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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6) - 2023. 5.20(토) 5.21(일) |
5월21일(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숙소 인근에 있는 ‘전주한옥 스파’라고 하는 대형 대중목욕탕에가서 목욕을 하고 인근 콩나물 국밥집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식당은 아침부터 붐볐다. 대부분 왱이 콩나물 국밥 전문집이라고 했는데 실제 ‘왱이’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주인도 몰랐다. 그냥 다들 붙이니 붙인다는 뜻으로 들린다. 특허청에 상표등록한 고유상표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어제 식당에서 모주(母酒)라는 전주 특산 술이 있어 한 병 시켜서 맛보았는데 이 맛도 저 맛도 없고 알콜 도수도 1%라 술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오늘 일과는 9시에 전동 성당에 가서 주일미사에 참여한 뒤 경기전(慶基殿)과 어진박물관(御眞博物館)을 관람한 뒤 전주 옥터와 전주 숲정이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할 같아 아침 식사 후에 바로 전주 옥터를 찾았다. 그런데 전주 옥터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주교인들이 성지, 성지 하지 다른 사람들은 관심밖이 아닌가? 설령 천주교 신자라 해도 이미 그 자리에 다른 건물이 들어선 곳을 어찌 알겠는가? 만약 경주에서 조선시대 경주 관아 감옥터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처음이자 마지막 방법은 네비게이션 길찾기이다. 휴대폰을 길찾기를 해 보았더니 6분 정도 소요된다면서 안내를 하는 것이 아닌가? 없어진 터이기에 길찾기에 나오지 않는 줄만 안 것이 괜한 걱정이었다.
전주 옥터 - 12살 소녀가 순교를 택하다니? |
전주 옥터는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만 그 터로 추정되는 곳만 전하는데 그 주소는 전주시 완산구 현무1길 20이다. 네비게이션이 인도하는 대로 와서 입구에 도착하니 한국전통문화전당 입간판과 전주옥터 성지 입간판이 길을 사이에 두고 세워져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창설 이후 100여 년간 크고 작은 박해를 겪었는데, 전라도의 수부(首府)였던 전주는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로 감옥이 가득 찼고 순교자들이 줄을 이었다.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수많은 순교자들이 혹독한 문초와 형벌 속에 치명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동정 부부인 복자 유중철(柳重哲, 1779~1801, 요한)과 그의 동생 복자 유문석(柳文碩, 일명 문철, 1784~1801, 요한)이 10월 9일 옥중 교살되었으며, 1827년 정해박해 때는 24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감금되어 초만원을 이루었고, 전주 고을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넣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옥사한 12명? 중에는 12세 소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며 치명한 복자 이봉금(1828?~1839, 아나스타시아)이 있다. 이봉금의 순교로 이 땅은 한국 교회사에서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 중에서 최연소의 순교자를 갖게 되었다. 어머니가 옥중에서 순교하고 의지할 데조차 없게 되었지만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고 어린 나이에 옥에서 교수당하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다.
이순이 루갈다의 동생인 이경언(바오로), 김조이(金召史, 1789~1839, 아나스타시아), 홍봉주 토마스의 아내인 심조이(沈召史, 1813~1839, 바르바라)도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옥중에서 가장 긴 세월을 보낸 분들은 1827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3년의 옥고를 치른 이들이다.
그들은 옥중에서 기도와 말씀의 묵상이 생활화되어 밤이면 등불을 켜 놓고 모두 함께 성경을 읽으며 큰소리로 공동 기도를 드렸다. 감옥이야말로 자기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에 참여할 수 있는 곳으로, 감옥은 덕을 배우는 학교로 변하였고, 화목이 넘쳐 모든 행동과 말에 규율이 잡힌 가족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전주 감옥은 순교자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이 참수 치명하기 전 신앙을 증거한 곳이기도 하다.
▲전주감옥 순교자들
◆ 복자 유중철 요한 (1779∼1801년)
유중철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스타니슬라오)으로부터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7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 영성체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로부터 동정을 지키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신부는 전주에 사는 요한을 생각하고는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그 결과 1797년 10월 요한과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음해 9월 요한은 아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9월 중순에는 요한의 아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 포졸들은 유문석을 가족들에게서 떼어내 형인 유중철 요한에게로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당시 요한의 나이는 23세였다.
◆ 복자 유문석 요한 (1784∼1801년)
유문석 요한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요한)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형수가 된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요한의 나이는 12살이었다.
1801년 박해 때 초남이에서는 그의 부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중순 그도 남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나와 형 유중철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이었다.
◆ 복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 ? ∼1839년)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27년 무렵, 이성삼(바오로)과 김조이(아나스타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부모들은 정해박해로 인해 피신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게 된 그녀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킬 줄 알고, 천주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도 알았다. 그녀는 귀여운 신심을 지닌 하나의 작은 천사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홍재영(프로타시아)의 집으로 피신해 갔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나이가 어려 형벌을 받지 않은 채 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포졸과 옥리들은 그녀의 나이가 어린데다가 얌전하였으므로 동정심을 발휘하여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녀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 관장이 “천주를 배반하고 욕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하자 그는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없어 천주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는 천주님을 섬겨 왔으니 천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며 잘라 말했다고 한다.
나이가 어려 형벌을 받지 않은 채 옥에 끌려간 그에게 어머니 김조이가 딸의 신심을 의심하는 체하며 “너는 틀림없이 배교할 것이다”고 말하자 이봉금은 “어떠한 시련에도 신앙의 가르침에 충실하겠다”고 거듭 다짐한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다. 배교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그는 결국 옥중에서 어머니가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해 12월 5일 한밤중에 몰래 옥중에서 교살형을 당한다. 15게가 되기 전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국법에도 어긋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당시 그의 나이가 12세를 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망기에서 전하고 있다
◆ 복자 이경언 바오로 (1792∼1827년)
이경언 바오로는 1792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요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의 누이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가롤로)는 그의 형이고,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누나였다.
그는 이후 명도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회장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성 정하상(바오로)이 북경을 왕래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것도 바로 그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뒤 체포된 포도청에서 전주로 이송되었다. 선천적으로 약했던 그는 1827년 6월 27일(음력 윤5월 4일) 전주 옥중에서 옥사하였다.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 복자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789∼1839년)
김조이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이성삼(바오로)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원만한 성격 때문에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또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로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마을 부인들의 교육에까지 유의하였으니, 그녀의 권면은 그들에게 아주 유익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함께 있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그녀는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다시 형벌을 받은 뒤 옥에 갇혔고, 그녀의 어린 딸도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옥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옥중 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바라던 참수형을 당하지는 못하였으니,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인해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1839년 10월경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1세였다.
◆ 복자 심조이 바르바라 (1813∼1839년)
심조이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에 홍봉주(토마스)와 결혼하였다. 1801년의 순교자 홍낙민(루가)은 그의 시조부였으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순교한 홍재영(프로타시오)은 그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였다. 바르바라는 지능이 아주 낮았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자선심 또한 열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녀는 전라도 광주에서 살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그녀는 시아버지를 비롯하여 함께 살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이후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하였으나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두 살이 된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보는 일이었는데, 그녀는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마침내 전라 감사는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그녀는 형벌로 인한 고통에 이질까지 걸렸으며, 스스로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되자 타당하게 예비한 뒤 죽음을 맞이하였다. 순교한 날은 1839년 11월 11일(음력 10월 6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27세였다. 그 뒤를 이어 그녀의 아들도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조이(召史)란 성(姓)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 쓰여 과부 또는 나이 많은 여성을 젊잖게 가리키는 이두(吏讀)이다. 한자로는 ‘소사(召史)’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조이’라고 읽어야 한다.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이렇게 부르는 분이 네 분이 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소지품을 챙겨서 9시 미사를 보기 위해 전동 성당으로 이동했다. 전동 성당에서 미사를 본후 10시가 넘어 바로 이웃한 경기전으로 갔다.
전주 숲정이 성지 -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 |
전주 숲정이(전주시 진북동 1034-1번지)는 조선 시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로, 일찍부터 중죄인들의 형장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터로 변모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 류항검의 가족인 부인 신희(申喜),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李順伊) 루갈다, 조카 유중성(柳重誠), 제수 이육희(李六喜)이 이곳에서 순교했고,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충청도 출신의 김대권(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정태봉(바오로)과 경기도 출신의 신태보(베드로) 등 5명이 5월 29일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또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 조화서(베드로), 이명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등 6명이 12월 13일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성, 그리고 기해박해시 순교자 5명은 2014년 8월16일 복자품에, 병인박해시 순교자 6명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1867년에는 김사집(필립보)외 수 명이 순교하였다.
숲정이의 순교자 6성인 12복자
숲정이는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사적지였다. 이곳은 신앙 선조들의 순교 열정과 함께 천상의 영복을 얻은 기쁨, 피로 적셔진 붉은 흙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박해 시대 내내 신자들은 그 자리를 잊을 수 없었고, 신앙의 자유를 찾은 뒤에도 자주 이곳을 순례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이 숲정이 형장이 교회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에 이명서 성인의 손자 이준명(아나돌)이 숲정이 순교 터를 매입하면서였다. 이후 1935년에는 전동 본당의 이학수(바오로) 회장이 그 자리에 십자가비를 건립하였으며, 1960년에는 이곳 이웃에서 해성 중고등학교가 개교하였고, 1968년에는 순교 복자 현양탑이 건립되었다. 또 1984년에는 숲정이 순교 터가 지방 기념물 7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시화의 물결로 1989년에 해성학교가 이전되고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본래의 순교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지금은 본래의 장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 내(진북동 1034-13번지)에 새로 사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11시 조금 지나 성지에 도착하니 정문 옆에 관리실이 있고 관리자도 한 사람 배치되어 있어 매우 친절하게 안내를 해 준다.
정문 안 왼쪽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건물 윤호관이 있는데 구 혜성중고등학교 체육관이라 한다. 벽에는 숲정이 성지라는 이름이 있고 가운데에는 예수성심상이 서 계신다. 윤호는 서천교에서 순교한 성 조윤호(요셉)이다. 이 건물은 곧 철거되고 실제 교구에서 필요한 새 건물이 신축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지는 오른쪽에 조성되어 있다.
하나의 꽃동산에 사방 4개의 바위에 각각 박해의 종류와 순교성인들의 훌륭한 말씀이 새겨져 있다. 하나의 시설로 4배의 효과를 낸 의도가 참 좋다.
경기전(慶基殿)(보물 1578호) - 유일하게 남은 태조 어진 |
1410년(태종 10년)에 전주, 평양, 경주, 개성, 영흥에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어용전(御容殿)을 세웠다. 주로 옛 도읍지이거나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나 고향으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함이었다. 전주는 경기전(慶基殿),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숭전(永崇殿), 개성은 목청전(穆淸殿) 함흥은 준원전(濬源殿)이었다. 경기(慶基)라는 이름은 조선의 국성(國姓)인 전주 이씨의 발상지이므로 '경사스러움(慶)이 터잡은(基) 곳'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 경기전을 제외한 4곳은 모두 불탔고 정유재란 때 이 경기전마저 소실되었다. 경기전 태조 어진(국보 제317호)은 임진왜란 당시는 조선왕조 실록과 함께 내장산, 묘향산,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때는 위봉산성으로 옮기어 유일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지금 경기전에 있는 어진은 1872년(고종 9년)에 원본이 너무 오래되어 모사한 것이다. 원본은 어진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원본은 1년에 1번 11월중에 약 3~4주간 전시된다고 한다. 이 경기전을 세울 때 봉안한 어진은 경주 집경전 어진을 모사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경주 집경전 어진은 임진왜란 때 강릉에 옮겨 위기를 면했지만 인조 때 화재가 나서 강릉의 태조 어진은 소실되었다. 정조 때 경주에서 새로운 건물을 세우고 어진을 내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정조는 集慶殿舊基(집경전구기)라는 어필을 내렸다. 이에 이 글자를 비석을 만들어 비각을 지어 보존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비각은 소실되고 비석만 현재 경주평생가족원(구 경주여중) 뜰에 하마비와 함께 서 있다. 따라서 소실된 경주 집경전 태조 어진과 가까운 것을 보려면 전주 경기전 어진을 보면 된다.
마침 어진박물관은 공사 중이라 볼 수가 없지만 경기전을 위시하여 전주사고, 조경묘, 경기전 부속 건물을 볼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매표소 앞에는 쌍귀부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에는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여기부터는 모두 말에서 내리며 잡인들은 들어갈 수 없다)라고 새겨져 있다.
경기전은 크게 정문에서 곧바로 들어가는 정전 영역, 그리고 왼쪽에 부속 건물 영역, 오른쪽에 전주사고 영역, 그리고 뒤편에 조경묘 영역이 있다.
경기전(慶基殿) 정전(正殿) 영역
정전 영역은 정문에서 일직선으로 들어가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을 거쳐 어진을 보관하고 있는 정전으로 가는 영역이다.
홍살문은 홍색으로 칠해져 있고, 윗쪽에 삼지창과 이지창의 창살이 있기 때문에 홍살문이라고 부른다. 예부터 귀신이 붉은 색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귀신이 홍살문 위의 창살에 옷이 걸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문이 있기는 하지만 홍살문은 경기전 안과 밖을 구분하는 문이기도 하다. 태조의 어진이 봉안된 곳이고, 제사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엄숙한 마음가짐을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홍살문을 지나면 다시 문이 둘이 있는데 바깥에 외삼문, 안에 내삼문이 있다. 이 둘은 건축구조에 차이점이 있다. 외삼문에는 기둥에만 공포가 있는데 내삼문에는 기둥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있다. 전자를 주심포식, 후자를 다포식이라고 한다. 둘 다 가운데 문은 신도(神道)이기에 제사 때가 아니면 닫거나 막아둔다.
정전은 丁자형이고 안에 태조 어진이 모셔져 있다. 마당에 왜 솥이 있을까? 불에 취약한 목조건물에 화재시 물을 공급하기 위함이며 솥을 걸어둔 것은 겨울철에 언 물을 녹히기 위함이라고 한다.
경기전 부속건물
정전 부속 건물은 경기전을 유지관리하고 행사를 하는데 필요한 각족 물품을 제공하는 부대 시설이다.
*수복청(守僕廳) - 제사나 큰 행사를 할 때 담당 하급 관리들이 일숙직을 하거나 맡은 일을 수행하는 곳이다.
*마청(마청) - 경기전 행사에 교통편을 제공하는 집으로 말을 기르거나 대기시켜 놓는 곳이다.
*용실(舂室) - 방앗간, 절구 등 을 두고 제사 때 음식을 곳이다.
*조과청(造菓廳) - 떡, 유밀, 다식 등을 만들고 보관하는 곳이다.
*제기고(祭器庫) - 각종 제기, 기물 등을 보관하는 곳으로 지면과 떨어지게 하여 습기를 막는다.
*어정(御井) - 임금이 참여하는 제사에 마실 물을 긷는 우물이다.
*경덕헌(景德軒) - 수문장청(守門將廳)이라고도 하면 경기전 일원의 군사들이 사무 보는 곳이다
*전사청(典祀廳) - 전사관들이 제상을 차리는 등 제사 준비를 하는 곳이다.
*동재(東齋), 서재(西齋) - 제사를 위해서 지은 집으로 제각이라고도 하며 제관들의 제계의식도 하는 곳이다.
전주 사고 영역
전주사고 지역은 울창한 숲 지역으로 복원 전주 사고와 예종대왕 태실 및 비석이 있다.
사고(史庫)는 조선왕조실록의 보관처이다. 조선왕조는 이를 보존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다. 재해에 대비하여 춘추관, 성주, 충주, 전주의 4곳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다. 이것이 4대사고(史庫)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본 이외는 모두 소실되었다. 왜란 이후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을 4부 복사하여 이번에는 춘추관 이외 묘향산, 태백산, 마니산, 오대산의 심산궁곡에 보관하게 된다. 이것이 5대사고이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와 태조 어진을 지켜낸 것은 관청이나 관리가 아니라 정읍의 이름 없는 선비 안의(安義, 1529~1596)와 손홍록(孫弘錄, 1537~1610)이었다. 이들은 사비를 들여 직접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어진을 내장산 중턱 굴속에 옮겨 1년여를 지켰다. 조선 역사를 지켜낸 것이다. 만약 이들 선비가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하다.
조경묘 영역
조경(肇慶)이란 ‘조선왕조 창업의 경사가 시작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조선 왕실의 시조 사당이다. 이한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21대조이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가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의주로 옮겨갈 때까지 전주 이씨가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조경묘는 영조 47년(1771)에 경기전 북쪽에 세웠는데, 태조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신 경기전, 태조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가 살았던 이목대와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전주는 후백제의 고향일 뿐 아니라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원향으로 조선왕조로 볼 때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성지 순례를 와서 자신과 종교나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신봉하는 성지를 방문하는 것도 결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런 활동이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종교도 준중받을 수 있고 종교 상호 간에 신뢰나 이해를 쌓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교나 유학은 한때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준 사상이 아닌가? 이런 면에서 이번 성지 순례에 한옥마을의 경기전을 관람하는 것은 퍽 유익했다고 본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