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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을 보내며.
2017년 12월 31일 일요일.
2017년을 보내면서 한 해의 삶을 되돌아 볼 생각을 하는데 문득, 사촌형수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 집례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4남
매 조카들이 다니는 교회가 있었지만, 어떤 연유인지 집례자로 목사를 모실 형편이 아니어서 내가 장례식 집례를 했었다. 나는 광암교
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장례식 집례도 해보았기에, 내가 장례식 집례를 하게 되었었다. 그 때 어떤 이야기를 할 가 준비 중에, 형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았었다. 한 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4남매 자녀들이 이 땅위에 있게 하기 위한 뜻이
있었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삶을 살자고 권했었다.
사촌형이 유복자를 포함해서 어린 4남매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후, 형수는 노상에서 생선 장사를 하면서 4남매를 키웠다. 다행이 시
어머니가 계셔서 집안일을 맡아 주었기에, 새벽에 공판장에 가서 생선을 사다가, 가게도 없이 밤늦게까지 노점에서 생선을 팔아, 큰딸
은 고교까지 가르치고, 밑으로 3남매는 모두 대학교까지 다닐 수 있게 뒷바라지를 했다. 4남매는 모두 잘 자라서 결혼도 하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형수는 자녀들이 모두 결혼해서 잘 살게 되어 장사를 접고, 맞벌이를 하는 작은 딸 집에서 손주들
도 보살펴 주며 살다가, 암에 걸려 생을 마감했었다. 그 분의 삶은 다른 아무것도 한 일 없이 오로지 4남매 자녀들을 위해 평생을 희생
했기에, 4남매가 이 땅위에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 이었겠다는 생각이었다.
2017년을 보내면서, 2017년 한해를 살게 하신,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궁금해진다. 얼마만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았을 가를
헤아려 보고 싶어진다. 먼저 1년 동안 가장 잘 한 것은 차질 없이 때에 맞추어 민채와 은채 두 손주를 보살피는 일을 한 것이다. 아침
에 일어나서 딸네 집으로 가서 딸 부부가 출근한 후, 아이들이 일어날 때까지 같이 있다가,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아내가 준비한
아침을 먹이고 유치원에 데려다 주었고, 오후 5시경 다시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을 데려와서 저녁을 먹이고, 딸 부부가 퇴근해서 데려
갈 때까지 보살펴 주는 것이 일이었다. 손주들이 건강하게 유치원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내와
함께 건강관리를 잘 하면서, 손주들을 보살폈고, 그로 인해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기도 해서, 감사의 생활을 했기에, 하나님의 뜻에 따
른 생활을 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도 있기에, 2017년에 나는 얼마나 주면서 살았을 가도 생각해 본다. 우선 물질적인 것을 보면 연
금을 받아 생활하면서, 월드비전에 월 10만원과 굿네이버스에 월 3만원씩 기부하여 불우 이웃돕기를 계속했고, 교회에 매주 5만원씩
헌금한 것이 지출내역인데, 이것만 잠시 계산을 해보니 소득의 10.97%의 지출이 된다. 모 교회인 광주계림교회에 건축헌금으로 300만
원을 드리기도 했다. 여자 3인이 개척한 모 교회는 어머니가 설립교인 중에 한 분이기에 나도 어려서부터 다닌 교회이고, 장로가 되어
섬겼으며, 수원으로 이사 오면서 떠난 교회로 언제나 내 의식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교회이다. 교회가 속한 지역이 재개발 되면서 교
회를 다시 건축하게 되었고, 곧 헌당예배를 드릴 것 같아 12월 31일 금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아내와 함께 모 교회에 가서 드리면서 건
축헌금을 드렸다. 그 외에도 설과 추석 명절과 문병, 조문 등에 이웃돕기 차원의 지출이 상당히 있었고, 이사할 때 집 마련에 많은 돈
을 대출받아 부담해준 딸에게 빚을 갚는 생각으로 적금을 찾아 1,300만원을 주었다. 딸에게는 몇 차례 더 적금으로 몫 돈을 마련해서
갚아가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 적금을 하고 있다. 받은 것은 명절이나 생일 때에 딸에게서 용돈을 받았고, 추석에 용한이와 용범
이에게서 용돈을 받은 정도이다.
금년에도 자연과 벗하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여행과 산행, 도보여행을 하면서 글과 사진으로 카페에 남겨 놓은 것이 81회이다. 매주
토요일에 나갔지만, 손주들에게서 해방되거나 아내가 손주들에 대한 오후 일정을 맡아주면, 토요일이 아닌 때에도 상당히 많이 나갔
다. 48주년 결혼기념일을 보내면서 아내와 강릉, 양평 지역을 1박 2일로 여행 한 것을 비롯해서 광주에 가서 남도한바퀴 여행도 하고,
시티투어 여행도 몇 차례 했고. 봄 꽃 구경도 몇 차례 아내와 함께했다. 자주 아내와 함께하고 싶지만 아내의 건강이 따라주지 않아 많
은 시간은 혼자 다니게 되었다. 나들이를 계속할 수 있는 건강이 참으로 감사하다. 병원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귀속에 상처가 나서 이
비인후과에 몇 차례 다녔고, 정기 건강검진을 받다가 내과의사의 권유에 따라 12월 2일부터 예방차원에서 혈압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
다.
금년에는 미국에 사는 아들 가족에도 변화가 있었다. 2005년부터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Walnut Creek에 살면서, 직장은 Lawrence
Berkeely National Lab.이었고 Senior research Associate의 직책을 가지고 일 하다가, 금년 7월부터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본사가 있는 회사 USG Corporation(United States Gypsum Corporation)의 연구소로 직장을 옮겨서 이사한 것이다. 100년이 넘은
회사로 건축자재를 생산하여 전 세계에 판매하는 큰 회사로 옮긴 것이다. 직장은 Liberty ville에 있고, 집은 Buffalo Grove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옮기고 싶어 했는데, 드디어 옮기면서 10년 동안 기도했는데 이제야 이루어졌다고 했다는 아
들의 말을 듣기도 했다. 그 동안 나도 많이 기도 했었다. 옮겨간 직장이 전보다 훨씬 좋아서 비교적 만족해하는 것 같아 다행으로 여긴
다. 새로운 곳으로 옮겨간 아들의 집에 가 볼가 하는 생각을 처음에는 했으나, 해외여행을 접겠다는 결심을 이미 했었기에 가지 않기
로 다시 마음을 정했다. 아내가 원하면 아내만 다녀오게 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날 잠자리에 누워서 나의 교회생활을 되돌아 볼 때가 있었다. 모태 신앙으로, 교회생활은 믿음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 당연
한 생활이었다. 4년 3개월의 군대생활을 할 때에 교회를 잘 다니지 않은 기간이 있었지만, 그 때를 제외하면, 나의 전 생애는 교회와
함께한 것이다. 주일이면 다른 곳이 아닌 교회에 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고, 교회에 갈 수 없게 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모두
피하는 생활이었다. 교회에서 봉사도 많이 했다. 주로 교육 부서였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시작한 교회학교 교사로는 유치부 교사, 유
년부 교사, 그리고 유년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의 부장을 모두 해보았다. 장로가 되어 찬양대 대장을 비롯해서 선교위원장, 예배
부, 전도부, 교육부, 재정부, 문화부 등 각 부서의 부장도 많이 했다. 교육부서 중에 고등부 부장을 할 때가 전성기였다. 매주 설교로
학생들의 신앙성장을 도왔었다. 내가 고등부 부장이었을 때 학생이었던 자 중에 현재 5명의 목사가 배출되어 있는 것도 나만이 아는
보람이다. 선교위원장을 할 때도 좋았다. 교회예산의 10%를 배당 받아 미 자립교회와 선교기관을 돕고, 해외선교를 기획 집행해 갈
때 신나는 생활이었다. 하지만 교회에서 선교활동을 모두 중단하는 쓰라림을 맛보면서, 교회 성장의 동력을 상실하는 것 같은 안타까
움을 경험해야 했다. 군대생활을 마치고 귀가하여 대학 1년 남은 것을 이수하여 졸업하고, 곧바로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 전신)
에 2학년으로 편입하여 1학기 하고 조금 더 공부하면서 김재준 문익환목사 등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를 들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2학기를 시작해서 한 달 공부하고 자퇴한 후, 교사생활을 시작했었는데, 교사생활을 마치고 환갑이 지나서 호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
원에 입학하여 교육전도사를 하기도 하면서 3년 과정을 마치고 신학석사가 되었고, 신대원 3학년 때부터 만 3년간 광암교회에서 목회
도 했었다. 목사가 될 수도 있었으나 목사고시에 두 번 떨어지고 더 이상 응시를 하지 않고, 목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았고, 나 자신도 목사로 살기는 힘들 것 같아 목사 되는 것은 포기했었다. 하지만 목회를 했기에 목사 역할도 한 것이다. 교회에서
모든 역할을 다해본 대단한 나의 교회생활이 교회전문가 대열에 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교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줄 알고 이사를 하면 다닐 교회를 찾는 것이 맨 먼저였다. 아무 교회나 다닐 수 없어서인지 제법 교회를
고르곤 했다. 수원으로 이사 와서 6년 동안에 교회를 6번 바꾸어 다니기도 했다. 7년째 되는 작년 3월에 수원 영통으로 이사 왔을 때
는, 처음부터 명성제일교회를 선택하여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그런데 교회생활이 다른 어느 때보다 소극적이다. 소위 Sunday
Christian이라는 말에 적합한 생활이다. 주일 낮 대예배에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전부이다. 주일 저녁 7시에 드리는 예배에 몇 차례
참석하다가 그만 두었다. 도무지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예배였기 때문이다. 친교 활동도 전혀 없는 외톨이 생활이다. 아내는 여자들끼
리 모이는 구역예배에도 참석하고, 은퇴권사로 직분을 부여받고 제직으로 임명도 받았지만, 어찌된 것인지 내게는 은퇴 장로 같은 직
분도 부여되지 않고, 제직 임명도 해주지 않아 출석교인 정도의 대접을 해주는 것 같을 뿐이다. 자기 교회 출신이 아닌 장로는, 장로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적절한 대우를 해주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장로라고 이름을 주보에 내
주고 관심을 가지고 대우해 주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장로라고 밝히지 않고 교회에 등록하기도 했지만, 어디에선가 장로라
는 것을 알아내는 것도 보았다.
3월부터 6월까지와 9월부터 11월까지는, 매주 화요일 명선교회와, 수요일 영은교회에서 운영하는 노인대학에 열심히 다니기도 했다
. 아파트 경로당의 모임에도 잘 참여 했다. 3월에 경로당의 정기총회에서 임원이 바뀌면서 총무로 지명을 받아 4개월간 일했으나, 맞
지 않은 점이 많아 접기도 했다. 노인들이 모이는 곳에는 여자들이 많아서 여자 위주이기에 어색한 경우도 있었으나, 노인들의 세계에
서는 남녀의 허물이 별로이어서, 노인대학에서는 취미 활동으로 종이접기반과 찬양반으로 재미있게 참여했고, 앞으로도 참여하여 여
가를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다. 아내는 노인대학이나 경로당에는 참여하지 않고, 복지관에 월, 수, 금, 일주일에 세 번 수영장에서 아쿠
아로빅 운동을 하고 있으면서, 최근에는 친구를 삼아 월 2회씩 외식을 하며 영화관에도 가면서 자신의 삶을 잘 이루어가고 있는 것 같
다. 아내의 생활이 다채로워지고 즐겁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금년에는 국가적으로도 격동기였다. 역사적인 사건이 된 촛불집회로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여소야대의 국
회로 인해 청산해야 할 적폐가 많은 장애를 받고 있고 정국이 안정된 것 같지는 않지만, 국민들의 여망에 따라 진척되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는 한다. 강대국 사이에서 강대국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자국의 방침대로 국가 운영을 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것도 보인다.
남과 북이 하나 되어 정의로운 국가, 진리와 평화, 자유, 사랑의 동산으로 발전하여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국가로 발전하기를 계속 기
도하고 있다.
12월 31일 금년의 마지막 주일예배는 모 교회인 광주계림교회에 아내와 함께 가서 드렸다. 전날 광주에 가서 이재식 집사를 만나 이집
사의 차로 망월동 부모님들의 묘에 가서 성묘를 하고 점심을 먹은 후, 요양원에 계신 처이모를 방문하고, 나주 이집사의 아파트에 가
서 1박하고, 송년주일 예배를 모 교회에서 드린 것이다.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의 반가운 마중은 흥분을 야기할 정도로 신나는 만
남을 만들어 주었다. 2015년 11월 1일 주일 예배를 나 혼자 광주를 방문했을 때 계림교회에서 드린 후, 2년 만에 간 것이기에 아내와
나도 반가움이 넘쳤다. 아내는 2015년 7월 26일 주일에 광주에 갔을 때 간 적이 있었다. 교회가 포함된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교회를
새로 건축하게 되어 그 마무리 단계에서 신축 성전에서 임시 예배를 드리는 첫 번째 주일이기에 의미도 있었다. 오후에 수원으로 돌아
오면서 아내가 신나는 여행을 했다고 했다. 나도 좋았다. 내 교회만 같은 계림교회에 더 자주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눌 수도
있었다. 금년의 마지막 날이 주일이고 그 주일을 즐겁게 보낸 감회가 상당히 오래 간직될 것 같다. 새해에는 더욱 우리에게 좋은 일이
많기를 기대하면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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