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최영선 공)을 떠나 보내드리며
사위 류종열
월요일이라서 출근을 하려고 준비하는데 나보다 30분 정도 먼저 출근한 집사람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온다. 순간 등줄기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전화기를 드니 울먹이는 소리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비록 노환으로 머지않아 돌아가실 것으로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사무실에 급한 일이 있었기에 바삐 출근하여 급한 일만 처리해 두고 금산에 있는 시골 처갓집으로 달려갔다. 방안에 들어서니 평안한 얼굴로 평소와 같이 누워계셨다. 가족들이 외지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집안에서 본 뒤에 장례식장으로 옮기기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천과 안양에서 온 처남과 처형 내외를 맞이한 뒤에 장례식장으로 옮겨 장례절차에 들어갔다.
장인께서 49세 정도 되었을때 우리가 결혼하여 처음으로 뵈었으니 장인의 일평생을 모두 알 수는 없으나 경험한 것이나 들은 것으로 그 일생을 회고해 보려고 한다. 장인은 1950년대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3회로 졸업하였으니 당시로 대단한 엘리트였다. 그러나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일념으로 서울행을 포기하고 시골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셨다. 그러나 유능한 분을 세상이 그대로 둘리는 없으니 학교 육성회장, 공화당 관리장, 지도장 등 시골 유지를 거치면서 금산인삼조합장을 지내셨다. 그러면서 강화최씨 종중일은 말한 것도 없이 마을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내 일처럼 나서서 해결해 주었고, 제원면과 금산군의 수로 개설, 도로 개설 등 민원 해결에 앞장서시고, 제원면에 한국타이어가 입주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셨다. 금산인삼조합장으로 있을 때에는 인삼경작자들을 격려하여 질 좋은 인삼을 재배하고 또 유통구조의 개선과 인삼의 세계화를 추진하여 금산 인삼의 위상을 크게 높혔다. 이런 일을 하면서도 청렴하고 양심적인 성품으로 인하여 그토록 좋은 시절(?)임에도 이권을 얻지도 않았고, 사치나 낭비벽이 전혀 없음에도 처조부께서 크게 이루어 놓으신 재산을 오히려 크게 줄이는 살림살이를 영위하였다.
결혼 초에 처갓집에 잠을 자는데 그때 처조부께서 노환을 앓고 계시던 때였는데 저녁에 사랑방에서 처조부를 간병하다가 주무시는 것을 확인한 뒤에 안방으로 돌아오셔서 주무시는 것을 보았는데 특별한 일이 없이 집에 계실 때는 반드시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장인께서 신혼 때에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 앞에서 자녀를 예뻐하면 불효라고 하여 부모가 계실 때는 자녀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일을 하다가 집에 볼일이 있으면 그때 비로소 살며시 안아보고 다시 일하러 가셨다고 한다. 지나칠 정도로 자녀들에게 엄격하였던 분이었지만, 그러한 부모님을 보고 자란 처가의 5남매는 다른 것은 차치하고 지극한 효심만은 누구 못지않게 뛰어났다고 생각되었다.
젊은 시절에 의젓하고 카리스마 있는 장인을 뵈오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해결해 주실 것 같아 든든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쇠약해지시고 최근 1년간은 기억력도 매우 약해지신 것을 보고 마음이 아프고 머지않아 돌아가실 것 같은 걱정이 몇 달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요즘 고려장이라고 불리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가지 않으시고 집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시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아니....
하루 전날 증손자 손녀 3명을 불러서 종이돈을 가지고 손으로 부채처럼 펴서 차례대로 한 장씩 뽑아서 가지라고 하며 함께 놀았고, 새벽 4시 반에는 장모님에게 가까이 와서 자라서 하면서 손을 꼭 잡고 한없이 쓰다듬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잠이 든 후에 아침에 일어나서 장모님이 아침 식사를 하라고 깨우셨는데 반응이 없어서 흔들어보니 돌아가셨더라는 것이다. 92세를 맞이하는 설날을 며칠 앞두고 이렇게 평안하게 잠드신 것이다.
돌아가신 일을 잘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지만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녀들에게는 한이 될 수도 있지만 본인에게는 이보다 편한 마지막은 없을 것이다. 묘한 일은 빈소에 켜 두었던 큰 양초 3개가 똑같이 촛물이 녹아서 아래의 사진처럼 교묘한 모양이 되었던 일이다. 혹시 저리되도록 애초부터 설계된 양초인가 하였는데 빈소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촛불을 조금 일찍 껐더라면 혼을 안고 곧게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이 되었을 수도 있고 곧은 양(陽)과 굽은 음(陰)이 조화를 이루는 형상이기도 하다. 아마 평생 베푸신 덕으로 인하여 좋은 곳으로 가셨음이 분명하리라.
빈소을 지키다가 사진에서 인자하게 웃으시는 장인을 보면서 장인의 마음을 빌려서 감히 만시(挽詩) 한 수를 지어서 바친다.
流光歲月何如短 빛 같은 세월이 어찌도 그리 짧은지
九十平生瞬息經 구십의 평생이 순식간에 지나갔구나
遠路黃泉踰萬里 먼 황천 가는 길이 만리가 넘을텐데
子孫回顧道尤溟 자손을 회고하니 길이 더욱 아득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