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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으로 읽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 1편
손자병법 시계편 5사 7계(제1차 출정전까지)
아들아, 손자병법(孫子兵法)을 들어보았느냐?
손자병법
태초부터 인류사에는 전쟁이 있었고, 불행한 일이지만 앞으로도 전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전쟁(戰爭,War)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전쟁을 하게 되는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과 지지않는 방법. 그리고 전쟁에서 지게되는 조건
전쟁에 관한 연구와 실전 경험을 거쳐 검증한 전쟁론, 군사학의 고전.
그게 바로 손자병법이다.
따라서 전쟁을 지휘하는 지휘관, 장수된 자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소양이기도 하지.
물론 확실히 아는 것과 머리로만 아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쟁을 다루지만 손자병법을 저술한 손무(孫武)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
병자, 국지대사, 사생지지, 존망지도, 불가불찰야.
전쟁은 나라의 큰 일이다. 병사의 생사가 갈리고
나라의 존망이 걸렸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전쟁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란다.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
아빠의 생각에 손자병법에서 최고의 경지는..
군형(軍形)편에서 나오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이란다.
勝兵先勝 以后(後)求戰 승병선승이후구전
승리하는 군사는 먼저 이겨 놓고 싸움을 하고
敗兵先戰 以后(後)求勝 패병선전이후구승
패하는 군사는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 뒤에 이기려든다.
먼저 이겨 놓고, 이길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 놓고 싸우면 당연히..
백전백승이겠지.
선승구전하기 위해서 5가지 사항을 가지고 냉정하게 피아(彼我)를 분석한다.
도(道)는 군주 또는 장수와 백성 또는 장졸이 뜻을 함께하고 사이가 굳건한가.
천(天)은 낮과 밤, 추위와 더위, 계절의 변화 등..천시(天時)를 의미한다.
지(地)는 멀고 가까움, 험하고 이로움, 넓고 좁음 같은 지형적 조건을 말한다.
장(將)은 장수의 기량과 품성. 장수는 마땅히 지모(智謀),신의,인애,용기와 엄정함을
갖추어야 한다.
법(法)은 법제. 군대의 편제와 운용, 보급 등을 말한다.
이 다섯가지를 손자병법의 5사(五事)라 한다.
피아분석이 끝나면 상대와 나를 두고 처한 상황에서 7가지를 가지고 비교한다.
첫째,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도, 정치는 누가 더 이치에 합당한가.
둘째, 장수는 어느 쪽이 더 유능한가.
셋째, 천시(天時)와 지리(地理)는 누구에게 더 유리한가.
넷째, 조직, 규율, 장비 같은 법제는 어느 쪽이 더 정비되어 있는가.
다섯째, 병력과 무기는 어느 쪽이 더 우세한가.
여섯째, 병사의 훈련도는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일곱째, 신상필벌(信賞必罰)은 어느 쪽이 분명한가.
이 일곱가지를 손자병법의 7계(七計)라 한다.
5사로 피아를 분석하고 7계로 피아의 상황을 비교하면 손무는 능히 전쟁의 승패를
예측할 수 있다고 했다.
아들아 이것은 손자병법의 제일 첫부분인 시계(始計)의 내용이다.
시계 (始計) 라 함은 처음,비로소 始, 셈할 計.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헤아리고 따지는 것을 말한다.
아들아, 우리 반만년 역사 속에 외침의 기록은 9백여 회라고 하는데 그 외침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우리 역사를 이어지게 한 것은 그만큼 선열들 한분 한분의 고귀한 희생이 모인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을 이끌어 역사를 이루어낸 명장(名將)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 수많은 명장들 중에..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이란 말에 어울리는
분으로 떠오르는 이들이 몇분 계신다.
고구려에는 을지문덕 장군이, 고려에서는 인헌공 강감찬 장군이 그러하셨고..
조선에서는 7년 조일전쟁의 주역이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1545~1598)
이중에서도 기록이 많이 남아 행적이 비교적 잘 전해지기에 친숙한 분은
단연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1545~1598) 제독일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1592년 4월부터 1598년 11월, 7년 조일전쟁 기간동안
조선 수군함대를 이끌었지.
전라좌수사라는 일개 작은 함대사령관에서 삼도수군통제사라는 해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지위에 서서 23번의 해전을 치루며 23번의 승리를 거둔 불패의 명장이셨다.
23전 23승.
이 불멸의 기록이 과연 우연이었겠느냐?
기적이었겠느냐?
아니다.
1591년 조선에서도 일본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일본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인지하고 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준비가 잘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사실 그 방향과 방법이 옳지 못했고, 그때도 이미 늦었던 것임은 다들 아는 바와 같다.
이때 조선의 전쟁준비는 변경에 성을 고쳐 쌓고, 명성이 있는 유능한 장수를 남쪽으로
차송하는 것이었지.
이때 이름이 오르내린 사람들은 어쨌든 당시 조선에서 이름있고 주목받는 장수였다고 볼 수 있었다.
이미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유능하다고 병략에 능하였던 우의정 정언신의 인정을 받은바 있고
서애 류성룡 선생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도
이러한 이유로 남쪽으로 차송되어 중요한 보임을 맡게 된 것이었단다.
조선에서는 이들에 대해서 다소 파격적인 승진도 시켜가며 차송하는데..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경우는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물론 전례없이 빠른 승진이라 반발이 많았지만 그대로 관철되었던 것을 보면..
조선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긴 했었나 싶어.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이때 가질 수 있는 강점이라면..
서애 류성룡이라는 후원자와 전라도 관찰사 이광과의 인연.
그리고 1582년 전라좌수영 소속 발포의 만호를 역임했던 탓에 그의 관할지역이
아주 낯설지 않았고, 짧게나마 수군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을 가졌던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준비된 수군 장수로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말함이니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5사 중에서 장(將)의 덕목을 취했다 할 것이다.
전라좌수영 관할 5관 5포 (5관은 청색.육지의 행정구역, 5포는 적색. 그리고 방답진 수군의 군사관할구역이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해서 그는 군영을 정비하고 전비를 갖추고, 군사를 조련하여
그의 방식으로 수영을 이끌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지.
이때에 태종대왕 때 처음 건조되었다가 잊혀졌던 귀선을 개량하여 건조하는 작업도
함께 이루어졌고, 귀선(龜船) 건조가 완료된 것은 7년 조일전쟁 발발 하루전..
1592년 4월 12일의 일이었다.
1592년 4월 13일 개전부터..한달은 무슨.
며칠이 못되어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이 제대로된 전투 한번 없이 붕괴해 버렸단다.
아들아, 특히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군은 당시 조선 수군 최대의 규모와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는 수군이었는데 원균은 경솔하게도 전투 한번 없이 함선을
자침시키고, 병력을 흩어지게 만들어 한순간에 강력한 수군전력을 잃게한 실책을
저질렀단다.
원릉군 원균(1540~1597)
경상우수사 원균(原陵君 元均,1540~1597)은 도주하려 했거나 아니면 함대를
모두 자침하고 육군에 합류하려 했거나...일단 그런 생각인 듯 하다.
그런데 전함과 병기만 잃고 병력 수습도 제대로 못했으니..이게 바로 무능이 아니고
무엇이냐. 자신도 그렇고 휘하장수 상당수도 겁에 질려 군인답지 못한 처신을 했고,
함부로 흩어지는 것은 그만큼 휘하장수들의 신망을 받지 못하고 조직을 휘어잡지
못했다는 증거다.
육군에 합류하려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수군 장수로서 수군의 역할에 대해 무지했다는
증거이니 이것도 큰 문제다. 이것도 무능하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문제다.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휘하장수로 있던 옥포만호 이운룡(息城君 李雲龍) 제독이
강하게 반발하여 제지하고 원균에게 전라좌수사 이순신 제독에게 사람을 보내어
원군을 청해 싸우자고 했단다.
그렇게 경상우수사 원균의 원군 요청을 받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어떠했을까.
바로 응하지 않았단다.
누군가는 말한다.
위기상황에서 아군의 원군요청을 받고도 바로 응하지 않고 시일을 끈 이유가 뭐냐고.
그러나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개전 이후 제1차 출정할 때 까지 약 3주의 시간을
허투루 보낸바 없다.
앞뒤 재지않고 일단 급하니 무조건 움직이고 본다..
이런 마음은 아군을 위험에 빠뜨리고 장수로서 무능하고 무책임한 처사라고
볼 수 밖에 없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원군요청을 받고 이런 시간을 가지지 않고 무작정 병력을
이끌고 갔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을까?
이런 경우가 바로 손자병법에서 말한 '敗兵先戰以後求勝(패병선전이후구승)'이
아니겠느냐.
적의 실체를 모르고서는 지피지기도 안되고, 손자병법의 5사7계도 힘들지 않겠느냐.
이런 면에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신중한 행보는 현명했다고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출정까지 3주의 시간을 보낸 이유는 바로 시간이 필요했거든.
전쟁에 나서기전..이길 수 있는 요건을 만들어 낼 시간말이다.
적인 일본의 실체를 더 확실히 파악할 시간과 전쟁의 양상을 파악할 시간.
피아를 비교하여 승패를 가늠하고..승산을 높이기 위해 전력을 더 가다듬고
전라우수영의 지원을 받아 최상의 전력을 갖추기 까지의 시간.
출정까지 걸린 약 3주의 시간동안..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경상우도 초유사 학봉 김성일 선생, 경상우수사 원균,
경상도 관찰사 김수 등과 공문을 주고 받으며 ..
더 정확한 전황을 파악하려 했고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관할지역을 벗어나 경상도 해역으로 원정 출정하는 것에 대해 조정에 고하고
답을 받아야 했고, 전라우수영에 협조 공문을 보내 연합함대를 구성하자고 했으며,
전라좌수영 관할 5관5포의 병력을 출전 전에 집결시켜 출동준비를 갖춘 상황에서
최종 전비상황을 점검했다.
전라좌수영 소속 장졸을 본영으로 소집하고 최종 준비를 마쳤지.
그리고 휘하장수들과 출정에 대한 논의를 했지.
경상도 해역 출정에 대해 신중론과 적극적으로 치고 나가자는 주전론이 대립하고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중립적 위치에서 의견이 모아지기를 기다리고, 승리의 요건이
완전해 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은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 제독의 독대를 통해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받고 강력한 의지와 충정을 확인한 후..
5월 3일, 중위장인 방답첨사 이순신 제독을 통해 제장을 소집하게 하고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출정의 뜻을 밝히며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았단다.
그리고..전라우수영의 준비가 늦어 합류가 지체되어 연합함대 구성은 좌절되었으나
1592년 5월 4일, 손자병법의 5사7계에 따른 모든 계획과 셈이 끝나고,
전쟁 준비 완료 확인 후..장수들의 보직을 배정하고 드디어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출정을 단행했어.
이것은 손자병법의 5사 중 도(道)에 해당한다.
그리고 출정의 시기를 잡은 것은 전쟁의 때를 선택한 천(天)에 해당한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제1차 출정
아들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제1차 출정이었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그리고 포작선 46척의 전력으로.
포작선은 사실상 전선으로서 의미는 없고, 협선은 소규모 쾌속선으로 전함보다는
정찰과 연락을 위한 전력 정도의 의미였지. 해전에서 주력은 판옥선이었다.
개전 직전에 건조가 완료된 귀선은 출정하지 않았다.
전라좌수영 부사령관격에 해당하는 우후(虞侯) 이몽귀는 유진장(留陣將)이 되어
본영에 남아 본영을 방어하며 후일을 대비하게 하고,
중위장(中衛將)에는 방답첨사 무의공 이순신(武毅公 李純信)
좌부장(左部將)에는 낙안군수 무장공 신호(武壯公 申浩)
전부장(前部將)에는 흥양현감 효숙공 배흥립(孝肅公 裵興立)
유군장(遊軍將)에는 발포가장 나대용(羅大用)
우부장(右部將)에는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중부장(中部將)이자 향도에는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후부장(後部將)에는 녹도만호 충장공 정운(忠壯公 鄭運)
좌척후장(左斥候將)에는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우척후장(右斥候將)에는 사도첨사 김완(金浣)
한후장(捍後將)에는 군관 최대성(崔大晟)
참퇴장(斬退將)에는 군관 배응록(裵應錄)
돌격장(突擊將)에는 군관 이언량(李彦良)
그리고 순천부사 권준(權俊)과 군관 송희립(宋希立)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보좌하며
출전했지.
이것은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5사의 법(法)에 해당하고,
지(地)의 이점을 취하기 위해 향도관인 광양현감 어영담을 기용한 것이란다.
그리고 5월6일..통영의 당포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이 수습한 판옥선 4척의 전력과
합류하여 결진하고
5월 7일..거제 옥포에서 일본 수군의 선봉장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의 함대 50척을
선제 공격하여 적선 26척을 격침하고 4천이 넘는 일본군을 수장시키면서도
아군은 단 1척의 판옥선 피해도 없었고, 1명 피해에 그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지.
아들아 이게 바로 7년 조일전쟁의 조선 수군 최초의 승리이자 향후 전쟁의 흐름에
변화를 예고한 의미를 가지는 옥포해전(玉浦海戰,1592.5.7.)이란다.
그리고 승세를 타고 현재의 경남 창원 합포(合浦)와 경남 고성의 적진포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1차 출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게 되었지.
옥포해전도
아들아, 손자병법이 오직 전쟁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그런 군인들만을 위한 책이겠느냐.
아니다. 사업가도 읽어야 하고, 스포츠팀 감독도 읽고, 우리같은 일반인도 본다.
그 속에 있는 전략, 전술과 인간과 세상을 읽어내는 눈은 세상의 많은 분야에서 그대로
활용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란다.
아빠는 손자병법으로 역사를 들여다 보았단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불패신화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리고 그와 늘상 함께 언급되고 비교되는 경상우수사 원균. 그는 왜 실패했는가.
그것은 손자병법의 내용으로 들여다보니..두 사람의 행보가 그려지며 대비 되더구나.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미리 이겨놓고 싸우러 갔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일단 싸워놓고 이기려 했으니..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의 시각으로 봐도 이 두 사람의 장수로서 수준 차이는 극명하다
아들아, 아직은 네가 손자병법의 오묘한 원리와 뜻을 깨우치기에 많이 이르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지금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경상우수사 원균.
왜 한 사람은 명장으로 남고 한 사람은 또 실패한 일개 장수로 남게 되었는가를
비교하여 풀어주니 새겨보고 교훈으로 삼으란 뜻이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