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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도 절망도 없이
김대현
삶을 거니는 자
산업혁명이 그 완성을 향해 달려가던 시절, 보들레르는 어느 대중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특별한 목적지 없이 대도시를 방황하는 ‘만보객(漫步客)’이라는 독특한 인간상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완만하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도시의 구석구석을 언제까지나 배회하는 이 산책자들은, 기술의 발달로 인해 도시의 구역이 점차 복잡하게 확장되는 시기에 탄생한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거주하던 공간이 변화하는 모습은 그들로 하여금 익숙한 풍경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도시의 풍경과 나날이 늘어나는 사람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록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 것이다. 군중으로부터 분리되어 매일매일 조금씩 새로워지는 사소한 도시의 풍경과 거리의 사람들을 탐색하는 것은 그들에게 각별한 도락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열정적으로 도시의 풍경을 구경하는 그들 또한 당대 도시의 특징적인 풍경 중의 하나라는 점에 있었다. 모두들 어디론가 목적을 가지고 바삐 움직이는 도시의 군중들 속에서 가끔 거북이를 앞세워 느린 걸음으로 아스팔트 바닥에 핀 식물을 채집하기도 하는 이 독특한 사람들의 모습은 도시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구경거리가 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도시를 배회하며 관찰하는 만보객과 그들이 관찰하는 도시의 풍경은 다시 하나로 융합되어 새로운 도시의 풍경을 형성함으로써 근대 도시의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우물은,
동네 사람들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우물이 있던 자리
우물이 있는 자리
나는 우물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우물」전문
이영광의 네 번째 시집 『나무는 간다』의 시적 주체들은 근대 초기의 만보객을 떠오르게 한다. 그들은 삶이라는 누구에게나 익숙하면서도 낮선 영역을 끊임없이 부유하며 타인의 또 다른 삶을 꼼꼼히 관찰하는 외로운 산책자임과 동시에, 그 자신이 “외갈래 산책로”에 홀로 서 있는 “정물”(「정물」)이 되어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양가적인 지위를 가진 자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물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들”과 ‘나’는 서로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언제까지나 서로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들의 삶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은 없다. 완만한 호흡으로 서로의 삶 속을 거닐며 삶을 탐색하는 현대의 만보객에게 있어 상이한 삶의 양상은 어떠한 것이라도 기록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나무는 간다』에 실린 시편들은 이렇게 시인이 기억하는 그들의 삶과 그들이 기억하는 시인의 삶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서로 다른 삶의 군상들이 모여 또 다른 삶의 모습을 형성하는 삶의 몽타주(montage)가 된다.
중독자들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이 자신을 해하게 됨을 알면서도 그것을 욕망하는 것을 금지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현상을 중독(addiction)이라 부른다. 중독은 이렇게 흥미로운 개념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갈망과 그 대상에 대한 환멸이라는 모순적인 감정이 하나의 단어 안에서 사이좋게 병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만 있으면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너는 두 손에 죽음을 꺼내 들고
나를 꼬나본다.
안 주면 죽여버릴 거야
(…)
나는 네 인사불성을
취중 난동을
최종 병기를 보고 싶은데
너는 고작 중얼거린다, 이천원만,
이천원만 빌려주세요
나는 네게 차비를 뺏긴다.
하지만 너는 죽음을
선사하지 않고,
고맙습니다 하고
돌아서 간다, 오늘 밤 네가
씨발, 죽으면 그만이었던 삶이어서
오늘 밤도 네가 끝내 죽지
않는 죽음이어서, 죽이지
않는 죽음이어서, 나는
하릴없이 비에 젖는다.
유정도 무정도 없이
개자식으로.
-「유정도 무정도 없이」-부분
‘너’에게 있어 삶은 환멸의 대상이다. 무엇하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어쩌다 사람만이 찾아낸 불만의 거주지”(「이 따위 곳」)에서 굴욕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은 무한의 고통을 잠시 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삶의 대극으로서 죽음은 이런 경우에 매우 유용하다. 죽음은 삶이 부여하는 모든 환멸을 소멸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덕분에 ‘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는다. ‘너’에게 있어 삶이란 언제든지 포기하면 그만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너’가 이미 삶에 치명적으로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점에 있다. 삶에 대한 환멸에도 불구하고 단돈 ‘이천원’을 확보한 ‘너’는 다시 굴욕을 감수하며 삶을 유지한다. 삶은 이미 ‘너’의 내면 깊숙한 곳에 “사람이 짓는 괴로움도 칼 받듯 하얗게” “받을 수 있”도록(「천국」)소소한 쾌락을 심어놓았다. 이렇게 ‘너’의 삶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시로 오가며 중독자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간다. 주의할 것은 삶에 중독된 ‘너’를 관찰하는 ‘나’또한 ‘너’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점에 있다. 삶에 대해 “유정도 무정도 없이” 어떠한 감정도 소지하지 못하는 ‘나’는 ‘너’의 “최종 병기”에 의해 삶의 환멸을 끝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한 그 소망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너’의 사소한 요구에 굴복하고 ‘너’는 ‘나’에게 고마워한다. 서로의 삶을 대가로 한 은밀한 도박은 언제나 실패로 돌아간다. 이렇게 “죽이지 않는 죽음이어서” ‘나’의 죽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 역시 ‘너’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증상을 하릴없이 은폐하며 그렇게 삶을 유지해가는 것이다.
모두가 살려고 한다
나는 놀라지 않는다
(…)
아, 좋다, 좋아서 미칠 것 같다
나는 자꾸자꾸 미쳐서 반드시 삶이 되고 말 것이다
(…)
이생이 이렇게 간절하여 나는 살고 싶으니
자꾸 죽자 자꾸 죽자
죽기 전에
-「오일장」 부분
그러므로 삶은 “이렇게 간절”한 것이다. ‘나’는 미치고 미쳐서라도 삶을 유지하기를 원한다. 더 이상 삶이 주는 즐거움을 향유할 수 없을 때 가끔 나는 죽음을 원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것마저도 더욱 더 살고 싶다는 이면의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 “두들겨 패고 저주하고 내쫓아도/기른 개처럼,/삶이라는 거지가 어디 가던가”(「하지만」) 그래서일까? “모두가 살려고 한다”라는 명제에 “나는 놀라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거부할 수 없는 삶에 언제까지나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죽음 밖에 적은 적 없는 데/내 책은 늘 삶으로 가득“한 것이다. (「치매였을까」)
유령(spectre)
이전시대의 노인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온 경험적인 지식을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동체 내에 자신의 지위를 점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로 전환된 현대의 고급정보들은 노인이 가진 케케묵은 정보를 무용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공동체는 더 이상 노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여전히 공동체 안에 존재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과거의 정보를 전달하려 하나 아무도 그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게 노인은 모순적인 존재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노인은 현실의 공동체에 실재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인지하지 못하는(또는 하지 않는) 유령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령은 두 개의 시간 축을 가지는 존재이다. 물리적 실체는 현실에 거주하나 그의 정신은 언제까지나 과거의 시간을 배회하고 있다. 이렇게 공존을 불가능하게 하는 어긋난 시간은 유령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다. 그는 “한 사람일수도,/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독도들」) 하지만 혼돈의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상이한 두 개의 존재가 배중률의 관계를 형성할 때 진실은 언제나 어느 한 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흘러가지 않는다
과거는 팔뚝에 푸른 ‘反共’을 새기고
뿔 달린 짐승을 궤뚫은 화살 문신을 하고
순대를 뺀 순대국을 천원 덜 내고 먹는다
반공은 생존,
생존은 여전히 총탄이 빗발치고
시체와 선혈과 유령이 아우성하는
공포의 미궁인데
(…)
나라만 사랑했는데, 과거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미래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과거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
죽도록 고생했는데, 과거는 다 쏴 죽이고 싶다
과거가 사라질까봐 과거는 힘이 세다
빨갱이가 나타날까봐 과거는 힘이 세다
(과거가 나타날까봐
과거는 힘이 세다, 일용할
빨갱이들이 사라질까봐
과거는 힘이 세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좀 힘없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동네 빨갱이는 체제를 대신해서,
괴력을 발휘해서 과거에게
소주를 한 병 산다
과거는 일흔아홉, 문득 동네 할아버지로 돌아와
하얗게 틀니로 웃는다
둘은 마주 보고 영정처럼 힘없이 웃는다
-「과거는 힘이 세다」유령4 부분
서로의 실존을 주장하는 상이한 두 개의 시간사이에서 노인의 선택은 과거를 지목한다.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강인한 팔뚝에 푸른 문신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던 과거를 두고, “순대를 뺀 순대국을 천원 덜 내고” 먹어야 하는 초라한 현재를 자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인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병약한 노인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처럼 보이는 환상이다. 환상은 그의 현재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동력이다. 과거는 그래서 힘이 세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환상은 실재하지 않기에 환상이라 불린다. 노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강인한 존재를 입증하고 싶지만 그 물증(物證)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거증책임에 실패한 노인은 여전히 유령으로 남는다.
실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증명에 실패한 노인은 결국 또 다른 과거를 소환한다. 그와 동일한 층위에 서 있는 존재만이 그가 보는 것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 노인은 과거의 자신이 기를 쓰고 없애려 했던 “빨갱이”를 현재로 소환한다. 오직 “빨갱이”만이 이제는 소멸해버린 노인의 과거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제까지 자신이 필사적으로 부정해 왔던 존재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시키는 유일한 존재로 전환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노인은 “빨갱이”들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빨갱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희망은 절망의
절망은 희망의
스토커다
증오하는 사랑들이다
사랑하는 원수들이다
황혼이든 새벽이든
절망이든 희망이든
-「원수들」부분
그러므로 존재는 자신이 보유한 독립된 자기 정체성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에 사람의 가슴을 부풀게 한다. 가슴 떨리는 “사랑”은 소름끼치는 “증오”가 있기에 아름답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 다시 말해 이는 삶에서 마주치는 서로 다른 삶들이 무의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뜻한다. 사전에 의도한 바 없는 낯선 삶들의 기묘한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은 이런 방식으로 각자의 삶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며 언제까지나 서로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다.
삶의 경계
이런 맥락에서 삶이라는 현상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에 대한 연구를 요청하게 된다. 삶과 죽음은 그 자신이 내포하고 있는 개념의 일부를 서로에게 상보적으로 유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죽음이라는 압도적인 체험만이 삶의 가지는 의미를 명징하게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도처에 존재하는 삶의 숫자에 비해 그리 쉽게 체험되지 않는다. 죽음이 근대를 지나오며 일상의 영역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이 자신의 타자로서의 광기를 격리한 것과 같이 죽음 또한 산자들의 세상에서 병원의 커튼 뒤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라는 관념이 소멸한 것은 아니다. 광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감금된 것과 같이 죽음 또한 사람들의 시야에서 은폐되었을 뿐이다. 산 자들이 있는 곳을 피하게 되면 죽음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
주말 등산객들을 피해 공비처럼 없는 길로 나아가다가
삼부 능선 경사면에 표고마냥 돋은 움막 앞에서
썩어가는 그것을 만났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것도
놀라지 않았다 몸이 있어 있을 수 있는 광경이었기에
이미 짐승들이 뜯고 찢어 너덜너덜한 그것 곁에 찌그러진 양푼 곁에
불 꺼진 스텐드처럼 어둑어둑 소나무 그늘이 드리웠기에
(…)
생이 한 번 죽음이 한 번 담겼다 떠난 빈 그릇으로서
이것의 마른 몸은 지금 축축하고 혈색도 체취도 극악하지만
죽은 그는 다만 꿋꿋이 죽어 가고 있다 무언가가 아직
건드리고 있다, 검정파리와 구더기와 송장벌레와 더불어
깊은 계곡 응달의 당신은 잠투정을 하는 것 같다 귀가 떨어졌다
당신의 뺨은 문드러졌다 내장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당신의 한쪽 팔은 저만치 묵은 낙엽 위를 홀로 기어가고 있다
그것이 닿는 곳까지가 당신의 몸일 것이다 끊겼다 이어지는
새 울음과 근육질의 바람이 이룩하는 응달까지가 당신의
사후일 것이다 고통과 인연과 불멸의 혼을 폐기하고 순결히
몸은 몸만으로 꿈틀댄다. 제가 몸임을 기억하기 위해 부릅뜨고
구멍이 되어 가는 두 눈을, 눈물처럼 벌레들이 끓는 그곳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것은 끝내 벌떡 일어나지 않았지만
죽음 뒤에도 요동하는 요람이 있다 생은 생을 끝까지 만져 준다
나는 북받치는 인간으로 돌아와 왈칵 왈칵 토했다
-「깊은 계곡 응달의 당신」부분
‘나’는 인적 없는 산길을 거닐다 썩어가는 ‘그것’을 만난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는다. ‘그것’과 ‘나’는 삶과 죽음을 경계로 분리되어 있으며 그 어떤 연결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짐승들이 뜯고 찢어 너덜너덜한” ‘그것’을 아무런 감정 없이 천천히 관조할 수 있다. 이상한 일은 이제 시작이다. ‘그것’의 일부였던 것들의 요동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전에 자신 또한 한때 삶이었으며 “몸”이었다는 것을 기억이라도 하듯이 자연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삶과 “몸”에 대한 이러한 동질감은 어느새 ‘나’와 죽음을 연결시키며, 삶의 영역에서 분리되어 ‘나’와 무관하던 ‘그것’은 ‘당신’이라는 존재로 전화한다. ‘당신’과 ‘나’의 연결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당신’은 끝내 벌떡 일어나지 못할지라도, 그 요동은 ‘나’에게 삶의 의미를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하나의 “생은” 자신의 생을 다했더라도 다른 “생을 끝까지 만져”준다. ‘나’는 ‘당신’으로 인해 “북받치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름 모를 ‘당신’은 “죽음 뒤에도 요동하며” 살아있는 ‘나’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이렇게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이 따위 곳」과 「천국」이라는 모순된 공간을 오가며 매일매일 “어떻게 살까” 아니면 “어떻게 죽을까”(「두악마」)에 대하여 고민한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들의 삶에 내재된 부조리가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저녁은” 삶에 대한 부조리를 개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모든 희망을 치료해준다”(「저녁은 모든 희망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중독된 자들은 언제까지나 삶을 유지한다. 까뮈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초부터 삶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부조리에 대해 저항하는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간다 바늘귀만큼 눈곱만큼씩 미친다 진드기만큼 산 낙지만큼 미친다 나무는 나무에 묶여 혓바닥 빼물고 간다 누더기 끌고 간다 눈보라에 얻어터진 오징어튀김 같은 종아리로 천지에 가득 죽음에
뚫리며, 가야 한다 세상이 뒤집히는데
고문받는 몸뚱이로 나무는 간다 뒤틀리고 솟구치며 나무들은 간다 결박에서 결박으로, 독방에서 독방으로, 민달팽이만큼 간다 솔방울만큼 간다 가야 한다 얼음을 헤치고 바람의 포승을 끊고, 터지는 제자리걸음으로, 가야 한다 세상이 녹아 없어지는데
나무는 미친다 미치면서 간다 육박하고 뒤엉키고 침투하고 뒤섞이는 공중의 決勝線에서, 나무는 문득, 질주를 멈추고 아득히 정신을 잃는다 미친 나무는 푸르다 다 미친 숲은 푸르다 나무는 나무에게로 가버렸다 나무들은 나무들에게로 가버렸다 모두 서로에게로, 깊이깊이 사라져버렸다
-「나무는 간다」전문
나무가 가는 이유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삶의 부조리가 가하는 고문으로 인해 뒤틀리고 고통 받으면서도 나무는 간다. “살 떨리는 그곳이/비록 독과 피가 흐르는 저주의 땅이라고 해도”(「가나안」), 가다가 미쳐 제 정신을 잃는다 해도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목적 없는 곳을 기어이 가고야 마는 것이다. 이렇게 나무는 온몸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한다. 끝없는 길을 가다 지친 나무들은 다른 나무들에 기댄다. 마치 삶이 다른 삶을 만나 새로운 삶을 이루는 것과 같이 나무들은 서로에게로 모여 숲을 형성한다. 세상에 저항하는 “미친 나무”와 “다 미친 숲은” 그래서 다 “푸르다” 파편화된 사람들의 남루한 삶 사이를 배회하던 시인이 기록한 삶의 모습들 또한 이렇게 푸르다.
김대현 문학평론가 201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현재 격월간 『전태일통신 편집위원』