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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SGI의 날 기념제언
평화의 천지(天地) 인간의 개가(凱歌)
인류 의식에 입각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인간주의’를 시대정신으로!
제33회 「SGI의 날」을 맞이하여 세계 항구 평화의 기원을 담아, 나의 소감의 일단을 말해 두고자 합니다.
혼미의 도를 더해가는 글로벌 사회
약 반세기에 걸쳐, 국제사회를 주도해 온 냉전 구조가 종결 된지 이제 ‘세기’를 넘어 20여년의 세월이 경과했습니다만, 그에 대신할 새로운 세계 구조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라이너스·폴링 박사(노벨 평화상, 노벨화학상 수상자)라고 하면, 살아계시는 동안 나와 4번 만나 대담집을 출판(1990년 10월)하였고 유지를 받들어 ‘라이너스·폴링과 20세기’전(展)도 세계 각지에서 개최했습니다.
박사가 대담집의 첫머리에서 “향후 세계정세의 동향을 생각하면, 나의 가슴은 뛰어오릅니다. 용기가 솟아납니다. 소련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리드로 현실에 세계 군축의 조류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인류가 처음으로 ‘이성(理性)’과 ‘도리(道理)’에 맞는 길을 걷는다. 그러한 세계로의 회전이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생명의 세기’의 탐구」) 라고 밝게 전망하셨습니다. 당시 90세를 눈앞에 둔 한 평화의 투사의 온화한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유감스럽지만, 그 후의 움직임은 박사의 기대를 크게 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글로벌리제이션(세계화)의 불가피한 흐름 속에, 그 선두인 미국을 중심으로 ‘신(新)세계 질서’의 움직임이 한때 떠들썩하게 선전되었습니다만, 새로운 알력이 연이어 생기더니 순식간에 퇴조를 피할 수 없게 되어 현재 상태는 무질서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톱니바퀴를 역전시켜서는 안 됩니다. 온갖 고난을 물리쳐서 인류 의식에 입각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모색하고 구축해 나가지 않으면 글로벌 사회는 혼미의 도를 더해 갈 뿐입니다. 그렇지만 질서의 모색이 여러 가지로 시도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1월 15일~16일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열린 ‘문명의 동맹포럼’(주1) 등이 그 일례지요.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해서는 문화적인 적대감을 극복하는 노력이 불가결하기 때문에 75개 이상의 유엔 가맹국 및 국제기관이 참가한 포럼에서 유엔의 반기문 사무총장은 “여러분은 각각 다른 문화적 배경이나 전망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명의 동맹’이 극단주의에 대항하여, 우리의 세계를 위협하는 분단의 움직임을 진정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방법이라는 공통의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라며 평화를 향한 행동의 제일보를 촉구하였습니다.
또,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연두(年頭) 회견에서 인간성의 중시와 연대 등을 핵심으로 한 문명 정책을 제시한 후, “20세기의 체제 그대로, 21세기의 세계를 만들 수 없다”라며 개혁의 일환으로써 현행 G8서밋(주요국 정상회의)을 중국, 인도, 브라질, 멕시코, 남아프리카의 5개국을 더한 ‘G13’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경청할 만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전부터 서밋의 참가국에 중국이나 인도 등을 더해 ‘책임국 정상회의’로 발전적 개편을 시행하여 보다 글로벌한 형태로 책임의 공유를 도모해야 한다고 호소해 왔던 만큼, 이 제안에 깊이 찬동하는 바입니다.
원리주의(原理主義)로의 경사(傾斜:기울어짐)가 곳곳에서 표면화
그런데 냉전 종결 후에 지향된 ‘신세계 질서’가 내걸었던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유’이며 ‘민주주의’입니다.
양자 공히 그 자체는 트집 잡을 데가 없지만, 한번 그것을 다른 정치 문화 속에 뿌리 내리고자 한다면 얼마나 힘든가. 그 뿐만 아니라 ‘자유’나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는 곳도 유지 향상의 노력을 게을리 하면 순식간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타락해 버린다. 이점에 관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89년 11월) 직후의 SGI 제언에서 나는 플라톤 (「국가」)의 통찰을 바탕으로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즉 ‘자유’라고, ‘민주주의’라고 해도, 도착점이 ‘욕망의 무리’를 낳고 그로 인해 ‘청년의 혼의 성채’가 무너져 버리면 구제할 수 없는 무질서 즉 카오스를 부르고 끝에 가서는 결국 사태 수습을 위해 ‘한 마리의 웅벌(강력한 지도자)’을 대망하게 됩니다. ‘민주제(民主制)’는 ‘참주제(僭主制)’로 쇠퇴(주2), 그 역행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그 경종은 결코 기우(杞憂)가 아니었습니다. 금융 주도의 세계화가 어긋난 듯한 움직임은 세계적 규모의 격차를 가져와 배금주의와 불평등감을 만연시키고, 그것이 하나의 요인(최대의 요인이라 할 수 있는)이 된 테러 행위는 확산의 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테러나 범죄가 발생하는 구조적 요인을 분석하여 치밀하게 대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힘으로 누르려고 하면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은 역사의 교훈입니다. 힘에 의한 질서는 오히려 무질서, 카오스에 가깝습니다.
내가 불법자로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풍조를 틈타 오늘날의 ‘원리주의로의 경사(傾斜)’라고도 해야 할 현상, 심성(마음)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종교적 원리주의뿐 아니라 민족이나 인종과 관련된 에스노센트리즘(ethnocentrism 자민족중심주의)나 쇼비니즘(chauvinisme 배타적 애국주의), 레이시즘(racism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적 도그마(교의), 혹은 시장원리주의에 이르기까지 카오스를 틈타 우리 사회 속에 횡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만사에 ‘원리’ ‘원칙’이 ‘인간’보다 우선적으로 선행되어 ‘인간’은 그 하인이 된 것입니다.
각각의 분야의 세세한 정의는 그만두더라도, 그러한 ‘원리주의로의 경사(傾斜)’를 단적으로 요약하면 일찍이 아인슈타인이 남긴 “원칙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원칙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 전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리·원칙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 이 철칙을 관철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칫하면 손쉽고 간단한 ‘해답’이 준비되어 있는 원리·원칙에 의지하기 쉽습니다.
시몬·베유의 비유를 빌리자면, 인간이나 사회를 나쁘게 하는 ‘중력’에 이끌려 인간성의 핵이라고도 해야 할 ‘당신 자신’은 어딘가에 매몰 돼버린다. 우리들이 표방하는 인간주의란 그러한 ‘원리주의로 기울어지는 것’과 대치하여 그것을 멈추고 쉼 없는 정신 투쟁에 의해 자신을 단련하여 인간에게 주역의 자리를 되찾게 하려는 인간복권운동(人間復權運動)인 것입니다.
사면초가에서 자기를 관철한 지드
여기서 원리주의와 인간주의의 대치라는 점에서 잊지 못할 유명한 에피소드 하나를 상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희대(稀代)의 휴머니스트인 프랑스 작가 앙드레·지드와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1936년 6월, 경애하는 M·고리키의 중병 소식에 지드는 서둘러 모스크바로 갔지만, 그 다음날, 고리키는 사망. 장례식과 일련의 행사를 끝낸 후, 이전부터 바램도 있어 1개월 정도 지방을 여행했다. 그 감상을 11월 초순 「소비에트 여행기」로 써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 책은 프랑스는 물론 구미 각국이나 일본에서도, 확실히 역사적이라고 할 정도로 떠들썩한 논쟁을 야기한 듯합니다.
내용은 지드가 러시아 혁명과 그 후의 소련의 움직임에 대해 충분한 역사적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점차적으로 나타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병리(病理)에 대해 오늘날 보면 너무나 조심스럽게 비판의 메스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이 날카롭고 핵심을 찌르고 있다는 것은, 소련이 붕괴된 오늘날, 누가 보아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붉은 30년대’라고 하여 전체주의와 싸운 스페인 내전(주3)의 영향도 있어 많은 지식인과 청년이 한꺼번에 좌익으로 쏠려 소련을 향해 희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만큼 좌익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던 지드의 경고는 학계, 저널리즘, 정계 속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찬반양론이라고 해도 대다수는 ‘반대’이며, 그 중에는 지드를 배신자로 취급하는 사람도 많아 그는 고립무원(孤立無援 고립되어 도움을 받을 데가 없음)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사면초가 속에서, 지드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에게 성실한다’는 일점에 입각하여 이렇게 단언합니다.
“나로서는 나 자신보다 소비에트보다 더 중대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인류이자 인류의 운명이며, 인류의 문화이다”라고.
인간주의에 입각한 보편적 토대
지드는 과장된 표현을 싫어할지 모르지만, 명쾌하게 요점을 이야기 한 실로 인간주의 선언이라고도 해야 할 역사적 유언입니다.
지드에게 있어 휴머니티(humanity))란 오늘날 낡고 손때 묻은, 그래서 그다지 공감을 일으키지 않게 된 휴머니즘이 가져오는 어감과는 달리, 극도로 잘 닦여진, 이것 외에 정의의 근거를 구할 수 없는 보편적 토대였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 라고 술회 했듯이,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도 좋을 ‘문화’ - 자타의 존중, 차이나 다양성의 존중, 자유나 공정, 관용 등 정신적 유산을 뒷받침하는 보편적 가치였다. 그 신념이 시류에 저항한 불굴의 정신 투쟁을 지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 휴머니티의 보편적 전개는 불전(佛典)에서 설하는 “법성의 연저(淵低)·현종의 극지(極地)”(일체 제법이 근거로 삼는 근본 진리)를 연상시킵니다.
불법을 기조로 하는 인간주의란, 그 보편적 토대 - 불성이라는 누구나가 갖추고 있는 금강불괴, 청정무이한 마음을 ‘심연대(心蓮臺)’(마음의 연화대:부처가 앉은 연화 대좌)라고 명명한 것은 보편적 토대, 근거를 잘 이미지화 한 것입니다 - 를 벗어나지 않고, 종파성은 물론이고 모든 주의·주장의 상위, 민족이나 인종의 상위, 사회를 구성하는 위계질서의 순종과 거역 등을 상대화하여 올바르게 재구축해 가는 것을 근본 특징으로 한다. ‘원리’가 아닌 ‘인간’이 주역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따라서 불전에서는 “그러므로 팔만사천의 법장은 자신 일인의 일기문서이며, 이 팔만법장을 나의 심중에 내포하여 갖고 품어 가졌노라. 나의 신중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와 법과 정토를 내 몸 밖에서 생각하고 원하며 구함을 미혹이라 하고 이 마음이 선악의 연을 만나 선악의 법을 만들어 내느니라” (어서 563쪽~564쪽) 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팔만사천의 법장’이란 직접적으로는 석존 일대의 설법을 가리킵니다만, 부연하자면 ‘차이(差異)’의 세계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차이’를 넘어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차별이 없는 평등한 경지를 찾아냅니다. 일체는 거기에서 시작하여 거기로 귀착됩니다. 알파(출발점)이자, 오메가(궁극)인 것입니다. 모든 원리주의는 그 점이 거꾸로 도착(倒錯)되어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스스로 만든 것의 노예가 된 약소함
반세기도 훨씬 전 프랑스의 휴머니즘에 대한 연구와 소개에 생애를 바친 와타나베 가즈오 (당시 동경대학 교수)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거칠게 불어 닥친 광신(狂信 원리지상주의)의 폭풍우를 되돌아보면서 ‘종교의 인간주의화’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제2의 종교개혁이 새로운 루터 새로운 칼뱅에 의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며, 그 방법은 기묘한 표현이지만, 종교의 인간주의화 밖에 없다. 종교의 인간주의화란 ‘아편’적인 것은 모두 버리고, 신(神)조차 인간을 위해서 존재함을 인지하고, 인간 자신이 만든 것으로부터 기계로도 노예로도 되기 쉬운 인간의 약소함에 대해 자신도 반성하고 타인에게도 가르쳐 르네상스시대 이래 인간이 획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천명(闡明)하는 역할을 맡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이래 60년, 그 이후의 그리고 오늘날의 종교 사정을 돌아보면 그의 급진적인 문제 제기는 아직도 미완성(未完成)의 물음으로 계속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원리주의라는 말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은 종교의 본연의 자세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결코 언제까지나 미완성인 채 방치해 두어서 좋을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종교가 평화구축의 원동력은커녕 전쟁이나 분쟁의 가담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나는 ‘21세기 문명과 대승 불교’라는 제목의 하버드 대학의 두 번째의 강연(1993년 9월)에서, 종교를 가지는 것이 인간을 ‘강하게 하는가 약하게 하는가’ ‘선하게 하는가 악하게 하는가’ ‘현명하게 하는가 어리석게 하는가’ 라는 관점을, 종파성을 초월해 도입해야 한다라고 자계(自戒)의 마음으로 강하게 호소한 것입니다.
종교가 사람들의 평화와 행복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종교가 인간을 ‘강하게’ ‘선하게’ ‘현명하게’ 되도록 촉발하고 뒷받침 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것은 ‘종교의 인간주의화’와 거의 동의어이며 그 실체입니다.
비젤씨의 양심적 절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엘리·비젤씨는 교조주의나 원리주의에 늘 따라다니는 광신과 증오를 주시하며, 자신이 창설한 인도 재단이 중심이 되어 ‘증오의 분석’을 테마로 한 국제회의를, 지금까지 여러 차례 개최해 왔습니다.
그는 회의의 개최 동기를 “오늘날 많은 지식인들이 광신에 매료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또 이러한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는 면역력을 종교에 접목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며,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만이 광신과 증오에 괴로워하고 있는데 이것을 막을 수가 있는 것도 인간뿐이다. 인간만이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이 그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에서 나오는 절규이며, 종교의 인간주의화를 향한 간절한 기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소년시절 아우슈비츠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고, 나치즘이라는 최악의 원리주의의 지옥을 빠져 나온 사람의 말인 만큼 인류사가 직면한 쉽지 않은 과제를 실감케 하는 무게와 영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이 피할 수 없는 난제(難題 아포리아)인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을 게을리 하고 종파성만을 고집한다면 종교가 인간의 정신성을 ‘약(弱)하게’ ‘악(惡)하게’ ‘어리석게’ 만들어 ‘아편적인 것’을 증대시키고 오히려 전쟁이나 분쟁을 조장하는 데 박차를 가해 버립니다. 비젤씨가 지적했듯 소위 ‘원리주의로의 경사(傾斜)’이며 굳이 실례를 들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인류 역사에 새겨진 종교의 어두운 측면입니다.
광신과 증오의 중력에 어떻게 대항할까
내가 ‘미완성의 질문’이라고 한 것처럼 ‘종교의 인간주의화’는 21세기인 오늘날 지금도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장해물로써 우리들 눈앞을 계속해서 가로막고 있습니다.
종교사의 밝음과 어둠의 밸런스 시트(balance sheet 대차대조표)를 어떻게 파악하는가는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적어도 21세기 문명과 종교의 본연의 자세를 생각할 때, 종교는 인간성의 향상과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하게 호소하는 바입니다.
역사가 미슐레가 제기한 종교관
그러한 점에서 전부터 내가 주시하고 있던 것은 19세기의 대역사가 줄·미슐레의 종교관입니다.
미슐레가 살았던 시대는 오리엔트·르네상스로 불리어진,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이 발견·재흥된 르네상스 시대를 이어 인도나 페르시아 등을 포함한 오리엔트(동양)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유럽 중심의 크리스트교적 세계관에서 탈피를 강요받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당시의 시대정신은 어딘가 오늘날의 세계화와 비슷한 분위기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서 「인류의 성서」에서 미슐레는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얼마나 행복한 시대인가! 전선(電線)을 통해 지구상의 혼을, 지금 현재 속에 하나로 묶어 조화를 만드는 시대이다. 역사의 흐름을 통해 여러 시대를 서로 대응시켜, 우애로 가득 찬 과거를 공유했다는 감각을 주고, 지상의 혼이 하나의 같은 마음으로 살아 왔음을 깨닫는 기쁨을 준다!”라고.
‘전선을 통하여…’와 같은 표현은 오늘날의 인터넷 사회를 연상시킵니다만, 무엇보다도 19세기 전반이라고 하면 근대 과학기술 문명의 새벽이라고 할 ‘요람기’입니다.
미슐레의 개인적 성품도 더해져, 문명의 프런티어(개척), 세계화에 대한 기대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한대이며, 거의 무조건에 가깝습니다. 그 점은 30년도 훨씬 전 로마 클럽이 보고를 통해’성장의 한계’를 경고한 대로 근대 문명의 ‘황혼기’를 피할 수 없게 된 우리의 시대와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급속히 진행되는 인터넷 사회에 감도는 일종의 궁지에 몰린 듯한 느낌은 정보과학이 가져오는 커뮤니케이션의 확대가 그대로 ‘지구상의 혼을… 하나로 묶고 조화롭게 하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낙관론이, 실상은 전무(全無)에 가깝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슐레의 시대는 유럽인이 스스로의 문명을 상대화하면서, 아니 상대화했기 때문에 인간의 힘이나 가능성의 보편적인 확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행복한 시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시대정신은 미슐레의 종교관에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종교의 인간주의화’ 그 자체였습니다.
「인류의 성서」란 미슐레가 “진정한 저자, 그것은 인류이다”라고 말했듯이「신·구약 성서」뿐 아니라, 인도의 ‘베다 (인도의 성전)’나 ‘라마야나’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나 고전극, 페르시아의 ‘샤·나메’, 혹은 이집트, 시리아 등 한자문화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문명권의 ‘성전=성서’(신들)를 두루 섭렵한 것으로, 그것들을 과부족 없이 비교·검증한 다음 그는 이렇게 대담하고 명쾌한 결론을 이끌어냈습니다.
“정신 활동이 종교를 포함 하는 것이지, 종교 속에 정신활동이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즉 ‘인간’을 초월해, ‘인간’보다 앞서는 모든 종교적 요인을 거부한 것입니다. ‘인간주의화’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시아와 유럽과의 완벽한 일치, 아득히 먼 옛 시대와 우리 시대가 일치함을 알게 되었다.(중략) 따라서 유일한 인류는 유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공간과 시간을 꿰뚫는 커다란 조화가 영원히 복원된 것이다”라고.
자기규율에 입각한 확고한 인간찬가
인간 불신이나 폐색감이 만연한 현대 사회를 보면 확실히 격세지감(隔世之感:많은 진보와 변화를 겪어서 딴 세상처럼 여겨지는 느낌)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확실히 그것은 근대문명의 ‘새벽’ ‘요람’의 시대이며, 유토피아적이랄까 너무나 대범한 낙관적 인간관, 인간찬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인간성의 개화에 관한 계보를, 고대 인도나 그리스의 인간관에서 중세의 ‘암흑시대’를 거쳐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자유·평등·박애)에 이르는 미슐레의 기대와 전망을, 그 후의 역사가 크게 저버린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20세기의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의 참극을 경험하고, 지식이나 과학기술을 방심을 할 수 없는 ‘양날의 칼’ 임을 뼈저리게 느낀 우리는 도저히 그러한 방임적인 낙관론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또 20세기말의 소련의 붕괴가, 역사의 진전을 프랑스 혁명에서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진보주의적 역사관에 종지부를 찍은 것도 우리의 기억에 새롭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독일속담)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미슐레가 “제발 ‘인간’이도록 하자. 인류가 들어 본 적도 없는 새로운 위대함에 의해 위대해지자”라고 호소하고 있듯이 인간이 원점이며, 인간이야말로 종교를 포함한 역사창출의 주역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기본자세만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표방하는 인간주의의 투쟁의 성공여부도 그러한 기본자세를 공유하고, 어떻게 심화시키며 계승해 나갈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특필할 만한 것은 미슐레의 인간찬가는, 오늘날의 ‘휴머니즘’이라는 단어에 얽힌 애매함, 뼈대가 없는 정서적 취약함과는 거리가 먼 다이너미즘을 지닌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해방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에고이즘의 방자한 확대에 거의 무방비한 그 후의 휴머니즘의 진행과는 대조적으로, 인간 정신의 규범성, 자기규율이라고 하는 점에서도 하나의 굵은 뼈대를 가지고 있었던 점입니다.
「인류의 성서」의 말미에는 “인도에서 1789년까지 빛의 격류가 흘러 내려온다. ‘법’과 ‘이성’의 대하(大河)이다”라는 인류사의 정통을 잇고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여러 시대에 있어 동일한 것, 자연과 역사의 견고한 기반으로 한 영원한 ‘정의’가 빛난다”라며 ‘법’과 ‘이성’ ‘정의’를 바탕으로 하면서, 스스로를 통제하고 재창조함으로써 역사창출의 주역이라는 자각과 자부심이 확고하게 구가되어 있습니다.
대범한 인간찬가가 ‘원심력’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구심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양자가 균형을 유지해야만 인간의 혼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미슐레가 말하는 ‘법’과는 약간 뉘앙스를 달리합니다만, 그것은 불교에서 설하는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 구도와 같습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주(州)로 하고, 스스로를 의처(依處)로 삼되 다른 사람을 의처로 삼지 말아야 한다. 법을 의처로 삼되 다른 것을 의처로 삼지 말라”라고.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주역이기 위해서는 어딘가 의지해야 할 ‘법’이 불가결한 것입니다.
부분적인 ‘정의’의 유혹을 넘어
그렇지만 역사는 미슐레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와타나베 가즈오는 “스스로가 만든 것으로부터 기계가 되고 노예가 되기 쉬운 인간의 약소함”을 말합니다.
그 ‘약소함’ 때문에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거역하는 자”(G·마르셀)라는 말과 같이 역사창출의 주역의 자리에서 굴러 떨어져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절대화, 광신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폭력의 폭풍우가 불어 닥쳤습니다.
미슐레가 말하는 보편적인 ‘정의’가 아니라, 온갖 차원의 개별적, 부분적 ‘정의’가, 인간의 ‘약소함’에 이용되듯이 자신의 올바름을 역설하며 티격태격 싸우고 있다 - ‘원리주의로의 경사(傾斜)’를 우려하는 이유입니다. 부분적 ‘정의’의 끝에 어떠한 비참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 채, 인간은 좀처럼 그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한 ‘원리주의로의 경사(傾斜)’를 멈추기 위해서는 그것을 좌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주의는 악과의 투쟁을 피하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휴머니즘이라는 말에는 평화나 관용, 원만이라는 플러스 이미지와 동시에 미온적, 미지근함 등의 마이너스 이미지도 항상 따라다닙니다. 거기에서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으면, 원리주의 특유의 과격함과 대치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나치즘과 꿋꿋하게 싸운 토마스·만은 그것을 ‘전투적 휴머니즘’이라고 명명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전투적 휴머니즘, 자신의 용맹함을 발견하고, 자유 관용 및 회의(懷疑)의 원리가 수치심도 회의도 없는 광신에 의해 악용되고 유린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견해로 일관된 휴머니즘이다”라고.
덧붙여서 와타나베 가즈오는 토마스·만의 그 소책자가 “격동기를 사는 나의 ‘머리맡의 책’이기도 하면서 ‘주머니의 책’이기도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적 휴머니즘’이란 사실 지드가 ‘정당한 휴머니즘’으로서 열렬하게 성원을 보냈듯이 지드가 “나 자신보다 소비에트보다 훨씬 중대한 것”으로서 보편적 가치, 정의의 근거로 한 ‘휴머니티’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불법을 기조로 한 인간주의에 의한 정신 투쟁의 본연의 자세가 오버랩 됩니다.
우리들이 추진하는 불교운동이 현재 세계적 확대를 보이며 각계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그것을 기조로 한 인간주의가, 종파성, 종교원리를 뛰어 넘은 보편적 확대를 지니고 있으며, 즉 ‘종교의 인간주의화’라는 문명사적 과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언론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을 싫어하는 것과 같은 뿌리
그런데 휴머니즘을 말하는 한 최대의 무기이자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인 대화 - 인류사와 함께 오래되고도 새로운 과제이자 지속적인 대화에 귀착함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부터 ‘대화적 존재’는 인간의 본질에 기인하는 것이며 대화가 두절된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인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대화를 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 실격이며, 대화가 없는 사회는 묘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대 소크라테스는 “무릇 사람의 마음이 빠질 수 있는 상태 중에서 언론을 몹시 싫어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라며 언론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을 싫어하는 것과 그 뿌리가 같다고 했습니다.
또 가까운 예로 작년에 서거한 독일의 석학 칼·폰·바이츠제커씨 (이케다 SGI 회장이 회담한 독일 전 대통령의 맏형)는 “인간이란 함께 살기 위한 인생의 대화자라는 존재이다”라고 갈파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증언은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으며, 그것은 언론이나 대화가 얼마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질적 요건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선한 인간이 되려면 요컨대 예지인(叡智人 호모·사피엔스)이 되고자 한다면, 동시에 언어인(호모·로크엔스)으로서 대화의 명수가 아니면 안됩니다.
특히, 대화와 정반대에 위치하는 광신이나 불관용의 역사를 끌고 가는 종교 분야는, 도그마(교의)를 배제하고 자기억제와 이성을 바탕으로 한 대화야말로, 확실한 생명선이며, 대화에 등을 돌리는 것은, 종교의 자살 행위라 해도 좋습니다.
따라서 불법을 기조로 한 인간주의를 추진함에 있어서, 광신이나 독선, 불신이라고 하는 문답무용(논쟁할 것 없는, 여기서는 원리주의)의 벽이 얼마나 많이 가로막고 있는지, 이 대화라는 인간주의의 ‘황금률’이라는 깃발만큼은 결코 내려서는 안 된다고 호소해 두고 싶습니다.
도중에 두절되는 것은 대화라고 할 수 없으며, 진정한 대화는 끊임없는 지속적 대화로서 관철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러한 언어인(호모·로크엔스)의 진가를 발휘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끊임없는 정신투쟁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강함’ ‘선량함’ ‘현명함’ 등의 아름다운 성품이 총동원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종교는 그러한 성품들을 현현시켜 가는 구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즉 ‘인간 혁명의 종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신념입니다.
그러므로 하버드 대학의 강연에서도, 그 점에 입각해 21세기 문명에 완수해야 할 대승 불교의 정수에 대해 논급한 것입니다.
약 50편에 이르는 식자와의 대담집
대화야말로 종교의 생명선이며 황금률이라는 신념에 입각해 나는 지금까지 7000여명의 식자 · 요인과 회담해 왔고, 토인비 박사를 비롯해 50편에 이르는 대담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거기에는 크리스트교 문명권이나 유교 문명권의 사람도 많다. 종래, 비교적 일본과 교류가 적었던 이슬람이나 힌두 문명권의 사람도, 구(舊)공산권의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인문계뿐 아니라, 물리학이나 천문학 등 이과와 수학계의 식자도 있습니다.
불전에는 “무량의(無量義)는 일법(一法)에서 생겼으니”라고 있듯이 국경이나 종파,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인종이나 민족, 학문 간의 장벽을 뛰어넘으면서, 다른 분야를 이어 주는 대화를, 불법을 기조로 한 인간주의에 따라 착실하게 추진해 왔습니다.
그것은 보편적 휴머니즘을 시대정신으로 고양시켜 21세기 문명에 기여하고 싶은 염원에서입니다.
또 SGI에서도 7년 전의 동시다발적인 테러사건의 직후부터 유럽 과학 예술 아카데미가 개최해 온 크리스트교, 불교, 유태교, 이슬람교의 대표에 의한 ‘4대 종교간 대화’에 계속적으로 참가하며 평화에 공헌하는 길을 함께 모색해 왔습니다. 게다가 내가 창립한 동양철학연구소나 보스턴21세기센터, 도다 기념 국제평화연구소에서도 ‘문명간 대화’나 ‘종교간 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습니다.
유엔에 ‘세계환경기구’를 창설
이어서 이러한 인간주의를 기반으로 지금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도에 대해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또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반성을 바탕으로 세계 인권 선언이 채택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이합니다.
“인류 사회 모든 구성원의 고유한 존엄과 평등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의 자유, 정의 및 평화의 기초이다”라는 숭고한 일절을 전문에 내걸고 전체 30개조로 이루어진 자유권과 사회권을 정한 선언은 그 후 각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쳐 인권에 관한 여러 가지 조약이나 제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기초로 되었으며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전후 세계의 재출발에 맞춰 ‘인권의 보편성’의 비전과 ‘공포 및 결핍이 없는 세계의 도래’를 목표로 내건 인권 선언은 유엔헌장과 함께 ‘인류 공화의 지침’으로서 역할을 다해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인권선언이 표방하는 ‘국경을 초월한 보편성’의 가로축에 더해 요청되는 것은 미래에 걸친 인간의 행복을 획득하기 위해 지속가능하고 평화로운 지구사회를 구축하는 ‘세대를 초월한 책임’이라는 세로축이 아닐까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지구 생태계의 보전’ ‘인간의 존엄’ ‘부전(不戰)의 제도화’라는 세 가지를 중심으로 제언을 하고자 합니다.
환경 문제에 관한 두 개의 리포트
첫째는 ‘지구 생태계의 보전’에 관한 제안입니다. 작년 최신 연구 성과를 이룬 주목해야 할 리포트가 잇따라 발표되었습니다.
하나는 유엔환경계획(UNEP)의 ‘지구환경전망보고서’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대기오염에 관해서는 개선된 지역도 있지만 지구전체에서 보면 매년 200만 명 이상의 죽음을 앞당기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유해한 자외선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오존층도 남극 상공의 구멍은 최대(最大)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1인당 사용할 수 있는 물의 양은 지구적 규모로 감소하였으며, 생물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1만 6000종 이상이 멸종의 위기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비교적 단순한 문제는 각지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는 여전히 남겨진 채 대책이 시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IPCC(기후변동에 관한 정부 간 패널:주4)가 정리한 ‘제4차 평가보고서’입니다.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이 급증하여 최근 50년간의 온난화 경향은 과거 100년의 거의 2배가 되어, 21세기말에는 최대 6.4도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북극 지역의 해빙이 진행됨과 동시에, 무더위나 열파(熱波:여름에 해양에서 오는 더운 기단), 큰 비 등의 극단적인 기상이 빈도를 더해 갈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져 향후 인간의 존재 기반이 현저하게 위협당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 국제 정치의 장에서도 서밋에서 기후변동이 계속해서 의제로 올라오고, 작년 9월에는 ‘기후 변동에 관한 하이레벨 회합’이 유엔에서 개최되는 등, 환경 문제의 긴급성에 관한 인식은 해마다 깊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국제사회가 일치된 행동이라는 면에서는 아직도 과제는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지구에서 산다는 자각과 책임감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지구 생태계의 보전은 국경을 초월한 인류 공통의 과제이며 ‘같은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강한 자각과 책임감 없이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회장은 가까운 지역에 뿌리를 둔 ‘향토민’, 국가를 형성하는 ‘국민’, 세계를 인생의 무대로 하는 ‘세계시민’이라는 3개의 자각을 겸비하는 것의 중요성을 호소했습니다.
그 위에 국익에 얽매이지 않고 같은 지구에 사는 인간으로서 ‘열린 인류 의식’의 함양을 촉구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SGI가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교육의 10년’을 제창하는데 있어서 기저로 삼고 있는 이념이며, 관계 기관이나 다른 NGO(비정부 기구)와 함께 그 실현을 위해 힘을 쏟아 온 이유입니다. 확실히 지금 ‘지구이익’ ‘인류이익’에 입각한 협조와 행동이 요구되고 있으며, 그 중심축이 되어야 할 존재는 유엔입니다.
유엔에서는 지금까지 UNEP를 통해 환경 문제에 대한 대처의 촉진과 조정이 도모되어 왔습니다.
또 UNEP는 환경 관련이 많은 조약사무국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 외에 6개의 지역사무소에서 지속가능한 개발과 환경보전의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 실적에 입각해, 심각해진 지구 환경문제에 보다 만전의 태세로 대처하기 위해서, UNEP가 더욱 강화되기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작년 2월 나이로비에서 실시된 각료급의 환경 포럼에서도 같은 인식의 일치를 보였습니다. 과학적 지견의 집적과 분석, 환경조약을 조정하는 기능 강화의 중요성이 지적되는 한편, UNEP를 유엔의 전문기관으로 격상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나도 이전부터 21세기의 유엔이 담당해야 할 활동의 큰 중심은 지구환경 문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구상의 하나로써 6년 전에 ‘유엔 환경고등판무관’의 설치를 호소한 적도 있습니다만, 그 주목적은 유엔이 중심이 되어 문제 해결을 위한 주도권을 잡는 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었습니다.
종래 UNEP가 담당해 온 기능 강화에 덧붙여 이러한 점 등도 감안하여 ‘세계환경기구’라고 해야 할 전문 기관으로 발전적 개편을 목표로 해 가면 어떨까요.
전문 기관으로의 개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UNEP에서의 논의나 의사결정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이사국으로 한정된 데에 비해, 전문 기관의 경우는 그 가맹국이 되는 것으로, 어떤 나라나 논의의 테이블에 앉을 수가 있는 점입니다.
이것은 내가 30년 전에 제창한 ‘환경 유엔’의 이미지와도 가까운 것으로, 최근 주장되고 있는 ‘글로벌 환경통치’의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나라가 참여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요.
동아시아를 에너지 절약의 ‘모델 지역’으로
다음으로, 초점이 되고 있는 온난화 방지대책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지난해 6월, 독일에서 실시한 서밋에서 2050년까지 세계 온실 효과가스 반감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온실 효과가스를 삭감하는 방법은 교토 의정서를 바탕으로 2012년까지의 계획 밖에 세우지 않은 실정입니다. 또 50% 삭감을 달성하려면 교토 의정서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들이 참여한 형태로 전 지구적 체제 만들기가 불가결하다는 것은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난달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되어 2013년 이후의 구상을 계획하는 교섭의 행정표 ‘발리·로드맵’(주5)이 채택되었습니다.
삭감의 수치목표가 제시되지 않은 것은 유감입니다만, 미국이나 중국, 인도 등 교토 의정서에 참가하지 않은 주요배출국을 포함해 온난화 방지의 새로운 대책 마련을 목표로 하는 체제가 정비된 것은 어느 정도의 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발리·로드맵’에 바탕을 두고 교섭을 추진하는 것과 함께 내가 호소하고자 하는 것은 발상의 전환입니다. 자칫하면 전체적인 목표의 달성보다 자국의 의무나 부담을 얼마나 조금이라도 가볍게 할까에 역점을 두는 마이너스적 사고의 발상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요국이 솔선해서 목표를 정하고, 의욕적인 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타국의 대처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지구적 차원에서의 공헌을 좋은 의미에서 서로 경쟁해 간다 - 말하자면, ‘협력’과 ‘연대’를 키워드로 한 온난화 방지 체제를 구축해 가는 시대로의 전환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마키구치 초대회장은 각국이 국익을 위해서 서로 다투는 것의 종지부를 찍고, 서로 플러스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공영의 세계를 건설하는 방도로써 ‘인도적 경쟁’의 비전을 주장했습니다.
이 ‘인도적 경쟁’의 시대를 지구환경문제에 대한 대처를 계기로 크게 열어 가야 되지 않을까요.
7월의 토우야호 서밋의 의장국이기도 한 일본이 그러한 플러스적 사고로의 전환을 호소해 시대 변혁의 선두에 설 것을 강하게 바라는 바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온실효과 가스의 배출량을 어떻게 삭감해 나가면 좋을까요.
다양한 대책이 생각됩니다만, 특히 자발적인 목표와 공헌이라는 플러스적 사고 발상에 익숙해짐으로써 재생가능 에너지의 도입촉진과 에너지 절약대책에 따른 ‘저탄소·순환형 사회’로의 이행을 도모하는 접근방법을 택하고자 합니다.
재생 가능 에너지에 대해서는 이미 유럽연합(EU)에서의 주목해야 할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작년 3월 정상회의에서는 온난화 대책으로서 태양열 등 재생가능에너지의 이용 확대를 가맹국에 의무화해 현재 EU전체 6.5%인 이용비율을 2020년까지 20%로 올리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이와 함께 ‘저탄소·순환형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열쇠는 에너지 절약대책입니다. 나는 이 분야에서 많은 경험과 실적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 이웃 국가들과의 깊은 연대를 통해 동아시아를 ‘에너지 절약 추진의 모델지역’으로 해 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호소하는 바입니다.
온난화를 방지하는 ‘인도적 경쟁’을
지난해의 제언에서 나는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의 기반이 되는 지역 협력의 시범 모델로서 ‘동아시아 환경개발기구’의 창설을 호소했습니다.
우선은 에너지 절약 분야에서 일본이 리더십을 발휘해 기선을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민중의 힘을 결집해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이러한 제도의 정비와 함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민중 차원의 대처입니다.
일찍이 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교육의 10년’의 제정을 호소함과 동시에,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제도의 정비라는 ‘위로부터의 개혁’ 뿐만이 아니라, 풀뿌리 차원의 행동의 고리를 넓혀 자각한 민중의 힘을 결집해 나가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불가결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활동의 중심으로써 교육을 주목한 것은, 교육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꺼내 각각의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결국에는 지구적 규모로 시대 변혁의 물결을 낳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SGI에서는 2005년 초부터 ‘교육의 10년’을 지원하고, 교육 교재로 영화 ‘조용한 혁명’을 지구평의회, 유엔환경계획, 유엔개발계획과 협력 제작하였고, 지구헌장위원회와 공동 제작한 ‘변혁의 종자’전을 각지에서 개최하고 있습니다.
또 이에 앞서, 내가 창립한 보스턴 21세기 센터에서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이념과 지침을 정리한 ‘지구 헌장’의 기초 작업을 지원해 왔습니다.
더욱이 자연 보호 활동으로서 브라질 SGI가 ‘열대 우림 재생 연구 프로젝트’를 1993년부터 전개, 아마존 강 유역의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한 식림이나 귀중한 종자를 채취·보존하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캐나다나 필리핀 등 각국의 SGI에서도 나무심기 활동을 해 왔습니다.
이러한 나무심기 활동의 의의를 둘러싸고, 그린벨트 운동의 지도자이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케냐의 왕가리·마타이 박사와 대화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그때, 고대 인도에서 석존이 녹색의 나무를 심는 일의 중요성을 설한 것,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와 자비의 정치를 실시한 아소카 대왕이 가로수 심기 등 환경보호 정책에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또 그린벨트 운동을 통해 여성의 엔파워먼트(능력개화)가 진전 되었던 사실 등에 입각해 ‘나무를 심는 것’은 ‘생명을 심는 것’이며 ‘미래’와 ‘평화’를 키우는 것임을 서로 공감한 일이 생각납니다.
‘교육의 10년’의 대처 방안을 정말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단지 환경 문제에 관한 지식을 몸에 익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나무심기 활동과 같은 실제 체험을 통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계의 소중함을 체감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생태계를 지키는 마음을 심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권교육을 테마로 국제회의 개최를
UNEP에서는 현재 마타이 박사 등의 후원을 받아 ‘10억 그루 나무심기 캠페인’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세계 전체로 19억 그루의 나무를 심어 금년에도 마찬가지로 10억 개 이상의 나무를 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활동을 ‘교육의 10년’과 연동시켜, 향후에도 정착시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교육의 10년’을 궤도에 올려 지구 환경의 악화를 막을 수 있을지는 한사람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로 받아 들여 구체적 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가 어떤가에 달려있습니다.
즉, 지속 가능한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서 개인이나 가족, 지역사회나 직장이라고 하는 가까운 곳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서로 이야기하며 함께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요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활동을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행동 네트워크’ 등 이라고 명명하고, 환경 문제 뿐만이 아니라, 빈곤, 인권, 평화 문제 등 각각의 활동을 연결하는 횡의 연대를 넓히면서, 인류 공동투쟁의 토대를 다져 가면 어떨까요.
SGI라고 해도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지구적 규모로 전진시켜 가는 데 한층 더 강하게 일익을 담당해 가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유대야말로 항구 평화의 초석
두 번째는 ‘인간의 존엄’에 관한 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찍이 나는 세계인권 선언의 제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브라질 문학 아카데미의 아타이데 전 총재와 대담집 (「21세기의 인권을 말한다」)을 발간했습니다. 그 때 당시를 회상하면 아타이데씨가 말씀하신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의 검토 작업을 하면서 직면한 수많은 난문제를 숙고하며, 내가 특히 유의한 점은 무엇이었던가 - 그것은 세계의 각 민족 간에 ‘정신적 유대’를 만들어 내는 일, 즉 ‘정신의 세계성’을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다시 말해 경제적 유대나 정치적 유대와 같이, 상황에 따라 무너져 버리는 관계로는 항구 평화의 기반으로서 너무 약합니다. 그러한 관계보다 훨씬 숭고하고, 폭넓으며, 견고하게 인류를 묶는 유대를 키우는 것이 불가결하다는 신념에 서서 검토 작업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지 60주년이 되는 올해는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사무소가 중심이 되어 인권선언의 의의를 한층 넓혀가기 위해 ‘우리들 전원을 위한 존엄과 정의’라는 제목으로 캠페인을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각국 정부와 시민사회가 서로 협력해 인권 교육의 보급 등 구체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현재 ‘인권교육을 위한 유엔 10년’(1995년-2004년)에 계속적인 형태로 유엔의 ‘인권 교육을 위한 세계프로그램’이 2005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계획을 지속해 가는 중요성은, 나도 2001년에 남아프리카에서 개최된 ‘반인종주의·차별 철폐 세계회의’를 향한 제언 등에서 반복해서 호소해 왔습니다.
인권의 존중을 정부 차원의 논의 대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의 기반으로 사람들의 현실생활에 깊게 뿌리 내려, 세계 공통의 ‘인권 문화’로 정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념에서였습니다.
‘인권교육과 학습의 추진’은 유엔 개혁과 함께 새롭게 발족한 인권 이사회에서도 총회 결의를 바탕으로, 주요 임무의 하나로 내걸고 있습니다.
또 작년 9월에는 ‘인권교육 및 훈련에 관한 유엔선언’의 초안 작성의 착수가 인권 이사회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이 선언이 채택되면 세계인권선언이나 국제인권규약 등 국제법상의 인권기준에 하나의 새로운 문서가 더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중요한 선언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사람들의 현실 생활에 뿌리를 둔 ‘인권 문화’ 정착에 이바지하는 것으로서 작성되어야 하며, 시민사회의 관점이나 요망을 충분히 인식하여 검토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거기서 나는 선언의 초안 만들기를 위해, 시민사회의 폭넓은 소리를 결집하는 것을 목적의 하나로 해서 인권교육을 테마로 한 국제회의의 개최를 강하게 호소하고 싶습니다.
인권교육에 관해서, 지금까지 지역 차원의 회의나, 전문가에 의한 소규모의 회의 등이 열렸던 일은 있습니다만, 세계적 규모의 국제회의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시민사회의 주도권’에 의한 시민사회를 위한 세계적 규모의 ‘인권교육 및 훈련에 관한 국제회의’의 조기 개최를 제안하고 싶은 것입니다.
또 회의에서는 새로운 유엔 선언에 관한 논의에 더해, ‘인권교육을 위한 세계프로그램’의 향후 진행방식에 대해서도 활발하게 의견교환을 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생명을 위한 물’ 세계기금의 설치를
이어서 유엔이 추진하고 있는 ‘밀레니엄 개발목표’에 관해 말해 두고자 합니다. 이 목표는 2015년까지 빈곤이나 기아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반감시키는 등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불가결한 생활기반이나 사회기반의 확보를 목표로 한 것입니다. 지난해는 그 중간 시점으로 유엔이 지금까지의 진척 상황을 조사하여 명백히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 초등학교의 취학률이 상승한 것 외에 빈곤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비율이나 어린이의 사망률 등에서 개선되는 경향이 보이는 한편, 이대로의 속도로는 밀레니엄 개발목표의 모든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지난해 7월 영국의 브라운 수상이 중심이 되어 작성된 미국, 캐나다, 일본, 인도, 브라질, 가나 등 각국의 수뇌가 서명한 ‘밀레니엄 개발목표에 관한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선진국과 도상국이 함께 정치적인 의사를 가지고 ‘올바른 정책과 올바른 개혁이 충분한 재원과 하나가 되는 체제’를 조기에 확립하는 것의 중요성이 확인되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유엔이 2005년부터 2015년까지를 ‘ 「생명을 위한 물」국제 행동의 10년’이라고 하여 올해를 ‘국제 위생(衛生)의 해’라고 정한 것을 보고, 안전한 물의 확보와 위생환경의 정비를 중심으로 ‘올바른 정책과 올바른 개혁이 충분한 재원과 하나가 되는 체제’ 확립을 목표로 해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현재 10억을 넘는 사람들이 안전한 물을 얻을 권리를 부정당하고 26억 명이 충분한 위생설비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 결과 매년 약 180만 명의 어린이가 설사나 그 외의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고, 많은 여성과 소녀들이 매일 어쩔 수 없이 물 긷기를 하는 등 성 차별을 확대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또 안전한 물과 위생설비의 부족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상적인 컨디션 불량 등이 더해져, 경제적인 불평등이 고정화되고 사람들을 ‘빈곤의 연쇄’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 염려되고 있습니다.
유엔 개발 계획도 ‘물과 위생에 관한 위기 극복은 21세기 전반의 중요한 인간 개발 과제의 하나’로 정해 그 대책이 성공하면 ‘밀레니엄 개발목표(MDGs)에 틀림없이 탄력이 붙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물과 위생설비에 관한 목표를 달성하려면 매년 세계 군사지출의 약 8일 분에 해당하는 100억 달러의 추가 자금이 필요함을 시산(試算)하고 “국가안전보장이라는 협의의 개념을 제외하고, 인간의 안전보장의 향상이라는 점에서 보면 소액이라도 군사지출을 물과 위생설비의 투자로 돌리면 큰 이익이 생겨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미 밀레니엄 개발목표에 관한 자금 계획이 성과를 거둔 예로서 2002년에 설립된 ‘세계 에이즈·결핵·말라리아 대책 기금’이 있습니다.
그것의 최대 특징은 지역이나 질병마다 사전에 예산을 할당하지 않고, 각국의 요구에 응한 계획을 세워 심사를 거쳐 재정적인 지원을 실시하는 ‘도상국의 소유권’이 중시된 점입니다.
또 운영을 맡은 이사회에는 각국의 대표 이외에 민간 센터, 선진국과 도상국의 NGO, 감염자 단체의 대표가 더해져 동등한 표와 발언권을 가짐으로써 보다 광범위한 사람들의 소리를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색을 이어서 이와 같은 자금 구상을 계획하여 ‘「생명을 위한 물」세계 기금’을 창설, 인간의 존엄이 위협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을 집중적으로 진행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창립한 도다 기념 국제 평화연구소에서는 2년 전부터 ‘인간 개발, 지역 분쟁, 글로벌·통치’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프로젝트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 ‘인간 개발’의 개념과 함께, ‘인간의 안전 보장’의 개념을 선구적으로 제창한 것으로 알려진 마브불·하크 박사는 도다 평화 연구소의 활동에 창립 때부터 기대를 걸어 주신 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박사는 도다 평화연구소가 주최한 국제회의의 기조 강연 (1997년 6월)에서 “비극적 결과가 초래된 하류(下流)에서 대치하는 것보다도, 발생원인 상류(上流)에서 인간의 안전보장의 새로운 과제를 연구하는 편이 용이하고 인간적이다”라고 강조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박사는 인간의 안전 보장을 ‘인간의 존엄에 관한 개념’이라고 하며 ‘사망하지 않은 어린이’나 ‘만연하지 않은 병’과 같이 구체적인 모습으로써 사람들의 생활에 반영되는 안전보장이 아니면 안 된다고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밀레니엄 개발목표에 관한 대처 방안은, 목표 달성은 물론 비극으로 괴로워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웃음을 되찾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구상에서 비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싶다 - 이것은 나의 스승인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의 열망이기도 했습니다.
그 스승의 평화 사상을 연원으로 하는 도다 평화 연구소에서는 앞으로 밀레니엄 개발목표나 지속 가능한 개발을 비롯해 ‘인간 개발’에 관한 대처 방안을 지구적 규모로 추진하기 위한 국제회의의 개최나 연구에 한층 더 힘을 쏟아 가고자 합니다.
비극의 유전을 전환하는 새로운 조류
여기서 ‘인간의 존엄’이 빛나는 지구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서 특히 아프리카에 빛을 비추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아프리카의 항구적 평화와 지속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아프리카 국가들에 의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이 되는 존재가 아프리카연합(AU)입니다. 과거 아프리카 통일기구(OAU)를 개편한 것으로 2002년 7월에 발족한 AU는 53개국·지역이 가맹된 세계 최대의 지역기관입니다.
최고 기관인 총회(정상회의)나 각 가맹국의 대표로 이루어지는 아프리카 전체 의회에 더해, 평화·안전 보장 이사회, 경제·사회·문화 이사회, 아프리카 인권 재판소 등이 지금까지 연달아 설치되어졌습니다.
‘21세기는 아프리카의 세기’라는 신념으로, 각국 수뇌와 식자와 대화를 거듭하며 민중 차원의 문화 교류와 교육 교류 확대에 힘을 쏟은 나는 AU의 도전이 착실하게 성공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커다란 성과를 가져오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아프리카의 재생’이야말로 ‘세계의 재생’이며, ‘인류의 재생’으로 연결되는 길이라는 것은 나의 변함없는 확신입니다.
사실, 20세기말에서 21세기에 걸쳐 인류 비극의 유전사를 전환하는 새로운 조류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전 대통령 등에 의한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 철폐와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 앞에서 언급한 마타이 박사 등에 의한 환경 운동과 여성의 엔파워먼트(능력개화)의 활동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조류는 이젠 세계 각지에 퍼져, 시대 변혁의 파동을 넓히고 있습니다.
또 아프리카에서는 근년, 많은 국가에서 내전이나 분쟁이 종결하고, 민주 정부로의 이관이 진행됨과 동시에, 경제성장률이 호조를 띄는 듯 밝은 조짐이 보입니다.
물론 다르푸르(darfur) 지역이나 소말리아 분쟁을 비롯해 빈곤이나 난민 문제 등 아프리카를 둘러싼 상황은 여전히 어려움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밀레니엄 개발목표의 달성도 역시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의 진척 상황이 가장 심각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다년간의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여 힘을 배증시키는 방향을 목표로, 직면한 과제에 대해 연대하여 해결해 가는 기반 만들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의의는 헤아릴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채택되었던 것이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새로운 파트너십’입니다. “아프리카 개발의 열쇠는 아프리카 자신이 쥐고 있다”는 신념에 입각한 각국의 지도자에 의한 맹세를 모은 것으로 평화와 안정, 민주주의, 안정된 경제 운영, 인간중심 개발의 촉진 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아프리카의 사람들에 의한 의욕적인 도전을 국제사회가 전력으로 지지해야 되지 않을까요.
금년 5월에는 제4회 아프리카 개발회의(TICAD4)가 요코하마에서 개최됩니다. 이 회의는 일본의 주도 하에 유엔 등과의 공동개최로 1993년 이래 5년마다 실시된 회의이며 아프리카를 비롯해 각국의 수뇌나 국제기관의 대표 등이 참가하여 아프리카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해결 방도를 함께 이야기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이번 회의에 내가 특히 유의를 촉구하고 싶은 것은 ‘아프리카 청년에 대한 엔파워먼트(능력개화)’를 모든 대책의 기초로 하는 것입니다.
빈곤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의 생활이 세대를 거듭해 계승되는 악순환을 끊고, ‘청년층이 처한 상황 개선’을 통해 ‘모든 세대에 걸친 상황 개선’을 단계적으로 도모해 간다 - 그 플러스적 사이클로의 전환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TICAD에서는 기초교육의 보급, 인재양성소의 지원, 직업 훈련 등의 면에서 인재육성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 실적을 바탕으로 새로운 중심으로서 ‘아프리카 청년 파트너십 계획’을 설치, 청년에 대한 엔파워먼트(능력개화)를 앞에 내세워 아프리카가 직면하는 여러 과제의 극복에 도전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환경정비를 추진해야 함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일본을 비롯해 세계 청년과의 깊은 교류를 통해 아프리카의 문제에 그치지 말고, 지구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함께 맞서가는 ‘청년의 청년에 의한 청년을 위한 네트워크’의 형성을 목표로 해 가면 어떨까요.
금년은 ‘일본과 아프리카 교류의 해’이기도 하여 다양한 교류 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의 기점으로 하여 향후 일본과 아프리카 제국의 청년과 학생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교류 하는 제도를 확립하는 것도, 아울러 제안하고 싶습니다.
군사이용의 재연(再燃)과 개발경쟁의 염려
마지막 세 번째로서 ‘부전(不戰)의 제도화’의 관점에서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나는 냉전 대립이 격화되었던 시대에서 군비 확장의 흐름을 저지하고, 긴장완화를 구축하기 위해 미소정상회담의 개최를 호소함 동시에 대화와 교류에 의한 민간 외교에 노력해 왔습니다.
미소 관계에 더해 중소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1974년~75년)에는 3개국을 연달아 방문해 주은래 총리나 코시킨 수상, 키신저 국무장관 등과 회담하며 관계개선을 위한 중개 역할도 했습니다.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핵무기에 의한 전면전쟁이나 세계를 분단시키고 민중을 괴롭히는 전쟁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에서였습니다. 냉전의 종결로, 그러한 위기는 멀어졌지만, 최근 몇 년 간 핵무기의 확산에 따른 위협이 강해졌습니다.
작년 제언에서 나는 ‘핵무기에 의존하지 않는 안전 보장’으로의 이행을 위해서 핵군축의 성실한 실행을 확보하는 ‘국제 핵군축 기구’의 창설을 호소했습니다.
이렇게 군축의 실행과 동시에, 핵무기 폐기를 실현시키는데 있어서는 ‘핵무기의 비합법화’를 국제사회의 합의로써 확립하는 것은 불가결합니다.
그 일환으로써 이번에는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은 것이 ‘북극의 비핵지대화’입니다. 이것은 지난해 여름부터 캐나다·퍼그워시 그룹이 호소하고 있는 것이며 도다 제2대 회장의 ‘원수폭금지선언’을 가슴에 새기고 ‘핵무기가 없는 세계’ 실현을 목표로 하는 우리 SGI도 그 취지에 찬동하여 지원을 표명하고자 합니다.
북극해는 일찍이 냉전시대에 탄도 미사일을 탑재하는 동서 양진영의 원자력 잠수함의 항로로서 군사 전략상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지구온난화에 따라 여름철의 북극 지역의 해빙이 감소하면서 한층 더 군사 이용이 가능해지는 상황이 생겨나는 것이 우려되고 있습니다.
또 지금까지 두꺼운 얼음에 갇혀 있던 북극에서는 해상 항로의 이용이 어려워 해저자원의 개발이 쉽지 않았습니다만, 온난화로 상황이 일변하면, 그 이용과 개발을 둘러싸고 각국의 이해가 크게 충돌할 우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북극의 군사이용 금지, 인류의 공유재산으로서 보호체제의 확립과 함께 비핵지대화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남극에서는 1959년에 채택된 ‘남극조약’을 바탕으로 군사이용의 금지 외에도 남위 60도 이남 지역에 핵폭발과 방사성 폐기물의 처분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 후 비핵 지대를 설치하는 움직임은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 지역, 남태평양,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로까지 퍼져 남극에서의 핵무기의 개발·제조·실험·보유·사용과 더불어, 수송과 반입을 금지하는 조약이 5개 지역에서 성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남반구의 대부분의 육지뿐 아니라, 아시아에도 퍼진 비핵 지대는 각각의 지역에 핵확산의 브레이크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의 비합법화’를 향한 발판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핵지대조약에 서명한 나라로는 비핵지위(非核地位)를 선언한 몽고를 합치면 100개국을 족히 넘습니다.
즉, 세계의 반수 이상의 국가가 핵무기의 개발이나 사용을 조약의 형태로 위법이라는 의사를 나타내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비핵 지대의 설치를 위해 협의를 거듭하는 가운데, ‘핵무기의 비합법화’를 인류공통의 규범으로 하고자 하는 흐름을 확실히 하여 최종적으로는 핵무기의 개발·취득·보유·사용 금지 등을 정한 ‘핵무기 금지조약’(주6)을 실현하는 과정을 열어 가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 실천의 일환으로써 우선은 유엔이 중심이 되어 북극의 군사이용 금지와 비핵화를 정하는 ‘북극 비핵지대조약’의 제정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특히 피폭국으로 비핵 3원칙을 국시(國是)로 하고 있는 일본은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요구하는 국가들이나 시민사회와 협력하여 북극의 비핵 지대화를 향한 주도권을 발휘해 나가도록 강하게 염원하는 바입니다.
또 이러한 접근은 북동아시아의 핵확산 방지와 함께 유익하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은 ‘핵무기를 가지지 않고, 만들지 않고, 반입하지 않는다’라는 비핵 3원칙에 대해 앞으로도 일체 예외 없이 지킬 것을 재차 맹세한 뒤에, 6개국 협의를 통해서 ‘북한의 핵개발 완전 포기’를 목표로 함과 동시에 ‘북동 아시아의 비핵지대 설치’라는 보다 포괄적인 목표와 비전을 향해 관계국과의 대화와 외교 노력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핵군축이든 핵무기의 비합법화이든 국제사회 여론의 강한 지지 없이 현실의 무거운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돌파구를 열기 위한 풀뿌리 차원의 구상으로서 나는 2년 전에 발표한 유엔 제언에서 ‘핵무기 폐기를 향한 세계 민중의 행동 10년’의 제정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SGI는 도다 제2대 회장의 ‘원수폭금지선언’ 50주년의 의의를 담아 지난해부터 ‘핵무기 폐절을 향한 도전과 인간정신의 변혁’전의 국제 순회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1980년대에 실시한 ‘핵무기 - 현대 세계의 위협’전, 냉전 종결 후 내용을 일신한 ‘핵무기 - 인류를 향한 위협’전에 이어진 전시회로, 유엔이 호소하는 ‘군축·비확산 교육’을 민중의 손으로 추진해 가는 구체적 행동의 하나로써 새롭게 시작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SGI는 이러한 의식계발의 활동과 함께 퍼그워시 회의를 비롯해 뜻을 같이 하는 단체나 조직과 손을 맞잡고 ‘핵무기의 비합법화’의 실현을 요구하는 국제여론의 환기에 노력해 가고자 합니다. 핵무기 폐기를 향한 길을 열어 가는 것이야말로 생명존엄의 사상을 내건 불법자로서의 사회적 사명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클러스터 폭탄(cluster 산탄폭탄) 금지조약을
‘핵무기 금지조약’을 위해 두 번째로 호소하고 싶은 것은 ‘클러스터 폭탄 금지조약’의 조기체결입니다.
클러스터 폭탄은 내장된 다수의 자(子) 폭탄을 광범위하게 흩뿌리는 무기로 목표 대상이 된 일대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살상할 뿐만 아니라, 일부가 불발탄인 채 남기 때문에 분쟁 종결 후에도 심각한 피해를 가져와 복원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4개국·지역에서 약 4억 4000만개의 클러스터 폭탄이 사용되었고 사상자는 1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아직 73개국이 계속해서 비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사용이나 제조, 비축의 금지 등을 요구하는 NGO의 연합체 ‘클러스터 폭탄 연합’이 2003년 발족하여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작년 2월 클러스터 폭탄의 금지를 목표로 하는 국제회의가 오슬로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 후, 대인지뢰 전면금지조약을 체결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클러스터 폭탄의 금지에 적극적인 국가들과 NGO를 중심으로 ‘오슬로·프로세스’ 조약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클러스터 폭탄 금지와 함께, 이와는 별도로, ‘특정 재래식 무기 사용금지 제한조약’을 골조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큰 진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보다 많은 나라가 가세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오슬로·프로세스가 목표로 하고 있듯이 올해 안에 조약 체결을 실현시키는 것이 선결이 아닐까요.
대인지뢰 전면금지조약이 성립되고 10년이 지나 가맹국뿐만 아니라 비가맹국에 대해서도 지뢰의 사용을 단념하게 하는 인도적·국제법적인 규범이 된 것처럼, 클러스터 폭탄도 이와 같은 규범을 국제사회 속에서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인지뢰에 이어, 시민사회의 강한 지지로, 클러스터 폭탄의 금지조약이 성립되면, 다른 분야의 군축을 전진시키는 큰 원동력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중일(中日)평화우호조약 체결 30주년
마지막으로 중일 관계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동아시아의 ‘부전(不戰)의 제도화’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올해로 일본과 중국의 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된 지 30주년이 됩니다.
되돌아보면 중일평화우호조약의 체결은 1974년 12월에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만났을 때, 저우(周) 총리가 강하게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도 완전히 동감하며, 그 회견의 다음 달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과 회견할 때 중일우호에 대한 나의 신념과 저우(周) 총리의 생각을 전하고 찬성의 뜻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975년 4월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등소평 부총리와 조약의 조기 체결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미키다케오(三木武夫) 수상에게 전언을 부탁받았습니다. 일본 정부에 그것을 전한 후, 정부 간 교섭이 재개되었습니다. 그리고 78년 8월 조약이 체결되어 중일 관계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진행되어 경제적 측면에서의 상호의존이 깊어지는 가운데, 지금은 1년에 473만 명이 왕래하여, 무역총액도 일·미간의 총액을 넘는 규모로 발전할 정도로 관계가 구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최근에는 수뇌 간 대화가 정기적으로 실시되어, 정치적 면에서도 협조관계의 구축을 향한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에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이 실시되어 그 성과인 중일공동프레스 발표에서는 ‘협조와 협력을 강화하고, 지역 및 지구 규모의 과제에 함께 대응한다’는 방침이 포함되었습니다.
일본 방문의 때, 나도 원자바오 총리와 만났습니다만, 석상에서 원자바오 총리는 “중일우호는 대세이며, 민중의 마음입니다”라고 한 말이 가슴 깊이 남아있습니다.
또 지난달에는 후쿠다(福田) 수상이 중국을 방문하여,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 등과 회담을 실시, 환경·에너지 분야의 협력과 청소년 교류 등에 관한 공동 문서가 합의되었습니다.
일찍이 내가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호소한 지 40년. 일본과 중국이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정과 발전을 위한 파트너십의 구축을 향해 크게 발걸음을 내디뎠던 당시의 감개무량함이 떠오릅니다.
중일 관계의 호전과 함께 한일 관계의 개선도 진행되고 있어, 이 3개국의 좋은 관계가 하나의 토대가 되어 ‘동아시아 서밋’의 논의도, 충실한 지역협력을 모색하는 장으로 정착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도, 지난해 11월 정상회의에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의 유지, 비핵무장, 빈곤 삭감 등을 목표로 한 ‘ASEAN 헌장’과 2015년의 경제공동체 실현을 향한 선언을 채택, 지역통합을 향한 전진을 개시했습니다.
나는 한중일 3국과 동남아시아 ASEAN이라는 2개의 고리가 평화와 공생의 방향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간다면, 결국 동아시아에 ‘부전(不戰)의 제도화’를 실현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지난해부터 ‘21세기 동아시아 청소년 대교류 계획’을 세워 중국과 한국,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 가맹국을 중심으로 5년에 걸쳐 매년 6000명의 청소년을 일본에 초대하는 계획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청년 교류나 교육 교류를 민중 차원에서 진행하면서 보다 더 확대를 호소해 온 한 사람으로서 계획의 대성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활동을 단순한 교류의 기회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유엔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이야기를 듣는 장을 마련하거나 유엔이 진행하고 있는 환경교육이나 군축교육에 관해서 함께 배우는 기회를 가지는 청년들이 국경을 초월해 차세대를 담당할 공통 의식을 기르는 장으로 하면 어떨까 라고 제안하고자 합니다.
인류의 미래는 모두 청년들의 양어깨에 달려있다 - 이것은 내가 대화를 거듭해 온 세계 식자의 의견과도 일치하는 바입니다.
우리 SGI는 “새로운 세기를 만드는 것은 청년의 열과 힘이다”라는 도다 제2대 회장의 유훈을 가슴에 안고 앞으로도 청년에게 모든 빛을 비추면서, 지구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행동하는 민중의 연대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참고문헌>
1. ‘생명의 세기를 향한 탐구’, ‘이케다 다이사쿠 전집’ 제14권.
2. ‘국가’ 다나카 미치타로, 후지사와 노리오 외 옮김, ‘세계고전문학전집 15 플라톤Ⅱ’ 지쿠마쇼보 출판.
3. ‘아인슈타인, 신(神)을 말하다’ 윌리엄 허먼스 지음.
4. ‘중력과 은총’ 다나베 다모쓰 옮김, 지쿠마쇼보 출판.
5. ‘소비에트여행기’ 고마쓰 기요시 옮김, 이와나미쇼텐 출판.
6. ‘와타나베 가즈오 평론 광기에 관해 외 22편’ 오에 겐자부로, 시미즈 도오루 편저, 아와나미쇼텐 출판.
7.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고(하)’ 아사히신문사 출판.
8. ‘인류의 성서’ 오노 가즈미치 옮김, 후지와라 쇼텐.
9. ‘불교백화’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지쿠마쇼보 출판.
10. ‘유럽에 고하다’ 사토 고이치 옮김, ‘토마스 만 전집 11’ 신초샤 출판.
11. ‘파이돈’ 후지사와 노리오 옮김, ‘세계고전문학전집 14 플라톤Ⅰ’ 지쿠마쇼보 출판.
12. ‘인간이란 무엇인가’ 고스기 가쓰지, 니이가키 세이쇼 옮김, 미네르바쇼보 출판.
13. ‘21세기의 인권을 말한다’, ‘이케다 다이사쿠 전집’ 제104권.
14. ‘인간개발보고서 2006’ 고킨쇼인에서
15. ‘인간개발전략 공생을 위한 도전’ 우에무라 가즈코 외 옮김. 닛폰효론샤 출판.
[어구 해설]
주1) 문명의 동맹포럼
스페인과 터키의 양 수상의 공동 제안을 받아, 2005년 9월 유엔의 아난 사무총장이 ‘문명의 동맹에 관한 하이레벨 패널’을 설치. 2006년 11월에 정리된 최종보고의 성과를 바탕으로 제1회 포럼이 2008년 1월 개최되어 ‘서로 다른 문화 간의 대화에 대한 젊은이의 연구’등을 둘러싸고 토의를 했다.
주2) ‘참주제(僭主制)’로 쇠퇴
플라톤(Platon)은 「국가」에서 정치 제도의 본연의 자세를, (1)왕제 (2)명예제 (3)과두제 (4)민주제 (5)참주제 라는 5개로 분류. 그 다음에 민주제라는 ‘가장 고도의 자유’가 그것이 안고 있는 숙명적인 내부 모순에 의해 참주제라는 ‘가장 야만스러운 예속’으로 쇠퇴해 버린다고 하는 ‘자유의 모순’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주3) 스페인 내전
1936년부터 1939년에 걸쳐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 인민전선을 소련이 지원하고, 프랑코 장군 등에 의한 반란군을 파시즘 진영의 독일과 이탈리아가 지지했다. 여기에 개입하여 반파시즘의 기를 내건 ‘국제여단(國際旅團)’이 조직되어 헤밍웨이나 안드레·마를로를 비롯해 각국의 지식인과 노동자가 의용병으로 몸을 던졌다.
주4) IPCC
유엔 환경계획과 세계기상기구에 의해 1988년 설립. 과학적 견지를 근거로 지구 온난화에 관한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발표, 제4차 평가보고서의 작성에는 130개국 이상 약 4000명의 전문가가 참가했다. 지난해 온난화에 관한 공통 인식을 만들었다고 하여, 앨고어 전미부통령과 함께 노벨 평화상에 선택되었다.
주5) ‘발리·로드맵’
교섭이 난항을 겪어, 일정을 연장하는 형태로 채택된 행정표에는, 모든 나라가 참가하는 특별작업부회를 설치, 내년 제15회 체결국회의까지 수치목표도 구체적으로 새로운 삭감 구상을 세우는데 합의. 구체적인 검토항목으로서 도상국의 피해방지 지원이나 기술이전, 새로운 자금책의 검토, 삼림감소대책 등이 포함되었다.
주6) 핵무기 금지조약
이 조약의 기초가 되는 것의 하나로 법률가, 과학자, 군축 전문가 등에 의해 작성된 ‘모델 핵무기 금지조약’이 있다. 1997년 코스타리카가 유엔에 제출해, 토의 문서로 배포되었다. 지난해 핵확산 금지조약(NPT)의 재검토 회의의 준비 위원회에, 코스타리카에 의해 다시 개정판이 제출되어 공식 문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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