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상하이 시절의 소재지 변천사
(상해 하비로 32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청) (당시 공공조계 인도 순포)
[임시정부 수립 일시와 장소]
의정원 회의록에 나와 있는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 개최 일시와 장소’가 ‘1919년 4월 10일 하오 10시 ~ 11일 상오 10시, 김신부로(金神父路/현주소 瑞金2路)’이다.
10일 밤 이곳에 모인 29명의 한인 대표가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며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고,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때가 날이 바뀌어 4월 11일 아침이었고, 세상에 이런 사실을 알린 것이 이틀 뒤인 4월 13일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은 4월 13일이 아니라 4월 11일이 되어야 한다. 임시정부 또한 중국 대륙을 전전하는 동안에도 4월 11일에 기념 행사를 벌였다.)
* ‘김신부로 22호’가 최초의 의정원 회의 장소라는 주장이 있는데, 근거가 희박하다.
[임시정부 소재지의 변천]
1. 하비로(霞飛路) 460호 (1919년 4월 17일 당시)
일제 정보자료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임시정부 주소이다.
2. 고내의로(高乃依路) 11호 (1919년 4월 29일 당시)
일제 정보자료에, ‘불조계 고내의로 11호지의 가옥을 월 3백원에 임대하여 임시정부 사무소를 이전할 계획이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이전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또다른 일제 정보자료에는 개자이로(愷自邇路) 장안리(長安里) 267호가 임시정부 청사로 언급돼 있는데, 이곳은 제3회 의정원 회의가 열렸던 장소이다.
3. 하비로(霞飛路) 321호 (1919년 5월 25일 ? ~ 10월 17일)
* 현재 주소 : 淮海中路 651호(?)
미국에 있던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선임되자마자 1919년 5월 초 상해에 도착하여 5월 25일부터 공식적으로 국무총리를 대신하는 집무를 시작했고, 1919년 9월 15일 통합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주도적으로 초창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그런데 그는 미국에서 올 때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로부터 2만5천불을 가져와 프랑스 조계 하비로에 번듯한 정청을 마련하고 매일 규칙적으로 정무를 보았다. 2층 서양식 건물 옆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내걸고, 일층 정면 중앙에 내무부, 왼편에 재무부, 오른편에 통신부를 두었다. 위층에는 국무총리 집무실이 있고, 뒤편에 있는 방들은 외교관들과 군인들이 사용했다. 정면에 있는 큰 방은 경찰대로서 20명의 청년과 김구가 함께 사용했다. 정문에는 인도인 경찰 한 명이 경비를 섰다. 그러나 상해 일본총영사의 요구를 받은 프랑스 조계당국이 이 해 10월 17일 폐쇄를 명해 더는 이 건물을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하지 못하게 됐고, 임시정부의 각 기관은 기관 책임자의 주소지로 분산됐다. 이후 임시정부의 큰 행사는 주로 포석리 14호에 있는 민단사무소에서 개최되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상하이 시절 마지막 청사인 보경리 4호로 들어가기 전까지 정청다운 청사를 더는 가질 수가 없었다.
* 그런데 이 정청(사진 속 2층 건물)의 소재지가 ‘보창로(寶昌路) 309호’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에 들어 있는 사진에 보창로 309호 주소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 거리는 1906년부터 보창로(寶昌路)라 불리다가, 1915년에 하비로(霞飛路)로 바뀌었고, 현재 지명은 회해중로(淮海中路)이다. 아마도 그때 번지수까지 (309호에서 321호로) 바뀐 것이 아닌지 추정된다. 아래와 같은 자료들을 살펴보면, 더욱 확실하다.
[관련 자료]
ㅇ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 제14호(1919년 9월 27일자)는 “몇 주 전 한국국민의회(의정원)가 하비로 321호 임시정부 본부에서 각도 대표 비밀 회의를 소집하였다.”라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ㅇ 같은 기관지 제15호(9월 30일자)에는, 상해일일신문(上海日日新聞)의 일본인 기자가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자신의 신문에 쓴 기사가 전재됐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한국독립 가정부(假政府)가 프랑스 조계에 위치하였다기에 한번 방문하였다. 이전에는 그것이 어떠한 건축물이며 어떠한 상태인지 알지 못하며, 그곳은 위험한 곳인 데다가 조선독립당 흉도 악당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방문한 뒤 의외로 그곳은 웅대한 건축물과 검푸른 큰 숲이 뒤덮힌 한 작은 국가의 영사관식 건물이었으며, 아주 큰 온실화원이 있었고, 문 앞에는 인도인 수위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 …”
ㅇ 중국 신문 신보(申報) 1919년 9월 26일자에 ‘고려가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처음으로 임시정부의 정확한 주소를 공개했는데, 이 신문은 당시 상해에서 발행된 영자 신문 대륙보(大陸報) 25일자 기사를 번역해 보도한 것인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몇 주 전 하비로 321호에서 임시정부 기관이 국회를 소집하였다. … … 이번 회의는 고려의 임시헌법을 제정하는 일 외에도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ㅇ 같은 날 민국일보(民國日報)도 ‘서방측 신문이 한국인 조국광복 운동을 게재하다.’라는 제목으로 대륙보 기사를 번역하여 보도하였다.
ㅇ 의정원 문서에, ‘제6회 의정원 회의가 8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열렸는데, 개원식은 개자이로 장안리 민단 사무소에서 했고, 다음 날부터는 이곳 하비로 321호에서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 상해, 한성, 노령 지역 3개의 임시정부가 통합되었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고 적혀 있다.
* 이곳의 현 주소가 '淮海中路 651호'라는 주장이 있다. (http://news.donga.com/3/all/20180410/89534000/1)
4. 포백로(蒲柏路) 명덕리(明德里) 26호 (1923년 8월 13일 ~ 1924년 5월 상순)
두 건의 일제 정보자료에, ‘임시정부는 1923년 8월 13일 법계 포백로 명덕리 26호 이시영의 집 2층 1실을 빌려 이전하였으나,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다.’와 ‘임시정부는 1924년 1월 29일 포백로 명덕리 26호 임시정부 정청에서 의정원의원을 소집하였다.’고 각기 적혀 있다.
5. 패륵로(貝勒路) 수덕리(壽德里) (1924년 5월 초순 당시)
일제 정보자료에, ‘임시정부 옥사는 종래 명덕리 이시영의 집 2층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5월 초순 수덕리로 이전했다.’고 나타난다.
6. 서문로(西門路) 78호 (1924년 5월 ~ 1925년 1월 20일)
일제 정보자료에, ‘임시정부는 1924년 4월에 한국에서 상해로 온 민정식(閔廷植)한테 도움을 받아 (원문에는 ‘자금을 강탈하여’) 이 집을 빌린 뒤, 이시영의 개인 집에서 철수했다.’고 나와 있다.
7. 포석로(蒲石路) 신민리(新民里) 14호 (1925년 1월 20일 ~ 1926년 12월 ?)
서문로 78호 청사의 임대료 3개월치가 밀려 집주인한테서 독촉을 받게 되자, 인성학교(仁成學校, 임시정부 가족 자녀들을 위해 임시정부가 설립한 초등학교) 건축비 2천원으로 안정근(安定根)의 집 2층의 한 방을 얻어 이전하였다.
8. 마랑로(白來尼夢馬浪路) 보경리(普慶里) 4호 / 현주소 馬當路 306弄 4호 (1926년 12월 ~ 1932년 5월) * 현재 실존 건물
일제 정보자료(상해 한인독립운동자의 상황 보고서 1928. 7.)에는 1926년 3월경 포석로 14호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나와 있지만,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관리처연구실’을 비롯한 국내외 전문가 다수가 1926년 12월에 이전했다고 밝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6년 벨기에 인 건축기사가 설계하고 신축한 근대 석고문(石庫門) 양식의 3층 연립주택인 보경리 4호 내 한 집에 새로이 터를 잡고, 곧바로 김구를 국무령으로 추대했다. 1930년 1월에는 임시정부 핵심 인사들이 이곳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김구가 주동하여 조직한 한인애국단 단원들인 이봉창이 일본 도쿄에서 의거하고 (1932. 1. 8.), 잇달아 윤봉길이 상해 의거(1932. 4. 29.)를 일으킨 여파로 부득이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될 때까지, 6년 동안 보경리 4호는 명실상부하게 한국인 망명정부의 정청으로서 제 구실을 다했다.
중국정부는 한중 국교가 수립된 이듬해인 1993년 4월 13일 보경리 4호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로서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봉원 정리 2017.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