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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글 김세현 그림 낮은산 2016-05-20 |
아기 장수의 꿈
“평소에 내 글쓰기가 무엇이었냐 생각을 해 보면 결국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삶을 씻겨 왔구나, 씻기는 과정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해요. ……. 현실의 삶으로부터 영혼을 위로하고 씻기는, 그래서 평상의 삶의 힘을 회복시키는 역할이 아니었나 싶어요.”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청준 선생이 우리나라의 대표 전설 ‘아기 장수’를 「아기 장수의 꿈」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썼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작품으로 아이들과 나누고자 했던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이 책의 발문을 쓴 옛이야기 연구자 김환희의 말처럼 “이청준 선생이 살아생전에 종종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기 장수의 비극이 아직도 이 땅에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아기 장수의 비극을 되살려내어 그 뜻을 다시금 새겨봄으로써, 매우 아름답지만 또 그만큼 무척이나 처연한 아기 장수의 아픔을 스스로의 것으로 느껴 봄으로써 아이들과 함께 우리의 혼탁한 영혼을 씻기고, 진정한 삶의 힘을 회복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선생의 글이 오랜 세월이 지나 화가 김세현의 그림을 만나 새롭게 태어났다. 지배집단에 대한 두려움이나 패배의식 따위는 저만치 박차 버리고, 백성을 겁주고 윽박지르는 관군의 일그러지고 우스꽝스러운 형상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늠름한 아기 장수의 모습은 아름답고 당당하다.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에 대해 김환희는 이렇게 말한다.
“「아기 장수의 꿈」은 그동안 받아 마땅한 세상의 빛을 제대로 쬐지 못했습니다. 이청준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도 세월이 제법 흐른 지금, 김세현 화백의 넘치는 열정과 섬세한 손길로 이 이야기가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해서 작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림을 한 장면 한 장면 완성해 나갔을 화가의 외롭고 긴 시간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어린 영혼을 위로하는 예술가의 씻김굿
아기 장수는 우리의 민간 전설이 만들어 낸 가장 아름답고 영웅적인 인물이다. 오랜 세월 백성들은 아기 장수를 기다리고 기다려 왔다.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 세상을 바꿔 낼 인물을 고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기 장수가 태어나면 부당한 권력에 앞서 그 장수는 부모에게 죽임을 당해 왔다. 그들은 아기 장수가 불러들일 화를 걱정했던 것이다.
이청준 선생은 작품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은 물론 그런 인물이 태어나기를 오래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그러기를 기다리는 것뿐, 정작에 그런 아기가 태어나면 큰일이었습니다. 그런 아기가 태어나기만 하면, 나라에서는 뒷날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아기를 미리 잡아다 죽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 사람들은 행여 자기 집에서 정말 장수 아기가 태어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 아이를 몰래 숨겼다 나중에 가서 일이 잘못되는 날이면, 일가친척이 온통 무서운 화를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아기 장수는 우리의 민간 전설이 만들어 낸 가장 아름답고 영웅적인 인물인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세상을 바꿔 줄 장수를 간절히 기다려 온 백성, 하지만 막상 자기 집에서 장수 아기가 태어나면 그를 권력에 앞서 먼저 죽일 수밖에 없는 백성, 그 속에서 하루가 모자라 그 뜻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허물어져 내리는 아기 장수. 그 어린 영혼의 입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안타깝고도 긴 한숨 소리. 이 책은 그렇게 스러져 간 어린 영혼을 위로하는 씻김굿이기도 하다.
김환희는 발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림책 곳곳에는, 못다 핀 삶을 살다 간 아이들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화가의 마음이, 이 땅에서 더는 이기적인 어른과 무책임한 국가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무참하게 희생당하는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부모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이 땅의 전통 색감과 조형미를 찾아 나선『아기 장수의 꿈』
화가 김세현은 오랜 세월에 거쳐 이 땅에 면면히 스며 있는 한국의 전통적 조형미와 색감을 찾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고 새로이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써 온,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를 그림책으로 구현해 온 작가다. 『만년샤쓰』, 『준치 가시』, 『엄마 까투리』, 『7년 동안의 잠』 등을 통해 김세현은 그가 찾아 나선 이 땅의 전통 조형미와 색감을 우리 앞에 지속적으로 펼쳐 보여 왔다.
그런 김세현에게 『아기 장수의 꿈』은 또 하나의 변곡점이 되는 작품이다. 그가 『아기 장수의 꿈』을 통해 이전 작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진채(眞彩)이다. 깊고 강렬한 채색을 그 특징으로 하는 진채는 멀리는 고구려 고분 벽화로부터 고려의 불화, 조선 후기의 민화를 거쳐 현대의 박생광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화의 전통이다.
화가가 진채와 더불어 과감하고 일그러진 형상을 통해 『아기 장수의 꿈』을 그려낸 것은 작가의 글을 어떠한 방식으로 그림책에 결합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이자 한국의 전통적 조형미와 색감을 스스로의 작업에서 구현하고자 애써 온 그의 오랜 노력의 새로운 결실이다. 그 새로운 결실은 강렬한 여운을 남기며 보는 이들에게 말을 건다.
그렇게 완성된 『아기 장수의 꿈』은 장수의 출현을 고대하는 시대와 그 속의 백성을, 아기 장수가 품었던 꿈과 겪을 수밖에 없었던 처연한 아픔을, 새로운 아기 장수의 등장을 여전히 기대하는 우리의 바람을 거침없이 펼쳐 내 보인다.
새롭게 태어난 아기 장수는 아름답고 당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