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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지부티 한국 분들과 만나다.
동풍이 밤새 강하게 분다. 끼익 하고 앵커 쇠사슬을 엮은 밧줄에 힘이 걸리는 소리가 난다. 눈을 뜨니 새벽 1시. 얼른 나비오닉스로 배 위치를 본다. 밤새 앵커가 끌리지는 않았다. 바람에서 흙냄새가 난다. 끈적하고 황토 냄새 물씬 나는 아프리카의 밤바람이다. 그간 영상에서, 책에서 보았던, 아프리카의 이미지가 확 다가온다. 마치 ‘차가운 물’ 이라고 쓰인 영상을 보다, 진짜 뼈 시리는 우박 얼음물을 뒤집어썼던 이스마일리아의 저녁처럼, 여기가 아프리카! 실감 100% 의 밤이다.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해본다.
다시 앵커밧줄에 힘 걸리는 소리에 눈을 뜬다. 새벽 4시 8분. 시애틀 사는 여동생에게서 문자가 와 있다. 오빠에게 무슨 일 생길까 노심초사다. 동생의 문장을 읽다보면, 나의 육체적인 고생에 대한 부분뿐 아니라, 혹여 내가 정신적으로 약해질까 염려하는 부분이 크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60세다. 몸이 젊지 않다. 고독엔 익숙하지만 그 내성까지 단단하진 않다. 동생은 나를 잘 아는 것이다. 고맙다. 배가 고프다.
새벽 5시에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아무래도 어제 바와디 몰에서 먹은 피자가 부실했던 모양이다. 동생은 피자모양 쿠키라고 놀린다. 그러나 적확하다. 피자 모양 쿠키에 BBQ소스를 올린 것 같았다. 나는 된장국, 밥, 계란 묻힌 쏘세지 전. 양배추에 마요네즈를 뿌려 아침 식사를 한다. 뭐가 됐든 배부르게 먹었다. 그럼 된 거지 뭘. 동생은 버거킹에서 감자튀김도 먹어 보라 하지만, 글쎄 지부티에서 제일 크고 다국적군들이 이용하는 몰의 피자가 저 정도면, 나머지도 기대가 가지 않는다.
아침에 인터넷 데이터가 25% 남았다고 한다. 제법 편안하게 인터넷을 쓰니, 하루에 3기가씩 쓰는 모양이다. 12기가를 산지 4일 만에 다 쓴다. 예상대로다. 1,000지부티 프랑은 5.62 달러다. 내가 쓰는 12기가 데이터 카드가 1,000 프랑인데 아산은 7달러를 받았다. 심부름 값까지 다 치는 것이다. 그럼 지부티에서 환전해서 직접 데이터 카드를 사야겠다. 구글에서 환전소를 찾아놓고, 주변 선장들에게 어디서 환전했는지도 질문해 둔다. 데이터 카드는 한 장 더 있다.
윈디를 봐도 4월 23(토) 까지도 바람이 약해지거나 방향이 바뀔 낌새는 전혀 없다. 더 느긋하게 맘먹어야 하겠다. 오늘 오전 10시 경, 아산이 오기로 했고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배의 선장을 만나기로 했다. 나름 분주한 하루가 될지 모르겠다. 오늘 시내로 나갈 계획은 없다. 동풍이 강하니 나도 앵커나 바라보며 웅크리고 있어야겠다. 아직 서늘할 때 잠이나 더 자 둘까?
[그러면서도 그는 그 속에 <쓸쓸하다>라는 단어가 씌어진 편지를 썼고 때로는 바다가 암청색(暗靑色)으로 서투르게 그려진 엽서를 사방으로 띄웠다. - 무진기행 중 / 김승옥] 무진기행을 읽다가, 혹시 내가 열심히 항해 기록을 남기는 것도, 쓸쓸하다고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세계일주 항해는 장거리 Off-Road 다. 차로 따지면 당연히 디펜더110이나 랜드크루저 등을 타야한다. 그러나 나를 포함 한국인들은 모두 현대나 재규어나 BMW나 벤츠 등의 세단을 선호한다. 세일요트에서 바바리아, 베네토, 한세, 듀포, 지뉴 등등 익숙한 브랜드들은 대부분 세단에 해당한다. 목적이 다른 요트들인 거다. 근해용이다. 물론 준비에 따라 대양도 나갈 수는 있지만, 어려움이 많다. 그런 것을 한국 해안이나 일본 항해의 연장선에서 생각한 거다. 전혀 다르다. 내가 제대로 몰라서 묻지도 못하고, 세계일주항해를 하며 하나씩 아프게 깨닫는다. 전술했듯, 윤태근 선장님의 37피트(약 11m)짜리 타야나 37형 '인트레피드'호 같은 배가 세계일주 장거리 항해에 부합되는 세일 요트다.
지부티에서 나의 제약 조건을 생각해 본다. 나는 통화가 안 되고 데이터만 되는 SIM 카드를 사용 중이다. 내 VISA 카드는 마트에선 사용되는데, ATM에서 인출이 안 된다. 달러는 약간 있지만, 지부티 프랑은 없다. 하루 종일 배에 있고, 보트로 선착장에 가지만, 지부티프랑이 없어 택시는 못 탄다. 걸어서 가는 바와디 몰에만 간다. 어떻게든 세상과 연락도 닿고, 마트에서 장도 본다. 외길이 열려있다. 바람을 기다리는데 큰 문제는 없다. 오늘 출발하는 Ruley에게 남는 지부티 프랑을 20달러로 바꾸기로 한다.
외교부 김진국 서기관님께서 지부티의 선교사님을 소개해 주셨다. 선교사님은, 시간이 되시면 오후에 만나 차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주말에 식사 자리를 만드시겠다고 하니, 너무 감사한 일이다. 해외 동포. 라는 오래 묵은 말이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 동포가 많은 곳에서야 어디 이런 호의를 느껴볼 수 있을까? 가톨릭이라고 하니, 성당에 미사 시간까지 확인해서 미사 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니 감사 또 감사한일이다. 일단 오늘 오후 3시에 만나 뵙기로 한다. 정말 반가울 것 같다
20년 지기 아우가 또 한명 일본서 요트를 사왔다. (임대균 선장 이후로!) 대기업을 그만두고 요트 사업을 기획중이다. 포항을 지나 울진마리나에 도착했다. 왓스앱으로 이런저런 잔소리를 좀 해준다. 출항 일정과 계획에도 조언한다. 울진서 강릉까지는 야간항해를 해야만 안전하게 일몰 전에 입출항이 가능하다. 4월 18일에 강릉의 나의 지인 한분도 일본에 세일 요트 보러 가신다. 이렇게 한두 명씩 한국에 요트 스키퍼가 늘어나고 있다. 개인적으로 큰 보람이다.
오전 10시 20분. 아산에게 나는 오후에 밖에 나간다고 하니 그제서야 연락이 왔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요트는 2~3일 후에 지부티 도착이라고 한다. 오늘 앵커리지의 대부분 배가 출항하기 때문에 그 배들을 보내고 내게 온다고 한다. 아마 오늘 못 온다는 이야기겠지. 오늘 못 오면 내일 오면 된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근대소설에 코를 박고 있다가 잠깐 콕핏 밖에 나가보니 다른 배들은 모두 출항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곧 수에즈에 도착하겠지. 나 혼자 남아, 2~3일 후에 온다는 동향의 세일요트를 기다리게 될 거다. 나는 오랫동안 세계의 바다를 항해한 선장들이 눈빛을 기억한다. 톨스가, 마르코가, 윌리엄, 존스가 그랬다. 이번 지부티에서의 오랜 기다림이 끝나면 나도 그들과 닮은 눈빛을 갖게 될까?
오후 1시 30분. 미국배 Ruley가 왔다. 20달러 주니 4,000지부티 프랑을 준다. 어? 이건 너무 많은데? Ruley는 내가 한국가면 맛난 것 사달라고 한다. 당연하지. Ruley는 내일 아침 출항 한다고 한다. 바람을 보니, 수아킨 까지 갈 것 같다. 혹시 시간이 나면 출항 전 내가 Ruley네 배로 가보기로 한다. 아마 시간이 어려울 것 같기는 하다.
오후 2시 30분. 나는 텐더를 타고 부두로 나간다. 10분여 먼저 도착이다. 잠시 후 홍종수 선교사님과 리나가 한국 갈 때 픽업해 주셨던 장00 대위님이 오셨다. 장대위님은 미군 부대에 파견되어 계신다. 함께 Sheraton Djibouti 호텔로 간다. 라마단이라 커피를 마실 수 있을까? 서빙 하는 아가씨에게 말하니, 책임자를 불러온다. 나는 에스프레소 한 잔, 장대위님은 아메리카노, 홍선교사님은 패스트리커버리라는 음료를 주문한다. 그런데 책임자가 아메리카노를 모른다. 그냥 에스프레소 두 잔과 패스트리커버리를 주문한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인 두 분께 이번 항해와 수에즈 아덴만 통과에 관해 두서없이 떠든다. 한참 말하다 보니 숨이 찬다. 체력이 엉망이 됐나보다. 지부티에 한국 사람은 모두 7명. 당분간 나까지 8명이다.
내일 홍선교사님 교회에 10시부터 예배가 있다고 한다. 나도 같이 참여하기로 한다. 주님은 같은 분이시다. 믿는 우리의 방식이 다를 뿐. 나는 별 상관하지 않는다. 모처럼 하느님을 뵙는다. 9시쯤 부두에서 택시를 타고 갈 예정이다. 예배가 끝나고 점심을 함께 하기로 한다. 홍 선교사님이 나를 바와디 몰로 데리고 가 지부티프랑을 인출하는 법을 알려준다. 이게 10,000지부티프랑부터 인출가능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4,000, 5,000지부티 프랑을 인출하려 했으니.
앗! 아산을 딱 만났다. 연속 4일째 온다온다 말만하더니 딱 마주친 거다. 내가 이대로 지부티에 앵커링 하고 있어도 문제없냐? 를 다시 확인하고 보내준다. 지금은 아산이 딱히 필요할 이유도 없다. 바와디 몰에서 인터넷 충전 카드를 사고, 간단히 장을 본다. 간단히 라면 몇 개, 바디샤워 산 게 50,000원이다. 지부티 물가는 미쳤다.
버거킹이 오후 6시 30분부터 개장 한다고 해서, 정시에 가니 다시 7시란다. 말이 막 바뀐다. 10,700원 짜리 치킨콤보를 주문했는데, 사이즈는 작고 짜다. 감자튀김도 한국의 절반이다. 예상대로다.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 가다보니 엇! 식당가가 오픈했다. 4~5개의 가게가 성업 중이다. 프라이드치킨도 있고, 일본식 메뉴도 있다. 가격은 10,000원~15,000원 선이다. 언제 오픈 하냐고 물으니, 오후 6시 30분부터란다. 오케이 다음엔 여기 들러 보기로 한다.
오후 7시 40분에 바와디 몰을 나와 어두운 지부티 거리를 걷는다. 생각보다 안전하다. 선착장 입구 커다란 모스크 앞에 경비원들이 있다. 편안히 걸어 선착장 도착. 텐더를 타고 밤바다를 건너 제네시스로 돌아온다. 내일 아침이면 나를 제외한 모든 요트가 일제히 출항한다. 2~3일 더 혼자 있다 보면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배가 온다고 하니 기다려 보자. 서로 정보를 나누며 출항해야지. 어쨌든, 오늘 한국 분들도 만나고, 바와디 몰의 ATM도 사용가능하고, 새로운 식당가도 발견했다. 장기 앵커링에 대비가 되어가고 있다. 바람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PS : 윌리엄의 사이트에서 fetch 에 관한 내용을 시애틀의 여동생에게 보냈다. 동생은 시애틀에서 대학 다니는 조카에게 전달했다. 조카가 딱 부러지게 해석해 보냈다.
바다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을 권장한다. 이유는 파도의 크기/사이즈는 세 가지 요인에 의해 정해진다
1. 바람의 강세
2. 사람이 분 시간
3. 사람이 불고 지나간 개방구역의 거리: fetch(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파랑이 지나간 면적/넓이)
셋 중 한 요소라도 증가하면 파도의 크기도 커진다. 첫 번 째와 두 번 째 요소는 이해하기 쉬운데 반면(intuitive = 직감으로 알 수 있음) 세 번 째는 그렇지 않음으로 fetch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50피트의 파도를 경험해봤다면 보퍼트 풍력 계급 중 11번에 해당하는 violent storm (=왕바람)은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 어제 처음 김선장님 글을 접하고 일지를 모두 뭔가에 홀린듯 읽었습니다.
무사히 항해를 마치시길 바라며 한국 영해에 들어오면 동반 세일링이라도 하고싶은 생각이 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지부티 앵커리지에서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