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의 사랑방 야화 (68)손 씻은 물
민초시는 청빈한 선비다.
물려받은 재산은 넉넉지 않았지만 부지런히 논밭을 일궜고, 뼈대있는 집안에서
시집온 부인은 알뜰하게 살림을 꾸렸다.
비록 초가지만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돈해놓고 마당가의 텃밭도 반듯하게 다듬어 놓았다.
젊은 시절, 비록 과거에는 낙방했으나 이날 이때껏 농사를 지어오면서도 책을 놓는 법이 없어
동네의 서찰이나 비문은 모두 민초시 몫이었다.
글 하는 사람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면 반가이 맞아 밤새도록 글솜씨를 주고받았다.
걱정없는 민초시에게 단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책은 멀리하고 잡기에 빠져 있는 열살 먹은 아들이었다.
호박에 목침 놓기, 참외·수박서리, 남의 집 닭서리…. 여간 말썽꾸러기가 아니었다.
어느 초여름날, 들에서 돌아온 민초시가 마루에서 점심상을 받았다.
텃밭에서 뜯어온 상추가 그득히 상에 올랐다. 아들 녀석이 큰 대접에 우물물을 떠오자 민초시가 손을 씻었다.
바로 그때 구겨진 갓에 해진 두루마기를 입고 단봇짐을 진 남루한 과객이 사립문을 열며 들어왔다.
“지나가던 길손입니다. 물 한모금만 주시지요.”
하지만 끼니때 찾아온 손님을 물 한모금만 대접하고 보낼 민초시가 아니었다.
“보아하니 요기도 안하신 것 같은데 소찬이지만 겸상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민초시는 부엌 장지문 쪽을 향해 밥과 수저를 내오라며 아내를 불렀다.
그때 길손이 민초시의 손 씻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게 아닌가.
민초시가 대경실색 “그, 그 물은 내 손…” 하는데 민초시 아들이 쪼르르 달려오더니
길손이 반쯤 마시다가 내려놓은 손 씻은 물을 두손으로 잡고 벌컥벌컥 다 마셔버렸다.
그러고는 생긋이 웃으며 길손을 쳐다보고,
“저희 집 우물물맛이 좋지요. 재작년에 아버님과 작은아버님이 팠어요.”
“아, 그렇구나. 물맛이 꿀맛이네.”
길손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고봉밥을 다 비우고 백배 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갔다.
길손이 떠나고 나서 민초시가 아들을 불렀다.
“길손은 손 씻은 물을 모르고 마셨다지만, 너는 왜 마셨느냐?”
“그 길손이 아버님 말씀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손 씻은 물인 줄 알았다면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민초시는 아들 녀석이 말썽꾸러기이기는 하지만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알았다.
길손도 물을 마시다 말고 손 씻은 물이란 걸 알아차렸고, 그 아들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길손은 암행어사였고,
7년 후 민초시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자 자기 밑에 두고 키워 나중에 우의정까지 오르게 했다.
첫댓글 오늘은 "염소 뿔이 녹는다"는 한해 중
가장 무덥다는 대서(大署) 보양음식 꼭
챙겨드시고 건강한 여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