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가죽이 등가죽 돼도 몰랐다, 싯다르타 절망시킨 고행 반전
⑮싯다르타의 고행…손으로 배 만지니 등뼈가 잡혀
날이 갈수록 싯다르타의 몸은 여위었다.
고행림의 수행자들이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그는 고행의 극한까지 갔다.
나무에서 떨어진 씨 한 알, 혹은 쌀 한 톨로 하루를 버티기도 했다.
팔리어 경전에는 당시 싯다르타의 몸 상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엉덩이는 낙타의 발처럼 말랐다.
손으로 배를 만지면 등뼈가 만져졌고,
등을 쓰다듬으면 뱃가죽이 잡혔다.
대소변이 보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면,
곧바로 넘어져 혼자서 일어설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굶어죽기 직전까지 간 셈이다.
손으로 배를 만졌는데 등뼈가 만져질 정도라면 말이다.
엉덩이에도 살이 다 빠졌다.
싯다르타는 거의 뼈만 남은 상태였다.
파키스탄의 라호르 박물관에는 붓다의 ‘고행상’이 있다.
나무로 깎은 조각상인데, 비쩍 마른 피부 위로 핏줄만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그의 고행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고행의 극한, 무엇이 있나
인도의 수행자들은 왜 고행의 극한까지 가려 한 걸까.
이유가 있다.
몸을 비울수록 마음도 비워지기 때문이다.
몸을 누를수록 몸에 깃든 욕망도 덩달아 눌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방식으로는 깨달음의 문턱을 넘을 수 없다.
왜 그럴까.
사람이 몸을 가지고 사는 동안 욕망은 끊임없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이나교에서는 완전한 열반이란 죽은 후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럼 욕망이란 대체 뭘까.
무언가 하고자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사는 동안 하고자 하는 바람은 계속 일어난다.
그건 생명 작용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럼 그걸 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여기서 불교와 자이나교는 차이가 난다.
자이나교에서는 몸이 죽어야 완전한 열반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명상에 든 채
죽음에 드는 ‘삼매사(三昧死)’를 수행의 최고 경지로 친다.
불교는 다르다.
살아서 깨닫는 종교다.
불교는 살아서 열반에 들라고 말한다.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몸을 가지고 사는 동안 욕망은 끊임없이 올라온다.
살아서 열반에 드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렇게 따질 수도 있다.
가령 분노의 풀이 있다고 하자.
고행을 통한 수행은 풀이 자라지 못하도록 자꾸만 베어내는 식이다.
올라오면 잘라내고, 올라오면 또 잘라낸다.
올라오는 속도보다 잘라내는 속도가 더 빠르면 풀의 높이는 점점 더 낮아진다.
이 방식으로는 풀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왜 그럴까.
뿌리가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뿌리는 우리의 몸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래서 자이나교는 몸이 죽어야 완전한 열반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불교는 다르다.
불교는 한마디로 ‘이치의 종교’다.
쑥쑥 올라오는 분노의 풀을 잘라내는 일은 끝이 없다.
그래서 ‘깨달음(頓)’을 말한다.
처음에는 수행자가 풀을 잘라내는 게 도움이 된다.
분노의 풀이 깎일수록 나의 내면이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그 고요는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그런데 풀의 뿌리를 뽑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고요만으로는 모자란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하다.
‘풀의 정체’를 깨쳐야 한다.
다시 말해 ‘분노의 정체’를 깨달아야 한다.
나를 힘들게 하고, 화나게 하고, 지치게 하는 분노.
눈에도 보이고, 마음으로도 느껴지고, 타인에게도 전달되는 분노.
그 분노의 정체가 비었음(空)을 깨칠 때, 비로소 풀의 뿌리가 뽑힌다.
분노의 정체를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분노로부터 벗어난다.
자유로워진다.
#너의 불안을 내놓아라
달마 대사는 중국에 처음으로 선(禪)불교를 전한 인물이다.
달마가 오기 전에도 중국에 불교는 있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중심에 둔 선불교는 달마 대사가 오면서 비로소 문이 열렸다.
달마에게는 혜가라는 제자가 있었다.
늦깎이로 출가한 혜가는 수행을 하면서도 불안했다.
나이는 마흔이 넘었는데, 아무리 수행을 해도 큰 진전이 없었다.
불안의 풀이 내면에서 자꾸만 올라오자 혜가는 힘들었다.
하루는 작심하고 스승에게 물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 대사는
동아시아에 선불교의 씨앗을 처음 뿌린 인물이다.
중국 쑹산에 세워진 달마상. 백성호 기자
“스승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달마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 불안의 풀이 왜 자꾸 자라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 불안을 내 앞에 내놓아라.
그럼 내가 그 불안을 없애주겠노라.”
이 말을 듣자 혜가는 기뻤다.
혼자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던 불안을 스승이 한 방에 해결해주겠다니 말이다.
혜가는 불안을 찾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을 찾았다.
그런데 참 희한했다.
그 불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손에 잡히지도 않고,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찾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달마가 한마디 했다.
“너의 불안이
이미 없어졌느니라.”
이 말을 듣는 순간, 혜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지긋지긋하게 나를 괴롭히던 그 불안이, 내가 만든 착각의 산물임을 깨친 것이다.
그 불안의 속성이 원래 비어있음(空)을 꿰뚫은 것이다.
그럼 그 뒤에는 어떻게 될까.
혜가에게 다시는 불안의 풀이 올라오지 않았을까.
아니다.
불안의 풀은 올라온다.
수시로 올라온다.
대신 혜가는 이제 풀의 정체를 안다.
그 풀이 비어 있음을 안다.
그래서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다.
불안의 풀, 분노의 풀이 더 이상 나를 적시지 못한다.
예전처럼 나를 때리지 못한다.
불교의 깨달음은 이런 식이다.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완전한 열반과 차이가 난다.
고행의 끝자락까지 간 싯다르타는 절망했다.
고행림에 있는 수행자의 상당수가 자신을 우러러봤다.
싯다르타만큼 철저한 절식에 극한의 고행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수행의 막다른 벽과 마주하고 있었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고민했다.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나, 아니면 멈추어야 하나.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