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신라·고구려에서의 국사 편찬과 문학작품 등이
한문으로 이루어졌고
한문은 고유어 체계 속으로 침투하여 한자어 생성을 촉진하였다.
통일신라는 정치·제도·학예·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미증유의 융성을 보였으며,
고려일대의 문화를 담당하여온 유학과 불교는
문학·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가운데 한자어는 매우 급속하게 증가되었으며,
고유어는 한자어에 밀려서
그 일부가 한자어로 대체되는 현상이
이미 이 시기에 나타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는 치국과 교육의 대본이 되어 왔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에도
한문 숭배의 사상은 고양되기만 하였고,
이러한 사상과 사회환경 속에서 한자어는 크게 증가하였다.
또, 그 뒤 서양에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많은 용어들이 한자어로 번역되었고,
중국이나 일본에서 한자어로 번역된 용어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한자의 공과(功過)가 크게 논란되는 가운데서도
한자어의 수는 불어나기만 하였다.
이렇게 되자 한자나 한문의 교육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1945년 9월 29일에
<한자폐지실행회 발기 취지서>가
한자폐지실행회발기취지준비위원회에 의하여 발표되고,
그해 12월 8일 조선교육심의회의 문자정책에 관한 결정사항 속에도
한자 폐지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그리고 1951년 9월에
<상용일천한자표 常用一千漢字表>가,
1957년 11월에는
<임시제한한자일람표 臨時制限漢字一覽表>가
문교부(현재의 교육부)에 의하여 공표되었다.
이는 그 뒤에 <상용한자 常用漢字>로 명칭을 바꾸었다.
1962년 4월 17일
<한글전용 특별심의회 규정>이 나오고,
1968년 12월 24일에 국무총리 훈령 제68호로
<한글전용에 관한 총리훈령>이 나왔다.
1972년 8월 16일에
한문과교육과정심의위원회(漢文科敎育課程審議委員會)를 거쳐 확정된
중·고등학교 한문교육용 제한한자 1,800자가 공표되었다.
이와 같이 한자교육은 ‘무제한’의 것으로부터 ‘제한’으로 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