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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신체포기각서>의 줄거리:
신체포기각서! 말만 들어도 무섭습니다. 대체 상황이 얼마나 절박하고 급하면 신체의 장기들을 담보로하여 돈을 빌려 쓰겠습니까? 법적 윤리적인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참으로 끔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진리 안에서 제대로 믿으려면 결국은 우리도 모두 신체포기각서를 써야만 합니다.
신체포기각서
(마18:5-14)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신체포기각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신체포기각서는 뭐 실제로 경험하신 분이 얼마나 많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아주 자주 나옵니다.
그 신체포기각서라는 것이 진짜 있는가 하고 양식을 찾아봤더니, 대충 이렇게 돼 있어요.
‘나는 갑에게 5억을 빌렸는데, 이 빚을 갚지 못하면 담보로 잡혀있는 내 신체, 주요 장기와 신체 전부를 채권자의 권리 하에 양도한다’라는 그런 내용의 각서예요.
어휴, 끔찍해요 여러분! 무섭습니다.
얼마나 절박한 상황이었으면 자기 신체 내에 있는 주요 장기들을 담보로 잡혀서 급전을 빌려 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끔찍해요.
그리고 이것이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당한가 아닌가의 여부가 얼마든지 논쟁이 될 수가 있어요.
이게 법적으로 가능합니까? 저도 잘 모르겠는데 신앙적으로는 이게 불가능하지요.
그렇게 각서를 써주는 것도 불가능하고 신체포기각서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도 극악무도한 죄이죠.
이건 분명히 불신앙적이고 악한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신체포기각서를 강요하는 고리대금업자나 조직폭력배들이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조건은 달라요, 악덕 고리대금업자나 조직폭력배들이 신체포기각서를 강요할 때는, 그 신체포기의 전제조건이 뭐냐 하면 빚을 못 갚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신체포기를 권면하시고 강요하시는데, 그 신체포기를 하게 되는 전제조건이 뭐냐 하면 예수님 믿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할 때입니다.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져 죽는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예수 믿는 작은 자를 실족케 하라는 거예요, 실족케 할 거면.
그리고 그런데도 실족케 하는 일을 중단할 수가 없거든 그렇게 실족케 하는 데에 동원이 되고 있는 네 팔모가지를 잘라버리고, 발모가지를 잘라버려서라도 실족케 하는 일을 피하라는 얘깁니다.
도대체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일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씀을 자애롭기 그지없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사랑의 화신인 주님께서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거냐 이겁니다.
그 사랑과 같은 맥락에 있는 얘기인데, 튀어나오신 말씀은 조직폭력배나 악덕고리대금업자가 할 수 있는 신체포기각서에 대한 얘기를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도대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예수 믿는 작은 자가 누굽니까?
12세 미만의 미성년자 어린이 초등학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린아이를 세워서 말씀하고 계시지마는 ‘어린아이 같이 작은 자’ ‘어린아이 같이…’라고 하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를 믿고 따라다닐 정도면 어린아이가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 작은 자’라고 그러면 어린아이 같이 작은 자는 누굽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좋다고 생각해서 추구하고 있는 가치들, 그 가치들이 없는 자가 작은 자입니다, 그 사회 내에서 작은 자예요.
그러니까 세리와 창기들이 작은 자이고 어부와 목수들이 작은 자고, 그 유대 사회에서 높이 평가 받은 수 있는 가치를 몸에 지니지 못한 자들이 작은 잡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큰 자이고, 대제사장이나 서기관과 율법사들이 큰 자이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 사회, 아니면 뉴욕 시애틀, 이런 사회에서 가치 있게 여겨지는 중요한 품목들이 내게 없는 것, 그러면 나는 작은 자입니다.
사람들이 돈 좋아하죠? 돈이 없습니다, 학식 좋아합니다, 학벌도 없습니다, 미모 좋아하죠? 미모도 없습니다, 건강 좋아하지요? 건강도 없습니다.
그러니 작은 자입니다.
작은 자인데 예수를 믿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는다는 게 심장을 꺼내서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마음 붙이고 좋아할 만한 가치라고는 하나도 없고 기껏 예수님을 믿어서 마음 둘 곳이라고는 돈에도, 하다못해 고급 차에도, 집에도, 학벌에도, 미모에도 없고 예수님에게만 마음 둘 곳을 찾는 자, 이게 작은 자라는 거예요.
이 사람에 대한 예수님과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목자의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속 읽어가다 보면.
그것은 왜 그럴까요?
왜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산에 두고 내려가서 그 한 마리 양을 찾을 정도로 그 양에 대한 마음이 애틋하다는 뜻입니다.
근데 그 소자들이 하나님에게 왜 그런 마음을 유발시킵니까?
보세요, 세상에서 이 사회에서 좋다고 하는 가치를 나도 좋아하고 그것을 갖고 있으면 내 마음이 그쪽으로 가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있다는 것은 반대방향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얘깁니다.
돈이 좋고 돈을 가졌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학벌이 좋고 학벌을 가졌습니다, 그만큼 더 멀어진 겁니다.
명예가 좋고 지위가 좋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는 게 좋고, 그걸 가졌습니다, 그만큼 멀어진 겁니다.
그러므로 작은 자라는 것은 그만큼 반대로 하나님께 상대적으로 가까이 와있는 자라는 얘깁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다른 데 둘 곳이 없으니까…
열애에 빠진 여인 앞에서 아무리 멋지게 보이려고 애를 써도 눈에 들어오지를 않아요, 이미 한 남자에게 마음이 꽂혀있기 때문에.
그런데 어떤 남자에게도 마음 주지 못하고 외로워하고 힘들어할 때 접근을 하면 말 한 마디 따뜻하게 해준 것으로 그 여자의 마음을 살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자들의 특성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가까이 있는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만큼 귀하고 아깝게 생각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작은 자들을 실족케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것일까요?
실족케 한다는 것은 길을 이탈시킨다는 거예요, 그럼 어떤 길을 말합니까?
예수님께서 내신 길이 있습니다.
말씀드렸지만 하늘에 계신 분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십자가를 향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길을 걷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그렇게 길을 가신 이유는, 십자가를 통과하고 부활하고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가시는 그 길을 내시는 이유는, 그 길을 걷는 게 바로 구원의 길이고 믿음의 길이고, 예수를 믿는 거니까.
그런데 이 길을 이탈시키는 것이 실족케 하는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대체 이 길을 걷는 게 뭘까요?
구체적으로 이 길을 걷는 것은 뭐고 이탈시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 이 길을 걸으면 십자가를 거쳐야 됩니다.
십자가를 거치면서 부활해서 승천하시는 주님의 길을 내 마음이 따라 가야 됩니다.
결국 마음이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주님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 우리 마음이 걸어가야 될 길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길을 걸으며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런 것이죠.
지금 내가 돈이 없어서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돈보다 더 좋은 주님, 내가 마음을 둔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아, 나는 돈은 없지만 하늘은 있다, 하늘에 내 아버지가 계시고 내 주님이 계신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니다’
그러면 뭘 바랍니까?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아버지와 주님께서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고 깔깔대고 웃으며 좋아하고 계시는데, 주님과 연합해서 주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주님이 아버지를 대하시듯이 내가 그렇게 아버지를 지금 느끼고 싶고, 지금 만지고 싶고, 지금 마음에 아버지를 닮고 싶다.’
이게 소망하는 겁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가신 그 하늘나라가 실재한다는 걸 믿는 것이고, 소망은 그 하늘나라에서 하나님하고 교통하고 계시는 주님의 자리에서 나도 하늘나라에서 주님이 아버지를 만나시고 느끼시듯이 그렇게 아버지를 느끼고 천국을 마음으로 갖고 싶어 하는 것, 이게 소망하는 거예요.
이 소망으로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이 없을 때, 또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이 주어졌을 때일지라도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만끽하고 그것에 취하는 것을 밀쳐버리고 하늘을 소망하면서 마음이 계속해서 하늘에 머물러 있기 위하여 기도하고 말씀 듣고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이탈하지 않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며 주님을 믿으며 가는 길이라는 겁니다.
건강이 안 좋아도 마찬가지고, 자식의 일이 안 되도 마찬가지고, 사업이 안 되도 마찬가지고, ‘내게 하늘은 있다, 나는 천국은 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몸이 처한 상황이 이래 절박하고, 저래 위기이지만 내가 먼저 구할 것이 하늘의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천국을 먼저 갖고 싶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소망하면서 살아가면, 때로는 성령께서 임하셔서 하늘을 느끼게도 해주시고, 때로는 소망 단계에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이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실족케 하는 것은 뭡니까?
예수 믿는 자를 실족케 한다는 것은,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이 사회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치의 사닥다리를 위로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 이게 바로 하늘에 마음을 두고 하늘로 기뻐해야만 하는 예수 믿는 자들을 실족케 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당신도 사업이 잘될 수 있고, 무병장수할 수 있고, 이 땅에서 멋지게 살 수 있다’
이 땅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들을 추구하게 만들고 그것을 선망하게 만들고, 그것을 향해 가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실족케 하는 자들이고 이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 손이 멀쩡하고, 두 발이 멀쩡하고, 두 눈이 멀쩡해서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라고 권면하고 다니고 이 세상의 가치를 갖는 게 좋다고 설득하고 다니고, 그렇게 인도하고 다닐 바에는 손을 자르고, 발을 자르고, 눈을 빼버리라 이겁니다.
그렇게 싫어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 가치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하고 멸시해서? 아니면 금욕적이라서, 아니면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고 있는 것이라서 그렇습니까?
아니에요.
이 세상의 삶은 하늘아버지가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알고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것을 마음에 담지 않는 거예요.
무시해서도 아니고, 금욕적이라서도 아니고, 오기가 발동해서도 아닙니다.
‘에라, 못 먹는 호박 찔러나 보자’ 이런 뜻으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 것을 추구하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 모두 하나님이 마음을 두시고 인도하고 계시고 이끌고 계시고 섭리하고 계시니까…
그 아버지가 살아계시며 나를 사랑하시고 내 처지를 알고계시니까 그 아버지의 사랑과 지혜에 맡기는 겁니다.
세상사람 눈에 흥해 보이든 망해 보이든, 그 아버지께 맡기는 것이죠.
그리고 내 마음은 계속 주님께서 내신 길을 따라서 하늘로 따라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여기서 하늘로 만족해하고, 하늘로 소망하고, ‘돈 많이 벌어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몸이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이런 소망 대신에 ‘하늘을 느꼈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느꼈으면 좋겠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지금 여기서.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가 다 이미 실족했고 -나 스스로가-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여기서 ‘화가 있도다’는 실족한 자가 있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실족했습니다, 내가 이미 실족해서 화가 미쳤습니다.
그리고 내가 실족했기 때문에 또 실족하게도 합니다.
내가 실족했다는 건 뭡니까?
이 사회가 좋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나도 좋아합니다, 그것을 찾고 싶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근심하고 그것이 있으면 좋아합니다, 이미 실족한 거예요.
그것이 있으면 좋아하고 그것을 선망하고 있으니까 그런 세상에 가치가 없는 작은 자들을 볼 때 업신여기게 됩니다.
이게 또 부정적으로 실족케 하는 거예요, 업신여김을 당한 자는 마음에 상처를 입는 거예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실족케 하는 것은 ‘너도 이 땅에서 잘살 수 있다’, 부정적으로 실족케 하는 것은 업신여겨 버리는 거예요, ‘너 까짓 게 뭐냐?’ 이렇게.
모두가 다 내 마음속에 이 세상 사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내가 먼저 물들어버렸기 때문에, 이미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신체 포기해라!’
실족하지 않은 자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여기서 손 찍어내고, 발 찍어내고, 눈 빼지 않아도 될 사람이 이 세상에 없는 거라는 겁니다.
누가 이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주님이 가신 그 길에서 이탈하지 않은 사람이 있고, 지금도 목사님들은 설교를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잘살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일탈시키고 실족케 하지 않았습니까?
목사님들 다 연자맷돌 매고 바다에 빠져야 되요, 그리고 사업 잘 돼서 기뻐하는 장로님들 다 가짜입니다, 다 연자맷돌 매고 빠져 죽어야 되요.
자식한테도 그렇게 가르칠 것 아닙니까? 예수 믿었더니 사업이 잘됐다고.
이게 무서운 일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싫어하셔서 ‘장로야! 네가 두 손, 두 발이 멀쩡하고 두 눈이 멀쩡해서 사업이 잘되고 좋아했고, 네 자식에게도 사업 잘 되려면 예수 믿으라고 가르칠 바에는 눈을 빼버리고, 손발을 잘라버려라!’ 이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렇게 하지 않은 자가 없다는 거예요, 실족하지 않은 자가 없고, 실족케 하지 않은 자가 없어요.
돈 없고 빽 없고 학벌 없으면 무시했습니다, 미모 없으면 무시합니다.
그렇게 무시했고, 또 자식에게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이 세상에서 훌륭하게 살려면 어찌어찌 해야 된다’ 다 실족케 했어요.
그러니 신체 포기해야 돼요.
그래서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고 그렇게 가르친 이 손, 포기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이제 더 이상은 내 두 손을 멀쩡하게 가지고 내가 살아갖고는 실족한 삶의 연장이 아닐 수가 없고, 남을 실족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내 두 손을 포기하겠습니다!’라는 게 십자가예요.
이 주님의 말씀은 경고성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돼야 되는 얘기예요.
돈 벌고, 인맥을 형성하고, 로비하느라고 두 발로 쫓아다녔습니다, 내가 계획 세우고 이 세상의 가치들을 쌓고 이루기 위해.
그래서 이제 두 발, 포기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과 연합해서 내 두 발, 내가 이 세상 가치들을 추구하며 삶을 쫓아다니던 내 두 발을 포기합니다, 잘라버리는 겁니다.
가시면류관 쓰고 내 머리, 포기하는 거예요.
내 배에 창이 들어옵니다, 이 배 안에 장기들을 다 포기하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제 신체 포기해야 돼요.
신체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소자들을 업신여겨서 실족케 하든지, 그들에게 이 세상 가치를 이루라고 이끌어서 실족케 하든지, 실족케 하는 일이 계속될 것이고 내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자마자 나 자신도 계속 실족한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에요.
십자가는 신체포기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지긋지긋해하시는 것,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실재의 천국으로 소망하는 대신에 이 땅 위에서 이 세상 가치들로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이 일을 중단하기 위해서 - 우리의 죄성 때문에 중단이 안돼요, 하나님보다는 이 세상이 더 좋고 하나님보다는 이 세상의 돈이 더 좋고 더 실감이 나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생각하면서 십자가에 내 마음이 이 몸을 죽은 자로 포기하는 각서를 날마다 쓰고 실행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땅의 삶은 살아계시고 사랑하시고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써 다 이끌어 가실 것이에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실족하고 실족케 하며 살던 내 손과 발과 몸 전체를 십자가에서 포기합니다.
받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신체포기는 하되 주님이 쓰시는 도구로 구별해서 질그릇에 담아둔 진주보석이 보호 되야 하리라 봄니다 천사의 도움도 받고요 상급을 위해서라도 아무튼 정욕에 위험은 있으나 함께 살기로
각서는 써야겠네요 몇번이나 쓸련지는 몰라도 하루에 한번쯤은 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