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특별 수업
금요일 저녁 글렌필드 초등학교 옆에 웬 택시가 한 대가 섰다. 택시 문을 열고 나온 여성 운전사가 학교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다섯 개 동으로 되어 있는 학교 건물 하나하나를 둘러보았다. 단층 짜리 학교 건물이 단출했다. 건물을 다 살펴보고는 택시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넓네. 다섯 개 동, 도는 것만도 시간이 꽤 걸려.’
다음 날 아침, 어제와 마찬가지로 글렌필드 초등학교 옆에 택시를 세웠다. 택시에서 내린 여성 운전사가 맨 끝에 있는 건물 동으로 갔다.
건물 바깥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갔다. 교실마다 문을 열고, 문을 고정하는 고리를 걸었다. 네 개의 교실을 지나, 다음 동 건물로 향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이른 아침부터. 어~. 병원에서 본 그 아가씨네. 강 선생 친구. 제니 선생. 특별 수업하기도 힘들 텐데. 일찍 나와 문까지 열고.”
“어머. 교장 선생님. 민재한테 부탁 전화 받고 좀 일찍 나왔어요. 어제저녁에 미리 둘러보고 갔거든요.”
“강 선생도 참~. 병원에서 있으면서 아픈 몸 관리나 하지. 오늘은 내가 강 선생 반 애들 수업하려고 준비했는데. 제니 선생도 강 선생을 똑 닮았어.”
교장 선생이 앞장서고 제니가 뒤따랐다. 나이 드신 교장 선생님을 뒤에서 보니, 옛날 아빠 생각이 물씬 일어났다.
“아~참. 제니 선생. 강 선생은 좀 어떠신가? 면회 다녀와서 내가 전화를 못 해봤는데.”
“네.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 중에 퇴원할 거래요. 목소리에 힘이 있더라고요. 이스트 앤 웨스트 주간지 기자의 취재 인터뷰를 잘 마쳤다면서요.”
제니가 교장 선생님과 남은 건물 동까지 모두 문을 열었다. 바로 교무 실로 향했다. 교무실에서 와 보니 다른 선생들이 와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교무 회의에는 특별 수업을 할 분을 소개합니다. 뉴스 들어서 아시겠지요. 강 선생님이 차에 치 일 뻔한 할머니를 구하다 사고를 당했잖아요.
오늘 수업에 못 나와서 대신 택시회사 동료분이 오셨어요. 자, 제니 선생님. 직접 소개 부탁드려요.”
“네. 반갑습니다. 제니라고 해요. 대학 시절 아이들을 가르쳐 봤어요. 강 선생님의 빈자리를 특별 수업으로 진행하려고 준비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스무 명가량의 다른 선생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그중 한 여선생이 의아한 눈빛으로 제니를 흘겨봤다. 제니도 언뜻 그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뭐지?
교무 회의가 끝나고 교장 선생님이 제니를 데리고 4학년 교실로 갔다. 아이들이 영어로 떠들고 있었다. 제니가 깜짝 놀랐다. 여기가 한국학교인가 싶었다.
“제니 선생. 이곳 아이들은 대부분 뉴질랜드에서 태어나서 영어를 더 편하게 사용해요. 그대로 가면 우리말은 뒷전이 되고 말아요.
학교 행사 때, 뉴질랜드 국가는 잘 부르는데. 한국 애국가는 잘 못 불러요. 그런 점도 이해하고 특별 수업해 줘요.”
제니가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어릴 때 환경과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가. 교장 선생님이 교탁 앞에 서서 떠드는 아이들을 웃으며 둘러보았다.
“친구들 안녕. 오늘은 강 선생님이 못 오시게 됐어요. 택시 운전하다, 다른 차에 치 일 뻔한 할머니를 구하다 사고를 당했어요.
여기 제니 선생님이 오셔서 특별 수업을 할 거예요. 강 선생님은 크게 다치지 않아서 오늘 오후나 내일 중에 퇴원할 거니 큰 걱정은 말아요.“
그때였다. 엉엉 우는소리가 들렸다. 한 학생이 책상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민재 선생님~어떡해요~”
교장 선생과 제니가 깜짝 놀랐다. 제니가 울고 있는 아이 책상 쪽으로 내려갔다. 가만히 아이 등에 손을 댔다. 이어서 아이 손을 쥐었다.
“그래요. 강 선생님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놀랐지요. 다음 주 부턴 다시 수업에 오실 거예요.
자, 울음 그치고 오늘 공부 함께 해요. 그래야 강 선생님도 빨리 일어설 거예요. 어서 눈물 닦아요.“
아이가 책상에서 머리를 들었다. 제니가 깜짝 놀랐다. 지난번 루나네 집에 갔다가, 만났던 마리아, 꿈나무 골퍼가 아닌가.
“아니? 마리아! 진정해.”
“제니 선생님~어떡해요~”
제니가 손수건을 꺼내 마리아 눈물을 닦아 주었다. 마리아가 놀란 얼굴로 제니 손을 잡았다. 눈물을 닦아주던 손수건을 쥐고 마리아가 눈물을 그쳤다.
눈물을 닦았던 투박한 손수건을 마리아가 쳐다봤다. 왠지 민재 선생님 손 바닥같다고 느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본 제니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아. 이 손수건. 민재 선생님이 쓰던 손수건이야. 지난번 텅 앤 그루브(Tongue & Groove)에서 울던 내 눈물을 닦아주던 그 손수건~’
교탁으로 온 제니가 아이들에게 쾌활하게 인사했다.
“친구들 안녕! 제니 선생이라고 불러요. 언니도 될 수 있고 누나도 될 수 있어요. 오늘은 민재 선생님에 관해 공부를 하겠어요.”
아이들이 놀란 표정으로 제니 말에 집중했다. 제니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려나. 궁금하다는 기색이었다.
“뭐에요? 민재 선생님에 대해 공부를 하겠다고요?”
“네. 살신성인, 강 민재 선생님에 대해서요.”
제니가 진한 녹색 칠판에 하얀 분필로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살신성인(殺身成仁). 강 민재 선생님.’
아이들이 칠판에 써 놓은 글씨를 노트에 베끼기 시작했다.
“제니 선생님. 살신성인. 무슨 말이에요? 처음 들어봐요.”
마리아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아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다시 물었다.
“살신성인 뒤에 쓴 글자. 쓰기도 어려워요. 무슨 글자예요?‘
그때, 제니가 들고 온 쇼핑 백에서 교민 신문을 꺼냈다. 뉴질랜드 코리아 타임즈였다. 금요일마다 발행되는 신문에서 잉크 냄새가 났다.
“여기 교민 신문이 오늘 교재예요. 반장과 마리아 이리 나와 봐요. 이 신문 하나씩 돌려줘요.”
반장 영훈이와 마리아가 교민 신문을 받아들고 반 친구들에게 돌렸다.
“우리 친구들. 교민 신문 다 받았지요. 14페이지로 넘겨봐요. 제목이 뭐라고 써있지요? 어느 친구가 한번 읽어 볼래요?”
뒤적뒤적~ 신문지 넘기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 다른 데 신경 안 쓰고, 제니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했다.
옆에서 참관하는 교장선생님이 흐뭇한 표정이었다. 아이들 지도를 잘하네.
“선생님. 저 찾았어요.”
앞에 앉은 재명이가 손을 들었다. 목에 건 이름표가 반짝였다. 제니가 아이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이름표를 외우고 있었다.
“그래. 재명이. 읽어 봐요.”
“네. 의로운 택시 운전사. 살신성인. 강 민재.”
“잘 읽었어요. 자. 여기. 상품 하나 받아요. 재명이.”
제니가 재명이 손에 153 마이 펜을 하나 주었다. 옆에 아이가 손을 들었다.
“그래. 윤슬이. 읽어봐요.”
“네. 선생님. 의인 강민재. 그는 누구인가.”
제니가 윤슬이 손에 분홍색 꽃무늬 머리핀을 쥐여 주었다. 기뻐하는 재명이와 윤슬이를 부러워하는 눈빛이 여기저기 빛났다.
“선생님. 제목 아래 큰 글씨. 읽어도 돼요?”
“그럼. 정운이는 참 똑똑하기도 하지.”
“네. 선생님. 자기 몸을 희생하여 남을 살린 현대판 강 재구 소령. 강 민재.”
제니가 손뼉을 치며 정운이에게도 선물을 주었다. 왕사탕이었다. 아이들이 까르륵 웃었다. 여기저기서 자기도 발표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선생님. 신문 아래 쓰여있는 작은 글씨 읽어 볼게요. 저. 강 직구에요.
뉴질랜드 TV 7과 뉴질랜드 헤럴드 신문에 대서특필한 한국 교민의 미담.
뉴질랜드 사회에 감동의 물결을 이뤘다, 아이 숨차.”
“야! 강 직구. 끝에 아이 숨차다는 말은 없어. 왜 네 말을 지어내니?”
미애가 직구의 발표를 꼬집었다. 듣고 있던 교장 선생님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니가 직구한테도 왕사탕을 주었다. 직구 입이 헤 벌어졌다.
미애게도 다가가 파랑색 꽃무늬 핀을 머리에 올려 주었다. 미애가 핀을 쥐며 제니 손을 잡았다.
부러워하는 아이들 손에도 저마다 작은 선물을 주었다. 준비한 스무 개의 선물이 동났다. 올 때 신문과 선물을 가득 담아 왔던 쇼핑백 안이 다 비었다.
교민 신문에 실린 기사도 마지막 줄까지 다 읽었다. 아이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어려운 단어는 제니가 쉽게 설명해 주었다.
살신성인 한자어를 풀이해 주었다. 강 재구 소령 이야기도 곁들였다. 아이들이 흥미진진하게 참여한 수업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벨이 울렸다. 수업시간이 끝나는 소리였다. 제니 옆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제니가 아이들 이름을 벌써 다 외웠는지, 아이 이름을 편하게 불렀다.
그 뒤로 이어지는 수업에는 뉴질랜드. 꿈나무 세상. 좋아하는 일. 이야기로 이어갔다. 살아있는 예를 들어서 생생하게 들려줬다.
다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집중했다. 제니가 수업을 다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가자 교장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이 반겼다.
함께 자리에 앉았다. 교감 선생님이 미리 준비해둔 쟈스민 차와 쿠키를 들었다. 두 분이 제니를 칭찬했다. 교장 선생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제니 선생. 오늘 특별 수업을 참관해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처음 보는 아이들을 어떻게 단 몇 분 만에 확 사로잡지요?
그 뒤로 이어지는 수업에 아이들, 집중하도록 하는 수업 방식도 특별했어요. 모든 아이가 자발적으로 손들고 발표하고. 수업이 아주 자유분방했어요.
자연스러운 수업에 주고받는 게 많고. 제니 선생은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요. 제니 선생. 강 선생이 추천 잘 해줬어요. 우리 함께 일해 봅시다. “
“교장 선생님.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는 교안에 따른 강의 준비는 못 했고요. 단지 주변에 있는 이야기를 교재 삼아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두 사람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여성 교감 선생이 덧붙여 칭찬했다.
“제니 선생. 듣기만 해도 흐뭇해요. 살아있는 교육은 아이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돼요. 암기식 교육이 아닌 현장 사례 중심, 주관식 교육이 필요해요.
강 선생이 그걸 잘하거든요. 여기 교사 지원 서류 작성해 주셔요.”
제니가 깜짝 놀랐다. 이렇게나 빨리? 잠시 눈을 감았다. 민재가 평소 말한 그대로였다. 아빠 같은 교장 선생님. 엄마 같은 교감 선생님.
“감사합니다. 두 분은 제 엄마 아빠 같아요. 제 부모님은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아~”
제니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때 교감 선생이 일어나서 제니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제니 선생. 잘 오셨어요. 저도 제니 같은 딸이 있어요. 우리 한 가족으로 지내요. 뉴질랜드 한국학교에 함께 하라고 천사를 위에서 보낸 것 같아요.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했어요. 강 선생이나 제니 선생은 왠지 자식 같다고요.”
제니가 고개를 숙이자 제니 등에, 교장 선생님이 손을 얹었다.
“제니 선생. 꿈나무들을 돌보는 일에 모두 함께합시다. 오늘 참관 수업 보며 정말 뭉클했어요.
순수한 분이 열정도 좋구나. 강 선생과 함께하며 젊은 기운을 실어 줘요. 여기 봉사하는 나이 든 선생님들도 두 분의 협력을 절실히 기대해요.”
제니가 앞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다, 펜을 꺼내 빠르게 채워갔다. 마지막 난에 사인했다. 두 분 선생님이 제니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제니 가슴이 뭉클했다. 두 분 손에서 전해오는 따뜻한 기운이 엄마 아빠 온정으로 느껴졌다. 하늘에서 엄마와 아빠가 보고 환하게 웃으시는 것 같았다.
오클랜드 병원에 누워있는 민재도 떠올랐다. 아픈 몸, 뒤척이면서도 전화해 한국 학교를 챙겼던 민재.
다음 주말부터 함께 만나. 한국학교에서 일할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났다.
‘민재야. 주말이면 우리 여기서 만나. 고마워. 민재야. 앞으로 아프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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