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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소설 / 이훈
이기호의 두 번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문학동네, 2006)의 성격은 “소설 같은 현실”에 대응하는 소설론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집에는 <나쁜 소설>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도 있거니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우연이야말로 현실의 실상이라고 주장하는 소설론을 펼치며, <원주통신>은 소설가 박경리에게 바치는 감동적인 헌사라고 할 만하고, <수인(囚人)>과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에서는 일인칭 화자인 소설가가 직접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전체 8편 가운데서 3편을 빼고서는 다 소설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 소설집의 성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작가의 소설론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겠다. 그러면 소설론을 잘 드러내고 있는 구절을 좀 길기는 하지만 먼저 읽고 얘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꽃이 폈네, 꽃이 졌네, 장독대에 있는 항아리야, 어쩌자고 또 임신을 했다더냐, 글러브가 웃는다, 글러브야, 글러브야, 어서 빨리 페달을 밟으렴, 쥐가 쫓아온단다, 쥐에게 잡히기 전에 개집으로 숨으렴, 해피는 아빠 뱃속에 들어간 지 오래란다, 아빠 뱃속에서 부활해, 저 하늘 카시오페이아가 되었단다. 카시오페이아가 내려와 목련꽃을 피웠으니, 해피가 목련이구나, 해피가 폈네, 해피가 졌네……말도 되지 않는 그것들을 수학공책 뒷장에다 빼곡히 적어나가다보면,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거짓말처럼 눈물이 한 방울 툭, 공책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쓰고 싶지 않은데, 이딴 건 쓰고 싶지 않은데, (중략) 나는 무언가를 계속 쓰기만 했다. 무섭고 쓸쓸했으니, 쓸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홧홧해지고, 눈물이 떨어져도, 그것이 무서운 것보다 나으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학교에서도, 버스에서도, 나는 계속 쓰기만 했다. 갈팡질팡, 괴발개발, 무엇이 그리 두려웠는지, 참 많이도 썼다.(<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287-8쪽)
액자 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첫째 단락이 나오게 된 연유는 이렇다. 주인공인 일인칭 화자는 목욕탕에 가다가 동네의 십대 폭력 서클의 아이들과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유 하나로 집단 린치를 당하는가 하면 친구들 앞에서 유명한 씨름 선수인 이봉걸을 욕하다가 ‘우연히’ 곁을 지나던 씨름부 선수들한테 걸려 들배지기에 이어 온갖 기술을 맛보기도 한다. ‘우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연히’ 당구장에 똥 누러온 불량배를 자신을 잡으러 온 것으로 착각해 피하려고 2층에서 뛰어내렸다가 다리를 부러뜨리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악재가 겹치자 이제 주인공은 불량배들에게 다시 맞을 것이 무서워서 집과 학교만을 오간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 “끼적끼적, 아무런 생각이나 고민 없이, 갈팡질팡 적어나간” 것이 바로 위의 인용문 앞 부분이다.
안의 이야기에서 문장들은 대상들의 객관적 성질이나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고 우연의 상상력이라고 할 만한 것에 의지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얼른 알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않는 발랄한 상상력의 작용이 주체 앞에 존재하는 현실과 관계없이 나타나는, 전적으로 관념적인 놀이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내 방 책상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창 밖을, 어둑어둑해진 골목길과 가로등을, 꽃잎이 모두 떨어진 목련과 장독대를, 녹이 슨 자전거와 비 맞은 야구 글러브를, 화단 한편에 놓인 쥐덫과 오래 전부터 비어 있던 개집을, 불 밝힌 교회 십자가와 밤하늘 카시오페이아를, 눈이 아플 때까지 쳐다보고 또 쳐다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같은 장소에 우연히 존재하는 것들을 화자가 상상력에 의해 연결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불량배들에게 얻어맞는 것도 앞에서 소개했듯이 우연이 시킨 일이다. 주인공에게는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계속 일어난”다. 이처럼 이 작가에게는 우연이 현실의 기본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우연의 연속을 그려 보이는 것이야말로 리얼리즘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는 엉뚱한 주장이 성립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나는 그 논리(필연성―인용자)가 버거워, 종종 우연으로 소설을 끝내버리곤 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내적 필연성으로 주인공을 몰고 가기 위해 용을 쓰다가 그만, 제풀에 지쳐 에라이, 뵹! 이쯤에서 주인공 자살(혹은 즉사)! 뭐 이런 식이 되었던 것이다. (중략) 나는 에라이, 뿅! 만큼 살았으니, 에라이, 뿅! 같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겐 리얼리즘이었으니까.(269쪽)
이기호의 ‘리얼리즘’은 이른바 가상현실의 압도적인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현실과 환상을 뚜렷하게 구별할 수 없을뿐더러 독자마저 소설 같은 현실에 뺏겨 버린 “무섭고 쓸쓸한” 시대의 소설 창작 방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 방법론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구체화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현실과 환상의 결합, 둘째 독자와의 소통에 대한 간절한 희구, 셋째 달라진 시대를 사는 소설가의 고뇌와 소설에 대한 애정 등이다. 이들을 조금 더 살펴보자.
첫째의, 현실과 환상을 결합하는 양상을 잘 보이는 작품을 실린 차례대로 들면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국기게양대 로망스>, <수인> 들이다. 이들에서 현실에서는 도무지 있을 성싶지 않은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진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에서는 1983년 북한에서 날아온 미그 19기가 남한에 귀순했을 때 전쟁이 난 것으로 알고,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파 놓은 집 뒤뜰의 벙커에 들어갔는데 부모가 여행 갔다 사고로 죽는 바람에 전쟁이 계속되는 줄 알고 벙커에서 나오지 못하고 흙을 먹게 된 주인공이 나온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주인공의 비현실적인 행위가 현실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 비행기가 날아왔기 때문에 저런 일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흙을 주식으로 삼는다는 발상이 아주 엉뚱하기는 하지만 분단 상황에서 체제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사람의 반응을 조금 과장해서 그린 것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따라서 분단 소설의 새로운 유형을 창조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비현실성을 도입함으로써 구태의연한 현실을 낯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작품집에 해설을 쓴 신형철의 말대로 <서울, 1964년 겨울>의 2000년대판이라고 해도 좋을 <국기게양대 로망스>의 비현실성은 더 나간다. 세 명의 남자가 국기게양대에 매달려 있다. 한 명(시봉)은 게양대의 국기를 훔쳐 팔기 위해서, 또 한 명은 국기게양대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나머지 “넥타이를 한, 삼십대 중반의 사내”는, 빚보증을 서서 집을 날린 뒤 가출한 아내를 찾기 위해서다. 여기서도 앞의 작품과 비슷하게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나타난다. 마지막에 등장한 사내가 국기게양대를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 사랑이 불법이 아니냐고 묻는다.
“무슨 불법이요?”
“저, 그러니까 뭐 국보법 같은 거……”
“그런 거 생각하면 사랑 못 하십니다.”
“그건 그렇지만…… 전 자꾸 국가와 뭘 하는 것 같아서……”(<국기게양대 로망스>, 189쪽)
사랑과 같은 사생활의 영역에도 국가와 반공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도 비현실성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의 작용과 더불어 밑바닥 인생의 슬픔을 낯설게 그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 수인>은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인 소설가 수영이 산 속에 들어가 소설을 쓰고 돌아와 보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살 수 없어서 외국으로 나가야 하게 되었다. 수영은 난민 심판관에게 소설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소설책이 진열되어 있는 대형서점에서 책을 꺼내 와야 하는데 원폭 사고 때문에 출입구마다 시멘트로 완전히 채워져서 곡괭이로 파 들어간다. 독자들이 떠나가 버린 새로운 시대를 사는 소설가의 곤경을 이처럼 낯설게 그리고 있다.
이제 자연스럽게 둘째 양상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수인>에서 보듯이 소설가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곡괭이를 들고 시멘트 벽을 부수는 시지프의 형벌을 받아야 하게끔 되었다. 소설만으로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난민임을 증명해 주는 일을 하는 서기는 “어느 국가가 망한 나라의 소설가를 고이 받아들이겠어요? 소설 말고 뭐 다른 장점이 하나쯤은 있어야죠.”라고 하면서 두꺼운 벽을 다 깼으니 소설책을 찾지 못해도 난민임이 증명됐다고 한다.
정신노동자인 소설가가 육체노동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소설가에게 독자와의 소통은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작가가 여러 소설에서 능숙하게 활용하고 있는 이야기체는 이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고심 어린 노력의 일환이다. 이것은 소설의 기원으로 되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소설이라는 게 원래 그랬잖아요. 누군가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이야기. 들려주는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고 각색되는 이야기. 그게 소설의 진정한 참맛이잖아요. 이 소설도 읽어주는 사람에 따라, 그의 맘에 따라, 계속 변하고 뒤바뀌고 출렁거려, 누가 진짜 이 소설의 원작자인지 모를 지경까지 흘러가길 원합니다. 나는 그런 것엔 하나도 서운하지 않으니까요.(<나쁜 소설―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 주는 이야기>, 9-10쪽)
인용에서 보듯이 화자가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건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채만식의 <<태평천하>> 같은 데서 익히 보아온 방식이다. 그런데 <나쁜 소설>은 여기서 이 전통적인 방식을 뛰어넘는다. 최면을 걸어 독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리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독자이자 소설의 주인공이며 더 나아가 이야기를 읽어 주는 역할도 하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당신’의 얘기를 들어 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결국에는, 여관에서 몸을 파는 아가씨에게 소설을 읽어 주게 되는데 ‘당신’은 그녀에게 변태 취급을 받고 “아, 씨발, 뭐 이리…… 나쁜 소설이 다 있냐……”는 핀잔을 들을 뿐이다. 소설가의 곤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위에서 본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의 요리 강사는 강습생 앞에서 “오늘의 요리는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이 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에서 화자인 소설가 주인공은 액자 안 이야기에서 할머니에게 얘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활용하여 독자와의 거리를 가깝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애정을 언급하고 마쳐야겠다. <원주통신>은 소설가의 위대함과 그에 걸맞은 존경심을 아주 재미있게 그리고 있는 수작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주인공이 사는 동네로 이사 온다. 그 후에 텔레비전에서 <<토지>>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자 동네의 “어머니들은 각자 자신과 박경리 선생과의 인연을 경쟁적으로 늘어놓”는다. 물론 주인공도, 골목길에서 한 번 마주친 적도 없으면서 학교 친구들에게는 자신이 작가와 가까운 사이라고 떠벌린다. 주인공이 이사를 가게 되자 여전히 만나 보지 못한 작가의 집을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고 달아난다.
이사를 가기 전날 밤, 나는 마지막으로 박경리 선생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담배를 피웠다. 그때까지도 나는 박경리 선생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선생 또한 그때까지도 <<토지>>를 다 끝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일천구백구십삼년도였다. 그러니까 선생이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온 지 꼬박 십삼 년이 흐른 뒤였다. 그 십삼 년 동안 선생은 계속 한 소설만 쓰고 있었고,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새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나는 갑자기 막막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뭔 할말이 그렇게 많아요…… 나는 선생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근 십삼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조용히 선생의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선생의 집은 언제나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대문 이곳저곳에 페인트칠이 일어나 있었다. 나는 그 대문을 바라보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재빠른 동작으로 초인종을 누른 후, 다시 등을 돌려 타다다다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잘 있어요, 선생님. 얼른 소설도 끝내시고요, 건강도 하시고요…… 뛰면서 나는 선생께, 난생처음 인사를 드렸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이였지만, 그래도 선생은 내 이웃이 분명했으니까……
선생이 소설 <<토지>>를 다 끝낸 것은 그로부터 다시 일년이 지난, 일천구백구십사년, 늦은 봄날의 일이었다.(<원주통신>, 102-3쪽)
내게는 소설로 쓴 박경리론으로 읽힌다. 소설가가 마치 운명이기나 한 것처럼 “안쓰럽게” 소설 한 편을 오랜 세월에 걸쳐서 써 나가는 동안 아이는 자라서 대학생이 되고 작가가 사는 집의 대문은 페인트칠이 일어난다. 그리고 창작의 고통을 반영하는 듯이 “깊은 침묵”이 있다. 재빠르게 초인종을 누르고 달아나는 화자의 행동에는 묵묵히 창작에 몰두한 작가에 대한 깊은 애정이 숨어 있다. 아름답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명장면이다.
세월이 흘러 학교 친구가 자신의 룸살롱 ‘토지’에 주인공을 초대해 크게 대접하고 나서 ‘토지’라는 상호를 쓸 수 있게 작가의 승인서를 받아 오라고 협박한다. 한국 소설사에서 영원히 남을 명작이 천박한 상업성의 제물이 된 것을 비판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으로도 읽어야 마땅하다. 화자와 소설가가 나눈 상상의 대화를 들으면 위대한 작가에 대한 찬사인 것이 더 분명해진다.
“선생님, 제가 몹쓸 짓을 했어요……”
“호오, 그랬어?”
“네…… 아이들한테 선생님하고 막 친하다고 그랬어요. 선생님이…… 우리 외할머니라고 한 것도…… 사실은 저에요……”
“다 지난 걸 뭘 그러노?”
“그러면 막 기분이 좋아져서 더 큰 거짓말을 하고 그랬어요…… 선생님이 맨날맨날 다음 이야기를 먼저 들려준다고……”
“그게 뭐 큰 잘못이라고……”
“아니요…… 내 멋대로 막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랬어요…… 아이들한테 둘러싸이고 싶어서……”
“그건 네가 외로워서 그랬던 게지.”
“네…… 아니요…… 네, 맞아요……”
나는, 나도 모르게 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또 다음 플라타너스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선생님 댁 개나리 가지에 담배꽁초를 버린 것도 저예요……”
“그래, 그래.”
“서희가 따라주는 술도 마셨어요……”
“안다, 내 다 알아……”
“그냥, 고마워서요…… 고맙고 따뜻해서요……”
“그럼, 됐지 뭐. 사내자식이 왜 이리 눈물이 많노?”
“정말 그게 다였어요…… 그냥, 고마워서요……”
“그래, 그랬구나.”
“한데요, 선생님…”
“그래.”
“한라산을 어떻게 서울로 옮기지요?”
“한라산을?”
“네.”
“한라산을 서울로 옮겨?”
“네……”
“한라산을 왜 서울로 옮기고 난리노?”
“그렇지요? 그렇지요, 선생님? 그건 그냥 난리인 거죠?”
나는 급기야 어린아이처럼 팔꿈치로 눈물을 닦으며 울먹거렸다.(<원주통신>, 126-7쪽)
참고로, 한라산을 옮기는 문제는, 화자가 삼류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취직하고자 면접을 받은 적이 있는데 면접관의 질문이라는 것이 “한라산을 서울로 옮기는 방법’이었다.” 좋은 소설이 부르는 눈물과 감동을 재미있게 형상화해 놓고 있다. 재미와 감동을 동반하는 빼어난 작품이다.
<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는 한국 전쟁의 상흔을 다루고 있는데 화자인 소설가의 할머니는 큰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좌익의 우두머리인 형부 덕분에 호강하다가 전세가 역전되자 언니와 조카들이 몰살당한다. “조카 중 한 명이 숨겨 달라고 찾아왔는데, 그 어린것을 그냥 모른 척해버린”다. 이 평생의 한을 풀어 주고자 소설가인 ‘내’가 “그 옛날 할머니처럼, 작은 목소리를 사라진 사람들을 불러내어” 할머니를 위로한다는 것이 작품의 뼈대를 이룬다. 이야기가 죽은 이를 살아나게 하는 마술을 부리고 그 과정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치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힘은 이렇듯 세다. “할머니를 통해서 뱀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죽은 사람들이 때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도 <원주통신>>과 똑같이 소설과 소설가―할머니는 글을 모르는 소설가이다―에 대한 애정과 깊은 존경심을 담고 있다.
이기호의 소설의 새로움과 낯설게 하기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그 과정에서 독자를 끌어들여 문학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안이 나올지 무척 궁금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