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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영상 제목: Galatians in Three Dimensions | N.T. (Tom) Wright | Calvin University https://youtu.be/pkLl1AZ7two?feature=shared
이 영상은 2022년도에 칼빈대학교에서 톰 라이트가 온라인으로 강연한 것이다.
이 강연에서 톰 라이트는 최근에 자신이 출판한 책 갈라디아서 주석을 소개한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를 초기교회의 상황에 근거하여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3차원이라는 말은 입체적이라는 의미도 되고 실제적이라는 의미도 된다.
톰 라이트는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이 설명해 준 방식으로 갈라디아서를 읽는 데서 벗어나서
초기교회의 유대교 상황 속에서 그 서신을 읽으라고 도전한다.
이 영상을 공부하면서 그의 주석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강연에서 특히 내 마음에 도전이 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고,
그 창조가 완성되는 모습을 예언자들이 그려주었으며,
교회는 그 완성될 새 창조를 미리 보여주는 실제 모델이 되라고
부름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새로운 삶, 새로운 연합,
그리고 다른 차원의 도덕과 비전을 가진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주장은 이신칭의의 신학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고 일어나 안일함과 누추함을 떨쳐내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새 창조에 동참하라고 촉구한다.
그의 다른 강연들을 아래에 소개한다:
로마서의 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톰 라이트)
https://youtu.be/hA-e092n9ok?feature=shared
십자가의 의미 (톰 라이트)
https://youtu.be/tOo5fkDkQFE?feature=shared
사도 바울의 삼위일체 신학 (톰 라이트)
https://youtu.be/GuJD3srgkSs?feature=shared
구원에 대한 새로운 설명 (톰 라이트)
https://youtu.be/aX_tPD_UmKg?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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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자막)
톰 라이트의 강연: 갈라디아서
미국의 칼빈대학교 재뉴어리시리즈(January sieres)는 매년 열리는 15일간의 연속 강연입니다. 이 강연은 1988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 시대의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세계시민들에게 문화를 새롭게 할 영감을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이 영상은 톰 라이트가 2022년에 온라인으로 강연한 것입니다. 제목은 ‘갈라디아서의 세 가지 차원’(Galatians in Three Dimension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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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톰 라이트입니다. 저는 영국 옥스포드에 있는 저의 연구실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조금 누추하지만 저는 이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그들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길이 막혔다고 했습니다. 저도 칼빈대학교의 금년도 재뉴어리 시리즈에 오려고 오래 전부터 바랐습니다. 정든 친구들도 만나고 싶었고 특별히 여러분과 최근에 제 연구에 대하여 나누고 싶었습니다. 아쉽게도 판데믹과 항공운항의 취소로 저는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제가 특별히 고맙게 생각하는 분들은 이 행사를 열 수 있도록 뒤에서 수고해 주신 분들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영상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늘 갈라디아서를 선택한 이유는 지난 여름에 저의 새 주석책이 출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책에서 저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으며 더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개신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책입니다.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향하여 찬사하기를 자신의 아내 케이티 본 보라(Katharina von Bora)와 동급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아내 착한 케이티가 루터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갈라디아서 그 자체를 보면, 그 책은 마틴 형제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어떤 점에서는 옳게 읽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가 오해했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 그 주제를 다루지는 않겠습니다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오늘까지도 교회는 갈라디아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육면체를 사각형으로 이해하거나 둥근 구를 원으로 축소하여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시대에게 무슨 말을 했고 오늘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 가지 차원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칼빈대학교의 학생이라면 이미 갈라디아서를 암송하겠지요. 헬라어로 암송하면 더욱 좋겠고요. 여러분 중에 자신이 좀 완고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성경 본문을 찾아서 제가 하는 말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좀 긴 도입부인 첫번째 두 장이 있고요, 핵심 논증을 다루는 중심부에 해당하는 다음 두 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적용을 다루는 마지막 두 장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이나 참고도서 목록, 그리고 학자들의 논의는 제 주석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현재 바울 연구에서 양면성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만약 알고 싶으시다면 저의 2015년에 쓴 책, ‘바울과 그 해석자들’을 보십시오.
고전적인 입장을 소개하자면, 유대 교사들은 갈라디아의 개종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때 바울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으며 율법은 폐지되었으니 너희는 오직 믿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문제는, 바울의 시대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런 율법주의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문제는, 바울에게 마르시온의 관점을 씌워 구약성경이 신약성경과 대립한다고 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신구약 언약의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세번째 문제는, 그런 주장이 간과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임을 강조한다는 사실입니다. 네번째 문제는, 이 전통적인 관점을 관통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을 보면, 그 이전 장에서 행위를 강조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주장했으면서도 바울이 이곳에서 주장하는 바는, 엄격하고 강경하게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다섯번째 문제는, 전통적인 관점이 갈라디아서를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로마서와 통합적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섯번째 문제는, 그 관점이 바울의 핵심적인 용어들의 의미를 무시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용어에는, 믿음을 의미하는 피스티스(pistis), 의로움을 의미하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가 있습니다. 그런 용어는 보통 공동체에서 성실함과 정의로움을 언급할 때 사용됩니다. 그 용어는 구원론의 체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번째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인데요, 갈라디아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라는 말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편지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간단하게 언급됩니다. 로마서와 다른 점이 그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구원에 대하여 주로 다룹니다. 사실 신약성경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도 기독교인의 목적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신약성경의 마지막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까?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오지 않습니까? 구원받은 영혼들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초기교회의 비전이며 바울의 비전은, 새로운 창조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신교회의 개혁자들이 그들의 최선을 다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적인 답변을 중세의 질문에 대하여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중세의 질문 그 자체에 있습니다. 일단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용어의 의미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부활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이 새로운 세상에서 일하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멈추어야 하는 것은, 19세기의 대답을16세기의 질문에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21세기의 대답을1세기의 질문에 대하여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해 봅시다. 여러분은 흔히 말하는 ‘새 관점’에 대하여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관점으로서 반드시 유대인이 되어야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율법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가 아니라 유대인임을 구별해 주는 특별한 표시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할례나 음식 규정과 안식일 준수 같은 것입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뭐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는 저의 주석과 최근에 바울 연구에서 다른 동향들도 다룬 바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소위 종말론적 학파인데요, J 루이 마틴이 이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다른 양상들도 있는데요, 예를 들면, 급진적 새 관점이나 유대교 안에서 바울 같은 것입니다. 이런 그룹의 주장은, 바울은 계속 토라를 준수하는 유대인으로 살았으며 다른 유대인들도 자신과 동일하게 살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율법 조문이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이방인들에게 간단하게 전할 때에 이 모든 생각이 바탕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그것을 논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저의 긍정적인 제안은 제가 보기에는 이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갈라디아서를 새롭게 읽는 것으로서 실제 역사적 상황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어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차원의 갈라디아서’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에 대한 것이며 정치와 신학과 인간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첫번째 차원은, 바울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죽으시고 살아나심으로써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구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5절에서 미래에 올 ‘의의 소망’에 대하여 말했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5장 21절에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것들은 미래의 목표로서 더 큰 틀에서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그 구원이 어떻게 작동되며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교회론으로 구원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세워줍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시라면, 이것이 핵심 요점입니다... 바울이 확신하는 바는, 그 편지의 수신자들은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는 메시아 사건들과 마지막의 완성 사이에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죄를 처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신학은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핵심 주제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중심 논의가 이루어지는3장과 4장을 보면, 초점이 어디에 맞추어지는가 하면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이냐?’하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비유대인과 반유대주의 세계에서는 그다지 흥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세시대와 16세기에는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찬송시를 보면, 성경 이야기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모세와 예언자들을 지나 메시아에 이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약의 이야기가 메시아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점점 분명하게 진행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반대로, 결정적인 본문인 2장의 말미를 보면, 메시아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단절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메시아의 죽음이며 다른 이의 죽음이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이곳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무리 역설적으로 보일지라도, 자리잡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의 백성을 부를 때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시범 프로젝트(pilot project)라고 합니다. 그 새로운 창조의 출범과 함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이 은사로 임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구조를 보면, 시작은 1장 3절과 4절인데, 하나님이 죄를 대속하셔서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6장 15절부터인데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중요한 것은 새로운 창조(καινὴ κτίσις)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요점은 언뜻 보이는 것 같지만, 그 형태를 뒤틀리게 한 것은 소위 묵시론적 해석입니다. 그 요점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서 지금 새로운 창조의 출범 안에서 그것을 힘입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낡은 삶으로 퇴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이제 우리는 두번째 차원, 즉 갈라디아서의 가장 중요한 차원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유대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갈라디아의 개종자들에게 가르치기를, 복음을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그들은 율법의 행위를 지켜야 하며 도덕적 행위를 그들의 믿음에 추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이라는 용어가 올바르게 사용되려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유대인처럼 살게 하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유대교의 관행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어쨌든 모든 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합니다.
저는 최근에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한 적이 있습니다. 방송에서 어떤 전문가가 나와서 파키스탄 정치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는 파키스탄의 정치 상황이 어떤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난 십여년을 지나왔는지 설명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중요한 차이점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는데 파키스탄의 탈레반 운동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운동의 차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그 나라들은 러시아나 서방 국가들, 그리고 중국 등입니다. 그때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이것이 실제 삶이구나! 현실의 어지러운 모습이 이와 같구나!’ 그것은 너무나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운동이며 양극단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율법에 매이지 않는 복음이 한쪽에 있고, 그 반대쪽에 율법주의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결코 간단하게 정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 차원에 대해서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차원과 정치적인 차원, 물론 우리는 신학적인 차원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제가 주석에서 논의했습니다만, 갈라디아서는 터키 남부에 있는 교회에 보내진 편지입니다. 그 교회는 바울에 의해 설립되었고 그 이야기는 사도행전 13장과 14장에 나옵니다. 갈라디아는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의 큰 도시로서 동쪽으로는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편지가 기록된 시기는 바울과 바나바가 시리아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의 회의로 출발하기 직전입니다. 그 이야기는 사도행전 15장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아직도 소수자들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그 근거는 고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제가 주석에서 주장했듯이 그것이 주석학적 입장에서 볼 때 더 합리적입니다.
이제 바울의 개종자들이 마주하던 문제와 그들이 위기를 겪게 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이방인이든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때 만나게 되는 도전은 명백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너희가 우상에게서 돌이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상에게서 돌이킨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살고 있는 세대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차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또는... 밀레니엄 세대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스마트폰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의 시대에 우상은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누구나 우상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우상을 섬겼습니다.
모든 도시나 마을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거주자들이 있었는데요, 하나는 보이는 인간들과 보이지 않는 이들인 신들과 조상들이 있었습니다. 신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주신인 제우스와 헤라, 아테네와 아르테미스 등이 있습니다. 물론 지역을 관장하는 신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신전과 거리의 사원과 집집마다 기호에 맞게 신을 모시는 곳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 있는데, 누군가 신들을 소홀히 대한다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일은 홍수나 기근, 또는 도시에 일어나는 화재입니다. 사람들은 즉시 이렇게 추궁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신들을 섬기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지?’ 우리는 모두 합당한 희생제물을 바쳐야 하고, 제대로 된 기도를 드려야 하고, 매년 또는 매월 있는 축제에 참석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세상에서의 삶은 매우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서 부유한 사람들이라야 사생활을 누리며 그럴지라도 종들이 알려줍니다. 모든 사람은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누가 모임에 나와서 그들의 신들에게 의무를 이행했는지 또 누가 빠졌는지. 사람들은 늘 자기 이웃을 감시하면서 그들을 압박하여 모임에 합류하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초기 교회에 있었습니다. 즉, 첫날부터 개종자들이 버려야 했던 것은 도처에 있는 우상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측면은 현대의 서구 기독교회에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우상에 마음을 빼앗긴 터라 이런 문제에 대하여 의논하지도 않고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도전이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듣고 개종한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그것은 단지 평생 익은 몸이나 생각과 마음의 습관을 끊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을 사회적 부적응자로 낙인찍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 이웃에서 집집마다 포스터가 붙여 있다 합시다.그것은 동일한 정치인을 지지하는 포스터라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한 집에는 그런 포스터가 붙여 있지 않거나 또는 심하면 상대방 정치인의 포스터가 붙여 있다 합시다. 그런 곳이 영국에는 있는데 미국에도 있을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집에는 벽돌이 창문을 깨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더 심해져서 천배나 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안디옥이나 루스드라나 그 외 다른 곳에서 길을 나서서 행렬에 참여하고 희생제사에도 참여하여 지방신을 섬기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한 가정이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은 금방 알 것입니다. 그리고 재앙이 그 도시에 덮친다고 합시다. 그 다음 주간에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로마 시대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제 추가적인 두 가지 특징을 갈라디아서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당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우선, 공동체에 이제 막 들어온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당시에 가장 빨리 성장하던 종교는 시저와 로마제국을 숭배하는 신앙이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그런 제의의 중심에 있었는데요, 도시가 로마의 식민지로 다시 설계되었습니다. 건축물들은 로마의 것과 최대한 유사하게 지어졌으므로 그곳은 새로운 로마라고 알려졌습니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로마의 양식을 형상화했는데요, 그것은 로마의 문명과 법률을 이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스티아(정의)나 디카이오쉬네(정의의 그리스식 이름) 같은 여신들입니다. 그런 것을 세계 구석구석으로 전했습니다. 결국, 시저는 가장 강력한 신으로 받들려 졌습니다. 그가 평화와 자유, 그리고 번영을 세계에 가져다준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하기야 모든 제국들은 다 그런 주장을 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정치와 종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시저에 대한 충성은 예배와 납세 둘 다를 의미합니다. 그리스어로 충성(allegiance)이라는 말은 피스티스(pistis)인데요, 이것은 믿음 또는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충성을 바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면에서 곤경에 빠질 것입니다. 창문을 깨면 깨지는 것입니다. 이유는 종교적일 수도 있고 정치적일 수도 있습니다. 벽돌이 문제가 아니라 직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부인은 개종을 하고 자기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시민종교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것입니다. 개종한 노예의 경우에는 더 가혹한 형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외에도 여러 어려움이 있습니다. 시저는 퀴리오스 코스무(kyrios kosmou), 세상의 주라고 하는데, 그는 가장 우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2세기 중엽까지도 시저의 신상에 향을 바치는 것은 시험의 통과의례였습니다. 폴리갑은 바울 이후에 130년경의 사람으로 서머나의 주교였습니다. 그는 화형에 처해졌는데 바로 그 분향테스트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은 그 사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추가적인 특징입니다. 두번째는 진짜 위험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에서 면제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이 오랜 경험으로 깨달은 것은 유대인들에게 억지로 신상들을 섬기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차라리 죽기를 택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실용주의자들이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깨달은 것은, 이 특별한 민족은 생각하기를, 어떤 이유에서 인지 자기들의 신이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선량한 시민이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았으며 납세도 잘했습니다. 그래서 거래가 성사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신께 기도를 드리되 로마의 황제를 위해, 그리고 자기 지역과 그 관리들을 위해 기도하면 됩니다. 그들은 황제에게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다른 신, 아르테미스나 아프로디테, 제우스 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이 면제받은 것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로마의 이교도 예배였습니다. 그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세 가지 차원에서 당시의 실제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가서 개종자들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명하는 차원들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새로운 관점들과도 다릅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방인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는가?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시민이 루스드라나 이고니온에 살고 있다 합시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신들을 섬기는데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믿고 있다 합시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은 유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 못해 된 것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신을 섬기면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무리가 나타납니다. 그들은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다양한 사회적 계층으로부터 온 사람들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여성들을 포함합니다. 결코 융화될 수 없어 보이는 파편들로 이루어진 그들은 남자들과 여자들, 노예들과 자유민들, 심지어 유대인과 이방인들입니다. 그들도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은밀하게 집회를 열었는데 로마세계는 그런 모임을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이 말하고 제물을 바치며 경배하는 대상은 다른 주(퀴리오스)이었습니다. 그 대상은 다른 바실류스(BASILEUS), 즉 다른 왕이었습니다. 이것들이야말로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었습니다. 그들이 충성하는 대상은 바로 이분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합시다: ‘왜 당신들은 신들을 섬기지 않습니까? 특별히 주님이신 황제를요?’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건 법으로 보장된 것이잖아요. 우리는 이스라엘 메시아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유대인의 면책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주장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우선 그런 주장은 외부인들에게는 납득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이란 말인가?’ ‘어떤 점에서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할 권리를 가졌는가?’ 그들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시민이 아닌가? 안디옥이나 루스드라 같은 도시민이 아닌가? 어쨌든 그들은 결코 유대인일 수 없다. 그들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살지도 않고 그 남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며 그들은 유대교의 관습도 따르지 않는다. 이들이 말하는 기름부음받은 자, 그리스도, 메시아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이게 제대로 된 말인가? 그들이 말하는 기름부음받은 자가 세상의 주인이란 말인가?
가장 마음이 너그러운 시민들도 그들이 비록 황제가 다스리는 광활한 제국에서 살지라도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분노했습니다. 소문은 금방 퍼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서로 긴밀하게 엮여진 작은 공동체에서 서로를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머지 않아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문을 두드리며 조사를 하러 방문할 것입니다. 이처럼 이상하고 망상에 빠진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대하여 더 많이 이야기할수록 누군가는 곧 회당의 지도자를 찾아고 발하러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보시오. 당신들은 우리 가운데서 평화롭게 살고 있소. 당신들은 사업을 하고 있소. 우리는 당신들을 이해할 수 없고, 우리는 당신들이 왜 우리의 일상에동참하지 않는지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을 존중해 왔소. 당신들이 스스로를 지키며 살기에 우리는 그에 맞게 살아왔소. 그런데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요? 이 자들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지 않소? 그래서 일반 시민이 따라야 할 일과 예배에서 면제를 받으려 하지 않소?
회당의 지도자들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도 설교를 할 때 어디서든지 회당에서 먼저 시작을 했습니다. 그의 설교를 열정적으로 들은 사람들 중에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유대인들 주위에 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에 대한 것이라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너무 거슬렸고 신성모독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의 지도자들은 그런 질문을 받고 나서 이처럼 이상하고 정통이 아닌 낯선 무리를 그들의 모임에서 배제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먼저 배제를 당한 무리는 어떤 유대인들로서 물의가 되는 줄 알면서도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시므로 새 운동에 합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회당의 지도자들은 바울을 깎아내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폄하하기를, 이 자는 광신적인 이단의 괴수로서 이상한 것을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 시의 관리들은 그 말을 수긍한 것 같습니다. 그 관리들은 아마 은근히 위협하며 제안했을 것입니다. 회당의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잘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가진 면책특권은 흔들릴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사방에서 대중 앞에서 일어서서 ‘저는 유대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사회의 시스템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경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관계를 좋게 하는 길입니다. 민족적인 경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열정적으로 세운 다민족으로 구성된 교회는 정말로 낯선 것이었고 새로운 존재였으며, 매우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회당의 지도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추종하는 저 낯선 이방인들에게 회당의 훈련에 참여하게 해야 겠어.’‘적어도 겉으로라도 따르게 하는 것이 좋겠어,’ ‘그래야 이방인 관리들이 우리를 추적하는 것을 떼어 놓을 수 있을 거야.’
그래서 회당의 지도자들은 유대인이면서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새로운 이방인 친구들을 설득하여 유대교의 관습을 어느 정도 수용하게 했습니다. 그래야 보기에도 좋고 겉을 그렇게 단장해야 지켜보는 이들에게 잘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요.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공동체는 그런 식으로 지켜보는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무리는 예기치 않게 왔지만 정결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동자들이며 괴롭게 하는 자들이라고 바울이 불렀던 이들이 말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 해결책은 한편에서 보면 매력적이었지만 그것은 진짜 분노를 촉발시켰습니다. 사회적이고 시민의 압력은 쉽게 폭력으로 변합니다. 사회적 압력은 오늘과 같은 문명화된 시대에도 쉽게 폭력으로 바뀝니다.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에 나오는 지침들은 일반화하여 ‘윤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지침들이 준엄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파벌로 나뉘어 논쟁과 다툼, 그리고 심지어 폭력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대항하여 맞서서 싸우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서로 물고 먹는다고 말했습니다(갈 5:15).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봅시다. 바울이 6장에서 책망하는 것을 보면, 할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은 겉으로 좋게 보이려는 것뿐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 목적은 핍박을 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들어맞게 됩니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훨씬 더 복잡하고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에 갈라디아서를 읽는 방식에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훨씬 더 실제 삶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고개를 돌려 보면 다른 차원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디아스포라처럼 사방에 흩어진 회당들이 남아시아에 있었는데요, 그들만이 이런 우려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준엄한 압력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습니다.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거기서 살았으니까요. 바울은 강경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들 중에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이교도들과 이웃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웃들과 다양하게 접촉하고 융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강경파들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것은 제가 보기에 주후 40년대 후반,48년이나 49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로마황제 칼리굴라가 유명한 명령을 내린 지10년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명령은 자신의 신상을 거대하게 만들어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마치 주피터라도 된 듯이 말입니다. 그 신상은 지성소에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말입니다. 다니엘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책은 1세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습니다. 거기에 요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로마인들이 결국 바로 그 혼돈의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었습니다. 강경파 유대인들이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이교도 혐오와 우상숭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로마인들은 그들에게 분명하게 가장 나쁜 이교도였습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칼리굴라는 그 명령이 실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일에서 표징을 읽었습니다. 이미 반란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60년대 후반에 일어난 재앙같은 전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위기가 다가오고 있고 사람들이 다가오는 그 위기를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들은 일어나 싸워서 그 어두움의 세력에 맞서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 유대인이든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에 충실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오염으로부터 자신들을 꼼꼼하게 지키는 길이었습니다. 그 오염은 하마톨로이(hamartoloi)로부터 오는 것인데, 이방인 죄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속에 대한 약속은, 많은 사람들은 그 날이 어느 때에도 올 수 있다고 믿었는데요, 그 날이 지연되거나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큰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이 율법에 충실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유대인들도 율법에 충실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구속과 자유와 평화를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강경파들, 예를 들면 다소의 사울 같은 사람들이 율법에 충실한 이유는 도덕적으로 인정을 받아 천국에 가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 이스라엘로서 하나님께 충실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이 바란 것은, 마침내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구원을 주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율법을 가볍게 여기거나 이방인 죄인들과 친구로 가까지 지낸다면 그때 시작되는 일이 공동체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그런 이유로 15년 전에 사울 자신이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떤 전갈이 예루살렘에 되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최선을 다하여 노력을 기울여 멀리 떨어진 공동체들도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게 하려고 했는데, 혼란스러운 일이 디아스포라에서 발생했습니다. 다소의 사울이, 이제는 바울로 그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 모든 일에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권하여 율법을 가볍게 여기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죄인들을 가르는 중요한 담을 허물어 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기독교인인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이미 지방에서 일어난 예수운동에 대하여 의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거스려 말하고 율법을 폄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이웃에 사는 기독교인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들이 너희들의 친구냐?’고 물었습니다. ‘너희는 선한 유대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저 밖에 있는 자들과 한패가 아니냐?’ 그들은 신명기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방인 죄인들과 형제가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그림을 종합해 보겠습니다. 로마시민들의 위협이 저 멀리 디아스포라에 있었다면, 유대인들의 위협이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야고보에게서 와서 시리아 안디옥에 도착했다고 갈라디아서 2장에서 언급합니다. 그 일로 인하여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교제를 하던 것을 중단했습니다. 바울은 그때 베드로에게 맞서서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사람들이, 적어도 한 사람이 갈라디아로 온 것 같습니다. 거기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권면하러 온 것입니다. 그들을 시켜 이방인 신자들에게 압력을 가하려는 것이지요. ‘너희의 이방인 친구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라!’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곤란하게 될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해 그들 자신의 악의적인 말을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입니다: ‘그 자는 예수님의 원래 제자가 아니다. 그가 아는 것은 모두 베드로 같은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외면하는 작자라구!’ ‘그런 이유로 아마 그는 안디옥에서 베드로와 결별한 것일 거야!’ ‘결국 바울도 군중을 선동하는 사람이야!’‘인기에 목매는 그런 부류라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을 알고 있지.’‘그런 사람은 정말 조심해야 해!’ ‘그런 사람은 상황에 따라 자기 입장을 이리저리 바꾸는 사람이지.’
이 모든 그림을 여러분의 머릿속에 담으면 갈라디아서는 입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우여곡절을 말입니다. 바울이 갑자기 비수같은 말로 어떤 숨은 대적자를 찌르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가 비방하는 자들을 어떻게 반박하며 현재의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그다지 교묘하지 않는 논쟁을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훈련을 통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세번째 차원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했을까요? 기본적인 대답은 물론 갈라디아서 전체가 그 답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운 점은 이전에 우리가 읽던 방식을 제쳐두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오래된 주석을 썼습니다.
그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살펴볼 것은, 동일한 요점으로 돌아가는 것인데요, 바울은 서신의 시작 부분과 끝나는 부분에서 주장하기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의 악한 세대가 결정적으로 패배했으며 예수께 속한 모든 사람들은 거기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종말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잘못 짚은 대목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세계가 이제 다른 곳이 되었기 때문에 된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계획에 의하여 몇몇 사람이 구원을 받아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세계가 이제 새로운 곳이 되었으며 바로 그 새로운 곳의 일부분은 ...아브라함은 마침내 전 세계에 자신의 새로운 가족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이 항상 약속하시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족은 결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규정될 수도 없고 규정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 대신에 그 가족은 약속된 새 창조를 미리 구현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교회론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의 핵심 주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전 세계를 아우르는 가족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려면 모세의 율법은 이제 치워져야 하는데, 그것이 나쁜 것이라서 이제 기쁘게 폐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이 선한 것이며 그 임무가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장이라 제가 한번 더 말하겠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제 바울에게는 폐지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나쁜 것이라서 기쁘게 폐지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선한 것이지만 그 임무가 이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비판하는 방식은 루터의 방식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기억하십시다. 그것은 어떤 공로를 얻는 것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묵시적인 의미입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이해하는 묵시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때가 차면,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아들과 성령을 보내셔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출애굽 이야기입니다. 즉, 노예들이 어떻게 마침내 구출되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노예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며 아브라함의 약속 성취가 유산으로 그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비교종교학에 대한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언제나 새로운 관점이 빠지기 쉬운 위험은 비교종교학입니다. 비교종교학이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기독교라고 부르든지 유대교라고 부르든지, 어느 쪽이 좋은지 알아보자는 주장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적인 종말론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유대교의 주장입니다. 그 주장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성경이 계속적으로 약속한 것이지금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라의 멍에를 메는 것은 그 중에 하나가 할례를 받는 것인데요,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메시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어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악한 세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바울의 결론은 단호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의 끝부분을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부분이 편지의 진정한 목적에 해당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괴롭게 하든지, 너희를 박해하든지, 또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면,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보듯이, 타락하게 하는 권세는 멈추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의 도전이었습니다. 단지 할례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을 무리에서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논의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의롭다 함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진정으로 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누가 정상적인 유대인 면제를 진정으로 주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죄를 용서받은 가족일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은 기술적인 용어로 하마톨로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메시아의 가족에서 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께서는 십자가에서 그들의 죄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긍적적인 요점은, 이제 메시아의 모든 백성들은 현재를 살아가되, 궁극적으로 완성될 미래의 모습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하나의 가족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로 이루어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도 아니고, 노예나 자유인도 아니며, 남자나 여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
여러분이 교회를 나눈다면, 특별히 인종을 기준으로 가른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낡은 시대가 인간의 분열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비극적인 일이긴 합니다만, 16세기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개념인 천국에 들어가는 법에 대한 생각은 지난 여러 세대 동안 오면서 이렇게 하나되라는 교회론적 명령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에서 긴 도입부를 통하여 이에 대한 길을 완벽하게 열었습니다. 그는 주의깊고 노련하게 이런 잘못에 대하여 대답합니다. 그의 긴 도입이 절정에 이른 것은 이전 시대에 가장 주목을 받은 진술입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2장 11절부터 21절입니다.특별히 19절, 20절, 21절입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표현으로서 그가 안디옥에서 베드로에 대하여 맞섰을 때 한 것입니다. 자신과 이방인 신자들을 구별함으로써 베드로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방인들도 이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즉, 공동의 식사에 우리와 함께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신 말씀은, ‘이방인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그들도 이제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에 온전히 적용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 공동체에서는 이런 의미입니다. 베드로 당신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르는 담벽을 다시 세우려 한다면, 비록 당신이 전에 그것을 무너뜨리기는 했어도, 그렇다면 당신이 인용하는 바로 그 율법이 당신을 정죄할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고 바울은 19절에서 말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나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노라! 이는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함이다. 이 구절이 바로, 소위 급진적인 새 관점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화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늘 약속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일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께서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죽으시고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내가 아니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사실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신분을 만드셔서 믿는 유대인에게나 믿는 이방인에게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신분으로 새롭게 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여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선물로 주어지는 새로운 신분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단 하나의 신분으로서 예수님께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선물이지만 다음과 같이 하면 그는 그것을 거절하는 셈입니다. 잠깐동안이라도 그가 율법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짓는 표시로 삼을 때입니다. 그것이 21절에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겠다. 그분의 넘치는 사랑과 함께.’
이 모든 것은 강력하고 절정적이고 결정적인 진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0절이 그것입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바울은 육신적으로 말하면 여전히 유대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분의 가족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지금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분이다.’ 수사학적으로 이는 결정적인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진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신학과 경건을 하나로 엮어냅니다. 새로운 신분이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랑의 선물입니다. 성경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언약적 사랑입니다. 신명기나, 이사야, 그리고 시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백성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메시아의 구원하는 죽음입니다. 이런 이야기와 함께 갈라디아서 2장은바울 자신의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그것은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바울의 대답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중심 논의를 다루기 위해 3장과 4장으로 나아갑니다.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여 5장과 6장을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만, 여러분이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핵심은... 지역에서 선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들은 회당 사람들로서 압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자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토라를 엄격하게 지키는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바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입니다. 그는 그런 사람들과 전혀 동떨어진 인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좋게 보이려고 하며 박해를 모면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2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상은 바울에게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자신도 세상에 대하여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역시 장차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이 모든 이야기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합니까?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사고,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다시 한번 세 가지를 매우 간단하게 언급하겠습니다. 시간의 제약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가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은 종말론과 교회입니다. 교회에게 기대되는 것은 작은 실제 모델이 되어 하나님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인데,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모든 피조세계를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이사야 11장과 같은 비슷한 본문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말입니다. 이런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기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약속은 플라톤식의 도피주의가 아닙니다. 그렇게 비물질적인 천국에 가리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부름받은 목적은 하나님이 만드실 이런 실재를 미리 보여주는 모델이 되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장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런 장벽은 인종적 장벽이며 또한 성별의 장벽입니다. 그것이 현재 필요한 표지이며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실 미래를 보여줍니다.
종말론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물론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교회론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이 갈라디아서에서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모든 피조세계를 결국에는 바로잡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복음의 충만한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바울이 선포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용서받아 아브라함의 가족의 일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선포하는 이유는 그들이 모범과 대리인이 되어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목적을 지금 이룰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종말론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완성된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많은 것들이 여기서부터 뒤따릅니다. 그래서 특별히 우리는 헌신적으로 살고 진실하게 행동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둘째로, 우리가 깨닫고 배척해야 하는 시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에서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으로 예수님의 백성에게 다가오는 압력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를 변화시켜 이런 저런 시민적 또는 문화적 의식을 따르게 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단지 종교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미리 보여주는 수호자가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동일한 것을 봅니다. 의혹과 편견이 고대 갈라디아에서 있었으며, 그리고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이런 것을 사용했습니다. 우리에게 재앙이 된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을 갈라지게 하며, 오래되고 봉합되지 않은 분열이민족들과 계층들과 성별을 가르는 선이 오늘까지도 드리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하나됨은 추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슬퍼하는 것은 종교개혁가들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강조한 방식 때문에 그것이 그들이 도달하게 된 결론은, 제 생각에는, 우연하게도 바울이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한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예수 추종자들의 분열은 그 자체로 스캔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양한 정치 진영에 갇히게 만들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이런 저런 지역의 특징을 고수합니다. 또한 이런 저런 취향을 선호합니다. 시절이 어느 때이든지 우리는 그 무엇이든지 예수님에 대한 충성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보통 무엇이 문제인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울의 비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미끄러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세번째,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하지만 강력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되돌아가는 길은 중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며, 세상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드셔서 작은 실제 모델이 되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창조를 보여주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 뜨거운 헌신은 그런 헌신은 복음적인 경건함이 정점에서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그런 헌신은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와 다시 통합되어야 합니다. 그 이해는 메시아의 백성이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세상을 위하여 어떤 의미인지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시대에 걸림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바울의 시대에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런 것을 거의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를 말입니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위험한 시기를 살고 있는 2020년도에 말입니다.
제가 아는 것 하나는, 바울의 복음은 우리를 헤쳐 나갈 수 있게 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가운데 모시고 기도하면서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실제적인 복음을 하나님의 실제적인 세상에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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