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 없으면 농사나 짓지 라는 말은 농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임을 실감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드나드는 텃밭농사이니만큼, 씨를 뿌리는 때와 거름을 주는 때, 가지치기를 해 줘야 하는 때 등을 제 때 맞춰주기가 어렵기 때문에 더 그렇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텃밭 농사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배추다운 배추 농사를 지었다.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 쌈으로 먹고 겉절이 해 먹으라고 배추 세포기를 보냈더니 엄청난 칭찬이 날아왔다. ‘전문 농사꾼이야 농사꾼 내년에는 거기 밭 한쪽에 함께 배추를 기르면 안 될까‘ 한 욕심을 더 얹어 말할 만큼 배추 안쪽 노란 고갱이가 꽉꽉 들어찼다.
이곳 양평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밤 기온이 낮고 낮 기온이 높을 뿐만 아니라 산이 높아 어스름이 빨리 온다. 겨울은 서울보다 3도이상 낮다. 일주일에 한번 씩 들르는 우리가 싱싱한 배추와 무를 얼리지 않고 김치를 담아 먹으려면 일찍 서두르는 게 상책이다. 게으름을 부렸다가는 몇 해 전 같은 안타까움과 맞닥뜨리게 될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배추와 무를 심었던 해였다. 온갖 정성과 관심을 기울인 덕분인지 기적이라할만큼 부쩍부쩍 자라났으니, 무조건 신기했던 우리는 환호하고 환호하였다. 11월이 되면 이곳 날씨가 갑작스레 영하로 뚝 떨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고, 거기다가 배추를 그대로 놔 두면 점점 더 커질것이라는 헛된 욕심을 부렸던 것도 화근이었다.
11월 19일. 날짜도 기억한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것일게다. 먹을 것이 귀했던 어린 시절처럼 와삭와삭 무를 뽑아 즉석에서 깨물어 먹고 싶은 마음에 무 한 개를 쑥 뽑아 무청을 잘라냈을 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발견했다. 실망으로 한숨을 쉬었다. 싱싱한 무를 잘라보면 촉촉한 물기야 말할 것도 없고 윤기가 흐르게 마련이 아닌가. 전혀 아니었다. 숭숭 뚫린 구멍이 보였으며 물기는 보이지 않고 푸석했다. 밭 가득한 무를 잘라보고 잘라보면서 이것만은 괜찮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오십여 개나 되는 무를 댕강댕강 잘라버리는 일로 무식한 농부로서의 신고식을 호되게 치뤄야 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서둘러서 배추와 무를 뽑아낸다. 갓 뽑아낸 배추는 싱싱하지만 뻣뻣하여 쉬이 부러지기도 하고 잘라져버린다. 저희들끼리 몸이 닿아도 상처가 생기므로 얌전하게 다듬어 간격을 조금씩 두는데, 문득 우리의 신혼시절이 생각난다. 바로 뽑아낸 배추만큼이나 한껏 싱싱해서 부딪칠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를 냈고 그때마다 퍼런 물이 돋는 상처가 생기지 않았던가. 절대로 자신을 낮출 마음이 없었으니 부러지는 것은 기본이고 문드러지기까지 했다. 적당한 간격이 필요했으나 신혼이니만큼 간격을 두려워했다. 너는 너로 나는 나로 인정해주기보다는 무조건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에 억매였으므로 부디침이 더 심했고 상처 또한 더 깊었다.
기운이 펄펄할 때는 혼자 하던 김장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도 힘든 줄 모르고 김장을 끝낸 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해 식탁에 자랑스레 올려놓고는 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 한 수저에 양념이 범벅인 노란 속고갱이를 길쭉한 그대로 올려 탐스럽게 맛나게 먹는 그를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얼마나 뿌듯했던가. 행복했던가. 나이가 들면서는 역부족임을 실감한다. 거기다가 내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있었다. 그의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배추 절이는 일을 그가 나서서 한다. 짭짤한 소금물에 흠씬 담갔다가 나란히 놓은 뒤 소금을 한 움큼 씩 집어 배추 줄기 부분에 올려놓으라고 내가 시범을 보였더니 오랫동안 해 온 일 인양 척척 해낸다. 쭈그리고 앉은 뒷모습에서도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역력하니 칭찬 한 마디 해 주었다. 와우 왜 그렇게 잘해요 대단한대 많이 해 본 솜씨예요. 입을 함지박 만하게 벌려가며 그가 웃는다. 배추가 절여지듯 우리도 서로를 그런대로 잘 절여가는가.
일곱 남매의 막내로 자라난 나는 부모님은 물론 언니 오빠들로부터 사랑뿐 아니라 무엇이든 받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주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던 내가 맏며느리로 시집을 간 것이다. 부모님의 생활비를 보내드려야 하는 것은 물론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져야하는 집안의 맏며느리였다. 무엇이든 나눠주고 베풀어야 하는 자리였다. 이기심만 그득했던 막내인 내가 받는게 아니라 주어야하는 일에 익숙해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시부모님께 잘 해야한다. 눈치를 채셨는지 친정 부모님은 누누이 말씀하셨다. 받는 입장이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야 주는 입장이라는 게 얼마나 행운이야. 받는 입장이라고 생각해 봐 어떻겠어? 시댁에 돈을 보내는 일로 내가 심술이 난 얼굴일때면 남편은 그 말로 나를 다독였다. 그 말을 되뇌이면서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듯 슬금슬금 나는 절여져갔다.
그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고 평화로운 사람이다. 급하고 화가 많은 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급한 일이라해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대로 해결해나간다. 급한 탓에 엄벙덤벙 난리를 쳐대느라 애만 쓰고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는 나는 좀 어리석은 편이다.
일광 바닷가에서 2년 살았을 무렵 주인집에서 방을 빼라고 하였다. 그 집 딸이 들어올 예정이라고 했다. 이사를 해야 할 시간은 한 달 남았는데 그는 주말말고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마음이 급한 내가 해운대쪽에 방을 알아보았다. 그 당시에는 부동산 업체로 알아보기보다는 대문간에 붙어있던 셋방 이라는 글자를 보고 방을 구하던 시절이었다. 여러날 2살된 아이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배기를 오르내렸지만, 그래도 부산시내이므로 우리의 전셋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몸이 힘들어서일 뿐만 아니라 내가 이사갈 집이 없다는 실망감으로 호된 몸살을 앓았다.
반면에 그는 참으로 여유만만이었다.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봐 좋은 방이 나올꺼야. 안달안달인 나는 화만 냈다. 그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렇다고 방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행히 목욕탕집 옆 이층집에 살던, 알고 지내던 내 또래 아주머니가 회사 관사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내가 안달을 부리지 않아도, 그에게 싫은소리를 해대지 않았도 될 일을, 내 급한 성질로 헛된 조바심만 냈던 것이다.
그의 단점이라면 ‘아니오’와 ‘예’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아니오’ 라는 말을 아예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스맨이다. 반면에 나는 냉정하리만치 ‘아니오’가 분명한 편이다. 언니와 오빠가 우리집에 놀러오신다고 말씀하실 때 나는 내 몸이 피곤하거나 마음이 불편하면 아니오 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냉정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정이 없다고도 말할수 있다.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 친정 형제들도 나보다 그를 좋아한다. 어느 때인가는 어머니 기일 날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거절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소금처럼 쓴 내 잔소리 때문일까. 이제 그도 ‘아니오’를 말해야 할 때 아니오 라고 말하는 횟수가 늘어간다.
엎치락뒤치락 서로가 서로를 제압하고 간섭하려 했던 시절은.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듯 상대방을 절여보려던 시절이었다. 소금보다 더 쓰고 짠 말들을 상대방에게 마구 쏟아붓던 그 많은 시간들 덕분에 서로가 서로를 절여왔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싸움의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아무리 부딪쳐도 상처가 잘 생기지 않는 잘 숨이 죽은 배추처럼 우리는 가지런해졌고 양순해졌다.
배추를 다 절이고 난 후 우리도 따스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나란히 누웠다. 우리도 배추처럼 잘 절여지고 있는 중이지 싶다. 배추처럼 시퍼렇게 저 잘났다고 뻐기던 시절 내려놓고, 적당히 자신을 낮추고 부피를 줄여 한 공간에서 부대끼고 뒤섞이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는 중이지 싶다. 우리는 배추와 소금이었다.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배추와 소금이었다
기운이 펄펄할 때는 혼자하던 김장을
오십이 넘으니 남편과 함께 하네
막 뽑아낸 배추를 다듬는 동안
상처가 쉬이 생겼던
뻣뻣한 시절 보이네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는 동안
알게모르게 서로에게 배어들던
보드라운 시절 떠오르네
부부의 인연으로 산다는게
배추이기도 하고
소금이기도 하네
배추이기보다는 소금이고자
짜고 쓴 맛 품었던 날 부지기수이지만
예까지 오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절이고 절인거네
아무리 부대껴도 흠집이 덜 생기는
골고루 절여진 배추로
절이고 절여졌던거네
웬만큼 숨이 죽은 저 배추를
마지막으로 더 뒤집어야 하듯
오십이 넘은 당신과 나도
마지막으로 뒤집어줘야 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