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품 16장--도솔천과 왕궁가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원불교신문 [1355호] 2006년 11월 03일
실상사의 한 선승이 봉래 정사에 와서 대종사께 여쭈었다.
“여래는 도솔천을 여의지 않고 몸이 이미 왕궁가에 내리셨으며,
어머니의 태중에서 중생 제도를 다 마치셨다 하니 무슨 뜻입니까?”
정전 의두요목 제 1조에 편입되어 있는 이 화두는 선가에서 유행하는 유명한 공안이다.
과학과 합리를 내세운 회의론자들은 일단 이 공안의 황당함에 냉소할 것이다.
그러나 고정관념만 벗어나면 황당과 합리에 거리를 둘 필요는 없다.
런던에서 공연되는 뮤지컬을, 기재만 동원하면 서울에서도 동시에 볼 수 있지 않은가.
관념이란 허공과 같은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 관념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묶이기도 한다.
도솔천과 왕궁가, 태중과 중생제도라는 시공의 차이를 극복하는 데에는
고정관념의 너머에 출구가 있다.
그러나 성리품 16장의 백미는 ‘그대가 실상사를 여의지 않고 몸이 석두암에 있으며,
비록 석두암에 있으나 드디어 중생 제도를 다 마쳤다’하는 대종사의 답변에 있다.
얼핏 보면 앞서 여래의 화두와 견주어 그 밥에 그 나물 같지만
그 본질은 판이하다.
도솔천의 여래와 실상사 선승의 차이는 ‘이미’와 ‘드디어’에 있다.
여래는 태중에서 ‘이미’ 중생제도를 마쳤으며,
선승은 석두암에 있으면서 ‘드디어’ 중생제도를 마친다.
대종사는 도솔천과 왕궁가라는 공간,
그리고 태중과 전법륜의 시간이라는 간극의 황당함에 대하여
분별 이전의 세계는 여래라는 표현을 빌리고 있다.
이는 여래의 씨앗이 우리에게 갊아 있다는 원돈(圓頓)의 소식이므로 ‘이미’가 적합하다.
이와 대비한 실상사의 선승은 생활 속의 우리 모습이다.
어려움을 헤치고 마침내 저 세계에 도달하는 수행인의 표상이다.
이는 구도역정 끝에 도달하는 수증(修證)의 소식이므로 ‘드디어’가 된다.
‘이미’와 ‘드디어’는 시골밥상의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니다.
근사한 레스토랑의 초호화 코스요리에 나오는 군침 도는 애피타이저와 깔끔한 디저트다.
서양식 표현으로는 알파와 오메가요, 불가의 용어로는 본원과 성불로 보아도 좋다.
법장비구가 아미타불이 되듯이,
다시 아미타불이 중생의 복전이 되듯이,
하나의 진리가 둘로 나투는 동전의 양 면으로 보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