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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1397~1450) 조선 제4대 임금으로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승하하니 재위 32년에 춘추가 54세였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훌륭한 업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를 이룩하였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였으며, 농사직설, 삼강행실도, 팔도지리지, 의방유취 등 법률 · 역사 · 유교 · 문학 · 어학 · 천문 · 지리 · 의약 · 농업기술 등에 관한 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국가의 오례(吉 · 嘉 · 賓 · 軍 · 凶禮)와 서민의 사례(冠 · 婚 · 喪 · 祭禮)를 정립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체계를 갖춘 훈민정음을 창제(1446년 반포)하였으며, 경자자(1420년), 갑인자(1434년), 병진자(1436년) 등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문화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측우기(세계 최초의 우량계), 혼천의(천문관측기구),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 · 제작하였다.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고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편경 · 편종 등 많은 아악기들을 제조하게 하였다. 연분9등법, 전분6등법 등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세금을 공평하게 하였으며, 노비에 대한 사형을 금하도록 하였다. 또한,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 6진과 4군을 설치하여 국토를 확장하는 한편 일본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세종대왕 영릉(英陵)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를 모신 합장릉(合葬陵)이다. 1446년(세종 28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쌍실 무덤인 영릉을 만들었다. 1450년 세종대왕이 승하하여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이로써 영릉은 조선왕릉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무덤을 하고 있으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왕릉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반대의견이 있어 실행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원년)에 이곳 여주로 옮겼다. 당시 여주에 새로운 능을 조성하기 위해 부역군(赴役軍) 5천명과 공장(工匠) 1백50명이 20일 동안 일했고, 식량으로 쌀 1천3백23석(石) 5두(斗), 소금 41석 3두가 쓰였다고 한다.
영릉은 능 뒤의 칭성산이 주산(主山)을, 앞쪽의 북성산이 안산(案山)을 이루었는데, 주위의 산들이 마치 영릉을 중심으로 꽃봉우리를 애워싼 듯하다 하여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의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여주는 당시 '여흥부(驪興府)'였는데 영릉이 천장되면서 '여주(驪州)'로 승격되었다.
영릉(英陵) 천장 내력 세조 때 세종대왕 승하 후 나라에 크고 작은 변고가 많이 생기자 영릉의 원래 자리인 헌릉(서초구 내곡동) 서쪽 산줄기가 길지가 아니니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서거정이 "천장(능을 옮기는 것)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이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다까?"라며 반대하여 옮기기 못하였다.
세조 승하한 뒤 1468년 예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영릉의 천장문제가 거론되었고 예종은 노사신, 서거정 등을 파견하여 천장할 자리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지세를 조사하던 중 여주 북성산 주위 지세가 풍수적으로 뛰어난 자리임을 알 수 있었고 예종은 이곳으로 영릉을 천장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미 이곳에는 세조 때 대재학을 지낸 이계전과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가 있어 선뜻 옮기지 못하였다. 예종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를 불러 그 자리를 비워달라는 뜻을 넌지시 비추었다. 이극배는 가족들과 상의한 후 이인손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이자리에서 연을 날리어 높이 오르거든 연줄을 끊고 그 떨어지는 자리에 묘를 옮겨 모시라"는 글귀가 나왔다.
그 글대로 하니 연은 서쪽으로 십리 밖으로 떨어졌고, 이장을 한 후에도 이극배의 집안은 번창하였다. 영릉이 북성산 자리로 이장하여 조선왕조가 100년 더 연장되었다는 설이 있으니 이를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 한다.
2009년 02월 27일(금요일)!
민경 방학 전 역사 여행지로 선택한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대왕 영릉(寧陵)! 그리고 명성황후 생가 및 이완장군 묘소!
대구에서 06시 30분에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해 충주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곧장 영동고속도로 여주IC를 내려선다. 여기서 차량 네비게이션을 작동시키니, 세종대왕 영릉(英陵)까지 10여 분! 그리고 세종대왕 유적관리소(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릉로 243번지, 031-885-3123, http://sejong.cha.go.kr) 앞 주차장 도착.. 10시 30분 쯤..
아직 잠 덜 깬 민경이 데리고 여유롭게 매표(500원, 성인 기준)를 하고 세종대왕 영릉(英陵) 입장..
평일의 너무나 여유롭게 들린 곳 ▶ 세종대왕 영릉(英陵)! 입구 좌편부터 세종전과 함께 측우기, 자격루, 앙부일구, 혼천의, 간의 등 다양한 과학기술의 업적들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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