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장군(1441년~1468년. 향년 28세)을 생각함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수음마무(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의 물은 말에 먹여 없애리)
남아이십미평국( 男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편안케 하지 못하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 여진족 정벌 시 남이가 읊었던 북정가( 北征歌)
남이장군의 묘는 춘천 남이섬이 아니라 화성시 비봉면 남전면에 있다. 남이장군이 유자광의 역모로 억울하게 거혈형으로 28세란 나이, 역모죄로 명을 다하니 후손들이 그의 시신을 안치할 장지를 쉽사리 구할 수 없었기에 사후의 부관참시를 면하기 위해 여러곳에 장군의 묘를 두었다는 설이 있다. 일찍이 권람에게 딸이 있어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청혼했다. 권람이 점쟁이에게 남이의 운을 점치게 했더니 점쟁이는 "이 사람은 반드시 젊은 나이에 죽을 것이니 좋지 못하다"라고 답했다.
권람은 자신의 딸의 수명을 보게 했다. 점장이는 "이 여자도 명이 매우 짧고 또 자식도 없으니 그 복만 누리고 화는 보지 않을 것이므로 (남이를) 사위로 삼아도 무방하다"라고 대답했다. 권람은 그 말에 따라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며 26세(일설에는 28세라고도 한다)에 병조 판서로 있다가 사형을 당했는데, 권람의 딸은 벌써 수년 전에 먼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이는 귀신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무속에서는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이 크나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여 신령으로 받들기도 한다.
그것은 남이가 권남의 딸이 귀신의 조화로 인해 죽게 되었을 때 귀신을 몰아내고 권람의 딸을 살려 자신의 처로 삼았기 때문에 남이의 화분만 보아도 귀신들이 쫓겨 간다는 속설 때문이다.
이렇게 귀신까지도 두려워하는 남이(1443~1468) 장군은 조선조 세조 때의 인물로 의령남씨 의산군 남휘의 손자이자 권람의 사위로 세조 3년인 1457년 무과에 급제했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남이는 세조의 총애를 받아 여러 무직을 역임하였다.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녔던 남이는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난을 평정했다.
이어서 파저강 일대의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여 추장 이만주 부자를 사살함으로써 세조 12년에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런 남이를 신진세력의 약진을 두려워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눈에 가시로 여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등극하자마자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당한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남이는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도모한다"는 고변으로 26세에 능지처참 당해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너무나 뛰어났기에 억울하게 죽은 남이는 350여 년이 지난 순조 18년인 1818년에 남이의 후손인우의정 남공철의 청으로 관직과 작위가 복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