대한 인식이 있으며, 생성과정에 관심을 드러낸 점에서 프로이트는 ‘원인성’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1차 전쟁이 끝난 후에, 프로이트는 이상하게 방향을 잡았다. 들뢰즈/가타리가 비판하듯이, 프로이트가 근대철학적(이항대립)사고를 받아들임으로서 신앙의 삼원성이 슬그머니 끼어들면서, 생성보다는 현실에서 상황들의 영향관계에 더 주목한 것 같다. 이런 전쟁과 더불어 외적 연관들이 자아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구성 또는 구조의 기본틀을 가정하는 쪽으로 기운다. 즉 가족적 관계로 설명을 바꾸었고, 게다가 인식의 삼원성의 도움으로 정신병을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통시태보다 공시태로 전환하여, 구조주의에 빠져버렸다.
유럽에서 20세기 전반에 구조주의가 등장했던 것은, 논리와 공시태, 현상과 재현에서 통일성의 우선을, 게다가 주체의 통일성을 작업과 조작의 우선성을, 전제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전쟁은 주체의 승리가 아니라 주체의 상실인데, 왜냐하면 인간이 주인임을 강조하다가, 누가 주인인지를 판가름하는 전쟁을 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주인이라니.
이원 대립에서 주체의 오만과 치졸함에서, 주체가 만든 성과로서 구성주의와 구축주의를 믿고서, 이 들을 종합하는 구조주의가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도 인간의 논리적 사고에서 오는 오만이었다는 것을 둘째 전쟁을 겪고 난 뒤에야 깨닫는다. 인간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이 구조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프랑스에서 스피노자 연구에서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전환기에 니체를 수용하면서, 들뢰즈에 의해 벩송이 재조명되고, 들뢰즈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로 생명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푸꼬도 성의 역사를 쓰면서 철학적 사유를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자는데 동의하게 된다. (55W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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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Conscience) : 정신분석학에서
[개요]
철학적 반성의 특권적 용어인 의식은, 사유가 의식 그 자체와 인접성이 있다는 원리(ce principe)를 또한 지각력있는(aperceptive) 종합이라는 원리를 지칭한다. 의식은 정신분석학에 의하여 영혼적 기능처럼(comme fonction psychique) 재(再)정의 되었고, 더욱이 일종의 구조적 동요(vacillation, 주저)에 종속되어 있는 것 같다. - 이 구조적 동요란 무의식(l’inconscient, das Unbewusste)이 지칭하는 것이다. 만일 의식이 반대 추론에 따라서(a contrario) 근본적으로 무의식의 침입에 의해 재(再)정의 된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이런 부정적 사실은, 이 부정적 사실이 매우 강하다고 할지라도, 의식이 지칭[지시]하는 문제를 단번에 규제하는데 충분하지 못하다.
무의식적 과정들의 메타심리학적 정교화과정은 어떤 기능(une fonction)을 문제제기하는데 정당하게 효과를 갖는다. 프로이트에 앞서서 심리학은 이런 기능을 마치 하나의 사실(un fait) 또는 하나의 “능력”(une “faculté”)처럼 고려했다. 독일어 용어들의 이원성(la dualité même) 자체는 개념 그 자체에 속하는 내적 경향성을 지칭한다: 의식은 상태(un état)와 존재(un être)를 동시에 지칭한다. 여기서 상태란 베부스트하이트(Bewusstheit, 의식성)로서 의식성(“consciencité)”으로서 생각된 사물이며, 존재란 베부스트자인(Bewusstsein, 의식존재)으로서 진실한 의식적 존재이다.
한편 전자(Bewusstheit)의 내포는 순수하게 서술적임이 드러났으며, 후자(Bewusstsein)의 내포는 이론화 작업을 요구하며, 이런 이론화작업에게 프로이트는 의식 “기능”의 메타심리학적 정교화작업으로 형식으로 정당화하였다. - [의식의 재현을 다룸에서 서술적 작업은 현상학에서 의식 기능의 정교화(초자아, 자아, 이드) 작업은 정신분석학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프랑스 정신병리학은 인간이 자신의 완성을 위해 사회를 만들었는데 왜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서, 소외된 인간이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로 이르게 되는지를 탐구하였다. 한편으로는 산업 사회가 광기로 다른 한편으로 제도와 체제가 억압과 폭력의 도구화로 간다는 것을 폭로하고, 인간이 스스로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지를 점검한다. - 산업사회의 광기는 20세기 후반에 이라크, 리비아, 아프카니스탄 등에서, 냉전의 계속으로 폭력성은 21세기 우크라이나에서 이루어진다. (55WMB) 이]
[내용]
말하자면 사람들이 프로이트에게서 “의식”의 개념정의 자체 고유한 방식을, 서술적 의미에서와 달리,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메타심리학적 정의의 진실한 실체는 이런 기능을 구축하는 전반적 작업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첫째 의미에서 “의식하다는 무엇보다 먼저 순수하게 서술적 항목(용어)(rein deskriptiver Terminus)이다. 이 항목은 가장 무매개적이고 가장 보증적인 지각작용에 관여하고 있다.”(자아와 이드(Das Ich und das Es, 1923; Le Moi et le Ça), 전집 13, 240.) 그러나 정확히 이런 “상태”[(Bewusstheit)]는 덧없고 휘발하는 특성에 의해 번역된다. 정신분석학은 철학적인 “의식주의(conscientialisme)”에 반대하여 무의식에게 - 이 무의식은 마치 의식적이 되려하는 (또는 의식적이 다시 되려하는) “잠재적(latent)” 성향인 것처럼 - 참조사항을[지시사항을] 도입한다. 달리 말하면 “정신분석학은 의식 속에 영혼적[심리적] 본질을 자리잡게 할 수 없지만, 의식을 마치 영혼적[심리적] 성질처럼 고려해야만 한다. 이 영혼적 성질은 다른 성질들에 덧붙여질 수도 있고 또는 부재로서[없는 것처럼] 남아있을 수도 있다.”(위책, 239)
[둘째의미에서] 프로이트가, 마치 서술적 접근을 넘어서, 심리과정들의 실재적 원인론을 정교화함에 있어서 동기화되었고 필연적이게 했던 것처럼 여기는 것을 “심리적[영혼적] 역동성(la dynamique psychique)”이라 지적 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심리과정들의 실재 원인론은 억제(le refolulement)의 문제거리를 도입할 것을 강요한다. 억제의 문제제기는 위상적 정교화(l’élaboration topique) 속에 프로이트가 빠져 들어간다. “원리”-“사실”로부터 의식은, 전의식과 “무의식”과 동일한 자격으로, 체계적인 “장소(lieu)”가 된다. “bw”(Bewußtsein)라는 약자의 출현은, 어떤 자격박탈(déchéance, 쇠퇴)보다 많은 것으로, 의식이 기능적 장소로 환원(la réduction)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환원주의”(ce réductionnisme)는 메타심리학적 정교화의 기원에서부터[1895년부터] 나타난다. 심리학 초고(Entwurf einer Psychologie; fr. Esquisse de psychologie scientifique, 1895)에서, 의식은 마치 “성질들(qualités)”을 전하는 것처럼 단번에 [암호로부터] 해독 되었다(정신분석학의 탄생(La naissance de la psychanalyse, 1956)(프랑스판), 328). 따라서 그것은 [의식]과정의 질적이고 지각적인 안면(l’envers, 반대면)이다(질적인 면들은 자체는 양적인 경제[아낌]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꿈의 과학(Science des rêves)(편집 번역 1926)에서 의식이 마치 “심리적 성질들의 지각작용의 감각기관”(die eines Sinnesorgans zur Wahrnehmung psychischer Qualitäten)(전집 2-3, 620.)의 재현처럼 정의된다고 이해한다. 이처럼 지각작용과 의식의 연대성을 마지막으로[결정적으로] 주장하게 되어 있었다. 그 연대성은 의식의 명증한 특성을 보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의식을 말할 때, 각자는 가장 내밀한 경험을 통해, 작동되는 무엇에 대해 무매개적으로 안다”(정신분석학 요약(Abrégé de psychanalyse, 1938)(출판 1940)의 제4장이 그것을 상기시키듯이, 전집 17권 79.) - 그러나 또한 [프로이트] 그 연대성을 둘째 체계에 대립시키게 허용해 주는데, 이 둘째 체계는 첫째 체계에게 심리적 등록(l’inscription psychique)(Pcs/Ics)을 가능하게 한다.
이중 등록의 체계는 의식의 이중 지위를 설명한다. 한편으로 의식은 끊임없이 의식 자체를 저넘어로[넘어서] 귀환하게 한다(이것은 소위 말하는 의식의 메타-심리학적 지위를 번역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람들은 의식을 통해서만이 무의식에 접근할 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심리[영혼]=의식이라는 철학적 착각의 전제에게, [다른 한편] 의식의 절대적인 저넘어[초월]에 대한 신비적 자리[입장]에게 동시에 반대하도록 한다.
이런 “이원론”이 프로이트에게 의해 끊임없이 다시 사유하도록 요구했던 것도 역시나 그대로 남아있다. 만일, 이런 의미에서 이 가장 주목할 만한 시도에서, 은유(une métaphore)에, 즉 마술적 덩어리(Wunderblock, le bloc magique)의 비유에 기대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우연(un hasard)이 아니다. 마술 덩어리의 비유란, 표면의 자치를 생각하게 해주고, 동시에 유연하고 동시에 강박적인 양상들에 따라서 “둘째 체계”로 표면의 뒤엉킴(intrication)을 생각하게 해준다.
의식-지각작용(Pc-Cs)의 체계는, - 지각작용을 받아들이지만 지속적 흔적을 간직하지 못하는 체계 – 심리장치의 “자극 방패막(pare-stimulus)”를 가지고 있는 그 심리 장치의 “백지상태”(feuille vierge)와 비슷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무의식이, 의식-지각작용체계의 수단을 통해서, 외적 세계를 향해 더듬이들(les antennes)을 펼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반대로] 더듬이들은 외적 세계로 자극에 마치 혼 줄이 난 후 인 것처럼 재빠르게 후퇴한다.”(프랑스판, Résultats, idées, problèmes II, 123). 의식은 이리하여 불연속적 기능의 양태에 연결되어 있다. - 그 [소]제목은 “시간의 재현에 대한 출현의 토대에서”이다.
사람들은 원리-의식의 연관에 의해서 전복의 효과를 본다. 원리-의식은 의식-생성의 필연성이 동시에 그것의 “소멸” 가능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프로이트는 자기 자신 자백에 따라서[자기 분석을 통하여], 의식의 기능적 불가사의를 어느 정도 폭로하는 문제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위하여, 은유의 자원들[재료들]을 강화하였다.
사람들은 또한 첫째 위상으로부터 둘째 위상으로 이행이 문제의 복잡성의 척도를 무엇으로 제공할 것인지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의식은 문제의 복잡성을 지시하는 만큼이나, 의식은 그 복잡성을 어느 정도 구현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지각/전의식/무의식(Pc-Cs/Pcs/Ics)의 삼원론(la trilogie, 삼부작)이 자아/이드/초자아의 삼원성(la trinité)으로 이어지자마자, 의식은 있는 그대로 이름지어졌던 기능적 원리이기를 그친다: 그 원리는 다른 심급들과 연관에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원리는 자아에 관련[참조]시킨다: 즉, 자아는 이드에서 나왔고, 그 이드의 변모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의식/지각작용(Pc-Cs) 체계의 매개작용(저 위에서 연구했던 양상론에 따르면)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자. 의식/지각작용(Pc-Ps) 체계에 관하여, 프로이트가 “자아의 핵심(noyau, Kern)”에 대해 사용했던 표현은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 그 표현은 심급의 “발생(genèse)”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소개에 귀착한다. 만일 “자아는 또한 무의식이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의식은 “무의식적 개체의 부차적[이차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이드가 있었던 거기에서 자아가 도래하기(advenir)위한 구조적 가능성이다.
이리하여 프로이트가 의식의 특수성(spécificité)에게, 그리고 정확하게 의식을 “위치화하기”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그는 의식적 존재가 “체계들 사이에 구별기준을 제공할 수 있는 어떤 방식도 없다”는 것을 더욱더 경험하게 된다(「무의식에 관하여(Das Unbewusste, L’Inconscient, 1915), 전집 10권, 291)」) 거기에서 그것은 좌절의 고백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 있다는’ 징후에게 속한 중요성을 믿는다는 사실 자체의 실험작업이다. ‘의식 있다’는 것은 ‘심리적 삶의 메타심리학적인 진솔한 개념작업’에 방해물[장애]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존재(Bewusstsein)의 이론을 의식 생성(Bewusstwerden: devenir-conscient)의 사유에 의존하게 해야만 할 것이다. 이 때에 철학적 사유는 자발적으로 반대 질서(l’ordre inverse)로 나갈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정신집중(l’investissement, 심리투여)과 재현(la représentation)에 대한 모든 문제제기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경제적[아낌] 측면, 위상적 측면, 역동적 측면들에 관하여, 프로이트 사유의 변동들(les fluctuations)은 이런 사실들의 기호(le signe), 즉 의식이 소위 말하는 메타심리학의 십자가/핵심(la crux metapsychologica)라는 사실의 기호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의식이란, 소위 심층들의 심리학(Tiefenpsychologie)이 - …을 실체화 함(hypostasier)이 없이 의식에게 권리를 주면서, 표면(Oberfläche)에 대해 사유를 - 의식의 한계처럼 사유하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5W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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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첫째 체계또는 첫째 위상도식(과정도식): 1900년 이래로 의식-지각, 전의식, 무의식 / 1e topique : W[Wahrnehmung]-Bw (Pc-Cs pour Perception-conscience / conscient), puis vorbewusst (préconscient → pcs), unbewusst (inconscient → ics) verdrängt (refoulé)] - [Ubw, « Ics » en français) (préconscient → pcs)]
어느 설명에서 첫째에서 의식 지각작용을 체계라고 한다. (Le système perception – conscience (Pc-Cs)
둘째 위상도식(역동도식): 1923년부터, 자아, 이드, 초자아 : la seconde topique par rapport à la première topique : Ich (moi), Es (ça), Überich (surmoi)
1895 심리학 초고(Entwurf einer Psychologie, Esquisse de psychologie scientifique)(Manuskript; gemeinsam mit Josef Breuer) (1950년 출판)
1915 논문 「무의식(Das Unbewusste, L’Inconscient, 1915)」에서 프로이트는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 1861-1937)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의식에 관한 논문은 무의식에 관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해야 했다. 무의식은 재인식과 동등한 가치이다”(« L'article sur l'inconscient doit exposer une nouvelle définition de celui-ci, laquelle équivaut à une reconnaissance »)고 한다. / 프로이트는 이 논문에서 “억제된 내용들은 충동의 대리자들이라 불린다”고 한다(Dans l'article de Freud sur L'inconscient (Das Unbewusste, 1915), les contenus refoulés de l'inconscient sont appelés « représentants de la pulsion », parmi lesquels compte « essentiellement le représentant-représentation »).
프랑스어판 Métapsychologie(1915-1917)(Puf, 2010) 여기에는 많은 논문이 있는데 그 중에 「충동과 충동의 운명(Triebe und Triebschicksale, 1915)」도 있고, 「상례와 멜랑꼴리(Deuil et mélancolie, 1917)」도 있다. [그런데 독일어판은 1940년에 나왔다고 하는데]
1917년 논문 「꿈의 해석의 메타심리학적 보충(Metapsychologische Ergänzungen der Traumdeutung, 1917)」 [독일어판 Métapsychologie는 1940년에 나온 논문집이고, 1990년 판에서는 「Das Ich und das Es(1923)」도 실려있다고 한다.]
1923(67살) 자아와 이드(Das Ich und das Es, 1923; Le Moi et le Ça), dans Essais de psychanalyse, tr. S. Jankélévitch, Payot).
[불어판 (Essais de psychanalyse, 1922?):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Au-dela du principe du plaisir, 1920)”, “집단심리학과 자아의 분석(Psychologie collective et analyse du moi, 1921)”, “자아와 이드(Le moi et ça 1923)”, “전쟁과 죽음에 관한 현실적 고찰들(Considerations actuelles sur la guerre et sur la mort, 1915)” 네 편이 들어있다. ... 이 책이 1922(?)년 출판되었다고 하면 자아와 이드가 실릴 수 있었던가... fr.wiki. Les premières traductions françaises datent de 1922, 1923 pour les Trois essais sur la sexualitéet en 1926 pour la Science des rêves, in Jean-Pierre Bourgeron, Marie Bonaparte et la psychanalyse à travers ses lettres à René Laforgue, Éditions Slatkine Genève, 1993, p. 136. / 1923년에 성에 관한 세 가지 담론(Trois essais sur la sexualité)(1923) 1926년에 꿈의 과학(Science des rêves)(1926)을 번역했는데 이것은 편집된 것이다. (45RLH)]
1926 『억제, 징후, 고뇌(Inhibition, symptôme et angoisse)』(1926)
« Résistance et Refoulement », dans Introduction à la psychanalyse
1927(71살) 착각의 미래(Die Zukunft einer Illusion: L'avenir d'une illusion, 1927),
「페티시즘(Fétichisme)」1927. in La Vie sexuelle, PUF, p. 137.
1930(74살) 문명 속의 불만/ 문화에서의 불안(Das Unbehagen in der Kultur, 1930: Malaise dans la civilisation (1929)
1937 「끝난 분석과 끝날 수 없는 분석」(1937)[셋째 텍스트(1937): Analyse terminée et analyse interminable]
1938 정신분석학 요약(Abrégé de psychanalyse, 1938)(출판 1940)(출판 Abriß der Psychoanalyse 1940).
1938 Résultats, idées, problèmes(I, 1890 à 1938; II 1921-1938), 프로이트가 1938년에 쓴 것인데 프랑스에서 1985년에 Résultats, idées, problèmes I,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85, p. 187-213, II, 1998. - 독일어판 Nachtragsband Texte aus den Jahren 1885 bis 1938 1987, mehrere Auflagen; Nachdruck beim Fischer Taschenbuch-Verlag 1999,
1956 정신분석학의 탄생(La naissance de la psychanalyse, 1956) : Lettres à Wilhelm Fliess, notes et plans (1887-1902), suivi de l' Esquisse pour une psychologie scientifique, réédition Paris, PUF, 2009,
1948 아순(Paul-Laurent Assoun, 1948-), 프랑스 철학자, 정신분석가. 1970년 생끌루 고등사범, 1987년 정치과학으로 박사. 프로이트와 니체(Freud et Nietzsche, 1980). 프로이트주의(Le freudisme, 1990(« Que sais-je ?»), 메타심리학(La métapsychologie, 2000(« Que sais-je ?»), 라깡(Lacan, 2003)(« Que sais-je ?»).
(10:21, 55WMD)
첫댓글 뉴스 민에서
[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조심해야 할 종교적 비유
글쓴이 장정일 –2023-03-03 14:33
아순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장정일의 흥미있는 우화적 기능에 대한 비판이다. (56N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