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김, 상업주의 용어 단정은 억지"
마인드풀니스 & 사띠 논쟁-4
김재성 교수 인경 스님에 재반론
법보신문 | 2009년 12월 24일
사띠 의미 다양…‘잊지 않고 지님’ 용례도 많아
‘알아차림’은 사띠 아닌 삼빠잔나 개념에 가까워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마음챙김’을 처음 사용한 김재성<사진>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한다”며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정신이 담긴 개념으로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라며 반박했다.
이에 인경 스님이 다시 “불성론에 근거한 간화선의 챙김을 사띠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오류”라며 “마음챙김은 소유방식 내려놓는 명상수행에 역행하는 것으로 불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개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김재성 교수가 다시 인경 스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필자는 ‘사띠’의 의미와 그 번역어 ‘마음챙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신 인경스님과 법보신문에 감사드린다. 이 논의를 통해 사띠와 사띠빳타나, 아누싸띠, 그리고 위빠사나의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이해되기를 바라면서 인경스님의 ‘마음챙김’ 또는 ‘챙김’이라는 용어에 대한 부정적 판단에 대한 반론을 3가지 측면에서 제기하고자 한다.
먼저 ‘사띠’가 초기경전에 사용된 용례와 함께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 sati라는 용어는 1)사띠, 2)사띠-삼빠잔나, 3)사띠빳타나, 4)까야가따사띠, 5)아나빠나사띠, 6)아누싸띠, 7)빠띠싸띠 등으로 사용된다. 이 가운데 1), 2), 3)과 6)의 용례를 중심으로 그 의미를 살펴본다.
1)사띠(sati)는 ‘기억하다(sarati)’의 명사형이다. 경전에서 ‘마음챙기며(sato)’, ‘항상 마음챙기며(sadā sato)’라는 말로 자주 사용되는 ‘사따(sata)’는 과거분사형이고, ‘사띠를 지닌’이라는 의미이다. ‘사띠만뜨(satimant)’도 같은 의미이다. 사띠가 ‘기억’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대표적인 예는 ‘아난이 사띠를 지닌 자 가운데 으뜸’(AN i, 24; 대림스님 역, 앙굿따라 니까야 1권, 126쪽)이라고 할 때이며,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가장 잘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숫타니파타』의 「자애경」에서 “서있거나 가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깨어있는 한 (자애의) ‘이 사띠’를 굳게 지녀야 한다.(Sn 151게)”고 한다. ‘이(자애의) 마음챙김’은, 자애의 마음을 잊지 않고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항상 모든 존재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놓치고 있지 않고 지닌다는 의미이다. 위의 두 맥락에서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색하며,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사또와 사띠만뜨로 제시된 다른 예에서는 ‘기억을 지닌’이라는 의미보다는, ‘놓치거나 잊지 않은’ ‘챙기고 있는’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항상 사띠를 지니고’ 라는 의미는 수행자가 자신의 감각기관을 잘 단속하면서 ‘현재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다’, ‘대상을 놓치지 않고 잘 챙기고 있다’는 의미이다.
2)사띠는 ‘사띠-삼빠잔나(sati-sampajañña)’라는 복합어로 자주 사용되며, 정념(正念)-정지(正知)로 번역된다.
이 복합어는 사띠와 삼빠잔나의 상호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사띠는 마음챙김(mindfulness)으로 삼빠잔나는 ‘분명한 앎’(clear comprehension) 또는 ‘완전한 알아차림’(full awareness)으로 번역된다.
엄밀하게 사띠와 삼빠잔나는 다른 용어이다. 이 때 ‘사띠’는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 있는, 또는 챙기고 있는 마음상태’를, ‘삼빠잔나’는 ‘그 대상을 온전히 알거나,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상태’를 의미한다. 이 복합어에 대한 표현의 하나는 ‘마음챙기는 알아차림(mindful awareness)’이다.
이처럼 사띠 또는 마인드풀니스를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삼빠잔나’의 의미를 포함하여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야 그 대상을 완전하게 알 수 있고, 대상을 완전하게 알아야 그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상보적인 관계이다. 이것이 마음챙김과 (완전한) 알아차림이 함께 설해진 이유이다.
3)사띠빳타나(satipatthāna)는 ‘사띠의 확립’이라는 의미이다. 『대념처경』 등에서 사띠빳타나가 사용되고 있다. 『대념처경』에서 제시된 사띠빳타나의 방법은 아누빠사나(anuppassanā, 隨觀) 즉 ‘반복적인 또는 지속적인 관찰’로 제시된다. 사띠를 확립시키는 방법이 지속적인 관찰이라는 말이다.
『염처경』 서문에서 사념처를 수행하는 방법을 ‘몸에서 몸을 거듭 관찰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또는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로 제시하고 있다.
‘몸에서 몸을 거듭 관찰한다’는 말은 육체를 거듭 거듭 관찰한다는 말이다. ‘열심히’는 ‘정진하며’라는 말이다. ‘분명한 앎을 지니고’는 ‘관찰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알아차림)을 지니고’라는 의미이다. ‘마음챙김을 지니고’는 관찰의 대상을 놓치지 않고 있는 마음상태, 현재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일어나는 그 순간 포착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라는 말은 지금 관찰하고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가치판단,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관찰 대상, 마음챙김의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태도를 말한다. 이 구절은 ‘비판단적인’, ‘수용의 태도’를 의미하는데, 존 카밧진과 심리학자들은 사띠의 한 특징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음챙김(의 확립) 수행, 사띠빳타나 수행은 반복적인 관찰을 통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위빠사나 지혜를 얻는 수행이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있다. 이처럼 서양에서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 또는 마음챙김 수련(mindfulness practice)을 위빠사나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통상 위빠사나는 통찰 명상(insight meditation)으로 번역한다.
4)몸에 대한 마음챙김(kāyagatā-sati)과 5)호흡에 대한 마음챙김(ānāpāna-sati)는 사띠빳타나의 일부로도 제시되기도 하고 독립되어 제시되기도 하면서, 4선정과 4념처와 연결되어 있다. 사띠가 선정과 지혜,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공통 기반이 된다는 인경스님의 지적에는 동의한다.
그 뿐 아니라 사띠는 계를 지키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팔정도의 바른 언어(正語), 바른 행위(正業)를 위해서는 바른 이해(正見),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노력(正精進)이 동반되기 때문이다.(냐나틸로카, 『붓다의 말씀』김재성 옮김, 고요한소리, 2008, 120쪽 이하 참조).
6)아누싸띠(anussati)는 수념(隨念)이며, 여기에 사용된 ‘사띠’는 사띠의 원래적인 의미인 기억 또는 상기(想起)를 의미한다. 초기경전에는 불(佛), 법(法), 승(僧), 계(戒), 사(捨), 천(天)에 대한 수념(隨念) 또는 반복적인 상기(想起)가 제시되어 있다. 삼보(三寶), 지계, 보시 또는 욕망을 멀리함(cāga), 천신의 덕을 반복적으로 상기하는 명상이 6수념(六隨念)이다.
이 때 아누싸띠의 사띠는 ‘반복적인 알아차림’이 아니라, ‘반복적인 마음챙김’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불법승 삼보는 ‘알아차림’의 대상이 아니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챙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예를 통해서 우리는 사띠라는 용어는 경전에서 기억, 상기(想起), 잊지 않음의 의미와 대상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는 의미의 ‘챙김’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알아차림’이라는 용어는 주로 ‘삼빠잔나’를 의미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경스님이 말하는 ‘챙김’이라는 개념이 상업주의의 의미를 담고 있다거나, 현대심리치료에서 말하는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거나, ‘화두챙김’에서 빌려왔으니 격의(格義)라서 잘못이라느니 하는 판단에는 ‘챙김’이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해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국어사전의 의미를 보자. ‘챙기다’는 말은 ‘필요한 물건을 찾아서 갖추어 놓거나 무엇을 빠뜨리지 않았는지 살피다. 거르지 않고 잘 거두다.’라는 의미이다. 용례로, ‘짐을 챙기다/서류를 챙기다/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그는 주위 사람의 생일을 잘 챙긴다.’라고 제시된다. 한편 ‘알아차리다’의 의미는 ‘알고 정신을 차려 깨닫다.’이다. 예로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어머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알아차리셨다.’가 제시되었다.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tdweb2.korean.go.kr)
이처럼 사전적인 의미로 ‘챙기다’는 ‘빠뜨리지 않고 살피고 잘 거두다’는 의미이고, ‘알아차리다’는 ‘알고 정신차려 깨닫다’로 이해한다면, 사띠는 두 가지 단어 중에 ‘챙기다’에 가깝고, 삼빠잔나는 ‘알아차리다’에 가깝다.
실제 수행에서 사용한 예를 보자. 필자는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이해하여 별문제 없이 20년 가까이 위빠사나 수행을 해왔다. 마음을 놓치지 않고 챙기거나, 마음이 대상을 챙기는 행위는 존재양식(being mode) 그 자체이다.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로 사띠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을 한 필자와 그리고 그러한 설명을 듣고 수행을 한 많은 분들은 ‘마음챙김’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사띠의 의미를 이해하여 실제 수행에 적용했으며 문제가 없었다.
인경스님 말대로 하면, 필자가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면서 ‘대상에 마음을 챙기세요’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마음을 자신(我)이나 자신의 소요물(我所)로 생각하고 관리하고 통제하세요.’라고 들릴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마음챙김’을 이해한 사람을 아직까지 만나본 적이 없다.
실제 위빠사나 수행에서 ‘있는 그대로 놓치지 않고 포착함’이라는 의미로 ‘마음챙김’을 이해하며, 마음챙겨서 알아차린 것, 알게 된 것은 정지(正知)로서 ‘알아차림’이라 이해한다.
인경스님이 “챙김이라는 개념은 상업주의에 철저하게 물들어진 용어이다.” 라고 단정 짓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의 하나일 뿐이다. 불교는 욕심을 떠나는 가르침이니까 ‘챙기는 것’은 나쁘다고 단정 짓는 것도 억지스럽다. ‘사띠’는 기억과 그대로 현재의 경험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있는 마음상태를 의미하며, 따라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사띠’,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김재성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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