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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발발과 칠천량해전
☎ 정유재란의 발발
1592년 4월13일 임란이 발생하여 일사천리로 북진하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옥포에서 첫 승리(1592.6.16)를 하고 이어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육지에서 저항이 강해지고 명나라에서 원군이 와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1593년 일본은 화해를 요청해와 휴전을 한다. 그 뒤 일본은 한국 분할과 명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해와 이를 거절하자 일본은 다시 재침을 한다. 1597년2월 600여척의 전선과 14만명의 병력으로 부산포를 재침한다. 이순신의 백의종군과 원균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1592년부터 1597년 남해 해상에서 15여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왜선 300여척을 파손하고 일본 수군을 궤멸시켰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왜군의 간계(奸計)와 조정의 무능으로 1597년 2월16일 서울로 압송된다. 4월1일 풀려나 권율휘하에 들어가 백의종군한다.
원균은 1592년 2월 경상우수영을 맡아 오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그 휘하에 장수가 되어 항상 불만이 있었다. 임진왜란 중간에는 해상이 아닌 충청도 등에서 육지에서 근무했다. 이순신이 하옥되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이어서 권율과 조정의 성화에 못이겨 부산해전에 참여했다가 칠천량에서 패전하고 고성 춘원포에서 생을 마감한다.
칠천량 해전 요약
1597년(선조 30)에 발생한 정유재란중 원균(元均)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게 패한 해전.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2월에 조선을 재 침입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무고로 하옥되고, 대신 원균이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했으나, 패하여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을 불태워 잃었다. 이에 도원수(都元帥) 권율은 원균을 불러 곤장으로 벌한 뒤 급히 한산도 본영으로 돌려보냈다. 본영에 돌아온 원균은 7월 14일 부산의 일본 전선을 급습하기 위해 3도수군의 전선 160여 척을 다 출동시켰다. 그런데 부산진포구의 일본 수군은 미리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란작전을 유도했다. 게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어남에 따라 조선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목표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간신히 가덕도로 돌아왔는데, 여기에서도 일본 병선 500여 척의 추적을 받고 거제도의 영등포로 후퇴했다.
조선군은 밤에 보급품을 구하려고 영등포에 상륙했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복병에게 급습을 당하여 약 400명을 잃고, 배를 타고 칠천량으로 후퇴하여 포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15일 밤에 도도·와키자키·가토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의 수륙양면기습작전에 말려들었다. 원균은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접전했으며, 경상우병사 배설은 전세를 보고 있다가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갔다. 원균은 끝까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하여 결국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도망쳤고,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죽은 조선 수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해전으로 3도수군통제사인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가 전사했다. 이로써 조선의 3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일본함대는 서쪽 해상을 향해 쳐들어가 일본군의 남원 및 진주로의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이 패보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흩어진 병력과 배를 수집·점검할 것을 명했다. 같은 달 22일에는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군절도사 겸 3도통제사로 임명햇다.
원균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다 고성군 춘원포라는데 상륙하는 바람에 살해당하고 배설은 한산도로 이동하는 바람에 12척의 배를 건진 것이다.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전선 100~160척, 거북선 3~6척 그리고 병사 1만여명이 죽었다.
칠천량해전에서 패한 원인
첫째, 조선조정이 왜군 첩자 요시라(要時羅)의 반간계에 농락당했다.
조선조정은 요시라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간의 갈등상황과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渡海)에 대한 거짓 정보를 흘리면서 이순신의 파직을 유도하는 반간계작전에 말려들고 말았다. 즉 임금 선조는 간첩 요시라의 정보는 맹신하고 오히려 수군지휘관 이순신의 판단은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파직 백의종군시켰으며, 정유재침으로 다시금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삼도수군통제사를 교체시킴으로써 수군지휘체제를 교란시키는 등 정책적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둘째, 조선수군의 작전지휘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정유재란 초기 부산근해해전, 즉 기문포해전(3월9일), 안골포ㆍ가덕도해전(6월19일), 다대포ㆍ절영도외양해전(7월8,9일) 등 부산진공작전(釜山進攻作戰)에 관한 견해차이가 발생하면서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간의 갈등,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원균과의 갈등, 통제사 원균과 휘하 장수들 간의 갈등이 심각했다. 이로 인해 도원수는 도체찰사를 무시하고, 통제사는 도원수를 무시하고, 장수들은 통제사를 무시했다. 이는 전투를 총괄하는 도원수보다 행정을 총괄하는 도체찰사에게, 수군장수인 통제사보다 육전장수인 도원수에게, 무과출신의 통제사보다 문과출신의 군신들에게 높은 지휘권을 부여한데 있다. 심지어 도원수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에게 곤장을 치는 지경에 이르니 가뜩이나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지휘체제마저 흔들리니 휘하장졸들은 적극적으로 싸우기보다 도망치기에 급급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셋째,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작전술과 통솔력이 부족했다.
원균은 부산근해해전에서 수륙병진전술을 주장했으나 조선조정은 해로차단전술을 주장했다. 그러나 해로차단전술은 임진왜란 때나 주효했지 정유재란 때는 이미 왜군들이 해안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오히려 우리 수군들이 포위당할 위험이 컸다. 바로 이점 때문에 이순신도 부산출정을 거부했고 파직 백의종군 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원균은 자신의 전술을 끝까지 주장하지 못한 채 오히려 도원수 권율에게 태형까지 당하며 불리한 전투에 나서고 말았다.
또한 이순신의 전술은 강력한 총통으로 원거리 공격을 가해 왜군을 제압하고 전의를 상실시킨 다음 근접전으로 분멸하는 전법이었다. 왜군에게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부산근해해전에서는 오히려 조선 수군이 왜선에 너무 근접하여 왜적의 강점인 등선육박전을 허용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원균의 부대는 7월8~9일에 벌어졌던 다대포ㆍ절영도외양해전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12일 한산도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쌀을 씹어가며 항해하던 14일, 목마름을 해결하러 가덕도에 올랐다가 매복중인 왜군의 기습으로 400여명이 몰살당하는 가운데 15일에 가까스로 칠천량에 도착했다.
근 3일간 굶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거친 풍랑과 싸웠으니 조선수군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하지만 휴식은커녕 16일 새벽 새카맣게 몰려오는 왜선들, 이미 심신이 탈진하고 전력이 바닥난 조선수군에게 칠천량해전의 참패는 예고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아, 이로써 우리의 님 이순신이 지난 5년 동안 지켜온 남해의 제해권은 왜군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남해를 장악한 왜놈들은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정유재란 최대목표였던 전라도, 조선수군과 의병들의 최후의 보루였던 전라도를 짓밟으니 오호 통재라! 칠천량해전, 조선수군의 무덤이 된 저 바다가 원망스럽고, 쳐다보기만 했던 저 하늘이 원망스럽고, 조선을 이끌었던 조정이 원망스럽다. 저 칠천량해전 기념비 옆에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 충청수사 최호 장군의 동상이라도 모셔 영혼이나마 위로해드렸으면 좋겠다.
+++++++++++++++++++++++++++++++++++++++++++ < 칠천량 해전 답사기>
칠천량해전 전적지를 따라 가보자
장목면 율천(율포)-구영(영등포)-송진-장목-칠천연육교-금곡-옥계 칠천량해전기념관-연구리 화전산-대곡-송포-역개(옆개해수욕장)-어온리 장곶-칠천도 연육교 (총 km)
이영남장군이 관장했던 율포진
임진왜란 시 해전이 있었던 곳이기에 이곳에서부터 출발한다. 거가대교를 지다다 보면 대금.외포 표시판을 보고 나오서 율천마을로 가면 된다. 성의 형체는 어느 정도 남아 있다.
-1450년 木柵을 설치하고 율포진을 두었으며 1470년 율포성을 쌓고 거제7진의 하나로 栗浦堡를 설치하고 1494년 權官 신석산이 부임하여 왜인 14명을 체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는 이영남장군이 권관으로 부임하여 임진왜란 시 해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경상우수사 원균의 특사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특사로 파견되어 3일 밤을 빌었다는 일화도 있다. 율포진은 1644년 동부 가배로, 1688년 동부 율포로 전전하다 1895년 혁파(革罷)하였다. 1592년 6월7일(양력7월15일) 율포에서 왜선 1척을 나포했으며 칠천량해전 때는 침입을 받았다.
거제에서 가장 오래된 진의 하나인 구영등진을 지나
율포(율천을 지나면 관포와 궁농이 나오고 거가대교 전망대가 나온다. 하유에 있는 거가대교 전망대는 야간에 불거리가 있고 하유바닷가는 아침 일출 대 장관을 이룬다. 전망대에서 처다보면 저도와 중죽도 대죽도가 보이고 거제와 부산을 잊는 사장교가 그 위엄을 자랑한다. 그 밑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침매터널이 있다.
침매터널을 빠져나오면 가덕도이다. 지금은 거가대교가 개통되어 지금은 우리나라 동남부의 젓줄이 되고 있다. 그러나 임란 시는 뼈아픈 장소이다. 조선수군은 부산포 방향으로 3차 출동을 하며 별다른 성과도 없이 돌아오다 가덕도에 물과 땔감을 구하려 잠간 들른다. 그러나 매복하고 있던 일본병사들이 기습하자 400여명의 부하들을 잃어버리고 영등(현 구영)에 도착하여 물과 땔감을 구하려 갔으나 역시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쫓겨 칠천도로 돌아온다.
영등(현 구영)에는 성이 2개 있다. 하나는 마을 뒤편에 있는 조선 평지성(1470)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영리 뒷산인 대붕산 기슭에 있는 왜성이 있다.(1593. 11월, 도진의홍)거제도 진은 1470년 7진이 형성되기 이전에 동에는 옥포진, 남에는 가배진, 북에는 영등진(구영)이 있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30년대로 추정된다. 1594년 10월1일 장문포 해전이 있기 직전에 영등포 전투가 있었다. 이곳에는 왜적이 200여채의 집을 짓고, 뒷산에는 나무를 베고 땅을 깎아 토성을 쌓았으며, 선창에서 가리포까지 도진의홍 등 6,000여명이 장기전에 돌입하고 있었다. 10월1일 아침에 출항하여 항전을 요구했으나 모두 산속으로 도망가고 한 놈도 항정하지 않았다. 해전이라 하기는 뭣하지만 그래도 작전을 벌리고 군사를 동원했다.
-영등왜성: 구영뒷산 kt기지국 주변에 있으며 흔적이 약간 남아 있다. 도보15분 -구영등성: 마을 뒷편에 있으며 그 형체가 대부분 남아 있다. 도보5분 거제도에 있는 성은 오아포(가배), 영등포성, 옥포성이 가장 먼저다. 1430년 오아포에 수군 주진을 두고 영등포 옥포에 만호를 둔 것으로 보아 1470년에 성이 축조된 것이 아니고 훨씬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사료됨.
양파의 고장 송진을 지나 장목포진을 지나
황포에서 송진을 오다 보면 골프장이 보이고 양파재배지로 이름이 난 송진마을이다. 송진은 일제강점시대 러일전쟁 시 일본군이 승리하여 세운 전승기념탑이 있는 곳이다. 거제도에는 취도와 송진에 전승기념탑이 있다. 송진마을에 주차를 하고 옛 송진초등학교 뒤편으로 가면 일본군 전승기념탑이 있다. 비석은 거제시청에 보관중이고 기단부만 남아있다.
다시 몇 분오다 보면 장목이다. 장목의 옛 이름은 장문포이다. 임진왜란 시 이곳에는 2개의 왜성을 쌓고 일본군이 진을 치던 곳이다. 이순신장군도 2차에 걸쳐 전투를 했으나 성과는 별로 없었다. 거제도 장목면에는 왜구들의 소굴이었는데 1593년에 축조된 장문포왜성( 군항포왜성), 송진포왜성(농암산왜성), 영등포왜성 3곳이 있는 곳이다.
-장목진 객사: 장목중학교옆에 있다. 걸어서 5분 1592년 건립.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목진객사에서는 이순신과 이영남(율포권관)이 전략을 숙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장문포왜성: 일명 군항포왜성이라고 하며 차로 갈 수 있다. (도진의홍1593.11) -송진포왜성: 일명 시루성이라고 하며 장목 농바위에 있다 걸어서 15분. 길이 험하다. (도진의홍1593.11) -장문포해전; 장문포해전(1594.10.8)육해군공동작전: 통제사 이순신, 육병장 곽재우, 충용장 김덕령 상의하여 수륙합동작전수립. 外叱浦 또는 吾非叱浦에 진입 공격.1594.10.15 2차공격 및 1597.2.23 장문포에서 배를 띄우다. 이순신과 원균이 참전했으며 왜선 2척 격침시킴.
1595.11.2 장문포에는 조선인과 왜구들이 같이 살고 있었으며 조선인의 집은 6백여호에 달했다. 1592.11.2 영등포 장문포 소진포다 불타 텅비어 있었다. 1594.10.15 장문포에는 5~6천명의 왜군이 있었으나 지금은 2~3천명이 머물고 있다.
더디어 칠천도에 도착하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이 칠천량 연육교이다. 몇해 전에 세워진 이 다리로 칠천도는 이제 섬이 아니다. 섬이란 배로 다닐 때가 섬이지 다리를 놓으면 섬으로서의 이미지가 사라진다.
칠천도는 거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일주도로가 되어 있고 곳곳이 양식하는 곳이며 고기가 많이 잡혀 낚시꾼이 붐비는 곳이다. 근자에는 웰빙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마라톤 연수지로 자전거 하이킹 도로로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칠천도에는 임진왜란 시 중요한 지역인가?
칠천도는 삼포왜란 시 (1510년) 왜인들이 수백 척의 배로 칠천량을 지나 하청에 도착하여 약탈을 일삼으니 거제 현령 오세한이 관군을 이끌고 가 기습하여 전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고려 성종 2년(983)에는 목장을 두어 黑牛와 赤馬를 방목하던 곳이며, 1910년대에는 외인들이 몰려와 멸치를 잡던 곳으로 번창했던 곳이다. 그리고 칠천도의 옛 이름이 溫泉島라 하여 따뜻한 물이 나는 곳이라고 했는데 아직도 온천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칠천량은 묘박지인지 정박지인지 분명하지 않고 그 지명도 명확하지 않다. 영등포 해전이나 장문포 해전 칠천량 해전에서 보면 한산도에서 출발하여 칠천량에서 하루 밤을 자거나 장문포해전에 참가하고 칠천량에서 묘박(錨泊)을 하였다고 한다. 정박과 묘박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없으나 정박이란 배를 부두에 정박하고 육지에 내려 쉬거나 배를 수리하는 곳을 말함이며 묘박이란 그러한 시간이 없을 때 바다 한가운데 닻을 내리고 잠간 휴식하는 것을 말함인가 아리송하다.
묘박이란 고속버스 휴게소과 같은 의미로 임시로 닻을 내리고 정박 중인 것을 보고 말함인 것 같다. 한산도의 중간 기착지로 칠천도가 묘박지라면 앞이 훤히 보이는 옆개가 아니라 蓮龜나 금곡일 가능성이 크다.
어느 자료에 보아도 칠천도 조선수군의 정박지로 기술한 곳이 없으며 칠천량 해전 시 거북선 3~5척이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 정박지가 어디인지 알 길이 없다. 칠천도가 임진왜란 시 수군의 중요한 묘박지라면 유적이나 유물이 있을법한데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몇 해 전 거북선을 찾기 위해 해군 탐사선이 총동원되어 수색을 했으나 아직 배쪼가리 하나도 건져내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유물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를 해본다.
묘박 錨泊 배가 닻을 내리고 머무름. ( 고속버스 휴게소) 정박 碇泊/渟泊 배가 닻을 내리고 머무름 (고속버스 터미널)
칠천도의 옛 지명을 보면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곳이 많은데~~~
하청면 연구리에는 금곡, 옥계, 연구, 곡촌 등 4개 마을이 있다. 연구리도 거북 구(龜)를 써서 거북선과 관련된 지명임을 알린다. 금곡마을 화전산(花田山)은 당시 조선수군이 잠복해있던 곳으로 가마솥에 밥을 지어먹던 곳과 수군에게 소를 공급하던 푸줏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피처럼 붉은 바위가 있는데, 왜군에 희생된 조선수군을 상징한다고 했다. 각시골은 부녀자들이 우리수군들을 위해 부식을 준비했던 곳이고, 처녀골은 조선수군이 전멸했을 때 왜군이 상륙하자 처녀들이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칠천량 해전의 격전지가 옆개(역개)라고 하는데 이는 조선수군의 시체가 널브러져 역겨운 냄새가 난다고 하여 지운이름이라고 한다. 역사적인 자료는 없고 다만 口傳으로 전해올 뿐이다.
칠천량 해전의 일번지, 그 전적지를 찾아~~~
칠천도를 가려고 하면 연육교를 건너야 한다. 건너기 전에 하청면 명사들의 시비가 즐비해 있고, 다리 입구에는 칠천량해전 기념탑이 있다. 그 다리 위를 걷다보면 바다 중간에 작은 등대와 섬이 보인다. 일몰 때에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 섬을 용의치와 매미섬이라 한다.~~`전설따라 삼천리
아주 먼 옛날 천년된 용과 매미가 바다 위에서 하늘나라로 승천하기 위해 싸움이 붙었다. 용의 입에서 시뻘건 불꽃이 품어져 나오고, 매미의 눈에서는 살기 서린 광채가 나왔다. 서로 으르렁 거리면서 불꽃을 튀겼고, 그 주위에는 안개가 지욱하고 번갯불 같은 섬광이 번득거렸다. 이 광경을 본 마을 사람들은 기겁을 하여 방문을 걸어 잠그고 떨고 있었다. 싸움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지만 판가름이 나질 않았다. 남의 일에 참견을 잘하는 마을 여인이 용과 매미의 싸움이 오래 가는 것이 못마땅하였던지 부둣가에 나와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미친 듯이 소리치는 여인의 소리에 부정을 탄 용과 매미는 승천을 하지 못하고 바다에 떨어져 섬이 되었고, 여인은 그 자리에서 돌부처로 변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돌부처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용과 매미는 그 한을 풀지 못해 날씨가 좋지 못했을 때에는 바다 위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킨다고 한다. 그럴 때는 천둥번개가 치고 안개가 자욱하여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이 무섭다고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다리를 건너왔다. 이곳이 長串이다. 칠천도 연육교 밑에는 분위기 있는 카페 ‘슈만과 클라라’가 있고, 그 바로 옆에는 거가대교로 가는 칠천도 크루즈 선이 있다.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이 옥계(玉笄)마을이다. 옥계마을은 바닷가로 벋은 작은 언덕이 있는 이 등을 옥녀비녀등이라 한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씨릉섬이라는 길죽한 섬과 북을 닮은 북섬이 있다.
~~ 전설다라 삼천리 ‘옥녀봉과 옥녀 그리고 씨릉섬~~
태고 때 하늘의 옥황상제 달이 죄를 짓고 칠천도에 내려와 올라갈 날만 기다리다 지쳐서 산이 되었다. (옥녀봉) 옥녀가 내려와 세월을 보내기 위해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렸다. 그럴 때 용왕신이 나와서 북을 치고 함께 즐거워했다고 한다. 옥녀가 거문고를 탈 때 씨릉씨릉 소리가 났다고 하여 씨릉섬이라 하고, 용신이 북을 쳤다고 하여 북섬이라고 한다.
옥계는 칠천출장소와 농협이 있는 중심마을로 몇 년 전 까지만 하여도 거북선 탐사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다. 지금도 탐사선은 운행은 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고 있다. 그리고 옥녀 비녀등에는 새로이 칠천량 해전 기념관이 건설 중에 있다. 지금은 건물은 완성되었고 실내 장식만 남아 있다 아마 2013년5월중에 개관할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칠천량 해전 막바지 격전장인 개인만으로 칠천도 화전산과 해안 천마산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칠천량해전기념관과 화전산을 돌아보며~~~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이 옥계(玉笄)마을이다. 옥계마을은 바닷가로 벋은 작은 언덕이 있는 이 등을 옥녀비녀등이라 한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씨릉섬이라는 길죽한 섬과 북을 닮은 북섬이 있다.
조선수군은 한산도에 본영을 두고 있었으며 진해만과 거제도는 왜군이 호남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간 지역이기에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거제도의 전적지는 송미포, 옥포, 율포, 영등포, 송진포, 장문포, 칠천도, 견내량, 적도, 견내량 등이며, 진해만 일대는 합포,적진포, 당항포, 남포, 안골포, 웅포, 증도, 고리량, 저도, 진해, 읍천포, 가덕도, 다대포 등이다. 이 일대는 이순신 함대가 가장 많이 기동했던 곳이다.
그 중에서 칠천도는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접하고 있었다. 장문포해전이나 영등포 해전 시 이순신함대가 정박한 곳이 온천도(칠천도)이며, 웅포해전 시 한산도를 출발하여 온천도에서 1박하다.
칠천도 어느 지역에 이순신 함대의 모항이 있었을 것인데, 그 지역이 명확하지 않다. 지형상으로 보면 외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정박을 해야 하니 금곡, 연구, 대곡으로 추정해 본다. 지금 건립 중에 있는 옥계 기념관은 역사적으로 이곳이 조선수군의 모항(母港)이라는 역사적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고, 입지적 조건에 맞기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칠천량 해전은 옆개해수욕장 부근에서 시작하여 칠천연육교를 지나 화전산과 천마산 지점에서 최고의 격전이 벌어지고 수세에 밀린 아군은 고성쪽으로 도망가고, 일부는 한산도로 도주하였다.
원균은 고성부군 춘원포에서 왜군과 사우다 전사하였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은 갑옷을 입은채 물에 뛰어들어 수장되고 169여척의 전선과 1만여명의 조선군은 몰살을 한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선12척을 이끌고 한산도로 도망을 간다. 이렇게 하여 한만은 칠천량 해전은 막을 내린다.
칠천연육교-옥계-금곡-연구-대곡-송포-옆개해수욕장-물안-어온-장곶-칠천연육교 한바퀴도는 데는 약10km이며 시간은 20여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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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도
칠천연육교 앞에 있는 표지판
연구리는 거북귀자를 쓴 것으로 보아 거북선과 관련이 있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거북선 정박지가 이곳일 가능성은 있다.
칠천량에서 진해쪽으로 다니는 카페리호, 그러나 계속되는 적자로
두달전 중지되었다.
칠천도 옥계에 세워지는 칠천량해전기념관 금년5월 개장예정
칠천량 해전의 마지막 결전지 칠천도 화전산과 덕곡 천마산의 좁은 해협
칠천도 연육교에서 바라본 칠천량 , 저 멀리 용의치와 매미섬의 보인다.
칠천량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실시된 칠천량 마라톤 대회
칠천량 해전을 따라 왕복하는 칠천도 크루즈선
낭만이 줄줄 흐르는 슈만과 클라라, 칠천도 연육교 아래에 있음.
아담한 풍치를 자랑하는 칠천도 초등학교
섬안에 섬과섬 즉 거제도는 큰섬, 칠천도는 작은 섬, 그 밑에 조그마한 황덕포
영등성에서 발견한 일본군 비석
칠천량 해전 부근에 있는 대나무 공원,
율천에서 영등가는 중간에 있는 관포 수협 어판장
장문포 (장목)에 있는 대규모 회센타
첫댓글 임란 해전사와 현대의 모습을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