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C우정 JC사랑]
靑山 손병흥
청년지도자 양성 사관학교 격이자 대한민국 NGO의 선두주자인 JCI KOREA(한국청년회의소) 산하 부산서면청년회의소의 일원이 된지도 지금으로부터 어언 20 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침 어제 저녁에 창립 30주년을 맞은 소속 로칼(Local)의 송년교례회 및 전역식과 취임식장에 참석하여, 내년도 부산서면JC 특우회 감사로서의 직책을 재차 맡게 된 나로서는, 무척 감회가 깊을 정도로 지난날들을 다시금 돌이켜 보게 되었다.
사단법인 한국청년회의소(한국JC)는 지난 1952년도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을 ‘JC운동’으로 복구하고자 헨리 기젠비어의 숭고한 창시 이념을 따라 시작되었고, 지금은 국제민간단체로 발전하여 청년회원들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하여, 지역사회 개발 및 세계회원국가와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세계 평화와 인류 번영을 이루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한국JC는 창립 후에 현재 16개 지구JC와 359개 지방JC에서 2만여 명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는 전 세계 국제청년회의소(JCI) 115개 회원국 중 세 번째로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단체에 속한다.
따라서 JC는 20세 이상 42세(이전에는 40세) 이하의 청년들이 웅지와 정열을 한데모아, 지도역량개발과 지역사회개발 및 국제와의 우호증진이라는 3대 이념을 실천하는 국제민간단체로 발전했으며, 한국에서는 지나간 1951년도 평택에서 영어교사를 하던 서정빈씨를 중심으로 발기인 대회를 가진 뒤, 1952년도에 강건원씨를 초대회장으로 한 ‘평택청년애향사업회’의 발족을 한국JC의 효시로 삼고 있다.
이처럼 JC는 아주 오래되고도 인상적인 유산을 갖고 있고, 이 조직은 1910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헤르클라륨 클럽의 형성에서 그 유래를 더듬어 볼 수가 있으며, 그 구성원들의 사회적 성장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 당시 지도자는 은행원인 ‘Henrry Giessenbier’씨 였는데, 그는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시에 위치한 선교사숙소에서 1915년 ‘페기’라는 소녀가 길가에서 놀다가 교통사고로 참변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어린이들에게 공원을 만들어 교통사고의 재발을 막고 지역사회의 각종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32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진보적 청년시민협회(YMPCA)'를 만들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것이 JC운동의 태동을 향한 첫걸음 이었다.
1916년 YMPCA는 세인트루이스의 사업가이며 JC조직의 초기 후원자인 클레렌드H.“Daddy” 하워드의 요청에 의해서 청년시민(JUNIOR CITIZENS)이라고 그 이름을 바꾸었다. 청년시민이라는 말의 약칭인 JC는 역동적인 조직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청년시민은 1918년 세인트루이스 상공회의소와 통합되었는데, 청년상공회의소라고 하는 명칭으로 개칭(Junior Chamber of Commerce : JCC)이 되었고, 1920년 1월21일과 22일에 첫 번째 전국기구인 미국청년상공회의소가 형성되었다. 전국 29개의 클럽이 참가하였고 그들은 Henrry Giessenbier를 그들의 첫 번째 전국회장으로 선출했다.
아울러 보다 더 상세히 한국JC의 연혁을 소개하자면, 1952년 숭고한 JC이념(3대이념 : 지도역량개발, 지역사회개발, 세계와의 우호증진)을 전수 받은 젊은이가 모여 “전쟁으로 폐허된 조국을 청년운동으로 재건하자”라는 취지로 출범하였고, 한국JC 태동의 움직임은 1951년 말 당시 미 제5공군이 주둔하고 있던 경기도 평택에서 29세였던 서울출신의 영어교사인 서정빈(徐廷斌)씨가 한국 밖의 세계를 더 배우는데 도움이 될 만한 좋은 기사를 번역하고 싶다며 미국 모빌시의 JC임원출신인 스포츠우드(Manning W.Spottswood) 중위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스포츠우드 중위는 전쟁의 상처로 시달리고 있는 한국에 시민정신함양과 지도역량개발을 목표로 하는 JC이념을 소개하였다. 이에 뜻을 같이하는 12명의 청년들이 모여 “전쟁으로 폐허된 조국을 JC운동으로 재건하자”라는 취지를 가지고 1952년 2월4일에 <평택청년애향사업회>를 결성했으며 동년 6월에는 국제청년회의소(JCI)에 지방JC로 가입하였다.
또한 국제청년회의소(JCI)의 창설은 국제적 조직이 되기 위한 구상이 1922년에서 1944년 사이에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이 기간동안에 1944년 JCI의 형성을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많은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외부에서의 청년회의소 조직이 처음으로 생겨난 것은 1923년 설립된 캐나다의 위니펙 무역위원회였다. 1926년에는 영국에 청년상공회의소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초기에 내딛은 첫 걸음은 1923년 캘리포니아주의 파사데나에서 개최된 미국 청년상공회의소의 전국대회에서 청년상공회의소의 국제적 행정의회(International Executive Council of Junior Chamber of Commerce : IEC)가 형성된 점이다. 여러 가지로 존재하는 청년회의소를 국제적 단체로 이루자는 구상이었다.
그리하여 42개국에서 접촉이 이루어졌고, 26개국은 그러한 구상을 추구하려는 진지한 의사를 제시하였다. 1933년까지 미국, 멕시코, 뉴질랜드, 캐나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콜롬비아의 회원이 가입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35년 IEC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1944년 12월7일부터 11일까지의 중앙아메리카회의 중에 국제청년회의소 JCI (Junior Chamber International)가 멕시코시티에서 탄생하였다. 기구의 탄생에 대한 증인은 7개의 라틴아메리카국가와 미국으로부터 온 30명의 대표사절이었으며 라울가르시아 비달(멕시코)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국제청년회의소는 1946년 파나마의 파나마시티에서 개최된 첫 번째 JCI국제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1972년 대만의 타이페이에서 열린 JCI 세계총회에서 기구의 이름은 국제청년회의소(Junior Chamber International)에서 국제JC(Jaycees International)로 바뀌었다. 이때 새로운 이름과 함께 “JCI”라는 이니셜은 계속하여 사용한다는 조항을 첨가하였다.
그런 후 1988년 시드시 세계총회에서, 총회는 국제적 기구의 명칭을 다시 국제청년회의소(Junior Chamber International)로 바꾸자는 헌장 개정안을 의결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부산서면JC 홍보분과위원장과 사무국장, 총무이사, 연수이사, 감사, 상임이사, 부산지구JC 유스JC담당이사, 부산지구JC 홍보실전문부위원장과 부산지구JC신문 편집위원 및 기자를 역임하였고, 한국JC 대외홍보위원도 역임하면서 전역을 하였으며, 이후로는 부산서면JC 특우회의 총무와 감사 부산지구JC 총무부위원장을 역임하고서 또다시 내년도의 감사직을 수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불황으로 인해, JC회원수와 그 활동영역마저도 많이 침체가 되어 무척이나 안타까울 뿐이다.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우선 가장 기억에 떠오르는 것으로는, 경남 함양에서도 오지인 산골벽지 초등학생들과, 경남 충무에서도 멀리 떨어진 낙도인 욕지도에 거주하는 초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방학 동안에 이곳 부산으로 초청을 하여 홈스테이와 함께 부산일원과 경주 등에 소재한 명승고적지 답사 시 비록 1박2일 간의 짧은 일정이나마 함께 동행 하였던 일과, 그 이후 답방형식으로 욕지도를 찾아가 숙식을 하며 지역주민들과 친목과 화합의 시간을 가졌던 추억들이 아련하게나마 떠오르고, 또한 가는 김에 개인적으로도 애지중지하던 무비카메라와 영사기 · 아동용 영화필름 및 슬라이드용 환등기와 등사기를 기증하였던 일, 그리고 부산시내 여러 복지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원생들을 한꺼번에 부산 시민회관 대 공연장에 초대하여 몇 번씩이나 음악경연대회를 치름과 동시에 선물과 간식거리도 제공할 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을 하였던 일, 부산진구 범천4동 동사무소 2층을 리모델링하여 지역 영세민들을 위해 수 년씩이나 새마을 유아원을 무료로 개설하여 운영하던 일, 한국자유총연맹 부산광역시지회 대강당을 대관하여 시민의식개혁운동의 일환으로 부산시남녀웅변대회를 세 번씩이나 주최하여 직접 주관하던 일,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매년 서로 함양과 부산을 서로 오가며 1박 2일간의 합동모임을 통한 친목도모와 JC우정을 나누고 있는 형제JC인 경남 함양JC 회원들과의 교류 및 오래전 그곳이 벽촌이었던 시절에 일부 의사회원들과 종합병원 등에 근무하고 계시는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님들을 특별히 모신 채로, 여름방학기간 중인 그곳에 있는 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함께 뜻 깊은 무의촌 의료봉사활동 등을 하면서, 당시 그 곳에 거주하고 계시던 여러 어르신들에게 대량으로 돋보기안경도 제공하며 방역소독과 제초작업 등을 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다.
그 외에도 부산서면JC는 거리교통질서캠페인과 교통안내박스설치, 성지곡수원지 어린이대공원 아치설치 후 기증, 양로원과 경로당에 대한 동절기 난방비 지원 및 부산지하철 개통 시 서면역에 교통안내판을 설치하여 기증하는 등 크고 작은 많은 지역사회개발과 봉사활동에 치중하여 왔었으나, 지금은 어려운 경제난국과 청년실업 등의 난제로 인해 점차 회원수 마저도 줄어드는데다, 신입회원들의 가입이 적어 이제는 정말 단체의 존립마저도 우려할 정도로 크게 침체가 되어있어서, 무척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인류에의 봉사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사업임을 우리는 믿는다.” 고 하는 ‘JCI신조’처럼, 온갖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JC의 발전과 JC이념을 마치 신앙처럼 굳게 믿고 실천하고 계시는 OB인 특우회원들과 아직 현역인 YB 회원들이 있는 한, 더불어 선 ・ 후배가 더욱 뜻을 모으고 힘을 합해서 노년의 경륜과 장년의 지혜로움과 정열 및 패기, 그리고 그 옛날의 번영과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지속적이며 아낌없는 JC사랑을 실천하되, 균형적인 동반자의 관계로 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힘을 모아 더욱 더 지역사회에 헌신하며, 나아가 이럴 때일수록 국가발전을 견인하는 그야말로 살아 숨쉬는 JC의 진정한 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뼈저리게 느껴지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