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아무도 없는 집에서 마음 놓고 펑펑 울었다.
수년 전 아이들은 둘 다 출가를 하고 아내와 둘이 살고 있다. 오늘 아내는 친하게 지내는 자매님들과 함께 공주로 여행을 갔다. 새로 복원된 백제 사비성도 둘러 보고 꽃 구경도 하고 단풍 구경도 하고 이튿날에는 천호 성지를 들러 성지에서의 신앙을 체험하고 온다고 하였다. 1바~악 2일!(버라이어티 쇼 분위기는 아니고…)
나는 그 동안 밀렸던 글 쓰는 작업을 하려고 사람 만나는 일정을 잡지 않고 집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아침 기도(성무일도)를 마치고 아내가 준비해 두고 간 열무 김치 잎 사귀, 된장, 고추장과 찬밥을 양푼 그릇에다 슥슥 비벼 먹고 모 방송국 프로그램인 ‘아침마당’ 이 막 시작되는 시각이었다.
남자 아나운서와 여자 아나운서가 약간은 침통한 표정으로 눈물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 닫게 해 주는 주인공의 유족들을 모시고 고인에 대한 못다한 이야기를 들어 본다고 하였다. 잠시 영상 화면을 감상하고 진행하겠다는 멘트가 있은 후, 화면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어 있는 그림과 함께 ‘울지마 톤즈’라는 자막 아래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라는 자막이 나왔다. 나는 살짝 긴장과 흥분을 한 상태로 텔레비전의 영상을 보았다.
2010년 1월 14일 신부님께서 대장암으로 선종하셨을 때, 나는 직장에서 퇴근하다가 라디오 뉴스를 통해 이태석 요한 신부님의 죽음과 활동내용을 듣고 ‘아주 훌륭한 신부님이셨구나’라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울지마 톤즈’라는 제목으로 수단의 톤즈에서 2001년에서 2008년 11월까지 8년 넘게 봉사하신 신부님의 생활이 다큐 영화로 제작되어 개봉관에서 상영되었으며 이 영화를 본 아내의 친구가 아내에게 영화를 꼭 가서 보라고 권유를 하여 영화관람을 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아침마당 진행자와 출연자들간의 대화 중에 방송국 측에서 간간이 보여주는 영상을 보면서 사제로서, 의사로서, 건축가로서, 음악가로서, 학교 선생님으로서 봉사하신 이태석 요한 신부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유족들(어머니, 누나, 형님(이태영 신부님)과 수단의 톤즈에서 한달간 같이 생활했던 친구 신부님(박진흥)을 모시고 들어 보는 이태석 신부님에 대해 더 많이 신부님을 이해 할 수 있었다.
특히 이태석 신부님의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 부분에서는 펑펑 울었다. 눈치 볼 사람도, 체면 차릴 사람도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이라 정말 마음 놓고 펑펑 울었다. 이태석 신부님 어머님의 말씀 내용은 이랬다.
“10남매 중 9번째인 우리 신부님은 자랄 때부터 유독 사랑이 많았습니다. 우리 신부님이 초등학교 시절에 자기 누나와 고아원 앞을 지날 때는 그 곳에서 물끄러미 고아들을 바라보며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고아원을 차려 고아들을 볼 보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우리 신부님의 누나가 운영하는 양장점에 들어 와 바늘과 실을 달라고 하더니 작은 손으로 거지의 옷을 꿰매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 신부님 9살 되던 해에 남편이 사망하여 혼자 몸으로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삯 바느질을 하면서 10남매를 키웠습니다.”
“변변히 해 준 것도 없었는데 의과대학을 입학하였습니다. 의사가 되면 자기 앞길은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뻤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제대 한 후 집에 와서는 신부님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반대를 하였습니다. 형도 신부님이고 누나도 수녀님인데 왜 너까지 신부가 되려고 하느냐? 하느님께서 저에게 또 한 사람의 신부를 원하시면 의사 아들의 동생을 신학교에 보내겠습니다. 하느님 이 아들을 신부로 쓸려는 생각은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하느님께 기도로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의사 아들은 자기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광주에 있는 신학교를 갔습니다. 2001년에 신학교를 마치고 살레시오회 신부로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님이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수단으로 가겠답니다. 거기서 몸이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마음이 아픈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치료하면서 그들을 위해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산간 벽지에 가서 그 사람들을 위해 병을 고쳐주고 마음을 달래주는 신부님이 되라고 매 달렸습니다.”
“우리 신부님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어머니!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곳 중에 톤즈라고 하는 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되어 그 곳으로 가서 그 사람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살겠습니다. 우리 신부님은 그렇게 톤즈로 갔습니다. 저는 4월에 구수환 프로듀서님이 만든 스페셜 다큐를 보기 전 까지 그 곳이 그렇게 힘들고 열악한 곳인 줄 몰랐습니다. 그저 가끔 우리 신부님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런 줄 알았습니다. 어미가 걱정할까 보아 그렇게 말 한 것이겠지요.”
“2008년 12월에 몸이 아파 한국에 돌아와 병원에서 대장암 말기의 병마와 싸우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어미인 저에게 항상 웃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투병 중인 우리 신부님을 찾아가면 항상 일어 나 앉아 밝은 모습으로 나를 맞았습니다. 선종하기 4일 전, 병원에 찾아 갔을 때도 문병 후 돌아가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휠 체어에 앉아 병원 문 까지 나와 잘 가라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4일 후에 하느님이 우리 신부님을 그렇게 데려 갔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데려 가지 않고 왜 우리 신부님을 데려가셨습니까? 하느님이 원망스러워 기도를 바칠 수가 없었습니다. 연도만 바치고 있었습니다. 제 가슴이 너무 아파 구멍이 났습니다. 그러다가 보름 후에 제가 다니고 있는 성당의 주임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보면서 하느님이 원망스러워 살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신부님은 우리 신부님이 이 세상에 있으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감당해야 하니까 그 십자가를 내려 놓기 위해 하느님이 요한 신부님(이태석 요한 신부님)을 데려 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평안해 졌습니다. 그 후부터는 예전과 같이 하느님에게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나는 눈물과 콧물이 뒤 범벅이 되고 눈물 때문에 눈이 따가워 아플 정도로 펑펑 울었다.
요한 신부님 어머님의 말씀 중간 중간에 수단에서 한센병 환자들의 피 고름을 닦고 주사를 놓으며 피부가 썩어 문드러진, 썩어서 손가락 발가락이 인 잘려 나간 환센 환자들을 치로하는 요한 신부님의 영상이 간간이 오버래핑 되고 있었다.
요한 신부님의 거룩한 삶에 비해 나는 어떻게 살아 왔나? 순간적이지만 나를 위해, 내 가족을 위해, 좀 더 나은 물질적 풍요를 위해 아등바등 한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눈물을 쏟아 냈다. 요한 신부님 어머님의 가슴이 얼마나 아플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울지마 톤즈’의 나레이션을 맡았던 분(아침마당 프로의 진행자)도 펑펑 울고 있었다. 생방송이라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고 콧물 삼키는 소리만 들린다. 어깨가 들먹이는 그림도 들어 온다. 나레이션을 맡았던 분이라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 신부님에 대한 감동이 북 바치는 듯 하였다. 남자 진행자와 고정 출연자인 여자 방송인이 재치 있게 던지는 질문으로 방송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